개인의 자유와 조화에 관한 고찰, 2005년 8월자유란 무엇인가“자유란 무엇인가.” 예전 자유주의에 관한 수업을 듣는데, 당시 교수님은 이 질문을 던지시면서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셨다. 다들 알고 있을 법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체포된 멜 깁슨이 사지를 결박당한 채 공중에 매달려 "Freedom"을 부르짖는 장엄한 대목이다. 우리는 그 영화의 맥락 속에서 멜 깁슨이 말하고자 하는 자유의 개념을 막연하게 공감한다. 하지만 교수님의 말처럼 그 “자유”라는 단어가 지니는 추상성은 여전히 우리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도 끊임없이 외칠 수 있는 ‘자유’란 과연 뭘까.우리는 많은 추상적인 단어들을 쉽게 언급하며 산다. 그 단어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정의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맥락에 비추어 자신만의 용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멜 깁슨의 자유 역시 그렇고, “빵 대신 자유를 달라”라는 귀에 익숙한 문장에서의 쓰임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이나 정의(正義), 평화, 평등이나 무슨무슨 주의와 같은 말들이 마구잡이로 나의 글과 말 속에 난무한다. 이런 언어들은 종종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맥락 혹은 미묘하게 어긋나있는 이해의 방식 등으로 인해 사회나 일상생활 속에서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유만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어쩌면 내가 사용하는 각종 단어들도 나의 맥락에 따라 자의대로 쓰임의 의도가 달라지거나, 나 역시 그 의미를 고정적으로 인지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의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고도로 추상적일 수 있는 그 단어들이 우리의 세계와 삶에 지대한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밀은 을 저술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논하는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인간 역사를 그토록 아름답게 빛내주던 거대한 규모의 정신 활동이 일어날 수 없다.”밀의 우리는 고등학교 공통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 뿐이다.은 “간섭받지 않는 자유”에 대해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역설한다. 그리고 그 자유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대중의 무리와 권력을 지닌 정부의 존재다. 밀은 개인이 이 양자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워야 개인의 발전은 물론,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역사가 증명하듯 이러한 밀의 논리는 자본주의의 성장과정에서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자유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고, 책의 일부 대목은 오리엔탈리스트들에 의해 차용되어 제국주의의 형성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의 은 자유라는 거부할 수 없는 포스는 여전히 강력하게 사회의 안팎을 드나들며, 오늘날까지도 자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고전으로 남아있다.책은 전체 5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저술 목적과 배경을 다룬 머리말, 생각과 토론의 자유, 개별성을 강조한 2장과 3장을 넘어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에서 사회는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에 개입할 수 있는가를 다루 4장과 자유가 현실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다룬 5장까지다. 5장의 구조를 통해 밀은 우리에게 자유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 논의는 비단 자유 그 자체에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인과 집단의 문제나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정부로 대변되는 대의 민주주의하의 정부와 개인의 문제까지 아우른다. 각각의 문제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난제인 까닭에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밀의 자유론은 참고할만한 중요한 고전의 일부가 아닐 수 없다.기본 중의 기본 - 개인의 진리를 에 자기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검증의 문이 열려 있으면 언젠가 우리가 이성을 통해 더 높은 진리에 이르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이런 방법을 통해 인간의 현재 수준에서 최고의 진리를 찾는 데 만족해야 한다. 이 정도가 유한한 인간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확실성이다.때문에 개인이 말하고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는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잠재력으로 기능한다. 절대 진리에 대한 회의는 곧 절대에 가까운 진리를 향한 강력한 인간의 갈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갈망은 부단한 토론과 검증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렇듯, 공리주의자인 밀에게는 자유는 곧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자 효용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자유의 효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밀의 논리에 탄복한다.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도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는, 개별자나 행위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가 아니라 사회와 세계, 진리와 윤리적 관점까지 아우르며 전체를 꿰뚫는 사고의 흐름이 놀라운 것이다. 현재를 돌아보면 자유라는 절대적인 것에 근접하는 가치를 바탕으로 나를 비롯한 사람들 각자는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시키는데 얼마나 많이 주력하고 있는가. 크고 넓은 진리와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소비에 탐닉하고자 기꺼이 일상에 구속되어 자유롭게 생산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본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헛되게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가치 이면에 있는 공공성과 진리 추구라는 측면을 발견한 이 18세기의 사상가를 우리는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개개인의 다양성과 다수의 폭력- 천재는 필요한가오늘날의 경향을 일컬어 우리는 대개 ‘쿨’함과 개성, 다양성의 뉘앙스를 띠는 추세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다양성이 분명한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여전히 일련의 주도적인 흐름이 존재하고 그 흐름에 다들 편승하는 방향으로에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다. 한일 월드컵 시즌에 한 축구에 관심 없는 아주머니가 자기 집 근처에서 응원을 하던 몇몇 행렬과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주민들이 사는 지역이니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니, 그 행렬 중 하나가 아주머니는 한국사람 아니냐고, 전 국민이 기뻐하는데 이해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힐난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발화자에 따라 이야기의 의도가 달라짐을 고려해서 듣는 것이 우리의 의무긴 하지만, 대강 상상이 가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다수의 분위기나 견해 등으로 많은 개인적 취향들이 억압당하는 경우는 사실상 비일비재하다. 밀은 토크빌의 ‘다수의 폭정’이라는 용어를 빌려 이것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본다. 개별성은 밀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가 된다. 개별성은 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회의 행복과 발전까지 꾀할 수 있는 핵심이다. 그리고 이 개별성이야 말로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해줘야 하는 근거가 되는 앞서 언급한 효용의 논리와도 닿아있다.각자의 개별성이 발전하는 것과 비례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도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더욱 충만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이처럼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면, 개인들이 모인 사회 역시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밀이 말하는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적극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할 나위 없이 옳은 말이다.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그는 특정 대중과 특정 개인의 간극을 지나치게 크게 보고 있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다수의 폭정을 근거로 대의 민주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소수의 뛰어난 역량의 소유자들에게 많은 권한과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수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사회를 구원해주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오늘에도 시의 적절한 충고가 될지는 의문이다.많은 사람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만이 새로운 실험을 주‘창조적 소수’와 ‘우매하여 폭정을 휘두르는 대중’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어떤 사안에서는 창조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에 기여하지만 다른 방면에서는 얼굴 없는 대중의 일부일 수도 있다. 때문에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때에 따라 대중의 일부이기도 하며, 고유한 개인이기도 한 사람들의 모순 되지만 필연적인 성향을 함께 안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밀의 사고는 자칫 소위 자타에 의해 엘리트라고 불리게 될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대중을 무지하고, 오로지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성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정계(政界)에 종종 등장하는 ‘메인스트림’이라는 표현도 극단적으로는 커다란 물줄기 안에 단지 몇몇 소수만이 방향성을 지닌 주요한 흐름이고 나머지는 그저 함께 쓸려 내려가는 곁다리일 뿐이라는 고약한 사고에서 비롯된 은유일지도 모른다.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밀과 함께 대의 민주주의의 폐해를 종종 목격한다. 행정도시와 관련된 사안에서는 행정도시를 둘러싼 핵심적인 논의 이전에 각 지역이나 정당의 특정 이익을 논하는 경우가 많고, 님비나 핌피 현상을 말하는 것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인터넷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네티즌이 하나의 권력으로 새롭게 부상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터넷에서 분위기를 이끄는 몇몇의 논객들에 의해 좌중이 쉽게 압도되는 모습도 종종 발견된다. 선거 때만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일은 이제 언급하기도 지겨울 정도다. 이 모든 모습들이 밀이 염려하는 다수의 폭정의 폐해이자 소수의 천재, 엘리트가 중시되어야 하는 근거가 된다.하지만 정작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소위 엘리트나 천재고 누가 우매한 대중인지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창조적인 개인들의 견해들을 함께 나누어가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탕으로 또 다른 창조적인 지평에 다다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만을 권장하고 보호하는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고민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