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엔트 문명 ♡○ 오리엔트 문명의 의미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페르시아 등 아시아 서남부와 동북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고대 오리엔트에서 발달한 문명이다. 관개 농업에 기초를 두고, 전제적인 신권 정치를 배경으로 하여, 법전·종교·토목·역법·천문학·수학·예술 따위의 발달을 이루었다.○ 오리엔트 문명 발생원인'오리엔트(Orient)'라는 말은 로마인이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방을 '오리엔스(Oriens)'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이집트와 서아시아 일대를 총칭합니다. 이 지방의 중심지는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의 유역인 메소포타미아와 나일강 유역인 이집트로서 두 지방 모두 BC 3000년 전후에 국가가 성립되고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오리엔트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오리엔트 문명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오리엔트 문명의 발생원인은 당시까지 인류의 생존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의존적인 수렵과 채집경제로부터 벗어나서 농경 · 목축이라는 생산경제로 전환한 데 있습니다.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인류의 생산력은 크게 증대하였습니다. 특히 관개 농업이 행해진 큰 강 유역은 토지가 비옥하여 생산이 늘어나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큰 촌락이 형성되었으며 청동기가 제작되고 바퀴, 쟁기, 돛단배 등이 발명되어 생산이 늘어나고 교통도 발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냥을 하는 것보다 가축을 길러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란 사실도 깨닫게 되어 목축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이리하여 발생한 촌락들이 뭉쳐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각 도시는 주변에 성을 쌓고 제각기 독립하여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국가에서는 각종 기록을 위하여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문명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생활에 여유가 생겨 분업이 생기고, 건축 · 도자기제조 · 기계 등의 각종 기술이 발달함으로써 이집트 ·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에 걸친 '기름진 초승달 변화가 원인이 아니였나 추측합니다.4. 통일기 ; 기원전 1000년경 - 이 시기는 혼란한 오리엔트의 상황이 끝나고, 강대국인 아시리아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가혹한 통치로 곧 망하여 4국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이 지역은 페르시아가 재통일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폴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기원전 4C에 거치면서 점차 약해졌고, 그 무렵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오리엔트의 고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특징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을 가리키나 넓게는 서남 아시아 전체의 고대 문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불타는 태양과 비옥한 진흙, 그리고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물 이외에는 아무런 천연자원이 없는 땅에서 세계 최고의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농경의 발달에 원인이 있었다. 농경이 시작된 뒤부터 메소포타미아에는 촌락과 마을 등의 공동체가 속속 마들어 졌다. 이 지역의 주인공이 바로 수메르인이다. 수메르인 중에서도 유력했던 움마의 왕 루갈자시기가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지만, 결국 셈족인 아카드인에게 멸망당한다.그 후 신수메르, 고바빌로니아, 카사이트,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로 지배왕조는00년경 : Gutr족의 침입을 받아 혼란상태가 됨B.C 1800년경 : Amor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움-바빌로니아 왕국. 이 시대에 함무라비왕이 바빌론市에 수도를 정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국가 발전에 기틀을 세웠으나, 古바빌로니아는 B.C 1600년경 카시트에 의해 멸망됨B.C 1300년경 : 아시리아(Assyria)인들이 세계전역을 통일하여 세계 대제국을 세움 이들은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B.C 625년경 : 칼데아(Chaldea)인들이 아시리아인을 멸망시키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계승하며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움B.C 550년경 : 페르시아(Perisan)인이 침입하여 바빌로니아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움 . 소아시아,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강력한 통치 국가를 유지하였다.B.C 330년경 :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건설하였다.* 수메르시대수메르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문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루바이드, 우르크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여기에 수메르인들이 나타난 것은 B.C3000년경이었다.수메르 시대의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다. 지구라트)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수메르인들이 처음으로 썼던 문자는 상형문자로 이상형 문자는 형체가 있는 물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로 낱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수메르인들은 자연의 신들인 우주를 다스리는 신 안, 폭풍과 홍수를 다스리는 신 엔릴, 대지의 여신 닌후르사그, 물의 신 엔키 등 자연을 다스리는 여러 신들을 섬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 함무라이 법전은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 왕(재위 BC 1792∼BC 1750)이 그의 만년인 BC 1750년경의 성문법으로 바빌로니아인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이 법전은 기원전 1700년경에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법전으로서 설형문자로 쓰여 졌다.☆ 이집트 문명- 이집트 문명의 특징이집트는 ‘헤로도투스’의 말처럼 '나일 강의 선물'이라 할 만큼 나일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집트는 나일강과 주변의 기름진 토양을 바탕으로 일찍 농경이 발달하였다.해마다 겪게 되는 나일강의 범람은 상류의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는 작용을 하였으므로 나일강변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나일 강의 홍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진흙 속에 묻어 버렸다. 그러나 이런 홍수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농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 이런 나일 강의 범람 때문에 태양력?기하학?건축술?천문학이 발달하였다. 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 불리었고, 태양의 신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토목 사업에 농민과 노예를 동원하였다. 귀족들은 소수의 관료와 신관으로서 왕에게서 넓은 토지를 받아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평민의 대부분은 부자유 농민이며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집트 문명을 대표하는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미술을 대표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나 신전의 축조 및 그 장식이 미술의 주류를 이루었고, 특히 열주양식은 조각, 그림, 공예품과 함께 솜씨가 뛰어났다.- 이집트의 역사이집트의 시대 구분은 ‘왕조’ 혹은 ‘왕국’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시대를 왕조별로 나누는 방식은 BC 3세기에 그리스어로 이집트 역사를 기록한 이집트인 사제 마네토가 창안한 것으로 그는 이집트의 연대기를 30개의 왕조 혹은 왕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세 ‘왕국’으로 구분한다. 이 왕국들에는 이집트가그 후계자들의 지배 하에서 파라오의 권력은 무제한이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지 않았다. 고왕국은 평화 정책과 불침략 정책을 추구했다. 그 원인은 이집트가 외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했다는 점, 토질이 대단히 비옥했다는 점, 그리고 이집트 국가가 다른 민족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협동적인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고왕국은 수 백 년간의 평화와 번영을 누린 후 종말을 고했다. 그 원인으로 파라오들이 피라미드 건설과 대규모 사업에 과중한 투자를 한 결과 정부의 세입이 고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집트는 나쁜 기후 조건으로 말미암은 흉작으로 인해 그 번영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으며 지방 귀족들이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더니 결국 중앙 정부의 권위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제1중간기* 중왕국시대제12왕조는 관리 ? 상인 ? 공인 ? 농민 등으로 이루어진 중간 계급과 결탁함으로써 강력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결탁을 통해 귀족 계급이 견제되었고, 유례없는 번영의 기초가 다져졌다. 또한 사회 정의가 증진되고 상당한 지적 발달이 이뤄졌으며, 실용성이 없는 피라미드 건설을 대신해서 용수로와 관개 시설의 확대 등 전 주민에게 도움을 주는 공공사업이 시행되었다. 또한 종교도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구원에 대한 희망을 그들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제2중간기200년 이상이나 지속된 내부 혼란과 외침의 시기로 BC 1750년경 힉소스인(Huksos)이 이집트에 침입.* 신왕국시대공격적인 제주주의 정신이 급속히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 파라오들의 새로운 정책의 첫 단계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면적 공격과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 주장이었다. 새로운 파라오들은 재빨리 시리아에 있던 적대 세력들을 모조리 섬멸하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나일 강 상류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로 인해 이집트오의 재화 유입은 사치와 타락을 부추겨 국가 기강마저 흔들어 놓았고, 피정복민의 끊임없는 반란은 결국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다.
♡ 교실 붕괴론 ♡▷ 교실붕괴의 정의우리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사회적 유용성을 상실하여 교사들은 가르칠 맛을 잃고 학생들은 배우려는 의욕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세대격차 및 학교체계 부적응 학생들 때문에 사제간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학생과 교사가 모두 학교에서 벗어나기만을 고대하는 현상▷ 교실붕괴의 원인1. 교육정책 및 학교정책가) 교육정책- 세대에 맞지 않는 교육 : 시대에 맞게 교육 또한 변화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교육은 전통적인 교육체제만을 고수하고 변화를 하지 않고 있다.- 체벌금지나 수요자 중심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도입 ; 수요자 중심으로써의 지나친 학교교육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대학입시제도와 제도의 잦은 변화 :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당국이 학교교육의 중요 관점인 대학입시제도를 수시로 바꾸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교사들의 교육 자체가 일관성 없이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재정의 부족- 정보화에 뒤쳐짐- 행정중심과 복종중심의 교육계 풍토- 학교 단위의 책임 경영제 미흡- 학교 운영 위원회의 활동미흡- 다양한 대안교육의 부재나) 학교- 입시위주 / 지식위주 / 성적위주의 운영- 개인차 무시, 획일적ㆍ주입식 교육 : 각기 다른 학생들에게 같은 내용을 똑같이 암기 위주로 교육을 시키는 것은 지금의 급변하는 시대에 맞지 않다.- 전통적 / 권위적 / 규제위주의 운영- 인성교육의 부족 : 대학입시를 위한 지식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학생들의 인성교육에는 소홀한 경향이 크다.- 과다하며 흥미없는 교과서 : 입시를 위해 단편적인 지식들만 열거해 놓은 딱딱한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주지 못하고 공부를 하겠다는 학습에의 동기부여를 제공하지 못한다.- 다인수 학급 (교사의 부족), 여교사의 증가- 열악한 환경 : 학교시설이나 수업에 필요한 장치 등이 학원 등 사교육의 공간에서 제공되는 것 보다 열악하다.2. 가정 및 학부모- 결손가정의 증가 : 부모들의 맞벌이, 이혼의 급격한 증가로 자녀들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력 저하, 공공장소에서의 질서의식 부족 : 부모들의 교육력 저하도 하나의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공공장소의 질서의식에 대해 자녀들에게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의 과잉보호- 핵가족으로 인한 이기주의 풍토 : 부모들의 마음은 어느 부모나 자기 자식이 누구보다도 훌륭히 커 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은 오히려 자식을 닫힌 공간으로 이끌어 가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부모들의 과다관여 : 학부모들은 자녀가 경쟁에서 이겨 최고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교육과 학교교육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입시교육 요구- 관심의 부족3. 교사- 전문성 부족 & 사명감 부족 : 자신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교직에 입문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교사에 대한 사명감이 부족해지고, 또한 현실적으로 너무 무리한 교육여건과 교육과정으로 교사의 전문성이 부족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지도력 부족 : 교사가 교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리드해가기 보다는 아이들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반응함으로써 학생들을 이끄는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학생이해의 부족 : 교사들은 자기만의 교수방법과 스타일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 학생들은 지난날의 권위적인 교사보다는 친구와 같은 함께 하는 교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중한 업무 (공문서처리/수행평가/학생부 기록 등..) : 교사들은 수업연구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부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교육행정으로 인해 공문서처리 등 과다한 업무를 맡고 있는 실정이다.- 권위의 추락과 개혁의 대상으로 인한 사기저하 : 현재 실정에 맞지 않는 개혁으로 인해 교사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이것이 교사의 교육권을 위축시켜 학교의 위기를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5. 학생- 기본 생활 습관 및 예절 부족- 학습동기의 부족 : 교실붕괴가 일어나는 학생의 요인 중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내 / 집단생활능력의 부족 : 요즘 학생들은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행동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즉각 욕구를 충족하며 생활한다. 따라서 현대 학생들은 인내심이 부족하고 집단생활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자기중심주의 : 요즘 학생들은 남을 배려하는 등의 바람직한 태도, 가치관 등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있다. 즉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생의 인권주장 : 예전과 달리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펴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것은 결국 교사와 학생간의 세대차이가 되어 교실붕괴의 또 다른 원인이 되는 것이다.- 학력과 스타일의 다양화▷ 교실붕괴의 사례 및 분석한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이 친후 교사가 출석을 확인할 때 그제 서야 교과서나 노트를 찾으러 사물함에 가는 학생들이 많고 수업도중에 그 시간의 교과서와 노트가 아닌 다른 책과 노트를 내놓는 학생들이 3/1이다.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데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교사의 지도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는 학생들로 인해 교실에 들어가기를 두려워 하는 경우도 있다.-경상북도 모 고등학교 교사사례 1( 분 석 )1. 학생들의 목적의식이 불분명 - 주의력 결핍.2. 학습동기의 결여3. 가정과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이 부족공부시간에 자고 있는 남학생이 있어 깨웠더니 “에이 XX년아 귀찮게 굴지 말고 좀더 자게 놔둬.” 하면서 다시 자더군요. 정말 너무 어이없고 수치스러워서 수업을 중단하고 나와 버렸어요.- 경기도 중학교 여교사사례 2( 분 석 )1. 교사의 권위 실추.2. 가정에서의 인성교육 및 생활지도 부족초등학교 고학년의 경우에 TV에서 촌지이야기가 나오면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선생님도 뇌물 먹어요?”라고 묻고, 의심의 눈초리로 심판하려고 한다.- 경상북도 모 초등학교 여교사사례 3(분 석)1. 학생과 교사간의 믿음 신뢰의 결여2. 일부 몰지각한 교사들의 존재3. 매스컴의 확대 보도.▷ 교실붕괴의 대책1. 국가 정책적- 교원정책 개선 : 교직부적격자로 평가될 경우에는 언제라도 교직에서 퇴출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교육재정 확보 : 교육여건을 개선하고 교육의 질적 수준 보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언론매체 협력 강조 : 학교라는 공동체를 지키고 발전하는데 있어서 언론매체의 협력과 참여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중심 개혁지원 : 정치에 흔들리는 교육시스템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가 주체가 되는 환경과 제도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과정의 유연화, 학교의 다양화 추진 : 소질과 적성에 맞게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사이버 상담기관 설치 : 익명성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 집단 상담도 가능할 수 있게끔 프로그램이 설치될 필요가 있다.2. 학교 행정적- 학교장은 전통적인 일반적 지시위주의 교무회의의 운영방식을 전환하여 교무회의 등에 학생대표 참여 하게 하고, 투표함이나 의견함을 만들어 학생의 요구사항과 불만사항을 알아보아야 한다.- 학생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 참여적 학교 만들기 :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학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漢四郡 問題目 次◇ 머리말1. 漢四郡이란?2. 한의 군현에 대한 사료상의 변천3.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3가지 논쟁1) 漢四郡의 한반도 內 위치설2) 漢四郡 요동 위치설① 위치측량 주장② 명도전의 출토 위치3) 漢四郡 허구설◇ 맺음말◇ 머리말한사군은 BC 108∼BC 107년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으로 즉, 위만조선을 비롯한 고조선의 영역이 어디에 걸쳐 있었는가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그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군현을 두었다는 한의 4군 위치를 어디로 비정하는가에 대한 의견의 차이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런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논쟁을 한사군의 한반도 內 위치설(식민사관), 한사군 요동 위치설(대한사관), 한사군 허구설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자.1. 漢四郡이란?위만조선은 위만의 손자 우거왕때에 와서 그 세력이 한층 강화되어 주변의 여러 정치집단들이 漢과 직접 교통하는 것을 막아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더구나 한의 입장에서는 위만조선이 匈奴와 연결할 경우의 위협까지 가중되었다. 이에 마침내 B.C. 109년 한은 涉河의 살해사건을 계기로 무력충돌로 사태를 이끌었다. 무제의 수륙 양군은 王儉城을 향하여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緖戰에서 위만조선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이후 위만조선 내부에서는 和戰 양파가 대립되고 朝鮮相 역계경은 남쪽으로 망명하는 등 일 년여에 걸친 전쟁에서 분열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의 암살을 계기로 급격히 무너진 위만조선은 3대 70, 80년만에 멸망하게 되었고 그 판도내에 漢은 樂浪, 眞番, 臨屯 및 玄?郡을 설치하였으니 이가 곧 소위 漢四郡이라는 것이다.2. 한의 군현에 대한 사료상의 변천B.C. 82년까지 한은 토착사회의 반항을 받아 진번, 임둔의 두 군을 폐하고 그 관할하의 현들을 각기 낙랑, 현토의 두 군에 맡겼다. 이때 일부의 현은 포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B.C. 75년에는 신흥 高句麗세력으로 인해 소위 제 2현토군이라고 하는 郡治의 후퇴가 일어난다. 따라서 다시 몇 개의 현을 더한 낙랑군의 최성기에는 25개 현에 62812戶, 406748口를 지배하였다고 한다.낙랑군은 王莽의 제위찬탈과 新의 건국에 즈음하여 왕조의 반란이라는 반항운동에 직면하였으나 A.D. 30년 이를 평정하는 동시에 嶺東의 7개懸에 자치를 허락하였다. 그 후 고구려가 북방에서 강력히 대두하고, 또 韓이 강성해지자(여기에서 한은 백제를 포함한 삼한을 칭함) 낙랑군 치하의 주민이 대거 이탈현상을 나타냈고, 이의 수습을 위해 요동의 公孫氏 정권이 204년경에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땅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이 두 군은 고구려에 의해 313, 314년경에 소멸된다.3.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3가지 논쟁낙랑군 - 평안남도의 대부분과 황해도의 일부현도군 - 옥저 방면 즉, 함경도 방면임둔군 - 지금의 대관령의 이동 강릉 일대진번군 - 낙랑군 이남에서 한강 이북지역1) 漢四郡의 한반도 內 위치설 (식민사관)고조선이 한나라와 장기간의 전쟁을 치렀던 최후의 항전지 왕검성의 위치는 지금의 평양지역이다. 따라서 한사군의 핵심 군으로 왕검성에 설치한 낙랑군의 위치도 평양과 그 주변 일대로 볼 수밖에 없다.평양 일대에서는 낙랑군과 관련된 많은 유물이 나오고 있다. 점제현신사비를 비롯하여, 낙랑군의 여러 군현명을 새긴 봉니와 인장, ‘낙랑’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외에도 많은 중국식 무덤과 거기서 나오고 있는 많은 중국제 유물들은 이곳이 단순히 중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 아님을 말해준다. 물론 이런 유물들이 일제기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조작되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유물을 모두 제작하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 漢四郡 요동 위치설 (대한사관)① 위치측량 주장의 군국지에는 당시 한의 수도였던 뤄양 동북쪽으로 5000리에 낙랑군이, 4000리에 현도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 수학적 위치 측량을 이용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대륙 깊숙한 곳이라는 주장을 했다.◁ 명도전 : 칼 모양의 돈으로 표면에 明(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 화폐인데, 자강도 위원군 용연동에서 출토되었다. 이로써 당시 한국 서북지역이 중국과 무역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② 명도전의 출토 위치명도전의 출토 위치 : 명도전이 주로 발굴되는 곳은 만주일대와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지역이다. 명도전이라는 이름은 일본학자가 붙였고 중국학자들이 연나라 화폐라고 규정한 것은 명도전이 연나라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기 때문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연나라의 화폐라면 난하 이남에서 더 많은 양이 발굴되어야 하는데 황하쪽으로 갈수록 분포 밀도가 엷어진다. 고조선이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사용했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엄청난 경제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 연나라는 화폐를 찍어 고조선에서 사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과 연은 전쟁을 치뤘고 막대한 전쟁물자를 조달해야 하는데 적국의 화폐를 유통시킨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전국시대에 연 이외의 진, 초, 제, 한 등의 7웅의 나라들이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벌였는데 고조선 영토에서 명도전 이외에 전국시대 화폐가 다량 발굴된 보고는 없다. 반면에 명도전은 그 출토량이 엄청나다. 연나라의 존속기간은 100년 남짓인데, 고조선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실제 명도전이 기념품으로 다량으로 팔릴만큼 많은 양이 발굴됐다는 사실은 이 화폐가 수백년에 걸쳐 다량 유통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마르크스의 생애1818년 - 독일 라인 주 트리어에서 태어났고,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8남매 중 셋째 아 들로 태어났다. (트리어=당시 독일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발달된 곳)1830년 - 트리어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12세 때)1835년 - 본 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미술상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17세의 나이에. 법률학 전공 동시에 예술적인 것도 공부하였다.)1836년 - 평생의 반려자 예니와 약혼했다.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 역사 철학수강(그 당시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접했다.)젊은 신학 강사 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익 청년 헤겔파에 소속 되어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어갔다.1841년 -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바우어의 해직으로 교수의 꿈을 포기했다. - 당시 사회 배경으로 인해서)1842년 - 1월『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라는 글로 정부를 비난했다.(잘못된 제도와 가치, 허위적인 의식을 비판하였다.)11월 말에 엥겔스를 만난다.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신문의 편집장이 됨.1843년 - 관헌에 의하여 폐간, 프로이센 귀족의 딸 예니와 결혼해서, 파리로 옮겨간다.1844년 - 2월 A. 루게 (1802~1880)와 를 출판했다.8월에 엥겔스와 재회하여, 엥겔스와 함께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1845년 -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프랑스 파리에서 추방당해,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 을 포기했다. 를 썼다.1846년 - 를 썼으며, 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 으로 정립 ? 설명하였다.1847년 - 런던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을 결성했다. (의인 동맹)1848년 - 파리에서 시작 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으로 파급되자 브뤼셀&파리&퀼 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다. 을 통해 혁명을 지원하였다. (각 국의 혁명이 좌절되면서 잇달아 회의 노동자들은 어떤가요?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맡은 일, 나사를 끼우는 일과 같은 노동 과정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전체적인 노동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생산물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이라고 부릅니다.)은 노동자의 것인가요? 아니죠. 상품은 시장에 나가 팔리게 됩니다. 게다가, 노동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무엇인지도 자세하게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결과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자는 점점 노동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노동자는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위의 구두 만드는 할아버지의 구두 만드는 일은 할아버지를 위한 것과 동시에, 구두를 신을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즉, 할아버지의 노동은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경쟁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을 적대시하고 본성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적존재로부터의 소외입니다.토대와 상부구조1.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1)헤겔적 원류인 국가-시민사회의 대당관계를 해명하고 바로 세우고자 했던 마르크스가 자신의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사회의 현상과 발전의 근본적 양상을 규명하기 위해 제시한 유물론적 개념.(2)토대는 생산관계들의 총체로 이루어진 사회의 경제적 구조 이며, 상부구조는 법률적 및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의식형태.-> 상부구조는 토대에 조응하며 토대는 상부구조를 조건지음.2. 토대와 상부구조는 경제적 제도들과,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제도들 사이의 단순한 구별이 아님.(1)토대는 생산 그 자체가 아니라 생산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하며, 생산으로부터의 분리도 아님(2)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를 매개로 하여 생산으로부터 규정.3. 생산과 상업은 모든 단계에서 국가 및 관념적 상부구조의 나머지 부분의 기초를 형성.상부구조의 개념은 두 가지 독립적인 사회적 표준, 즉 국가와 사회의식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지는 않음-> 교환을 목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죠. 철수가 시계를 만든 노동이라든가 영희가 신발을 만든 노동이라든가의 구별을 떠나 다만 그 시계와 신발 만드는 데 인간노동이 얼마나 소요되었는가에 의해서 가치를 평가를 받게 됩니다. 철수가 시계를 만들고 영희가 신발을 만드는 노동은 구체적 노동이고, 각 상품이 가치로서 평가를 받게 되는 노동은 철수나 영이를 떠난 노동, 혹은 시계라든가 신발이라든가를 만든다는 구체성을 떠난 노동, 즉 추상적인 일반노동입니다. 이 추상적 인간노동은 상품생산사회에서만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철수가 시계를 만들어 철수 자신이 사용하면 철수 자신이 만든 사용가치를 철수 자신이 사용하므로 교환가치가 없고 따라서 상품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품으로서 시장에 나서게 되면 시계를 만든 노동이건 신발을 만든 노동이건 간에 인간의 노동량이 얼마나 투하되어 있는가에 의하여 그 가치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럼,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추상적 노동은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노동으로서, 일반적으로 그것의 구체적 형태와는 무관하게 간주되는 노동입니다. 구체적 노동과는 대조적으로 추상적 노동은 질적인 차별성을 갖지 않죠. 생산물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인간노동력의 생산적 지축(근육, 신경, 뇌 등의 에너지 사용)이기 때문입니다. 즉, 청소부가 청소를 하는 노동이나, 의사가 수술을 하고 있는 노동이나 똑같이 근육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질적인 차별성을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구체적 노동은 다른말로 유용적 노동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상품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물건으로서의 상품은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사용가치입니다. 그것을 만드는 데는, 실을 만드는 데는 방적노동이 필요하듯 물건에 따라 그에 적합한 특정한 생산활동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노동은 그 목적?대상?수단?방법?결과가 각각의 물건에 대하여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용가치로서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구체적 유용노동이다. 수 있게 된 것이 기원이 되었음2. 계급의 형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형태로 나타남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그리고 피지배계급은 노동력을 제공한다.3. 부르주아의 어원(1) 살롱에서 혁명적 사상이 고취되기 시작했고 이 사상이 혁명이라는 실천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살롱의 멤버들이 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공화정 시대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됨(2) 쁘띠 부르주아: 소시민으로, 생산수단의 소유권, 즉 법률적 소유권은 있으나 경제적 소유권은 없는 계급. 이들은 경제적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 계급에 흡수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음4. 계급과의 투쟁의 역사가 바로 역사다.(1) 계급간의 투쟁의 역사가 바로 역사.⇒ 지배계급은 가지려고 투쟁하고 피지배 계급은 벗어나려고 투쟁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 이유가 됨5. 계급위치와 계급의식(1) 계급 위치 (Class Position)(2) 계급 의식 (Class conscious) : 넓은 의미에서 계급의식은 자기의 경제적 위치에 대해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같은 계급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한 이해관계에 있음을 깨달으며, 반대되는 계급적 위치에 있는 집단에 대해서는 적대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함(3) 계급 투쟁은 계급의 위치가 아니라 계급의 의식에 따라서 일어나게 됨< 알고 넘어가기 >계급( Class )계급이란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체제 속에서 점하는 위치에 의해 일차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집단입니다. 마르크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계급은 바로 경제 계급입니다. 왜일까요? 바로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갈리기 때문입니다. 계급의 기원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사적 소유에 의해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노동을 전유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따라서 각 생산양식은 각각 두 가지의 계급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입니다. 여기서 지배계급은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계급이고 피지배계급은 생산 수단을 가지고 산 활동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마르크스는 물질적 생산 활동이 역사의 기본 전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삶 전반을 규정하는 토대로서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물질적 생산 활동은 역사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 전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사회적 삶 전반을 규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물질적 생산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를 고찰하는 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역사발전 5단계 설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역사< 알고 넘어가기 >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하고 있는데, ‘정’과 ‘반’이 싸워 결국 새로운 ‘정’을 만들어 내며, 그 변증법적인 역사의 끝에는 공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발전 5단계의 핵심 내용입니다.또한 역사발전 5단계의 전제는 역사란 계급간의 갈등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며 하나의 체제는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체제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란 바로 무엇일까요?첫 번째, 원시 공산사회입니다.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산사회’라는 개념의 정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필요에 따라 공동으로 분배하는 것이 공산사회입니다. 이는 마치 토머스 모어가 이야기한 ‘유토피아’의 사회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역사발전의 단계에서 처음을 공산주의로 두었을까요?이는 세계 각 국의 문명들이 일어난 시기(기원전 2500년~2000년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농경이 시작되었지만, 구체적인 사유재산의 개념이 들어가지 않은 시기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즉, 모두 함께 사냥하고, 채집하고, 간단히 농사짓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아버지’정도가 부족장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 사회(청동기 문명)에서는 ‘공산’이라는 개념이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