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 : 4조Winter term “educational philosophy“ Team 4-four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교사를 위한 교육 철학제 7장. 유학과 교육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유 학(儒 學, CONFUCIANISM)◈ 춘추시대 말 공자(B.C. 551-479)에 시작되어 한 무제(B.C. 136) 때 국교가 되었다. ◈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하였다. ◈ 유학의 핵심 :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에 주안점을 둔다. ◈ 근본사상 : 인(仁)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유학의 원초적 문제의식문제 1. 우리가 삶을 기탁하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자연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나 하는 '본체론'보다는 '인간과의 관계'라고 하는 점에 중점을 둔다. 자연은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다루어진다. 문제 2. 그렇게 있는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파악된 자연 안에서 적합하게 살아가는 것을 모색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유 학선진유학(원시유학, 초기유학) 실제적,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다룬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선진유학과 신 유학의 비교신 유학(성리학 주자학) 세계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나? 사람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理) : 기가 응집되는 원리 기(氣) : 인간․자연 구성하는 생명, 물질의 동적 에너지※ 우리나라에 중국의 유학이 오게 된 것에 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분명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유학은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이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유교적 전통의 마음관 (정재걸이 정리한 서양과 동양의 교육관)서양의 교육관주물 모형교육이란 아동에게 일정한 교육내용을 전달하여 사회에 적합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목공적 교육관' '만드는 교육관'도토리 모형교육은 학생 내부의 가능성을 발현 하는 것이다.'식물성장적 교육관' '기르는 교육'동양의 교육관만두 모형교육은 학습자가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여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교육은 외부의 지식을 교사가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학습자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현시키는 것도 아님)유교와 불교의 전통에서 이해하는 마음관에 기초한다.성리학 인간의 마음은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진리가 다 들어있는 것불교 인간의 마음속에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가 들어있다.※ 동양적 전통의 교육관의 특징: 교육의 목적이 '마음의 형성', '마음의 수양'에 있고, 그 마음에 대한 인식 자체가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4단 7정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인(仁)ː측은지심(惻隱之心) :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의(義)ː수오지심(羞惡之心) :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예(禮)ː사양지심(辭讓之心) :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지(智)ː시비지심(是非之心) :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을 말한다. 칠정(七情)이란 인간에게 기본적인 일곱 가지 정으로, 유학에서는 희(喜:기쁨) 노(怒:노여움) 애(哀:슬픔) 락(樂:즐거움) 애(愛:슬픔) 오(惡:미움) 욕(慾:욕망) 을 말한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사단(四端)맹자(孟子)가 고자(告子)가 성(性)을 인간의 욕망으로 해석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고 인의를 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펼친 주장.사람은 인 仁 (측은히 여기는 마음) 의 義 (부끄러워하고 경계하는 마음) 예 禮 (사양하는 마음) 지 智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라는 네 개의 실마리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4단은 인간의 본성으로 마음 자체요, 마음의 핵심이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 맹자는 고자(告子)의 설명에 논박하며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 성(性)에는 물의 흐름에 동서가 없듯이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성(性)은 인간의 생명력이요, 생존본능이자 종족보존 본능이다. (성(性)을 인간의 개인적․생물학적 특성으로 본다.)마음을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어 개념화 하는 것은 성리학의 시기에, 맹자 이후 성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이다. 주 희: 4단은 정이다. 이홍우: 4단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의식하는 마음이라면 정(情)이라고 할 수 있지만 4단은 미발의 표준(표현되기 이전의 표준)에 해당하며 이것은 마음 자체, 마음의 리(理)에 해당하는 성(性)과 다르지 않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유학에서 말하는 마음리(理)와 기(氣)로 구성된 하나의 물(物)이다.바깥 세계의 외물과 끊임없이 접촉하여 영향을 받는다.미발(未發)이발(已發)외물에 간섭 받지 않고 평정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7정(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의 감정이 이미 발동된 상태천리(天理)가 가장 잘 보존된 상태인간의 마음은 하늘의 이치를 지닌 선한 본성의 존재이지만 끊임없이 외계와 접하며 그 선한 마음이 흩어지기 마련이다.유학 : 세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미발의 기준으로서의 선한 본능을 유지 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닦는 것을 강조한다. 맹자 : 공부의 방법은 그 마음을 찾는 것에 있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4단 7정 논쟁과 교육4단7정 논쟁 : 4단과 7정에 관한 논쟁의 과정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의 요약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주 장주자, 정지운, 퇴계고봉, 율곡차이점사단과 칠정을 분리해서 생각칠정은 사단을 포함한다. (사단은 칠정 중 선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공통점사단은 칠정이 따라야 할 기준이다.기준사단은 칠정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절대기준이다.기준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발휘되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현상 속에 존재하는 기준 이외에 별도의 기준이 있다. (기준이 현상을 초월)별도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준은 현상 속에 존재한다. (기준이 현상에 내재)기준의 절대성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삶의 기반을 과소평가하게 된다.기준이 인간의 욕망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박종덕의 해석(이황과 기대승간의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을 교육이론과 관련지어 해석함)사칠논쟁은 각각의 입장 강조한다. 하지만 교육에서 이 두 차원이 동시에 존재한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두 차원은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가?교육을 하는 데는 학습자가 처한 시공간적 맥락의 특수성 중요하며 학습자가 갖고 있는 흥미, 요구, 동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듀이의 주장 : 교육이란 교육내용이 학습자에게 경험되도록 가르쳐져야 한다. (학습자와 객관적인 교육내용을 연관 짓는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학습자의 동기와 흥미가 고려될 경우, 교육내용의 무시간적 차원이 경시 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결국 교육을 하는 데는 학습자인 아동도 있어야 하고 그 학습자에게 가르치는 바인 교육내용(교과)도 필요하기 때문에 '교과'와 '아동'은 둘 중 하나를 택할 문제가 아니다.훗날 낭만주의 교육자들이 “우리는 아동을 가르치지 교과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표출유학과 교육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1층 양 육발달을 도와주는 차원어린이와 자라나는 이들의 생존과 발달에 필요한 일체의 기본적인 도움을 지속적으로 제공2층 전 승 - 산 출객관적 문화유산을 전승 ↳단순히 전달하는 것과 다르며 본질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상호 의존하여 관련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만하다고 간주되는 객관문화를 전달하고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그것을 스스로를 위해 능동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의미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를 '전승-산출' 혹은 '객관문화의 주관문화에로의 변전'이라고 나타낸다.)문화가 교육에서 불가결한 이유는 개인의 삶은 생존을 시작하면서부터 불가피하게 객관 세계와 연관되어 있고, 실상 내면의 창조적 발달은 완전히 고립된 존재로서는 발전하기 불가능하며, 대신 적절하게 촉진시키는 매개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3층 각 성↱ 인간의 의미 활동의 다른 표현 정신생활의 각성 ↳ Erweckung, 사물에 오랫동안 몰두한 끝에 그 구조적 원리를 돌발적으로 이해하게끔 불러일으키는 과정주관으로 하여금 객관문화의 매개를 통해서 창조적인 의미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게 하는 교육 및 교수 과정의 특수한 현상쉬프랑거의 세 단층으로서 교육을 이해하는 논의에서 어린이를 둘러싼 문화가 어린이의 의식발달을 위한 하나의 불가결한 전제를 이룬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Copyright ⓒ Team 4-four All rights reserved.Copyright ⓒ Team 6-six All rights reserved.Thanks You ^-^{nameOfApplication=Show}
8 장 유학의 공부론8.1 교육의 어원적 의미 『 맹자 』 - 군자삼락 ( 君子三樂 ) → ‘ 교육 ’ 이란 말이 처음 등장 교학 ( 敎學 ), 교회 ( 敎誨 ), 학문 ( 學問 ) 등의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됨8.1 교육의 어원적 의미 교 ( 敎 ) = 효 ( 爻 )+ 자 ( 子 )+ 복 ( 攴 ) → 교사는 회초리를 때리며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아이는 본받는다 치다 , 회초리로 때리다 아이 본받다 , 어울리다8.1 교육의 어원적 의미 학 ( 學 )= 효 ( 爻 )+ 구 ( 臼 )+ 멱 ( 冖 )+ 자 ( 子 ) → 이미 마주하고 있는 세계를 아직 깨우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밝혀보고자 하는 자기 노력 물건을 덮은 모양 사물의 근원적 요소 아이 마주본 양손8.2 논어의 학이 ( 學而 ) 편에 나타난 배움의 의미 ①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자왈 , 학이시습지 , 불역열호 )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 배움의 시작단계 ②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 유붕자원방래 , 불역락호 ) 다른 사람과의 소통 . 배움의 중간단계 ③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인부지이불온 , 불역군자호 )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음 . 배움의 마지막 단계인 최고 단계8.2 논어의 학이 ( 學而 ) 편에 나타난 배움의 의미 •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 ( 발견의 기쁨 ) 배움의 기쁨이란 ? 그러나 , 오늘날 교육과 공부의 의미에는 지식을 소유하고 그 대가로 부와 지위를 소유하게 되는 것으로 연결 지으면서 공부의 즐거움과 점점 멀어지게 됨 평생교육시대가 아닌 평생고역시대8.3 일상과 삶에 기초한 공부 이율곡의 『 격몽요결 』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학문이 아니면 ,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학문은 절대로 일상을 벗어난 이상스런 일이 아니다 .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부는 자기역할을 충실히 하고 형제간에는 우애 있게 어울리고 젊은 사람은 노인을 존경하고 친구사이에는 신뢰로 대하는 것이다 . 그러기에 공연히 마음을 이상하고 허황된 방향으로 내달아서 괴상한 효과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 →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 사이의 질서에 맞게 행동하는 것 나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가정에서 생기는 인간관계 , 확대된 사회관계 속에서 사람됨의 도리를 하는 것 .8.3 일상과 삶에 기초한 공부 『 소학 』 : 유학의 여러 경전 중 어린 아이들 (15 세 이하 ) 을 교화하기 위한 내용을 골라 만든 책8.3 일상과 삶에 기초한 공부 제 2 권 명륜 오륜을 다루는 부분 , 소학 중 가장 많은 비중 제 3 권 경신 개인의 일상적 삶에서 갖추어야 할 윤리 , 덕목에 대한 윤리적 자세와 태도를 다룸 제 4 권 계고 입교 , 명륜 , 경신 편의 내용을 요순에서 공자에 이르기까지 성현들의 행적을 통해 증명 제 5 권 가언 한대에서 송대에 이르는 성현들의 언행 기술 , 입교 , 명륜 , 경신 편의 가르침을 넓힘 제 6 권 선행 한대 이후 송대에 이르는 성현들의 언행 기술 , 입교 , 명륜 , 경신편을 실증 ` ` 쇄소응대 ( 刷掃應對 ) 의 원리에 기초8.4 『 대학 』 에 나타난 공부의 체계 『 대학 』 은 ? 논어 , 맹자 , 중용과 함께 사서의 하나로서 어른이 되기 위한 , 어른에게 필요한 학문 을 말하며 대략 15 세 이상을 대상으로 함 . 거경궁리 ( 居敬窮理 ); 고요히 거처하며 세상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탐구한다 .8.4 『 대학 』 에 나타난 공부의 체계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 대학지도 , 재명명덕 , 재친민 , 재지어지선 ) 1) 공부의 출발 어른들이 해야 할 공부는 ? 첫째 , 착한 마음을 밝힘 둘째 , 다른 사람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 셋째 , 지속적으로 선을 실천8.4 『 대학 』 에 나타난 공부의 체계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 先治其國 , ( 고지욕명명덕어천하자 , 선치기국 ) 欲治其國者 , 先齊其家 , 欲齊其家者 , 先脩其身 , ( 욕치기국자 , 선제기가 , 욕제기가자 , 선수기신 ) 欲脩其身者 , 先正其心 , 欲正其心者 , 先誠其意 , ( 욕수기신자 , 선정기심 , 욕정기심자 , 선성기의 ) 欲誠其意者 , 先致其知 ; 致知在格物 욕성기의자 , 선치기지 ; 치지재격물 ) 2) 공부의 과정 격물 - 치지 - 성의 - 정심 -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 ( 대학의 8 조목 ) 8 조목의 바탕8.4 『 대학 』 에 나타난 공부의 체계 성리학 속에서 격물의 의미 실제 사물을 접하고 그것을 대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 독서를 통한 수양의 이치에 이르는 것 격물 ( 格物 ) 과 치지 ( 致知 ) 격물치지의 최후의 산물인 지 ( 知 ) 의 궁극적 의미 를 서양에서는 진리의 추구 , 동양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 데서 큰 차이점 정자 는 격물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점진적인 방법을 강조 주자 는 격물의 시기에 대해 ‘한가한 때’라고 말함8.5 위기지학 ( 爲己之學 ) 으로서의 공부 자신을 위한 공부 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8.5 위기지학 ( 爲己之學 ) 으로서의 공부 공자 “옛날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했는데 , 지금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 .” 퇴계 “ 도리를 우리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삼고 , 덕행을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삼아서 먼 것 보다 가까운데서 , 겉보다 속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마음으로 얻어서 몸소 행하기를 기약하는 것” 위기지학에 대해서 ` ` 유학에서의 진정한 공부는 위기지학8.5 위기지학 ( 爲己之學 ) 으로서의 공부 ‘ 나아감 ’ - 교육을 통해 입신출세하려는 욕구 ‘ 물러남 ’ 내성적 성찰 중시 , 세속적 욕망의 절제 ‘ 나아감 ’ 과 ‘ 물러남 ’ 의 철학 그리고 오늘날의 교육 오늘날의 교육 ? 경쟁 , 효율성 , 무한경쟁에의 생존책T hank You:){nameOfApplication=Show}
교육의 향방 - 대한민국의 교육과 미래교육의 향방 - 대한민국의 교육과 미래Ⅰ. 핵심내용은 총 3부의 글 구성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의 전반적인 문제와, 해결의 방안 그리고 교육 저변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1부 ‘현실의 교육문제’ 는 세가지 우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입시, 평준화, 영재교육, 영어교육, 전문적 자율, 대학교육 등의 7가지 주제로 교육문제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제안을 덧붙이고 있다.첫번째 주제인 ‘입시’에서는 현재의 입시제도는 현재의 필답위주, 객관과신, 점수맹신의 풍조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사점수와 같은 ‘숫자놀이’는 지양하고,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는 다중적 전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다중적 전인 평가로의 변화를 위해서는 현재의 중앙집권적 교육체제에서 벗어나 학생 선발의 권한을 대학에게 주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사회전체의 변화로 이어져서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해 있는 고시 위주의 채용은 지양하고, 다중적 전인평가로 전환될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두 번째로는 ‘평준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여기서 ‘평준화’는 교육의 자유와 평등이 균형있게 추구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초, 중등학교는 최우선적으로 전체적으로 균등한 질적 향상이 경주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유능하고 열의있는 교사가 확보되고, 학교에는 성과에 따라 상벌이 주어져야 한다. 이에 비해 사립학교는 자유로운 교육의 목적 달성을 위해 ‘평준화’ 대상에서 개방하되, 교육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세 번째로 ‘영재교육’ 에 대해서는 “영재英材는 높은 지능이 아니라, 남다른 창의력을 가진 인물” 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시험만을 잘 보는 수재秀才와는 차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재교육의 요체는 창의성을 살릴 수 있는 개별지도이며, 사회를 이끌어갈 영재의 성장을 위해서는 현재의 왜곡된 집단적인 형태의 영재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네 번째로는 ‘영어교육’ 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말조차도 제대로 학습되지 못한 초등학교부터 영어교육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우리말이 제대로 학습된 중등학교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에 현재보다는 교육 전반에 대한 투자와 연구가 지속되어 교사의 자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전공과목을 영어로 교육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대학의 전공 강의는 전공내용의 전달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하는데 그 전달이 영어로 이루어진다면, 강의의 목적 자체가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지속적인 학습과 생활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는 시설들이 설립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마지막으로는 바로 대학교육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대학의 목적은 교육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연구 실적만을 강조하는 현재의 평가방식을 배제되어야 하며, 교육 당국 또한 자율성을 온전하게 보전해주어야 한다. 대학 또한 현실 안주와 방만함을 탈피하고, 지나친 등록금으로 대표되는 거대 지향적인 생각을 버리고 학문교육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2부 교육의 과정에서는 교육의 과정의 주요 단계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들과 해결의 원칙들을 서술하고 있다. 첫 장인 교육의 신조와 가정에서는 자신의 신조 10가지를 밝히고, 교육의 기본을 가정하고 있는데, 교육이란 ‘바람직한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인간관, 변화관, 계획관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은 잠재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육은 이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교육은 목적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다음 장에서는 ‘왜 가르치느냐’라는 교육의 목적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교육의 이념과 목적, 목표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교육에서 그 목적의 자원은 인간과 사회로, 교육 이념뿐만 아니라 모든 이념 자체가 인간과 사회의 존재와 향방에 관해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사회에 관한 지향점이 갈등관계에 접어들 수 있으므로, 이 가운데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교육은 ‘쓸모’를 강조하기 전에 학생에게 흥미를 배양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교육의 목표는 교사가 학생들이 기르게 하려는 바람직한 능력과 특성을 의미한다. 이는 내용과 형식을 합한 형태로서 이원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개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문제해결능력과 응용력을 배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표는 희미해지거나, 일관되지 못하면 여러 현실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교육이 다루는 것은 인간사회의 문화로 이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서 이 모든 내용을 다룰 수 없으므로, 가능한 필수적인 것들을 선별해서 그것을 여러 관점에서 ‘철저히’ 다뤄서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선별된 내용이나마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아이들이 알게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저자는 학습에는 청취학습, 강화 학습, 모방학습, 자율학습 4가지의 기제가 있다고 한다. 학습기제를 모두 동원할 수 있다면 학습효과는 극대화 될 수 있으며, 학습기제간 갈등이 생긴다면, 학습효과는 극소화 될 것이다.그리고 교수는 네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학습, 시행, 평가, 교정의 4단계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열심히 가르치고, 알아들었다고 생각되면, 연습문제를 주고 풀어보게 하고, 그에 대해 평가해보고 잘했을 경우 칭찬해주거나 또는 잘못을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학습결손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고 한다.‘어떠한 성과를 냈는가‘도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맞은 문제는 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틀린문제는 교정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시험은 학습 동기를 유발하며, 학습과정을 규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므로 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지원구조에 관한 견해도 밝히고 있는데, 교육은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그 나라의 지원구조와 관련된 것으로, 가정의 부모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지도층까지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중심에는 늘 교사가 존재해야만 하는데, 저자는 교사가 외면 받는 한국교육의 운영현실을 비판하고 있다.3부에서는 교육의 저변에서 교육의 방향을 결정짓는 사상, 사고의 문제들에 관해 고찰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관’을 통해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며, 삶의 목적은 자아실현이며,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기르는 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관’에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뿐 아니라 교육은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도 해야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자유와 평등으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역량을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관’에서는 교육은 세계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식관’에서는 지식이란 특수속에서 보편을, 다양속에서 통일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개념들이 합법적으로 연결된 것이 법칙이며, 관련된 법칙이 이론을 이루고, 이론들을 체계화 한 것이 학문이 되는 것이다. ‘지력관’에서는 교육은 지식을 잘 이해할뿐 아니라, 그것을 응용하여 문제 해결에 활용할 줄 아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 발견할 줄 아는 능력까지도 길러낼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기억, 창의력, 사고력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전인관’에서는 전인교육이란 지정의체의 교육, 지성, 감성, 덕성의 교육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리고 전인교육의 목적은 모든 학생에게 기본적인 전인성을 함양하고, 개개인의 특수한 재능의 기초를 배양해야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풍부한 교육과정과 시설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이상과 동떨어져 있으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마지막 장에서는 ‘교육력, 어디까지?’ 라는 제목으로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학습 결손에서 오는 사회적 불평등에서 기인함을 주장하면서, 이를 해소 하기위해서는 불완전 교육을 청산하고, 완전교육으로 변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의 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Ⅱ. 교육적 시사점올해 초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절찬리에 방영되었다. 일본에서 출판된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교육현실과 너무나는 비슷해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드라마에서는 공부가 자기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하나의 기회라고 말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세상의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고, 법률, 교육, 조세제도 등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체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좋은 성적을 내고, 명문대학교에 진학할 것을 강권한다. 주인공들은 갈등을 겪지만,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명문대에 진학하게 된다. 겉보기에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공부에 매달린다. 자신의 장래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의 장래희망은 좋은 성적이 나오고 난 다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꿈보다는 남들을 이기기 위한 경쟁을 먼저 배우게 된다.
동아시아 근현대사티베트의 역사 :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Ⅰ. 머리말1950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사천성에 강제로 편입한 이후, 티베트의 독립을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은 지속되어 왔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탄압에 맞서 티베트의 승려들이 연이어 분신자살을 하고, 정부청사를 폭파시키는 등 분리주의 운동이 격화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의 실질적 자치를 허용하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중국의 시진핑 국가 부주석이 “티베트의 안정과 중국의 통합을 해치는 모든 계획을 엄단할 것” 이라며 강경한 의사를 내비치는 등 사태는 알 수 없는 형국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역시 취임 직후인 2009년 미국을 방문한 달라이 라마를 만나지 않아 국내외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러자 작년과 올해에는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고 "티베트가 독특한 종교적, 문화적, 언어적인 독자성을 보존해 가고 있는 것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가, 이번에는 중국의 비난이 거세지자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의사를 번복하기도 했다.중국의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티베트는 대표적 분쟁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독립을 주장하는 그들의 역사에 관한 관심은 부족한 상황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조차 수-당시대에 토번이라는 국가가 존재하여, 실크로드를 확보하였다는 정도로만 기술되어 있으며,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진행된 서남공정으로 인해 역사를 왜곡당하고 있다는 정도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티베트는 과연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독립을 주장하는지, 중국과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티베트의 역사가 우리에게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지 알아보고자 한다.Ⅱ. 티베트의 역사티베트의 역사는 크게 보아 5기로 구분될 수 있다. 제1기는 티베트 국가의 형성기로서 티베트의 시초에서 842년 티베트 제국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기간이다. 이 기간은 티베트 제국(630-842)에 의해 티베트 고원 전역이 정치적으로 시기이다. 막강한 사원에 근거지를 둔 특정종파가 정치-군사적 비호를 제공받는 대신 그들에게 종교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사제-후원자의 관계가 유지되었다.이러한 관계를 최왼(공시供施 관계)이라고 하며, 이를 근거로 한 종파의 수장이 티베트 전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티베트는 중국의 몽고 왕조인 원이나 만주 왕조인 청과 일종의 봉건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로부터 간접적인 정치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여타 동아시아 질서에 속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티베트가 현재처럼 불교 신정국가의 모습을 지니게 된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제4기는 청이 멸망한 1911년부터 티베트가 중국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1950년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이 시기에 티베트는 영국이나 중국 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정치, 군사적 압력을 받음과 동시에 근대적 의미의 티베트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정치적 독립을 누리기도 한 시기였다.마지막으로 제 5기는 1950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기간으로 티베트가 정치적 독립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중국정부로부터 독자적 정체성이 크게 위협받는 시기라 할 수 있겠다. 현재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인도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위해 힘쓰면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1. 티베트제국의 흥망티베트는 고대 장족으로부터 기원하는데, 이들은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여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4세기에는 선비족 계열의 토욕혼에게 복속당하였다. 하지만 575년부터 600년 사이 토욕혼은 쇠약해지고, 티베트 고원에서는 통일을 위한 전쟁이 이어진다. 이때 야룽 왕조는 지속되는 통일전쟁 속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티베트 고원에서 유래없는 막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을 앞두고 618년경 야룽의 국왕 남리송첸이 독살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이 사태를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 티베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송챈캄포(581-649)였다. 송챈캄포는 티베트 고원을 통일하고, 라사를 수도로 왕비는 이러한 공로로 현재까지 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후 송첸캄포는 인도 문자를 기반으로 하여 티베트 문자를 창안하고, 토욕혼을 점령하여 티베트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후 티베트 제국은 서역의 주도권을 두고, 당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751년 압바스 왕조와의 연합군과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격파하면서 무역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763년 안사의 난 때는 티베트에 바치던 공납을 중단한 것을 빌미로 삼아 당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장안을 정복하기도 하였다. 821년 당과 티베트는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이 조약의 내용을 담은 비석을 라사의 사원 앞에 세웠다. 9세기 중반까지 티베트는 통일왕국을 유지 했으나, 지방호족들에 의해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면서 다시금 혼란기를 맞이하였다.2. 제국 멸망 이후의 티베트 : 원나라와의 관계티베트 제국의 해체 이후, 불교는 토착신앙들과 습합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존속하게 된다. 정치적 구심점이 사라진 티베트 사회는 11세기부터는 귀족 가문들의 후원을 업은 영향력 있는 사원들에 의해 주도되게 된다. 이들 사원들은 유명한 승려에 의해 창건된 것들로서 영향력 있는 가문과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면서,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징기스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티베트를 침공 하였을때, 티베트의 여러 사원들이 몽고에 투항하였고, 몽골군은 이들의 도움으로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유력한 사원이 샤카사원이었다.샤카파의 판디타(1182-1251)와 그의 조카 팍파의 역할이 가장 결정적이었는데, 이들은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 칸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팍파는 쿠빌라이칸을 밀교의식에 입문시켰고, 쿠빌라이칸은 1270년 팍파에게 제사帝師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팍파는 티베트와 원 황실 사이를 오고가면서 티베트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팍파와 쿠빌라이칸의 관계는 이후 티베트의 정치-외교 역사에 결정으며, 주로 의례적인 일에 국한되었다. 티베트는 몽고의 직접적 통치를 면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중엽 티베트는 재차 몽고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겔룩파가 몽고의 지원을 얻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겔룩파의 지도자인 주지 소남가초(1543-1588)은 1578년 몽고의 알탄칸을 만나게 되었는데, 몽고로 하여금 피의 제사를 그만두도록 설득하였으며, 이떄 알탄 칸으로 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받게 되었다. 이때 겔룩파는 이웃 지역의 카르마파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였으며, 2세기 전 샤카파의 팍파와 쿠빌라이가 맺었던 사제-후원자 관계를 다시 재현했다. 비교적 신생 종파였던 겔룩파는 전통적 종파들처럼 강력한 씨족의 후원이 없었기 때문에 외세의 비호가 더욱 필요했다. 소남 가쵸는 최초로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부여 받았으나, 겔룩파의 3번째 지도자였기 때문에 소급 적용을 받아, 그는 제 3대 달라이 라마로 인정되었다.제5대 달라이 라마 로샹 가초(1617-1682)때부터 확고한 권력을 구축하게 된다. 몽고군은 1621년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해 카르마파를 공격하였으며, 이곳을 점령하였다. 이로서 다시 로샹 가쵸는 티베트 전역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로샹가초는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전통인 판첸라마제도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판첸라마는 샨스크리트어로 대학자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는 티베트의 양대 정신적 지주로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면서 티베트 역사를 주도하였다.3. 청나라와의 최왼 관계1720년에는 청의 군대가 라사를 점령하고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티베트의 일부 지역은 중국의 사천성으로 병합되어 버렸다. 다음해에는 3명의 티베트 대신으로 구성된 카샥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내각을 중심으로 한 정부가 구성되었고, 청조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암반(마장대신)이라는 존재를 티베트에 상주하게 했다. 승려들은 통치기구에서 배제되었고, 달라이 라마는조에서 파견된 암반이 여전히 가장 큰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이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부터 청의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함에 따라 청의 티베트 장악도 느슨해지게 되었다. 특히,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청은 군사적으로도 티베트를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부패하고 무능한 암반들도 청의 장악력 약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실질적으로 티베트는 내각과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하나의 자율적 정부조직을 갖춘 독자적 국가였다. 외면적으로는 중국의 속국과도 같은 존재였으나, 결코 중국의 일부는 아니었다.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보아 티베트는 독자적인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를 형성할만한 요건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4. 청조 이후의 티베트의 역사19세기 말부터 영국이 티베트의 관심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중국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티베트에 개입하려 하였으나, 이미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던 청조는 영국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티베트인의 저항에 봉착된 영국은 드디어 직접적으로 티베트와 상대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1904년 영국군은 마침내 티베트의 라사를 점령했으며, 13대 달라이라마는 외몽고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은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티베트의 개방은 라마승들의 전통적 지도력과 권위에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티베트는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들의 적극적 입지를 회복하려는 태도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중국은 종주권을 되찾기 위해 1904년에 영국과 티베트 사이에 체결된 협약을 인정하지 않고, 영국과 중국 사이에 체결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영국은 러시아와 연합하여 중국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결국 영국은 1908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가 외몽고로 피신하고 없는 사이에 라사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쉽게 강화했으며, 1908년에는 달라이 라마의이다.
동아시아 전근대사유목제국의 역사 : 돌궐제국의 흥망Ⅰ. 서론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다. “...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나라가 동북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에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이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세력을 구축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른바 십자외교로, 7세기 동아시아의 정세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외교 질서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세계사 교과서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돌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찾아 볼 수가 없다.유목민족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며, 인류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스키타이는 홀연히 나타나서 서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훈족은 ‘신의 채찍’으로 불리며, 게르만족을 밀어내고, 로마를 위협하였다. 몽골은 제국이 세워진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문명의 도시 북경과 바그다드,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유라시아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이렇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턱 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유목민족의 역사, 그 중 우리 역사와 친숙한 돌궐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돌궐의 발흥6세기 초 중앙아시아 일대는 몽골계의 유연柔然)과 에프탈족이 양분하고 있었다. 물론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몽골 본토를 장악하고 있던 유연족이었다. 러시아 초원일대에서는 훈족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지만, 서부의 쿠트리쿠르와 동부의 우투르구르와 전쟁을 벌여 세력이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돌궐은 5호 16국 시대에 흉노족의 일파에 속해 있다가, 북위 태무제(423-452)에 의해 흉노 일파가 멸망하게 되자, 유연柔然에 예속되었다. 알타이 산맥의 서부에서 생활하던 돌궐족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철공업을 주산업으로 하여 점차 세력을 키워나간다.유연은 520년 부족들 간의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다. 여기에 521년과 546년에 걸쳐서 속국인 고차에서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돌궐은 고차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돌궐의 부민土門은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하게 되는데, 유연의 지배자 아나괴阿那壞는 이를 거절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부민은 선비족 계통인 탁발씨의 서위와 손을 잡고, 혼인관계를 맺는다. 서위의 도움을 받은 돌궐은 자신들의 족속을 규합하고, 부민은 가한可汗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552년 마침내 유연을 멸망시키고, 오르콘 강 일대를 비롯한 몽골고원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에 따르면, 유연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돌궐족이 고구려의 신성을 공격하였다고 이기지 못하고, 백암성을 공격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와 돌궐의 최초의 접촉이었다). 한편, 유연의 유민들은 중국의 변경으로 피난하게 되고, 북제의 변경 수비세력이 되었다.2. 돌궐제국의 성립과 발전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제국을 수립한 부민가한은 그 해 사망한다. 돌궐제국은 둘로 분리되게 되는데, 그의 아들 무한木汗은 몽골고원일대와 함께 가한의 칭호를 물려받게 되었고, 동돌궐제국을 성립하였다. 그리고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는, 야브구)라는 칭호를 받아, 이리강 유역의 준가리아지방을 물려받아 서돌궐제국을 수립하였다.서돌궐의 이스테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혼인관계를 맺어 에프탈을 협공하여 멸망(565)시키고, 다시금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깨고 전쟁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뿐만 아니라 568년에는 동로마제국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고, 초원로를 개통하여 동서무역의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동돌궐의 무한가한 역시 560년에 거란을 격파하고, 요하의 서안까지 진출하는 가하면, 북주와 혼인관계를 체결하고, 중국의 북제와 북주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도맡아 하였다. 그야말로 돌궐제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3. 돌궐제국의 분열과 붕괴돌궐제국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실제 돌궐의 힘을 약화시킨 것은 외부의 요인보다는 오르콘 강가에 위치한 동돌궐제국과, 이리강 유역에 위치한 서돌궐제국의 다툼때문이었다. 만약 두 제국이 552년 처음 분할이 이루어졌을 때처럼, 동돌궐의 우위를 인정하고 서돌궐이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였다면 그들은 오랜시간 전성기를 구가했을 것이었다.무한가한을 계승한 타발가한他鉢可汗(572-581) 이후로는 서돌궐제국은 동돌궐제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다. 서돌궐제국은 스스로를 가한으로 칭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581년 양견은 수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다. 중국이 통일된 시점에 돌궐이 분열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 서돌궐의 갈등뿐만 아니라 동돌궐은 내부에서의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 문제는 이를 적절히 이용하여, 돌궐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이이제이의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절망적인 분열상태 속에 서돌궐의 타르두 가한이 돌궐제국의 재통합을 시도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수나라의 군대는 돌궐제국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하여 609년에는, 오아시스 지역의 상당수의 국가들이 수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를 와해시키고, 돌궐을 구원한 것은 수의 고구려 원정(612-614)이었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돌궐제국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615년에는 수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 양제를 포로로 잡을 뻔하였으며, 수나라가 멸망한고 난 뒤인 624년에는 동돌궐의 힐리가한(620-630)이 새로 건국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였다.그러나 624년 전투에서 이세민에 의해 동돌궐의 군대는 대패를 당했으며, 626년에도 장안을 다시 공격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이세민은 동돌궐 내부의 반란을 획책하는 한편, 이세적과 이정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마침내 동돌궐을 멸망시키게 된다. 이어 630년 서돌궐제국 또한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고 만다. 당은 동돌궐 지역에 속령을 설치하는가하면, 서돌궐지역에도 차츰 영향력을 확대하여, 한동안 중앙아시아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다.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탈라스 전투에서 격파하고, 당 제국이 혼란에 빠져든 후, 유목민족들은 다시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