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와의 재회는 딱 8년 만이었다. 8년 전 마담 보바리를 읽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마담 보바리에게 외면 받은 남편 샤를르 보바리가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의 눈에는 바람 핀 마담 보바리와 그녀의 두 정부 레옹과 로돌프가 단지 나쁜 사람들, 위선자로만 비춰졌던 것 같다. 이번에 ‘프랑스 문학과의 만남’ 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어보니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마담 보바리의 생각과 행동들에 연민을 느꼈고, 각각의 주인공들의 삶을 거울삼아 우리네 인생을, 보통 인간들의 소소한 감정들을 비춰 볼 수 있었다. 나아가 줄거리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숨겨둔 장치들을 찾아내는, 소설을 읽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전반적인 줄거리는 알고 있었고 또 한 권 분량이어서 수업시간에 먼저 다뤘던 적과 흑보다 빨리 읽을 줄 알았는데, 플로베르가 묘사하는 상황들을 머리에 그려보고 시점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니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느렸다.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묘사’ 하나하나에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플로베르는 장면을 화려하게 만들고 주인공을 치장하기 위한 단순한 장식적 묘사를 하지 않았다. 샤를르 보바리가 학교에 입학한 날의 ‘모자 사건’에서 모자를 “그것은 온갖 요소들이 한데 섞인 혼합식 모자의 한 유형, 요컨대 어떤 멍청한 사람의 얼굴처럼 그 말없는 추악함이 표현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는 그런 한심한 물건의 하나였다.”라고 묘사함으로써 샤를르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보여 주었다. 플로베르는 애매한 감정과 모호한 생각을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고 글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 단어 선택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고 하는데, 이처럼 마담 보바리에서 묘사는 단순할 수 있는 줄거리에 문체와 운율의 깊이를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읽으면서 느낀 또 다른 독특한 특징은 ‘시점의 변화’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려니까 교장 선생님께서 어떤 평복 차림의 신입생과 큰 책상을 든 사환을 데리고 들어오셨다.”에서 신입생은 샤를르 보바리였다. 주인공 주변의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샤를르’가 엠마를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보바리 부인이 된 ‘엠마’가 본격적으로 그녀의 인생을 말하다가 엠마가 죽고 다시 ‘샤를르’로 마지막으로 샤를르의 죽음 후 약제사 ‘오메’가 소설의 마침표를 찍는 일련의 시점이동을 통해 나는 구성이 정교하고 짜임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각각의 시점을 접하면서 내 스스로 주인공들의 성격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8년 전에는 나쁜 여자로만 생각했던 마담 보바리는 다시 보니 불쌍한 여인이었다. 어쩌면 순수했기 때문에 지나친 낭만적 공상에 빠졌던 것이고,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여기 저기 도움을 청하지만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았던 신부에게서 봤듯, 매번 그녀의 시도는 좌절 되었다. 샤를르의 사랑도 지금 보니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사랑했다면 마담 보바리의 허전함과 외로움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낭만적 상상을 조금이나마 함께 나누면서 행복하게 살았어야 하는데 미련하고 무지했던 그의 사랑은 오히려 그녀를 현실 밖으로 몰아쳤다. 나는 마담 보바리가 레옹과 로돌프를 만났던 것이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담 보바리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없었다. 수도원 시절에 만든 수많은 낭만적 틀에 억지로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공식에 따라 사랑을 이루려던 그녀는 죽는 날까지도 자기가 만든 낭만이란 감옥에 갇힌 외톨이였다. 이 점이 내가 마담 보바리에게 연민을 느꼈던 이유이다.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들은 평범하지 않은, 극한 성격으로 인간이 저럴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지만, 나는 마담 보바리의 낭만적 감수성과 샤를르의 무감각함, 오메의 계산적 이기심, 뢰르의 천박함은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다.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를 통해서 인간의 어두운 삶의 모습까지도 사실적으로 재현해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