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동학농민운동의 유적지의 감동을 느끼면서….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2008년 5월 1일 목요일 나는 이번학기에 동학농민 혁명사라는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고, 단체로 답사를 떠나는 일정에 학생회 LT 일정과 겹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이 수업을 같이 듣고 있는 학생회 동생들과 함께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원칙으로는 지난주 교수님과 수강학생들의 단체 답사에 함께 참여했어야 했지만, 학생회 사정상 답사를 함께하지 못한 나는 교수님의 동의를 얻어 동생들과 이번 답사를 함께하였다. 이번 답사일정으로는 고등학교 시절 동학농민운동 유적지로 답사를 경험해보았던 백산지역의 유적지는 제외했으며, 답사 전에 사전조사를 통하여, 유적지 답사를 다음의 표와 같이 크게 4구역으로 나누어서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구역코스제1구역(만석보 유적지)만석보유지비 → 만석보혁파비 → 말목장터제2구역(전봉준장군 유적지)전봉준장군 고택 → 전봉준장군 단소제3구역(황토현 유적지)동학농민혁명기념관 → 황토현전적지 → 동학혁명기념탑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익산에서 아침 10시를 약간 넘겨 출발하여 자동차로 40여분의 시간을 달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만석보유지비가 있는 만석보터' 였다.만석보 유지비 전라북도 기념물 제33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던 보가 잇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과 태인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는데 조선 고종 30년(1893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낸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그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주변에는 배들평(이평)이라는 비옥터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비석(이평 종합복지회관 앞)과 말목정(이평 종합복지회관 좌측), 그리고 고부봉기를 도모 할 때에 깊은 관련이 있는 감나무만이 이곳이 예전의 동학농민혁명운동의 첫 집결장소로써 유서 깊은 곳이라는 것을 입증해 줄뿐 이였다.말목장터와 감나무 전라북도 기념물 제110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이 곳은 1894년1월 고부봉기 때 배들평 농민들이 고부관아로 진출하기 전에 모인 곳으로 전봉준장군이 감나무 아래에 서서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을 설명하고 고부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에 수천 농민이 호응하여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하니, 이곳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는 농민혁명의 첫 집결장소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면사무소 맞은편에는 전봉준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다. 이 감나무는 2003년 8월 25일 강풍으로 도복되었으나, 방부 처리하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 보존되어있다.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더군다나 말목장터에서 보았던 감나무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 이였던 고부봉기의 첫 집결장소로 유서 깊은 150여년동안 세월의 세파 속에서도 견디어낸 그 당시의 감나무가 아니였으며, 그 당시의 감나무는 2003년에 태풍으로 인하여 도복되어 현재 보존 처리되어 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었고, 감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새로이 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말목장터를 답사하면서 가장 크게 마음에 거렸던 부분이 바로 이 감나무였다. 앞에서 말했던바와 같이 현재는 많은 변화로 인하여 이곳이 말목장터였음을 알아보기 힘들다. 비석과 말목정이 있다고는 하나 이는 언제까지나 그 후의 기념물 일뿐 그 당시의 말목장터의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많이 부족하였다. 그나마 그 당시의 감나무가 도복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있었더라면 그 당시의 현장분위기를 느끼는데에 큰 도움이 되고, 또한 역사적 가치 또한 크게 남지 않았을까하는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도복된 금을 모아 이곳을 확장 정화하였다. 이곳에서 200미터 북동쪽에 장군의 고택이 있고, 150미터 북서쪽에 선친의 묘소가 있다. 전봉준 장군의 고택 주변에는 일반묘소들과는 달리 화려하고 장엄한 묘소들이 곳곳이 있었는데 그리하여 장군의 단소인줄 알고 가고서는 헛걸음을 계속하는 헤프닝이 있기도 하였다. 장군의 단소는 여러 비석과 단소 바로 뒤에 있는 도로로부터 단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된 외벽, 단소주변에 잡초하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관리된 잔디 등 어느 묘소보다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었으며, 이는 천안 전씨 문중이 조상인 장군을 기리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내 자신부터도 조상들의 묘소에 기껏해야 명절을 비롯해 한손에 꼽을 정도로 성묘를 가면서도 매번 귀찮아하고 반강제적으로 갔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자신도 전봉준 장군처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되는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단소 앞에서 다시금 마음을 갖춰먹고서 다음 답사지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제2구역의 견학장소가 동학 농민혁명운동의 주역이셨던 전봉준장군에 대한 유적지였다면 다음으로 답사한 제3구역은 동학 농민역명운동의 전반적인 흐름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황토현 유적지였다. 전봉준 장군의 단소로부터 자동차로 10여 분간 이동하여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동학 농민혁명 기념관' 이였다.2004년 5월 11일 개관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은 전시관과 교육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와 정신의 선양 장소로 활용 되고 있다고 한다. 총면적은 174,146㎡(기념관 172,602㎡, 교육관 1,544㎡)먼저 교육관은 전통 초가형으로 전시관과 함께 준공된 교육관은 세미나실, 강의실, 대강당(283석)등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각종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역시 전통 초가형으로 만들어진 전시관은 사무실, 수장고, 기획전시실, 1· 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우스나 터치스크린을 통해서가 아닌 허공에 손을 움직여 영상을 조작하는 '아이오포인터 시스템' 을 시작하여 놀이동산에서나 볼수 있는 목마인형을 타고서 동학혁명 유적지를 가상체험해 보는 시스템 등등 여러 체험공간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 이였던 체험공간은 전봉준 장군이 일본군에게 재판심문을 하는 과정을 다룬'애니메트로닉스'이였다. 정말로 볼 것도 많았고 체험을 통해 몸소 느껴봄으로써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좀 더 한발 더 다가 갈수 있는 좋은 경험 이였던 것 같다.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황토재 전적지는 1894년 5월(고종 11년)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최초로 크게 승리를 거둔 전적지로 동학혁명기념탑을 비롯 전봉준장군의 동상과 사당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 광장, 주차장을 갖추고 있었다. 1987년에 전봉준장군상 및 동학농민군의 부조물이 건립되었으며 백산 창의문 중에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중략)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지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라는 동학농민군의 그 때의 함성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91년에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사당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장군과 동학농민군 참전제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황토현 전적지 사적 제295호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이곳은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중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서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전라감영)과의 첫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싸움터이다. 조선 고종31년(1894년) 4월7일 새벽에 인근 고을의 농민군과 함께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는데 이는 동학농민군의 혁명운동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높아져 정읍, 흥덕, 고창 등 각 현으로 그세력이 확장되었다. 1987년에 전봉준장군상 대칭의 중심에 수직으로 우람하게 선 조형의 상보다, 수평의 형상으로 농민군의 뜻을 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같은 황토현 유적지에 있는 전봉준장군 동상은 5.6미터 되는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청동으로 주조하여 만든 2.7미터 높이의 동상으로써, 오른손을 불끈 쳐든 모습으로 우람하게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전봉준 장군 동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군의 모습 중에 머리 부분이 맨 상투의 모습인 것을 쉽게 알수있다. 이는 동상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 어떤 상황의 사진을 모델로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아래의 사진자료에서 보는바와 같이 '압송당하는 전봉준'으로 알려진 왼쪽의 사진처럼 머리는 맨 상투의 '죄수' 모습인 데 반하여, 몸체는 오른쪽 사진의 백산에서 격문을 낭독하는 농민군 '지도자'의 모습이다. (※ 사진 인터넷 참고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7819))동학농민혁명사 동학농민 유적지 답사 INDEX또한, 동상 뒤쪽에서 좌우로 날개처럼 동상을 감싸고 있는 농민군 부조의 그림(아래 그림참고)을 자세히 살펴보면, 농민군 모습 어디에도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들고 목숨 걸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표정은 찾아볼수 없고, 마치 도시락을 싸들고 소풍가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각의 표현력의 부족해 보였다. 위의 신문기사의 내용과 같이 이렇듯 역사의식을 전혀 반영되지 않은채, 오로지 형식적으로 손재주만 발휘하기에 성급했던 위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이는 해석의 차이일수도 있지만 후대에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우리의 근대적 시민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라면 기왕이면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기 전에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과 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작품작업에 심열을 기울였다면 좀 더 완벽하고 훌륭한 기념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을 쓰리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how}
지역사회와 향토문화 REPORT- 우리지역의 역사적인 사건 이리역 폭발사고 -이리역 폭발사고 대체 어느정도 였을까?“이리역 폭발사고”는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에 일어났다.지금은 익산시로 바뀐 이리시는 당시 인구 13만의 조용한 작은 도시였다.특히 폭발사고가 발생한 그 순간은 많은 시민들이 집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다투는한국과 이란 축구대표팀간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천지가 진동하는 폭발음 소리와 함께 도시는 암흑과 공포,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하고 말았다.인천에 있던 한국화약에서 화약 30톤(다이너마이트용)을 싣고 광주로 가던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 대기하고 있던 열차가 폭발한 것이다.정확하게는 다이너마이트용 화약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흑색화약 3상자 등 도합 30.28톤당시의 이리시 주민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게 되면 얼마나 참담한 광경인지 느낄 수 있다.`쾅''하는 대형 폭발음은 약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졌고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는 것이 이리시민들의 증언이다. 당시 6살이었던 소설가 김남중(33)씨는 최근 발간된 `기찻길 옆 동네''(창비 간)라는 어린이소설 속에 당시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이리역 폭발사고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어린 눈으로 보고 묘사한 사고 현장과 당시 피해상황이었지만 상황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당시 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던 김남중씨의 경우는 그래도 `간접 피해''지역에 든다.직접 피해지역에 살았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리역 바로 앞 창인동에 살았던 박정근(71)씨의 증언은 더욱 생생하다. 창인동은 역전일대여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의 하나. 당시 역 앞에서 작은 여인숙을 운영하던 박씨는 그 날 밤 노모와 세 아들, 부인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쾅하는 폭발음이 들리더니 순간적으로 전기가 나갔어요. 잇따라 벽이 넘어지고 유리파편이 튀는 등 집은 거의 완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죠. 저는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행히 씨는 저녁식사도중 쾅하는 소리와 함께 전깃불이 나가고 집이 무너져 30여분 동안이나 흙더미속에 갇혀 구조대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와보니 4살 먹은 아들은 죽어있었다고 말했다. 또 이리시 중앙동에서 TV상을 한다는 노병조(34)씨는 거래처에 수금을 나갔다가 자전거를 타고 이리역에서 150m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쾅하는 폭음의 압력 때문에 자전거와 함께 4m정도까지 떠밀려 넘어졌다고 밝혔다”.당시 피해규모는 우리나라 폭발사고중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이 사고로 59명이 숨지고 중상자 185명, 경상자 1천158명 등 모두 1천402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주민들 외에 근무중이던 철도 공무원들도 모두 16명이나 숨졌다.또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이내의 가옥 등 건물은 완전히 파괴됐고 반경 1㎞이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갔으며 반경 8㎞이내의 유리창까지 파손됐다. 완파된 건물이 811동, 반파 780동였고 경미한 피해를 입은 건물은 6천여동이었다. 이재민 수는 1천674세대, 7천873명에 달했다.피해지역별로 볼 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은 이리역 부근의 창인동과 모현동 일대였다. 특히 주로 서민 주거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는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으며 객화차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구내에 있던 객화차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고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천650m가 파손됐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이리역 다음 역인 부용역에 근무했던 정우수 현 이리역장(55)은 “폭발력이 얼마나 셌던지 현장에서 700m 떨어진 시내 우리 집앞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왔었다”고 말했다.이리역 폭발사건 사고 현장 사진이사건을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사고 원인은 어처구니없는 인재였다.당시 수사당국의 사고원인 발표에 로 이어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화약회사 호송원의 허술한 안전의식과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구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로 통과시켜야 하는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리역 등 총체적인 `안전 불감증''이 빚은 사고였던 것이다.호송원 신무일씨는 당시 수사과정에서 “인천을 출발해 이리까지 오는데도 무려 22시간이나 걸렸고, 이리역에 도착해서도 화차배정을 받지 못해 하루 동안 역구내에 대기하고 있어 화가나 술을 마셨다”고 진술했다. 술을 마신 신씨는 화약종이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다가 화재가 나자 진화에 실패하고 도주했다가 붙잡혔다. 위험물질을 운반하면서 호송원 1명이 책임졌고 역 당국도 `목적지 직송원칙''을 어기고 구내에 장시간 대기시킨 점 등이 모두 문제로 드러났다. 철도운송 제46조는 ‘화약품의 운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로 운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이 사고 책임을 물어 당시 한국화약 신현기사장을 비롯해 화약회사, 철도청, 대한통운 관계자 등 7명과 신무일씨 등이 무더기로 구속됐고 신무일씨는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이사건을 조사하면서 한가지 또 흥미있는 기사거리가 있었다.이리역 폭발사고는 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와 가수 하춘화(49)씨간의 사연으로도 유명하다.당시 22살의 인기절정이던 가수로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관객 500여명을 두고 공연중이던 하춘화씨는 폭발로 부상을 당했다. 또 함께 공연중이던 이주일씨는 하씨를 업고 병원으로 옮겨 치료토록 한 일화는 유명하다.그때 신문에는 하씨가 실종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으며 극장 주인 등 10여명이 숨졌다. 이 사고와 관련 하춘화씨와의 인터뷰를 싣는다.▲ 당시 사고순간을 설명해 달라.이번에 발생한 룡천역 사고와 비슷하다. 당시 나는 콘서트중이었다. 9시에 공연이 시작되자 오프닝 공연으로 히트곡을 10여분 부르고 다음 공연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분장실로 들어갔다. 당시 11월이었기 때문에 쌀쌀해 나는 난로를 쬐고 있었고, 내 개인 전속 사회자였던 이주일씨는 무대북관계가 긴장국면이었잖은가. `이건 북한의 침략이구나'', `폭탄이 또 터지면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지붕이 무너진 이후 상황은폭발소리와 함께 정전이 되고 암흑으로 변했다. 당황한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였다. 어둠속에서 이주일씨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소리에 서로 생사를 확인한 뒤 이주일씨가 나를 끌고 더듬더듬 밖으로 나왔다.극장 밖으로 나온 뒤 극장과 외부 사이에 있는 담벼락으로 이주일씨가 먼저 올라갔다. 담 위에서 나를 끌어 올린 뒤 이주일씨가 먼저 뛰어내리고 나한테 뛰어 내리라 했지만 무서워서 못했다. 그러자 이주일씨가 자기 머리를 딛고 내려오라고 해 그렇게 했다.▲ 알려진 바로는 이주일씨가 업고 탈출했다고 하는데그랬다. 담을 넘는데 성공하자 이주일씨는 자기 등에 업히라고 했다. 나는 당시 긴 치마를 입고 있어서 걷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등에 업혔는데 이주일씨가 자꾸 넘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 어떤 건장한 청년이 다가와 “누구냐”고 묻자 이주일씨가 “하춘화씨다”고 하니까 그 청년이 “업히라”며 나를 업었다. 혹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주일씨는 그 남자 팔짱을 끼고 따라왔다.우리는 근처에 있던 숙소인 호텔로 갔다. 그 곳에 자가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자가용 지붕도 내려앉고 길 바닥은 온통 하얀 유리조각들로 가득했다. 이미 거리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하고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군의관 윤장현씨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부상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해 화제가 됐던 인물도 있었다.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화제의 주인공은 현 광주 중앙안과 윤장현(54) 원장. 폭발사고 당시 광주 국군통합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 원장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치료해 줬다. 그러나 윤 원장이 당시 그 같은 발빠른 지원활동으로 칭찬을 받았지만 사 병원에서 숙식하며 지내고 있었다”며 “사고 당일도 부대 내에 있는데 텔레비전을 통해사고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소식을 듣자 마자 `이건 어떻게든 출동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전북이면 광주 통합병원 지원 위수지역이어서 `우리 관할인데''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군인정신이 바짝 들어있었고 산악인 출신이라 현장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는 설명이다.그는 “곧바로 병원장을 찾았으나 연락이 안되고 당직에게 출동을 건의했더니 지휘관 지시가 없다고 갸우뚱 했다. 안되겠다 싶어 `나쁜 일 아니니 나 혼자라도 가자''고 생각하고 위생병과 간호장교 20여명을 뽑은 뒤 장비와 함께 현장으로 내달렸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한 밤중에 현장에 도착한 윤 원장은 남성고 강당에 진료반을 차리고 곧장 파편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생겼다. 지휘관에게 보고도 없이 병력과 장비를 빼내 이동해 버렸으니 병원에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윤 원장은 “당장 철수하라며 호통을 쳐서 `알았다''고 철수준비를 하려는데 느닷없이 군 고위 관계자들이 밀려들었다. 군사령관, 참모총장 이런 분들이 오더니 `초동출동을 잘 했고 환자를 치료하느라 정말 고생했다''며 격려를 했다. 상황이 반전돼 버린 것이다”고 말했다. 가까운 논산지구병원에서도 오지 않았는데 멀리 광주에서 왔으니 당연한 칭찬이었던 셈이다.결국 현지에 의무부대까지 차려지고 윤 원장은 그로부터 3개월 동안 그곳에서 더 활동했다.그는 “나중에 훈장과 표창이 내려오고 요란했는데 장기 근무자들에게 양보했던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폭발사건이 난 후 전국민 온정의 손길 민관군 복구이리역 폭발사고로 한국화약 신현기 사장을 비롯해 한국화약 관계자 및 철도청, 대한통운 직원 등 7명이 무더기로 사법처리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대부분 형이 감량돼 중형을 선고받은 이는 없었다.다만 폭발사고의 주범인 신무일(당시 36)씨만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이리역 폭발사고후 복구과정은
경영정보 시스템 미국 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IntroductionManagement Information System미국 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1 조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GM사크라이슬러사문 제 점해결 방안정보 기술☆ 발표 내용 ☆Part 1. GM사 문제☞ GM사의 문제점 ☞ GM사의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Part 1. GM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GM사의 문제점☞ GM사의 문제점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 소비자들은 미국차 보다 일본차가 품질과 디자인이 앞선다고 인식 점차 많은 사람들이 미국차보다 일본차를 선호하기 시작함. 그결과 GM의 시장점유율은 1960년대 52%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35% 하락하였음. - 1992년 기준으로 자동차 1대당 인력비용을 살펴보면 포드에 비해 무려 40% 생산성 떨어짐.자동차 생산업체자동차 1대 생산 인력비용생산성 분석GM$2,358GM은 포드에 비해 40%생산성 저하크라이슬러$1,872포드$1,563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GM사의 문제해결방법☞ GM사의 문제해결 방법GM사는 비효율적인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제조 및 관리정보시스템들을 통합목적으로 정보서비스 전문기업 인 EDS(Electronic Data Services) 인수 EDS는 자체에 딸린 5개의 컴퓨터 센터와 GM의 34개의 컴퓨터 센터를 21개의 통일된 정보처리 센터로 통합 정리하여 수백 개의 상이한 네트워크들을 세계에서 기업전용 디지털 통신네트워크로 대체하였으며 기업 경영 혁신을 수행 그러나 일본 자동차 업체들과 유럽 자동차 업체들의 도전으로 GM의 수익성은 적자 기록 1992년 존 스미스 회장을 임명 스미스 회장은 1년 반만에 1992년 235억달러 적자에서 1993년 25억 달러의 흑자로 반전① 부품의 공통화를 통하여 여러 자동차 제를 이룩할 수 있었다. ② 그 결과 92년~93년 두해동안 40억달러 절감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① 신형 자동차와 트럭 제품의 목표 고객 계층을 수립 - 고객의 수입, 나이, 운전습관 등 26개로 항목으로 세분화 ② 세분화된 고객계층에 맞춘 디자인 혁신 시도 - 세분화에 따른 비용 증가할 수도 있으나 부품과 엔지니어링의 표준화로 생산시간을 반으로 단축 - 세분화된 고객계층에 맞춘 새로운 디자인으로 인해 1997년 옵즈모빌은 과거 1 대 판매 시 2000달러 손해 보던 것에서 1800달러 이익으로 전환.☞ 표준화를 통한 원가절감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GM사의 문제해결방법☞ 고객계층 세분화 세분화된 고객에게 매력 있는 디자인 추구① 생산, 엔지니어링, 판매, 마케팅 재무, 인력, 물류, 구매, 홍보 등 모든 분야의 경영자 14명이 참석하는 전략이사회를 구성하고, 상정안건을 14명의 시각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함. ② 디자인 과정부터 부품의 호환성, 시장성, 엔지니어링 개념을 반영할 수 있도록 디자이너, 엔지니어, 마케팅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디자이너 센터를 창설함. ③ 이익센터 개념을 도입하고 재무기능을 이곳에 집중하여 자원배분, 이전가격, 가격결정 등이 이익센터의 수익성을 반영해서 이룩될 수 있도록 기획능력을 높임.① 북미지역의 신모델 개발능력과 해외생산 능력을 보강함. ② 1999년 북미사업부는 한해에 14개 모델 출시라는 업계최다기록 수립☞ 조직혁신을 이룩했다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GM사의 문제해결방법☞ 세계화 전략을 추구했다.① 개별 고객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서 “온스타”를 포함한 새로운 서비스 개발 ② GM에서는 21세기 생존전략으로 '스피드 경영'을 채택하여 디지털 경제시대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고객의 욕구를 신속하게 반영할 수 있는 '스피드 경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여 이 항목들을 추진하고 있다. - 세계적인 생산시스템 통합, - 플랫폼의 축소, - 고객 넷 스피드로 움직이는 '첨단 인터넷 서비스 기업'으로 전환을 하고 있다.☞ 고객 만족주의 와 고객서비스 개선.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GM사의 문제해결방법Part 2. 크라이슬러사 문제☞ 크라이슬러사의 문제점 ☞ 크러이슬러사의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 ☞ 크라이슬러 JIT(Just In Time)도입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Part 2. 크라이 슬러사람들이 사고 싶어하고, 즐겁게 운전할 수 있으며 다시 갖고 싶은 차를 만든다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GM사의 문제해결방법☞ 크라이슬러사의 문제점1980년 말, 크라이슬러는 엔진개발과 시장대규모화에 대한 대응과 국내시장 침체에 대비하여 글로벌 시장을 개발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년간 수십만에 달하는 판매기회를 놓쳤다 경쟁사인 포드사의 토러스나 혼다사의 아코드와 같은 차와 경쟁할만한 중가, 중형의 모델 부재로 시장점유율이 낮았다는 것이다.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크라이슬러사의 문제해결방법☞ 크라이슬러사의 문제해결 방법- 1980년대 경영위기에 처해있는 크라이슬러사는 비용을 절감 및 재고회전율을 증가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전사적 차원의 공통시스템을 구축했는데, 공통시스템이란 6천개의 딜러 전시장과 25개의 지역사무소와 22개의 부품배송센터와 제조공장 모두에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크라이슬러의 통합시스템은 하나의 작업이 생산, 송장, 부품수요 예측, 부품과 제품의 재고관리 등과 연계되어 생산 및 관리의 효율을 증대시키는 결과.전사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JIT(Just In Time)정보시스템의 도입 시스템 도입효과 부품제고수준이 9%로 낮아짐 재고회전율이 6.38배에서 13.9배로 증가함.6.38배13.9배☞ 크라이슬러사의 JIT 도입이 가지는 의미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크라이슬러사의 문제해결방법매출규모에서는 3위이나 재고관리의 효율성을 나타내는 재고회전율이 가장 높다는 것은 크라이슬러가 JIT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JIT System은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회사에서 이른바 '도요타 생산방식'의 일환으로 전개된 소롯트 생산을 중심으로 한 생산관리 시스템이다☞ JIT System을 구성하는 핵심요소간판(Kanban) 방식생산의 평준화소롯트 생산설비 배치다기능공 제도Part 3. 크라이슬러사에 정보기술☞ JIT 도입과 배경 ☞ JIT 정보기술의 활용 ☞ JIT 정보기술의 효과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Part 3. 크라이슬러사의 정보기술 JIT(Just In Time)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크라이슬러사의 정보기술 JIT(Just In Time)☞ JIT(Just In Time)의 배경미국 자동차 산업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에 들어와 일본과 유럽 자동차 업계의 북미시장진출과 시장잠식으로 위협을 받게됨. 미국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1981년 미국 자동차기업 3사(GM, FORD, 크라이슬러)는 “AIAG(Automotive Indust Action Group)” 비영리 조직을 설립하여 자동차 3사와 부품공급 업체들간 유기적인 협력과 물류관리혁신을 통하여 일본 자동차 메이커에 대한 경쟁력 향상을 도모하고 하였다.FORD GM 크라이슬러비영리조직 AIAG 설립IOS Inter Organizational System 표준화 추진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JIT(Just In Time)의 활용☞ JIT 이전의 부품공급체계크라이슬러는 자동차와 트럭의 생산에 소요되는 27,000여 종류에 30%만 자체생산 나머지 70%를 1,600개의 협력업체로부터 공급받는다. 조립부품 중 아웃소싱의 비율이 높기 때문에 원활한 자동차 생산은 협력업체와 조립공장간 부품공급의 효율성에 달려 있음 JIT를 도입하기 이전의 크라이자는 본사에 연락 후 본사는 다시 해당 협력업체에게 필요한 부품의 인도를 요청하는 주문을 보내 재고를 확보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JIT(Just In Time)의 활용☞ JIT 이전의 부품공급체계작업재고순환재고인도재고여유재고작업재고협력업체 재고조립공장(크라이슬러) 재고JIT 이전의 부품 재고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JIT(Just In Time)의 활용☞ JIT 이후의 부품공급체계인도재고순환재고작업재고작업재고여유재고협력업체 재고조립공장(크라이슬러) 재고JIT 도입 이후 재고의 변화순환재고작업재고작업재고재고비용 감소 거래비용감소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JIT(Just In Time)의 활용☞ JIT 상에서의 EDI 정보흐름협력업체크라이슬러조립공장협력업체 은행물류정보공급자 인도일정부품인도 통지부품공급수령통지응용통지CTX온라인 지불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JIT(Just In Time)의 활용☞ JIT 협력업체 비중협력업체 수부품수부품가치운송비용5531,25011,51115,08979.5%20.5%67%25%JITNON-JIT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활 JIT(Just In Time)의 활용☞ JIT와 IOS의 효과▷ 크라이슬러는 JIT를 도입하여 자동차 부품 제고비용 절감 조립공장내 여유재고제거 부품재고 평균 보유시간 5일 - 2일로 줄임 (약 10억불정도 재공비용 감소) ▷ 협력업체와의 정보교환을 IOS 네트워크를 통해 자동화함 인건비와 거래비용의 감소라는 부가혜택 달성EDI 도입거래당 5불 절감연간거래건수 1700만건비용절감 8,500만불▷ 크라이슬러의 연간 200,000만대의 생산능력을 갖춘 조립공장을 대상으로 한 JIT와 IOS효과연간 200,000만대 생산 공장JIT, IOS차량한대당 100불 절감 효과경영정보 시스템 미국자동차 산업의 회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역w}
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INDEX모악산 금산사의 장관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Introduction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 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 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 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 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금산사 창건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홍예문(虹霓門)금산사를 들어서면 처음 나오는 문화재인 홍얘문이다. 처음에는 문화재 인줄 모르고 그냥 지나쳤는데, 문 또는 석성문, 견훤문 이라고도 하며 금산사 사찰에 들어가는 관문으로써 예로부터 금산사를 수호하던 성문이다. 금산사에 한때 유폐되었던 후백제 견훤왕 당시인 서기 935년경 금산상성과 함께 전면이 12척 측면이 6척 높이가 15척인 대형 아치형 성문으로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일주문(一柱門)금산사를 들어서면 처음으로 나오는 문은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은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상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치미 담겨있는 문이며 현재있는 일주문은 2004년에 신축하였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해탈교(一柱門)사찰에서 독립된 문의 형태로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금강문, 해탈문, 불이문, 천왕문 등이 있다. 금산사에는 해톨의 의미를 지닌 '들어서는 지나는' 해탈문이 아니라, 건너는 의미를 지나고 해탈교로 되어있는거 같다. 해탈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작은 물 흐름을 보며 해탈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짧은 만남을 가져보는 시원함이 색다르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금강문(金剛門)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교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 한다. 죄측에는 나라연금강(아금강)을 우측에는 코끼리의 100배 힘을 가졌다는 밀적금강(홍금강)이 있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금강문(金剛門)나라연금강 나라연은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 백만배나 된다고 합니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아쉽게도 유적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망을 쳐놓은 것 같았으나 유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단점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밀적금강 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면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다. 어렸을 적에 다른절에서 보았던 수호신들보다는 덜(?)무서운 것 같았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서남북 네곳을 지키고 있다. 안에는 지극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이 있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천왕문(天王門)증장천왕 방위로는 남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지니고 있다. 노한눈이 특징이며 천공의 위치는 유리타이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푸는 서원을 세웠다.광목천왕 방위로는 서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오른손은 삼지창 왼손에는 보탑이 있다. 천공의 위치는 백은타이며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도심을 일으키게 하는 서원을 세웠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천왕문(天王門)지국천왕 방위로는 동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주먹을 쥐고 있다. 천공의 위치는 황금타이며 선한 이에게는 복을 악한이에게는 벌을 내리는 서원을 세웠다다문천왕 방위로는 북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손으로는 비파를 켜고 있다. 천공의 위치는 수정타이고,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제도하는 서원을 세웠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당간지주(幢竿支柱)당간지주(幢竿支柱) 사찰에서는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는데 이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간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지주라 한다. 금산사 당간지주는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에서도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사찰에 깃발을 달아두는 곳이라고 하였는데 아쉽게도 깃발이 달려있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어떤식으로 깃발이 달려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아 아쉬웠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보제루(菩濟慺)보제루(菩濟慺)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금산사가 승병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세워졌다. 이 후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 크게 볼거리는 제공하지 않는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대적광전(大寂光殿)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오여래(약사여래불, 노사나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육보살(월광, 일광,문수,보현,관음,대세지)을 모셨다 대적광전이 화재이전에는 보물 476호 였는데 문화재는 복원을 시키게 되면 보물,국보에서 제외된다고 들은 것 같은데 화재가 나서 재건을 하여서 소중한 문화재를 잃은 것 같아서 아쉬었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범종각(梵鐘閣)범종각(梵鐘閣) 39년 건립된 종각은 미륵전 전면에 위치 했었으나 일제때 법종이 징발 당하고 종각만 있다가 78년 범종을 주조했으며 83년 현위치로 옮겨 신축하였다. 범종각에서 울려 나온 소리는 곧 우리들 일심의 작용이요, 부처님의 위대한 작용을 상징하 한 것이다. 그 소리는 스스로를 밝히고 중생을 교화하는 크나큰 울림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다. 문화재를 일제시대에 많이 훼손당한 것도 억울한데 우리지역의 있는 문화제도 징벌 당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대장전 大藏殿(보물 828호)대장전 大藏殿(보물 828호)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탐으로 창건 당시엔 미륵전의 가운데에서 우측에 세원 진 목탐이었다. 조신인조때 수문대사가 목탑 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으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 이름이 부쳐졌고 1922년에 현위치로 옮겼다. 지분 위에는 통일신라 때 목탑의 양식인 복발 (탑의 맨 윗 부분에 바리때62호미륵전 彌勒殿 국보 62호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진표율사가 건립하고 정유재란때 소실 된 것을 조선 인조때 수문대사가 복원한 후 39척의 미륵불상과 29척의 대묘상보살과 법화림보살상을 모셨다.미륵전은 국보 62호 이며, 금산사에서 최고의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실내안은 복원 중이라서 제대로 된 관경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았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미륵전 彌勒殿 국보 62호미륵전안에 있는 불상은 현재 복원작업 중이여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문화재를 복원하고 재건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빠른시간에 복원이 안되고 오랜시간동안 방치가 된다는 사실이 아쉽다.미륵 삼존불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오층석탑 五層石塔 (보물 25호)미륵전 우측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려 경종4년(979)에 시작하여 고려 성종 원년에 완성되었다. 석탑의 높이는 7.3M이고 1971년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금산사 5층 석탑은 고려 초기에 옛 백제 땅에서 유행했던 백제계 석탑의 대표작이다.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석등 (보물 828호)육각다층석탑(보물 27호)석련대 (보물 23호)방등계단사리탑 (보물 26호)금산사 문화재방등계단사리탑 (보물 26호)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지역사회와 향토문화 금산사 답사 기행문 TRAVEL금산사 기행을 마치며….금산사 답사 기행을 마치면서… 수학여행 이후에 정말 오래간만에 온 답사였지만 많은 것을 얻고 가는 것 같았다. 문화재를 보호 하는 것도 좋지만 과도한 보호 및 복원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되고 방치되는 것이 문화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예술과 철학 예술과 외설의 차이.. INDEX예술과 외설의 차이는……..과 목 명 : 예술과 철학 담당교수 : 전 영 하 교수님 학 부 : 정보 전자상거래 학부 학 번 : 20071517 이 름 : 강 대 현예술과 철학 예술과 외설의 차이.. INDEX예술과 외설의 차이..예술 혹은 외설 단지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동일한 사물이 예술이 될 수도 외설이 될 수도 있다. 한번 틀어진 시각을 가지면.. 다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예술과 철학 예술과 외설의 차이.. INDEX예술과 외설의 차이..예술 혹은 외설 단지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이다. ☆ 예술과 외설 단지 위 그림에서와 같이 상하를 뒤집어서 보았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그림이 된다. 사람의 예술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리고 마음가짐에 따라서 예술은 외설로 외설은 예술로 바껴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동일한 사물이 예술이 될 수도 외설이 될 수도 있다. ☆ 예술가 외설가 그가 의도하였던지 의도 하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관람하는 관람자가 어떻게 옆에 있는 사진을 보게 될지는 모른다. 저사진의 경우 보는 각도에 따라서 완전히 극과 극이 된다. 저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가 저 각도까지 생각하고 찍었다면 외설로서는 성공한 것 같다. 하지만 예술로 생각한 사람들은 잘못 생각 한것일까? 한번 틀어진 시각을 가지면.. 다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 ☆ 옆에 있는 사진을 예로 들자면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는 나무와 푸른 숲에 관하여 얘기 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사진을 본 사람들은 이것의 외설로 보게 된다면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한번 옆에 있는 사진을 보고 외설이라고 느끼게 된다면 다시 원상태의 사진으로 돌려서 보게 된다고 해도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예술과 철학 예술과 외설의 차이.. INDEX예술과 외설의 차이..예술과 외설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는 중에 이러한 사진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거 머야~! 낚였네.. 야동 사이트 광고네.. 이렇게 생각하고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려 하는데 밑에 있는 글귀가 보였다. Rien n'est nouveau sous le soleil 태양도 수억개의 별 중 하나일뿐 태양이 유별나지 않으면 당신은 무얼 제대로 볼 수나 있겠어?“ 켈리 작가의 의도를 보니 여성의 누드 사진이 아닌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게 됐다.예술과 철학 예술과 외설의 차이.. INDEX예술과 외설의 차이..박기민 [수정] 빨고싶다 쏘 [수정] 나도 빨고싶다 동이남푠 . ㅇ [수정] 하나 더 올려줘요... er [수정] fefefe 덕 [수정] 별모양 없는걸로 부탁드립니다 jin [수정] 참잘했어요 .. 박정근 다리밑에 있는 아라키책이 묘한분위기...^^ 쫙쫙 [수정] 별을 지워주삼... 이왕이면 쫙 ~~~~ 제발.... [수정] 제발 No STAR / 이왕이면 더 쫙 각도 증가... 더 많은 사진 부탁해요 하지만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사진의 댓글은 이렇게 수준 이하였다.. 적극 우리가 듣고 있는 예술과 철학 수업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 나만 이사진의 그 글귀를 본 것일까? 아니면 인터넷의 익명성이라는 것 때문에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의 아쉬울 뿐이였다. 이렇게 작가의 의도를 이해못해 다르게 예술은 외설이 되는 현실이 안따까울 뿐이다.{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