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농업을 중심으로 한 폐쇄사회로서 상업과 공업을 억제하고 무역을 제한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후기 대동법이 실시되고 금속화폐가 유통되면서 상품, 화폐 경제는 한층 가속화되었으며 국내 상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대외무역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오직 대마도 사람에게만 무역을 허락했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 상인과 동래 상인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부산진 부근에 왜관을 지어 무역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대마도 상인과 동래 상인은 매달 여섯 번 왜관의 개시대청에 모여 무역을 상담하고 수출과 수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상업세를 피하기 위한 상인들이 왜관의 각 방에 들어가 몰래 거래를 하는 밀무역을 선호하면서 개시대청에서 무역을 하는 관계는 크게 무너졌다. 이는 외채를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상업세가 제대로 거두어지지 않아 동래부와 호조의 수입이 감소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선과 대마도는 왜관의 각 방에서 이루어지는 무역과 외채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임진왜란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한일 간의 통교가 재개 되었을 때 조선정부는 왜관 주변에서 또 다시 잠상(밀무역)이 횡행하게 될 가능성을 크게 염려했다. 조선후기 잠상은 그야말로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 양국에게 있어서 금압의 대상이 되었고 그렇기에 때문에 적발시에는 극형이라는 중벌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잠상의 형태와 장소에 따라 처리에 임하는 양국의 태도와 중요도의 인식에는 적지 않은 격차가 존재했다.한편, 임진왜란 이후 무역이 10년 만에 다시 열리고 국교 재개의 요청은 먼저 일본 쪽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도요토미 사망 이후 새 정권이 일본 내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도 일본을 같은 하늘 아래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사회를 재건하면서 남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과 수교를 재개했다. 국교 재개를 앞당기는 데에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마도가 큰 몫을 담당했다. 척박한 섬인 대마도는 쌀의 부족으로 조선으로부터 쌀을 조달했다. 이에 따라 대마도는 조선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으며 단절된 무역의 복구는 대마도 사람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한일관계에 있어서 대마도는 대일외교의 창고로서의 역할, 조선 남쪽 번병으로서의 역할, 조일 무역의 중개지로서 역할 그리고 대마도 및 일본의 국내정세에 대한 정보수집 장소로서의 역할을 행했다.
1. 전두환 정권 이전의 한미관계에 대해서 논하시오.한미동맹의 갈등은 1968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남북한의 긴장상태에 대해서 미국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동맹관계의 결속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상호신뢰의 확인이었는데,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을 통해서 한미 간의 인식과 해결 방법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노출되면서 한미관계의 상호신뢰가 약해졌다.한편, 대통령이 된 닉슨은 아시아 국가들은 핵공격을 당한 경우를 제외하면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에 닉슨은 군사지원을 통해 주한미군의 수를 줄이고자 했고 박정희는 미국의 지원을 통해 자주국방을 이루려고 했다.닉슨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핵심은 ‘데탕트’였다. 이것은 미국이 소련?중국과 경쟁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제한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대경’을 통한 봉쇄에서 ‘협상’을 통한 봉쇄로 정책상의 전략적 수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미국이 중국과의 협상을 위해 타이완을 포기한 것은 박정희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지금까지 추진하던 자주국방과 더불어 핵무기개발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이것을 용인하지 않고 한국의 계획을 막으려고 했다. 박정희는 이 계획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끈질긴 반대로 박정희는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여기에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위험해졌다. 카터는 자신의 선거공약에 따라 일방적인 주한미군철수를 감행하려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인권유린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카터의 행동은 동맹국인 한국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으며 이로 인해 한미동맹은 심각한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철수는 미국 국내에서도 강하게 비판을 받아 실현되지는 않았다.뿐만 아니라 카터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정확한 도착 시간을 알리지 않아 박정희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고, 도착하자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바로 미 제2사단으로 떠나버리는 등 박정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다음 날 박정희는 카터에게 40분 동안 일방적으로 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시아안보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이러한 박정희와 카터의 만남은 동맹국 정상들의 정상적인 만남이 결코 아니었다. 이는 둘 사이에 숨길 수 없는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카터 행정부 시기의 한미동맹관계는 갈등과 불화의 연속이었으나 박정희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로날드 레이건의 대통령당선은 한미동맹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 전두환 정권 이후의 한미관계에 대해서 논하시오.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 미국은 한국에 대한 확고한 방위태세를 보여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한편 대통령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보면서 ‘힘을 통한 평화’라는 기치 아래, 대소 군사력 우위 확보를 국가정책의 우선순위로 정했다. 그리고 레이건은 취임 후 최초로 전두환의 미국방문을 승낙했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기 소원했던 한미관계가 질적으로 개선되고 특히, 한미군사동맹이 굳게 결속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전두환의 방미 이후, 한미 간의 동맹자적 안보협력체제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실시된 ‘팀스피리트’훈련을 통해 미국은 한국의 국가안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와 더불어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한국의 안보는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에 필수적이며 이는 미국의 안보에도 필수적이라며 미국의 핵우산이 한국의 안보를 확실하게 담보할 것임을 천명했다. 따라서 신 냉전체제가 새롭게 구축되고 있었던 1980년대 초반 반공의 투사들인 레이건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유대관계가 돈독해져 가면서 한미동맹관계도 자연히 강화되어갔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해 갔으며 한국인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의 주장을 내세워 한국인들을 그들의 침략전쟁에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군대와 경찰 병력을 보내어 한국인의 민족 운동이나 저항 활동을 철저히 봉쇄했으며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여 한국인을 황국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황국 신민화 정책 즉,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책을 실시하게 위해 일제가 우리나라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살펴보도록 하겠다.먼저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동화주의를 표방했다. 일본제국은 조선을 식민지로서 취급하지 않고 하나의 지방으로 생각하여 조선인을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완전히 통합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다. 경복궁, 창경궁, 원구단 파괴 이외에도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장충단이 있다. 이는 한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세웠으나 일제는 이곳에 동상을 세우고 공원화함으로써 장춘단에 얽힌 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 그리고 관동대지진의 발생과 함께 무고한 조선인이 무참히 죽어간 사건이 있다. 이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정부의 조직적인 유언비어유포로 인해 테러의 대상이 된 사건이다. / 창씨개명 제도는 유례없는 민족말살정책으로서 일제 당국이 한국민족을 황국 신민화 하려는 방책의 하나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조선인의 성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가족제도를 일본식의 가족제도로 바꿈으로써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려고 했던 것이다. / 그리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군 위안부 문제가 있는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군대에 의해 강제적이고 반복적으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였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 또한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수많은 인적자원을 다양한 형태로 강제동원 했는데 이는 징용과 징병으로 이어졌다. 각종 명목으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장에서는 물론 탄광과 같이 고된 근육작업이 요구되는 곳에 배치되었으며 조선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대량 동원하기도 했다.이렇듯 우리나라에 대한 일제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도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민사관이란 힘의 우위를 정당화시키고 역사의 내적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제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자기들이 해결해 주겠다 라는 식으로 식민주의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1. 육군가치관의 모범적 실천사례(1) 명량대첩의 비밀, 이순신 장군의 전략전술- 이순신 장군의 창안한 인류 최초의 철갑선인 거붑선은 대표적인 창의정신의 발휘나, 이보다 전략전술에 있어서도 탁월한 창의력을 발현하였고 또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고도의 전문성과 창의를 갖추고 주도면밀하게 승리를 기획하고 연출한 군인이였음 이 사례에서 우리는 창의적인 훈련기법과 전술관 공유로 임무형 지휘능력을 구비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함(2) 백의종군하며 국가에 충성한 이순신 장군- 이순신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하였고 이는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이런 이순신장군을 표본 삼아 국가를 위해 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위풍당당한 군인상을 사생관으로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3) 살신성인 부하사랑 강재구 소령- 훈련장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중 박일병이 안전핀을 뽑고 수류탄을 쥔 손을 뒤로 제쳐 앞으로 던지려 했지만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만 실수로 수류탄을 놓쳤고 이를 강 대위가 몸을 날려 수류탄 위로 몸을 던져 부하를 살림(4) 백천간두의위기에서 조국을 구한 백선엽 장군- 사단징의 직위로 직접 공격에 나서는 것은 솔선수범으로 부대원을 감화시켜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사례이며 이를 표본 삼아 솔선수범과 진솔한 부하사랑으로 신뢰를 형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5) 서희 장군의 나라를 구한 용기 있는 담판- 화친을 원하면 속히 내 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한 장수를 서희 장군은 소손녕의 설득시켜 돌려보냄이는 군인에게 용기란 위험을 감수하는 능력과 지혜요, 고통과 실망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임 서희장군과 같은 용기가 샘솟을 수 있도록 평소 많은 노력을 기울여 나가야 함(6) 죽음으로 동료를 구한 이원등 상사- 낙하산을 표지 못한 상태의 김중사를 필사적으로 다가가서 낙하산을 펴주었으나 낙하산의 몇 가닥 줄이 이중사의 완쪽 팔을 후쳐치면서 팔이 부러져 균형을 잃고 무서운 속도로 한강의 두꺼운 얼음위로 떨어짐.전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이원등 상사를 통해 타인을 중하게 여기는 존중의 가치를 뜨거운 전우애로 실천한 살신성인의 표상이 됨(7) 육탄으로 적 자주포를 파괴한 심일 소령- 심 중위는 함께 행동할 5명의 지원자를 선발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적 자주포 포탑으로 기어 올라가 해치를 열고 화염병과 수류탄을 투척한 후 빨리 몸을 피하는 방법으로 2대의 적 자주포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임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용기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용기임(8) 불길 속에서 민간인 구출, 이청길 중사-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사고를 요기 있는 행동으로 막을 수 있었고 이 미담은 후에 마을 주민이 수소문하여 찾은 끝에 알려지게 되었음 이를 교훈삼아 두려움을 알면서도 신념을 갖고 임무를 완수하는 자세가 필요함(9) 발명왕 홍재석 원사- 재치 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군 생활 주변의 물자와 장비를 개선하여 많은 국방예산을 절감하고 군 전투력 향상에 기여한 이 사례에서 우리는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의 창의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을 수 있음2. 육군가치관의 모범적 실천사례를 통한 교훈앞으로 장교가 될 우리 장교 후보생들은 육군가치관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여 군인 기본자질을 함양함과 더불어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여 생활화 할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설명한 실천 사례를 통해 무엇을 위해 복무하고 어떤 군인이 되어야 하며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를 다시한번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또한 본 사례를 교훈삼아 육군가치관이 모든 간부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이며 어느 특정 계급 및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자기반성과 생활화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해야 한다.3. 장교후보생으로 육군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실천방안나는 가장 먼저 장교후보생으로서 육군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실천방안으로 창의성을 개발을 제시할 수 있다. 먼저 창의라는 단어에 대한 용어를 설명하자면 창의란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생각이나 착상으로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려고 하는 사고력을 일컫는 말이다. 창의는 미래의 전장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독창적인 사고력 계발과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도록 힘쓰라"라는 말인 일일신 우일신으로 과거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관행을 혁신하는데 필요한 가치일 뿐만 아니라, 다양성, 역동성의 지식,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하는 기초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창의는 정보, 과학화된 미래 전장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고력, 계발과 일일신 우일신으로 과거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관행을 혁신하는데 필요한 가치이다. 지식,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을 배양하는 기초이다. 창의성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전문지식', 두 번째는 '사고력', 마지막 세 번째는 '하고자하는 동기'이다. 창의성은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접근해 나가는 과정이며 하나의 열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계는 갈수록 세계화와 미래화를 지향하고 있고 더불어 선진 정예군대로 가기 위해서 각 나라들이 많은 정책변화와 제도 등의 조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모든 움직임들도 창의성이라는 것을 모티브로 해서 나오는 것이다. 창의성이라는 밑바탕에 모든 구성원이 임무에 대한 창의적인 마인드와 열린 사고,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발전을 위해 노력해 가는 모습 역시 창의적인 면에서 본받을 만한 요소이다. 아울러 후보생으로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창의적인 후보생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실제로 눈에 보이는 성과적인 창의성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지 재고해 봐야 한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단복에 정전기를 일으켜 먼지들이 덜 달라붙게 해서 단복을 더욱 더 깔끔하게 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단화의 광택이 굉장히 장시간 발현되도록 하는 구두약 성분 제조 등의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도록 여러 가지 면에서 노력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장교든 병사든 간에 직책에 맞는 전문성 구비가 자기 계발의 기초임을 인식해야 하며 항상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자세, 평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부대 개선소요 발굴, 지식 · 정보화 시대에 따른 Mind 및 전문지식 습득,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를 통해 현상을 진단함으로써 부대발전 도모, 자기 계발을 통해 시대에 적응하고 선도하기 위한 노력 경주, 관리개선, 교리발전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전투력 발전에 기여, 창의적인 훈련기법과 정보화 시대에 부합되는 업무방법 적용, 지휘관과의 전술관 공유로 임무형 지휘능력을 구비 할 줄 아는 장교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노력할 것이다.
1. 존경하는 인물이순신 장군2. 인물 소개충무공 이순신장군은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 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고 혼인하였으며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함은 물론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76년 32세가 되던 해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선전관,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가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어 전라좌수영(여수)에 부임하자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사조련, 무기제조, 진지보수 등에 힘썼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하여 이에 대비하였다.3. 업적 및 교훈(1) 이순신 장군의 주요 업적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 20여만은 일사천리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그러나 장군은 5월초 1차 출동 때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0여척을 격파하여 승리한데 이어 5월말부터 6월초에 이르는 2차 출동 때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평양까지 진출한 육군부대와 서해를 통해 연결하려는 적 함대를 한산도에서 기습 대파하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여 안골포해전과 9월초 부산해전 등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1593년 웅천 등의 적 수군을 궤멸하여 남해안의 적을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을 삼았으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594년 당항포, 장문포 등에서 왜적을 소탕한 뒤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보호, 산업장려에 힘썼다. 1597년 왜 간첩 요시라의 간계로 모함을 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받게 되었으나 정탁의 상소로 사면되어 권율장군 휘하에 백의종군하였다가 정유재란 때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되어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랑해전에서 133척의 적함과 대결, 31척을 부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1598년 적선 500여척이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의 수군과 연합, 적군을 기습하여 접전중 12월 16일 새벽 적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2) 생애와 업적을 통한 교훈이순신은 멀티 플레이어형 인재였다. 해전 전문가였지만 육전에도 베테랑이었으며 거북선을 만들고 신무기 개발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정도로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전문가였다. 게다가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로 시작되는 한산도가와 그 외 수많은 시문을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이처럼 능력 있는 리더의 대표적 특징은 멀티 플레이어형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전문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어떤 상황 어떤 문제가 주어졌다고 해도 부하직원들을 침착하게 이끌고 가치를 생산해내고야 만다. 현재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하고 각자의 개성을 지닌 부하직원을 하나로 통솔하려면 현재의 내 분야에만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순신은 청렴결백의 상징이다. 상사가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관사 앞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명령했으나 끝끝내 베어오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함 때문에 파면과 백의종군 등 수 차례의 위기를 겪어야 했지만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가 청렴결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공정성을 발휘하여 부하들의 사기를 높이기도 했다. 즉 전쟁 승리 시 군사들의 전과를 일일이 명시해 단 한사람도 수훈에서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했고 반대로 군령을 어긴 군사는 엄하게 처벌했다. 이순신은 당시 조선의 문무 관리 중 거의 유일하게 청렴한 인물이었고, 군사통제와 전술능력, 충성심과 용기가 실로 기적이라 할 만한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그리고 전쟁에 찌들어 있던 조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묵묵히 추진한 것은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준비였다. 왜군의 침략을 미리 예견한 이순신은 거북선을 만들고 수군을 정예화 하는 일에 주력한 것으로 즉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변화에 맞서 대응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명한 이순신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북선을 만드는 혁신을 단행했고 이로 인해 이끄는 전쟁마다 승리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순신은 왜군의 조총을 연구해 정철 총통을 개발한 것은 물론 아이들의 놀이기구인 방패연을 신호수단으로 활용하는 창의력을 발휘했다. 적재적소에 발휘되는 리더의 창의력은 부하직원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를 선사한다. 그밖에 백성을 자신의 부모, 형제, 자식처럼 아꼈던 따뜻한 인간미, 어떤 상황에서든 굴하지 않는 자신감과 전략가적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싸움터에서 최후를 맞겠다는 프로정신 등이 우리가 이순신에게 배워야 할 리더십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4. 리더십 계발 계획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앞으로 소대장으로서 나의 리더십을 향상시키기 위해 크게 5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경쟁력 있는 소대장이 되는 것이다. 그냥 대충 2년 동안 후보생 생활을 마치고 개 끌려가는 마냥 소대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남들과는 다른 능력을 키워서 장차 야전에 갔을 때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소대장이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책임질 줄 아는 소대장이 되는 것이다. 이는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일을 풀어가는 사람이며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리더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신뢰받을 수 있는 소대장이 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소대장이 되어 갖추고 싶은 자질 중 하나이다. 리더로서 부하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리더가 될 수 없다. 신뢰를 받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나는 나의 부하를 사랑하고 보살피며 인간적인 사람으로서 부하들에게 신뢰를 받는 소대장이 되고 싶다. 네 번째로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소대장이 되는 것이다. 리더라면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창의적인 생각으로 도전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지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이라는 혁신적인 배를 만들며 전쟁에서의 승리의 근원을 만들어내었다. 이처럼 리더는 항상 남들과는 다른 생각으로 항상 생각하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도전하는 정신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impossible이는 생각을 버리고 항상 possible이라는 생각을 가져야겠다. 다섯 번째로 솔선수범하는 소대장이 되어야 한다. 리더가 먼저 하지 않는 한 부하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는 꼭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지금부터 누구에게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리더로서 자질을 서서히 갖추어 나갈 것이다. 또한 위험한 일이나 남들이 선뜻 나서서 하지 않는 일들을 가장 먼저 나섬으로서 내가 꼭 되고 싶은 신뢰받는 소대장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