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 서론Ⅱ. 헤즈볼라의 역사Ⅲ. 레바논 전쟁Ⅳ. 헤즈볼라 평가Ⅴ. 결론① 서론대표적인 이슬람 테러조직으로 일컬어 지는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공식적인 정당이다. 중동에서 가장 서구적이며 개방적인 국가인 레바논에서의,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헤즈볼라의 행보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미 오랜 기간 지속된 갈등은 끊임없는 테러와 종교분쟁을 낳았으며 한국의 동명부대를 포함한 UN군이 분쟁지역에 들어설 정도로 확대되었다.이 글에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끊임없는 테러로 일관하는 헤즈볼라의 역사적인 탄생 배경과 서구세력에 대한 그들의 전략, 그리고 헤즈볼라에 대한 평가를 짚어 보고자 한다.② 헤즈볼라의 역사헤즈볼라는 이란의 호메니이의 무슬림 군국주의 노선에 영향을 받아 1983년에 조직된 정치, 군사조직이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서구의 개입, 종교적 갈등, 레바논 내 시아 공동체의 정치적 동원등의 요인이 탄생의 배경에 있다. 후세인 무사위가 이끌던 이슬람 아말과 다와파티 레바논 지구당이 헤즈볼라라는 이름 아래 병합되었다.종교적 갈등의 배경에는 레바논 내 기독교와 시아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이 종교 갈등은 오랜 기간 레바논 내, 특히 베이루트의 슬럼가를 형성하고 있는 무슬림들이 선진적이고 풍요로운 기독교와 수니 이슬람을 바라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며 발생된다. 이에 그들은 나세르주의, 시리아 사회민족주의당, 바아스당과 교류하며 그들만의 '프톨레타리아 공동체 계급'의식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그럼으로 그들 무슬림을 대표하는 헤즈볼라가 탄생하게 된다.- 참고 : Amal Saad-Ghorayeb - ‘Hizbullah: Politics and Religion’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제거하기 위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했다. 당시 PLO 본부가 레바논에 있었기 때문인데 처음에 당시 레바논 국민들은 이스라엘 군대를 환영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들의 지배적 지위를 탐탁치 않게 느꼇기 때문인데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군은 PLO를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이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명을 학살한 후 마을을 폭격하고 발전소를 파괴했다. 그리고 레바논 남부에 15km의 ‘완충 지대’를 건설하여 그곳에서 눌러 앉는다. 이것에 항거하는 세력이 등장하여 헤즈볼라가 탄생하게 되는 요인을 제공한다. 이때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서 철수 하라는 UN 결의안을 무시했다. 그러는 동안 헤즈볼라는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근래 헤즈볼라가 앞장선 저항 운동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철수하게 된다. 여러 아랍지역으로 퍼졌던 레바논 국민들은 다시 만났으며 타 아랍 국가 국민들에게도 이러한 기쁨은 전파된다.그들은 이스라엘과 싸운것 뿐만 아니라 레바논 내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썻다. 학교와 각종 병원,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재건사업을 펼치는 등 활발한 복지 네트워크 형성에 힘을 쏟아 부었다.헤즈볼라는 이란과 시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1983년의 베이루트 미 해병대 사령부 차량폭탄 공격으로 미군 200여명을 사망시켰다. 1992년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대사관 폭탄 공격사건, 2006년 이스라엘 병사를 납치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이 발발되는 등 서방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펼친다.여기서 레바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헤즈볼라의 이스라엘군 납치에 있지만, 민간인 지역을 무차별 폭격하고 살해하며 분쟁지역화 시키는 이스라엘과 서구의 정책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이후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에서 5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헤즈볼라는 후원세력이였던 시리아가 병력을 철수하자 레바논 회교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엎고 총선에 참여 새로운 연합정부의 일원이 되었다.2011년. 헤즈볼라는 하리리 총리를 암살한 혐의로 유엔 재판소에 회부되었으며, 헤즈볼라가 내세운 나지브 미카티 전 총리가 레바논의 새 총리로 지명되며 정권을 장학하지만 순니파를 비롯한 여러 종파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③ 레바논 전쟁전쟁의 양상이스라엘-레바논 전쟁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006년 7월 13일 이스라엘 육군이 탱크를 이용하여 레바논의 도시를 공격한 사건이다. 헤즈볼라 측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며 다수의 아랍 세계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이스라엘은 연일 레바논 주요거점에 대해 폭격을 개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레바논 피난민들이 타고 있던 민간인 버스를 폭파되는 등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유럽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난민 무단 폭격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으며 미국과 영국측도 유감을 표명했다.전쟁의 목적 (헤즈볼라)이스라엘이 이 전쟁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중동에서 군사, 정치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헤즈볼라, 시리아, 하마스의 연합고리를 깨기 위함이다. 레바논 남부 지역을 공격 함으로써 레바논 내의 무장저항세력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헤즈볼라의 군 전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이스라엘과 미국은 반미로 뭉친 이들 세력을 대 중동정책 추진에 가장 큰 장애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들로부터 여러 가지 테러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기에 국제적인 비난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희생이 다수 발생하는 무리한 군사작전을 펼쳤다.전쟁의 영향력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전쟁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중동에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이란과의 갈등도 심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지구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절대량을 생산하는 산유국들은 유일한 무기인 석유가격 조정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중동 지역의 정세가 불안정할 수록 유가의 불안정성도 커가기 때문이었다.아프가니스탄, 이라크전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이스라엘 대 레바논의 전쟁까지 더해져, 이 지역내의 갈등 구조가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며, 그 발생지역이 확장되어 갈수록 확장되어 간다면, 더 큰 규모의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라크전쟁의 규모를 뛰어넘는, 여러나라가 동시에 개입하는 전쟁이 발생하면, 정상적인 석유수출입이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만큼, 곧바로 지구 반바퀴 떨어진 한국경제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 기필코 이러한 전쟁은 피해져야 했다.전쟁의 결과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수립하였던 목표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헤즈볼라의 무장해재를 원하였다. 헤즈볼라는 군사력이 손상을 입기는 하였지만 그 피해가 미미하고 오히려 정신적인 측면에서 입지가 크게 향상되엇다. 그들의 모든 군사 작전은 당초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목차Ⅰ. 러시아의 중동정책① 러시아의 대 중동정책 전개② 정책 목적과 전개 특징③ 러시아의 중동정책 평가 및 전망Ⅰ. 러시아의 중동정책① 러시아의 대 중동정책 전개러시아의 대 중동정책은 크게 소련시기, 옐친시기, 푸틴시기부터 현재로 나뉜다.- 소련시기 : 1950년 이전까지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나 1967년에 발발한 ‘6일전쟁’ 이후로 이집트와 시리아와 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아랍국가들이 소련제 무기에 의존하면서 많은 진척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1970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하며 친미정권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고 소련 자체내의 경제혼란으로 중동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도록 약화된다.이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급속도록 약화된 원인은 이슬람과 공산주의 이념간의 대립과 소련의 아프간 침략으로 인한 신뢰성 추락에서 찾을 수 있다.- 옐친시기 : 옐친 집권 초기에는 소련 붕괴 이후 경제위기 극복과자본주의로의체제전환을 위해 친 서방 정책을 시작한다. 이로인해 상대적으로 중동지역에 대해 외교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소홀하게 되었다.그러나 2차 집권 시기부터 중동 평화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중동국가들간의 관계 개선에 힘쓰고 이란, 이라크와의 무기 및 에너지 분야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푸틴시기(현재) : 푸틴의 집권 초기에는 정국안정과 경제발전에 중점을 두어 미국보다는 중국과 EU에 중점적인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반 이라크 정책에 불만을 가지며 이란에 핵 발전소를 건설하고 무기를 수출하는 등 중동 평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최근 러시아는 이스라엘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하마스와 헤즈볼라 같은 단체들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친미국가인 사우디, 카타르, 요르단등지를 순방하며 관계 개선에 힘을 올리고 있다.② 정책 목적과 전개 특징소련의 중동정책 목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산과 미국에 대항하여 그 지역에 대한 이익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탈 식민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그러나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인 현재, 중동지역이 수익성 좋은 무기 판매 시장일 뿐만 아니라 에너지 공급의 요충지로써 대 중동정책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중동 분쟁에 있어 평화적 중재자 역할을 통한 국제적 위상의 제고를 바랄 수 있다.최근 러시아의 행보는 기존의 우호국들과의 관계를 강화함과 동시에 친미성향인 사우디, 이집트, 이스라엘 등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중동 지역의 반미 정서에 힘입어 중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함과 에너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함일 것이다.특히 러시아는 이란을 자국에 중요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푸틴정부가 이란을 중동지역의 대미 견제의 협력자로 생각하고 경제적으로도 전략적 협력이 필요한 국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 핵개발 문제의 경우에는 핵무기 개발이 바람직 하지 않다는 국제사회의 의견을 따르나 이란 내의 핵발전소 개발에는 지지한다. 무기수출과 에너지협력, 경제협력을 의식한 결과일 것이다.
목차1.서론2.하마스의 역사3.하마스의 체제4.하마스 성장 원인5.하마스의 신념6.맺음말1. 서론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됨으로써 팔레스타인 땅에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서구 제국주의는 팔레스타인 원주민들 철저히 이용했지만 무시했고 서구 세력이 맺은 거짓조약들은 현대 팔레스타인 뿐만 아니라 중동전체를 세계의 화약고로 만든 씨앗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은 남의 도움으로 건국과 이스라엘 타도라는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구적인 해결책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로 하마스가 탄생한다. 과격단체 성격의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다수당으로 정권을 이끌며 이스라엘과의 끊없는 대립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글에서는 하마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스라엘과의 문제 해결의 방안은 있는지 짚어 보고자 한다.2. 하마스의 역사하마스는 아랍어로 'Al-Harakat' 라는 열정, 열심 이라는 의미의 약어이다. 현재의 하마스가 탄생하기 까지는 약 4단계의 주요 단계를 거치며 발전하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무슬림형제단이 가자지구에 설립된 것(1967-1976)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가자지구와 웨스트 뱅크에 있는 전문단체들과 이슬람대학의 참여를 확대하며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로 그 세력을 확대한 것(1976-1981)이고 세 번째 단계는 무장투쟁의 준비단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 시기(1981-1987)이다. 네 번째 단계는 1987년 순니파 범 아랍주의 운동의 야흐메드 야신(Sheikh Ahmed Yassin) 에 의해 가자지역에서 하마드가 탄생하며 현재의 하마드의 형태가 만들어 지게 된다.참고 - "Truth and existence"이들은 1988년 작성된 하마스의 헌장에 그들의 목표가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의 파괴와 팔레스타인 땅에 그들만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이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해결 방법은 오로지 지하드를 통해 얻을수 있다고 말한다.하마스는 PLO와 이스라엘 간의 모든 평화 협상을 부정했다. 이스라엘이 PLO에 대한 강경 정책으로 모두 해외로 추방해 버리자 세력이 약해진 PLO는 1991년 PLO가 마드리드 평화 회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하마스는 항의 하였고 1993년 이스라엘과 PLO의 아라파트 사이에 오슬로협정이 체결되자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강력하게 실행하기 시작한다.이 오슬로협정은 겉으로는 평화를 위한 협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좀 더 교묘하게 만들었다. 이 협정에 대한 기대는 큰 실망으로 바뀌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는 2000년 9월 알-아크사 인티파다로 폭발하게 된다.2006년 1월에는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선거로 평가받는 팔레스타인 총선이 있었다. 그러나 이 총선에서 미국은 하마스를 선출하지 말라며 총선에 개입했고 이스라엘인 하마스의 후보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전체 132석 가운데 하마스가 74석을 얻어 집권당이 되는 되었다.반면 여당인 파타(Fatah)당은 43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하마스의 무장투쟁을 지지하며 여당인 파타당의 효과 없는 정책에 지쳐했기 때문이다. 또 하마스의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행사를 합법적인 저항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마스는 대규모의 복지 프로그램, 학교에 자금지원, 고아원과 무료 보건소를 웨스트 뱅크와 가자지구에 펼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선거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마스 정부를 비난했고 유럽까지 팔레스타인의 모든 자금줄을 끊어버린다. 이러한 경제제제에도 하마스는 항복하지 않자 가자지구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해 그 해 말까지 수백 명을 살해한다. 인구 150만의 가지지구에서 22일 동안 1천4백여 명을 살해하고 5천5백여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이 2008년 12월27일의 전쟁은 하마스와 이스라엘 두 세력의 의도적인 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은 여당의 집권을 계속하기 위해 민심을 의식한 폭격이었고, 하마스 또한 총선을 앞두고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최근 새로운 바람이 팔레스타인 땅에 불고 있다. 2007년 6월 하마스가 파타 보안군을 몰아내며 가자지구를 장악한 이후 두 정파는 대립구도를 보여왔지만 2011년 4월 28일, 1년안에 총선, 수반선거등을 거쳐 통합정부를 구성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화합 협정에 서명한다. 곧 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국가를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가자지구에 수립하는 것이 목표인 하나의 새로운 팔레스타인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다.하마스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테러단체로 규정했다는 이유에서 이스라엘은 반대했지만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반대 이유가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으려고 하는 핑계라며 반박했다.3. 하마스의 체제하마스는 지도부인 3개의 위원회와 활동 분야별로 독립된 4개 하위조직으로 구성되어있다. 쉽게 말하자면 독립된 세포조직들이 수평적으로 구성되어있어 한 조직이 발각되더라도 다른 조직은 발각되지 않아 계속해서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마스가 무장투쟁이 중점을 두고있는 만큼 하위 조직중 최대 조직은 '잇즈 알 딘 알 까삼' 이라는 테러담당 군사조직이다. '잇즈 알 딘 알 까삼' 이라는 명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최초로 무장저항 투쟁을 시작한 자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하마스는 가난에 찌들고 대를 이어 이스라엘에 의해 처참히 짓밟힌 젊은이들, 그리고 종교적으로 심취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자살테러 같은 극단적인 테러에 이용하며 테러가 진행되면 그들 유가족에게는 보상금을 쥐어주고 순교자로 치켜세운다.4. 하마스 성장 원인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할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이 형제국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에 뺏긴 영토를 수복하고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다. 이런 믿음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형제국들은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무려 4차례나 이스라엘에 대항해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그들의 목표를 이룩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이것은 인티파다(Intifada : 민중봉기)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그들을 하나로 묶을 강력한 힘을 원했지만 그 당시에 있던 기구들은 그들의 이상을 이룩하기에는 성격이 달랐다. 과거 과격주의 단체였던 PLO가 있었지만 1980년부터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무장투쟁을 포기했기에 팔레스타인들의 열망을 만족시킬수 있는 하마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동시에 하마스에 대한 열화와 같은 지지는 커져만 갔다.이슬람 세계에서 급진적 이슬람세력은 전폭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과격 이슬람 단체인 하마스가 팔레스타인에서 그토록 중요한 세력이 되었을까? 이러한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의 힘이 컷다.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주의 운동을 활발히 진행시킨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스크에서 기도하는데 시간을 많이 쓰면 팔레스타인 내부의 민족주의 운동에 신경을 덜 쓸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쿠르드족의 특성쿠르드족은 중동지역에서 4000년 이상의 고유문화와 언어를 유지하였지만 유목민이라는 특성과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하나의 구심력을 갇지 못한 채 자신들의 국가를 가지지 못한 민족이다. 그들은 현대에 들어서도 많은 수는 유목민의 전통을 버리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고 도시에 살고있는 쿠르드족이라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약 3000만명이 아랍 각국에 분호하고 있고 자체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으나 언어를 체계화 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어렵고 인도-유럽인종으로 분류되며 그들의 종교는 순니파 이슬람교이다. 1920년 세브르조약은 쿠르드 자치권을 보장하지만, 1차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립을 위한 쿠르드족의 민족주의 운동은 로젠 조약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정책에 의해 차단되게 되었고 1991년 걸프전 이후 이라크의 쿠르드 족의 반란과 난민발생에 국제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랍각국의 쿠르드족과 그 분쟁여러 국가들에 분포한 쿠르드족은 그들이 소속된 국가에 따라 다양한 분쟁 원인과 독립운동양상을 보인다.터키는 20세기 초 터키민족주의를 표방하며 4000년간 이어져 온 쿠르드민족의 정체성을 무시한채 동화정책을 추친한다. 특히 1922년 로젠조약에 대한 반발로 터키의 쿠르드족은 활발한 무력투쟁을 펼치나 강력한 동화정책에 그 힘을 잃어갔고 결국 터키정부는 쿠르드 지도층을 추방한다. 1970년 이후 터키에는 쿠르드 정당이 설립되고 정부와 이들은 서로 투쟁관계에 돌입하지만 미국으로부터 전면적인 지원을 받는 터키 정부군의 10년 에 걸친 소탕작전으로 3,500개 촌락이 파괴되었고, 2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에서 쫒겨났고 수만 명이 사망하는 등 1999년 이후 거의 괴멸 상태에 있다.이란은 1921년 레자 칸이 정권 시절 쿠르드를 강경 진압하여 그들을 이란정권 아래 흡수한다. 터키보다는 덜한 탄압이 있었으나 서구열강과 소련이 쿠르드족을 독립국가 건설을 빌미로 이용한다. 이후 팔레비 왕정 아래 심하게 탄합받던 쿠르드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열렬히 동조하지지만 호메이니의 자치권 묵살로 협상에 실패한다.현재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 난민을 위해 힘쓰지만 자국 내의 쿠르드족의 저항 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탄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이라크의 쿠르드는 탄압받던 타 국가의 쿠르드민족과는 달리 그들의 언어사용과 자치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 뿐이었으며 자치지역 내에 유전지대가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족을 품고 이라크 내 쿠르드 저항운동이 시작된다. 이에 이라크 정부는 회유정책을 펼치지만 통하지 않자 강경정책을 취하여 사담후세인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4000개 이상의 쿠르드 촌락을 초토화시키고 수십만 명을 학살한다. 1990년 걸프전을 계기로 91년에 대규모 쿠르드 독립운동이 일어나지만 막대한 난민만이 생기고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은 자체 내의 내분으로 더욱 상황이 악화되어가고 있다.
목차Ⅰ. 중국의 중동정책① 중국의 대외정책 전개과정② 중국의 대 중동외교정책③ 중국의 대 중동경제정책④ 중동현안문제에 대한 정책⑤ 전망- 중국의 대 중동 정책① 중국의 대외정책 전개과정세계대전 직후부터 1973년까지 중국은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 있었음으로 그들에게 자본과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소련에게 의존적인 정책을 취했다.1953~58년에는 평화공존노선을 걸으며 반둥회의를 계기로 제3세계와의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었고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수립된다.이후 1958~65년, 모택동은 중소 분쟁이 표면으로 드러나며 제3세계 속의 중국의 위치 확립을 위해 힘쓰게 된다. 제3세계를 배경으로 반미와 반소를 제창하기 시작한 것이다.문화혁명과 그 직후인 1965부터 1973년까지는 문화혁명의 실패와 세계 속의 중화주의로 인해 심지어 제3세계와도 관계를 악화시키는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게 된다.1972년 상해공동성명으로 중국의 대 외교정책은 대변화를 맞는다. 이들은 미국와 소련의 패권주의에 저항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제3세계의 일원으로 그들의 패권에 맞설 것을 제창한다. 이러한 원칙에 근거, 아프리카 48개국 중 37개국의 승인을 얻어내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중국은 아프리카 29개국에 19억 달러를 원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실효를 거두게 된다.1979년부터 1982년 동안 조성되었던 미국과 중국의 화해 및 협력 분위기는 미국과 대만의 무기판매 등을 계기로 중국이 소련과의 화해가능성을 조성하며 자주독립외교노선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 미소양국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걷게 되는 것이었다.1989년 이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은 지도층의 부패와 경제몰락을 원인이라 생각하며 근절을 추진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사회, 특히 서방세력과의 긴밀한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② 중국의 대 중동외교 정책1. 1949 - 1955이 시기의 아랍국가들은 군주국들이거나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들이었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어느 중동국가들도 중국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도 아시아-아프리카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중동에 대해서도 전략적, 경제적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국은 이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려는 전략을 추구 할 수 없었다.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나세르의 군사혁명과 이스라엘이 배제 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로 구성된 반둥회의에서 아랍의 반 제국주의, 반시온주의 투쟁을 지지하였고 이 계기로 대 중동 외교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2. 1956 - 1966반둥회의와 이집트에 낫세르 아랍민족주의 정권이 등장하며 서방세력과 갈등을 겪으면서 중국과 아랍국가들 간의 외교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이집트, 시리아, 예멘을 시작으로 여러 아랍국가들은 중국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수에즈 전쟁이 발발 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다시 중동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 할 가능성이 커지자 중국, 소련, 미국은 이집트로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기도 했다.1957년 카이로에서 개최된 ‘아프리카, 아시아 인민단결회의’가 이루어 지고 ‘아프리카, 아시아 단결협의회’가 결성되며 중국은 아프리카, 아시아의 민족주의 운동과 접촉하여 그 운동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단체는 모로코, 튀니지, 수에즈 전쟁같은 사건들 이후 반 서구 민족주의와 범 아프리카주의를 일깨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듬해 중국은 이라크, 모로코, 수단, 소말리아등과 수교한다.1960년대가 시작되며 중국의 대 중동정책은 많은 고초를 겪는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1965년 예민과 오만에 이데올로기 운동에 많은 지지를 보내지만 이때 이데올로기 수출은 실패했고 대 중동외교에 타격을 입었다.또 PLO의 창설을 지지했고 그들에게 군수품과 더불어 민간물자등 좀 더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지원을 한 이유는 중국이 혁명 이데올로기를 선전 할 수 있는 반제국주의 투쟁적격지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이 시기 동안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국가들에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두 국가간의 노력이 돋보였고 그 결과로 소련은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에 대한 군서 및 경제원조를 더욱 확대할 수 있었으나, 중국은 제한된 원조능력으로 중동 국가들의 관계는 악화된 반면,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점차 증가되었다.6일 전쟁에서 중동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참패를 당하면서 1966년부터 1976년 사이의 중국의 대 중동정책은 큰 변혁기를 맞는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하는데 이 계기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들은 소련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무장조직들은 중국의 지지를 받게 된다.이후 1970년대 초반의 중국내의 권력투쟁과 소련과 이집트등과의 관계악화에 힘입어 중국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터키, 이란, 레바논, 쿠웨이트 등과 같은 친 서방 국가들과 수교 한다. 이 시기에 중국의 중동외교 목적은 소련의 대 중동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우호적인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1977년 이후부터 중국은 현재까지 자국에 이득이 되는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과거 미국의 압력으로 가로막혔던 이스라엘과의 수교도 이루어 지고 거의 모든 아랍국가들과 수교하며 소련의 대 중동외교를 앞지르고 있다.최근까지 중동에서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미국이 팔레스타인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간 갈등과, 이슬람 과격주의에 대해 미국이 강하게 탄압하며 미국의 대 중동 입지는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 있어 소련과 중국은 중동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며 이 지역 안보와 중동평화와 경제협력에 참여하고 있다.③ 중국의 대 중동경제 정책중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그들의 소비 또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대 걸프석유수입의존도는 연 90% 이상이 될 것이라 예측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그들 국민의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중동가 중앙아시아를 주요 전략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은 ‘2수입, 1수출’전략을 취하며 중동 산유국들과 장기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석유수입안보를 추구하고 있다.그들에게 석유 수급을 방해 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에 대해 어떻게 석유 공급의 취약성을 감소시키느냐의 고민이 에너지 안보 정책의 중점이다.그러나 중국의 인권유린과 무기거래는 미국이 꼬투리를 잡을 만한 큰 요소이다. 왜냐하면 중국과의 무기거래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란은 미국이 지정한 테러지원국이며 이란은 중국에게 대량학살무기를 판매해 줄 것을 바란다. 무기거래에서 이란은 최대 수출국임으로 내 칠 수 없는 국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