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삶에 사회가 미치는영향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목차Ⅰ. 들어가는 말Ⅱ. 유아기 > 중간대상 : 위니캇Ⅲ. 상상계, 상징계 : 자크 라깡Ⅳ. 학교생활- 뒤르켐 주의 문화사회- 사회와 개인은 의례 안에서 형성됨Ⅴ. 롤랑 바르트 - 언어와 신화Ⅵ. 사회생활미셸 푸코 - 사회와 개인의 담론Ⅶ. 결론어빙고프만 : 세상은 무대, 개인은 연기자Ⅰ. 들어가는 말우리들은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간 개인들의 삶의 모습은 달라졌으며, 한 사회의 모습에 따라 개인들의 삶이 결정되는데 많은 영향력을 끼치곤 하였다. 예를 들어, 1997년 우리나라가 IMF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우리 국민들은 금모으기 운동과 아나바다 운동과 같은 범국민적 운동을 통해 외환위기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한 국가의 경제적 위기가 그 국가의 국민들 개개인에게 영향력을 끼친 것이다. 이 때 국가는 하나의 사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개인들은 사회의 영향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현상은 사회학적 용어인 ‘사회실재론’ 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회실재론은 개인보다 사회가 실재상 선행한다고 보는 사회관의 총칭이며 이를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 학자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교육학자이며 프랑스 사회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에밀 뒤르켐이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사회 실재론으로 그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사회실재론의 정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사회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사회 그 자체를 인간과 별개의 독립된 하나의 실재로 간주하고 인간 개개인보다 사회 그 자체를 더 강조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사회실재론에서 에밀 뒤르켐은 사회는 그 자체의 목적과 의무를 가지며 그것을 출현적 속성이라고 한다. 출현적 속성은 개인의 특징에 없는 것이 사회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족혼, 집단심, 애국심 등이 출현적 속성에 해당한다. 즉, 개개인들의 속성으로, 또는 개개인들의 합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존 결정적인 요인은 모성적 돌봄이라고 주장한다. 위니캇은 “가장 원초적인 환경은 자녀의 성장을 촉진하는 환경인 어머니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유아의 욕구에 대한 환경의 적응’이라는 개념을 기술하면서 부모가 유아의 욕구와 성숙하는 과정에 적응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즉 촉진하는 환경은 유아에게 전능감을 제공해준다. 이러한 전능감은 주관적으로 인지된 대상에서 객관적으로 인지된 대상으로 바뀔 때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위니캇은 세 번째로 “충분히 좋은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위니캇은 유아가 인생에서 훌륭한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제공하는 부모의 기능을 서술하기 위해 “충분히 좋은 어머니”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환경과 부모가 유아와 유아의 욕구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요구되는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 “일차적인 모성몰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어머니는 아동이 자신과 관계를 맺는 특별한 발달 시기에 아동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충분히 제공하여주고 아동의 변화하는 욕구에 따라 적응하고 변화하며 그리고 점차 아동은 어머니에 대한 의존감이 감소하게 된다.마지막으로 위니캇은 과도기적 대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영아는 자신이 전능하다는 주관적인 환상의 세계에 산다. 그리고 약 4~6개월부터 8~12개월이 되면 과도기적 대상과 공간을 형성하게 된다. 과도기적 대상은 주관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과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 과도기 사이에 있는 대상이다. 영아는 생후 몇 개월이 지나면 자신의 성과 관계없이 인형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한다. 여기서 위니캇은 과도기적 공간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과도기적 공간이란 육체적 관계에서 정신적관계로의 진행은 어머니와 영아의 잠재적인 공간이라고 칭한 현상의 발생과 함께 진행된다. 또한 과도기적 공간은 일종의 정신적 공간이며 과도기적 공간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으로 문화와 놀이가 일어나는 공간이며 세계와 의미 있는 상호교환이 일어나고 의사소통과 내적, 회적 경험이 혼합된 공간을 말한다.또한고착된 것들, 오디푸스 콤플렉스, 반복충동, 전이 현상 등이 중요시되고 있다. 그리고 리비도의 발달 단계를 성감대가 이동하는 생물학적 위치에 따라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성기기 등으로 구분해서 설명한다. 그런데 라깡은 이렇게 과거로 환원하는 정신분석적 경향에 반대하는 것 같다. 그는 인간 심리 의 발생과 발달이 선행하는 구조에 의한 것이지 생물학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라깡이 생각하는 심리 구조는 상징계, 상상계로 나뉜다.먼저 상상계는 일명 거울 단계로 불리기도 한다. 거울 단계란 말은 생후 6개월~18개월 된 아동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유래되었다. 상상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어린 아이가 어른과 함께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앞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을 혼동하게 된다. 그 다음, 어린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실재(여기서 실재라는 개념은 라깡이 새로 도입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無)이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무(無)인 것이다. 이는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개념과 유사하다. 비어있으면서 꽉 차 있는 것으로써의 공(空)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가 아니라 허구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결국 어린 아이는 그 모습이 이미지임을 깨닫고, 자신의 이미지와 타인의 이미지가 다름을 깨닫게 되며 결과적으로 어린 아이는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며 놀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처음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의 손이나 발 등의 모습이 자신의 전부이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게 되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어린 아이가 자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그 시기에 주체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자신의 몸 일부를 사랑하는 자기애적 단계에서 자신의 몸 전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발전하게 된다. 상상계의 단계에서 어린 아이는 아직 자신과 인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개인, 사회 연대성과 사회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 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공동체주의과 맥락을 같이 한다. 본격적으로 에밀 뒤르켐의 도덕 교육론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먼저 에밀 뒤르켐이 생각하는 도덕이란 행위를 미리 결정하는 행동 규칙의 체계이다. 그리고 도덕은 특정 사회의 필요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일련의 행위의 규칙, 실천명령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완성이 우선이 아니라 먼저 공동체에 적응하는 일과 그것이 요구하는 규범에 자신의 행위를 조화시키는 일 즉, 도덕사회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에밀 뒤르켐의 도덕 교육론에서는 인간 도덕성의 발달 단계를 규율정신, 사회집단에의 애착, 자율성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로 규율정신은 의무의 도덕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규율정신은 규칙성과 권위의 합을 말하며 규칙성과 권위는 또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규칙성은 도덕규범을 일관되게 준수하는 성향이며 권위는 도덕 규칙을 명령으로 가하는 힘의 원천_ 도덕적 의무의 명령을 존중하며, 그것을 규칙적으로 수행하려는 성향이다. 따라서 규율 정신은 도덕규범이 명하는 바를 의무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권위를 존중하여 이에 기꺼이 따르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뒤르켐은 그의 이론에서 규율정신이 왜 길러져야 한다고 언급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뒤르켐은 세가지의 이유를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먼저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그 사회에 일단 적응해야 하기 때문에 규율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 개인과 사회의 존립에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민주적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형성되는 데 가장 밑바탕이 되는 자질이기 때문에 규율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두 번째로 사회집단에의 애착은 선의 도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회집단에의 애착은 선에 대한 사랑과 그 실현에의 의지의 합으로 볼 수 있다. 선에 대한 사랑과 행위의 규칙성과 자기 규제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에 따르는 것은 교사에 대한 존경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이러한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는 도덕규범 그 자체에 대한 권위와 존경으로 연결, 발전돼야 한다. 또한 교사의 애정은 아동들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신뢰로부터와야 한다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에밀 뒤르켐은 학교 교육에 있어서 벌과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벌은 비도덕적 행위를 제재하는 모든 조치를 포함하며, 도덕규범의 권위를 보호하고자 하는 소극적 제재를 말한다. 반대로 보상은 권위를 수용하여 이를 몸에 배게 하는 보다 적극적인 조치를 말하며 벌보다는 보상의 적절한 사용이 바람직한 행위를 정착시키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에밀 뒤르켐은 주장한다. 벌보다 보상이 더 적절한 방법인 것 이유는 애타성과 공감, 공동체 정신은 인간 본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는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공감성과 애타성의 경험 기회를 부여하여, 나와 우리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게 하고, 공동의 노력으로 가치 있는 결과를 창출해 내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도록 격려하는 일이 중요하다. 또한 학교는 도덕적 자율성을 기르기 위해 합리적 교수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과학교육과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에밀 뒤르켐의 교육학 사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와 개인은 의례 안에서 형성되며 그 단계에서 개인은 도덕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본성인 애타성과 공감, 공동체 정신으로 볼 때 개인은 그러한 본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교육을 받아왔기에 개인의 삶에 사회가 미치는 영향은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Ⅴ. 롤랑 바르트 - 언어와 신화다음으로 살펴 볼 학자는 20세기 중엽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문학 평론가인 롤랑 바르트이다. 롤랑바르트의 (신화론) 그중에서도 ‘언어와 신화’ 라는 관점에서 그의 이론을 한 블로거의 분석을 인용하여 살펴보기로 하자.먼저 라는 주제로 롤랑 바르트는 이야기.
“Good will Hunting”학과:학번:이름:굿 윌 헌팅을 본 후........굿 윌 헌팅을 보면서 또 주변의 사건사고들을 접하면서 정신적인 이상이 있는 사람이나 아이들에게는 그 이상에 대한 이유가 존재함을 느꼈다. 어렸을 때 겪은 충격이나 사건 사고를 통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 굿 윌 헌팅에서 또한 그러했다. 어렸을 때 양부모님의 양부에게 매질을 당하고 폭행을 받은 것이다. 한 번 버려져서 다른 사람에게 입양된 것만으로도 큰 충격과 고통이 있었을 터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렇게 입양을 가서까지도 양부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폭행을 받고 버림을 받았으니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고 먼저 상대방이 떠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상대방이 떠나가도록 하는 윌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그러나, 다행히도 좋은 정신상담자 숀을 만나게 돼서 윌은 완치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좋은 정신상담자란 저명한 의사가 아닌, 진정으로 환자를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그 환자가 느끼는 고통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최고의 정신상담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 중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정신상담자와 정신 상담을 받는 사람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대답에 “믿음”이라고 대답한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정신 상담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사람에게 마음을 닫았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를 해야 함을 깨달았다.우리주변엔 많은 상처를 받고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대부분 방치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회의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사고에 연류된 사람들의 인적 병적 조사를 해보면 정신적 이상이 있는 사람의 비율이 더 많다는 뜻이다.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들을 짚어 봐도 그렇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있었던 대구지하철 사건만 봐도 볼 수 있다. 그러한 엉뚱한 사건을 만들어낸 그 범인의 내막을 살펴보면 정신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자만 잔인하게 살인을 저질렀던 유영철을 봐도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사건사고가 터지고 나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신이상의 병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의 보호가 부족한 탓에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그런 상황을 파악하게 되니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이렇게 우리 주변에 많은 정신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데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하고 보호해야 할까? 우선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정신 상담을 통해서 그들을 치료해야한다. 물론 그 정신상담자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대한 환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 놓게 함으로써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정신이상은 어떻게 보면 가장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면서도 오히려 다르게 보면 가장 어려운 병으로 볼 수 있다. 정신이상은 대부분 사랑의 결핍이 원인이 되어서 나타나는 증상이 대부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에 대한 사랑결핍을 채워준다면 쉽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랑을 받고 있구나! 사랑을 할 수 있구나, 라고 깨닫게 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그 병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병을 고치는 것보다는 원인을 알고 해결방법을 아는 정신이상의 환자들은 과정에서의 애로사항은 존재하겠지만 한층 더 고치기 쉬운 병일 것이다.그렇다면 정신상담자에게 정신이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인가? 물론 믿음을 줘서 그들이 다가 오도록 해야 한다. 접근 할 수 있도록 유도할 때 너무 수동적으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환자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풀어놓는 것 또한 안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정형적인 틀에 박혀 사무실 같은 갇힌 공간에서 치료를 하는 것 보다는 가끔은 확 트인 공원이나 강가에서 상담을 한다면 더욱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배경과 분위기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므로 상담에 있어서 어떤 곳이 더욱 효율적이고 상담을 받는 환자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곳인지 고려한 후 선택해서 그 곳에서 상담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치료하는 데 있어서 상담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정신상담자와 환자가 친밀해 질 수 있도록 다양한 게임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게임을 하면서 친밀감을 쌓고 스킨십을 유도하다 보면 어느새 친밀해 져서 환자에게 편안함을 주고 그 편안함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효과적인 상담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얼마 전 우울증으로 자살을 한 유명 배우 이은주씨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우울증의 정신이상을 겪고 있었는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 사연을 접하고서 정신이상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시기와 적절한 치료방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정신이상의 병을 앓고 있는데 있어서 치료를 꺼려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이 정말 정신이상을 겪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정말 자기가 정신병자라는 것인가. 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오히려 신체적 질병이라면 괜찮게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정신이상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이상의 사람들을 미친 사람 싸이코 취급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이상을 겪고 있는 환자 스스로가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는 그런 병이 아닐 것이라고 부인하고, 주변사람들 조차 그 병에 대해 관대히 받아 들여 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 찾는 것을 꺼려하고 그로 인하여 치료시기를 놓쳐서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된다. 조금만 빠른 시기에 치료를 받고 상담을 받았더라면 쉽게 고칠 병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의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를 읽고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콧물도 나고 몸은 움츠려들지만, 지금까지 미뤄온 일들에 치여 불평하며 어쩔 수 없이 분주하게 살아가는 요즘이다. ‘한경직 리더쉽’ 과목의 중간고사 대체 독서과제로 나에게 큰 짐으로 다가온 ‘나의 감사’ 독후감 제출.. 날짜는 다가오고 시험 때문에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이고,, 나의 생활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끝끝내 일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대책 없는 스타일, 때문에 늘 불평이 많았고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책을 읽으러 도서관을 가면서까지 투덜투덜 불평을 일삼았으니 정말 군대를 다녀와서도 철이 덜 들었다. 도서관에서 ‘나의 감사’ 목차를 훝어보면서 느낀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제목과 소제목들에 감사라는 단어들이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하나님에게 복을 많이 받았으면, 얼마나 부족함 없이 여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에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감사’였다. 어느 것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준비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낮추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뜻함으로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한경직 목사님의 구술 자서전 ‘나의 감사’ 이 책에서는 한경직 목사님의 ‘따뜻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책을 읽어나갔다.이 책은 한경직 목사님의 어릴 적부터 미국 유학시절, 그리고 한국에서의 목회사역까지 시간의 순서로 흘러가고 있다. 한경직 목사님은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오산학교, 숭실대학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해외로의 유학생활까지 하셨다. 어려운 가정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배우게 하시고, 젊은 날 성장케 하시며, 약할 때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어려움들을 담대히 이겨냈노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선 한경직 목사님을 자신의 길로 또한 자신의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부족함은 늘 먼저 아시고 채워주셨으며, 아플 땐 돌봐주셨고, 타지에서 홀로 있어 방황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늘 잡아주시며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해 주셨다.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늘 은혜와 축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를 시험하고 좌절케하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목회를 하며 유학생활 중 미국에서 겪었던 신신학(개혁)과 구신학(보수) 간의 갈등이 한국 교회에서 그대로 일어남을 겪으며 갈등과 고민을 했고, 일제의 탄압속에 교회를 지도해 나가며 감옥에서 20여일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강요를 못 이기고 이를 인정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사건을 하나님 앞에 즉시 눈물로 회개를 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느끼게 된다. 신사참배 사건을 통해 한경직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하시고 자신을 통해 일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을 느낀 것이다. 훗날 한경직 목사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따뜻한 온기를 가슴에 품고 감사의 종으로써 남은 생을 헌신하신 것이다.감사의 종으로써 살아간 한경직 목사님과는 반대로 여태까지 늘 불평의 삶을 살았던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한 부분들이 있었다. 한경직 목사님은 결코 하나님의 크고 섬세한 은혜에만 감사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작은 일, 또한 충분히 불평을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따뜻한 마음으로 늘 감사를 고백하신다. 정말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사람에 대해서나 또한 정말 내 필요를 채워주는 그 순간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처럼 농촌에서 태어남을, 폐병으로 앓고 있는 상황을, 홀홀단신 남쪽으로 피난가는 상황을.... 사람들 아니 내가 그당시 사람이라면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늘 듣는,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을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과연 사람이 항상 감사를 하면서, 입술로 불평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해왔다. 하지만 이 자서전을 통해 본 한경직 목사님은 나의 이런 질문을 무색하게 할 만큼 정말 범사에 감사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었다.최종적으로 책에 마지막 부분에 한경직 목사님이 가족들에게 하는 말이 실려있다. 그 부분을 살펴보면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재산도 아니요, 명예나 권력도 아닌‘기도’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신다. 한경직 목사님은 세계 기독교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템플턴상의 수상자로, 또한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영락교회) 원로 목사님으로써, 거기다 서울권 4년제 대학의 총장까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가지고 가는 재산,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하나도 모아 두질 않으셨다, 아예 쥐고 있는 욕심이라곤 하나도 없으셨다. 젊었을 적 돈이 없어 유학길을 고민하던 당시 본인에게 꿈을 열어준 윤치호 선생의 100원이라는 투자(당시에는 큰 돈).... 꼭 이 은혜를 갚겠노라고 다짐하는 한경직 목사님에게 윤치호 선생님이 했던 말씀(받은 은혜는 그 당사자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라)을 마음에 따뜻함으로 삼고 끝까지 변함없이 가신 것이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한순간의 작은 일에도 사람들은 짜증을 내기 일쑤이고 불평을 하는데 말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속에서 자기를 비워낸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따뜻함’을 품은 채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는 한경직 목사님의 구술 자서전 ‘나의 감사’를 읽으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써, 마음속에 예수님을, 그 따뜻함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우리 기독교의 삼위일체신관은 설명하기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신관이야말로 기독교가 지닌 특이한 신관이요, 또 특색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교회나 성당에서 베푸는 세례 예식이라든지 그 밖의 여러 식전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런 의식이 베풀어진다고 선언하는 말을 흔히 듣는다. 여기에 "아버지"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며 "아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실상 이러한 삼위일체의 표현은 매우 어려운 신학적 논리와 과제를 제공해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모순되거나 어려운 논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원시 기독교 시대로부터 중세기에 걸쳐 매우 격렬한 논쟁의 과정을 거쳐서 교회가 고백한 신조요, 그것은 이를테면 신앙과 교회의 매우 귀중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거기에 우리가 지닌 "하나의 신앙", "하나의 교회"의 토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누구나 반드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 일과 동일한 일이다. 또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생겨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기 자신의 혈육이나 심정이나 이성이나 양심에 의해서이기보다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에 의하여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적은 신앙도 우리가 자각하거나 아니거나를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삼위일체는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에 놓여져 있다. 즉, 우리는 삼위일체를 올바로 이해함위일체가 아니라면, 진리는 가서 세례를 베풀고라는 마28:19 의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여, 한 분 하나님이신 당신이여, 성 삼위일체시여, 내가 한 분이신 당신의 영감으로 이 책에 기록한 모든 것을 삼위이신 당신이 받아 주소서. 만일 그 속에 나의 생각이 포함되어 있거든 한 분이시면 삼위이신 당신이 그것을 간과해 주소서’) 어거스틴의 이 말은 참으로 아름답고 기억해 둘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으므로 설명을 다 못하나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 역사상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직접 표현된 곳은 없으나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있는 성경구절들은 많이 있다.삼위일체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구별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삼신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세가지 양태나 세 부분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시는데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본체도 하나이시고 권능과 영광도 동등하시다.삼위는 세가지 모양이거나 가면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직분이나 기능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즉 한 사람이 세가지 기능이나 직분을 의미하지 않는다.삼위는 ‘세위격’ 또는 ‘세격위’ 세분의 인격적 존재를 가리킨다. 삼위는 세분이라는 뜻이다. 한 분이 아니시고 세 분이시다. 이것은 상식적이면서도 지극히 성경적이다. 삼위는 세 분이 계신다. ‘본체는 하나이나 세분으로 계신다’가 아니고 세 분이 계시는데 그 세분의 신성은 단일하시다. 왜냐하면 모두 동질이시기 때문이다. 삼위가 다른 질의 신성이시면 세 하나님들이지만, 신성이 동질이시므로 한 하나님이시다.)삼인격이 일체란 것은 우리 이성의 지력으로 이해하려고 볼 때 불가사의하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다. 그러나 하였다.그러나 이것은 둘 다 잘못된 견해이다. 그 이유는 신약에서와 같이 구약에서도 이 교리에 대하여 충분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시의 점진성으로 인하여 구약이 신약만큼 이 교리를 구체적으로 증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및 섭리와 관련하여 추상적이기는 하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증거가 구약에 포함되어 있다.1) 엘로힘) (??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여기서 “...하나님이...”‘엘로힘’은 복수형을 가리킨다. 이는 복수형으로 위엄하신 하나님, 창조주와 통치주 하나님으로서의 일반적 면을 지시한다.‘? ? ’(엘로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명사는 삼위를 가리킨다. 물론 히브리어에서 명사들을 복수형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 ? ’(엘로힘)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격적 구별을 의미하고 있다.2)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는 복수형을 말씀하셨다.① 우리의 형상“...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인간 창조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적 증거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의 발전된 계시에 의해 뒷받침될 뿐 아니라 창1:2절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과 그리스도께서 태초에 천지창조 사역에 동참하셨음을 분명히 밝힌 요한복음 기자의 증거(요1:2-3)에 의해서도 입증된다.② 우리가 내려가서“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11:7)‘우리’라는 표현과 더불어 태초로부터 삼위의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의신성으로 존재하고 계셨음을 암시하는 말이다.③ 누가 우리를 위하여“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6:8여기서 이사야를 소명하시는 주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신을 보내셨느니라” 사48:16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라고 말했다.“나와 그 신”을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는 본서의 저자인 이사야를 가리키며 ‘그 신’은 하나님의 신이신 삼위성령을 뜻하는 것이다.(※ 참조 : 사63:14; 창1:2; 6:3; 삿3:10; 잠1:23; 켈3:12; 욜2:28; 학2:5; 슥4:6)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의, 우리가, 우리를, 나의 신, 그 신을 이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안에 하나 이상의 인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나의 신, 그 신 이라는 인칭 대명사로 부르신 사실이 삼위의 존재를 암시한다.4) 구약에서 인간들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여호와 사자“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웠는고 함이라” 창16:7-13구약의 역사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일일이 구속사에 간여하셨다. 그러므로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현현이다.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이유는첫째.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을 스스로 여호와와 일치시키고 있다.“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둘째. 성경은 여호와의 사자를 여호와라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여호와의 사자는 출3:4절에서 ‘여호와’와‘하나님’으로 표현되었다) 출3:2.2. 신약의 증거신약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는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설술에 접근하지 않고 구약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다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하고 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갈1:1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엡4: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참조:마11:25; 요 6:27; 벧전1:2; 빌2:11; 요 20:17; 막 14:36; 요11:41; 17:11)② 성 자롬9:5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딛2: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요6:27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참조:골2:9;요1:1)③ 성 령행5:3,4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속이고 땅값을 얼마를 감추었느냐 당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고전2: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요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3) 삼위의 인격적 교재신약은 성부, 성자, 성령을 상호인격적 교재의 대상 즉 판이한 인격들로 제시한다.신약에서 삼위가 1,2,3인칭 대명사로 서로 말씀하셨고, 상호 사랑하고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성자는 성부께 기도하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는 존재로 묘사한다.◆ 1,2,3 인 칭마17:0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 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