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있다는 걸 기억해줘.- ‘스파이더릴리’에 대한 감상‘스파이더 릴리‘란 영화를 시사회를 통해 보고 왔다. 생각이 많아졌다. 원래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영화를 보고 레포트를 쓰는 중이었지만, 어쩐지 ’스파이더 릴리‘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졌다.이 영화는 2007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테디베어 상(최고의 퀴어 영화에 수여하는 상)을 수상하였으며 제로 추 감독의 최신작으로, 기억이라는 소재를 두 젊은 여성간의 사랑을 매개로 그려낸 작품이다. 제로 추는 동성애자를 인간적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성감독이다. 그녀의 최근 작품동향들을 살펴보면 2001 벤쿠버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던 밝고 즐거운 게이 바의 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이미 국내에서도 각 영화제들을 통해 인디영화 팬들에게 소개된 ‘드랙퀸 가무단‘ 등을 통해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비뚤어진 시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은 단발적인 이벤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만 내 동성애자들의 인권운동인 ’레인보우 시리즈’라는 캠페인으로 승화되고 있다. 이번 영화인 ‘스파이더 릴리‘는 ’레인보우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대만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만들어졌다. 나는 동성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 그리 곱게 보지도 않았다. ‘사람들끼리 사랑한다는데 뭐 어때? 나만 아님 되지.’하는 개방적이고 싶은 보수파인 나에게 동성애란 참으로 낯선 소재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단 한번도-섹스 장면에서 조차- ‘징그럽다'라던가 '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기존의 퀴어 영화는 동성애 그 자체가 주제가 되어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을 극복해 나가는 내용이기에 오히려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스파이더 릴리의 그녀들은 자신들의 사랑방식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고, 그렇기에 평범하지 않은 사랑방식에 편견 없이?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내용에 충실하게 보게 되었다 랄까.우리나라 버전의 제목인 ‘스파이더 릴리‘는 타이완 나 그림, 즉 문신을 뜻한다. 이 영화의 주된 소재를 말하자면 동성애, 피안화, 문신. 이렇게 세 개라고 말할 수 있다. 셋 다 친숙치 않은 소재이다. 이러한 친숙하지 않은 소재들을 통해 이 영화는 친숙한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이 영화의 장르는 ‘퀴어‘지만 이 속에 담긴 내용은 동성애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기억‘이란 것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일까?주인공은 두 명이다. 잊으려고 하는 그녀 다케코와 기억하려 하는 그녀 샤오리. 다케코는 남성적이며 쿨하고 약간은 음울한 분위기의 여인이다. 그녀가 여자 동급생인 첫사랑과 함께 있던 밤,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죽음을 본 동생 아칭은 아버지의 팔에 새겨져 있던 피안화 문신만을 기억한 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 해리장애(선택적 기억상실증)를 가져 자신을 기억 못하는 동생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여기게 하기 위해 아버지의 팔에 새겨져있던 피안화를 자신의 팔에 새긴다. 그 후 문신 전문점을 차린 그녀는 손님들을 위해 각기 비밀을 간직한 문양을 디자인해 준다. 샤오리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고 어머니에게는 버림받아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녀가 9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다케코를 처음 만난다. 다케코가 이사간 뒤 다케코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그녀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 그와 동시에 다케코의 팔에 새겨진 피안화는 샤오리에겐 사랑의 문양으로 남는다. 9년 뒤, 그녀는 불법 화상 채팅을 직업으로 삼아 가상세계인 웹사이트에서 수많은 남성과 유희를 즐기며 산다. 우연히 다케코의 문신 전문점을 찾은 샤오리는 벽에 걸린 피안화 문양에 매료된다. 그것을 보고 문신 전문점의 주인이 자신의 첫사랑 다케코라는 것을 안 그녀는 다케코에게 자신의 블로그가 적힌 명함을 건넨다. 그 뒤 샤오리는 다케코가 닉네임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접속한다고 믿고, 누가 다케코인지 맞히려고 애쓴다. 한편 다케코는 가게로 찾아온 샤오리를 만나면서 애써 억누르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 꿈틀거리는 걸 느낀다. 샤오리는고 그것을 어찌할 줄도 모르면서 밝은 척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과 똑같이 절망 속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가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새기고 싶어하던 피안화 대신 그녀에게 힘을 주기 위해 재스민 도안을 디자인한다. 재스민. 샤오리의 첫사랑이었던 다케코가 항상 흥얼거리던, 웹캠 속에서 울고 있던 샤오리가 흥얼거리던 바로 그 재스민이다. 경찰은 샤오리에게 고백하고 샤오리는 이 경찰이 다케코라 믿는다. 어찌되었건 샤오리와 다케코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고, 사랑을 나눈다. 그 시각, 경찰은 샤오리가 접속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라 생각하며 검거를 시작하고, 겁 많고 소심한 성격의 아동은 그 지독한 열등감을 다케코의 문신으로 가리며 불량배 행세를 하다 팔이 잘린 채 다케코의 가게 앞에 쓰러져있다. 그리고 다케코가 일을 하는 시간동안은 보호소에 맡겨져 지내는 그녀의 동생 아칭은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까지 그녀가 오지 않자 자신 혼자 돌아가려 길을 걷다 길 가에 피어난 피안화를 보다 크게 다친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한 다케코는 다시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하고, 피안화가 피어있는 아칭이 다친 그 들판으로 와서 갖가지 상상을 보게 된다. 죽은 아버지, 자신을 원망하는 동생, 팔이 잘린 아동. 피안화의 향기는 독약과도 같은 기억을 실어다 준다. 다케코는 샤오리에게 더 이상 문신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샤오리는 그런 다케코를 걱정하며 자신의 채팅방에서 다케코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러나 불시 검거 중이기에 채팅방에 접속해 있으면 샤오리는 검거되고 말 상황이었다. 경찰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접속을 끊어달라고 한다. 샤오리는 그가 다케코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이가 다케코가 아니란 사실에 좌절한다. 다행히 샤오리는 검거되지 않았고, 아칭은 사고의 충격으로 기억을 되찾는다. 그리고 다케코는 다시 마음을 열고 후회하며 샤오리에게 연락을 한다.98분이란 긴 시간동안 이미지 위주로 촬영되어 암시적인 내용이 많은 역할도 하고 있지만, 다케코의 동생 아칭은 과거의 잊고 싶은 기억과 현재를 연결시키는 인물이고, 다케코의 고객인 아둥은 사람들은 문신을 새길 때 그 문신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곁다리 등장인물의 의의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인물을 훑어주는 방식은 나중에 영화를 다 보았을 때 그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알려주는 데 효과적이다.둘째로 주목해야할 것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사이버공간, 과거의 기억에 대해 적극적인 주인공 샤오리와 매우 소극적인 다케코의 대비이다. 샤오리의 과거는 외로움이 가득하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외로움 속에서 자란 그녀이기에 웹캠에서 함께하는 인형 또한 그녀의 외로움이 묻어나 더욱 쓸쓸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기에 찾아온 자신의 첫사랑을 기억하려하고, 그렇기에 그녀의 과거는 그리운 첫사랑의 추억인 것이다. 반면에 다케코의 경우 과거는 잊고싶은 상처이다. 그녀에게 과거란 자책감을 들게 하는 것일 뿐. 그렇기에 기억해내려 하지 않는다. 반면 샤오리의 현재는 사이버공간 상의 존재감이 현실에서의 존재감보다 훨씬 큰 다소 비현실적인 상태이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외로움. 그것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사이버 상에서 웹캠걸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가 자신을 보아주기 원하기에. 이따금 보여주는 샤오리의 방 전경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웹캠 상으로 보이는 부분은 화려하다. 반짝반짝하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방이란 느낌. 그러나 웹캠에 비치지 않는 그녀의 방은 곰팡이가 슨 벽지와 간이 옷장이 전부이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 그렇기에 샤오리는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내게 이제 다른 선택이 없어요. 이 허구 세계에서 살아가는 수밖에요.”이 독백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 살고자 하는 사오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절실히 묻어나오기에 가슴 아팠다.다케코의 현재는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을 묻어둔 (적어도 겉위해 항상 민소매 옷을 입고 있는 그녀와 대조적인 모습이다.이렇게 샤오리와 다케코의 다른 상황은 위와 같은 몽환적인 느낌과 선명한 느낌의 대비와 왼쪽과 같은 색채대비 등으로 표현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샤오리에 대한 다케코의 마음만큼이나 그 간격은 점차 좁혀진다. (上 샤오리, 下 다케코)마지막으로 드러나는 이 영화의 특징은 중간 중간 나오는 삽입구들이다. 이 삽입구들은 영화의 부분 부분을 해설하여 보는 이들의 이해를 돕는다. 아무래도 숨은 의미가 많은 영화이기에 이러한 장치는 매끄러운 연결을 위해서도 필요한 듯하다. 그와 동시에 영화의 장면이 바뀌기 전에 한 템포 늦춰주는 호흡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 이러한 삽입구가 나온다.“나는 당신의 환상 속의 여인, 당신도 내 환상 속에 있죠.”이 장면에서 샤오리의 직업과 밝아 보이는 그녀의 내면에 숨어진 어둠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에 사이버 상에서 일을 하는 그녀지만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것이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 그녀의 외로움은 깊어져만 가는 것이다.“모든 문신에는 비밀이 있다.”중반부에 나온 말. 이는 다케코 뿐만이 아니라 문신을 한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다케코는 동생을 위해 새긴 것이지만 이것은 과거의 고통을 덮음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동의 문신은 소심하고 겁 많은 자신을 가리는 역할을 하고, 샤오리에게는 사랑의 기억이다. 말 그대로 모든 문신에는 비밀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삽입구가 중간 중간에 있어 어려운 영화지만 무언가 명쾌하다-는 느낌을 준다.이 영화는 ‘퀴어’라는 양날의 칼과 같은 장르에 속해있음에도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그녀들의 감정선의 변화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함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샤오리의 슬픔과 어둠이, 다케코의 불안과 초조함이 색채, 분위기, 구도 등을 통해 피부에 와 닿는다. 여자와 여자가 아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란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기에 보
끝, 그리고 탄생.정보컴퓨터공학부A711013 구혜민트루먼쇼 (The Truman Show, 1998)감독 : 피터 위어당신의 인생이 극본에 의해 짜여진 쇼라면 당신은 어찌할텐가? 이 영화의 주인공, 트루먼은 바로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던 그가 자신의 인생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신이 살고 있는 ‘가짜’ 세상을 벗어나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대략적인 흐름이다. 내가 논하고자 하는 최고의 10분은 바로 마지막 장면이다. ‘트루먼 쇼’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트루먼의 마지막 인사. “Good morning. And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이 인사와 동시에 트루먼은 무대를 벗어난다. 의도치 않던 ‘배우’로써의 작별인사인 셈이다. 너무나도 감명 깊던 엔딩. 하나씩 뜯어보자.의도된 사고로 인해 물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던 트루먼이 배를 타고 섬을 벗어나려고 하다 드디어 거짓세상의 끝, 즉 세트장의 벽을 만난 장면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물은 트루먼이 공포심을 갖고 있던 대상이다. 끔찍한 것은 이 공포심 또한 트루먼이 세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작된 경험으로 심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포심을 극복하고 바다로 나선 트루먼은 이미 거짓된 자신을 한 꺼풀 벗겨내고 자신을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자아를 찾아 간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고 진실한 나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트루먼이 30여년을 살아온 초대형 세트 씨헤븐은 돔형으로 지어진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트루먼이 탄 배가 세트의 벽을 뚫고 박힌 것. 이는 거대한 트루먼이 살고 있던 하나의 ‘알’에 금이 간 것을 말한다. 즉, 부화가 임박했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른바 ‘탄생’인 것이다. 또한 이는 세트의 벽이 인간에 의해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한계점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설정해 놓은 한계의 파괴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스스로가 설정해 놓은 한계는 파괴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이 때 트루먼 쇼의 감독 크리스토퍼는 트루먼을 설득한다. 트루먼의 세상에 남을 것을. 이 장면에서 크리스토퍼는 이렇게 얘기한다. “트루먼, 니가 살고 있는 세상은 천국이야. 현실은 쓰레기이고 거짓이 넘쳐나.” 참으로 역설적이다. 거짓 세상을 벗어나도 거짓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토퍼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씨헤븐에서의 신은 크리스토퍼이다. 그런 그에게 트루먼은 30년을 길러온 아들과 같은 존재이다. 현실의 세계는 너무 냉혹하고 더러운 경쟁의 세계인 반면에 낙원과도 같은 가상의 공간 씨헤븐에서 트루먼은 적어도 편안할 수 있다. 우리가 트루먼의 행복을 어디까지로 설정 하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는 씨헤븐을 박차고 나오려는 트루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 같은 심정으로 트루먼을 말려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트루먼은 편안하게 안위하는 것 이외에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 만이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한 그를 향해 트루먼은 위에서 소개한 인사말을 하며 멋지게 퇴장한다. 완전한 탄생. 트루먼. 그는 진정 Trueman이 된 것이다. 크리스토퍼에 의해 만들어진 삶, 만들어진 성격, 만들어진 인생. 이 모든 것을 부정하며 멋들어진 인사를 남기고 나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트루먼의 모습은 진정한 의미의 자신을 찾은 트루먼을 표현한다.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의 트루먼은 이때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트루먼이 탈출하는 모습을 본 시청자들은 어떠한가? 그의 의도된 거짓 인생을 보며 즐거워하던 모두가 바다 위에서 생명이 위험할 때엔 모두가 가슴 졸여한다. 마침내 문을 열고 진짜 세상으로 트루먼이 나오게 되었을 때, 그들은 기뻐한다. 기쁨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소리치기도 한다. 한 인간을 이제껏 전국민이 지켜와 보고 그에게 ‘사랑받을 기회’ ‘사랑할 기회’조차 송두리째 앗아간 죄의식은 시청자에게는 없다. 그저 시청자들 또한 쇼의 또 다른 1인칭 관찰자가 되어 인간적으로 트루먼을 나가라고 응원한다. 그 결정은 자신들은 아직 ‘인간적’이라는 자만감과 그들은 자유롭다는 ‘우월감’에 바탕한다. 트루먼 쇼의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없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 바로 그들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트루먼과 같은 또 다른 명백한 피해자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30년간 진행되어 온 트루먼 쇼는 진부할 수 있다. 그들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는 데에 익숙해졌고 다른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또 다른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자신들은 트루먼과 다르다.” “자신들은 진실만을 본다.”라는 자기 괴멸적 우월감은 정보기술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지배층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실제로 정보기술을 다루는 자들은 모든 사실과 진실을 가공해서 보낼 수 있음에도 그에 대한 비판적 수용 의식이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트루먼 쇼를 보는 것 자체가 “너희들은 이렇게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면서 좋아하느냐”는 메세지를 담은 리얼 트루먼 쇼일 수도 있음에도 말이다. 더 이상 밖에 나가 사실을 대하고 부딪쳐 보고 진실을 대하기 귀찮아진 그들은 통제혁명론, 감시사회론에서 말하는 정보지배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나기에 너무도 배가 불렀다. (여기서의 통제혁명론, 감시사회론은 정보사회론적 관점에서의 데이빗라이언의 논점임을 밝힌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그 부분은 자기 주변 일을 제외하면 사실상 모든 사회의 일들을 미디어로밖에 볼 수 없는 -나 자신을 포함한-현대인에게 경각심을 울리고 비판적 수용이 정말 무엇인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함축적 메세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