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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삼국통일에 대한 고찰 평가B괜찮아요
    신라 삼국통일에 대한 고찰《목 차》1. 머리말2. 7세기 신라의 대내외적 위기3. 신라의 위기극복과 삼국통일4.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와 한계5. 맺음말1. 머리말우리나라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항쟁이 그 주를 이루며 역사가 전개 되어 왔다. 그런 과정에서 중대한 시기적 변화에 따라 삼국의 모습은 달라져 왔고, 여러 의미 있는 사건이 있어 왔다. 필자는 그 사건 가운데 가장 큰 충격을 주고 의미를 주는 것이 삼국 통일이라고 생각 된다. 삼국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지만 하나로 묶는 국가의 탄생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그런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이후 북쪽에 발해가 성립되어 짐으로 인하여 남북국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통합과 우리나라 역사 흐름에 주는 영향력은 작다고 보지 않기에 삼국통일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중요한 일이라 보여 진다. 그래서 일찍부터 삼국통일에 대해서 역사가들의 많은 논의와 평가가 이루어 져왔다. 그 큰 줄기는 두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는데 해방이전까지의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어떻게 논의 되었는지 알아보자.긍정적인 평가는 고려시대의 『삼국사기』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그런 인식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도 계승되고 있다. 그 후에 일제시대로 이어지면서 이런 긍정적 인식론은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라이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하였다. 일본 사학자들의 긍정론은 당시 만주와 관련하여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만선사관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삼국통일에 대한 회의적 부정적 입장은 민족사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조선후기 들어와 이름을 가진 진평왕의 아래에 태어난 이는 곧 부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여자이지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의식에 의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으로 즉위한 이가 여성이었다는 것이 비록 혈통이나, 사상적으로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었으나 그것에 불만을 품는 존재들이 잠재하게 되면서 정국을 위태롭게 했다.선덕여왕 2년(633)에서부터 14년(645)에 이르기까지 여제동맹의 군사적 침공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백제의 공격이 대부분이었으며 수준도 매우 위협적이었다. 그중 642년 백제 공격에 따른 국서(國西) 40여 성의 함락과 대야성의 상실로 신라는 백제와의 국경을 남으로는 낙동강 이동에서 접하게 되었고 수도 경주가 적 앞에 노출시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고구려·백제 양국에 의한 당항성 협공은 신라의 대중국 통로를 차단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당항성은 신라 대외교섭의 중요한 관문이자 정치·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거점으로 이의 상실은 곧 고립무원에 처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는 곧 즉위와 더불어 논란이 되었을 여왕의 통치체제에 대한 불신을 불러 일으켰다.)그런 가운데에 신라 정부는 당나라에 급변을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백제 양국의 협공을 고발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 자리에서 당 태종은 사실상의 여왕퇴위를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중고왕실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당시의 정치세력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들 간에 미묘한 갈등과 경쟁의 양상이 노출되고 있었다. 우선 당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고 있던 신진세력은 사륜계로 지칭되는 방계왕족 김춘추계와 가야 왕족 후예로서 군권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김유신계의 연합세력을 말하며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하였다. 한편 보수 세력은 중고기 이래의 불교이념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지만 여왕의 진퇴문제를 둘러싸고 여왕의 존재를 인정하는 선덕여왕 및 그 측근들로상은 상대등이므로 이 난은 상대등 비담이 왕위쟁탈을 목적으로 일으켰고 추대될 사람도 바로 비담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김춘추·김유신 등 신흥세력과 비담 등 구귀족세력간의 쟁패전이었으며, 선덕여왕 개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핵에서 밀어난 원동륜계의 반진지왕계 운동이라는 견해이다.)어찌 되었든 이일을 계기로 김춘추계와 김유신계의 연합세력이 승리하여 진덕여왕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해, 혼란한 정국을 안정화 시켜 나가게 되었다. 진덕여왕이 죽은 이후에는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그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그것을 억누르고 마침내 태종무열왕이 됨으로 인하여 왕실은 성골에서 진골로 전환되었고, 신라 중대 전제왕권의 그 첫 문을 열어 나갔다.한편 신라는 대외적으로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통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해 나갔다. 백제와 고구려 양국과의 대립과 갈등관계에 높이며 한반도에서의 고립되어버린 신라로서는 그에 대응할 만한 세력을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 외부세력으로 ‘왜’와 ‘당’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왜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맹방관계로 당과의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점차 대외관계가 고구려와 백제로 서서히 경사되어 가면서 신라와의 관계는 소원해 져갔다. 그래서 당이 643년에 신라의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였을 때 거부하기도 하였지만, 신라가 의지하고 동맹을 맺어 위기를 극복하게 해줄 세력은 당시 국제 정세로서는 당이 유일했기에 적극적 외교를 펼쳐 나갔다.당시 당의 상황은 신라의 요청을 거부한 이전과는 좀 달라져 있었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왕조로서의 자존심과 중화질서에 의거하여 주변을 복속, 평정해 나가던 당에게 당 중심의 질서 편입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패권을 추구하는 고구려의 존재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더하여 고구려의 실질적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세워 권력을 독점하며 당에 대한 초강경 노선을 선언하였다. 그에 당은 고구려 공격을 결심하고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나 실패 한다. 이후 당은 아무런 성과가 없이 물러났다.당이 추진한 요동공략과 평양직공의 두 전략은 모두 실패했지만 고구려를 점령하려는 당의 의지마저 꺾인 것은 아니었다. 662년에 평양직공책도 무위로 돌아간 뒤, 666년 12월에 당이 고구려 원정을 재개할 때까지 두 나라 사이에는 소강 상태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기왕의 긴박했던 양국의 전쟁 추이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이 동안 당은 백제의 옛 땅을 통합하려는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 곳에 기미지배를 완료하여 나갔다. 한편 신라도 664년에 이르러 백제부흥군의 진합을 끝내게 됨에 따라 666년에 다시 고구려 공략에 논의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구려의 방어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을 검토하였다.그런 가운데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당의 강경노선을 주도하던 연개소문이 665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태막리지에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이 취임하였는데 그는 보장왕과 구귀족세력의 당에 대한 온건노선에 동조하였다. 반면에 차남 남건은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강경노선을 고수하고 있었고, 남산도 이를 따랐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후에 일어난 자제간의 내분은 장기간의 여·당전쟁으로 내연하고 있던 정치세력간의 당에 대한 노선 차이가 태산봉선의 참여를 계기로 표출되기에 이른다.당은 태산 봉선에 관한 조선을 내린 후, 유인궤가 인솔한 신라·백제·탐라·왜 등과 달리 고구려를 참석시키려고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교전상태에 있어 고구려의 봉선 참석을 유도하여 내분을 회책하고 고구려의 방어역량을 약화시키려는 공작이었다. 이런 공작은 성공을 거두어 고구려의 내분을 만들어 냈으며 그로 인해 당으로 남생이 망명하자 고구려 원정을 재개하였다. 당의 수륙 양군과 신라의 응원군이 협공하는 상황에서 남생의 사주를 받은 중 신성의 내응으로 668년 9월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끝내 함락되었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3) 나당전쟁과 삼국통일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서서히 신라와 당의 대립준외교문서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648)에 입조(入朝)하여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기일을 정해주셨읍니다. …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현경(顯慶) 5년(660)에 이르러 …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끄실 수 없었으나, 과거의 은혜를 생각하셔서 억지로 국경까지 나가 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 양군이 같이 [백제] 왕도에 도착하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 대군이 돌아간 후 적신(賊臣)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 함락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쳐부수어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서로 바꿔 잡아먹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남쪽의 여러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은 승세를 타고 다시 웅진부성을 에워싸니 이로써 웅진은 길이 끊겨서 성 안에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장정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그 곤경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6월에 이르러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의식은 겨우 끝났으나 …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와서 칙명을 받든 바,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나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웅진부성이 고립되어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
    인문/어학| 2008.10.17| 6페이지| 2,000원| 조회(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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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의 말갈지배
    고구려의 말갈지배《목 차》1. 머리말2. 말갈종족의 존재양상과 고구려의 말갈복속3. 고구려의 말갈 지배 방식4. 전쟁시의 말갈동원과 동원 체계5. 맺음말1. 머리말고구려의 활발한 정복활동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시기를 대표하여 잘 알려있다. 정복활동은 단순한 영토의 확장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정복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까지도 고구려의 민으로 편입되어 인구의 수가 많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확장된 영토를 관리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정복되어진 그 주민들을 통치하는 일은 고구려의 국가체제 발전에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문제로 작용될 소지가 많았다. 특히나 그 정복되어진 주민들이 동족이 아닌 이민족이었을 경우에 발생되는 문제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고구려가 자리한 위치가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고구려는 남으로 동족인 백제와 신라와 대립하지만 북으로는 한족이나 북방이민족과 대립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삼국 중 이민족과의 대립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의 활발한 정복전쟁을 통해서 다스리게 되어 질 이민족의 지배에 대하여 많은 고심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그런 이민족 중 고구려에게 있어 말갈과의 관계는 밀접하고 주요하다. 고구려 멸망 시까지 지속된 고구려의 말갈에 대한 지배권의 확대·강화과정은 국세 팽창의 시·공간적 양상과 흡사한 전개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말갈족은 안시성 전투에서 수천 명씩 항교(抗敎)를 당하면서도 종군하는 등 6~7세기 고구려 군사행동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 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부흥운동 과정에서 주목되는 활동을 하였고,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진 발해의 건국에도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말갈과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하는 지, 그 지배방식을 알아보는 것은 고구려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기존의 말갈과 관련한 연구에 대해서 알아본다면 말갈에 관해서는 발해의 건국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그간말갈은 서로는 북류 송화강, 남으로는 백두산, 북으로는 동류 송화강, 동으로는 연해주 지방에 걸쳐 수많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꾸려나가고 있었고, 이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 『수서』와 『신당서』에 입전된 말갈 7부를 들고 있다.) 이렇게 중국사서에 서술된 말갈 종족에 문제가 된 것은 흔히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주축이 되어 성립되어 졌다고 알려진 발해를 누구의 역사로 기록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더구나 중국사서와 달리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관계 기사는 만주지역의 말갈과 혼동을 일으키는데 많은 부분 일조했다. 『삼국사기』에 90회 정도 나타나는 말갈은 백제 온조왕대에 백제 초기부터 통일신라 7세기 말까지 연속적으로 나타나며 남북조시기 신라가 구서당 가운데에 말갈세력으로 흑금서당(黑金誓幢)을 설치하고 있는데도 알 수 있으며, 이에서 보듯 분명 당시 7세기 까지 통일신라 내에 말갈세력이 존재하였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말갈이란 종족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는 많은 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학자들 간의 의견도 분분하게 되었던 것이다.본고에서는 머리말에서 그와 관련하여 말갈의 족계(族系)문제에서 기존의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하나는 이들을 고구려와는 별개의 종족, 즉 숙신(肅愼)·읍루계(?婁系)로 이어지는 일원적 종족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고구려와 같은 예맥계(濊貊系)가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원적 계통론이 그것이었다. 전자의 주장은 주로 중국학자들에 의해서 1970년대 이후 발해의 건국주체와 관련하여 적극 주장하고 있으며, 그 이유로 말갈의 계통과 생활 습속 등을 기록한 중국 사서를 근거로 들고 있다.후자의 주장은 중국사서에 기록된 말갈의 거주지가 단일 종족의 활동무대로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지나치게 넓다는 저에 착안하여 다원적 계통론이 제기 되었고, 말갈의 거주지가 고구려의 영역이 상당기간 동안 겹친다는 점과 일부의 말갈이 고구려 군의 한 축을 형갈에 대하 지배권 확대·강화 과정은 그 국세 팽창의 시·공간적 양상과 흡사한 전개상을 보이게 된다.)고구려는 기원전 28년 두만강 연안의 북옥저 지방에 대한 군사행동을 성공적으로 실시, ‘통구(通溝) → 통화(通化) → 백두산(白頭山) 북록(北麓) → 해란하(海蘭河)·개마고원(蓋馬高原)루트’를 공제(控除)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6년 ~ 기원후 22년 부여는 자기의 읍루 지배 기반을 잠식(蠶食)하고 있던 고구려에 대한 일련의 공격적 방어조치를 취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 대무신왕의 부여국공멸작전 앞에서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이후 고구려는 책성(柵城)을 군사 거점화하여 관북(關北)·간도(間島) 및 연해주 지방 일대의 읍루·숙신이라 지칭되던 ‘백두부’ 및 ‘불열부(拂涅部)’ 말갈에 대한 실효적 군사행동을 담보하는 작전기지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요동 방면의 한(漢)세력에 대한 파상적 공세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태조왕 69년 겨울 10월에 ‘숙신래헌(肅愼來獻)’이라는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그간 동북경영에 쏟은 관심과 노력의 소산이었다. 244~245년 관구검 강습 당시 동천왕이 북옥저 지방에까지 퇴각하여 책성을 최후의 저항 거점으로 삼아 위군(魏軍)에 대한 반격작전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위군의 추격전이 ‘지숙신씨남계(至肅愼氏南界)’에서 그친 사실은, 고구려가 그간 애써 추진한 적극적 이 방면 경영의 성과로서 간도·연해주 일대의 읍루(말갈)족이 고구려의 전열(戰列)에 가담하였음을 시사해준다).한편 280년 고구려는 송화강 유역 방면으로 세력을 확산하는 과정에서 조우한 당시 ‘숙신’이라 지칭되던 속말부(粟末部)말갈 제 세력을 제압하고 이들에 대한 사민(徙民)·부용화(附庸化)정책을 실시, 부여에 대한 자기 잠재적 군사역량을 주도면밀하게 조성해 나갔다.또 광개토왕은 역랑 4년 모용씨·백제 및 거란(契丹)에 대한 군사행동을 수행하던 와중에서 이미 그 가운데 상당 세력이 고구려의 지배권 아래 포섭된 백산부·불열부 말갈에 대한 자기 지배권 확인 차원의 군사구려는 양 세력의 대립관계에 대하여 적극적인 중재를 하지 않고 방조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말갈의 관계는 5세기 초반에 이르러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립을 도모하면서 급변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대처한다. 그러나 신라가 진흥왕대 한강유역의 전지역을 차지하고 동예지역을 장악하면서 말갈세력은 토착적인 기반을 붕괴되고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 고구려의 말갈 지배 방식고구려는 말갈을 어떤 방식으로 지배했는지는 고구려의 이종족 지배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접근해 볼 수 있다 생각한다. 고구려는 알다 시피 전방위적 전복전쟁 수행 과정에서에서 말갈·선비·거란·실위·지두우 등 이종족 집단을 군사력을 제압하면서 이들에 대한 실효적인 지배권을 확립해 나갔다. 특히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이래 급팽창한 자기 영역 내에서 영위되는 제기저사회(諸基底社會)의 다양한 존재형태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의하여 다기한 지배형태의 병존을 허용하는 ‘다종족국가’의 경영, 곧 제국적 통치질서의 실효적 운용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농경정주양식(農耕定住樣式)을 영위하는 ‘촌(村)’을 그 기저 사회로 하는 ‘성-촌 지배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면지배적 영역통치형태를 실현하여 안정적 수취기반을 확보하는데 진력하였다.한편으로는 고구려는 이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즉 그들 고유의 생존영역과 비호·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력(勞力)과 군력(軍力)을 수탈하였던 것이다. 결국 고구려는 이런 보호·종속관계를 바탕으로 말갈·선비·거란 등의 이종족 집단을 부용세력화함으로써 제국의 군사잠재력의 기반을 확대·강화시켜나갔던 것이다.)이러한 고구려의 이종족 지배 방식에 의거하여 말갈도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구려 초기에는 말갈족도 그 영역내에 편입된 다른 속민집단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지배하였다. 말갈족의 경우 지리적 환경이 덜하고 후진사회여서 경제적인 수탈의 필요성이 적었다. 또한 고구려 자체의 국가적 발전도 말갈의 입지적 조건과 수문화권 및 한족과의 종족적 이질성등의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고구려와 수의 대립속에서 고구려는 말갈군을 인솔하여 수의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그와 관련하여 말갈 기록은 다음과 같은 사료에서 알아 볼 수 있다.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 총관 위충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 양과 왕세적을 모두 원수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본기」20 영양왕 9년조,『삼국사기』권 20 中에서 -이렇게 고구려의 요서공격을 시작으로 고구려와 수나라 간에는 4차에 걸친 전쟁이 벌여졌다. 그때마다 고구려는 말갈군을 인솔하고 전쟁에 임하였다. 고구력 막강한 수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말갈군을 기병화한 뒤 그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 그리고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나타났다.수는 고구려에 침공에 온 국력을 기울인 상황에서 고구려에 패한 후 제국의 위신이 여지없이 실추됨은 물론 백성들도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 수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마침내 다시 내부적 혼란 상황에 돌입하게 된다. 그 난세를 다시 진압하고 새로이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은 바로 당이었다.당은 대고구려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한 전왕조의 사례를 되세계 섣불리 고구려와의 전쟁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표면적으로 실제적인 충돌없이 우호적인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당 태종은 이면에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에게도 고구려는 많은 부담이 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고구려를 침공하기에 앞서 수가 했던 것처럼, 그리고 중국의 전통적 방식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책략에 의거하여 거란과 말갈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런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여 말갈의 일부(一部)가 당나라에 내부(來附)해 오기도 했다.)거기에다 고구려의 실질적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인문/어학| 2008.10.17| 6페이지| 1,500원| 조회(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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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의 신화 평가C아쉬워요
    《독일의 신화》1. 머리말어떤 나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근본적인 것이 아닌 문화, 경제, 사상, 그 밖에 각종 여러가지의 것들로 이해를 해 나가고 접근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본시 근본에서 파생된 것들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결국에는 근본이라는 것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까닭으로 빙빙 돌아 먼길을 가는 것 보다는 근본이라는 것을 파악해서 나아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떤 나라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름길이 될것이고, 좀 더 큰 시야로 총제적이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여기에서는 독일이라는 특정 나라를 다루고자 하며, 독일이란 나라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것, 근원적인 것을 그 주제로 하여 서술 하고자 한다. 독일의 근본이라 하면 독일을 이루는 토대가 되는것으로 독일이란 나라가 존재하기 전 부터 그 맥이 이어져 확고 부동하게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의 독일을 만들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근본과 근원을 필자는 독일의 신화로부터 찾아 냈다.신화라는 것이 어쩌면 허무맹랑하고 말도 안되는 것들이 총집합이 생각될 수 있겠지만 그 황당함과 허무맹랑함 속에는 고대인들의 사고관이 들어있고 그것은 알게 모르게 변형되고 가지를 쳐나가 오늘날의 상식과 사고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신화를 안다는 것은 근본에 가장 가깝고 밀접하게 도달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독일의 신화를 통해서 독일의 근본에 도달하고 이해할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2. 게르만 신화와 그 특징(1) 게르만 신화란?독일인은 아시는 바와 같이 게르만 족의 일파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신화라는 것은 바로 게르만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 게르만 신화를 흔히 사람들은 '북유럽 신화'라고 부른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켈트 신화와 더불어 유럽의 3대 신화라고 하는데 왜 게르만 신화를 북유럽 신화라고 부르는 것일까?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켈트인을 밀어내고 로마를 무너뜨린주를 신들이 타파하여 질서있고 조화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북유럽 신화에서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신과 거인의 공멸, 그리고 이 세상의 완전무결한 파국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둘째, 그리스 신들은 말 그대로 불사신이지만 북유렵 신화에서는 신도 죽는다. 그것도 최고신인 오딘이 한 마리 늑대에게 잡아 먹힐 정도로 참혹하고 수치스럽게 죽는다. 이런 직독한 신성모독은 북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의 세계를 끔찍해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 인간의 수호자인 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세상인데 한낱 미물인 인간의 삶이야 오죽하랴!셋째, 그리스 신화가 비교적 밝고 현실긍정적인 데 비해 북유럽 신화는 어둡고 비관적이다. 고대 그리스인 자신들이 살던 현실 세계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고대 북유럽인은 언제 이 끔찍한 현실이 끝나고 살 만한 미래 세상이 오느가에 더 신경이 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는 신과 거인의 공멸, 즉 현세의 완전한 파국 뒤에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겨울이 만물의 생명을 앗아 간 뒤 봄이 뒤면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듯 푸르른 생명의 땅 위에 펼쳐질 날을 북유럽인은 기다리고 있다.넷째,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북유럽 신화에는 인간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스 신화가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되면서 인간을 위한 신화로 다듬어진 반면, 북유럽 신화는 자연의 힘을 한없이 우러르고 두려워하던 원시시대의 세계관을 비교적 온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다섯째, 북유럽 신화에는 그리스 신화와 같은 문화 영웅이 없다. 그리스 신화 최고의 문화 영웅인 프로메테우스와 가장 유사한 북유럽 신화의 인물은 로키이다. 프로메테우스처럼 로키도 거인족의 일원이고 머리고 좋으며 신들의 뜻을 거슬러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신들이 독점하던 불을 훔쳐다주고 기술을 가르쳐준 것과 달리 로키는 신들에 대한 시샘과 악으로 요툰헤임과 동쪽의 산악지역에 거인들의 성태가 있는데 이것은 바깥 세상의 의미를 가진 우트가르드라 불린다. 미드가르드 북쪽에는 난쟁이들이 살고 있는데 어두운 집이라는 니다벨리르인 동굴이 그것이다. 그 곳의 지하에는 검은 꼬마요정들의 땅인 스바르탈프헤임이 있다. 그리고 난쟁이와 검은 꼬마요정들 사이에 확실한 차이점은 발겨할 수 없으나 둘은 서로 동일 종족으로 보인다고 한다.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는 떨고 있는 길이라는 의미의 비프로스트라고 불리는 불타는 무지개 다디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세 개의 색채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어떤 구조물보다도 더욱 정교하고 뛰어난 기술로 이루어졌다고 한다.세 번째 수평면에는 미드가르드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지하로 9일을 달려가야만 도착하는 죽은 자들의 세상인 니플헤임이 있었다. 니플헤임은 몹시 추운 곳이며 영원히 밤만 지속되는 곳이었다. 그 곳의 성채는 우뚝 솟은 방볍과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문이 있는 헬이었고, 같은 이름을 지닌 반은 희고 반은 검은 끔찍한 괴물 여인이 다스리고 있었다.그래서 아홉 세상이란 아스가르드, 바나헤임, 알프헤임과 미드가르드, 요툰헤임, 니다벨리르, 스바르탈프헤임, 헬과 니플헤임을 지칭한다. 만일 헬과 니플헤임을 하나의 세상으로 묶는다면 아홉 번째 세상은 불의 나라인 무스펠헤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세 개의 수평면과 아홉 세상의 축은 거대한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이다. 어디서 생겨났는지 기월도 할 수 없고 라그나뢰크에서도 살아남은 이 거대한 나무는 봅시도 광대하여 “그 가지는 온 세상에 다 뻗쳐있고 하늘까지 닿아있다.”라고 한다. 이그드라실은 뿌리가 세 개 있다. 뿌리 하나는 아수가르드 아래로 파고 들어갔다. 운명의 세 여신인 노른이 지키고 있으며 신들이 모여 매일 회의를 여는 장소인 우르드 샘이 바로 이그드라실 뿌리 아래에 있다. 두 번째 뿌리는 요툰헤임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뿌리 아래에는 미미르의 샘이 있으며 이 샘의 물은 지혜의 원천이다. 세 번째 뿌리는 니플헤임으로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희안한 점은 이 무스펠은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니플헤임과 함께.- 헬(Hel): 말 그대로 저승. 협작과 사기의 신 로키(Roki)의 딸인 헬(Hel)이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과 망령들이 득실대는 위험한 장소.※ 라그나뢰크(Ragnarok), 그 이후라그나뢰크세계의 종말은 모든 신화에 어김없이 나오는 주제이지만 게르만 신화에서 만큼 처절한 사계는 달리 찾을 수 없다. 악의 화신 로키의 세 자식 앞에서는 심지어 신들마저 무력하게 몰살당한다. 라그나뢰크는 이미 태초에 예정된 ‘신들의 황혼’이나 우주적 세계연극의 절정이다. 세계는 그 자체와 최오의 피조물들이 생성될 당시부터 몰락의 맹아를 품고 있었다. 물과 불의 작용으로 생성된 물질세계는 애초부터 불완전하고 무상한데다가, 창조의 주체인 신들과 그 피조물인 인간이 각기 자신들의 세계에서 서로 불화하고 반목한 끝에 결국 파멸의 소용돌이에 빠젼든다. 라그나뢰크를 예고하는 전조로서 수많은 파국이 일어난다.선과 아름다움의 남성적 표상으로 널리 숭배 받는 발드르가 질투와 증오에 찬 로키에게 살해당하고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 밖에서는 적대적인 거인족의 증오가 한층 격렬해진다. 마침내 라그나뢰크에 이르러 온갖 악의 세력들이 일제히 뛰쳐 나온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현세 파괴와 내세의 승리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달리 말세에 이어질 재생도 암시한다. 생태계의 회복 및 세대 교체의 의한 신생과 재건의 기미가 희미하게나마 엿보이는 것이다.파국에 앞서 세계수 이그드라실 속에 숨어들었던 젊은이 리프와 처녀 리프트라시르가 생존하여 새 세상에 새 존속을 퍼트릴 것이다. 신족 가운데에서는 오딘의 두 아들 비다르, 발리의 동생 호니르가 살아남고 토르의 아들 모디와 마그니도 위혁의 쇠망치 미룔니를 물려받는다. 억울하게 죽은 발드르가 부활하여 죽은 자들의 세계 헬로부터 돌아온다. 북유럽 신화는 라그나뢰크가 부겁고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신과 영웅들의 용기를 한껏 과시하고 새 세상에의 소망도 담버림.②라그나뢰크 이후- 어머니인 늙은 태양이 하티에게 먹히기 전에 낳은 딸이 세상을 다시 비춰줌.- 인간 리프(Lif)와 리프트라시르(Lifthrasir)가 생존해, 다시 번성함.- 오딘의 아들 비다르와 토르의 아들 마그니, 모디 그리고 창조신 중 하나인 빌리가 생존했고 헬에 억류되어 있던 발데르가 풀려남.(2) 게르만 신화의 신들1)오딘 : 최고의 신이자 아서 신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법을 쓸줄 아는 최고의 마법사.더 많은 지혜를 얻기 위해 미미르의 샘에 한쪽 눈을 바치고 죽은채로 샘위에 거꾸러 일정 기간 매달려 있는다.보라색 옷과 모자를 쓰고 있고 죽음과 관련있기때문에 보라색이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로키와 의형제를 맺고 그를 아스가르드로 데려온다.라그나뢰크때 로키의 아들인 펜리르에게 잡아먹힌다.2)프리그 : 신들의 여왕.오딘이 본처이자 구름을 만드는 여신.오딘과의 사이에서 발데르와 호드를 두었다.발데르가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자 아홉세상을 돌면서 모든 생명체에게 발데르를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낼 정도로 모성애가 뛰어나다.3)토르 : 북유럽 신화의 제 2인자.머리가 나쁘지만 힘은 아주 세다.묠니르의 주인이고,천둥과 번개의 신이다. 라그나뢰크때 로키의 아들인 요르문간드와 싸우다가 둘다 죽는다4)티르 : 전쟁과 법의 신으로,펜리르에게 물려 한쪽 팔을 잃었기 때문에 토르보다 약하다.하지만 가장 용감한 신이다.라그나뢰크때 저승의 개 가름과 싸우다가 죽는다5)프레이르 : 바니르 신족으로,아서 신족과 바니르 신족의 전쟁후 아버지와 여동생과 함께 아스가르드로 보내져 온 신.남신 중에 가장 잘생겼다.거인족 여자인 게르드와 결혼했다.6)프레이야 : 바니르 신족,프레이르의 쌍둥이 여동생이다.사랑과 풍요의 여신이며,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다.남편이 있지만 자신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흘린 눈물이 황금이 된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걸이 브리싱가멘을 가지고 있다7)뇨르드 : 프레이르와 프레이야의 아버지이다.누이동생과 결혼했으나,아스가르드로 오면서 다
    인문/어학| 2008.05.18| 9페이지| 1,500원| 조회(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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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사노비 파악방식
    조선후기 사노비 파악방식 - 김건태 -1. 머리말기존의 연구는 노비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해명하기 위하여 노주와 노비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 결과 1980년대 이후 노비와 관련된 연구는 커다란 진전을 보았다. 그리고 국내외 연구자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도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 성과를 되돌아 볼 때 국가와 노비의 관계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노비의 사회경제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사노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단성호적을 중심으로 국가의 사노비 파악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 단성호적의 노비등재 실상단성호적은 타군현에 거주하는 노비를 등재하기도 하고, 동일한 노비를 두 번 기재하기도 한다. 따라서 단성현의 노비 수는 호적이 작성될 당시 단성현의 거주자가 아니거나 이중 등재된 노비들을 제외한 숫자가 된다. 즉 국가의 사노비 파악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성호적에 등재된 노비를 단성현의 노비와 그 이외의 부류로 이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단성호적에 등재된 당선현의노비 수를 계산할 때 제외되는 부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①~⑭번에 속하는 부류는 호적이 작성될 당시 단성현의 거주자가 아니거나 이중 등재된 노비들이다. 따라서 단성현의 노비 수에서 제외되는 부류이다. 이들 외에도 단성현의 노비에서 제외되는 부류는 더 있다. 그들은 호적에 두 번 등재됨에도 불구하고 ①~⑭의 용어가 붙지 않은 노비이다. 이러한 경우를 ⑮‘중출’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우리가 단성현의 노비수를 계산할 때는 중출에 속하는 노비는 한번만 계산해야 된다. 한편 다음과 같은 노비들은 단성현의 노비에 포함되는 부류이다.다시 정리하자면 단성현의 노비는 ?~?번에 해당하는 부류이고 단성현 노비에서 제외되는 부류는 ①~⑮번에 속하는, 즉 타군현에 거주하는 노비, 이미 사망한 자, 이중 등재된 노비 등이다.호적에 기재된 노비 가운데 단성현의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 [표1]과 [그림1]에서 보듯이 단성호적에 등재된 노비 가운데 단성현 노비의 비율은 18세기 전반까지는 50~60% 사이, 18세기 후반에는 60~70%사이, 19세기에는 70~80%사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성현의 노비 수를 계산할 때 제외되는 부류들은 호적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단성호적에 등재된 양인도 노비와 마찬가지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즉단성현의 노비 수를 파악할 때 사용한 방법을 양인에게 적용하면 단성현의 양인 수가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단성현의 노비와 양인 비율을 살펴보기로 하자.단성현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의 장기추이는 1820년대를 최저점으로 하는 커브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19세기 중엽에 노비의 비율이 상승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노비제는 18세기 이후부터 빠르게 해체된다는 일반적 이해와 상치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1876년에 작성된 대구 조암방 호적대장과 1897년에 작성된 의령현 화곡면 호적중초에서 찾아진다. 1876년 대구 조암방 호적대장에 등재된 208호 가운데 187호에는 노비 1구, 1호에는 노비 2구가 등재되어 있고, 노비가 등재되지 않은 호는 20호에 지나지 않는다. 1897년 화곡면 호적중초에 등재된 266호는 어김없이 노비 1구씩을 등재하고 있다.이러한 사례를 통해 19세기 후반 들어 1호에 노비 1구를 기재하는 관행이 서서히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노비를 보유하지 못한 호라 할지라도 노비 1구를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호적대장을 작성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단성현 또한 19세기 중엽부터 허구의 노비를 호적에 기재했기 때문에 노비의 비율이 증가했다고 여겨진다.한편 단성현의 노비는 상전호의 솔하에 기재되기도 하고, 독립호로 등재되기도 한다. 이같이 노비가 독립호를 구성할 경우 해당 호의 구성원 가운데는 노비뿐만 아니라 양인도 포함되어 있다. 양천교혼이 이루어진 노비호이다. 그런데 양천교혼이 이루어진 호의 구성원을 노비와 양인으로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18세기 이후에는 노비종모법이 적용됨으로써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지만 호적대장을 살펴보면 남편이 노이고 부인이 양녀인 경우에도 그 자식이 노비 신분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사례가 흔히 나타난다. 나아가 노비호의 경우 자식들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는 표시를 전혀 해두지 않은 사례도 다수 보인다. 호적대장의 기재양식이 이와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주호의 직계가족 가운데 한 명 이상이 노비이면 그 호의 직계가족과 방계가족을 노비로 파악하였다. 즉 여기서 말하는 단성현의 노비 수는 노비화 양인의 가족도 포함된 수치이다.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상전의 솔하에 기재된 노비와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 중 어느 쪽이 주임을 이루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단성현 노비 가운데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8세기 중엽만 하더라도 절반이 넘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30~40%, 19세기에는 10%미만으로 감소한다. 이렇듯 노비제의 명맥을 끝까지 유지한 부류는 바로 상전의 솔하에 기재된 노비였다. 노비제 해체의 물결은 외곽에서 내부로 밀려들었던 것이다.3. 단성호적에 등장하는 노비유형호적대장은 노비소유권 분쟁이 발생했을 때 중요한 증빙자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세대장의 기초자료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노비를 호적에 등재할 때 정부 기관에 소속된 공노비인지, 사ㅓ원과 향교 같은 교육 기관에 소속된 노비인지, 개인 소유의 노비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가 그의 솔하에 노비를 기재하게 되면, 솔하에 기재된 노비의 주인이 주호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성호적에는 노비의 소속처, 주호와 솔하노비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각 용어를 기준으로 노비의 유형을 살펴보도록 하자.1)사노비(私奴婢) ; 호적에 사노 혹은 사비로 나타난다. 사는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노주가 자신의 노비를 솔하에 기재할 때는 단지 노 혹은 비라고 기재하지, 사노 혹은 사비라고 기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호적을 작성할 때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가 사노비인지 아니면 공노비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사자(私字)를 붙였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사노비는 공노비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사노비는 타인의 노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편 사노 혹은 사비 앞에 직역을 비롯하여 병인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2)반노비(班奴婢) : 호적에 반노 혹은 반비로 나타난다. 반노, 반비의 의미는 상전의 노, 상전의 비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노비의 부모 가운데도 반노, 반비가 많은데 이 경우에도 반노비는 상전의 노비라는 뜻이다. 양반들은 특정 노비들에 대해 반자를 붙였던 이유는 노비들의 소유권을 분명히 해두기 위한 조치였다. 부모 가운데 한 명이 반노비로 칭해지는 노비들은 모두 양천교혼소생이거나 노비가 다른 사람의 노비 혹은 양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이다. 그렇기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소유권 분쟁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노비들의 부모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노비라는 사실을 밝혀두었다고 할 수 있다. 반노비는 상전이 다른 노비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처럼 반노비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상전의 노비, 나의 노비, 상전이 다른 노비 등으로 해석되고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지만 주로 상전의 노비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반노 혹은 반비 앞에 직역을 비롯하여 병인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3)타노비(他奴婢) : 18세기 단성호적에서 단 한번 나타난다. 글자 그대로 타인의 노비를 지칭한다.4)신노비(新奴婢) : 부모가 전체 재산의 분재에 앞서 결혼하는 자식들에게 나누어준 노비다.5)호노비(戶奴婢) : 글자 그대로 우리 집 노비라는 뜻으로 나의 노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6)앙역노비(仰役奴婢) : 상전가에 신역을 제공하는 노비이다. 반노비와 사노비와 마찬가지로 직역을 비롯하여 병인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붙는 경우가 있다.7)사환노비(使喚奴婢) : 앙역노비와 같은 성격의 노비이다.8)노비(奴婢) : 단성호적에 등재된 노비 가운데는 단순히 노 혹은 비라고 표시되는 경우가 다수 있다. 그야말로 노비라는 뜻이다. 이들에게도 직역을 비롯하여 병인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붙는 경우가 있다.9)노비라는 표현이 없이 단지 직역을 비롯하여 병인과 같은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만 붙는 경우 :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의 자식 가운데서 이러한 부류가 보인다.10)명(名)만 기재된 노비 : 단성호적에는 이름만 있고 노 혹은 비를 비롯한 어떤 용어도 붙지 않는 노비들도 다수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 또는 독립호를 구성한 노비의 자식에게 찾아진다.11)사노비(寺奴婢), 서원노비(書院奴婢), 향교노비(鄕校奴婢) 등 : 단성호적에는 국가 기관이나 사회단체에서 소유하고 있던 노비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4. 솔거·외거노비의 성격단성호적에는 솔거라는 용어가 전혀 없고, 외거로 표시된 노비 또한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호적작성의 기초가 되는 호구단자와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된 준호구 등에 솔노비와 외거노비가 다수 나타난다. 즉 조선후기 호적류에서도 솔거라는 용어는 확인되지 않지만 여기서는 기존의 관행대로 솔노비를 솔거노비로 칭하기로 한다. 조선후기 호적류에 나타나는 양반가의 노비분류 양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를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2002년까지 간행한 『고문서집성』에 실린 호적류의 노비분류를 보면 노비를 솔거와 외거로 구분하고 있는 호적류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솔거노비와 외거노비의 분류기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인문/어학| 2008.05.18| 6페이지| 1,000원| 조회(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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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사 과제 -2. 페미니즘의 갈래1) 자유주의 여권론자유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이성에 있으며, 반인은 이성적 존재로서 동등하다고 여겼으나 그것은 남성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런 발상에 맞서 여성 역시 이성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며, 여성에게도 똑같은 교육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성적 존재로서 잠재력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회구조 자체보다는 관습과 제도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며, 기성 사회의 틀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고 있다. 원래 자유주의 여권론은 사회와 가족을 공적인 기구가 간섭해서 안 된다고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여성들이 부딪치는 많은 문제가 이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자 이 문제를 위해 가족과 성과 같은 개인사에도 어는 정도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자유주의 여권은 이렇게 여성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 하여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나, 불평등한 사회구조 자체를 그대로 둔 채 목표가 제대로 실현될지 의문이 들며,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인 중산층이상, 백인 등 일부 여성들의 권익 신장에 그 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2)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19세기 이후 노동계급 여성들이 사회운동에 진출하며 생겨났으며, 여성들의 조건에 기반 하여 여성문제를 경제적 억압구조와 연결해 파악하고자 했다. 여성 억압은 계급제도와 동시에 발행하였으며, 계급적 억압과 마찬가지로 사적 소유제에 바탕을 둔다는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성별 분업이 이루어져 집안일과 바깥일을 남녀가 나누어 맡았는데 사회경제적 변화로 말미암아 바깥일이 더 중요해 지면서 그것을 담당하던 남성이 지배권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것이 여성 억압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자본주의가 자본의 증식이라는 목적에 맞추어 전통적인 성차별 관행과 관습을 활용하고 변형해 나갔다. 여성을 가사노동에 해방시켜야 한다. 문제의 근원인 사적 소유와 계급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크스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여권론의 단편적·현상적 문제제기를 넘어 여성문제를 역사적·사회구조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여성 억압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고, 여성해방의 전망과 방도를 확실히 제시하였다. 그러나 원론적이고 도식적인 분석을 되풀이하거나 성별 억압으로 환원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며 여성 산업노동자의 문제만 집중한다는 한계를 가지기도 한다.3)급진적 페미니즘1960년대 후반 서구에서 여성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여성 억압을 보는 새로운 관점들이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 여성 억압이 무엇보다도 근본적이며 독자적인 체제를 이룬다고 보는 것인 급진적인 페미니즘이다. 이들은 체제 전체의 문제를 삼으며 모든 억압 가운데 여성 억압이 가장 처음 생겨나고 널리 퍼졌으며, 가장 뿌리 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여성을 종속하는 데서 이득을 보는 것은 남성 집단이라고 보았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는 성애문제를 중시한다. 이성애 주의는 남성 중심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이성애를 평등한 관계로 변화시키고 이성애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면서 레즈비어니즘과 연계된다. 레즈비어니즘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성들 사이에 자매애를 강조하는 것이 공통 특징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 문화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며, 얼마나 다양한 국면에서 여성의 삶을 지배하는 지를 밝혀냈다는데 그 의의가 있으나 모든 현상을 남녀대립이라는 틀로 설명하면서 문제를 단순화하게 하였고, 남성과 여성의 특질을 고정하거나 생물학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등 결정론에 빠지기 쉽다. 계급·인종·민족적인 다른 억압 구조들과의 관계도 묻어 버리고 있으며 특정 여성 집단의 이해만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문/어학| 2008.05.18| 2페이지| 1,0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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