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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보산 사건
    동아시아현대사자신이 특파원이라는 가정 하에, 당시 신문보도 및 후대의 연구 성과를 활용하여, 1931년 7월 중국에서 발생한 만보산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심층 기사를 1800자 내외로 작성하시오.19세기 말부터 우리 농민들은 만주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때 조선 정부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그들에게서 세금을 걷기 시작하였는데 청의 관리들은 이를 알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해관계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인데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서 북간도 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고자 했으나 자국민의 비협조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은 청령을 경작하는 사람이면 모두 청 국민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결국 간도영유권 분쟁으로 승화된다. 간도 영유권 분쟁에서 양측은 백두산 정계비를 놓고 상이한 해석을 하여 갈등을 벌인다.이러한 가운데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철도 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재만조선인에 대한 국적 및 관할권 문제를 청국에 귀속시킴으로써 논란을 끝낸다. 하지만 문제는 한일합방 후에 다시 일어난다.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이라 규정지은 일본은 1915년 만몽조약을 통해 사실상 토지 소유권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맺은 간도협약에 의해 재만조선인들이 중국의 관할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침략을 확장하는데 있어서 불리하게 되었다.결국 일본은 만몽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간도협약이 무효가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반면에 중국은 유효하다가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 측은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은 모두 일본신민이 되었으므로 만몽조약에서 규정된 토지상조권은 그들에게도 유효가 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자연적으로 간도 협약은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간도협약은 특정민족과 특정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만몽조약과 별도로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재만조선인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일제의 침략에 선봉역할을 한다는 오해를 받았으며 일제는 계속해서 재만조선인의 간도정착을 지원하면서 대륙침략정책에 이용하고자 한다. 결국 중, 일 그리고 그 속에 낀 재만조선인들의 갈등 속에서 만보산사건이 일어난다.만보산사건은 간도의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 속에서 벌어지게 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조작 된 것이다. 일본이 사건을 조작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원래 간도 지방은 우리 민족의 무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 된 곳이다. 20년대에 존재하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는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원으로 3부통합운동을 실시하지만 결국 결렬된다. 결국 삼부가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나뉘는데 혁신의회는 나중에 한국독립당이 되고(1930) 그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둔다. 또한 국민부는 조선혁명당(1929)으로 바뀌면서 조선혁명군을 그 산하에 둔다. 이 두개의 군이 중국군과 합작을 하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의 연대 항일 무장 투쟁을 두려워하던 일본은 둘을 이간시키려는 계책을 모색하고 그 해법의 일환으로 실행 된 것이 바로 만보산사건이다.중국인 학영덕이 장농도전공사의 명의로 길림성 장춘현 이통하 동쪽 삼성보 관황둔 일대의 중국인 지주 소한림등 12호의 토지 500상을 10년 기간으로 조지계약을 체결한 후, 다시 이 땅으로 조선인 농민 이승훈 등 9명과 전조계약을 체결한 데서 발생하였다. 땅을 빌린 조선인 농민들이 개간지를 수전으로 만들기 위해 수로를 파자 중국인 지주들은 수로가 자신들의 토지에 손상을 준다고 주장하며 수로공사를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농민들이 일본 경찰의 호위 하에 계속 수로공사를 진행하자 수백명의 중국인이 수로를 파괴했으며, 이에 일본경찰은 그들에게 사격을 가했으나 큰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커다란 유혈사태를 부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조선인과 중국인 양측 모두 커다란 피해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대륙침략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 관동군에서는 이 사건을 이용하기로 하고 장춘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허위 보도하도록 한다.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 기자는 일본의 꾐에 빠져 만보산 현지에 가보지도 않은 채 본사로 허위보도를 전송하였다. 보도에 신중을 기했던 동아일보와는 달리 조선일보는 이를 7월 2일 석간과 3일 조간 호외에 실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 내에서는 중국인 배척사건이 일어나게 되었고 재만조선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조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인문/어학| 2012.06.25| 2페이지| 1,000원| 조회(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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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업적목 차 ◎ 연표 ◎ 주요활동 1) 구국운동 2) 임시정부활동 3) 교육운동 4) 재외한인운동 ◎ 사상◎ 연 표 1878. 11 월 9 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 ( 일명 도롱섬 ) 에서 안흥국의 3 남으로 태어남 .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 1890. 서당에서 황해도 안악 출신 청년 선각자인 연상의 필대은과 교류 . 1894. 상경하여 서부 대정동 소재 구세학당에 입학 , 이즈음 예수교 장로회 입교 .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함 . 1897. 독립협회에 가입 .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발기 . 여름 ,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첫 열변 . 18 조의 쾌재와 18 조의 불쾌를 열거하며 민중의 새로운 자각을 호소 .◎ 연 표 1898 . 11 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 대신을 탄핵하고 , 6 개조의 정치혁신안건의 . 1899. 점진학교설립 . 황무지 개간 사업에 종사 . 1902. 도미 .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를 도산 ( 島山 ) 으로 함 . 10 월 14 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 1903. 9 월 23 일 재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를 조직 , 회장에 피선됨 . 1905.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 창립 , 초대 회장이 됨 . 순국문판 《 공립신보 》 발행 .◎ 연 표 1907. 귀국 후 서울에서 이갑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창립 .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을 비롯하여 , 평양 · 서울 · 대구에 태극서관을 두고 , 평양에 자기회사 설립 . 이토와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 ( 組閣 ) 을 일축함 . 1908. 서북학회 창립 . 1909. 청년학우회 창설 . 안중근 의사 의거로 서울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만에 석방됨 .◎ 연 표 1910. 통감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일축하고 국외 망명의 길을 떠남 . 이 때 거국가를 남김 . 산동성 청도 ( 靑島 ) 에서 독립 운동자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 . 1912. 11 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민보 ( 新韓民報 )》 로 이름을 바꿈 . 1913. 청년학우회 후신으로 흥사단 창립 . 1914. 대한인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음 .◎ 연 표 1917. 송종익 . 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 실업주식 회사 설립 . 대한인국민회 조직 운동 강화 . 1919.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연통제 · 독립 운동 방략 제창 . 임시정부 기관지 《 독립 》 발간 .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총판이 됨 . 1920. 독립운동중심세력의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흥사단 원동위원부설치 . 1921. 임시정부 세력 통일에 노력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인책사임 .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발기 .◎ 연 표 1922. 서울에 수양동맹회 . 평양에 동우구락부 발족을 지시 . 하와이 지방 총회 해체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단 조직됨 . 1923. 국민대표회의 개최 , 동 부회장이 됨 . 그러나 동회가 개화파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 결성과 독립 운동 근거지 이상촌 건설 계획 수립 . 1924. 이상촌 후보지 탐사 .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 1928. 이동녕 , 이시형 ,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 이때 대공주의 제창 .◎ 연 표 1932. 윤봉길 의사의 폭탄사건으로 이날 오후 잡혀 일경에 인도됨 . 4 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 . 대전 감옥에서 복역 . 1935. 2 년 반 만에 가출옥 . 지방 순회 후 평남 대보산 송태 산장에 은거 . 1937. 동우회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 11 월 1 일 서대문 형무소 수감 . 12 월 24 일 신병으로 보석 출감 . 1938. 3 월 10 일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 주요활동 - 구국운동 - 독립협회 1897 년 독립협회에 가입 . 필대은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 설립 .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 . 1898 년 7 월 25 일 ( 음력 )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에서 연설 . - 신민회 1907 년 귀국 . 비밀결사단체인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로 평양에 자기회사 를 설립 . ( 이후에도 한인들의 소자본을 주식형태로 모아 투자하는 많은 주식회사를 설립 ) 국외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 .◎ 주요활동 - 구국운동 유일당 운동과 한국독립당 국민대표회의가 실패 이후 독립운동의 계파와 노선을 초월하는 대동단결운동 전개 . 반 임정세력의 집결지인 북경을 시작으로 , 중국 관내 주요지역과 만주지역까지 확산 . 1932 년 안창호는 피체되었으나 , 유일당운동과 대일전선통일운동은 이유필 · 송병조 · 김규식 · 최동오에 의해 계속 진행되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 중한민중대동맹 으로 결성 .◎ 주요활동 - 구국운동 - 이상촌 건설 운동 목적 1) 해외 독립 운동의 근거지 를 삼을 것 , 2 ) 귀국을 원하되 일본 통치하에 들기를 원치 않는 이들의 집단 생활지 로 할 것 , 3 ) 농촌 도시 생활의 표본 을 만들 것 , 4) 해외 동포로 하여금 모국의 문화를 보존 하게 할 것 등 . 이상촌으로 농촌 생활의 모범 마을이자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만들고자 함 .◎ 주요활동 -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고 헌법과 법률을 제정 · 검토 .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여 비밀연락망을 구축 . 기관지 《 독립신문 》 을 창간 , 대한민국적십자회 결성 , 임시사료편찬위원회 를 설립 . 국내 · 외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임시정부 관할 아래로 끌어들이고자 각 지역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교섭활동 . ⇒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총단결하고 외국과 동맹을 맺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함 .◎ 주요활동 - 임시정부 「 우리 국민이 결단코 실행할 6 대사」에 대한 연설 → 장기적인 독립투쟁을 위한 재정 확보강조 . ‘ 국민개납 ',‘ 국민개업 ',‘ 국민개병 ' 을 독립운동의 지도 방침으로 세움 . 임정의 내분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의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 로 인한 혼돈 . 이승만의 위임통치안 논란 . ⇒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과 개인의 비난이 정부의 비 월에 노동총판을 사임 ,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 주도 . 1923 년 국민대표회의 가 개최 . → 미주대표 자격으로 참가 , 임시의장으로 선출 . →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 . 결렬 ⇒ 민족유일당 결성에 착수하여 독립운동의 계파와 노선을 초월하는 대동단결운동을 전개 .◎ 주요활동 - 교육운동 점진학교 1899 년에 평안도 강서군에 세워진 최초의 남녀공학 . ` 점진 ' 이라는 학교명에는 기회를 기다리며 독립을 준비하는 힘을 기르자 는 뜻이 담김 . 도산은 교장으로서 오전에는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황무지 개간 사업도 종사 .◎ 주요활동 - 교육운동 - 대성학교 1908 년에 평양에 설립된 중등교육기관 . 도산의 교육 이념을 구현하는 동시에 민족 운동 투사를 양성하는 본거지 였음 . - 청년학우회 1909 년에는 ` 설립된 청년 운동 단체 . 무실 · 역행 · 자강 · 충실 · 근면 · 정제 · 용감 을 기본 정신으로 한 가지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하고 , 매일 덕 · 체 · 지 수양을 한 가지씩 행하여 수련함으로써 민족 계몽 운동과 구국 운동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를 양성◎ 주요활동 - 교육운동 흥사단 단원들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 지혜 · 도덕심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 흥사단은 도산의 필생에 걸친 사업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있을 때에도 그는 중국 본토와 만주 , 소련의 연해주 등을 포함하는 원동 지역에 흥사단 원동위원부 를 설립 . 1948 년 광복 이후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여 지금까지도 계속 활동 .◎ 주요활동 - 재외한인운동 1 차 망명 ① 한인친목회 이강 · 정재관 · 김성무 등과 함께 1903 년 한인친목회 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동포들의 생활지도와 직업 알선 . 한인친목회는 발전을 거듭하여 1905 년 4 월에는 미주 한인 최초의 민족운동 단체인 공립협회로 발전 . ② 공립협회 을사 5 조약 전후로부터는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 퍼져 나간 한인사회를 결속시키고립신보 』 를 발간 .◎ 주요활동 - 재외한인운동 2 차 망명 ① 시베리아 연해주에서의 민족운동 신민회 동지들과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독립운동기지 를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북만주 밀산에다 농지를 개간 , 사관학교를 세우는 일에 착수 . 러시아 여러 곳을 다니면서 국권회복을 다짐하는 연설을 통해 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호소 . 재러 청년들과 함께 청년근업회 를 조직하고 , 신문 재간행 · 자선공제회의 운영 · 한인들의 귀화운동 을 중점사업으로 진행 .◎ 주요활동 - 재외한인운동 ② 대한인국민회 활동 1912 년 2 월 해외 한인사회를 통합하여 한인들의 중추기관으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를 발족 . ( 초대 중앙총회장에 선출됨 .) 북미 ․ 하와이 · 멕시코 · 쿠바 · 만주 · 시베리아 등지의 지방총회를 지휘하며 민족운동을 지도 . 기관지 『 신한민보 』 를 간행 . 1915 년에는 클래어몬트 한인국어학교를 발전시켜 , 한인 2 세에게 모국어를 교육함 . 1917 년 북미실업주식회사 를 설립 .◎ 주요활동 - 재외한인운동 -3 차 망명 1920 년 9 월 20 일에 국내를 비롯한 중국 · 연해주 · 국내 · 일본을 관할 운동권으로 한 지부조직으로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 설립 ⇒ 이상촌건설운동과 재정확보운동을 지속적으로 모색하면서 독립운동을 현실화하는 기초작업에 진력◎ 사 상 “ 나 하나가 건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 곧 애국의 길이라며 나부터 나를 건전 인격으로 만드는 일이 민족을 강하게 하는 길 ” 건전한 인격의 3 가지 요소 첫째로 사 ( 思 )· 언 ( 言 )· 행 ( 行 ) 에 있어서 남의 본보기가 될 만한 건실한 도덕적 품성을 가져야 한다 . 건전한 인격은 먼저 덕성을 지녀야 한다 . → 인격적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무실 ( 務實 ), 역행 ( 力行 ), 충의 ( 忠義 ), 용감 ( 勇敢 ) 의 4 대 정신을 강조◎ 사 상 둘째로 건전한 인격은 한 가지 이상의 전문 지식과 생산 기능을 가진 생산적 직업인이라야 한다 . 마지막으로 도산은 건전한 인격의 내ow}
    인문/어학| 2012.06.25| 24페이지| 1,000원| 조회(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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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식인유 완성
    동양고대사-호식인유(虎食人?)가 가지는 의미-호식인유란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해보면, 호랑이의 식인 술통이란 뜻으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 형태의 술통이다. 호식인유는 중국 상대 말기의 청동기 진귀한 물건이며 높이는 35.7센티미터이고, 무게는 5.09킬로그램으로 무겁다. 중국 후난성 안화현에서 출토되었는데 모형이 약간 차이가 있는 2개가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나중에 모두 중국 외로 빠져나갔다. 하나는 프랑스 파리 시립 미술관에 소장되어있고, 다른 하나는 일본 이즈 미야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호식인유는 술그릇으로 술통의 몸을 호랑이의 모양으로 하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은 무섭게 노려보고, 큰 입을 열어 송곳니가 완전히 드러나 보는 사람들에게 사납고 무서운 두려움을 심어준다. 술통 전체가 장식 역할을 하며 상당히 세밀하게 만들어졌다.이 조형은 호랑이와 사람이 서로 안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호랑이의 두 발과 꼬리가 신체를 지탱하고 동시에 술통의 세 발을 구성한다. 호랑이의 양 발톱은 사람을 꼭 껴안으며 사람은 호랑이 어깨를 향해 손을 내밀고 매달려있다. 중요한 것은 호랑이가 입을 열어 사람의 머리를 무는 모습이다. 호랑이 어깨 양쪽에 손잡이를 덧붙이고, 손잡이 양옆에 짐승의 머리가 있고, 손잡이 장식은 용의 모양이다. 술통의 맨 윗부분에는 덮개가 있고 덮개 위에 사슴이 서있다. 뒤쪽 등 부분은 짐승 얼굴 무늬를 주된 무늬 장식으로 삼고, 꼬리가 비늘 무늬를 하고 있으며, 앞발 장식은 용무늬이고, 뒷발은 호랑이 무늬로 장식 되어있다. 또 호랑이 얼굴 윗부분과 턱 옆부분은 비늘 무늬와 구름 무늬로 장식 되어있다. 사람의 용모는 조용하고 장엄하고, 옷을 입고 있으며, 사각의 옷 깃과 좁은 소매를 알 수 있다. 사람의 허벅지는 뱀 무늬로 장식 되어 있다.표면에서 대부분 검은색을 띠고, 일부에서 매우 얇은 녹색이 녹슬어 남겨지고, 그것은 여러 출토의 후난성에서 상대의 후반기의 청동기와 같으며, 무늬 장식은 복잡하고, 사람과 동물을 주제로 하고, 괴이한 사상을 표현한다. 호식인유의 장식 기능에 대해서 현재 주로 이하의 다섯 종류의 견해가 있다고 한다.첫째, 노예를 위협하고 횡포하는 통치자를 표현하는 것으로, 호랑이가 노예주 계급의 상징이고, 사람은 노예의 대표이다. 둘째, 사람과 동물사이의 관계를 사람이 동물의 힘을 빌려 천지와 소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셋째, 사람의 자아와 신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의 통일을 상징한다. 넷째, 호랑이의 식인 실제는 “호식귀”의 신화를 반영한다. 용맹스러운 호랑이로 악귀를 몰아내고, 액막이의 사용을 가진다. 다섯째, 사람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또 반드시 자연을 부착해야 하고, 인간성의 연약을 표현한다.
    인문/어학| 2012.06.25| 1페이지| 1,000원| 조회(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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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틸라 소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 이야기는 나의 옛 친구와 고대 훈족의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먼 옛날 동쪽 어딘가에서 시작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고대 종족은 모험심이 강하고 더 넓은 땅을 찾아 기나긴 여행길에 나선다. 그 유목 민족은 뿌리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일부가 사막을 건너고 평원을 지나 세상의 끝 동쪽 태양이 뜨는 첫 번째 땅에 도달한다. 두 형제가 이끌던 이 고대 종족은 동생은 유목 생활에 지쳐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곰을 숭배하는 나라를 세운다. 계속해서 정처없이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던 형과 일행은 척박한 상황 속에서 거칠고 강하게 변해만 간다. 그들은 뛰어난 문명국가인 동쪽 한 제국 사람들에게 흉노라 불리며 그들을 몹시 귀찮게 하였다. 한 제국의 변방에서 자주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한 제국의 지도자는 변방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긴 장벽을 쌓는다. 남쪽에는 괴물 장벽이, 동쪽에는 거대해진 동생이 세운 국가가, 북쪽에는 드넓은 황무지와 설원이 있었기에 사막을 넘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또다시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사막을 지나고 넓은 초원을 달려 마침내 볼가강 유역에 도달했다고 한다.이 고대 민족은 말을 굉장히 잘 다루었다. 지금의 훈족 역시 그렇다. 그들의 말은 키가 작고 정강이뼈가 튼튼하고 군살없이 매끈하였으며 턱이 넓고 목이 억세고 강했다. 하루에 62마일을 달릴 수 있었다. 훈족은 이 말을 이용해 전투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볼가강에 도착한 그들은 알란족과 사르마트족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자기들 종족의 일부로 편입 시켰으며 슬라브족을 다뉴브강 하류로 도망가게 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서쪽으로 나아가던 훈족은 이런 정복 활동에서 과거 접촉했던 민족들보다 높은 수준의 문명과 만나게 된다. 흑해 부근에 도달해 그들은 게르만족과 만나게 되고 게르만 족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기에 바빴다.훈족의 특징으로는 이교도로 곰을 신성시 여기고 숭배한다. 곰에 대해 잘 알고 있고 1년에 4차례 제사를 지낸다. 훈족의 갓난아기들은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요한네스를 지지했으며 갈리아에서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을 맞아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른 뒤에는 로마의 관리가 되었다. 보니파키우스가 죽고 나서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도왔다.이로써 지금의 나는 서로마 제국을 지배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평민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차례나 집정관을 지냈다. 일생을 반란군과 여러 적대적인 부족들에 맞서 갈리아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했다. 보름스에 있던 부르군트족의 왕국을 파괴했으며 툴루즈에서 서고트족의 이동을 저지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서고트족과 연합해 카탈루냐 평원 전투에서 훈족의 아틸라를 격파했다. 그러나 아틸라가 이듬해 이탈리아에 침입했을 때는 막아낼 수 없었다.어린 시절 나는 루아와 친하게 지냈다. 시간이 자나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에도 루아와는 계속해서 친분이 있었다. 내분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루아에게 군대를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이민족 더군다나 이교도와 친하다는 이유로 나를 시기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로마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보답으로 판노니아 세쿤다의 일부를 훈족에게 내주었다. 루아는 영리한 사람이다. 이것은 훈족에게 로마를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물로 생각해도 좋다. 반달족과 페르시아가 주변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훈족마저 가세한다면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판노니아는 훈족의 유럽에서의 영구적인 정착지가 되었다.루아가 죽고 나서 그의 조카인 블레다와 아틸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블레다는 그의 삼촌인 루아를 살해했다. 블레다와 아틸라는 야망이 큰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아틸라는 고아였던 자신을 키워준 삼촌 루아를 살해할 배은망덕한 인물은 아니었다. 블레다는 음모를 꾸며 사냥을 나간 루아를 암살한다. 훗날 이 사건이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블레다는 알지 못했다. 블레다는 아틸라의 친형으로 티소강 하류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고 동생인 아틸라는 훈족의 이인자 신분으로 다뉴브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부카레스트 플로에스티에 본. 그의 눈 속에서 야망을 볼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이제 아틸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아틸라는 인육을 먹는다느니, 지옥에서 온 악마의 자식이라느니,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라는 이상한 소문들도 퍼졌다. 하지만 야망에 가득차고 저항세력에게는 잔인하고 분노에 가득찬 아틸라지만 힘없는 피정복민과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관대하고 예우하는 성품을 지녔다.아틸라가 지배한 훈제국의 통치권은 남으로는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그리고 서로는 갈리아 땅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에 미쳤다. 치하의 종족만 해도 45개 종족에 달했다. 이때 아틸라를 국제적 전쟁에 뛰어들게 한 여인이 등장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가 바로 그 여인. 호노리아는 동생을 황제 자리에서 밀어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추방됐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내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했다. 아틸라는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로마제국의 절반을 결혼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하고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켰다.서로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메츠, 랑스, 오를레앙 등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서로마 중심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서로마는 훈족의 친구이고 아틸라를 잘 알던 나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훈족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게르만족들을 규합해 아틸라에 대항하도록 했다.프랑크 북동부 평원 카탈루냐에서 알란족과 서고트족 그리고 로마군을 이끌고 아틸라의 훈족과 맞서 크게 싸웠다. 아틸라는 훈족 기병은 중앙에 배치되었던 5만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훈족과 게피다이족 같이 훈족에게 투항한 게르만족의 혼합보병이었다. 이러한 병력구성은 기동성을 잃고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성전을 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장점을 가지게 되었고 무슨 이유인지 아틸라는 지형선택과 지휘의 양 측면에서 훈족의 장점인 기동전을 발휘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이 전투에서 서고트 왕 테오도리쿠스가 동고트의 영주 안닥의 창에 찔려 전사하게 되었다. 나는 후퇴하는 훈족을 추적하는 대신 왕자 도리스문드를 서고트로 돌려보내 왕좌를 이어받게 했다. 든든한 전쟁 동료를 잃었고 수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슬프게도 그 대다수는 로마측과 훈족측의 동맹부족들의 전사자들이다. 나는 이 싸움으로 아틸라의 침입을 저지하였을 뿐 실제로는 훈족의 주전력을 고이 돌려보내 훈족은 다시 로마를 침입하게 된다. 이 싸움은 아틸라가 참패한 것이 아니라 양측이 각자의 사정으로 물러선 무승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훈족의 갈리아 침입은 방어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서 아틸라를 막아내지 못했다면 유럽은 아틸라의 지배아래에 있게 될 것이었다.엄청난 피를 흘린 전투였다. 나와 아틸라는 두 서로 다른 민족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기 전에 아틸라는 '훈 족은 패할 것이나 적장은 죽을 것이다'라는 주술사의 예언을 듣고 나서 '아이티우스가 죽는다면 전투에서 져도 상관없다'고 해석하고 만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적장은 테오도리쿠스였다. 그러나 아틸라 역시 확실한 승리를 거둔 상태는 아니었다.나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나의 이러한 행동에는 '두 민족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로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탈루냐 평원에서의 전투에서는 로마와 주변의 주요 세력에 관련된 거의 모든 민족들이 참여했다. 아마도 볼가강에서 저기 서쪽 끝 바다까지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 사는 모든 민족이 카탈루냐 평원에 집결하였을 것이다. 훈족이 이겼더라면 앞으로 알 수 없는 미래의 세계 역사가 송두리째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아틸라는 전투 후 판노니아로 철수했다가 이듬해 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가 표적이 됐다. 아틸라는 아퀼레이아 점령을 시작으로 후 그를 이어갈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아틸라의 아들 덴기지크가 훈족의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배를 받고 있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통치권을 놓고 내분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동로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될 운명이 되었다. 이 무적의 대제국도 급격히 분열하고 쇠퇴하여 훈족은 결국 아바르족과 같은 새로운 침략자의 물결 속에 타민족과 혼혈되고 동화되어 소멸되겠지.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훈족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다. 내가 죽고 난 후 이 회고록을 통해 언젠가는 진실이 알려지겠지만 사실 아틸라는 죽지 않았다. 난 나의 어릴 적 친구의 진실 된 마음을 진작 알고 있었다. 8년 동안 남들이 할 수 없던 모든 일을 아틸라는 이루었다.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지혜로웠으며 소문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아틸라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세계 역사상 몇 명 되지 않는 지배자 중의 한 명일 것이다. 아이들은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는 강력함과 정열, 그리고 거대한 힘에 매력을 느낀다. 실제로 아틸라를 보거나 경험한 적 있는 사람들에게 아틸라가 파괴와 약탈만 일삼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비감을 더해주기도 한다. 아틸라는 교묘한 협상을 통해 상대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도 발휘했다. 잔인하고 무서운 인물이라고 소문나는 것이 전쟁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인 로마를 상대로 말안장에 앉은 채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으며, 호노리아와의 결혼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절반을 달라는 대담성도 보였다.아틸라는 피를 흘리게 하는 이런 전투를 누구보다 싫어했다. 사실 훈족은 다른 민족에게 피해를 준적이 없다. 우리 영토에 들어온 훈족을 우리 스스로 두려워하여 밀어내려 했기에 훈족은 반응한 것일 뿐이다. 아틸라는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과 피 냄새를 싫어했다. 그러한 훈족의 생활에 염증을 느꼈고 어릴 적부터 훈족 어른들에게 들어오던 이야기를 동경하며 언젠가는 태양뿐이다.
    인문/어학| 2012.06.25| 7페이지| 1,000원| 조회(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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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기성장보고서
    행동수정EBS ‘아기 성장 보고서’를 보고 어떻게 잘 양육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2003년도에 EBS에서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던 ‘아기 성장 보고서’는 1편 세상을 향한 첫걸음, 2편 아기는 과학자로 태어난다, 3편 애착. 행복한 아기를 만드는 조건, 4편 언어습득의 비밀, 5편 육아의 키워드, 기질로 총 5편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이다.인간은 자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래에 대해 설계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인생의 첫걸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해 왔다. 그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잘 보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기 성장 보고서’는 아기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자세하고 이해하기 쉽게 아기 행동에 숨겨진 비밀들을 알려주었다.인간의 전 생애에서 유아기는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는 시기이다. 우리 모두 그 시기를 거쳐 왔지만, 정작 그 시기의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도 아기가 말을 하고, 걷고, 뛰고 하는 것은 어느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능력이 생겼을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첫 걸음을 하기위해 아기는 끊임없이 연습하고 준비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이 시기의 중요성을 느끼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신체적, 인지적, 사회 정서적 발달 등 각 발달 영역에서의 첫 출발단계이고, 이것들은 서로 밀접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으며, 이후 개인의 발달 결과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며, 지금의 자신 또한 본인은 느끼지 못하지만 이 시기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나약한 모습과 달리 놀랍게도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여러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아기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급속히 발달해가는 이 시기에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역할이었다. 부모들은 아기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신체를 어루만져 주고, 많이 안아준 아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지만 불행하게도 부모와 상호작용 못한 아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비정상으로 자라게 된다.아기들이 옆에 물건이 있으면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부모들은 안 된다고 야단치고, 나도 그것이 병균에 감염될 수 있는 안 좋은 행동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아기의 성장과정에 그러한 행동은 신체를 발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아기는 혀와 입술이 가장 촉각적으로 발달하여 사물을 입에 넣음으로서, 모자란 시각을 보충하여 그것의 생김새를 인식한다. 그러므로 많이 경험한 아기의 감각은 당연히 빨리 발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기를 잘 키우기 위해선 너무 구속하지 말고, 가끔씩은 하고자 하는 대로 자연스레 두는 것이 좋은 방법일 듯하다.아기들은 이미 태어날 때 인류의 기나긴 진화의 과정속에서 축적된 지혜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미 태어날 때 중력의 원리, 수의 원리, 인과의 원리 등을 알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아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탐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요즘 수많은 영재교육프로그램이 유아기 때부터 학습을 많이 시키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아기의 호기심이 채워질 수 있는 경험의 확대이다.애착이란 부모와 아기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감으로 생후 1년까지의 시기에 생성된다. 그런데 애착은 이후 아기가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데 기본이 된다. 애착을 잘 맺은 아기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맺어가고 또래집단의 리더로 커나가는 반면에 불안정애착을 형성한 아기들은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하게 된다. 즉 인생 초기에 형성된 엄마와의 인간관계가 평생 인간관계의 기초가 된다는 말이다. 안정 애착을 위해서는 아기와 끊임없는 접촉을 해야 하며, 아기가 원하는 것에 곧바로 반응해주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엄마들은 아기의 버릇을 들인다며 울어도 제대로 반응해주지 않고 심지어 다그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심각한 잘못이다.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특히 18개월에서 24개월까지는 폭발적인 언어성정기로 약 2천 단어 정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아기들이 언어습득 능력이 뛰어난 것은 한 사물에는 하나의 말만 있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인해 단어를 빠른 시간에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어 뿐 아니라 문장과 문법도 아기들은 쉽게 습득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습득 능력은 약 6~7세까지의 시기까지이며 그 이후에는 능력이 뚝 떨어지기 때문에 이시기에 언어습득을 효과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청각적 자극을 많이 주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호교감하고 책을 많이 읽어주는 것이 아기의 언어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기질이란 아기들이 타고난 성질로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기질 또한 조금씩 다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을 잘 살려주는 것이 육아에선 가장 중요하다. 특히 아기들이 고집을 부릴 때 잘 훈육을 해야 하는데 무조건 아기의 고집을 꺾으려고 하지 말아야한다. 기질이 곧 성격으로 굳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심한 기질의 아기라도 부모가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처럼 성격 형성에는 반드시 환경이라는 변수가 작용한다. 성격은 유전과 환경이 각자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다. 유전과 환경의 변수에 따른 성격변화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부모는 아기의 기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인문/어학| 2012.06.25| 2페이지| 1,0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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