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딴스홀을 허하라1920년대 말에 이르면 상황은 보다 광범위한 변화를 맞게 된다.본격적으로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수효가 증대하고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사상 특히 사회주의 사상이 일상의 영역에까지 널리 퍼지면서 이제 현대는 지식층의 사상에 자리잡은 관념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체험하게 될 삶의 형태였다. 이때 ‘모던’이라는 용어가 그대로 일상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시기이다.이때의 모던은 굳세게 지향해야 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경박하고 자유분방하며 천박스러운 유행으로 등장한다.많은 사람들은 이제 주의와 주장으로서의 현대가 아닌 일상의 현실로서 현대를 말하기 시작했으며, 비로소 현대적 삶을 바라보고 거기에 자신을 밀착시키거나 아니면 애써 거리를 두려는 분화된 태도를 갖기 시작했다.1930년대 모던어 사전에는 ‘모던’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이렇게 말한다.모던(modern)-어의는 ‘새로운’혹은 근대적이란 말이다. 그래서 ‘모던 껄’이라면 새로운 여자 혹은 근대여자, 모던 보이라면 같은 의미의 남자인 경우에 사용한다. 의미로 보면 결코 낫분 말은 아니다. ‘모던보이’니 ‘모던껄’이니 하면 경멸과 조소의 의가 다분으로 포함되여잇다. 그래서 불량소녀 혹 불량소년이라는 의미로도 통하는 것이 사실이다. 요즘에는 이 ‘모던’이 한층 더 새로워져서‘씨-크’라고 변하여 간다. 초 ‘모던’이다. ‘울트라 모던’이다.모던이 경박스럽고 불량스러운 현상에 붙이는 말이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론 ‘진보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용했던 ‘모던’이라는 말은 분명 당시에 쓰였던 유행어 이상의 1930년대의 도시문화적 현상을 지칭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즉, 과거에 ‘개조’와 ‘문화’가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던 현대화의 계몽적 패러다임으로 작용했던 반면, ‘모던’이라는 용어는 사회의 일면에서 반영된 현대화의 현상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었다.현대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 모습은 여러 가지였다.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반발,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이상한 것에 대한 취향과 혐오감, 서양에 대한 적대감 혹은 부러움, 야만과 열등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한탄등이 뒤섞인 태도들이 현대를 둘러 싸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성을 처음으로 경험하기 시작한 그 어디에고 ‘현대’ 혹은 ‘모던’이란 이름을 붙일만한 적절한 표현을 발견할 수 는 없다. 그만큼 현대란 미리 규정지을 수 없었던 낯설고 위협적으로 다가온 새로운 문화의 충격이었다.현대 혹은 모던이라는 말은 1920년대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익숙한 유행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20,30년대에 들어서였다. ‘모던’은 그자체로 모던풍 즉 현대적인 스타일을 말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껄이나 뽀이, 룸펜, 인테리빠 등등 서양말의 다발을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향성을 말하는 용어였다.1930년대의 ‘모던’은 서구적인 삶의 패턴을 지향하려는 의식적인 태도이자 행동방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현대’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910년대부터 인데, 이때의 현대란 적어도 시간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조선에서 공간적으로는 부재하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새로운 단어였다. 초기에 현대라는 말보다 더 현대라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하는 언어는 그 이전 개항을 즈음하여 어느새인가 모든 언어의 앞머리에 붙여썼던 ‘신新’이란 말이었다. 신사고, 신문물, 신학문, 신여성, 신생활, 신문화등이 ‘새롭다’라는 말속에는 ‘이제까지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하여 우리가 알고 있지 못했던’ 그 무엇, 그래서 이곳에 있어야 하며 반드시 지향해야할 무엇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경성,앞뒤골 풍경 中 [선술집]언제 보던지 풍성풍성한 곳은 선술집이다. 술맛이 좋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별 탈 없는 그 술 한잔에 안주 한 개, 이래서 일금 5전. 안주만은 가지각색 것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특전 그리고 그 안주가 세상없는 영양학자를 다 불러대더라도 자식물滋食物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못할 육류, 어류, 채소등이다.일금 2십전만 던지면 양요리집의 1원어치 폭은 되는 영양과 취홍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확실히 고마운 일이다.술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없애버린다면 몰라도 양요리집과 카페, 기타 요리집이 엄연히 존재해 있는 한에는 선술집이라는 것은 확실히 없지 못할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없는 사람들 층의 유일한 연회장 사교장은 선술집이다.있는 놈들이 요리집에서 백원 쓰는 동안에 없는 사람들은 선술집에서 같은 기분과 취흥을 5십전, 1원에 살 수 가있다. 선술집이 더럽다던 신사 나으리도 머리가 영리해졌는지 어정어정 제발로 걸어들어온다. 그뿐이냐 은행, 회사, 대감까지 깊숙한 골목 선술집에서 안주받은 호콩을 까먹고 있지 않느냐. 세상은 이와같이 개명해간다.
고은[미당 담론] 요약미당은 고은에게 있어서 추억의 대상이기도 하고 단절의 대상이기도 하다.미당은 고은을 편애하기도 했지만 고은의 문학은 지키는 것 보다 고치는 것을 지향 해야 했다. 시간이 흐른 뒤 미당과 고은의 만남을 요청하는 매체들이 나타났다. 심지어는 미당 자신이 전두환의 통로로 얻어낸 자금으로 운영하는 문예지에서 그와의 권두대담을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렇게 미당과 고은이 화해하는 극적인 광경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고은은 미당 별세 소식을 듣고 빈소의 사진과의 대면으로 그와의 만남을 마감했다.김수영은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그 이유는 하나, 그의 토속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 둘, 그의 늘어지는 서정성이었고 셋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미당에게는 태생적일 만큼 그의 생애 내내 지속된 인촌가와의 관련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동아일보 사회부장 문화부장으로 특채된 사실도 아버지를 이은 2대의 긴 인연임에 틀림이없다. 인촌일가와 떼어놓을 수 없는 준세습적 인연과 함께 도하나의 인연은 그를 한때 출가시켜 학승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가 시인노릇이나 하도록 중앙불전 무료 학생으로 입학 시킨 석전 박한영에 의해서였다. 요컨대 이 인촌과 석전이 미당에게는 살아가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으며 미당의 운명은 그 기반 위에서 잘 활약해온 것이 사실이다.[자화상]에 관련해서 김우창은 실패라고 규정하고 그 실패를 한국시 전반에 관련 시킨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서 죄인을 읽고 어떤 사람은 천치를 읽고 있으나 그런 따위의 외부에는 아랑곳할 필요가 없는 자신으로 환원된다. ‘죄인’, ‘천치’는 시의 진정성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은유이지만 그것은 강렬한 수사이지 깊은 자기성찰이나 ‘회개’의 아픔같은 것에는 이르지 않는 추상으로 된다. 여기서부터 미당의 체질적인 자기합리화가 능란하게 이어지는데 그것은 자아와 세계의 무속적 연결을 통해서 한층 더 깊어진다.미당에게서는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이른바 대응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뇌의 소재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당시의 주조 가운데 하나가 개인사적인 세계이다. 서정이란 세계를 자기화한다고 말 할 수 있고 거꾸로 자아를 세계화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말고 시인이라 해서 개인의 한계를 무조건 벗어나라는 도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세계는 사실의 세계로부터 재구성되는 세계이다. 따라서 시인 자신은 엄연한 화자로서의 ‘나’이지 않으면 안된다. 한 시인의 개인적 정서의 실감을 박제화 할 수 없으며 실지로 있게 된 삶의 여러 고비들을 통해서 불멸의 애가를 남기게 될 때도 적지 않다. 시인은 시 속에서 일정한 승화단계 없는 작위나 동작을 노출하기보다는 하나의 부재로서의 극한에 반사된 존재일 때가 훨씬 시의 깊이를 더 할 것이다. 여기서 미당의 언어는 지용의 언어에 어느만큼 빚지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월의 시가 음악이고 지용의 시가 회화라는 단순비교론 따위가 아니더라도 지용의 한 측면에서 미당을 상대화시킬 이유가 분명해진다.또한 미당의 경우 시적 결말에 이르기까지 객관화될 만한 계기가 없이 매우 주관적이며 몽롱한 감정이입으로 처리된다. 그래서 시 속의 나는 화자 내지 작중인물의 의미 따위와는 절연된 상태로 사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의 시 속의 ‘나’나 제 1인칭은 결코 공적 존재가 아니다. 미당의 ‘나’는 독보적 서정의 임의로 된 시인 자신에 불과하다.그 후 친일에 대한 반성의 표시가 없는 문학작품을 한 미당의 친일적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는 시대의 정면에서 약한 존재이고 시대의 측면에 기탁함으로써 존재의 회로를 찾아내는 곡신불사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미당과 관련해서, 문제는 순수문학으로서의 무죄가 참여문학으로서의 유죄라는 등식이다. 이 경우 한국 현대시의 순수노선은 일체의 정치적 이념적 개입의 문제로부터 격리되어 시의 현실부재를 지향한다. 문학 자체의 순수한 상태, 순수성으로 말해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론적이다. 시인이란 어떤 시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개척적 상황에 진입함으로써 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명분들이 철수된 시대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초상으로서 어떤 현세성에 추수하지 않는 시흔으로서의 투혼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문학은 둘이고 셋이어야 한다. 문학의 일생을 사는 동안 거기에 절교도 있고 같은 종으로서의 미개인 같은 서러운 할거도 있어야 한다.황현산 [서정주의 시세계]서정주는 어떤 사람들에게 개항 이후 한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민족 시인이었던 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일파이며 신군부에 부역했던 기회주의자 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이력에 대한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겨레의 가장 깊은 정서를 환기력이 높은 시어로 노래한 부족 언어의 마술사라는 거의 공식화된 평가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의 시는 악덕을 저질러온 사람에게서 그토록 아름다운 시가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쉬운 감정은 거기서 하나의 운명을 보는 반면 의아함은 거기서 하나의 품성을 본다는 점에서 서로 같지 않지만, 한 시세계가 그 운명 내지 품성과 관계해온 방식을 똑같이 우연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 둘은 동일하다. 한쪽이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다른 쪽의 눈에 예외적 현상으로 비치는 것도, 표현을 바꾸면 모두 우연의 나쁜 장난이란 말로 요약된다. 그의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그의 추문 속에 숨는 형국이다. 시인의 몫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저 최초의 낙원을 그 자신의 조절되지 않는 욕망에 따라 분열시키고 자기 시대의 협착한 시야에 맞춰 세속화하였다는 혐의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미당에게서 불교는 그의 시가 지향하는 마지막 목표이기 이전에 그 미학적 원리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서정주는 시인의 탄생에 축복과 저주의 기능을 함께 담당하는 신 대신에 신분의 미천함과 가계의 유전을 대입함으로써, 하늘의 섭리와 시인의 절대적 소명을 사가화한다. 더불어 시인과 사회의 관계도 역전된다. 한국의 젊은 시인 서정주에게는 단절이 없으며, 따라서 건너가야 할 세계도 자기 변모에 대한 전망도 없다. 그는 가난하기에 그만큼 순결한 세계에 갇혀있다.서정주에게서 ‘생명’은 개개 생명의 구체적 실천들을 아우르는 자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이반하는 자리라고 말해야만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으로 피어난 국화가 폐쇄적 성찰의 거울 속에 갇히는 이력이 여기서도 다시 반복되는 것이다. 시인은 한 생명의 개화가 그 자체로서 어떤 근원적 진리의 발현이라고 여기고, ‘벼락과 해일’에 방불한 어떤 비범한 영감의 길이 그것으로 제시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생명의 구체적인 실천인 앞의 것들은 분명하게 알려진 ‘인위적 행위들’을 제유하고 문학적 인습에 따라 이미 추상화된 표현인 꽃의 개화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치’를 은유한다. 그래서 이 시의 단순한 내용은 수사법의 교묘한 배치에 의가 가려져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벌이는 모든 일에는 이제 싫증이 났으니 다른 이치가 지배하는 세계가 열리기를 바란다‘는 말 이상의 것일 수 없다. 미분화의 상태가 종합의 상태와 혼동되는 초기시의 미숙한 사고가 여기서도 다시 연장 반복되는 것이다.시인은 그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시에는 그 세계의 강한 열망도, 거기서 비롯될 삶의 태도에 대한 변화의 기미도 나타나 있지 않다. 미당에게서는 세계가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간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