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대해서..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유럽의 도시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그 중 히딩크의 나라로 잘 알려져있고 풍차와 튤립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도시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중 ‘안네의 일기’의 배경이 되었던 네덜란드의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암스테르담에 대해 알아보자!네덜란드의 최고 높은 지점은 해발 321m에 지나지 않는데 이곳은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3개국이 접경하는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한곳에서 3개국을 둘러볼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이 많다.네덜란드의 정식 국가명은 Koninkrijk der Nederlanden,즉 「낮은 국가」란 뜻이다. 글자 그대로, 국토의 1/6이 해수면보다 낮다. 이 해수면보다 낮게 위치한 토지는 13세기 이후 계속된 대간척 사업에 의해, 네덜란드 사람 스스로가 창조한 토지이다. 이 간척 사업에 의해 태어난 토지는 폴더(polder)라 부르며, 현재는 목초지, 농지, 산림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자부심이 「지구는 신이 창조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창조했다」라는 유명한 말까지 창조하게 된 것이다.(◀ 파란색의 토지가 간척지)네덜란드에서의 공용 언어는 네덜란드어이며, 영어와 독일어가 별 불편 없이 통용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와 독어를 언어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로 잘하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불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하기도 한다.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고등학교에서는 라틴어도 가르친다고 한다. 예로부터 자원이 부족하여, 무역을 발판으로 돈을 벌어온 이들에게 외국어 실력은 보이지 않는 국력으로, 학교에서 외국어 교육이 철저하다고 한다. 세 가지 언어를 알게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언어는 상대적으로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방영되는 외국의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만화영화까지도 더빙을 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들려 주며, 화면 아래쪽에 네덜란드어 자막이 나온다. 어려서부터 외국어의 리듬을 익히고 학교에 가서 철저한 언어교육을 받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외국어를 여러 개 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자기네들끼리 네덜란드 말로 이야기를 하다가도 곁에 네덜란드 말을 모르고 영어만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곧바로 영어로 바꾸어 이야기를 한다.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워 주는 마음이 풍요하게 느껴진다.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유치원 어린이까지도 유창한 영어를 한다.네덜란드의 날씨와 기온은 일년 내내 비가 고르게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부는 편이다. 사계절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여름처럼 덥지 않고, 겨울의 평균기온은 그렇게 낮지 않으나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 체감온도가 낮다.입헌군주국인 네덜란드는 나라의 우두머리로 여왕을, 정부의 우두머리로 수상을 두고 있다. 모든 입법행위는 여왕이 이끄는 국가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통과될 수 있다. 수상과 다른 장관들은 양원을 이끈다. . 양원 의원들은 4년에 한번, 18세 이상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다.네덜란드의 근세 역사에 대해 알아보면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터루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프랑스의 점령은 끝이 나고 네덜란드 왕국 (Kingdom of the netherlands)이 탄생하게 된다. 처음에는 네덜란드와 벨지움이 하나의 국가였으나,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왕가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벨지움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1830년에 네덜란드와 분리된다.네덜란드는 1차 세계대전까지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도 역시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으나, 독일에게 침입을 당하여 대단한 손해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유럽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네룩스 경제 연합을 형성하여 유럽 공동체의 초석을 다졌다.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 (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한 1619년 이후 300년 넘게 지배해 오던 인도네시아에게는 1949년 독립을 안겨 주었고, 식민지였던 Dutch New Guineaeh를 1963년에 인도네시아에게 넘겨 주었다. 또 하나의 식민지였던 수리남과 독립협상을 시작한 1968년부터 많은 수리남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였고, 1975년에 이르러 수리남은 독립되었다. 그 이후로 지금 유럽의 네덜란드 영토로 유지되어 왔다.네덜란드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았으니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시의 중심은 여러 개의 운하로 둘러싸인 부채꼴 도시로, 남쪽의 담 광장에는 오래된 왕궁을 비롯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국왕의 즉위식을 행하는 신교회등이 있고,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의 집이 서쪽에 있다. 동남쪽에는 렘브란트의 집이 보존되어 있으며 미술관으로는 렘브란트, J.페르메르, F.할스, J.수틴 등의 걸작을 수집한 국립미술관과 고흐의 그림과 네덜란드 근대화를 소장하고 있는 시립미술관이 특히 유명하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 열대박물관과 올림픽스타디움 등이 있다. 반원형의 구시가는 크고 작은 운하가 사방으로 뻗어 70여 개의 섬을 500개의 다리로 연결하고 있어 장관을 이룬다.운하로 이뤄진 암스테르담은 극과 극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도시의 화두는 섹스와 예술이다. 중앙역 앞에는 버젓이 섹스박물관이 자리잡았다. 일본 요코하마와 우리나라 부산에도 문을 연 섹스박물관은 이곳에서 색다르게 변질된다. 입구부터 채찍을 들고 가면을 쓴 남녀의 모습이 이채롭다. 또 중앙로에서 한 블록만 지나면 홍등가로 이어진다. 커피숍에서 합법적으로 마리화나를 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암스테르담이다. 비흡연자들을 위해 마약을 넣은 케이크까지도 판매한다. 암스테르담의 매춘녀는 합법적으로 일을 하며 물론 세금도 낸다. 매춘이 일찍부터 국가적으로 허용된 이유에는 많은 말들이 있으나, 과거 네덜란드가 해양대국이었을때 영국의 무적함대와의 전투에서 패해 많은 남자들이 전사하고, 그 군인의 과부들이 생계가 막막해지자 국가에서 매춘을 허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네덜란드는 수백년에 걸친 간척의 역사로 치수, 즉 물을 다스리는 가장 근대적 경험을 가진 곳이다. 중국의 요나 순처럼 황제에 의한 치수가 아니라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땅을 만들고 물을 다스린 새로운 대화적 치수를 한 곳이 바로 네덜란드다. 또한 오래 전 부터 세계로 진출한 네덜란드 상인들과 그들의 대화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 바로 네덜란드이다.)허나 뒷모습과 달리 도시 자체는 예술의 향취가 가득하다. 암스테르담은 렘브란트,반 고흐, 나막신과 풍차,165개의 운하와 1,290여개의 다리가 사연이 돼 그물처럼 얽혀 있는 도시다. 암스테르담 여행은 담 광장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천연색 치장을 한 모든 트램(전차)은 이곳이 분기점이다. 걷거나 자전거를 빌릴 수도 있다. 프라센 운하를 끼고 있는 안네 프랑크의 집 부터 둘러본다. 오전부터 입장객이 100m 넘게 줄을 섰다. 이곳 은신처 다락방에서 13세 유태인 소녀는 2차 세계대전의 숨막히는 정황을 써내려갔다. 중앙 쇼핑가를 지나 시내 남쪽의 릭스 박물관과 반 고흐 박물관으로 향한다. 렘브란트의 야경과 반 고흐의 자화상을 이곳에서 만난다. 릭스 박물관옆 하이네켄 공장을 견학하며 맥주 3잔 마시면 기분은 알싸해진다. 중앙역에서 알크마르행 열차를 타고 20분이면 닿는 풍차마을 잔센스칸스에서 치즈도 맛보고 전원 풍경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 ; 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고대 그리스 쇠망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델로스동맹을 지배하는 아테네가 횡포를 부려 제시(諸市)의 자치를 범하고 위협한 때문이며, 또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든 데 있었다. 상업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해상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편을 들어(BC 433) 양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 밖에도 메가라 등 아테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 있었다. 코린토스메가라 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 스파르타를 부추겨 개전(開戰)하게 하였다. 전쟁은 개전 후 얼마되지 않아 아테네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빼았고 페리클레스도 이때 병사하였다. 이후 시칠리아 원정에서 패하고,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전투에서도 패하였다. 또한 델로스 동맹도시들은 점차 아테네로부터 떨어져 나가 아테네는 식량난으로 시달렸다. 아테네는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BC 404년 마침내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長城)을 헐었으며, 델로스동맹을 해산하게 되었다포에니 전쟁 ; 총 3차에 걸쳐 일어난, 고대 지중해의 패권을 다툰 전쟁. 이 전쟁의 승자가 된 로마는 그 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1차 포에니전쟁 ; 당시 지중해는 페니키아인들의 식민도시였던 카르타고가 패권을 잡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경쟁자인 그리스도 있었으나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리스는 그리 세력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뒤늦게 지중해 패권다툼에 끼여들게 됩니다.이탈리아반도 아래에 있는 시칠리아섬. 그섬에는 옛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던 메시나가 자리잡고 있었모두 10차례의 원정전쟁을 벌였다. 1차 1096~99, 2차 1147~49, 3차 1189~92, 4차 1202~04, 5차 1217~21, 6차 1228~29, 7차 1248~54, 8차 1270 9차 1271~72, 10차1272~91중세시대 전쟁의 양상은 평지 전투보다는 성을 의존해 싸우는 형태였다. 성과 더불어 중세전쟁에 큰 영향을 준 다른 요인은 교회였다. 교회는 기사들이 신사도에 입각하여 싸우도록 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제한전쟁화 했으며, 교황의 허락을 얻어서 이른바 '정의의전쟁'을 해야만 많은 사람들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강력한 교권하에 십자군원정의 빌미가 된 것은 1071년 비잔틴 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과격한 이슬람교도의 셀주크 투르크족(터키)들이 크리스트교도들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금지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은 유태교,크리스트교,이슬람교도들에게 공통의 성지가 있어 이교도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충돌이 벌어지기 쉬운곳이었다.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1세는 교황 우르반2세에게 지원요청을 했으나,교황은 자기를 지지하는 군대가 게르만 제국 군대와 격돌 하고 있어서 지원을 하지못하다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를 개최하고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서유럽은 내란을 겪고있는 독일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가 원정군 편성에 가담했다. 그렇게 큰 호응을 한데는 종교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유럽은 100년이상 인구가 급팽창했으며, 그에 반해 농업생산은 제자리 걸음이였고, 특히 1094년 흉년이후 기근 현상은 심각해졌다. 농부들은 농노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군인이 되고,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비잔틴 제국의 붕괴나 십자군 원정을 돈벌이의 호기로 여겼다. 마침내 1097년 봄 3만명의 십자군 전사들은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넜다. 사라센 인들은 각 세력이 서로 불신하고 단합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에 1차원정은 성공적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보급문제로 고생했지만, 투르크 군대를 무찌르고 안티오크,예루살렘,자파등 주요 도시들을 잇달아고, 장기화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내분상태를 겪었고, 내분을 먼저 수습한 영국이 재침하면서 다시금 전쟁이 확대됩니다. 1428년 프랑스왕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이 영국군에 의해 포위되었으나,소녀전사 쟌 다르크(Jeanne d'Arc)의 등장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쟌 다르크가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격파하는걸 보고 힘을 얻게된 프랑스군은 이후 대대적인 반격에 성공, 전세를 역전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쟌 다르크는 조국의 배신으로 1430년 영국측에 넘겨지게 되었고, 이듬해 마녀재판으로 화형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프랑스에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고, 결국 1444년 휴전조약을 맺게 됩니다. 전쟁에서 영국이 패하긴했지만, 여전히 프랑스내 영토는 남아있었으므로 이후 프랑스왕 샤를 7세는 대대적인 영토수복작전을 벌이게 됩니다. 1453년 프랑스는 자국내 영국의 식민지를 모두 회수하는데 성공합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사실상 1453년에 전쟁은 종결된 것으로 인정합니다. 1475년까지 친다면 총기간은 138년이나 됩니다.트로이전쟁 ; 트로이의 전쟁은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발단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왕비 헬레나입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헬레나를 유혹하고 헬레나는 파리스의 유혹에 넘어가 트로이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지요. 이것을 알게 된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군사를 모아, 트로이로 쳐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실 이 전쟁에서 가장 이름을 날렸던 명장은 그리스의 장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입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 초반에, 총사령관이자 메넬라오스의 형인 아가멤논에게 자신의 여자인 브리세이스를 빼앗기게 되자, 전쟁에서 빠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의 설득에 못 이겨 가장 소중한 친구인 파트로클로스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 내보내죠. 하지만 파트로클로스는 헥토르에게 죽게도를 무대로 발생한 2번의 전쟁. 1912년 3∼10월에 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그리스 사이에 개별적인 동맹조약이 체결되어 오스만제국에 대한 방위동맹체제가 성립되었다.- 제1차 ; 1912년 3∼10월에 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그리스 사이에 개별적인 동맹조약이 체결되어 오스만제국에 대한 방위동맹체제가 성립되었다. 이 동맹체제는 1908년 오스만제국의 근대화를 주장하고, 터키인 중심의 집권제 확립을 목표로 하는 청년 장교의 청년터키당 혁명에 크게 반발한 발칸제국에 의해 조직되었다.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오스트리아의 발칸 진출을 막기 위해 러시아는 동맹체제 형성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1911년 9월 시작한 이탈리아-투르크전쟁의 1년에 걸친 교착상태이다. 이것을 기회로 발칸반도 여러 나라가 동맹을 확립하고, 1912년 10월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발칸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탈리아와의 전쟁으로 북아프리카에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오스만제국은 2개월 만에 패배하였다. 강화조약에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청년터키당은 1913년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全權)을 장악하고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지만 패배는 계속되어, 결국 5월에 런던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됨으로써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잃었다.- 제2차 ; 발칸반도 여러 나라의 국수주의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제2차발칸전쟁은 오스만제국이 잃은 테살로니카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지방을 둘러싸고 1913년 6월 불가리아가 그리스와 세르비아를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7월에는 루마니아와 투르크가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였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불가리아는 패배하여 8월에 부쿠레슈티에서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이 결과 그리스는 테살로니카를 포함한 에게해 연안 마케도니아지방의 대부분을,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지방의 북부와 중부를, 루마니아는 도브루자 남부를, 투르크는 아드리아노플(지금의 에디르네)을 포함한 동트라키아지방을 영유하게 되었를 아랍 알 야움(그날의 아랍인)으로도 부른다. 즉 철부지 시절의 아랍사람이란 뜻이다. 이 두 명칭은 은연중 이슬람을 광명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는 이슬람 발생 이전 200-300년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이슬람의 수임 기간이라 볼 수 있다.이슬람이 발생한 직사각형의 아라비아반도는 그 넓이가 약 300만 평방km로서 인도아대륙에 버금갈 정도로 크다. 그러나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예멘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강우량이 적어서 대부분 사막과 같은 건조지역이다. 중앙지역에 높은 산들이 있기는 하나 만년설이 쌓일 정도로 높지는 않아 하천에 물을 일년 내내 흘러 보내지 못한다. 간혹 비나 눈이 내릴 때에만 하천 역할을 하는 물길을 아랍인들은 와디라 부른다. 반도의 내륙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 있고 그 주변에는 넓은 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반도 곳곳에는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다. 이런 반도에는 베두윈(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둘 다 부족 단위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베두윈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꾸려 나갔으며, 오아시스의 정착민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이 반도의 부족들은 늘 서로 싸웠으며, 부족의 구성원들은 자기 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을 명예로 알았다.당시 아라비아 반도의 신앙형태는 다신교였고, 애니미즘적 성격이 강한 원시적인 것이었다. 기원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유대교의 아라비아 반도의 침입은 시작되었다. 홍해 연안을 따라서 남하한 유대교도는 야스리브(메디나)와 예멘에 정착하게 되었다. 반도 북부 변경에는 기독교 단성론과 네스토리우스파가 들어왔다. 중부의 히자즈 지방이나 남부의 나즈란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정착하고 있었다.2) 무함마드의 등장6세기 후반에 들어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아라비아 반도를 더욱 안전한이다.
‘공리’ 주연의 영화 [인생] 을 보고 ..Ⅰ. 줄거리 & 주요장면이 영화의 원작은 여화(余華)의 중편소설이다. 1930년대의 후우꿰이(福貴)는 지주계급-유한족속이다. 하루종일 도박판에 쳐박혀 시간을 소진하는 사람이다. 결국은 도박판에서 가산을 다 날린다. 그의 집문서가 넘어 가는 날 아버지는 홧병에 죽고, 아내는 집을 나가버린다. 그제서야 세상의 험난함과 추움을 알게된 후이꿰이는 새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린 딸과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던 아내가 돌아오고, 그는 전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바로 "그림자극"(인형에 줄을 매달아서 움직이는 놀이)이였다. 후이꿰이는 원래 도박판에서 가끔 가다 그림자극 패거리에 끼어 한 재주 보여주기도 했었기에 그가 이제 자신의 능력을 밥벌이로 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다가 시절이 하수상하여 국공내전(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싸움)이 시작되고 후이꿰이는 국민당군에 끌려가서 군인들을 위해 그림자 놀이극을 보여준다. 일종의 유랑극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엄청나게 추운 겨울날. 추위에 오돌거리며 떨다가 일어난 아침, 흰눈이 온 강산을 뒤덮은 그 들판 위엔 온통 끝없이 펼쳐진 국민당군의 시체가 시야에 들어온다. 얼어죽고, 병들어죽고, 내버려진 중국인들인 셈이다. 국민당군이 죽고 뿔뿔히 도망간 그 공백을 차지한 것은 이번엔 공산당군이다. 이제 후이꿰이는 공산군을 위해 그림자극을 보여줌으로써 생을 유지한다. 그러면서 전쟁은 끝나고 후이꿰이는 꿈에 그리던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 자이첸은 아침에 뜨거운 물을 가가호호 배달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린 딸 봉하(鳳霞)는 병마의 후유증으로 벙어리가 되어 있었지만 똘망똘망한 아들놈 유경(有慶)이랑 네 가족이 행복한 순간을 맞는 듯하다. 그가 오래 전 도박으로 탕진한 가산과 큰 저택을 물려받아았던 사람이 이제 시대가 변해 지주라는 죄목으로 총살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후이꿰이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는 인민혁명군을 위해 공연을 한 무산계급 출신의 .역사는 계속되고 이번엔 대약진 운동이 시작된다. 이는 물론 모택동이 일으킨 운동이다. 그 이전 3년동안 중국은 엄청난 자연재해에 고생하였다. 그래서 일거에 공산주의 부국을 만들기 위해 대약진운동이란 것을 전개했었다. 동네마다 용광로가 만들어지고, 집집이 쇳조각들이 긁어 모아지고 모두들 제철 제련작업에 투입된다. (이는 엄청난 자원의 비효율적 집행이었음이 밝혀진다. 큰 용광로, 작은 용광로가 전국 곳곳에 세워진다. 미제국주의가 동부에서 침략해올 때를 대비하여 중국은 "3선이론"이란 것을 내세워 중국내륙 깊숙히 제철공장, 정련공장을 중복 건설한다. 포항제철이나 광양제철소가 왜 바닷가에 있는지는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당시 중국은 그런 배려없이 산골짜기에 공장을 세우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걸고 넘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자원과 모든 결정은 모택동의 독단과 집단광기로 이루어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후이꿰이의 똘망똘망하던 아들놈 유경이가 희생당하는 것이 이 시대였다. 잠결에 학교에 불러간다. 높은 분이 지도 나왔다기에 나가서 제련작업을 도와야하기 때문이다. 후이꿰이는 그런 애처로운 어린 유경이를 업고는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학교로 간다. 그 날 유경이는 담장에 누워 자다가 후진하는 위원장의 자동차때문에 무너진 담벼락에 깔려 죽는다. (그 트럭을 몬 사람은 이전에 후이꿰이 밑에서 그림자극를 하던 사람이었고 이제 이 마을 위원장으로 부임한 사람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그들 가족은 한 생명을 담보로 잡은 셈이기도 하다.다시 역사는 흐르고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온다. 후이꿰이의 벙어리딸 봉하도 어느듯 다 커서 홍위병 청년과 결혼을 한다. 봉하가 병원에서 출산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의사란 존재는 모두 반혁명반당분자로 하방운동에 의해 쫓겨나고 자아비판 당하는 신세가 된다. 새파란 학생들이 혁명완장을 차고 병원을 차지한다. 결국 봉하는 아기를 낳다 과다출혈로 죽는다. 하혈을 하지만 어린 학생들은 속수무책이었다자(반당분자의 징표)를 뒤집어써고 병원에 끌려와서 만두 먹다가 체하여 죽을고비를 당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블랙코메디의 진수이다. 후이꿰이는 새조국 건설을 위해 딸과 아들을 바친 셈이다.몇 년 후 병석에 누워있는 후이꿰이의 처가 사위와 손자의 생일 축하인사를 받는다. 그들이 유경이와 봉하의 무덤에 다녀오는 길에 손자놈을 위해 병아리를 산다. 후이꿰이는 오래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그림자극 도구를 담아두는 괘짝에 병아리를 담으며 감개무량하게 이야기한다. "병아리가 자라면 닭이 되고, 닭이 자라면 양이 되고, 양이 자라면 소가 된단다.." 손자가 묻는다. "소가 자라면 뭐가 되죠?" 그러자, 공리가 그런다... "그 다음엔 너도 어른이 되는거야." 손자가 아주 기뻐서 그런다. "그럼 내가 어른이 되면 소를 타고 다니나요?" 이에 후이꿰이가 그런다. "아니. 너가 어른이 되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다닐거야. 그때가 되면 세상살기가 지금보다 좋아질테니까."Ⅱ. 참고문헌을 통해 시대배경 설명하기● 국공내전 (1946년 ~ 1949년); 『중국의 어제와 오늘』- 왕순홍지음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들은 한결같이 국 공 양당과 각 당파가 참여하는 민중연합 정부를 구성하여 민주개혁을 실행하고, 독립 자유 민주 통일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지지하에서 표면적으로는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진행하였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내전을 준비하면서 항일 승리의 성과를 독점하여 국민당 정부의 독재통치를 유지하려고 기도하였다. 1946년 6월에 국민당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해방구(解放區)에 대하여 전면적인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중국에는 국공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1946년부터 1949년까지 국공내전은 3년간 계속되었다. 전쟁 초기에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미제 무기의 우세에 힘입어 기세가 등등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영도하에서, 그리고 해방구와 국민당통치구(國民黨統治區) 민중들의 지지하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탁월한 전략전술. 3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중국인민해방군은 국민당의 800만 군대를 섬멸하였으며 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당 군대는 대만(臺灣)으로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대만과 몇몇 작은 섬들을 제외하고 전 중국은 모두 중국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국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중국 대륙에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되었다.● 대약진운동 (1958년 ~ 1960년) ; 두산세계대백과공산당의 주석 마오쩌둥이 경제의 고도성장을 위해 경제발전과 인민공사를 설립하는 등의 삼면홍기를 통한 전국적인 대중운동.중국은 제2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하여 제기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주도하에 경제의 대약진과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설립하는 전국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의 삼면홍기(三面紅旗)는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3가지 경제정책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의 발표에 의하면, 제2차 5개년 계획의 첫해인 58년의 농공업생산 총액은 전년비 48% 증가를 보였다고 하고, 그 후 계속 비약적인 신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성장지수는 과장된 보고에 의한 것이었으며 59년부터 계속 3년간 자연재해가 있었고, 구(舊)소련이 60년 이래로 경제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한 데다 중 ·소관계가 악화된 점 등의 원인으로 대약진정책은 중도에서 좌절되었다.원래 삼면홍기운동을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진입하는 초기 단계라고 하면서 강철생산량이 15년 내에 영국을 초과할 것이며, 농업생산량도 100% 이상 증가할 것을 표방하면서 모든 가정을 없애고 직업별로 군대식으로 인민을 조직화하였다. 그러나 농민의 태업과 반항으로 농업생산은 대풍작이었던 58년의 2억 2500만t에서 60년의 1억 8000만t으로 떨어졌고, 밥짓는 솥까지 몰수해서 토법(土法:재래식 방법)으로 수만 개의 제철소를 만들어 생산한 철은 산성이 많아서 쓸모 없는 것이 쌓이게 되었다. 이래서 60년부터 류사오치[劉少奇]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무마 등으로 5∼6년 후까지는 1억 8000만t 대를 겨우 유지하였고, 강철생산도 중지하였으며 대약진은 완전히 실패하고 마오쩌둥도 일시 뒤로 물러났다. 이것이 그 후 문화대혁명에 의한 마오쩌둥의 보복(전면무정부주의화 및 류사오치의 감금)으로 나타나 중국의 경제를 20년이나 후퇴시켰다.● 문화대혁명 (1966년 ~ 1976년); 두산세계대백과 & 네이버 검색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났던 마오쩌둥이 유샤오치를 중심으로 공산당내에 새로운 계급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비판하며 이를 개혁할 새로운 사회주의 교육을 제기하였으나 공산당이 이를 적극 수용하지 않자 군을 움직여서 군이 지원하는 ‘무산계급 문화를 창출하는 문화대혁명’으로 발전, 문화 대혁명 이후 구(낡은 이념,사상,습관,관습) 타파를 미명으로 지식인,전문가 폭행, 피살, 사찰, 문화재파손 발생하였다. 무엇보다 사상문화 자체가 아닌 사람을 공격 배척함으로서 사회발전에 필요한 전문인력 절대 부족 현상으로 경제, 사회적 발전 기회 박탈당하게 되었다.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를 내렸다.Ⅲ.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중국현대사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투쟁이라는 외적 변천에 관계없이 실제 인민은 열심히 제 살길을 찾아 살아간다는 간단한 진리를 보여준다. 겉보기에는 현대사 관통이지만 한편 보면 지독한 풍자임에 분명하다. 후이꿰이는 한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헤쳐나간 적은 없다. 도박에서 지는 것도, 국민당군이 공산당군에 차례로 부역하는 것도, 그리고 아들을 죽음의 운명으로 몰아넣는 것도 모두 상황이, 현실이 그를 그쪽으로 몰아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림자극을 위해 목숨걸고 지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리고 그 현실이란 것이 죽음과 매시간 희롱하는 것들이기에 우리는 더욱 범상치 않은 보통 인민의 행동과 운명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