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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 신화와 비극의 특징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中 다섯 번째 묶음인 「비극과 카타르시스」를 읽고,(1) 그곳에 나타난 그리스 신화 혹은 그리스 비극의 특징을 정리할 것.1. 그리스 비극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플라톤에 따르면 비극이 사람들에게 주는 쾌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연민이다. 사람들이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눈물 흘릴 때, 그들은 겉으로는 주인공의 불행을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의 깊은 속내에서는 바로 자기 자신의 불행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빙자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이 허락되는 예술이다. 이것이 바로 비극이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 모으는 매력이라는 것이다.플라톤은 이러한 비극의 특징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던 것이다. 비극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 억제하고 있었던 연민과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는 것을 허락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오직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슬픔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비극적 공감은 겉보기에는 타인에 대한 연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모든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불행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본능적인 욕망으로 있다. 하지만 이 본능은 제멋대로 분출되어서는 안 되는데, 자기연민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사소한 고통에서 점점 더 예민해져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유약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의 고통에 점점 예민해져 끝내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차갑고 무감동한 이기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기도 하다.공포란 우리들 자신에게 임박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자기에게 임박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처럼 참기 어려운 것이 없다. 그리스 비극은 우리에게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줌으로써 마치 그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하여 느끼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극복하고 제거해야 하는 까닭은 굳이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그것이 그 자체로서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09.06.05| 2페이지| 1,000원| 조회(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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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와 맹자, 유가의 가르침
    유가의 가르침유가의 사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을 예()라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운용될 수 있는가? 린타캉, 탕쉰이 지은 공자와 맹자에게 직접 배운다. 라는 책의 가상문답 속에서 드러나는 예의 근본정신과 현실에서의 적용과정에 대하여 살펴보겠다.공자: 인을 말할 때 나는 나를 미루어 남을 완성한다고 말했고, 또 나를 이겨서 예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를 미루는 것’과 ‘나를 이기는 것’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작립: “나를 미루어 남에게 완성한다.”는 사상은 충서()의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충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사상이자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우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한다.' 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이런 덕목은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된다면, 남에게 강요하거나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공자: 나는 지금은 예악()이 붕괴된 시대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주례에 맞춰 일을 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넘보아 난을 일으키고, 윗사람은 예를 내팽개쳐 버린 시대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사로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나는 극기()를 말했습니다.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면 주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사로운 마음은 나를 미루어 남을 완성한다는 덕목의 장애물입니다. 예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마음을 극복해야 하고, 나를 미루어 남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이 마음을 극복해야 합니다.나의 생각 --->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과 귀를 밝히는 것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서고자 하는 자리에 남을 세운다거나 내가 이루려는 일에 남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조금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일단 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나의 사사로운 마음을 다스려서까지 남을 완성하여야 하다니.. 공자는 한 개인의 입장보다는 좀 더 큰 하나인 사회나 국가.. 그러니깐 천하의 이익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어느 사회이건 간에 그 사회를 통제하는 규범이 필요하다는 점이고 공자가 살던 시대에 공자는 그 규범으로 예()를 제시한 것이다. 중국이 하나로 통일 되어야 천하가 안정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좀 더 큰 개념인 천하의 이익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공자 : 위나라의 정치상황이 매우 어두우니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해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정명()에서 시작해야지.작림 : 그런데 왜 반드시 정명에서 시작하여야 합니까?공자 : 모든 이름은 저마다 그 뜻이 있고 각종 사회관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임금의 행위는 반드시 임금의 이름에 부합해야 합니다. 신하의 행위는 반드시 신하의 이름에 부합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름은 고유의 뜻을 지니고 있고 그 뜻은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기준을 대표하는데, 이 기준이 도입니다. 도가 없는 시대는 난세로, 오늘날이 난세가 된 것은 천하에 임금의 이름은 있으나 임금다움이 없고, 신하의 이름은 있으나 마치 임금처럼 행세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않고, 자식은 자식답지 않기 때문입니다.작림 : 선생님께서 정명을 외치신 궁극적인 목표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었군요.공자 : 잘 보았습니다. 명분을 바로잡으면 모든 사람이 그에 합당한 지위를 얻게 되니 예가 회복되지 않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나의 생각 --->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가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움을 정명이라고 하는데, 문자그대로 이름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예라는 것이 이렇게 정명을 바탕으로써 회복됨을 공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위에서 공자가 말한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신이 바로 이 정명사상에까지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사로운 이익을 생각하고 각자가 움직인다면 임금이 임금다울 리가 없으며 신하가 신하다울 리 없고 아비가 역시 아비다울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요즘 사회를 생각해보면 정치가가 정치가 답지 않음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두 정치가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였기에 생기는 일인 것 같다.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아버지 답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이는 그 처와 자식들이 자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에 젖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자신이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였든, 그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이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였든간에 결국 사사로움은 정명을 방해하고 정명의 방해는 곧 예의 확립을 어렵게 하는게 아닐까?작림 : 예를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어떠한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공자 : 그것은 바로 내가 말하려는 중용의 사상입니다. 자공은 “어떤 것이 중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나는 “예이다! 예가 중용을 결정한다. 예는 중용의 구체적인 규정이고 중용은 예의 이론적 근거이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작림 : 군자는 언제나 중용을 지키고 한시라도 떠날 수 없습니까?공자: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요. 중용은 결코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변화에 따라 변화를 꾀하는데, (...) 어떤 이는 비록 주례에 부합했으나 예를 실제 운용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 만약 지나치게 예를 강조하면 사회 전체가 분열되고, 그것이 심해지면 사회가 붕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운용할 때는 반드시 사회 각 구성원이 화목하게 지내고 등급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나의 생각 ---> 중용이라는 것을 한쪽으로의 쏠림이 없는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예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양 극단으로 치우치는 말과 행동이 많아 사람들에게 불안정하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중용을 향한 열망이 큰 사람이다. 이 중용의 덕목을 실천하지 못해온 내가 예를 지켜오지 못했음을 공자가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올 곧은 중용만이 예를 실천하는 방법이 될 수는 없음을 공자는 또한 얘기하고 있는데 중용이라는 개념을 한 지점에 머무르는 정적인 것이 아니고 사태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동적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는 공자가 강조한 예가 공자가 살던 시대에만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닌 어떠한 사회에서도 그 사회의 규범과도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내가 예전에 배우기로는 주례에는 남녀가 신체접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신체접촉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구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구절을 본 일이 있다. 예라는 개념이 결코 융통성 없는 고리타분한 사상이 아님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실감할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회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공자는 예를 말함에 있어서 등급을 나눌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결국은 그 신분에 걸맞는 언행으로 정명을 실천하고 사사로움을 배제하고 중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쩌면 민주주의를 실행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지금의 사회와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어학| 2009.06.05| 3페이지| 1,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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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vs 유태인
    역사학 입문, 이상호 교수님이슬람교와 역사《 깊어져만 가는 갈등의 골짜기 》2007년 7월 19일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활동을 떠났다던 한국인 선교단 23명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원리주의 세력인 탈레반 대원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2명의 한국인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테러전쟁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하여 관심이 증대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이슬람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2000여년에 걸친 문명의 충돌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인 선교단체는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문명의 선봉과 다름이 없었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친미정권이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슬람세력의 영향권 아래에서 이슬람 원리주의가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진 곳이었기 때문이다.얼마 전까지 강 건너 불구경처럼 느껴지다 한 순간 우리 곁으로 다가와 버린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 역사를 모두 포괄하는 키워드 앞에서 우리는 ‘역사에게 배우지 못한 민족에게 역사는 보복한다’ 는 말을 떠올려 본다. 우리는 그만큼 이슬람에 대하여 문외한이었고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나 사회 국가가 이슬람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할 때 그 개인이나 국가 또는 사회의 현재와 미래는 이슬람의 보복에 취약해질 수 있음을 우리는 이번 피랍사건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오늘 이 기회를 통하여 우리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이슬람의 역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 어떠한 원인에 의하여 테러와의 전쟁, 그로 인한 계속되는 복수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이슬람교는 무함마드 빈 압둘라에 의하여서 서기 610년 메카에서 창시된 종교이다. 이슬람은 ‘스스로 순종하다’ 라는 뜻으로“이제 나(절대신 알라)는 너희를 위해 너희의 종교를 완전케하고 너희에 대한 나의 은혜를 완전케하고 너희를 위해 이슬람을 너희의 종교로 선택하였노라.도 전혀 용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알라는 아버지도 아들도 동반자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로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급의 신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 보낸 위대한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존경하지만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원죄를 사하였다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슬람의 교리에 따르면 신에게는 인간차원의 혈연관계 따위는 있을 수 없으며 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주장은 용서할 수 없는 불경스러운 대죄 행위라고 규탄한다.이슬람과 기독교는 모두 그것을 믿는 신자들의 운명공동체적 결집력을 대단히 강조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그 추종자는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자신의 종교에 대한 믿음과 그 실행을 매우 중시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정치, 경체 및 문화적 활동과 분리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오랜 기간 동안 종교로서의 지위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화를 모두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력체로 군림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21세기에 와서는 이러한 특징이 두 종교의 차이점으로 분화되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이슬람세계는 아직도 무슬림계 정당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슬람의 교리와 율법에 따라 사회제도가 정해지는 등 비민주적인 행태가 지속되는데 반해 서구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회들은 대부분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개인의 행동을 구속하지 않으며 개인의 종교적인 자유마저도 인정하는 사회로 변모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직도 이슬람세계가 그들의 종교인 이슬람과 그 교리를 담은 쿠란에 의하여 좌지우지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든 중세든 현재든 이슬람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꼭 짚고 넘어가야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서기 73년 로마제국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지방(지금의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어 약 2000여년간 전 세계를 떠돌던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 감옥에 투옥되었고 제도화된 고문을 당했다. 는 고문이 공식적으로 용인되고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나라는 이스라엘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스라엘에서 고문은 잘 조직되고 제도화 되어 있으며 기록으로 남겨진다. 많은 피의자들이 군 경찰로부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추방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략 중 하나였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이 발생한지 한 달만에 2만여명의 팔레스타인인과 레바논 사람들이 죽었고 2만 5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0여만 명이 집을 잃었다. ‘베이루트‘에 투하된 폭탄만 해도 히로시마를 황페하게 마든 원자탄을 능가했으며, 주된 목표는 학교와 병원이 되었다.)보다 못한 국제사회는 이 둘을 중재하려 노력하였고 결국 이스라엘 영토 안에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허용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오슬로협정(1993), 요르단강 서안을 팔레스타인에 양도하는 와이협정(1998)등 을 맺기에 이른다. 하지만 수감자석방문제, 분리장벽문제, 예루살렘의 이슬람사원 관리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힘들여 이룩했던 평화협정들이 차례로 파기되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테러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인 가자지구를 공격하여 수 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는 등 이스라엘의 공세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어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였고 이슬람근본주의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의 공격을 뿌리 뽑겠다는 명목 하에 2006년 또다시 레바논을 침공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숱한 비극에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이어 이스라엘을 후방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비난여론도 더욱 거세져만 갔다. 이러한 비극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인을 비롯한 아랍인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여론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아랍권에 대한 동정여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이슬람의 교세확장에도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유대인들과 자주 접하였던 무함마드가 성경의 이야기들을 쿠란을 인용하여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무함마드가 주위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성경을 인용한 일부 쿠란 구절들의 모순점이 드러나면서 그에 대한 반박이 이어졌다. 게다가 당신이 진정한 예언자라면 기적을 보여주라는 요구가 빗발치는 등 무함마드가 곤경에 처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일들로 인해 무함마드는 알라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유대인들에게 무함마드와 그의 신 알라가 우호적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유대인들이 2500여년간 믿어왔던 여호와를 무슬림들은 그것이 본래부터 그들의 신(알라)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침략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무함마드를 조롱하였으며 또한 두려워하였고 심지어 그의 암살을 기도하였다. 하지만 그 암살기도가 실패로 끝나고 무함마드는 자신에게 독 묻은 양고기를 대접한 자이네브라는 유대인 여자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무슬림들에게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무함마드를 증오했고 질시했으며 그를 없애고 싶어 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에게 이 사건은 유대인들이 알라의 예언자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무슬림들은 사건이나 사물을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이슬람교를 거부한 후에 무함마드에게서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무함마드는 이제 유대인들을 이슬람의 원수로 판단하게 된다. 그동안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절하라 했던 것도 메카를 향해 절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쓰여진 쿠란의 구절들은 모두 유대인을 저주하는 말들로 채워진다.“알라께서는 그들의 믿지못함을 저주했다. 그들 가운데 믿는 자는 소수였다.” (쿠란 4장 46절)이전의 계시에서 알라는 종교에서 강요는 있을 수나시크를 적용하지 않은 채 알라의 초기계시를 그대로 주장함으로써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점을 부각시킨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최종적인 계시는 결코 평화가 아니다.유대인들을 이슬람교 최대의 적이라고 규정하는 등 알라의 계시가 진보함에 따라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한다. 알라에게 복종하지 않는 종교는 어떤 것이든 파괴해야 한다는 사상이 이미 이슬람시대의 초기부터 무슬림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무함마드가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군사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는 유대인들을 공격하기 전부터 메카의 대상단을 공격하는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무함마드는 이미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유력한 리더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유대인들을 공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함마드의 군대는 먼저 유대족의 한 일파인 네이디어 부족을 공격하여 마을을 파괴하고 그들을 추방하였고 이어 코레이저 부족을 공격한다. 코레이저 부족은 당시 아라비아에 남아있던 마지막 유대인들이었는데 무함마드의 군사들이 25일간 마을을 포위하자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항복한 유대인 남자 9백여명을 살해하였으며 남아있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일부는 노예로 팔았고 일부는 휘하군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어 무함마드는 “앞으로는 아라비아에 두 개의 종교를 허용치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로써 아라비아 지역에는 유대교 집단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고 많은 무슬림들이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무함마드 사후 제2대 칼리프로 등극한 우마르 알 이븐 카타브는 성서의 백성들(유대인)을 위한 새로운 지침을 만들어 시행토록 하는데 쉽게 말해 유대인 차별법같은 것이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도가 길가에 앉아 있을 때 무슬림이 지나가면 그 유대인이나 기독교도는 무슬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일어나야 한다.* 유대인이나 기독교도가 길을 걸을 때 맞은편에서 무슬림이 오고 있으면 유대인이나 기독교든 방향을 돌려 다른 길로 가야 한다.* 성진다.
    인문/어학| 2009.06.05| 10페이지| 2,000원| 조회(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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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영의 소설 무기의 그늘 감상문
    무기의 그늘 감상문전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전쟁의 본질은 무엇이며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석영의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은 바로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나는 전쟁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는 못하였지만 전투는 경험해보았던 사람이다. 나는 전투경찰로 군복무를 하였는데 자주 시위대와 전투를 치루었다. 물론 맨날 전투를 하는 것은 아니고, 집회가 평화적으로 끝난다면 그냥 돌아가지만 집회가 불법적인 성격으로 변질되면 그때부터는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전투를 경험하면서 이러한 전투의 본질과 또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면의 일들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황석영 역시도 본인이 월남전에 참전하였던 사람으로서 실제경험을 통하여 월남전의 본질과 이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을 테고 이는 무기의 그늘이라는 소설로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베트남에 간 대부분의 한국의 군인들은 대부분이 경제적인 이유에 의한 참전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그들은 참혹한 전장에서 어떠한 고민도 해볼 겨를 없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것이다. 하지만 안영규는 남들 말대로 운이 좋게도 전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합동수사대로 발령이 나게 된다. 하지만 그로인해 월남전의 본질과 이면을 알게 되고 방황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안영규는 남들 말처럼 그렇게 운이 좋은 사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전투지역에서만 있었다면 죽었든, 살아서 돌아오든 결국 그가 전쟁의 추악한 단면에 대하여 알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어떤 면에서 안영규는 베트남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나쁜 정도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침략에 의하여 고통 받는 것도 모자라 서로 분열되어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며 싸우는 베트남 민중들의 고통은 그저 운이 나쁘다는 말로는 결코 표현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묵인해야 할 때가 있다는 미군장교의 말은 그러한 비인간적인 행위를 직접 겪으며 또한 침략자들에게 그런 행위를 하는 베트남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월남군 간부인 팜 꾸엔은 미군에게 납품되어야할 생필품 등을 빼돌려 암거래를 통해 돈을 모아 해외로의 도피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나 거래가 거의 끊기다시피해 값이 폭등한 계피를 군인들을 동원하여 채취해 큰 이득을 보려는 생각이나 가지고 있는 부패한 군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생 팜 민은 형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베트남인민해방전선의 보급 공작원으로 활동하며 그의 형이 빼돌리려는 물품을 인민해방전선 측에 공급하려 한다. 거기에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해방전선의 공작원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구엔 타트라든가, 팜 꾸엔과 함께 해외로 도피할 생각을 지니고 있는 오혜정도 있다. 이렇듯 월남전은 전쟁이라는 큰 나무 아래 수많은 음모와 공작의 그늘이 드리워져있는 전쟁인 것이다.작가는 월남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듯 하다.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베트남인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국은 언제나 그렇듯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명분을 동원하여서라도 전쟁이 참여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금까지도 드러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베트남인들의 자유를 위하여 전쟁에 개입하였다지만 실제 그들의 안중에 베트남인들은 없다. 이 작품은 미군들이 베트남인들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지,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사실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인민해방전선 게릴라 들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도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베트남 양민들을 마구 학살한다. 또한 그들의 욕정을 채우기 위하여 베트남 여인들을 강간하고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그러한 행동에 가담하지 않은 동료 병사들이 상부에 보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많은 일들이 밝혀져도 미군 측 에서는 그런 일은 전쟁터에서 매일 발생하는 일일 뿐이며, 전쟁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은 전제된 사실이라고 말하는 등 제국주의적 속성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그렇지만 이 소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전쟁의 본질 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이면인 것 같다. 전쟁을 상징하는 무기의 뒤편에는 언제나 경제적 이익이라는 그늘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전쟁의 본질을 ‘무기’ 라 한다면 전쟁의 이면에는 ‘그늘’이 있음을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안영규가 차출되어 온 합동수사대는 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근무하는 곳이지만 더 핵심적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서로 경계하고 경쟁한다. 더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는 쪽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들은 ‘우리는 같은 목적으로 이 곳에 왔다‘는 한국 병사들의 말을 ’너희는 돈을 벌기 위해 왔을 뿐‘ 이라며 공격한다. 이것은 미군 스스로가 자기네들도 돈을 벌러 왔음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됨을 작가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 사용되는 엄청난 양의 총기, 탱크, 비행기, 전함 등의 군수물자를 만들어내는 미국의 군수업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호황을 맞게 될 것이며 그러한 호황 속에서 조그마한 이득을 취하려는-결국 개인에게는 큰 이득일 것이다- 무리들의 얽히고 섥힘이 전쟁이라는 것. 결국 월남전은 경제적 이익의 추구라는 추악한 명분을 그 이면에 숨긴 채 베트남인들의 자유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침략전쟁임을 알 수가 있게 된다.
    독후감/창작| 2009.06.05| 2페이지| 1,000원| 조회(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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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치
    대원군을 위한 변명1. 서론2. 본론- 대원군이 쇄국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1) 병인박해(2) 병인양요- 대원군의 부국강병 의지3. 결론서론1863년 철종(哲宗)이 대를 이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실의 가장 웃어른인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가 흥선군 이하응(興宣君 李昰應)의 아들 명복을 다음 왕으로 지명하니 바로 조선 제 26대 왕인 고종(高宗)이다. 그의 아버지 흥선군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봉해졌고, 나이가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이끌기 시작한다. 조선조 역사를 통틀어 대원군만큼 강력한 개혁을 실시한 정치가는 없었다. 이는 어쩌면 대원군이 집권한 시기가 조선조 500여년 가운데 가장 개혁을 필요로 했던 시기라는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대원군이 실행했던 여러 가지 개혁 작업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서원철폐와 호포법,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꼽을 수 있겠는데, 그 중 서원철폐와 호포법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는 양반이라는 지배계급의 특권을 완전히 부정하는 작업으로 영조(英祖)나 정조(正祖)조차도 이루어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경복궁 중건 역시도 많은 원성이 있었지만 수도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서는 복원이 필요한 면이 있었다. 경복궁 중건은 숙종(肅宗) 등이 추진한 적이 있었지만 역시 대원군의 추진력이 미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이처럼 대원군이 내정에 있어서 엄청난 결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정치가였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나 대원군의 외치에 있어서는 그동안 많은 비판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표되는 그의 대외정책이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어 일본의 식민지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이미 정설처럼 굳어져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난 잘못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평가하는 의견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력시위로 문호를 개방함과 동시에 치외법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는 서구세력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으로 현명한 처사였다고민심이 크게 흔들려 머지않은 장래에 서양세력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세력의 침략에 있어서 첨병구실을 하는 것이 천주교였다. 대원군은 집권초기까지는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의 아내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 閔氏)와 고종의 유모를 비롯한 가솔들 다수가 천주교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대원군은 조선 내 천주교의 교세확장에 대하여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연이어 밀입국하여 포교활동을 벌이는데도 별다른 제재가 없었으며 이로 인해 1865년(고종 2) 경에는 조선에 천주교도가 2만 3천여명에 이르렀다.)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지 않고 묵인한 것은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하위협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주교로 개종한 양반들이 대원군과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면담을 주선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남하위협이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또한 서원철폐 등의 강력한 내정개혁을 실행하면서 보수유림 등의 기득권세력의 견제를 받게 된 대원군은 정치적인 안정에 유달리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양반기득권세력에게 시달리던 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천주교를 인정할 경우 불어 닥칠 후폭풍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모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 서양, 반 서학세력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조선의 사정상 천주교탄압은 보수유림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 국내 세력의 일체감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부인을 비롯한 가솔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은 대원군의 정적들에게는 대원군을 몰아낼 수 있는 빌미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결국 대원군은 국제정세를 충분히 고려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천주교탄압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1866년(고종 3) 프랑스선교사 9명을 비롯한 조선인 천주교도 수천여명을 처형하게 되는데 이를 병인박가 있을 따름이었다. 악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서양세력의 침략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은 대원군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좀 더 나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병인박해를 구실로 강화도에 함대를 출동시킨 프랑스군의 약탈과 만행은 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화진(楊花津)을 지나 서강(西江)나루에 까지 이르러 조선정부를 위협하였으며 강화도(江華島)를 공격하게 된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해군은 포악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한다.) 프랑스군은 강화성을 점령하고 성안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 2000여권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마음에 드는 물건은 모조리 싹쓸이해 배로 실어 날랐으며, 운반하기 힘들만큼 크고 무거운 것들에는 불을 질렀다. 이들은 민가, 군영 등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포격을 하였으며 이러한 만행이 황해도 연안까지 이어졌다.조선 측은 프랑스 측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선교사 처단의 합법성과 프랑스함대의 불법 침범을 들어 퇴거할 것을 통고하였다.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은 회답을 통하여 선교사 학살을 극구 비난하고, 그 책임자를 엄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신들과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맞섰다. 이렇게 기세등등하던 프랑스 함대는 그러나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패하고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침략의도 자체가 조선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닌 조선에게 위협을 가해 통상교섭을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강화성에 있으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銀金塊:당시 화폐로 환산하여 3만 8000달러)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조선은 결국 전투에서는 대부분 패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한 셈이 되었다. 프랑스 군함이 원했던 통상교섭이라는 의도를 좌절시켰쟁을 전개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2. 대원군의 부국강병(富國强兵) 의지서양세력의 연이은 침략을 물리친 대원군은 이때부터 매우 단호하게 쇄국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대원군은 쇄국이 조선의 미래에 보다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국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개항을 하는 것보다는 쇄국을 통해 국내정치를 안정시킨 뒤 부국강병을 이뤄내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집권 초기부터 무관들이 병조판서를 거치지 않아도 판의금부사가 될 수 있게 하여 무장들이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였다. 또한 그동안 문관이 독점해오던 병조판서에 무관을 임명하는 등 무관들의 권위향상에 노력하였다. 무관들은 자연히 대원군에게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충성을 다 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권력기반이 더욱 강화된 것이다.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며 서양세력의 강력함을 실감한 대원군은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두 양요의 격전지이자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인 강화도에 병력을 대폭 늘리고 군사적 기능을 한층 강화시켰다. 각 지방별로 포군을 설치하여 새로이 늘어난 포군의 숫자만도 대원군 집권기에 3만명 이상이 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교대로 근무하는 번상병이 아닌 사실상의 상비병들로서 일정한 급료가 지급되었다. 포군의 증강은 조선 군사력의 강화로 이어지는 동시에 대원군 정권을 사수하는 세력이 되어 국내정치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이들 포군들은 대원군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조선의 주력군으로 자리 잡을 만큼 탄탄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원군은 각종 무기 개발에도 많은 재원을 투입하는 등 군비증강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원납전, 결두전, 성문세 등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주조하여 원성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대원군은 관리들의 각종 비위 불법을 시정함은 물론, 귀족 관리들의 경제적인 온갖 특권과 사사로운 착취, 뇌물수수행위를 철저히 단속함으로써, 백성들의 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경복궁 중건 및 병인, 신미의 두 차례 난리를 치루고 그에 따른 군비증강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바닥난 국가재정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박은식(朴殷植)이 그의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대원군 집정 10년의 결산으로 재정 상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묘사한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선혜청, 만리창, 상평창, 군자감, 광흥창에 가득한 은괴와 엽전은 모두 백성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친부 안에 다시 곳간을 증축해 은화를 채우고 있다. 이때의 국력은 참으로 10년을 쓰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 다시없던 일이다.”)대원군이 이 당시에 개항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따르지만 결국 10여년 뒤 1876년(고종 13) 조선은 개항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부국강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개항을 택한 조선은 일본을 비롯한 서양세력의 침략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세력과 무역을 하면 조선같이 이전에 개발되지 않았던 국가에서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관계국과의 상호협조인데 이는 국력을 바탕으로 하는 세력균형이 이루어져야 가능했다. 조선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과 서양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으며, 실제 개항이후 있었던 조선의 대 서양무역도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대원군이 쇄국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효과를 우려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적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외부의 강압에 의해 문호개방을 한다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외면상으로는 교역을 통해 상호 이익을 증진한다는 것이지만, 산업이 발전되지 못한 나라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교역을 할 수는 없다. 서로 교환하는 상품의 내용이 다른 것이다. 또한 국제법에 익숙지 못한 미개국으로서는 자연히 불평등조약해진다.
    인문/어학| 2009.06.05| 6페이지| 2,000원| 조회(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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