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상상력◎ 서론『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책을 찾기 위해 제일 처음 찾은 곳은 서울의 대형 서점이었다. 하지만 3곳을 돌아보아도 이 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인터넷을 통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책이 도착하고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1장을 채 못 읽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을 읽기 전에 이 사람이 왜 이 책을 썼으며, 이 책을 쓴 사람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읽은 것이었다. 이것은 밀즈가 책에서 언급했던 ‘무관심의 경험’인 것이다. 내가 책에 대해 무관심하게 했던 것이다. 목적도 없이 이 책을 읽은 것은 ‘생활환경에 대한 개인문제’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라이트 밀즈와 이 책에 대하여 찾아보았고 그 내용은 밑의 내용과 같다.라이트 밀즈(C. Wright Mills)는 비판이론의 대표적인 미국의 사회학자로 이 책에서는 개인과 역사 그리고 개인과 역사가 상호작용하는 사회라는 세 가지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사적인 문제와 공적인 문제의 의미,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의 상호 이율배반, 역사가 오늘날의 상황에서 지니는 의미 등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는 통찰력을 통해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밀즈는 사회학적 쟁점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는 여기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 단어적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다. 여기서 상상력이란 사회 문제의 의미와 그 맥락을 올바로 파악하는 안목을 뜻하는 것이므로 달리 표현하면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이트 밀즈와 이 책에 대하여 조금은 이해가 되고 나서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처음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말을 들었을 때 생각은 내가 처음 도서를 구매할 때 겪었던 어려움을 해결해준 인터넷 도서판매와 같은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대형서점을 만들어 책을 구비해 놓아서 지역 주민들에게 팔 때, 전 세지 못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진술이 종종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말로 채색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가치 평가가 부가된다는 것이다.○ 3장 - 추상적 경험주의? 추상적 경험주의 - 하나의 연구 방식으로서 실제적인 어떤 명제나 이론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사회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어떤 새로운 개념이나 그것들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 추상적 경험주의자들이 전형적으로 선택하는 문제의 종류와 그들의 연구 방법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이 방식의 사회 연구가 향유하는 명성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지적 특징 - 지적특징은 그 종사자들이 주장하는 과학철학과 그들이 그것을 고수하고 사용하는 방식이다. 실제적인 연구 유형과 그 행정적?인적 장치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 바로 과학철학이다. 실제 연구의 취약성과 행정 기구와 인적 장치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 때문에 그들은 이 특별한 과학철학에서 지적 정당화를 찾는다. 실제로 추상적 경험주의자들은 사회 연구 그 자체보다는 과학철학에 더 관심이 많다. 그들이 지금껏 한 일은 그들이 과학적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한 가지 과학철학을 받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방법은 일반적으로 사회과학 연구의 고전적 계보로 여겨지는 것에서 발생한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의 일반화도 아니다. 그것은 주로 자연과학의 한 철학을 적당히 수정한 것이다.?4장 - 실용론의 여러 유형가치는 연구하는 문제를 선택하는데 연루된다. 또한 가치는 문제를 파악하는 데 쓰이는 주요 개념에도 연관되며, 문제 해결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념에 관해서는 가능한 한 ‘가치 중립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그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가치적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고 명확히 표명해야 한다. 문제들에 관해서는 역시 어떤 관점에서 문제가 선택되는지를 분명히 하고, 문제 해결 과정에서는 그 해결책이 연구자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건 그 도덕적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편향적인 가치 평가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자신의 지다. 자유주의적 실용론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중간 계급적인 소규모 도시에 생활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안정되고 질서 정연한 농경 원리에 어긋나는 것, 문화 지체의 낙관적인 진보적 주의에 배치되는 것, 적절한 사회 진봉 순응하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적 실용론의 요점은 ‘적응’과 그에 반대되는 ‘부적응’의 개념이다. 적응이란 개념은 한편에 사회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 개인적인 진입자가 있는 사회적 상황에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전입자는 그 사회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입자 문제는 초기 사회학자들의 중심적인 관심거리였고, 그 문제를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이 모든 문제를 공식화하는 일반적인 모델의 일부가 되었다.제 5장 - 관료적 풍조관료주의적 사회과학의 선전력은 대부분 과학적 방법에 대한 철학적 주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조사자 충원이 잘 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쉽게 개인들을 훈련시킬 수 있고, 그들을 장래가 유망한 직업에 쉽게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경우에서, 기술자들이 즉각적으로 사용 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성문화된 연구 방법이 주요한 성공 열쇠이다. 몇몇 창시자들은 이 경험적 기술을, 이상하게 억눌려 있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상상력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 창시자와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하나의 정신을 대하게 된다. 그러나 관료주의적 조사에 3,4년간 종사한 젊은이와는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그리 수월하지 않다. 그의 지위와 경력, 야심과 자존심은 대부분 이런 관료주의적 조사의 전망과 그 용어, 그리고 그 기술에 의거한다. 사실 그는 그 외의 것은 전혀 모른다.추상적 경험주의의 방법과 그 방법론적 금기, 그 실용론의 초점, 그 연구소가 선발해서 훈련시키는 정신적 자질, 이러한 모든 사실들 때문에 사회과학의 사회정책적인 문제는 더욱더 시급한 것이 된다. 이 관료주의적 양식과 그 제도적 구현은 현대 사회구조의 지배적인 경향과 그 특징적인 사상 유형과 궤를 같이한다.가지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방법의 제시와 그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론의 정립과 재수정은 아무리 자극제가 되고 흥미롭다 하더라고 그저 기대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방법이 제시되면 무언가에 대한 연구, 사실상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연구를 위한 보다 더 좋은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이론의 정교화를 위해서는 체계적이든 비체계적이든 간에 관찰 내용이나 관찰 내용의 해석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방법도 이론도 혼자서는 사회 연구의 실제 작업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사실상 이론과 방법은 종종 상치되기도 한다. 이론과 방법은 사회과학 문제로부터의 정치적인 후퇴이다. 이미 보았듯이 일반적으로 이론과 방법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극제가 되는 거대 연구 모델에 근거한다. 이 거대 모델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다 해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대개는 의례적으로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거대 모델은 자연과학 철학에서, 그리고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대부분의 고전적 연구는 추상적 경험주의와 거대이론 사이에 위치한다. 또한 그러한 연구는 일상적 상황에서 관찰되는 것에서의 추상화를 포함하지만, 그 추상화의 방향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를 향해 있다. 사회과학의 고전적 문제가 제기되고 그러한 관점에서 해답이 제시되는 것은 구체적인 사회적?역사적 구조, 즉 역사적 현실의 수준에서이다. 고전적 연구에서는 무엇을 입증하느냐가 어떻게 입증하느냐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개념들은 일군의 실질적인 문제와의 밀접한 관련으로 정교해지며, 입증 대상의 선택은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결정된다. 정교화에 가장 적합한 추론을 약속하는 듯 보이는 개념의 특질을 입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경험적 입증, 증거, 기록, 사실의 확정은 많은 시간을 요하며,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러한 연구가 자신이 연구하는 개념과 이론에 효과적이기를 원한다.사회 연구의 모든 방법, 연구와 연구 방법의 모든 선택은 과학적 진보론특정 현상에 관한 연구에서 특히 ‘사회학적인’ 것이란 전체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 현상을 다른 형상들과 관련시키려는 부단한 노력이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상당 부분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러한 관점과 실천이 비단 사회학자나 인류학자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때는 이 분야만의 약속이었던 것이 이제는 사회과학 전반의관행과 목적이 되었다.사회과학의 통합으로 인해 제기되는 지적 문제는 주로 특정 사회와 시기의 제도적 질서, 즉 정치?경제?군사?종교?가족?교육 제도들의 관계와 주로 관련된다. 여러 사회과학의 통합으로 말미암은 실제적인 어려움은 교과 과정과 연구 경력의 설계 그리고 각 분야 졸업생들에 대한 확실한 직업 제공, 용어상의 혼란과 관련된다. 사회과학의 통합 작업을 크게 방해하는 장애물은 각 분야의 입문서이다. 분야들의 통합과 경계 설정은 어떤 다른 지적 산물보다는 대개 교과서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보다 더 부적절한 요인은 없을 것이다. 교과서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손해는 보는 쪽이지만 교과서 도매업자들은 그들의 생산물에 실질적인 이권을 가지고 있다 교과서의 통합과 더불어 사회과학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문제와 주제보다는 개념과 방법에 따라 진행된다. 학계 내의 어떤 구조적인 경향이 종국에는 전문화된 환경에 갇힌 완고한 사람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틀림없이 제공할 것이다.제 8장 - 역사의 효용역사가들은 대개 설화라는 수단을 통하여 사회 제도의 역사적 변형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해석하는 일에 몰두한다. 게다가 많은 역사가들은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사회과학자들처럼 역사가들도 정치사, 경제사 혹은 사상사 등을 전문으로 다루지만, 그들의 영역은 바로 사회과학의 영역이다. 역사가들은 여러 유형의 제도를 연구하면서 일정 기간에 걸쳐 일어난 변화를 강조하며 비교학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반면에 일반적인 사회과학자들의 제도 연구는 역사적인 성격보다는 비교 연이다.
◎ 로마의 체육과 스포츠 문화 ◎1. 로마의 사회와 문화로마 역사는 크게 공화정시대와 제정시대로 구분된다. 공화정 전기(6~3BC)의 로마는 라틴 동맹을 결성하여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하였으며, 훌륭한 도로를 건설하여 로마와 지방과의 상업적, 군사적, 문화적 교류를 원활히 한 뒤 점차 지중해로 진출하였다. 공화정 후기(3~1BC) 로마는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했고, 그리스, 유럽, 소아시아, 이집트, 중동까지 지배권을 확대하여 대 로마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로마는 짜임새 있는 법과 행정, 훌륭한 도시 건설 등을 문화유산으로 남겼으며, 헬레니즘 세계의 정복 과정을 통하여 그 문화를 수용하고, 거기에 독특한 라틴적인 요소를 첨가함으로서 유럽의 고전문화를 완성시켰으며, 기독교를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시켰다.2. 로마의 체육1) 체육의 목적로마에서의 체육은 곧 군사 훈련이었으며, 로마의 청년들은 훌륭한 군인이 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육 활동은 곧 전형적인 군사훈련 중심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체육의 목표는 건강한 신체, 의지력, 용기 등 전투 체력의 강화와 직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마 후기의 체육은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오락적 성격의 체육 활동이 성행하였다.2) 전기의 로마의 체육ㄱ. 전기 공화정 시대의 로마의 교육그리스를 정복하기 이전까지 교육을 의미하는데 그리스 문화를 수입하기 이전의 순수한 로마인 시대의 교육을 의미한다. 즉 초기의 로마에서는 가정, 공적인 집회 등이 열리는 광장을 의미하는 포럼, 그리고 군대가 기본적인 교육기관이었다.로마인은 보수적이었으나 실용적이고 실제적이면서 용감하였으며 그리고 모험심이 강하고 도덕과 준법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그들의 교육목적은 애국심이 강하고 법률을 준수하며 성실하게 신을 숭배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국가에 유용한 시민을 양성하는 한편 시민의 병사로서 훈련하는데 있었다. 즉 덕성을 지닌 선인으로 생각하였다.그리스의 교육제도가 채택되기 전까지 학교가 존재다. 소년이 되면 폭풍우르 문제시 하지 않고 사냥에 참가시켜 밤잠을 재우지 않고 사냥을 하게 하는데 말을 타고 활을쏘고 기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노고를 견디게 한다. 어른이 되면 곡괭이로 대지를정복하고 전쟁에 참가하게 되면 도시를 전율시킨다.”라고 쓰고 있다. 전쟁은 로마인에게는 중요하고도 최대의 무기였기에 군사훈련은 매우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로마의 소년들은 14세부터 17세 사이에 미성년임을 나타내는 토가 프라에테크스타(Toga Virilis) 라는 외투를 벗어 버리고 성인용 외투인 토가 프라에테크스타(Toga Praetexta)로 바꾸어 입는 의식을 시민의 의무로 인정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는데 의식이 끝나면 로마의 시민으로 그 이름이 등록되고 군대에 입대하였다. < 로마의 군사 >로마 청소년들이나 군인들은 연병장에서 주로 군사 훈련을 비롯하여 경주(달리기), 도약경기, 투척경기, 권투, 레슬링, 수영, 승마 등과 같은 훈련을 받았으며, 17~47세까지 국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해야 하였다. 로마의 청소년들은 우열을 다루는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밭을 갈고 여러 가지 농장일을 함으로서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신체운동을 충분히 하였다. 그 외에도 아버지들은 마르스의 연병장에서 군 생활에 대비하는 운동을 실시하였다. 17세에서 47세까지의 남자들은 유사시에 군인으로 소집되어 전쟁이 끝나면 제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병역 복무 중의 교육은 대단히 엄격하고 고되었는데 달리기, 뜀뛰기, 씨름, 말타기, 수영, 검술, 창던지기 등의 연습이 나체 또는 무장을 한 상태에서 실시되었다. 기병이나 경무장병은 활이나 승마의 연습을 하였고, 신병은 처음에는 목마를 사용하여 뛰어오르고 내리는 연습을 하였고, 신병은 처음에는 목마를 사용하여 뛰어오르고 내리는 연습을 하였고 진지작업 용구, 방패, 철모, 칼, 창, 활통 등 약 30~85파운드 가량의 장구와 17일간의 식량 등 < 대전차 경주장 >무거운 장비를 갖추고 장거리 행군과 같은 고된 군사훈련을 행하였다. 또유한 계층의 지원을 받았다. 쥬베누스의 체육 활동 내용은 전기 로마의 캠퍼스 마르티우스 연병장의 활동 내용과 비슷하였으나 가장 중요시 된 것은 기병훈련의 하나로 실시되었던 '트로이 게임' 이었다. 그러나 후기 로마 시대에는 체육 활동이 쇠퇴했고, 가장 성행했던 것은 직업 경기자들의 경연이었다.로마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B.C. 264년 경에는 이탈리아의 전역을 지배하였다. B.C 2세기 경에는 카르타고와 스페인 지중해 연안의 여러 섬과 갈리아의 일부 그리스 및 소아시아를 정복하였으며 공화정치에 종지부를 찍은 B.C 31년에는 지중해의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광활한 국토와 막대한 부 그리고 강력한 지배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와의 전쟁 이후로 로마제국의 사회적, 경제적 체제는 멸망의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었는데 로마의 군대가 전쟁에 참가하는 동안 원로원과 일부의 상인들 그리고 고위 군인들은 부를 축적하여 사치에 빠지고, 전쟁으로 얻은 많은 노예들로 인해 자유노동의 가치가 떨어지고 시실리아와 아프리카로부터 들어오는 값싼 곡물은 농민계층에게 큰타격을 주어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더욱이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와의 만남은 로마인의 지적인 수준을 한층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약탈한 도서, 예술품, 지식이 풍부한 노예, 우수한 철학자와 의사들에 의해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건축 그리고 종교는 더욱 발전하여 로마는 점차 그리스 문명에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소박하고 강건했던 로마인의 기상은 개인주의와 사치와 허영으로 물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뜻있는 위정자들은 헬레니즘 문화로 인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 헬레니즘 문화를 탄압하였고 로마의 원로원은 철학자와 수학자를 로마에서 살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B.C 27년경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 시저를 지칭함)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로 황제가 되면서 새로운 학문을 장려 및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제국시대의 후기에는 국가구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는거나, 특히 시민들 앞에서 나체를 보인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로마의 경기회는 경기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극을 즐기던 군중들에게 지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가들에 의해 열리곤 하였다. 결국 후기에 들어서는 그 횟수가 많아져서 공화제 말에 1년에 76일이었는데 B.C. 354년 경에는 175일을 경기회에 소모하였다. 더욱이 자극을 위한 새로운 경기가 새로이 행해져 그리스 시대와는 물론 초기 로마의 체육의 목적에서도 크게 벗어나 체육의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의 올림픽은 완전히 쇠퇴하여 지방제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슐라(Sulla ; 로마의 장군, 정치가, B.C.138~78)에 의해 모든 제전경기가 로마로 옮겨졌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많은 로마의 황제들이 그리스 경기의 부활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피정복 민족의 통일과 충성을 확보하고 동방과 서방의 집합지로서 올림피아의 전략적, 지리적인 중요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쥴리어스 시저(아우구스투스)는 경기에 대한 순수한 흥미로 그리스제의 신성한 종교적 영역을 부활하여 지난날의 화려함과 장엄함을 재현하고 경기를 지지하였으며 모방하여 새로운 로마의 경기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직업선수들의 폐단이 너무도 깊숙하게 침투되어 그리스 체육의 이상을 부활할 수는 없었다. 황제 네로는 자신을 치켜 올리기 위해 축제를 악용하기도 하였는데 전차경주에 직접 참가하기도 하였고 우승을 하자 호화로운 개선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체육관을 짓고 부분적이나마 체육의 성격을 지닌 네로 경기회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시저가< 1:1로 하는 검투와 다대다로 하는 검투 >개최한 어느 경기회를 살펴보면 연극공연, 음악회, 검투, 전차경기 외에도 여러 운동경기와해전이 벌어졌다. 맹수와의 격투는 5일간이나 벌어졌는데 보병과 기병대 그리고 코끼리가 동원되는 모의전투, 거대한 인공호수에서 2단 노의 군선과 3단 노의 군선, 4단 노의 군선들이 참가하는 모의 해전이 열리기도 하였다. 로마시대의 최대의 경기장인한 경기를 보여주거나 상대방이 죽어야만 승부가 결정되었다. 로마의 황제들은 시민들의 잔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색다른 경기방식을 연구하였는데 수십명 또는 수백명의 검투사들이 짝을 지어 패싸움을 하게 한다거나 시합장내에 물을 넣어 수중전투를 연출하게 하였다. 검투사의 양성학교가 카푸아(Kapua)와 폼페이(Ponpei)에서 몇 개가 발견되었는데 중앙에는 정방형의 광장이 있고 그 주위에 교관실, 주방, 회식당, 용구실, 숙직실 등의 건물이 설립되어 있었다. 칼리큘라 황제는 약 2만명의 검투사를 소유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검투사는 사병으로서도 훈련되어지기도 하였다. 로마에서는 검투사와 전차의 기수가 가장 사랑받고 우대받는 기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초기의 로마인은 위생적인 목적에서 티베르강가에서 냉수욕을 즐겼으나 점차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그리스의 습관에 따라 공중 목욕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후기의 테르메라고 불리는 목욕장은 짐나지온의 설비를 가미하여 웅장하고도 화려한 레크리에이션 센터로서 또는 사교장으로서 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대건축물은 실로 화려하여 기둥과 벽은 대리석을 사용하였고 바닥은 모자이크를 깔았으며 인상적인 아치가 복잡한 모양의 천정을 받쳐주었다. 욕장은 개인 소유의 것과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이 있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30~315)의 테르메는 약 1,600명을, 카라칼라(Caracalla)의 테르메는 약 3,2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 테르메는 약간의 입장료를 받기도 하였으나 보통은 무료로 공개되었다. 테르메에는 여러 가지 설비가 있었는데 그 구조는 대체로 탈의실(Apodyterium)이 있어 벽에 옷을 걸거나 노예가 옷을 받아 정리하였다. 거실이 매우 크게 설비되어 있었고 조그마한 팔레스트라 옆에 위치한 옥외 풀(Pool)은 운동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테르메에는 크기나 무게가 다른 여러 가지의 공놀이를 할 수 있는 사에리스테리움(Shaeristerium)이라는 방이 있었다. 도유실(Unc있다.
2009. 11. 6 금『 사회 속 존재하는 축구 』이 책의 제목은 처음부터 심상치 않다. ‘축구가 세계를 지배했다’라니.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이런 느낌은 한 번씩 느껴볼 듯 하다. 내가 처음 해석하기론, 축구가 인기가 많아 세계를 지배했다라고 비유한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허나 읽어가면서 책 속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던 축구라는 운동 속에 양면성,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축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들이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한 예로 우리나라에서는 동방의 아시아의 아주 작은 나라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전문체육인을 육성하였다고 한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인구비율에 대비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스포츠 대회에 나가 입상하는 것은 왠만한 큰 국가보다 많다. 그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당연히 대회에 나가면 금메달을 따야하는 것인 줄만 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나라면 ‘저 작은 나라에서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시키면 저 정도로 운동을 잘해서 대회를 휩쓸까?’란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림과 동시에 이상한 나라로 추측되게 하는 스포츠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책에서는 이런 현대사회의 축구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과거부터 현대로 이어 나오는 역사를 알려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축구의 경제성,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글들, 유태인과 축구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나 이슈를 축구와 상관시켜 이야기하고 있었다.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사건들이 외국의 축구장에서는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바로 훌리건이다. 외국에서 훌리건들이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볼 때면 ‘저런 행동을 왜할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이나 주변 환경,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과 습성이 훌리건을 조성하는 것 같았다. 한 예를 들어 셀틱과 레인저스를 들어보면, 셀틱과 레인저스가 더비 경기를 하고 나면 항상 사건, 사고가 터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종교의 문제였다. 이것은 단지 종교만의 문제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레인저스는 개신교 신도들이다. 그리고 반대로 셀틱은 가톨릭 신자들이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에 팬들이 이러는 이유는 종교개혁의 연장선이라 생각된다. 축구를 보면서 셀틱과 레인저스의 팬들은 축구안의 선수들이 마치 과거 속에 나오던 개신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을 응원하는 응원가는 ‘페니안의 파가 우리의 무릎을 적시네’, ‘내 손에는 총이 들려져 있네’ 등과 같은 살벌한 응원전을 이룬다. 더군다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아버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들 또한 이러한 노래를 서슴치 않고 부르고, 그 문화에 익숙해 진다는 것이다.이것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모든 스포츠 대결 구도에서 일본을 만나면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 일본을 싫어해서는 아닐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읽고, 보고, 느꼈던 그러한 배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조금씩 생긴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기가 있을 때면 일본을 응원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열렬히 응원하며, 다소 과격한 팬들은 일본에 대한 욕설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이것은 셀틱과 레인저스가 자신들의 감정을 축구에 대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과 비슷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보다 더욱 과격한 것이 셀틱과 레인저스의 훌리건이다.훌리건들은 서로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을 하며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 시키는 특성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 서로를 비방할 때, 우리는 저쪽 훌리건과 다르게 아이들은 때리지 않고, 흉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 대목이었다. 현대사회에서 폭력이라는 것은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이 사람들에게 축구란 폭력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이며, 그로인한 쾌락을 얻는 수단일 뿐인 것 같았다.하지만 훌리건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조직체는 아니다. 훌리건에도 다른 기업들과 다르지 않게 컨설턴트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또한 중역의 위치에 서있고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 어느 기업체에 비교해도 될 만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훌리건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상대편 훌리건에게 더욱 피해가가는 방식의 공격을 하는 것이다.다음으로 축구의 영향력은 힘 있는 나라, 힘 있는 인종에게 더 강한 법이라는 것을 느꼈다. 축구가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예로부터 유대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착한 사람들이 많지만 독일의 나치정권에 의해 학대받으며 뿔뿔이 흩어져 살아남은 훌륭한 인종이란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유대인들도 그들만의 문화를 구축하고 남들을 배척한 것 같다. 아니면 그 사회 속에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배척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유대인들이나 독일인이나 모두들 축구를 이용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념을 포교하고자 하였다. 유대인들이 만든 하코아란 축구팀은 헤브라이어로 힘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것은 구단의 목적이 유대인의 힘을 키우기 위한 것을 암시적으로 알려주는 단어였다. 그리고 하코아 축구팀의 반대팬들은 반유대주의자들이 주를 이뤘으며 ‘더러운 유대인, 유대인 돼지놈’ 하고 야유를 퍼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자들의 여론과는 반대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축구팀들은 상대편의 고의적인 파울로 인해 다친 골기퍼와 말도 안되는 경기규정인 선수교체가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역전극을 시켜 우승하며 유대인들의 뜻을 한군데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이것을 보고 사회의 일반적인 섭리가 힘이 있는 자가 권력을 쥐듯이, 축구라는 하나의 도구 또한 힘이 있는 사람들의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하여도 경기규칙을 마음대로 바꾸는 권력자, 아무리 심한 파울을 하여도 퇴장 같은 제제를 주지 않는 심판으로 하여금 승리를 빼앗길 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이것은 2006년 우리나라와 스위스 사이에 벌어진 축구경기에서도 비슷한 유형이라고 생각하였다. 오프사이드 깃발을 올렸다 내리는 부심. 그리고 그것을 골이라고 인정한 주심을 보고 스위스의 세계적 축구연맹에서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의 압박으로 인한 골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힘이 약한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적이 기억에 남는다.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그들 인종만이 뛸 수 있는 그러한 축구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팀을 응원하는 인종 역시 거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팀의 특성상 서포터즈들의 인구수는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유대인 물주들은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뉴욕의 안락한 환경으로 인해 팀의 대부분 선수가 이주했기 때문에 후에 다른 외국인들을 불러들여 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팀의 성적이 상승했고, 서포터즈들도 많이 생겼기 때문에 명예와 부를 챙길 수 있었다고 한다.우리나라 또한 모든 스포츠의 프로리그에 외국선수가 뛰길 원치 않았다. 기량차이도 많이 났고, 사회적 인식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선수를 기용함과 동시에 더욱 재미있는 경기흐름을 인식한 관객들이 더 보러오게 된 것이다. 세계화의 추세를 거스르는 행동보다 세계화에 찬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결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서감상문다채로운 놀음의 향연 !『노름마치』를 읽고무용이라는 것을 처음 접해보며 많이 어색했었다. 무용은 인간문화재에 등록되어 있으신 분들이나, 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나 교수님들이 하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연이 있었는지 무용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가 왔고, 그로인해 노름마치라는 책까지 읽게 되었다.노름마치. 노름마치가 도대체 무엇일까? 처음에 책을 보고는 노름마치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처음 듣는 단어이고 전혀 추측할 수도 없는 단어여서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게 되었다.'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 의 은어.노름마치란 뜻은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할 단어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흥’이라는 것을 멋스럽게 표현 잘 하는 민족이라고 알고 있다. 그중에서도 남사당패 속에서 최고의 연주자를 뜻하는 노름마치. 이 책에서는 이 노름마치인 열여덟의 예인들에 대해 소개해주는, 그들의 삶과 예술, 애절한 사연까지 소개해주고 있었다.전통이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로서는 이런 분야의 책은 처음 접해보기 때문에 조금의 어색함이라고 해야 할까? 읽기 전에 미리 지레 겁부터 먹었다. 한마디로 나에게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감에 있어서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했다. 그냥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그리고 웃고, 울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책과는 다른 것이었다.덩더쿵, 쿵 더러러러 쿵더쿵 쿵 더러러러......책을 읽으면서 무용교육 시간에 배웠던 장단이 생각났다. 생각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나도 같이 어깨가 들썩거리고 하는 것 같았다. 책속의 예인들은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사람들이독서감상문라고 생각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몸으로 익히지 않고서는 접할 수 없는 그런 거리가 먼 곳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운동을 못해도 좋아하고 하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듯이, 나처럼 무용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용에 관심을 가지고 한다면 이런 예인들도 흐믓해 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우리나라의 전통 음악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녀노소 모두가 다 참여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에 내가 사물놀이 패에 장구를 가지고 쉬운 장단과 함께 어울리려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면 북이나 소고를 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이 무형문화재로 전해지고 대가 끊기는 것도 나오는 것을 들었을 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전통들을 생계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지켜내온 노름마치들의 삶은 단순히 어느 경지에 오른 장인 정도로만 평가되어서는 안되며, 그 속에서 우리의 역사와 한과 개인의 고난한 삶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노름마치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풍족함을 위해서도 아니고 유명세를 위해서도 아닌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쉽게만 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 노력한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쉽고 편한 삶만을 원하고 있고, 이루고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애를 쓴 것도 그렇게 많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교사가 되는 것을, 이들이 제대로 된 것들을 배우기 위해 자신과 모든 것을 버리고 한 길만 걸어 가는 것 처럼 한다면 나의 꿈도 이루어질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춤을 추고, 소리를 내는 정확히 말하자면 춤을 추어지는 경지, 소리가 나오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되기 위해 좀 더 나 또한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책을 읽고, 또 글을 쓰면서 나는 자연스레 흥에 몸을 맡기고, 우리의 것을 몸으로 체득한 자들이 일구어 놓은 위대한 자산들을 정작 우리는 얼마나 소홀이 여기고,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미신이라고, 혹은 상것이라고 매도되었던 그들이지만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피눈물 나는 노력이 지금에 와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의 일반인, 혹은 나같이 체육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도 모르고 있던 명인들을 쫒아, 발품을 팔아가며 그 모습을 하나라도 남기려고 애를 쓴 작가의 노고에도 찬사와 감사를 표한다. 워낙에 무용이라는, 춤이라는 것에 대하여 일자무식인 나이지만 책을 읽는 동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팔꿈치를 허리 위로 올려야한다. 팔꿈치를 안으로 쪼여야한다. 손목을 꺽어선 안된다. 어깨에 힘은 빼야한다. 배에 힘을 줘야한다. 목은 최대한 뽑아서 어깨라인을 살린다. 손끝까지 에너지는 흐르지만 힘을 주어선 안된다. 엉덩이가 뒤로 빠지지 않게 조심한다. 가슴은 내밀지 않는다. 시선처리는 정확하게 해준다. 앞뒤로 태극마크를 그릴때 비율을 똑같이 한다..... 항상 정박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음악 속에 숨어있는 두번째 박자를 찾아낼줄독서감상문알아야한다. 음악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음악이 날 따라와야 한다. 풀어주다가 몰아치는 느낌이 살아 있어야 한다. 눈에선 눈물이 흐를지라도 표정은 웃고 있어야한다.이것이 진정한 한국무용이다..[출처] 한국무용위의 글귀는 성찰일지를 쓰면서 필요한 사진을 찾기 위해 블로그를 찾아보다가 어느 무용수가 쓴 글을 따온 것이다. 책을 읽던 도중 갑자기 이 글귀가 생각나서 다시 찾아본 것이다. 내가 무용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이 글귀를 보았을 때 너무 감동받았던 것이다. 비록 예인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했을 지라도 이 글을 쓰는 순간은 어쩌면 예인보다 뛰어난 노름마치의 마음가짐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맨마지막 부분인 ‘눈에선 눈물이 흐를지라도 표정은 웃고 있어야한다.’ 이 부분에서 진정한 예인의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배우고 있는 무용교육에서 참고해야 할 부분, 무용을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길래 내가 따라하는 듯한 무용과는 차원이 틀리게 춤을 출 수 있는가 지식으로라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설명되어 있다.‘머리끝엔 채상이 놀고, 손끝에는 소고가 놀고, 발끝에선 몸이논다. 모두가 제각각이니 뼛속까지 익은 자만이 꺼내놓는 절정이다.’이 글귀는 예인의 춤을 한마디로 잘 표현한 글귀이다. 이 글귀를 보면 노름마치의 모습을 어느정도 상상할 수 있다. 온몸의 한 동작 동작에 의미를 두고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그런 예인 한명이 나와 환상적인 춤을 추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그러면서 내가 직접 그 예인의 춤사위를 움직여보고, 보고 싶은 춤사위도 그 예인이 추도록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느낌은 내가 마치 예인이 되어 자연과 하나가되어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얼마 전 무용교육 수업의 연장선으로 공연을 보러 갔다. 서울 속의 우리 문화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KOUS라는 공연장을 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노름마치라는 도서가 나의 무용에 관한 지식과 생각과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공연은 노름마치에 대한 실제 현상 같았다. 특히 가장 눈에 띄고 감명 깊었던 것은 사물놀이였다. 나는 지금까지 동아리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를 읽고◎ 전도유망한 체조선수 이승복이승복은 8살 때 즉, 1973년에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그 당시 미국으로의 이민자들이 모두 겪었던 일이겠지만 이승복의 가족 역시도 많은 시행착오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이승복이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게 된 것이 바로 체조였다. 낯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서 겪어야했던 설움, 경제적으로 고생하는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행복을 주고 또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고민하던 그에게 다가온 것은 체조였다. 집 주변에서 우연히 보게 된 YMCA에서 체조 연습을 하는 장면, 그리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보여준 나디아 코마네치와 넬리 킴이라는 한국인 2세 체조선수는 그를 체조라는 길로 빠져들게 만들었다.가난한 이민자였던 그에게 체조를 따로 배울만한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YMCA 체조 프로그램의 무료 수강생이 되는 등 체조 선수로 성공해서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무대에 서겠다는 일념 하나로 노력하였고 결국 많은 인정을 받고 집을 떠나 국립 체조 훈련센터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이민생활의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어려움으로 고생하던 그의 부모들은 그가 학업을 계속해나가길 원했지만 이미 체조 선수로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승복에게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자기가 '체조선수로서 성공하면 인정받겠지'라는 생각으로 체조에만 몰두 하였다. 그는 다른 10대 또래라면 누구나 한번씩 해봄직한 작은 일탈이나 유희도 즐기지 않았다. 가족의 어려움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게 체조는 책임감과 사명감으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그는 점점 인정받는 체조 선수가 되어갔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그는 최고의 예비 체조 스타가 되어있었다. 많은 대학교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이런 저런 달콤한 조건으로 접근해 왔다. 이름나 들어도 알 수 있는 미시간, UCLA, 스탠퍼드, 웨스트 포인트 군사학교 등 전미의 유명한 대학교들이 체조 선수 이승복을 주목하고 그를 데려가기 위하여 접근해왔다. 그가 그토록 꿈꿔왔던 체조 선수로서의 성공과 올림픽 한국대표로서의 성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그러나 이런 그에게 크나큰 시련이 다가온다. 항상 체조로서 성공해야지라는 조급함 속에 살고 있던 그는 무리한 연습 도중에 C7, C8 척추가 손상되는 중상을 입게 된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서서 걷지도 못하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손가락을 마음대로 구부릴 수도 없는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여 살아야 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올림픽 체조 금메달을 꿈꾸었던 청년이 말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상처를 입게 되었으니 자기 자신에 대한 그 분노는 엄청나게 컸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아가 생기기 시작할 나이부터 꿈꿔왔던 올림픽이라는 꿈이 무너진 순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삶의 전환점재활훈련을 거치면서 자신감과 삶에 대한 의지를 확인한 이승복에게 삶의 전환의 기회가 왔다. SAT(대학 진학 적성시험)를 보기로 한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단순히 앉아서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기자 그는 그것에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무엇을 공부하는냐'라는 문제였다. 재활 치료 중에 이승복의 의학적 호기심은 극에 달해있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수많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재활훈련을 열심히 받던 그는 병원을 벗어나 근처의 뉴욕 메디컬 스쿨까지도 그만의 여행을 다녔다. 그곳에서 뉴욕 의대생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을까 없을까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한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다. 즉, 할 수 있는냐 없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전할 수 있기 때문에 꿈인 것이라고 이승복은 생각하였다.그러던 중 그가 입원한 “러스크 인스티튜트”의 설립자이자 재활의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하워드 러스크 박사를 알게 되면서 더욱더 의학에 대한 열정에 빠져간다. 러스크 박사에 대해서 알게 된 후 이승복은 그가 받았던 치료들과 훈련들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의학이라는 길에 빠져들게 된다. 체조 이후 잃어버렸던 그의 인생의 목표를 찾게 된 것이다. 신앙인이었던 그는 체조가 아닌 더 큰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같은 시련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이제 새로운 꿈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다시 세상 속으로어느 정도 재활 훈련이 마무리된 후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집은 편하기만 한 장소는 절대 아니었다. 일단 병원과 같이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아직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체조를 하다 다친 아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자신이 이민을 결정해서 일어나게 된 일이라고 자신을 자책하는 아버지, 아들이 다치고 나서 슬픔에 빠진 어머니 등 정신적으로도 많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과거에는 올림픽에 대한민국 체조대표로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목표였듯이 이제는 대학에 들어가서 재활의학분야의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이 그에게는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불편한 몸, 어려운 환경은 그에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결국 그는 높은 SAT점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인정해주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서와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담은 에세이는 그를 뉴욕 대학에 합격시켜주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장애인 특별 장학금등을 받게 되면서 학비 걱정도 덜게 되었다.대학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그는 새로운 그리고 그의 인생을 또 한번 바꿀 만남을 가지게 된다. 래리 실버라는 사람을 통해서 네비게이토라는 선교 단체에 들어가게 된다. 앞에서 말한 하워드 러스크가 그의 지적인 영역의 영웅이라면 네비게이토를 만든 도슨 트로트만은 그의 영적인 영역의 영웅이었다. 그는 도슨 트로트만을 통해서 책이나, 글, 조각상 같은 다른 사람 눈에 보이는 것에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가슴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네비게이토는 이승복에게 신앙에의 의지와 많은 한국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사랑하였다. 체조를 할 당시에도 목표는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로서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장애를 극복한 재활의학 전문의가 되어서 조국을 빛내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된 것이다.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미국의 대학생들이나 한국의 대학생들이나 마찬가지 인 것 같다. 4년 동안 “로맨스 언어”라는 전공과 네비게이토 활동으로 보람차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이승복에게는 이제 의대로 가는 길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비슷하였다. 이승복이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것은 알지만 그런 그에게도 의대라는 곳은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부모님의 반응도 비슷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승복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그는 분명 육체적 한계를 지닌 장본이었지만 자신의 육체적인 한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멀쩡한 사람들이 그의 육체적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는 지금보다 더 장애가 심하더라도 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를 둘러싼 다른 이들은 손과 다리가 전부인 것처럼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이승복은 이미 장애라는 그를 속박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졌는데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그 속박에서 빠져나오지 못 한 것이었다.결국 그는 지쳐갔고 메디컬 스쿨의 길을 포기하였다. 대신에 비슷한 방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공중보건 쪽으로 그의 진로를 잡았다. 콜롬비아 대학의 메일먼 공중보건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곳에서 역학(유행병의 확산과 그 용인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하던 그에게 뜻밖의 선물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승복에게 의사의 길을 갈 수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이전의 누구도 해주지 않던 격려와 칭찬을 이 곳의 사람들은 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콜롬비아 대학에서의 과정을 마치고 다시 메디컬 스쿨로의 입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메디컬 스쿨 입학에 필요한 정도의 평균 학점, 그리고 MCAT라는 의대 입학시험 성적 역시도 충분히 잘 확보해두었다. 기타 추천서나 입학지원서, 학업계획서 역시도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의 장애였다. 그는 무려 30개에 달하는 메디컬스쿨에 지원서를 썼다. 이중 면접까지 이어진 곳은 8군데였다. 무려 4개월간의 치밀한 면접 준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면접의 공격적인 분위기는 이승복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들은 직설적이고 가혹하고 회의적이었고, 심지어 이승복의 자존심이 상할 정도의 질문도 서슴치 않고 퍼부어댔다. 대부분이 그의 장애가 의사로서의 삶에 끼칠 악영향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인터뷰가 끝나고 결국 다트머스 의대에서 이승복의 입학을 허가하였다. 재활훈련을 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운 것이 1983년 이었고 다트머스 메디컬 스쿨에 합격한 것이 1993년이었다. 무려 10년이 걸린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그에게는 새로운 또 하나의 올림픽의 시작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