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의 패션19세기 후반의 패션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여성들은 뒤를 부풀리고 아래가 좁은 버슬스커트를 입었다. 머리모양은 크고 화려했으며 옆과 위를 부풀린 모양이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그 당시의 대표적인 여배우 깁슨의 이름을 따서 깁슨걸이라고 불렸다. 수영을 즐기는 여성들은 소매가 달린 달라붙는 형태의 웃옷과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를 수영복으로 입었다.1910년대의 패션1910년대는 호블스커트의 시대였다. 디자이너 프와레가 오리엔트 의상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호블스커트가 일반적인 의상이 되면서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호블스커트는 허리선이 높게 올라가고 상의는 주름을 잡아 부풀렸으며 긴 하의는 아래로 갈수록 좁아졌다. 프와레는 오리엔트 여성들의 하늘하늘한 옷들에 착상하여 호블스커트를 만들었다. 오리엔트 분위기의 둥글거나 네모난 모자와 커다랗고 많은 장식을 한 모자가 인기를 끌었다.1920년대의 패션1920년대는 플래퍼의 시대였다. 1910년대의 1914년부터 1918년까지 1차 대전이 있었다. 그때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가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옛날의 전쟁은 주로 직업군인들이 동원되었지만 1차 대전은 거의 대부분의 청년들을 징집했다. 남자들의 일을 대신했던 여자들은 박스형의 코트를 입거나 바지를 입었던 일도 많았다. 1차 대전 이후 여성용 군복도 만들어졌는데 상의는 남성군복과 유사했지만 하의는 긴 치마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강하고 보이쉬한 여자들이 나타났다. 말괄량이인데다 댄스클럽에 가서 격렬한 댄스를 추는 이들 여자들을 플래퍼라고 불렀다. 새로운 원피스는 평평하고 슬림한 모양이었으며 허리선은 아래로 내려갔다. 전체적으로 일자형 옷이었으므로 활동적인플래퍼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대중적인 복장이 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짧은 커트머리를 했고 전체 머리를 착 달라붙는 모양으로 빗었다. 몇 가닥의 머리를 꼰 다음 이마 부근에 달라붙게 해놓기도 하였다. 머리에 딱 맞는 모양의 동그란 모자가 인기를 끌었고 차양이 크고 뒤집어진 모양의 모자도 나왔다. 긴 치마 대신에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미니스커트가 나타났고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 일도 있었다. 그때는 여성들이 바지를 입으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이후 여성들의 바지 착용은 꾸준히 늘어나서 196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바지를 입게 되었다.1930년대1930년대에 경제공황으로 유럽과 미국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회사원들이 해고되었다. 그리하여 여자들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세하여 여자들의 옷은 다시 여성스러워졌다. 미니스커트가 사라지고 대신에 발목 위로 조금 올라오는 길이의 긴 스커트가 인기를 얻었다. 허리선은 다시 허리로 돌아와 위에는 셔츠를 입고 아래에는 긴 스커트를 입거나 원피스를 입고 허리에 허리띠를 매는 모양의 의복이 대중화되었다. 모자는 1920년대처럼 머리를 덮는 스타일이었으나 챙이 커지고 구부러진 모양이 되었다. 커트머리도 사라지고 단발머리에 윗머리에 컬을 조금 넣고 아랫머리에 웨이브를 층층으로 넣은 모양이 인기를 얻었다.1940년대1940년대에 2차 대전으로 인해 의복에 대한 규제가 단행되었다. 똑같은 국민복을 대량으로 만들어 모든 국민에게 같은 의상을 입히자는 계획이 나올 정도였다. 옷의 수량이 적어지고 쿠폰이 발행되어 1년에 20벌만 옷을 살 수 있도록 규제되었으며 옷감의 양이 제한되면서 모자의 크기는 작아졌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작은 모자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쓰고 다녔다. 모자가 작아졌으므로 윗머리는 단정하게 달라붙는 모양으로 하고 아랫머리에 컬을 넣어 부풀리는 단발이 전형적인 스타일이 되었고 머리에 컬을 넣어 길게 늘어뜨리는 스타일도 인기를 얻었다.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로 가면서 그 후 여자들이 그들의 일을 대신하게 되면서 박스형의 옷들과 미니스커트가 다시 나타났다. 재킷상의를 입고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 여성들의 공식적인 의복으로 정착했다.1950년대2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이 축제분위기에 휩싸이면서 1947년에 디오르가 발표했던 뉴록이 1950년대의 대표적인 의상이 되었다. 디오르의 뉴룩은 옛날의 로맨틱한 의상을 현대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허리가 들어가고 스커트가 넓게 퍼지는 S라인의 드레스는 로맨틱한 분위기였으며 코르셋을 다시 등장시키기도 하였다. 머리모양은 컬을 많이 넣어 둥그렇게 한 단발머리가 인기를 얻었다. 한편 그러한 드레스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그러한 드레스가 수입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도 벌어졌다. 샤넬이 만든 샤넬슈트는 직사각형의 웃옷에 짧은 치마를 입는 스타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현대까지도 판매되고 있다. 디오르는 의상에 라인을 도입하여 S라인 이외에도 Y라인, H라인 등의 옷을 만들었다. 드레스는 195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많은 여성들이 허리가 꼭 끼고 아래가 넓게 퍼지는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1960년대 패션1960년대는 히피의 시대였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히피운동에 참여했고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행렬에 동참했다. 영국에서 등장한 비틀즈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문화에 반기를 들었고 마약이 널리 퍼졌으며 일부러 허술한 옷을 입고 다니는 그런지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자유를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보헤미안 스타일의 헐렁한 꽃무늬 원피스가 유행하였다. 여자들은 생머리를 길게 기르고 인디언 머리띠를 두르기도 했다. 중국, 인도와 아시아의 문화가 관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시골 각지에 히피들이 사는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많은 락그룹이 이때 나타났다. 핑크 플로이드는 몽환적인 프로그레시브락으로 성공했으며 락그룹 레드 제플린은 강하고 무거운 헤비메탈의 곡을 노래했다. 모델 트위기가 짧은 커트머리에 미니원피스를 입고 나타나면서 미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무릎 위로 올라오는 간소하고 단순한 사다리꼴형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트위기는 깡마르고 미소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오드리 헵번 또한 미소년처럼 마른 몸에 요정같은 분위기였다. 그 전까지 모래시계형의 성숙한 여성형이 인기를 끌었다면 활동적이고 보이쉬한 미인들이 등장하였고 여자들의 사회활동은 다양해졌다. 많은 여성들이 트위기와 비슷한 카트머리를 했고 진한 화장을 했다. 1960년대에는 청순한 스타일이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긴 생머리가 유행하면서 독특한 헤어스타일이 만들어졌다. 특히 윗머리를 동그랗고 높게 올리는 스타일이 많았고 아랫머리는 옆쪽으로 동그랗게 올라가도록 말아올리기도 하였다1970년대 패션1970년대는 디스코와 펑크의 시대였다. 핑크 플로이드,레드 제플린,퀸과는 전혀 다른 유파에 속하는 펑크락이 등장했다. 락그룹 섹스 피스톨즈는 과격하고 난폭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는 인디언처럼 밀고 가운데 부분만 남겨두는 모호크족 스타일을 하고 피어싱에 메탈분위기의 가죽옷을 입은 해괴한 복장을 유행시켰다. 티셔츠가 대중적인 옷으로 정착하였는데 찢어진 티셔츠와 요란한 메시지를 적은 티셔츠도 판매되었다. 여성들의 블라우스는 헐렁해졌으며 60년대의 히피식 에스닉 스타일도 복고적인 스타일로 돌아와 판매되기도 했다.한편 디스코장이 각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화려한 디스코춤을 추기 위해 클럽으로 몰려들었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채의 옷이 유행했고 달라붙는 나팔바지와 존 트라볼타가 입고 나온 큰 깃을 높이 세운 하얀색 슈트가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까지 억압의 대상이었던 흑인, 여성, 동성애자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시작했고 디스코장에서는 흑인들의 파마머리를 동그랗게 부풀린 아프로 가발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 여성용의 양복이 등장하여 여성들도 수트와 바지를 널리 입게 되었다. 티셔츠와 청바지는 이때부터 대중적인 의상으로
미국 전역을 들끓게 했던 버지니아공대 총기살인사건이 어느덧 1년여가 되었다. 단순히 충격적인 살인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의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우리로써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증오나 분노는 적었다고 한다. 다민족이 어우러져 ‘용광로‘를 형성하고 있는 ’america‘이었기 때문일까? 미국의 다문화 주의는 지배적인 유럽문화의 억압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한 미국사회의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 이라고 한다.(미국문화의 단일성과 다양성 13페이지) 그렇지만 미국의 그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코케이시안 (Caucasian)만을 위한 무대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1830년대 토크빌은 미국인들을 가르켜 ‘앵글로-아메리칸’이라고 불렀다. 그후 100년뒤 미국은 더 이상 앵글로-아메리칸 사회가 아니었다. 세계의 다양한 민족이 미국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WASP)로 통하는 부류는 미국을 쥐락펴락한다.(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82페이지) 흔히 백인과 흑인이 100미터 달리기리를 하면 백인은 30미터 앞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미국의 사회구조를 살펴보더라도 흑인이 성공하기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아메리칸 아프리칸이 이정도 라면 다양한 소수민족, 이민족들은 그 차별이 얼마나 심할 것인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Free Food For Millionaires)’을 쓴 재미교포 작가 이민진씨는 “나의 조국은 아메리카입니다. 비록 그들이 끼워주지는 않지만..” 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를 보더라도 미국의 다문화주의의 모순점을 들춰낼 수 있을 것이다.이방인들의 충동과 화해라는 모토로 제작된 영화 ‘크래쉬’는 미국내의 다문화주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 각각의 인종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삶들이 마치 ‘충돌사고(크래쉬)’처럼 거칠고 충격적으로 마주치는 것을 묘사한다. 그들의 삶의 궤적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폐곡선처럼 작은 원이 수없이 얽힌 사건의 고리들에 연결되다가 마침내 커다란 원과 만나게 된다. 처음 볼 때는 몰랐지만 다시 한번 영화를 감상 했을 때, 영화의 하나하나가 인종적 갈등을 드러내는데 탁월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의 포스터에서는 인종(주인공)별로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이러한 배타적인 현실을 허무는 것은 충돌에 의해서다. 배경역시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생활하고 있는 LA다.“정이 그리운 거야”라고 시작되는 화면을 지나 LA 교외의 밤. 사건현장에 도착, 시체를 본 흑인형사의 표정은 일순간 당혹과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그리고 영화는 36시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 첫 대사에 함축된 의미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수업시간에 봤던 there will blood 에서의 무성으로 이루어진 플레인뷰의 집착에 가까운 행동들은 그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미국초기의 개척정신을 잘 묘사했다. 크래쉬 역시 ‘정’이 그리운 것이라는 것으로 현대사회의 단절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이는 인종적으로 차별되고 있는 미국사회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는 걸까? 그러나, 영화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15명 - 8커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흑인형사와 라틴계 여형사, 흑인청년과 백인부부, 이란인 부녀와 히스패닉. LA에 살고 있다는 공통점 말고는 피부색도 나이도 모두 다른 그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의 충돌이 그들의 마음속에 남기는 서로 다른 색깔의 상처를 그려가기 시작한다.영화에서는 시종일관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흑인은 어디서나 범죄자의 꼬리표를 벗어던지기가 어렵다. 아랍인은 테러의 영향 때문인가 이라크인이 된다. 동양인은 중국인, 히스패닉은 멕시코인일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사회를 비꼬는 흑인 자동차털이범은 흑인을 비판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유색인종을 혐오하는 검사부인, 그러한 유색인종을 이용하려는 남편. 이에 굴복하는 흑인형사. 그리고 흑인에 앙심을 품은 경찰과 이 때문에 피해를 입는 흑인부부. 욕을 들어가며 열쇠를 수리하는 맥시칸과 그 딸. 이 모든 것들은 선입견에 의한 미국문화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인은 기본적으로 인종주의였을 때가 많았는데, 역사적으로 백인 미국인을 흑인, 인디언, 아시안, 맥시칸등과 분명하게 구분 짓고 사회에서 소외시켰다. 이는 서부개척시대를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지미더럼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주된 내러티브는 나라 안에 ‘인디언들’이 없으며 그저 황야만이 있었다고 선언한다. 그다음엔 ‘인디언들’은 미국을 필요로 하는 야만인들이었다고 선언한다. 다음은 불행하게도 ‘인디언들’은 모두 죽었다고 선언한다.”(증오바이러스, 미국의 나르시시즘 219페이지) 더럼이 인디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들은 현대의 다양한 인종에게도 말해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미국에서 ‘정의의 집행’으로 받아들여지는 각종 제도와 가치, 사고들은 다른 사회를 계속해서 배척하고 소외시켰으며 지금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크래쉬‘ 에서는 이렇게 편견에 사로잡힌 ‘버블’들이 충돌하여 불꽃을 일으키고 다시 재탄생을 이뤄낸다. 사실 영화를 자세히 살펴보았다면 편견뿐만 아니라 ‘소통’의 불협화음을 잘 잡아낼 수 있는데, 고장난 열쇠와 문, 상한 우유,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보험금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 각각의 이야기는 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못한다. 백인부부는 서로를 챙겨주지 못한다. 그녀는 정치적 야심에 목마른 남편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녀의 아픔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의심하고 소리치고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데, 정작 왜 아파해야 하는가는 알 수가 없다. 병든 아버지로부터 받는 아픔은 백인경찰인 아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는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렵다. 백인경찰로부터 모욕을 당한 흑인여자는 남편을 비난하지만, 흑인인 남편은 세상의 시선이 두렵다. 그 외에도 각각 소통이 되지못하여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불꽃이 일어나고 그들은 비로써 변하게 된다. 죽음직전의 사고, 몸을 가눌 수 없는 극한의 고통에서, 아픔의 밑바닥에 이르러서야 깨닳게 된다. 친밀해지고 싶고, 소통하고 싶고, 타인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고 싶다는 것을. Crash는 곧 접촉(Touch)이었을 뿐이다. 영화의 결론은 피부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마주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해의 과정을 드러내는데 너무 관념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흑인부부를 모욕했던 백인 경찰이 사력을 다해 구해낸 상대가 바로 그 흑인여성이었다는 것이나 백인 중산층 여성이 맥시칸 가정부를 껴안으며 “당신이 나의 가장 충직한 친구였다”라며 고백하는 장면, 흑인 강도가 캄보디아인을 팔지 않고 아무 대가 없이 거리에 풀어 주는 장면들에서는 현실적인 설득력을 잃는다. 게다가 한국인의 경우 변화가 없이 그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결론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은 단지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는 망치다.” 라는 말로 아카데미 수상소감을 남긴 작가 겸 제작자인 바비 모레스코의 말 그대로 관객들에 의해서 사회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미국의 다문화주의는 두 가지 현상에서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정부를 비롯한 공적영역에서 얼마나 그 이념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적영역에서 얼마나 위화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측면이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다문화 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인 계산이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이 미국 내에서 조차 영어가 아닌 언어로 메세지를 남기고, 개신교라 해도 모스크에 발을 들여놓는다. 동성애자도 가정을 꾸릴 수 있고 헤이트 크라임(hate crime)), 인종이나 종교 등 소속 집단의 특징을 이유로 저지르는 범죄에 대해 사회전체가 엄격하게 대응한다. (세계의 분쟁 바로보기 제4부) 미국사람들은 다문화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때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다문화주의가 침투하면서 개별 문화와 보편적 가치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일이 심각한 문제가 됐다.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이론인 다문화 주의는 사회제도 차원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개인들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결과적으로 미국문화의 독특함과 단일성에 대한 가정과 믿음이 와해되기 시작되었으며. 인종적, 계층적 갈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미국문화의 동질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이전의 편협한 인식에 비판을 가했다. 공통적 정체성개념이 거부되고 미국과 미국인이라는 말의 단일한 의미가 무너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소외되었던 인디언, 흑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의 문화가 미국문화의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과거의 소외계층이 스며 나와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다문화 주의는 미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하여 미국인들의 의구심과 희망을 나타낸다. 미국의 다문화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무수한 편견과 함께한다. 삶은 어쩌면 편견과의 전쟁일지도 모른다. 편견을 깨부수고 일정한 시각을 갇는 것.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정당한 방법이 아닐까? 크래쉬를 본 후 나는 라이언의 대사 ‘You think you know who you are?‘처럼 우리는 세상이 만들어놓은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인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느꼈다. 이러한 메시지를 폴 헤기스는 원했을 것이다. 인종이 아닌 인간. 인간과 인간이 사는 삶이라는 것을.
1. 태평천국운동과 중국사회의 변화태평천국운동은 청조를 타도하고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목적의 운동이였다. 이 시기에는 즉 1850년 이후 농민에 기반을 둔 반란들이 약 20년이 넘도록 거의 모든 중국지역을 소란에 빠지게 하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소한 형태의 지역봉기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반란의 일반적인 원인은 중국 자체가 안고 있는 환경에서 비롯되었지만, 외국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원인을 살펴보면 인구증가에 비해 형편없는 토지의 증가율, 행정조직의 퇴보등을 들 수있다. 게다가 아편전쟁은 광동지역의 무역변화를 가져와 이 지역의 운수업 종사자들이 대거로 실업자가 되었고 아편전쟁 이후 광동지역이 영국의 관할로 빠지게 되자 해적들의 활동지역이 내하의 수로로 바뀌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광동, 광서 지방이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연스레 중국민들은 불안감에 빠지게 되고, 이 위기감속에서 비밀 결사들이 조직되었다. 1840년에는 전통적 민중교리와 기독교의 교리를 접합시킨 배상제회라는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배상제회는 사람들을 모아 교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그들을 하나로 할 수 있는 교리를 정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여호화만을 섬기며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선전했다. 그 후1850년에 중국남부의 광서성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배상제회가 주동한 반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반란지는 광서성 이었지만, 곧이어 주변의 하층민들을 끌어 모으면서 세력이 확장되었고, 지역상으로도 호남을 거쳐 1853년에는 화중의 중요도시인 남경을 점령하면서 이 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들은 공식 국호인 '태평천국'에서 보이듯이 종교와 사회, 경제, 정치면에서 중국인이 이상으로 여겨온 대동 세계를 기독교적 이념과 절충하는 방식으로 건설하려고 시도하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이며,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될 뿐만 아니라, 생산물도 독점될 수 없는 공산주의적 규범으로 정하였다운동은 주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개혁은 동치제 때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동치중흥')이라고도 한다. 1862년 증국번이 '안경내군계소'라는 서양식 무기제조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흥장이 '상해양포국', '강남제조총국' 등 무기공장을 만들었다. 이 공장들은 모두 관영으로 국가재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이들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국내의 정치, 경제제도 등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중국사회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태평천국군과 싸울 때는 외세에 의존하기도 했다. 이홍장의 외국들에 대한 정책은 타협과 양보였다.그 후 청불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힘써 준비한 각종의 선박과 해군부대등이 처참하게 파괴됨으로서 양무운동은 실패를 하게 된다. 그 실패 중 가장 큰 원인으로는 역시 일반사대부계층의 우월감을 들 수 있다. 즉 당시 지배층은 서양인에게 배운다는 사실을 대단히 치욕적인 일로 간주 했던 것이다. 이점에서 일본의 현대화가 시사 하는점은 상당히 크다. 이밖에 국민들의 낮은 호응, 지도자의 무지등도 실패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시기의 현대화는 서방문물에 대한 인식과 모방단계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서방문물의 근저에 흐르는 원리나 가치 체계 등에서는 대해서는 깊은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3. 중화제국질서의 붕괴서양세력들은 해외 식민지 개척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고, 종이호랑이로 무력해져가는 청제국의 드넓은 영토나 조공국은 서양세력이 노리는 군침나는 먹이감 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는 중국대륙을 지키기도 힘겨웠으며, 조공국들은 하나씩하나씩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우선 월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가게 된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침입하여 1862년 베트남의 왕조인 완조와 사이공 조약을 맺고, 완조로 하여금 청조에 대한 조공관계를 부인하도록 했다. 이것은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다.국경지에는 흑기군이라는 사병이 중국의 운남지방과 배트남 사이에서 육성했던 막강 북양함대는 일본해군의 공격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결국 청과 일본 사이에 배상금 지불, 조선의 독립, 대만과 요동의 할양 등의 내용으로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힌 이 조약을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님을 표현하는 다른 형식의 말이었고, 결국 일본이 조선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을 청이 인정한 것이었다.4. 변법운동과 입헌운동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 세계의 대부분의 침략세력들이 중국에 들어와 이권을 나누어가 졌고, 중국은 외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외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힘을 키우려 했던 양무운동도 청일전쟁의 패배로 성공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중국의 이권은 계속 외국에게 넘어갔다. 그 후 지배층 내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이 강유위, 양계초 등이었다.강유의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 개혁파들은 만국공보를 간행,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 입헌정치의 실시, 유럽의 학술과 교육의 도입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변법파의 활동은 서태후가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었고, 강유위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해로 잠시 피했다. 상해에서 그는 황준헌, 장건 같은 당대의 개혁론자들과 어울려 중국의 개혁정책을 모색했다. 변법파의 개혁안은 북경보다는 일부 지방에서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그런 움직임을 저지했다.변법파들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 것은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던 1897년 말 이후였다. 강유위는 황제에게 다섯 번째 상서를 올려 법과 제도를 고쳐나가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시 한번 제시했다. 당시 황제인 광서제는 강유위 일파의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1898년 제도의 개혁 들을 주로 하는 개혁세력들과 함께 제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 '변법'을 추진하겟다는 선언을 했다.개칭, 이를 반 합법화하였다. 의화권도 '청조를 받들고 외국을 멸망시킨다'는 기치를 내걸고 배외를 주요 투쟁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1899년 말에 양무파의 위안스카이가 산둥순무에 취임하면서 의화단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허베이성에 유입하게 되었고 대운하·경한철도 연선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순식간에 화베이의 모든 성, 동북지방·몽골·쓰촨 으로 확산하여 외국인이나 교회를 습격하고 철도·전신을 파괴하고, 석유 램프·성냥 등 외국제품을 불태웠다. 청나라 조정의 태도는 시종 동요하였으나 수구파의 지도 아래 의화단 이용책을 취하여 1900년 6월 열강에 선전을 포고하였다.베이징에까지 침입한의화단은 관군과 함께 열강의 공사관을 공격하고 베이징이나 톈진 에서는 의화단원이 거리에 넘쳐 그 세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근교의 농촌에서 베이징에 집결한 의화단원은 10대의 소년이 많았으며 빨강·노란색의 천을 몸에 감고 팔괘로 대오를 나누었다. 이들에게는 전체적인 지도자는 없고 동리마다 권단을 설치, 이 단이 의화단의 한 단위였으며, 대사형 이라고 불리던 지도자가단의 책임자였고 10대의 소녀들도 홍등조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은 연합군을 형성하고 대고포대와 톈진에서 관군과 의화단을 격파, 8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농성 55일에 접어든 여러 나라의 공사관원들을 구출하였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시안에 피신하고 실각한 수구파에 대신해서 실권을 쥔 양무파는 연합군에 협력하여 의화단 잔당을 학살하였다. 1901년 베이징의정서가 성립되자 중국의 식민지화는 한층 깊어지고 이후 중국은 방대한 단비배상금의 지불에 오랫동안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6. 공화혁명(신해혁명)'신축조약')의 체결로 청 정부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보수세력이 더욱 결합되도록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제국주의와 중화민족, 봉건통치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20 세기에 들어선 이후에 중국의 민족자본 내용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중국인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중국도 전승국의 위치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중국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제기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으로서는 독일을 비롯한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이권을 되돌려 받으려 했다. 즉,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세력범위와 이익범위 철폐, 외국군대 경찰의 철수, 영사재판권 폐지, 조차지 조계의 반환, 관세자주권 승인 등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러나 중국인들의 기대는 환상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파리회담은 정의로운 세계, 평화로운 세계건설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 패전국 독일이 가지고 있는 이권을 나누어 가지는 자리였고, 전승국들의 이권이나 식민지에 대한 권리는 전혀 양보되지 않았다. 중국측의 요구는 대부분 묵살되었고, 전쟁 전에 독일이 가지고 있던 여러 권리는 일본으로 넘기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대표의 요구가 묵살되고 일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 분노는 그들의 이권과 주권을 빼앗아가려는 제국주의 열강들을 향한 분노였고, 또한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중국의 군벌세력에 대한 분노였다.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내용이 중국에 전해진 1919년 4월 30일 이후 북경에서는 5월 1일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그 결정에 대한 반대표시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으며, 5월 3일 저녁 각 학교 대표들은 파리 강화회담 반대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5월 4일 오후, 천안문 광장에서는 약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21개조를 취소하라)(청도를 반환하라)(매국노를 타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말 것과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긴 매국노들을 처벌할 것을 외쳤다. 시위대는 그들의 의사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몰려갔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저지당한 끝에 시위대표들이 진정서를 전하는 데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되었다.
사회주의 [ 社會主義 , socialism ]사회사상으로서 볼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사회주의란 말의 기원에 대하여는 이설이 많다. 1826년 영국에서 R.오언의 제자들을 가리켜 사회주의자라고 불렀고(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회주의란 말은 1927년 런던의 어떤 조합 기관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그러나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P.르루는 “나는 사회주의란 말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말이었으나 대단히 필요한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인성론)고 말하고 있으며, 《브리태니커백과사전》도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의 사회주의란 말은 프랑스의 르루와 J.레이노의 《신백과전서(新百科全書)》 등 저서에 의하여 일반화되었다.”고 쓰고 있어서, 사회주의란 말이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르루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말을 만들어 낸 연대는 밝히지 않고 있어서 단정하기 어려우나, 사회주의란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1926년보다 뒤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그러면 개인주의의 반대말을 새로 만들어 낼 필요가 어디에 있었는가.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는 사적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자유경쟁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제도로서, 개인의 소유, 개인의 경쟁으로 되어 있는 경제적 개인주의의 제도이다.그런데 19세기 사회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모순과 병폐들, 즉 생산의 무정부성 ·자본의 집중 ·자원의 낭비 ·실업과 빈곤의 증대 ·주기적 공황 ·제국주의와 전쟁 등이 나타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인 개인주의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개조하기 위하여서는 개인주의를 폐지하고 반대 원리로 대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사회주의란 말이 개인주의의 반대말로서 새로 만들어져 나오게 되었다.이리하여, 사회주의는 처음에,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사회적 관리의 수단에 의하여 자유·평등·오언 학파(學派)들이 모두 자유경쟁을 기조로 하는 초기 자본주의 제도의 결함을 비판하고, 생산·분배·노동을 조직하는 힘을 개인적인 데서 사회적인 것으로 바꿈으로써, 즉 사회적 공동관리에다 둠으로써 사회의 경제적·윤리적 기반을 변혁할 것을 주장한 일련의 이론을 사회주의란 말로 표현하였다.그러나 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행한 이들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학설과 사상에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학적 이론과 정책이 없다 하여 유토피아 사회주의라고 단정하는 한편, 자기들의 사회주의 이론은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잉여가치론(剩餘價値論) 등 과학적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다고 하여 1870년 이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렀다.이들은 비단 초기의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던 선배 또는 동년배 사회주의자들, 이를테면 바이틀링, 헤스, P.J.프루동, J.J.블랑 같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유토피아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L.A.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휴머니즘 사상과 G.F.헤겔의 변증법철학(辨證法哲學)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이것을 토대로 사적 유물론을 구성하였고, 영국의 고전경제학에서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흡수하여 잉여가치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주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기들의 사회주의 혁명이론의 정수를 《공산당선언》(1848)에서 제시하였는데, 이 선언은 사회주의 문헌 중 가장 유명한 논술로 평가된다. 여기서 이들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고 공산주의자라고 강조한 것은 자기들을 다른 평화적·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란 말은 비슷한 뜻으로 혼용되고 있었지만 강조점은 약간 달랐다. 즉, 사회주의란 주로 지식인들 사이의 운동을, 공산주의란 노동자들 사이의 운동을 의미하였다.마르크스, 엥겔스 이후 공산주의하면 곧 마르크스주의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도 광범한 의미의 사회주의의 한 유파(流派)에 속한다. 그의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그러나 민주주의적 기초가 전무했던 제정(帝政) 러시아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의 당대회(런던) 이후 혁명적 전위당이냐 노동계급의 대중정당이냐의 당조직 원칙을 놓고 레닌의 볼셰비키파(다수파)와 L.마르토프의 멘셰비키파(소수파)로 뚜렷이 분열되었는데, 볼셰비키당은 소련공산당의 전신이었다.레닌은 자파 이외의 사회민주주의자를 우익기회주의자·사회개량주의자·수정주의자 등으로 비난하면서 의회주의 배격, 폭력혁명의 절대화를 강조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轉化)를 주장하면서 자파를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레닌은 1917년 10월혁명에서 승리한 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정권으로서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였다.1918년에는 볼셰비키당을 전 러시아 공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레닌과 견해를 같이하는 다른 나라의 마르크스주의자도 공산당이란 이름으로 독자적인 당을 결성하고, 자기들의 견해와 이론·정치적 입장을 평화적 개혁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고수하는 다른 사회(민주)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에 와서는 자기들의 이데올로기를 사회민주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란 사회주의 안에서도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레닌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레닌주의 이외의 사회주의와는 철저히 분열·대립하는 별개의 정치사상 또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레닌은 1919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국제적 조직체로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제3인터내셔널:1919∼1943)을 조직하고,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통일·지도하였다.그러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스탈린 시대에 와서 국제주의적 이념을 포기하고 소련의 국가이익을 옹호하는 데 급급한 스탈린의 외교적 도구로 전락하였다. 이에 대해 대전 후 각국의 사회당·사회민주당·노동당들은 전시에 소멸한 제2인터내셔널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은 아니지만 사실상 포기하고 있으며 공산주의와 스스로를 이념적으로나 운동방법에 있어서나 엄밀히 구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부활되지 못하고, 중·소 이념분쟁을 계기로 공산국가들은 저마다 국익에 따라 복잡하게 분열되고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불과하다.사회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있는 각국 사회주의 정당들은 틀에 박힌 어떤 특정한 사회주의유형을 따라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각국의 사정에 따라 사회주의 정책과 방법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당 간에는 국유화와 부(富)의 분배 등에서 정책상의 차이가 있고, 한 나라 당 내에도 분파가 있다. 그러나 의회민주주의, 산업민주주의(산업의 민주적 관리), 광범한 사회보장, 공정한 분배, 시민적 자유원칙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공통된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산하의 사회주의 정당들의 운동이 비록 그 방법은 점진주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주의 이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공산당정권도 아니며, 사회민주당정권도 아니지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이 속출하였고 국호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이슬람 사회주의, 아프리카 사회주의, 사회주의에로의 미얀마의 길 등으로 대표되는 이 지역 신생국들의 경우가 그것이다. 시리아, 이집트, 알제리, 튀니지, 거의 모든 아프리카 신생국, 멕시코, 미얀마, 싱가포르 등은 모두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경우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어, 국유화와 국영기업을 곧 사회주의로 인식하고 있다.민주주의적 자유와 인권존중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일당독재를 실시하고 있으며, 군사독재정권인 경우가 많다. 특히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경우 그 사상적 뿌리를 근대사회 이전의 고유한 부족적 공동체에서 찾고 있으며 이것을 로 변화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과학사회주의를 수용하고 선전하였다. ≪신청년≫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주요 진지가 되었다. 진독수는 5?4운동 전야인 1919년 4월 20일에 ≪20세기 러시아혁명≫을 발표하여 ≪18세기의 프랑스정치혁명, 20세기의 러시아 사회혁명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 심하게 욕을 먹었으나,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이들은 인류사회를 변동시키고 진화시킨 대관건으로 간주되었다≫라고 하였다. 5?4운동 이후 신문화운동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와 과학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사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대교는 1919년 5월 ≪신청년≫ 편집을 주관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연구 특별호를 편집하였으며, 동시에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을 발표하여 비교적 체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소개하였다. ≪신청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혁명, 소련 연구, 중국 노동자계급의 상황 및 노동운동에 관한 많은 문장과 통신이 발표되었다. ≪신보≫부간에는 이대교의 도움아래 마르크스 연구 전용란이 만들어져 마르크스주의 저서와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문장이 게재되었다. ≪매주평론≫도 지속적으로 10월혁명의 상황에 대한 문장을 게재하였으며 아울러 소련 정부가 반포한 헌법?토지법?혼인법 등을 소개하였다. 당시 전국에 출현하였던 200여 개의 진보적인 사단과 진보적인 간행물도 정도는 다르지만 마르크스주의 선전과 사회주의혁명 문제를 탐구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북경에는 이대교가 참가하고 만든 소년중국학회와 이 회의 간행물인 ≪소년중국≫이 있었다. 상해에는 심현려가 창간한 ≪성기평론≫과 소력자가 주편한 ≪민국일보≫ 부간 ≪각오≫가 있었으며, 장사에는 모택동이 주편한 ≪상강평론≫과 그가 운영하던 문화서사와 러시아연구회가 있었다 천진에는 주은래가 주편한 ≪천진학생연합회보≫와 ≪각오≫ 및 그들이 운영하는 각오사가 있었다. 제남에는 왕진미 등이 조직한 여신학회와 ≪여신≫이 있었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를 선전, 소개하는 서적과 번역서들도 많았는데, 가령 ≪공산당 선언≫, ≪노동과 자본≫, ≪자본론 입문≫, ≪사회주의사되었다.
중국영화사■ 중국영화 약사-중국은 다른 어느나라보다 정부의 검열이나 간섭이 심하다.-중국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중국현대사의 이해는 필수적. 한마디로 지난 백년간 중국영화는 20세기 중국에서의 문화와 정치간의 상호작용의 결과.▶중국영화사 시기 구분1초기 영화 활동: 1896-192121920년대 영화에 대한 열광3난징의 10년: 1927-37 (난징 정부)4전쟁기의 영화: 1937-19455전후의 부흥: 1945-19496중국인민공화국의 영화: 1949-19667문화대혁명: 1966-19768새로운 시기와 그 이후: 1976-19961)초기 영화 활동: 1896-1921▷1911: 혁명가들에 의해 청조 멸망했으나 새로운 공화정부의 무력함. 19세기말에 만연한 정치적 분열의 가속화 이후 군벌시대 도래. 서구,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착취 심화.▷1895: 중일전쟁 패배▷1900:의화단 사건 이후 서구의 간섭은 중국에 발호하는 제국주의의 절정을 나타냄.▷1896: 중국 최초 영화상영: 갈렌 보까(스페인인)→초기에 영화는 이국적인 주제와 대중오락물로 취급됨.→중국영화 발전 초기에 외국인 역할이 컸음을 보여줌.▷1905: 중국 최초의 영화 제작→Ren Fengtai: 중국 최초의 영화배급자, 제작자, 감독→당시 북경오페라의 왕이던 Tan Xin pei 주연의 의 한 부 분을 필름에 담음. 이후에도 이러한 작업 이어짐.→서구매체와 전통 중국연극을 접목하려는 초기 영화의 시도.▷1910년대: 대부분 외국기술이나 외국 자본의 영향 아래 제작됨.▷영화 인프라 구축 과정→초기 중국인들의 영화에 대한 반응은 열광적.→1901년: 홍콩과 대만에 영화전용극장 설립→1907년: 베이징에 첫 극장 출현→1926년경: 중국 영화관은 총 68,000석을 수용하는 106개로 증가.▷영화에 관한 용어 변화: electrical shadow play→electric shadow (電映전영)2)1920년대 영화에 대한 열광▷유럽에서 발생한 1차대전의 파괴적 결과는 상대적으로 10년대 말: 약 12개 미만의 스튜디오만이 생존.▷검열의 시작→소규모 스튜디오와의 전면전을 벌이는 한편, 메이저사들은 중국에서의 외국영화와의 싸 움을 위해 라는 명분 아래 국민당 정권에게 영화산업에 대한 정부 통제 요구.→1920년대 후반 국민당 정권(KMT)은 검열기관 출범→1930년대 영화산업의 안정기로 접어듦.▶초기의 영화인들-초기 영화인 대부분 은 'Xinxi(Civilized play)'를 하던 사람들.-Xinxi: 유학파 중국인이 중국에 소개한 서구 스타일의 연극으로 동시대 쟁점과 사건을 다 뤄 젊은이들로부터 특히 인기를 얻음. 전통 중국연극과 비교할 때 무대디자인, 연기면에서 사실주의적 접근했기 때문에 여화로의 변신이 보다 용이.-영화배우: 신극장 운동과 밀접. 주로 하층계급 출신. 전통적으로 연기자를 비천하게 취급 해온 문화. 여배우를 무희나 창녀 정도로 인식. 영화스타에 대한 낮은 사회적 대우는 중국 영화산업의 주요 걸림돌로 능력있는 인물의 영화계 투신을 저해. & 낮은 급여.그러나 낮은 경제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대중적 매력의 발산을 통해 유행을 선도, 사회적 영향력은 지대.(영화산업의 주세력인 각본가, 스튜디오 매니저,감독과 다른 위상).3)난징의 10년: 1927-1937▷1927: 국민당 난징정부의 수립. 영화의 무법천지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시기.▷1931: 국민당, 국가 검열위원회 설치로 영화산업에 대한 통제의욕 공공연히 함.▷1930년대 영화산업의 상황-영화매체를 새로운 중국건설의 도구로 간주하고 국가 개입 본격화-일본 침략에 의한 국민적 위기의식 고조가 영화산업을 형성시킴-지하 공산주의 그룹의 영화계 침투▷당시 대표적인 3개 스튜디오11922: Mingxing Film Company(명성영화사) 설립.: 실용적이고 이윤추구적인 흐름과 영화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는 두 흐름 존재.: 중국영화의 아버지인 정정추 의 노선은 좌파영화인들의 입지를 제공. 정정추 자신은 좌파는 아니었지만 좌파의 믿음을 공유. 정부 개입 거부.21930 영화를 통칭.1토착 영화인의 휴머니즘 영화(1920년대 베테랑 영화인, 정정추 등...)2정치 강령 지닌 지하공산당원의 영화. 국민당 정권을 깎아내리는 파괴적 성격의 영화3좌파 이념에 고무되어 좌파와 연합한 세력의 영화(채초생...). 좌파 영화에 진정 의미있는 공헌.▷1928년 혁명문학에 대한 논쟁이 좌파영화운동의 시초▷1931년 좌파공연예술연대 결성 이후 좌파영화 운동 본격 추진.→훗날 중국공산당 지식인들을 대거 포함.▷중국 3대 주요 스튜디오 창작부가 CCP(Chinese Communist Party)의 영향력 아래 놓임.▷1927년 숙청으로 수천명의 공산주의자가 체포, 살해된 이후 CCP와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이들은 없었음에도, 국민당 정권의 검열기관이 좌파영화를 용인하게 된 이유.→검열기관과 스튜디오 매니저들이 좌파영화의 개념 정의에 혼란을 일으킴.→국민당 정권 내부의 분파, 권력투쟁이 영화산업에 대한 통제의 효율성을 떨어트림.→영화검열관을 포함해 좌파영화의 견해에 동조하는 국민당 정권의 관리들도 있었다.▷1933. 11.12의 테러: 우파의 반동행위는 좌파영화운동을 쇠퇴시킴.: 그러나 좌파영화운동의 영향은 강하게 남아 1940년대 부활의 씨앗이 되고 1980년대, 1990 년대 영화인들을 고취시킴.▶연성영화(soft film)-영화의 주된 기능은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지 관객에게 설교하고 사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의 영화.-1930년대 중반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사회비판적 자세 누그러트리고 오락의 가치 강조.▷영화의 흐름-1905년 이래 영화의 사회적 기능과 오락적 기능의 상호 병존.-1920년대 내내 상업적 관심이 지배적.-1930년대초 일련의 변화가 영화산업을 사회관심적인 영화생산으로 몰아가 좌파영화 융성.-연성영화: 좌파영화의 과잉에 따른 반동으로 1920년대 오락영화 유산의 부활을 주장.예술적 정체성과 높은 숙련도 강조하여 중국영화의 질적 수준 향상에 대해 관심▶유성영화-중국영화계는 할리우드 영화에 지배되어 온 국내시장에서 로웠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 전까지 이기간 동안 상해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영화는 당대 정치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들.-1939년 초: 일본은 China Film Company를 6세워 점령지역의 영화배급 관장.:상해 영화인들은 배급상의 불이익을 고려해 일본을 자극하지 않는 영화제작 선호.:진주만 기습 이후 일본정부는 상해를 직접 통제.-1942: 일제, China United Film Production Corporation 출범시켜 상해의 모든 영화제작시설 관장. 더 이상 소수 영화인들이 보여준 저항과 거부 불가능. 중국영화인들의 수동적 저항은 일본이 영화를 이데올로기적 세뇌장치로 이용할 수 없게 상업영화를 찍는 것 뿐.5) 전후의 부흥: 1945-1949-국민당의 패배로 끝난 4년 간의 전쟁기간 동안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은 영화라는 근대적 매체에 대한 통제권 싸움으로 이어짐.▷국민당: 영화산업을 국유화, 제작에 대한 검열 강화▷공산당, 좌파영화인: KMT 정권의 정통성 훼손하는 영화 제작. 이 영화들은 국민당 정권 락에 중요한 역할 수행.▷이 시기 정치불안은 영화산업의 성장잠재력을 제한했지만 중국영화는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이전 시대를 뛰어넘는 역량을 축적. 1949년 정권 잡은 중국공산당은 잘 차려진 밥상 물 려받음.6)중국인민공화국의 영화: 1949-1966-중국공산당의 집권은 영화를 국민당보다 더욱 철저하게 도구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짐.-문화대혁명까지의 17년간 영화에 대한 국가 개입은 서방영화의 추방/소련영화의 도입/사유 스튜디오에 대한 통제/ 백화시대(1956-57) 의 체제비판 영화제작 등 다양하게 나타남.-1950년경: 할리우드 영화 소멸→그 공백은 동구와 소비에트 영화로 채움.-소련 영화 도입의 의미: CCP가 자신들의 선전영화 제작하기 위한 전단계에 불과.-라는 영화를 둘러싼 갈등 이후 개인소유 스튜디오에 대한 불신.(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노선에서 벗어남으로써 빚어진 사건. 현존 체제 내에서 변 화를 시도한다는 점이 공산당 비위를 건드림)술가는 당의 예술관에 자신들의 예술관을 합치시켜야 함. 예술가 개인의 관점과 당 노선이 상충되면 예술가는 자신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는 것으로 CCP노선과 동일.▷백화시대: 예술과 정치의 결합: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도전→ 혁명적 사실주의와 혁명적 낭만주의를 종합한 새접근 시도.:위 주장은 50년대 후반 대약진운동 으로 세력을 얻음.:진정 정확한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이 상을 가진 미래지향적인 비젼으로 예술을 해야한다. 이 기조 하에 왜곡, 과장, 완전한 날조 로 현실에 대한 이상적인 모습을 만들어야 했다.:결과적으로 이념과 현실의 괴리 발생▷대약진 운동의 실패-중국을 변화시키려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CCP가 자신들의 정책 재평가하는 기회 제공.-모택동의 은거와 온건 지도부의 등장.-새로운 검열원칙은 당분간 특정 영화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예술성과 정치성 사이에서 논 란이 일 때 예술적인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을 표방.-1960년대 초반, 10여년의 예술과 정치를 통합하는 실험 끝에 양자를 보다 세련되게 결합하는 법을 익히는데 성공.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미학 전개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감.7)문화대혁명: 1966-1976-1966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서곡은 1963년 12월 모택동의 연설에서 시작.-모택동은 문학과 예술영역에서 문제점이 산재해 있고 문화관련 관료들이 당의 노선에서 이탈하여 수정주의자들에게 굴복하고 있다고 말함.→교정 운동 일어남.→10여편의 영화가 도마에 오름-문화대혁명 시작되자 모택동 아내 강청은 블랙리스트를 54편으로 늘림.이 정치적 마녀사냥의 와중에 PRC의 17년간 영화 뿐 아니라 1949년 이전 좌파영화까지 공격 받음.-온건 문화관료는 해직되고 영화인들은 재교육 캠프에 보내지거나 투옥됨. 전국의 스튜디오 는 소수의 극력분자의 손에 넘어감.-공격의 주된 표적이었던 장편영화 제작은 수 년간 중단.-모택동의 죽음이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10년간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을 할퀴고 다님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