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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천의 변화와 현상, 결과 장소의 의미
    2007년 2학기 국토개론현장답사 보고서청계천의 변화 그리고, 의미-장소의 의미-답사일자 : 2007.11.2제출일자 : 2007.11.8팀원 :차례Page담당1.들어가며22.역사2.1 청계천의 탄생2.2 조선후기2.3 일제강점기2.4 1950년대 이후33. 복원 이유3.1 청계고가와 복개의 위험요인 예방3.2 자연환경복원과 삶의 질 향상3.3 지역 간 균형 발전3.4 역사문화복원3.5 경제활성화-3.5.1 기업하기 편리한 환경 조성-3.5.2 외국기업 활동여건 완화3.6 지속가능한 발전의 구현3.7 미래지향적 도시환경 창출74. 복원과정 및 복원 전 상황4.1. 복원과정4.1.1. 구조물 철거4.1.2. 하천 복원4.1.3. 역사ㆍ문화 복원4.1.4. 교량4.1.5. 조경4.2. 복원 전 실태105. 복원결과5.1다시 돌아온 청계천5.2 대중교통체계 개편5.3 강북의 경제 활성화5.4 복구의 문제점-5.4.1 가난한 자의 땅-5.4.2 엄청난 관리비-5.4.3 아직도 해결안된 노점상 문제146.장소의 의미6.1 :6.2 :6.3 :20참고문헌26첨부증거물271. 들어가며우리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숨을 쉬면서 공기의 존재와 중요성을 항상 인식하고 살아가지 못 하듯이 사람에 대한 공간의 의미와 공간에 대한 사람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공간은 그 사람의 역사이자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다가온다. 또한 공간은 그 곳을 지나쳐 갔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든지 간에 모두에게 다르게 인식되어지고 각각의 또 다른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이렇듯 공간은 그것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에 의해서 항상 변화하며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할 수 있고, 그런 공간의 변화와 의미에 대하여 사람은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든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공간의 변화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러므로 한 공간의 급격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 곳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후 많은 유민(流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1657년(효종 8) 약 8만명 남짓한 서울의 인구는 10년 후인 1669년(현종 10)에는 19만 명으로 늘어났다. 인구의 급증으로 생활하수는 개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였다. 더구나 유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개천 변에 채소밭을 경작함으로써 수로가 막혀 배수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또한 17·8세기에는 때아닌 이상기온현상으로 대풍, 폭우, 우박, 서리, 눈 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추위를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성 주변에 있는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 되어 조금만 비가와도 토사가 쓸려 내려와 개천을 메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영조가 즉위한 1725년경에는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평지와 같은 높이가 되기에 이르러 준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준천을 시행하기에 앞서 영조는 수 차례에 걸쳐 그 시행여부를 조정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물어본 다음 1759년(영조 35)년 10월에는 준천을 관리할 기관으로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였다. 1760년(영조 36) 2월 18일 드디어 대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의 준천은 송기교(현재 광화문 네거리와 신문로 접점 지점)에서 영도교(현재 영미교길) 까지 총 8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개천에 두텁게 쌓여 있는 토사를 걷어내고 개천의 깊이와 폭을 예전처럼 회복하였다.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고, 상류 및 지류는 물론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 안에 있는 물길도 준설하여 물이 잘 통하게 하였다. 이 준천은 4월 15일까지 총 57일간 시행되었으며, 동원된 인력은 모두 20만명이고, 전(錢) 35,000민(緡), 쌀 2,300여 석(石)이 투입되었다. 또한 준천의 시말(始末)과 장래에 해야할 일을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을 편찬하여 이후 개천 준설의 지침으로 삼도록 하였다.1773년(영조 49) 6월 영조는 다시 한번 개천 정비를 위한 공역을 실시하였다. 1760년 준천을 할 ) 짓고 생활하였다.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형성된 판자촌과 여기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되어 갔다. 엄청난 양의 하수가 도심 한가운데를 흐르면서 발생하는 악취로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으며, 도시 전체의 이미지도 크게 손상되었다.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위생 면에서나 도시경관 면에서 청계천을 그대로 두고 서울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기초적인 생활필수품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웠던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청계천은 1955년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복개한 것을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고가도로(사진)도 건설되었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1967년 8월 15일 착공되어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청계천 주변에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은 헐리고 대신 현대식 상가건물이 들어섰으며, 토사와 쓰레기, 오수가 흐르던 하천은 깨끗하게 단장된 아스팔트 도로로 탈바꿈하였다. 시원하게 뚫린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위에는 자동차가 쏜살같이 달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장 부끄러운 곳이었던 청계천은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으로 서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반면 청계천 복개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를 당하여 또 다른 빈곤의 상징인 달동네를 형성하였다. 또한 광통교와 같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훼손되었다.3. 복원 이유청계천의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청계천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도로 양편으로 공구상, 조명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도시 이미지로서 21세기 새로운 도시관리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려는 흐름과 함께 한다.4. 복원과정 및 복원 전 상황4.1. 복원과정)4.1.1. 구조물 철거청계천복원의 철거공사는 고가구조물 5.86km, 복개구조물 5.48km, 차집관로 5.0km, 하수암거 0.30km 철거 등 4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1단계 램프구간 철거, 2단계 고가상판 철거, 3단계 고가를 떠받치고 있는 교각철거, 마지막 4단계 청계천을 덮고 있는 복개구조물 철거이다. 철거되는 구조물은 청계고가와 삼일고가, 복개도록, 고가를 받치고 있는 교각 371개, 복개도록 교각 6700개, 램프 10곳, 육교 7개 등이다. 철거공사는 1공구 태평로 입구~광장시장(2km), 2공구 광장시장~난계로, 3공구 난계로~신답철교(1.7km)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4.1.2. 하천 복원하천 복원의 기본적인 목적은 치수기능 확보 및 하수기능 개선과 유지용수공급을 통한 상시친수기능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확보국지성 집중호우를 대비하여 200년 빈도의 통수단면(제방여유고)확보하였으며, 도시하천임을 감안하여 형하 여유고는 50~80년 빈도 적용하였다. 설계기준으로는 시점에서 성북천 합류점까지 지방 2급 하천(50년빈도)을 기준으로 하였고, 성북천 합류점에서 중랑천 합류점까지: 지방1급 하천(80년빈도)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리고 하천의 치수기능을 위한 주요지면 홍수위 및 홍수량은 과 같다. 주요지면 홍수위 및 홍수량하천단면제원과 침수빈도는 과 같다. 하천다면제원 및 침수빈도하천단면제원침수빈도하폭19~13m고수부지연 3회저수로 폭6~72m고수부지 폭2~27m저수부지연10회고수호안 높이3~7m저수호안 높이1~3.7m4.1.3. 역사ㆍ문화 복원청계천 관련 역사ㆍ문화 복원을 위하여 명지대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2003. 2. 11 ~ 3. 31에 걸쳐 전 구간 지표조사 및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하였으며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 유구잔존 가능성이 높은 지역 및 퇴적층 양호지역 발굴(시굴)조남 못지않은 강북의 친환경 주거단지로 집중 개발한다는 'U턴 프로젝트'를 발표한 후 이 지역의 발전 가능성에 투자자 관심이 집중되고있다.[기획취재팀=김지영 차장 / 심시보 기자 / 유통경제부 = 정승환 기자]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청계천이 호평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환경도시 서울의 모습은 세계의 매스컴을 통하여 퍼져 나갔다.몇일 전 직접 걸어본 가을의 청계천은 넉넉함과 여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어디서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양수와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라는 문구를 기억한다. 이 문구가 내가 걷고 있는 청계천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느낌을 받았다.청계천과 연결된 서울의 생태장소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면, 수업시간에 들은 것처럼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 많이 환경을 파괴해왔던 것 같다. 하천을 덮어 버리고 강을 막아버리고 땅을 메우고 이 모든 인위적인 행위들이 자연을 얼마나 다치게 했는지, 그로인해 인간들이 얼마나 황폐해 졌는지를 생각해 볼 때 인 것 같다. 청계천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서울의 많은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역사의 산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그것이 흉측하고, 또 새로운 도로가 필요하다고 그 위를 덮어 버렸다. 이제와 과거에 청계천 고가도로의 당위성과 현재의 논란에 대해 우리들이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현재 존재하는 청계천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더욱 깨끗한 서울을 어떻게 물려줄것인지 고민 할 때라고 생각한다.5.2 대중교통체계 개편 구글어스로 본 청계천복원 전의 고가도로복원를 시행할 경우 가장 게 우려 되었던 문제가 바로 청계고가도로와 주변도로의 교통량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 되었고 지금은 다행히 교통량이 완화되어 안정기에 접어 드는 듯하다.복학 후 서울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느낀 것이 대중교통의 환승제도 였다. 1학년 때만해도 강북의 어디에 갈려면 버스와 지하철 마을버스를 갈분이다.
    사회과학| 2007.11.20| 23페이지| 3,500원| 조회(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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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를 통하여 본 독일 평가A좋아요
    2007년 2학기 - REPORT분데스리가,축구,독일제출일: 07.11.141.들어가며2002년 월드컵결승전 우리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구호아래 광란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여름의 열기도 독일 대표팀의 ‘미하엘 발락’ 선수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목표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고 3,4위전을 통하여, 그리고 이후에 진행된 모든 과정을 통하여 열기가 계속되었다. 당시 나는 독일의 기량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패하고 나니 사실 허탈감이 밀려오기도 했다.매번, 월드컵이나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독일은 늘 우승후보로 점쳐진다. 그런데 실상 분데스리가는 영국이나 이탈리아, 스페인리그에 인기를 빼앗겼다. 왜 무엇이 분데스리가가 최고의 리그에 있게 만들었고, 이제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축구의 광팬으로서 나는 영국이나 스페인, 이탈리아 리그를 많이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이유 중에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그곳에서 활약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사실 유럽연맹에서도 독일을 4,5위정도의 리그로 취급하는 것을 보면 비단 그 이유뿐만이 아닐 것이다. 혹자들은 축구를 통하여 독일 민족을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나는 여기서 이전에 행해져 왔던 진부한(?)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얼마나 축구를 사랑하고, 전쟁과 분단의 역사과정에서도 축구가 어떻게 진행 발전해 왔는지를 보고자 한다. 오히려 중심이 독일이 아니라 축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글을 쓰고자 한다.독일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그들의 사람의 또 다른 부분인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축구를 통하여 찾아보고자 한다. 정치와 경제, 역사는 수업시간에 많이 다루었으므로 많은 부분 생략할 것이다.사실 ‘분데스리가’에서 ‘분데스’가 의미하는 바를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처음 알게되었다. 단지 명칭에 불가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고의 리그, 우수한 리그라는 이름대신 연방축구독일 축구는 그 화려한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유럽에서 그 어떤 나라도 세계대전 후 국제무대에서 독일이 거둔 영광에 범접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세계대전 이전까지 독일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적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1934년 월드컵 3위에 오른 것이 전부였던 독일은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던 축구강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비해 한 단계 떨어지는 평범한 팀에 불과했다. 독일이 국제무대에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세계대전이 끝난 뒤 처음으로 열린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였다. 참혹한 전쟁으로 독일 전역이 폐허가 된 가운데 독일 축구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팀에서 주축 연령대를 이루어야 할 선수 대부분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독일은 전쟁 이전에 뛰던 노장 선수들과 전쟁 이후에 등장한 어린 선수들을 혼합한 팀으로 월드컵에 나서야만 했다. 독일은 조별 예선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헝가리를 맞아 8-3으로 대패를 당했지만 독일에는 '제프 헤르베거'라는 당대의 명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감독의 작전이었다. 그는 헝가리와의 경기에 2진을 보냈고 헤르베거의 작전대로 체력을 비축한 독일은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차례로 누르며 결승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결승전 장소인 베른의 방크도르프 슈타디온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경기 전문가들은 헝가리의 우세를 점쳤으나 이미 서독은 경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돌프 다슬러(Adolf Dassler)’가 고안한 축구화 때문이었다. 그의 축구화는 징을 교체할 수 있어서 진흙에서 경기를 펼치는 데 유리했다. 다슬러는 '프리츠 발터 날씨'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독일 선수들의 신발에 평소보다 긴 징을 장착했다.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아돌프 다슬러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제시 오웬스에게 신발을 건네 주기도 했던 스포츠화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신발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아돌프 다슬러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를 만들었고, 아돌프와 불화를 승을 라디오로 중계하고 있던 헤르베르트 짐머만은 독일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짐머만의 흥분된 목소리는 패전국 독일 국민의 아픔을 한꺼번에 날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란 선수 슛했습니다. 골입니다. 독일을 위한 골입니다. 독일이 3-2로 앞서갑니다. 저는 지금 제 정신이 아닙니다"라며 '베른의 기적'을 알렸다.)그림,1부리그 홈구장, 월드컵때 사용할 경기장(w마트가 붙은 경기장은 월드컵 때 사용)이러한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서독 축구협회는 전쟁의 폐허가 된 독일에서 국민에게 기쁨을 안겨줄거리를 축구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1963년 처음 분데스리가가 출범한다. 15개팀이 유럽컵대회참가와 하위리그로 강등되지 않기 위해 매 경기 최선을 다했고 이는 곧 흥행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시즌부터는 독일특유의 연방제 성격까지 맞물리면서 독일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잡는다. 첫해 우승팀은 FC쾰른이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원년 프로야구에서 OB베어스가 우승한 것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건국신화에서 우리의 조상은 곰으로 묘사되어있다. 그리고 ‘뿔달린 염소’를 마스코트로 하는 FC쾰른은 뿔달린 송아지를 예배용으로 쓰는 독일인과 관계있는 것은 아닐까?)분데스리가가 자리잡음에 따라, 서서히 범 국가적인 클럽 대항전에서도 독일 클럽들은 서서히 그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 창설 이후 3년만에 유럽컵 위너스컵(현재는 UEFA컵과 통합)을 거머쥐었다. 이는 분데스리가 클럽 사상 최초의 유럽 무대 정복이였다. 한편 FC 바이에른 뮌헨은 1974년 독일 클럽으로는 최초로 유럽컵 챔피언스컵(챔피언스리그의 전신) 정상에 올랐으며, 이후 75년과 76년 유럽컵 챔피언스컵의 타이틀을 방어하였다. 이때가 바로 독일축구와 분데스리가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잘 아고 있는 베켄바워, 뮐러, 마이어 3인방은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독일축구, 아니 세계축구를 주도하는 흐름이었고, 당연히 그들이 활약하고 있는 분데스리가는 최고의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커가는 덕에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요한바오로 2세의 뒤를 이어 2005년 교황이 된 베네딕토2세도 독일 남부 바이에른 출신이다. 교황의 자리는 인간이 가진 세속적인 욕망을 뿌리치고 꾸준히 정진할 수 있는 힘과 참을성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자리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보면 그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도 태어난 독일의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참을성 많고 강인한 남부 독일 사람들의 근성은 누구나 타고 싶어하는 세계 제일의 차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남부 독일의 남동쪽에는 바이에른 주가, 남서쪽에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가 스위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이 두 지역에서 각각 전 세계운전자가 타고 싶어하는 BMW와 벤츠가 생산되고 있다.)앞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아돌프 다슬러’는 축구화를 수리하는 사람이었고 이러한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54년 독일이 월드컵을 우승한다. 그리고 1970년 FIFA는 최초로 아디다스의 ‘텔스타’를 공인구로 선정한다. 이때부터 아디다스는 축구용품전문 브랜드로 성장한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러한 단적인 예로만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현대에 올수록 축구공의 과학은 더욱 더 부각되고 있다. 작은 신발 수선방에서 시작된 아디다스가 전 세계를 지배할 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바탕에 강인한 독일인의 정서가 녹아 있는 듯하다.수업시간에 들었던 68운동의 여파는 축구에도 미쳤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된 독일인들은 70년대초 기존의 의식을 타파하려고 했고, 기존의 플레이가 아닌 새롭고 신선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를 스타로 만들어 낸다. 그들이 바로 브라이트너와 회네스이다. 72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그들은 신구의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해낸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점차 독일은 강한 팀으로 거듭난다.내가 독일의 축구를 공부하던 중,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점을 발견 했다. 1974년 서독월드컵에 동독이 몇 년간의 철저한 준비로 예...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정서가 바탕이 안 되어 있었다면 독일 통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어찌됐건 같은 조에 편성된 서독과 동독은 한차례의 정면승부를 치러야만 했다. 결과는 예상외로 동독의 승리였고, 서독의 관중들도 오히려 깔끔한 응원 매너로 전세계 사람에게 감동을 전해주었다. 두팀의 경기에서 승리팀은 준결승리그에서 1조에 편성되어 어려운 경기가 예상되었음에도 동독선수들은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달렸고, 승리를 거두었으나 준결승리그에서 네덜란드와 브라질에 잇달아 패함으로서 탈락을 하고 만다. 반면 조2위로 준결승리그에 오른 서독은 3연승으로 결승에 올라 1974년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을 일구어낸다. 이것이 아직도 회자 되는 것은 동,서독이라는 단순히 분단 국가의 경기라는 점이 아니라 서로의 이념의 우수성을 축구경기라는 경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최근들은 “축구를 곧 경제”라고 하는 기사를 자주 볼 수 있다. 유명리그의 축구선수들은 일반인들의 평생 월급을 주급으로 받고 운동하고 있고, 유명구단을 소유하는 것은 황금을 낳는 거위를 키우는 격이 된다. 1974년의 냉전시대의 축구와는 비교될 수 없지만 여전히 축구는 총성없는 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독일 축구는 계속 분데스리가를 통한 우수한 선수배급과 게르만 군단이라는 특유의 정신력으로 월드컵을 비롯한 세계무대에서 정상급 위치에 위치하고 있다. 74년 서독이 우승한 이후 우리나라의 차범근 선수가 독일에 진출하면서 우리국민들은 분데스리가에 열광했다. 차범근선수의 친출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도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여하튼 독일 축구협회가 선정하는 20세기 최고의 아시아 선수에 차범근 선수가 선정될 정도로 차범근은 훌륭한 기량한 선 보였었다.통일에 된 이후인, 91/92시즌에는 동-서독의 재통일로 인해 구동독 클럽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디나모 드레스덴과 한자 로스톡이 추가로 분데스리가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91/92시즌에는 기존 18개팀에서 20개팀으
    사회과학| 2007.11.20| 6페이지| 1,000원| 조회(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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