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서구에서 플라톤 철학이 아직까지도 계속 해석되고 인용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플라톤 철학 안에서 현재와 연관되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현재와 연관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아마도 2천 년 전에 플라톤이 정립한 사유방식이 아직도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데, 플라톤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서구의 사유가 플라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가 근대철학에 대해 논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근대철학의 시조로서 데카르트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것은 근대철학뿐만이 아니라 학문체계, 심지어는 가장 일상적인 언어에까지도 데카르트적인 사유의 경향들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언어는 현실과 꼬여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데카르트적 사유의 경향은 그러한 사유와 연관되어 있는 특정한 삶의 형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문제가 된다는 것은 단지 '데카르트'라는 유명한 철학자에 대한 자구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데카르트가 표현했던 사유방식과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특정한 삶의 형태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본론 전반부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는 어귀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이 어귀의 의미는 사유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제1명제 이다. 이러한 것들은 데카르트의 『성찰』이라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성찰』이라는 책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 관한 주요 저서이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한다. ‘방법적 회의’란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것은 모두 의심해 보자는 것이다. “감각은 때로 틀리는 것이므로 믿을 수 없고 내가 지금 여기서 윗도리를 입고 화롯가에 앉아 있다고 하는 것도,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보증은 없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세계의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스럽다고 해서 멀리 할 수는 있으나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고 하는 근본원리가 확립되고 이 확실성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나는 의심하고 있으므로 불완전한 존재인데 이러한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므로 나 속에 있는 신에 대한 관념은 무한하게 완전한 존재자, 즉 신에게서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 이것은 결과로부터의 증명을 말한다. 그리고 신이 완전한 존재자인 이상, 성실하며 인간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명석한 판명으로 인식한 데로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결론지어진다. 물체(신체)의 존재가 증명된 뒤 정신은 사고만으로, 즉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신체는 단지 연장(延長)을 지니는 한,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리하여 심신의 실제적인 구별이 논증되어 실체형상의 사상, 목적론적 사고방식이 철저하게 타파됨과 동시에 자유의지의 주체로서 정신의 자립성이 확인되는 것이다.본론 후반부데카르트의 목표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절대적인 회의를 선택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얻어지는 상식과 관습은 물론,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지하는 외부 세계 역시 의심했다. 심지어 그는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이 신이 자신을 속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을 전제하기도 했다. 이런 회의 끝에 데카르트가 얻은 것은 절대적인 진리였다. 내가 끝없이 회의하고 있을 때, 내가 "생각을 한다는 사실"과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 만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선하고 나를 속이려 하지 않는 한 이 원리가 명석판명하다고 여겼다. 이 원리로부터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진리를 이끌어낸 데카르트는, 그의 철학의 제일원리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을 연역해 나간다. 데카르트는 불완전한 인간의 정신이 '완전한 신'이라는 관념을 창조할 수는 없으므로 신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제일원리의 보증자로 신을 내세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가 참이기 위해서는 '단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선한 경우에만' 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즉 우리가 명석판명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신이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신 증명이 결코 인간 이성의 완전성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결론데카르트의 사유는 이른바 ‘인식’에 관한 고민에서 시작된다. 지금 인간의 전체(the whole) 인식, 즉 ‘지식’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를 묻는 그의 질문은, 거친 회의와 부정을 시작으로 자기 인식의 과정을 지나 물질 세계를 나름대로 재 정립하고 있다.데카르트가 제시한 방법적 회의에 대해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삶과 철학’ 교수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비록 그 회의가 충분히 강력한 의심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끊임없이 인식의 틀을 비우고 자기 검증을 가하고 새로이 담아가는 자세라는 점에서만큼은, 기초 철학적 사고 과정에 있어서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본다. 특히 ‘도구적’이라는 관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데카르트의 인식론 전개 과정의 많은 부분에 동의하고 도전을 얻지만, 그래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역시 신의 존재에 관한 논증이다. 데카르트가 종교적인 인간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논증은 분명 무리하게 의도된 듯 보인다. 특히 존재론적 논증은 거의 이성 활동을 가장한 말장난 수준 같아 보일 정도이다. 중세 교회에서도 언급되던,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명제와도 통할만한 이 논증은 그 자체로 순환적이며, 확대해서 확증할 경우 너무 간단히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또 한가지 고민스러운 부분은 순전한 이성과 감각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는 감각은 그리 신뢰할만한 인지 도구가 아니므로 오로지 순전한 이성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지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때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바로 이성이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도 결국은 감각을 재료로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상대적으로 뒤늦게 발달하기 시작하는 이성은 결국 태어날 때부터 (최소한 이성의 발달 시작 이전부터) 인지를 시작하는 감각에 종속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러한 물음은 철학사 내내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거리지만, 최소한 순전한 사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논증해낼 수 없다면 데카르트의 논증은 꽤나 근원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순전한 이성의 존재 여부를 떠나, 사고만으로 세상을 인지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감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분석해낼 수 있는 사실을 종종 로지컬한 ‘오류’로 반박해 내곤 한다. 이 경우, 감각적 직관이 옳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논리가 반드시 옳다고도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악령이 감각을 속이듯, 논리를 왜곡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에서 깨어나고 난 다음 이야기다. 꿈에서 깨기 전 까지는 우리의 감각은 물론 이성까지도 꿈에 지배될 수 밖에 없고 우리가 열심히 사고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실은 아직도 진행 중인 가상일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즉 요는, 감각만큼이나 이성 역시 우리가 인지해내지 못한 더 큰 차원에서 왜곡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이다.인지에 관한 데카르트의 해법은 실로 기왕의 관념을 뒤엎는 실로 위대한 것이었지만 내게는 이러한 결점들이 너무 결정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 덕분에 이후 서양 철학계에 새로운 활력이 뿜어져 나온 것도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아마 데카르트가 마주친 한계는 그만의 한계가 아닐 것이다. 아직 누구도 분명한 해답을 내놓지 못할 인지에 관한 중대한 질문들은 그가 그렇게 밝혀내고 싶었던 인간 이성의 한계일 것이고 350여 년 전 데카르트가 던진 화두는 앞으로도 계속 인간 이성의 한계를 자극할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