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 회화의 변화Ⅰ 시대적 배경 Ⅱ 화론 Ⅲ 원대 회화 이론에 나타난 미학사상원(元)의 시대적 배경원(元)은 중국 민족을 정복하여 그 문화를 흡수하고, 또 한족(漢族)의 문화에 동화 융합하였으며 인류 역사상 영토가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하고 동서문화를 교류시키기도 하였다. 중국미학사에서는 원대예술을 송대에서 명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사실 몽고인의 중국지배는 전통적 중원문화의 유린과 함께 역설적으로 전통에 대한 반성과 전통·문화의 의의 재정립, 복합적 다원문화 형성(남북의 통일과 역외문화의 유입)을 가져왔고 원대는 백 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중국 회화사에 있어서는 커다란 전환기가 된 시기였다. 원대문화는 강남문화와 중원문화, 역외문화가 혼융되어 이루어진 다원복합문화이며 화폐남발과 가혹한 징세로 농촌경제가 무너지면서 대도시 중심으로 통속적이고 실질을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으며 이런 풍조는 아문화(雅文化)의 쇠락을 가속화시키고 함께 속문화(俗文化)의 발전을 조장하였다. 속문화는 당대 말기 싹터 송대에 점차 확산하였고 원대에 이르러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화원이 성하던 송대와 달리 원대에는 화원을 두지 않고 정부기관의 공작서(工作署)에 화공을 두어서 기술적인 요구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적 이유로 원체화풍은 명맥을 유지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직업화가들의 활동이 축소되었다. 원대의 산수화는 예술의 계승이라는 문제에서 남송의 전통을 버리고 당과 북송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족사대부는 통치기구에 있으면서도 정치상 뜻을 펼치기가 어려웠기에 그들의 삶의 이상이 정치참여로 보는 유가적 관점에서 학문과 문화의 계승자로 바뀌게 되었고 문화와 도덕을 통해 정치를 변화시키고자 하였고 따라서 문화활동은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이들은 주로 시문, 서화에 의탁하여 감정을 드러냈는데 원대 후기에는 정치가 부패하여 각종 모순이 엉키고 첨예화 되어 많은 문인들이 뜻을 펼치기가 어렵게 되어 서화로 고결함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문인사대부의 회화는 원대회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원대의 문인화를 대표하는 황공망(黃公望 1269~1354), 오진(吳鎭 1280~1354), 예찬(倪瓚 1301~1374), 왕몽(王蒙 약1308~1385) 네 명의 화가를 원사대가(元四大家) 또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양자강 이남의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원대 후기에 은거 생활을 하면서 동거산수양식에 기초한 새로운 산수화풍을 확립하였다. 직간접적으로 조맹부의 영향을 받았으며 회화작품으로 그들의 심경과 생활정취를 표현하였다.조맹부(趙孟頫)의 고의(古意)론과 서화용필동법(書畵用筆同法)론 고의(古意) –복고주의적으로 옛 것을 배운다는 것은 회화기법상 당,북송을 따른다는 의미이지만 고의를 따른다는 것은 과거에 의탁하여 자신의 창조적 개성을 펼친다는 뜻이지 무조건적인 모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나는 복고파가 아니라 옛 사람들의 기법과 품격을 배우는 것이고 그가 현실을 반영하는 데에 영향을 주기 않았다. 한편,시대적으로는 옛 전통계승으로 정신적 우월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문인화가의 예술심미취미의 산물로서 남송 화풍에 대한 비판(판에 박은듯하고 메마르며 생경하다)을 토대로 당대 회화의 품격을 높이 평가하고 방일(放逸)함을 추구하였으며 말끔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 직업화가들의 회화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 “그림을 그릴 때는 옛 화가들의 뜻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만약 고의(古意)가 없다면 교묘하게 될 뿐 이로움이 없다. 그런데 요즘 화가들은 섬세하게 붓을 쓰는 것과 화려하게 채색을 하는 것만 알면서 스스로 능수라고 한다. 고의를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손해가 있을 뿐이며, 또 온갖 병이 생길 것이다. 이런 일은 오히려 짐작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조맹부의 고의론의 한계 ▪ 조맹부는 자신의 예술취미를 그림의 우열을 논하는 유일한 기준으로 삼았는데 가령 그는 “고의가 이미 이지러지면 온갖 병이 마구 생기니, 어찌 볼 수는 생각으로 당의 장언원(張彦遠)은 인물화로 논증하였고 송의 곽희(郭熙)는 산수화로 논증하였으며 조맹부는 이를 죽석(竹石), 화훼(花卉)에까지 확장시켰다. 조맹부의 다음 시가 일으킨 작용과 영향은 장언원과 곽희를 훨씬 넘어섰다. ▪ 돌은 비백(飛白)과 같고 나무는 주서(籒書) 같되 대나무는 오히려 8법(八法)에 통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 이를 안다면 글씨와 그림은 본래 같은 줄 알게 되겠지. ▪ 서법을 화법에 사용한다는 이치로 청나라 시대의 동계(董棨, 1772~1884)는 “글씨가 이루어지고 나서 그림을 배우면 곧 그 체(體)를 바꾸어도 그 법이 바뀌지 않는다”고 하였다. ▪ 조맹부의 서화용필동법론은 '돌은 비백과 같이 그려야 하며 나무는 주서같이 그려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당시 돌이나 나무와 유사한 소재를 그렸던 화가들의 경험을 총결하고 자신이 마음 속으로 깨달은 바를 포함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이론은 중국서화에 있어서의 하나의 법칙을 총결해냄으로써 보편성을 띠며 후세에 계승되는 주장이다. ▪ 서화용필동법론은 중국 회화예술형식의 하나의 객관적 법칙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작화추색도 부분조맹부 作. 췌산과 화산의 가을을 그리다 (鵲華秋色圖 작화추색도), 1295 종이에 먹과 채색, 29 x 93 cm, 전체 길이 605 cm, 두루마리, 타이페이 고궁박물원 소장ㅇ조맹부의 조량도(調良圖), 종이 수묵, 22.7 x 49 cm. “나는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했는데 자못 물(物)의 본성에 접근하였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는 고대와 현대를 대비시키고 나서 어떤 사람들 그리든지 간에 모름지기 그 사람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실한 성정(性情)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전선(錢選)의 사기(士氣)론 ▪ 전선(錢選, 1235~1301). 자는 순거(舜擧), 호는 옥담(玉潭)·손봉(巽峰)·습란옹. 우싱 출신. 원나라 초기에 조맹부 등과 함께 오흥팔준(吳興八俊)의 한 사람으로 꼽혔고 문인화론에 정통하엿고 시서화(詩書畵)에만 정열서 이루어진 산물로서의 강조되는 서법적인 운필은 문인화가의 편견을 지니고 있다. ▪ 전선은 예체를 문인화와 비문인화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생각했는데 회화가 어떻게 하면 사기(士氣)를 구비할 수 있는가에 대해 첫째로 그림을 서법의 용필로 그려야하며 둘째로 화가가 청고(淸高)한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선의 사기론은 송원대의 문인화사조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산물로서 서법적인 운필이라는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였고 청고한 마음을 강조함으로써 문인화가의 편견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에 근거하여 명청대 문인들은 화공들을 배쳑하였다. 즉 서법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은 서법을 운용하여 그림 그리는 것을 배우는 권리가 없으며 설사 서법을 잘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더라도 마음이 고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육법에서의 기(氣)는 생동감을 표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나 전선의 기는 창작 주체의 정신과 기운이 작품에 구현되어있는 것을 뜻한다.예찬(倪瓚)의 일필(逸筆)과 일기(逸氣)론 ▪ 예찬(倪瓚,1301~1374). 원(元)나라 말기의 화가·시인으로 원사대가(元四大家)의 한 명. 간소한 묘법(描法)으로 깊은 운치를 느끼게 하는 산수와 고목죽석(枯木竹石)을 그렸는데, 4대가 중에서 가장 품격이 있었다.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학문과 예술을 좋아해서 저택 내에 청비각을 세워 고서화·고기물(古器物)·서적을 수집했다. 도교(道敎)에 열중하였고 장우(張雨)와 황공망(黃公望)을 롯한 많은 문인들과 교제하였으며, 벼슬에 뜻이 없어 풍류를 즐기는 은둔자 생활을 했다. “흉즁의 일기를 그린다” “일필초초하여 형사를 구하지 않는다” 일기 예찬이 말한 일기는 화가의 기질, 감정이 필묵을 통해 표현된 것으로 흉중의 일기는 객관적 경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가기준이 대상의 정확성보다는 화가의 일기가 전달되었는가에 있다.이는 예술 자체가 목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자율성에 대한 첫 번째 선언이었다. 일필 일기에 상응하는 필묵이궁박물원기수추풍도(琪樹秋風圖) 62×43.4cm 상해박물관이간의 화죽(畵竹)론원대에 대나무를 그린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할만큼 많았고 인물화는 드물었다. 고상한 품격이 문인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한 사대부들은 대나무를 그들 자신에 비유했고 이간은 대나무그림의 이론적인 체계에 있어서 문동과 소식을 계승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슴속에 대나무를 이루어 얻는다.”는 것, 즉 “의재필선”을 하나의 소중한 이론으로 신봉하고 ,자신의 경험을 결합하여 [죽보]를 편찬하였다. 문동의 대나무 그리는 이론은 주로 원칙적인 문제의 규명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간의 저서는 대나무 그리는 법칙을 계통적으로 서술한 대나무그림의 기초이론이다. 이간은, 대나무 그리는 것을 배울 때는 반드시 그 기본적인 법칙에서부터 시작하여 마디 하나 잎사귀 하나가 모두 법도에 맞아야 한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오랜 기간의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지고 마음에서 얻는 것을 손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간이 논하고 있는 법도에 들어간다는 것과 법도를 벗어난다는 것의 관계는 곧 유법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법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간은 경영위치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간은 단지 대나무 그림에서 구도잡을 때 피해야 되는 몇 가지 잘못만을 예로 들고 있을 뿐 구도법에 대한 구체적인 강의를 하고 있지는 않다.원대 회화 이론에 나타난 미학사상도화원 폐지 → 국가,황실 간섭 배제 → 회화 창작 및 비평에서 문인 계층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고, 창작이 더 이상 벼슬과 관계가 없어지게 되고 사회적 평가의 중요도도 떨어지면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리는가를 모두 스스로 결정하게 되며 회화는 개인적인 행위가 되었다. 산수화 – 격변하는 세속의 시끄러움 대신 한가로운 산수 가운데 적막함과 문인의 심정을 드러냄(사대부의 소양, 도덕, 사상, 이상, 문화적 취향의 표현의 매개로서 회화가 발전함) 경물의 미 표현이 아니라 화가의 이념과 정신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송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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