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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재천 보고서
    1. 들어가며경관은 복합적인 환경적 영향에 따라 수차례 변화를 겪고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이번에 답사한 양재천도 하천의 중요성에 대한 의식이 개선되고 삶의 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과거의 악명을 떨치고 자연친화적인 생태하천으로 변모하였고 그에 따라 경관도 바뀌었다. 또한 한 지역의 경관일지라도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양재천이 도심의 고층 빌딩 숲 근처에 위치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층빌딩 숲이 문명의 이기가 밀집된 경관이라면 양재천은 인공적인 구조물을 최대한 배제하고 친 환경적으로 조성한 경관으로 이 두 경관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지만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복원된 양재천의 경관상의 특징 관찰을 중점에 두고 이러한 경관이 주변시스템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양재천변 습지 양재천 경관2. 양재천의 복원양재천은 원래 한강으로 직접 유입되는 한강의 1차 지류였으나 한강연안개발사업과 주변일대의 개발로 직강화 되면서 탄천으로 유입되는 유역변경 및 유로변경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하천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개조로 인한 부작용은 심각했다. 우선 사행하던 강줄기를 직강화 하여 홍수도달 시간을 짧게 해 오히려 홍수의 위험을 가중시켰으며 홍수방지를 위한 콘크리트 제방은 하천식생을 파괴해 수질의 악화는 물론 생태계 파괴를 야기했다. 결국 양재천은 악취가 심하고 물고기나 조류의 서식이 불가능한 '죽은 하천' 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그러나 하천복원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각 지자체마다 도시 내 하수도로 전락한 하천을 자연생태 하천으로 복원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되었다. 특히 도시 내 하천은 치수기능 뿐만 아니라 수변경관 감상, 친수위락 기능 등을 가진 중요한 공간 자원이기 때문에 기능이 상실된 하천을 자연생태하천으로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친수 위락공간으로 제공 할 경우 시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양재천 복원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양재천의 수질이 2~3급수 수준으로 개선되어 잉어, 붕어, 피라미, 자라 등이 대량으로 서식하며 두루미, 청둥오리 등 철새들이 찾아오는 환경으로 개선되었으며 하루에 만 여명 이상이 찾아와 즐기는 친수 위락 공간을 가진 자연생태공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3. 경관상의 특징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가진 생태공원이라고 하여 여느 생태공원들과 비교했을 때 경관 상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천을 중심으로 유사한 자연경관이 끊임없이 이어졌을 뿐이다. 다만 몇 가지 인상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먼저 하천 양안에 조성된 습지체계였다. 특히 친수성 식물인 갈대가 유난히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발제지에서는 이를 천변습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수문과 토지, 동식물을 포함하는 복합생태계로 물의 흐르고 고이는 현상을 통하여 다양한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물을 담고 있는 땅을 말한다. 즉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물을 저장하며 오염물질을 정화하며 수생 및 육상 동식물의 서식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들 습지는 다른 경관요소보다 높은 수준의 생물종 다양성을 갖는다고 한다. 지난 10월 경남 창원에서 개최된 람사르 협약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습지는 여러모로 자연생태계와 그에 따른 인간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습지는 생명력이 매우 풍부한 지역으로 각종 무척추 동물과 어류, 조류의 서식지이고 미생물들이 유기물을 먹고 살기 때문에 오염원을 정화하는가 하면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는 자연적 스폰지 역할을 한다. 또한 생물적, 생태적, 환경적으로뿐만 아니라 수리적 , 경제적으로도 그 보존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세계습지의 날을 정해(2월2일)습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습지에는 식물이 밀생하거나 다양한 종이 생식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습지를 개간하여 다른 용도로 쓰는 것 보다 보존하는 것이 여러모로 인류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물고기나 새우에 있어 영양이 풍부한 생식 환경을 제공하여 산란 장소나 치어가 성장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먹는 어패류의 3분의 2는 습지를 생식 환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생물종 다양성의 유지, 수상교통으로 이용, 유전자의 저장소등 인간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물의 라이프 사이클 중의 중요한 생식환경, 문화 또는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 그리고 연구나 교육의 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습지는 호주, 뉴질랜드와 시베리아를 잇는 철새 이동 경로에 있기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양재천의 습지 경관은 인상적이었다.다음으로 양재천과 탄천이 만나는 하천합류지가 기억에 남는다. 이곳은 70년대 초 유로변경 공사로 인해 생긴 지점으로 청계산, 관악산으로부터 발원된 양재천이 끝나는 부분이다. 사실 하천 합류지라고 해서 대단한 것을 기대했었는데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합류지라는 상징성이 이 경관을 특별하게 한 것 같다. 아마 이곳은 두 하천 생태계의 중간적 성격을 띠고 있을 것이다. 한편 이 부분에서 발표자가 특히 강조하던 여울과 소를 볼 수 있었다. 여울은 물이 얕고 빠르게 흐르는 지역을 일컫고 소는 비교적 많은 물이 있고 그 물이 느리게 흐르는 지역을 지칭한다. 양재천의 여울과 소는 자연형 호안공사와 같이 진행되었으며 본래 하상의 경사와 흐름을 고려한 자갈여울과 소가 반복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이와 함께 조성된 징검다리도 여울을 형성하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마지막으로 학여울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환경 개선에 도움이 되고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학여울 생태공원은 수생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하천환경의 회복을 통한 자연생태계로의 기능회복, 자연과 인공이 조화되는 도시경관 연출, 시가지와 하천 자연환경요소의 조화로운 조성, 하천의 치수기능 유지를 목적으로 조성된 자연학습장이다. 갈대와 물억새 등 180여종이 넘는 수변식물이 자라나며 습지 사이로 난 수변테크를 이용하여 습지의 중앙으로 들어갈 수 있다.4. 주변시스템과의 관련성한편 이러한 자연생태공원으로서의 양재천은 도심에 위치하며 인근의 도시경관과 차이를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한 지역에 상이한 경관이 공존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경관상의 차이는 이러한 경관을 형성해 가는 지역 구성원에 영향을 미치는 등 주변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양재천의 생태적 보존과 심미적 가치는 인근 대치동, 도곡동의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며 일종의 관광자원으로서 이 지역의 도시홍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생태탐사교실 등 환경교육을 위한 일련의 노력으로 지역학생들의 환경의식 개선과 인식의 지평 확대에 도움이 되어 지역의 각종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학생들 뿐 아니라 지역 구성원의 쉼터, 운동 공간, 산책로 등으로 이용되어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
    인문/어학| 2009.12.22| 3페이지| 1,000원| 조회(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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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촌한옥마을 답사보고서
    들어가며...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특유의 생활상은 복합적인 경관을 만들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건축물은 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의 산물이며 이러한 건축물과 건축물의 변화과정을 통해 이러한 배경을 알아보고 당시의 건축양식을 조명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과정이다. 이는 개량한옥을 텍스트로서 읽어보자는 이번 답사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북촌 일대는 과거 조선시대에 궁궐과 인접한 장소 입지 등의 이유로 한옥마을의 원형을 이루었고 서울이라는 도시의 근대화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한옥과 현대적인 개량한옥이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형태의 경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러한 독특한 주거경관의 특징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한옥의 보존 및 활용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답사를 통해 보고 배운 것들...답사코스의 첫 번째는 고종의 잠저이자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이었다. 이곳은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역시 여느 한옥과 마찬가지로 조선 전반을 지배하던 유교사상에 의한 신분 구분, 남녀에 따른 차이가 가옥의 공간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보통 경제력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양반계층에서는 집안에 여러 명의 하인을 두는데 이들의 거처는 대부분 대문 근처에 두어 외부로부터 방어적인 형태를 취했다. 또한 이들의 생활영역을 담과 문으로 막아 주인의 생활공간인 안채와 사랑채와는 격리시켰고 행랑채가 있는 행랑마당은 하인들의 작업공간이 될 수 있도록 넓게 만들어졌는데 역시 운현궁에서도 이런 면을 볼 수 있다. 기단이 3층이면 왕이, 2층이면 양반이 그 아래이면 평민이 거주한다는 차별적인 가옥구조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사랑채는 남성에겐 사회활동의 공간, 손님을 맞을 수 있는 공적인 영역으로 사용된 반면 안채는 주거기능을 담당하는 생활공간으로 이용된 흔적을 볼 수 있었다.이후 북촌한옥마을에 진입하기 전에 직선이 아닌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갔는데 이러한 형태는 마을 구성원의 결합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외부인을 몰아내는 역할을 하여 도둑 감소효과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엔 이러한 길을 따라 식당이 즐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근처에 생긴 여러 회사의 사원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한다.다음 코스는 북촌한옥마을이었다. 북촌… 예부터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조선왕조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조선성리학에 기초해 배치된 궁궐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해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 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00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북촌은 1920년대까지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지만 1930년대 서울의 행정경계가 확장되면서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됐다. 현재 한옥들이 밀집해 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등의 도시한옥 주거지들이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됐다. 특히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벽돌을 쌓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면서 개량한옥으로 불렸으며 도시한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에 적응해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북촌에는 약 900여 채의 한옥이 남아 있으며 전체 필지 수는 약 2500개에 이르고 있다. 1990년 한옥보존지구가 해제된 후 약 600여 채의 하옥이 다세대주택으로 바뀌고 이제 3분의 1가량의 한옥이 남겨진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회31·33 도시한옥주거지는 한옥들이 모여 전통적인 도시경관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런대로 골목직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예전의 전통가옥은 사라져가고 근대적인 주생활을 반영한 한옥의 개량이 크게 진전된 상태이다. 따라서 이곳 특유의 경관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우리가 처음에 들렀던 북촌문화센터를 통해서도 이러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비록 담을 설치해 놓아 희미하게나마 예전 형식을 유지하려 한 것을 볼 수 있었으나 전통한옥에서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안방과 사랑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안"방", 사랑"방" 이라는 명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원래 "채"로 구분되던 조선시대와 달리 다목적의미의 방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여성의 역할과 지위변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주거공간상에서의 남녀구별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말한다.한편 답사를 하는 내내 볼 수 있던 한옥들은 대부분 개량한옥이다, 즉 전통주거지인 한옥이 도시주거지라고 하는 새로운 구조 속에서 자생적으로 특징적인 주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도시형 개량한옥의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r자형이나 ㄷ,ㅁ자형을 취하고 있으며 ㄷ자 구성이 일반적이다. 마당의 기능이 약화되어 오히려 통로로서의 기능이 강해졌고(이는 예전에 가보았던 가회박물관과 북촌문화센터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한옥의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쉽다.) 대문을 나서면 바로 도로와 면하게 되어 있어 공적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건물자체의 외벽이 되어 폐쇄적이고 내향적인 성격을 띠는 점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폐쇄적인 구조를 띠게 된 이유는 도시화에 따른 개인주의 만연과 기독교의 유입으로 인한 부부중심의 생활 등에 있다. 또한 개량한옥의 평면구성은 전통한옥의 안채에 문간채를 복합시켜 놓은 형태로 그 형태는 ㄷ자형과 튼 ㅁ자형을 이룬다. 또한 과거 안채와 사랑채로 남녀의 생활공간이 분리되었던 것이 안방으로 합쳐져서 안방에서 부부중심의 생활을 하고 안방이나 마루를 가족생활 중심으로 놓고 있다. ( 북촌문화센터) 튼 ㄷ자형의 한옥도 볼 수 있었는데 핵가족화로 인해 마당의 기능이 약화되어 마당이 단지 통로 또는 중앙 정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대청마루가 있었지만 유리로 막아놓아 현대화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랑방과 안방이 연결되어 북촌문화센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주거 공간상에 남녀구별이 사라져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답사 도중에 빨간 벽돌로 이루어진 담들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근대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서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북촌을 답사를 하는 내내 공방이나 게스트하우스 또는 여러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한옥을 랜드마크화 하여 지역홍보전략의 하나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남산한옥마을을 비롯하여 고성 왕곡마을, 순천의 낙안읍성, 안동하회마을 등도 이를 위해 마을 정비사업과 지자체, 주민간의 협의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북촌에서도 서울에서 유일한 우리의 전통한옥 밀집지역인 북촌을 주민들 스스로 보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주차장 건설,소공원조성 등 생활환경개선 사업을 시행하고, 한옥보전을 위하여 한옥등록제를 시행, 등록된 한옥에 대하여는 개/보수비용의 일부를 지원 (보조또는 융자)하며 또한 한옥으로 신/개축할 경우에도 비용의 일부를 융자하는 등 우리의 전통주거문화를 계승 보전하려는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주민이 스스로 한옥과 마을을 지키고 가꾸며 행정이 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마을만들기”방식 ‘governamce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하계답사 코스중 하나였던 진안 백운마을과 같은 방식이라 더욱 그렇다.
    인문/어학| 2009.12.22| 4페이지| 1,500원| 조회(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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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지리, 과거경관의 이해 기말고사 요약
    1. 지리와 역사의 관계? 지리와 역사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역사지리학 초미의 관심사.공간적 시간적? 지리학&역사학- 진부하고 친숙한 오래 된 학문.- 다루는 현상이 많고 오래되어서 문제점이 많음.- 두 학문을 매치시키는 것이 쉽지 않음. 갈등- 두 학문을 묶기 위해서는 철학적 기반 필요. (제공자 - 칸트)? 역사지리학- 새로운 학문.- 과거?현재?미래 공존- 인류가 출현하면서부터 인류와 지표와의 관계가 학자들의 관심 대상.? Herodotos(헤로도토스) →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Thukydides(투키디데스) → 현지 답사를 중요시 함.? Heylyn(피터 하일린)- 르네상스 시대- 『Micro Cosmos』저술 - 지리학과 역사학의 관계 정의“지리가 없는 역사는 시체와 마찬가지로 생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운동도 할 수 없다.”- 지리에 역사가 빠지면 생명이 있고 운동할 수 있어도 전혀 목적이 없고 안정적이지 못하다.(트렌드?비전이 없음)? Darby- 현대지리학의 기반을 굳힌 인물.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천적이 측면에서나)- 1950년대 활약, 영국.- ‘11C 영국의 역사지리’라는 주제로 연구 모임 조직, 주관. (7개의 보고서→2권의 책)- 역사지리학의 방향 제시 : 역사의 지리적 기초/ 과거의 지리/ 지리 중에 역사적 요소? 중국의 역사지리는 오랜 역사를 가짐.초기에는 연혁지리의 형태, 연혁지리 상당히 발달함.1) 역사의 지리적 기초? 18C- 낭만주의 쇠퇴하고 사실주의 대두.농촌에서의 생활을 감미롭고 풍족하고 건강한 것이라 생각.- 정치사 중심, 사회?경제사는 발달하지 않음.? Michelet(미슐레)- 역사학자, 프랑스사 저술.- “역사는 바로 지리이다.”- 프랑스 지리를 이해하기 위해 답사를 다니고, 여기서 얻은 경험적 지식을 통해 역사를 저술.- “지리적 기초 없이 역사를 구상하는 사람은 중국 산수화에 그려진 인물(허공에 뜬 인물)과 같다.”-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무대가 아님. - “인간과 국토의 관계는 새와 새 둥지의 관계와함.ex) 뉴질랜드 - 인간이 토지를 점유한 역사가 짧아서 자연적 요소가 강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인간과동?식물을 포함한 생물적 역사가 발달함.2. 서양에서의 역사지리학 발전? 역사시대의 지리적 환경이 변화하는데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 역사지리학. (법칙지향적 학문)1) 연혁지리 (연혁 - 제도의 변화)? 초기 지리학에서는 연혁에 초점을 두고 연구 진행.? 행정구역?국토의 변천을 대상으로 하여 연구 진행.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 ex) 면적, 국경선, 분립, 통일 등? 멕클레- 『영국산』저술.- 역사지리지로 내용 中 일부가 지리 관련.- 강역(지역)의 변천 연구. (지배하는 지역)2) 연혁지리에서 역사지리학으로 변하는 점이적 단계 (근대지리학)? 지리학 전반의 발달과정과 비슷.? 칸트- 변화의 모티브 제공.- “지리학은 일종의 경험과학이면서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이다.”- 지리적 현상은 시간의 발전에 따라 변화함. (역사지리학의 맹아 제공)? 훔볼트- “자연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체이다.”-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상호보완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짐.- 전체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의 법칙을 따름.- 『Cosmos』저술. 전체=Cosmos(우주)- 자연은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현재 모습뿐만 아니라 과거의 발전과정을 분리해서는 안 됨.(과거를 토대로 현재가 있음)- 사물의 형성과정을 돌이켜보지 않고서는 사물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음.ex)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지구 자체의 형태에서도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음. (단층...)? K. 리터- 근대 인문지리학의 아버지, 독일.- 『지리과학의 역사적 요소』 저술.- 지금까지 지리는 단순한 기술. (백과사전 적으로)but! 단순한 기술에서 탈피하여 사물의 법칙추구. → 역사적 자료를 인용하여 현실구성요소 간 법칙.? 칸트, 훔볼트, 리터 - 서양의 지리학을 발달시킨 1세대 학자들.? 걸츠- 연구방향 제시, 문헌기록을 이용하여 지표면의 자연현상 변화를 살피는 것이 역사지리학.① 지표를 구국- 『유럽 역사지리』저술.- 당시 지리학 전반이 크게 발전하여 현대지리학이고 정의 내릴 수 있는 발전단계가 됨.그럴수록 과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 역사지리학은 젊은 학문.? Darby? 하트숀- 현대지리학의 방법론 - 철학적 기반, 체계 마련.- 지구를 통일체로 봄.전체 - 부단하게 변화함. (계열적으로 바라보아야 함)- 변화하는 통일체의 역사적 연구 → 지역적 특성에 초점.-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흥미는 ‘과정(Process)’ 자체에 있음.- 지리학자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임. → “과거는 현재의 열쇠이다.”3. 역사지리학의 방법론1) 과거에 접근하는 방법① 담화형식 (과거→현재)? 매력적이지만 위험한 형식.? Narrative 형식 - 인과관계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풀어감.? 변화를 기술하는데 용이? 단점- 과거 자료들이 시기적으로 적절히 배분되어 있지 않음.- 일관된 서술이 힘듦. (계기적으로 이어지지 않음)-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한꺼번에 풀어가기가 쉽지 않음.→ 관심있는 주제 선정(취락, 교통...) - 학자의 능력이 중요.② 소급 (현재→과거)? 과거의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취하는 방법.? 우리가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관점에서 우리들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는 주제 선택.? “과거는 현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현재는 기록 풍부, 경관으로 남아있음. 경관은 일상생활을 통해 보고 있음.but! 과거는 문헌자료 부족, 현재에 더 잘 이해할 수 있음.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과거로 돌아가 하나하나 체크.? 지리적 관성의 침투.2) 방법론 中 12가지① 시간단면? 공간적인 단면이 지세 상에 많이 나타남.? 시간 요소가 중요.? 지리적으로 중요한 사상이 출현하거나 발전하는 단계.? 풍부한 자료가 있는 시기를 골라내서 지역의 종합적 연구 가능.? 현재 지역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시간단면상의 지역 연구. (선호하는 연구방식)? 단점- 생기?생동감이 없음. (박물관의 진열실처럼)- 어진 환경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생활방식 개선.(자신만의 내적인 에너지에 의해 변화)but! 어려움.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음.- 집단이 이주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 수반.- 새로운 속성이 외부로부터 도입. (영향을 주거나 근본적인 수정)? 문화의 적응성과 역동성에 기반.? 고대인 - 주어진 환경 내에서 기술적 수준을 변화시키며 생활양식 변화.⑩ 이론적 모델 적용? 생태계(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분석) 모델 분석.? 전통적으로 가져왔던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모호한 부분에 적용.? 영국에서 활발. (구석기에서 중석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자원이용 방법의 변화와 크게 관련됨.? 취락의 역사에서 교회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함. (중세시대)⑪ 경관 유산의 보존? 풍경, 관광수입이 되기도 함. (지리학에서는 학문적 접근)? 하나의 가시적 역사. (보존 된 경관 - 지리학적 자원) 물질로 변화된 역사.? 경관을 보존하는 사람들이 응용 역사지리학의 도움을 받아 계획적으로 보존?응용? 학문적 관점에서는 경관을 원래의 상황으로 재현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음.역사적 의미, 가시적 역사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⑫ 환경인식, 환경지각의 관점? 인간 집단의 환경에 대한 인식. (같은 집단이라도 다른 인식)? 환경심리학 - 환경에 대한 인간 집단의 인지태도를 다루는 분야.? 과거 사람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에서 과거인의 환경에 대한 인식?태도 중요. (과거를 과거 그대로 받아들임)? Lynch - 경관은 집단의 역사와 이상을 보존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돕는 체계.인류 특정 집단의 가치관, 이상, 이념 보존.그러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인식들이 가시적 역사 속에서 구현되어야 함.4. 경관1) 경관이란?? 경관은 지리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에서도 관심 주제.? 지리학의 큰 추세를 이해하는 데 경관의 이해 필요.? 지리학적 사상 - 종합체적인 특성을 지님.? 경관은 전체적으로 나타남. (초기에는 개별적으로 바라봄)? 경관은 시각적 접촉이기 때문에 형태 중시→ 관광(정나라 - 특징적인 곳)정나라 - 중국 중원에 위치, 문화발달, 다른 나라와 다른 모습을 보임.- 과거 사대부들은 나라로 나가 지식을 활용하고 자기의 학식을 과시하기를 원함.그 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다니며 정세가 좋은 곳에서 자기의 뜻을 펼치기 바람(ex) 노자) → 관광? Landschaft- 근대지리학 이론이 활발한 독일에서는 Landscape를 Landschaft라고 함.- 영역적 단위(범위), 보통 지구 또는 지역을 의미.- Land(육지)보다 범위가 좁음, 보다 제한된 공간.- 지리학자들이 연구 시 지리학적 단위로 이용.- 칼 사우어(미국)는 Landschaft를 역사학의 시대 개념에...지리학에서의 단위(역사학의 시대와 같은) → Landschaft? 경관이라는 용어는 독일에서 근대지리학이 발달하기 전에 이미 서양에서 등장한 용어.지도풍경화부호로 표시그림으로 표시투영법투시법3차원의 세계를 2차원으로 표현? 15~16C 르네상스시기에 유럽의 인문주의자들의 풍경화에서 출발.? 우리는 어떤 지역을 이해할 때 지도라는 도구를 이용함.? 풍경화로서 지역을 지도와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지도, 풍경화를 걸어 둔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의미.적극적인 의미로 세계?지역을 소유하고 싶다, 친근해지고 싶다.? 풍경화- 시각적 이데올로기, 경관에 부르주아의 특성 반영.- 부르주아는 좋은 경관을 많이 소유 → 富3) 인물별 경관에 대한 견해? 훔볼트- 시각적 인상, 경치의 아름다움을 표현.- 초기 지리학자들은 지리학을 과거로 성립시키기 위한 방법론 고뇌.→ 법칙을 세우자!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 초기에는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를 객관적?분석적?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함.- 자연을 객관적으로 이해 - 사물을 나와 떨어져 있는 개체로 인식.- 지리학의 결과가 축적되면서 경관을 미약적?전체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생김 → 관찰자의 주관 개입.- 경관은 내용을 갖는 것,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그대로 구현됨.- 경관을 text로서 인식하게 됨,
    학교| 2009.12.22| 10페이지| 1,500원| 조회(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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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 일대 답사보고서 평가A좋아요
    정동지역 경관의 지리적 해석특정한 장소의 경관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에 따른 사회적, 역사적 배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고 변천해 온 산물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관이든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된 필연적 이유가 있고 이러한 이유와 관련된 경관의 공간적 구성과 지리적 함의에 대해 파악해 가는 것이 역사지리학이 다루는 주제일 것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정동지역의 경관 적 특징과 역사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정동은 조선시대 태조의 둘째 왕비였던 신덕 황후의 무덤인 정릉이 지금의 정릉 동으로 옮겨가기 전에 이곳에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근대화의 역사기 시작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동에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아우르는 근 현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건물들이 많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치안유지법을 집행한 옛 대법원 건물은 지금 아름다운 미술품을 전시하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쓰이고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서구 문물이 물밀 듯 밀려오면서 그 선두에 있었던 교회와 학교들도 이 곳 정동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교회 건물로는 독립운동을 도왔던 정동제일교회 등이 있다. 1887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세워진 근대식 학교 배재학당과 여성 교육의 요람인 이화학당 등은 당시 신교육을 대표하는 교육 기관들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의 현장인 중명전과 일본의 위협을 피해 고종 황제가 피신했던 치욕의 장소 구 러시아 공사관은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는 듯 쓸쓸하고 고즈넉한 모습으로 서 있다.우리의 답사코스는 덕수궁돌담길-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 동관- 정동제일 교회- 이화박물관- 손탁호텔 터- 구 러시아 공사관 이었다. 먼저 덕수궁 돌담길. 길을 가득 메운 만추의 단풍은 메마른 감성을 다시금 자극한다. 관광지인 만큼 외국인도 꽤나 눈에 띠고 이화여고, 예원학교 등 이 주변의 학교 생들도 많았다. 또한 걷다보니 인도 상에 정동지역의 랜드마크를 표현한 구조물도 볼 수 있었다. 특정지역을 가면 그 지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지역의 특성화된 문화를 주제로 지역을 홍보하고 더 나아가 수익을 올려 지역발전에 기여하는 도시마케팅의 개념이 적용된 사례를 발견 할 수 있는데 정동지역의 인도에서 발견한 랜드마크도 이러한 지역마케팅의 일환으로 생각할 수 있다.다음으로 서울 시립미술관을 거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답사하였다. 서울 시립 미술관은 정초석만 보고 경유했다. 이곳은 광복 후에도 1995년 까지 대한민국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면서 현대사의 부침을 함께한 공간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건물의 파사드가 보존되어 있는 점이었다. 이 파사드는 그 당시의 사조를 반영하여 이 건축물이 몇 년대에 세워졌는지 어떤 특징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시대에 지어진 건축 양식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과거 경관의 특징적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과거와 현재의 건축양식을 비교할 수 있었다.다음 답사지는 배재학당 동관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 이었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배재 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예전에는 이 건물 말고도 몇 동이 더 있었고 지금의 배제빌딩 터에는 운동장이 있었다고 한다. 1885년 7월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가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에 고종은 1886년 6월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배제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간판을 써 주었고, 그 해 10월 학생 수는 20명으로 늘게 되면서 더욱 확장되어 처음에는 한옥이던 건물이 지금의 벽돌 건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역사박물관으로 바뀌어 당시 근대 교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주변에 지어져 있는 배재 빌딩이 이곳의 터를 배려하지 못한 배치와 규모를 하고 있는 듯 해서 아쉬웠다. 근대 건축물을 배려하였다면 지금처럼 볕이 들지도 않는 공간을 만들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 배재학당의 상설전시관, 기획 전시관 등을 두루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과거 유산의 보존과 연구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사회, 역사적 시대 배경과 이러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형성된 과거 경관을 복원하는 것은 인간이 역사적 존재이므로 과거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여 더욱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하며 특히 지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인문지리학의 여러 연구는 주로 현재의 세계와 여러 지역에서의 인간 활동, 사회,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므로 역사적 동태적 규명을 필요로 하고 이런 까닭에 인문지리학의 연구에 어느 정도의 역사지리학적 조작을 덧붙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거경관을 연구하는 역사지리학은 과거시대의 지리학적 연구라는 점에서 지리학의 한 분야임과 동시에 인문지리학에서 필요한 연구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배재학당 동관 이후에 답사한 곳은 정동제일교회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1898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사적 256호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동제일교회가 정동의 입지와 건물외관상 신자들의 신분 때문에 우리나라 최고의 하이처치로 불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공간 입지의 특성에 따라 장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정동은 사대문 안에 위치하여 도시의 중심부에 가깝고 과거 개화기나 일제강점기에 높은 신분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위치한 교회는 상대적으로 고위층을 신자로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거입지이니 농업입지 공업입지이니 하며 배우는 개념들을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다음으로 답사한 곳은 이화학당 씸손 기념관이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조선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 라는 이름은 명성황후로부터 하사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처음 세워진 교사는 한옥이었는데 두 간방에서 시작해서 후에는 190간이 넘는 한옥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 이화박물관과 이화여고의 동아리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경관이 공존 하는듯한 모습이 신선했다. 우리가 답사할 당시에는 공사를 하고 있어 아쉽기도 했으나 건물외관상에서 당시의 건축양식을 반영하여 복원한 듯한 인상을 받았고 과거 경관상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과학| 2009.12.22| 3페이지| 1,000원| 조회(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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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납토성 답사보고서
    풍납토성은 거대한 판축토성으로 그 규모와 이를 축조하기 위해 동원된 인적, 물적 자원을 고려할 때 한성백제의 왕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백제 몰락 때 보이는 북성과 남성의 2성 체제를 구축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러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자꾸만 훼손되어 가고 있다. 이번 보고서에서는 이러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역사적 의미와 발굴현황에 대해 알아보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입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이번 답사의 첫 번째 코스는 풍납토성이었다. 풍납토성은 평지성 토성으로서 백제의 도읍이었던 위례성으로 유력한 장소이다.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초기 백제시대의 집자리와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풍납토성에는 기원 전,후 시기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히 일반 가옥이 아닌 국가나 왕실이 주체가 된 각종 제사시설이나 특수 건물지가 발견되고 있으며 막대한 양의 토기와 기와류, 전돌 등을 비롯해 사치품인 중국제 물품 등이 출토되었다. ?라서 풍납 토성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백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계급의 최고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풍납토성은 한강변의 평지성으로 인근의 몽촌토성과 이성산성, 춘궁리 일대의 고적과 남한 산성등 지형지세와 성곽의 존재를 연계하면 고대 도읍지로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왕릉 규모에 해당하는 적석총이 집중되어 있는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시대가 내려오는 방이동 고분군 등 또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증거의 하나로 보여지는 것이다. 아울러 풍납토성의 축조연대를 뒷받침하는 탄소연대측정에 의한 분석 결과는 기원 전후 시기부터 5세기 말에 이르는 한성백제 전 시기에 걸친 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그 중심연대가 기원 전 2세기부터 기원 후 3세기에 이른다는 확인 결과는 풍납토성에 기원 전에 이미 사람들이 정착하였고 늦어도 3세기 전후한 시기에 성벽이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풍납토성 내 집자리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토기류이고 철기와 석기는 소량이었다. 토기의 큰 특징은 철기시대부터 줄곧 사용되었던 경질무문토기와 같은 재래식 토기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타날식 토기와 회색 무문토기 등의 사용이 보편화 되는 새로운 기술의 유형이 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풍납토성 축성 시 흙을 불에 찌는 방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을 수직으로 잘라 단면을 보면 진흙을 일정한 두께로 층층이 다진 판축기법으로 쌓았는데 흙을 불에 살짝 구워 견고하게 했다. 또한 흙으로 성벽을 쌓을 대 10cm안팎의 두께마다 한 번씩 나뭇잎, 나무껍질, 볏짚 등과 같은 식물유기체를 얇게 깔로 뻘 흙을 교대로 하여 견고하게 판축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성벽 최하층에서 뻘 흙이나 점성이 강한 흙을 깔아 유동성을 확보하여 성벽이 붕괴되거나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했다.풍납토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한성백제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며 주거지 규모와 출토유물의 위상 등에서 주변의 다른 백제유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현대연합주택지와 경당지구의 육각형 주거지와 대형 건물지, 그리고 토성 동벽의 절단 발굴을 통한 유구 확인 결과 풍납토성이 그 동안 논란되어 왔던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이를 밝혀 내기 위해 문헌 중심의 고대사를 비롯하여 고고학적 발굴 증거와 신화학, 민속학, 인류학 등 관련 학문간의 공동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풍납리 토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한성백제시대 불교 전래를 입증하는 절터,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수많은 문화재,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연결된 관방시설 등을 연게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성립과 발전을 비롯한 백제 도성구조와 생활상 등에 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려 현재의 유적보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발굴 후 기록만 남기고 복토하거나 그 위에 고층건물을 짓는다면 20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역사의 유구함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지 못할 것이다. 반면 유적을 잘 보존하여 교육,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우리역사의 유구성을 바탕으로 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며 앞선 인류문화의 한 유형을 이끌어온 우리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풍납토성 성벽에서 발표자의 설명을 듣고 영어체험마을(유물전시실)에서 관계자의 설명을 들은 후 몽촌토성을 향하였다.몽촌토성은 흔히 토성이라 불려지고 있지만 순수한 의미의 토성은 아니다 기본적으로는 남한산(청량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야산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구릉을 이용하고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판축법을 써서 성벽을 쌓은 성이다. 즉,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판축법을 써서 성벽을 쌓은 성이다. 즉 구릉의 정상부를 바깥쪽으로 보축하여 서, 남, 북벽이 이루어졌다. 동벽의 경우도 구릉을 다라 곳곳에 보축하였으나 낮은 지대에는 흙으로 안팎을 판축하여 쌓았는데 그 성벽의 견고함이 풍납토성에 뒤지지 않는다.몽촌토성은 늦어도 3세기 말에 축조되어 5세기 중엽까지 걸쳐 사용되었다. 또 그 지리적 위치와 규모, 축조 방법, 목책 등이나 수많은 철촉 ,골제찰갑, 와당, 벼루 등을 고려하면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성, 수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는 지배세력 집단이 거주하였을 와가 구조는 나오지 않았으나 고식의 와당이나 기와편 그리고 중국제로 보이는 벼루 등으로 미루어 지배층의 주택이나 공공건물 등의 존재를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아마도 이들 유구는 아직 발굴 조사되지 않은 성 내부의 저지대에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삼국시대 대부분의 도성들이 주변 3-4km 이내에 대규모 고분군을 가지고 있고 산성 등 방어성을 배후기지로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 가락동 고분군과의 관계, 이성산성을 비롯한 주변 산성들과의 관련 속에서 몽촌토성을 백제 도성의 유력한 후보지의 하나로 꼽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대체로 4세기로 보고 있다. 물론 몽촌토성은 이보다 앞선 시기에도 초기 백제의 한 거성으로서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 지지만 본격적이 도성으로서의 변모는 대체로 4세기로 추정된다.
    자연과학| 2009.12.22| 3페이지| 1,000원| 조회(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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