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운영전」가상인터뷰1. 「운영전」 기본줄거리선조 34년(1601년) 봄, 청파사인 유영이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의 옛집인 수성궁 터에 들어가 홀로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안평대군의 궁녀였던 운영과 운영의 애인 김 진사를 만나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을 듣는 이야기이다.풍류를 좋아하던 안평대군이 10명의 궁녀를 별궁에 두고 시와 풍류를 배우게 했는데 그 궁녀 중 한명인 운영은 어느 날 안평대군을 찾아온 김 진사에게 반하고 둘은 서로 연정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운영은 궁 밖으로 빨래하러 나가는 틈을 이용하여 김 진사를 만나 회포를 풀고 이후 밤마다 궁궐 담을 넘어 들어오는 김 진사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에게 이 사실이 발각돼 옥중에 갇힌 운영은 자결하고 김 진사 또한 운영을 따라 죽는다. 김 진사와 운영은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며 자신들의 사랑을 세인에게 전해 달라고 당부한다. 유영이 다시 취중에 졸다가 깨어보니 김 진사와 운영의 일을 기록한 책만 남아 있었다. 유영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다.2. 「운영전」선택 이유이 소설은 고대 소설 중 애정소설의 갈래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고대 애정 소설에는 한국에서 계승되어 온 전통적 양반사회의 문화적인 요소, 특히 한국적인 남녀의 만남의 모습이 원형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것에 있어 그 커다란 의의가 있다. 또한 애정소설은 한국 민족 정서와 삶을 대표하는 장르의 대표 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가장 행복하고 친숙한 정서적 테마라고 볼 수 있다.주인공인 ‘운영’과 ‘김 진사’에게만 편중되어 있지 않는 ‘자란’, ‘특’, ‘안평대군’, ‘무녀’ 등 각각의 개성 있는 인물 또한 스토리텔링 하여 각색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좋은 요소이다. 또한 이 캐릭터들은 주동인물, 반동인물 등으로 나뉘어 선과 악의 대립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이야기 전개에 흥미성을 더해준다. 또한 「운영전」은 여타 고대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요소들을 갖췄는데 여러 명의 화자 즉 ‘유영’, ‘운영’, ‘김 진사’가 각각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액자형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다른 고대 애정소설과는 달리 유일하게 비극적인 결말을 갖는 소설로서 이는 마치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는 것 같다.현재 전해지는 수많은 고전 소설 중 조선조 유일의 비극적인 정황을 기조로 한 소설로서 지은이는 알 수 없으나 배경장소의 정확한 위치와 실존했던 인물이 글 중에 등장하는 작자미상의 애정소설로서 논의 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작자미상인 작가를 인터뷰이로 삼아 가상인터뷰를 진행 할 것이다..3. 「운영전」작가와 가상인터뷰나 :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유일한 비극적 소설인 「운영전」의 작가를 인터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작가(이하 작) : 안녕하세요,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과 인터뷰 하게 되어 저 또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나 :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happy ending인 반면 「운영전」은 비극으로 끝나는데요, 의도가 궁금합니다.작가 : ‘운영’의 원한에 찬 죽음은 애정행각의 당위성과 그 죽음의 필연성에 의해 비장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대군의 엄명에 불복하는 애정행각은 인간 성정의 본능적 욕구에 의한 극복의지적인 행위라고 하는 점에서 당위성을 얻게 되고, 또 그 죽음이 신분적 윤리적 규범의 절대가치가 고수되는 조선조의 사회 상황에 직면하여 부득이 좌절하면서도 결코 그것에 승복하지 않는 불복의지의 필연적 결과라는 점에 의해 비장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게다가 ‘운영’의 자결을 초래한 억압적인 신분 윤리적 규범은 당대인의 현실적 삶의 질곡이었으며, ‘운영’이 추구한 애정은 바로 인간 본능적인 욕구의 하나로 인간이면 누구나 절실히 공감하는 인간사회 공통의 문제라는 점에서 운영의 죽음은 비극적 진실로 승화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애정을 성취함으로써 보다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운 인간적 삶을 실현하고자 했던 운영의 인간적 의지는 비장한 죽음을 통해 비극적 진실로 승화하고 싶었습니다. 비극적 결말로 인하여 감동이 극대화 되는 것을 도모한 것이죠.나 : 「춘향전」의 ‘춘향’처럼 ‘운영’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묘사되는데요?작 : 네 맞습니다. ‘운영’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억압하려는 시대적인 인습과 제도로 대변되는 세계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인물입니다. 여성의 삶을 박탈당하고 궁 밖으로는 조금도 나갈 수 없는 궁녀의 삶이란 여전히 억압되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진사’를 만나면서 자각하게 되고 그녀는 ‘진사’와 만난 첫 순간부터 자신의 사랑에 매우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죠.소극적으로 대처했던 ‘진사’와 비교하여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여성인물을 긍정적으로 그리려는 의식이 작용한 것이며, 더 나아가 여성의 자아실현을 강조한 것입니다. 춘향이처럼 말이죠. 하지만 운영은 결국 별궁에 갇혀 자살합니다. 이것은 여성의 삶을 추구했던 운영이 결국 조선조 봉건 사회의 억압된 질서의 힘, 현실에 굴복하여 욕망이 좌절되는 아픔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차용하여 소설의 전달성을 극대화 시키고 싶었습니다.나아가 궁녀들이 있죠. 운영과 함께 궁에서 안평대군에게 글을 배우던 궁녀들은 당시 여성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논리적이며 활발한 모습을 보입니다. 여러 차례 논리적인 논쟁을 벌이며, 운영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된 그들은 운영의 사랑을 도와주게 되고 안평대군에게 운영의 사랑의 죄가 아님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안평대군의 용서를 받아내는 노력을 합니다. 그러한 궁녀들을 통하여 이상적인 사회는 논리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나 : 작품에 관한 질문 드릴게요. 가장 궁금한 것은 왜 안평대군이 궁녀를 열명이나 모아서 시와 풍류를 배우게 한 것입니까?작 : 안평대군은 당시 궁 안에만 갇혀 있던 궁녀들을 위하여 문학성을 길러주고 나아가 자신과 함께 문학을 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고자 함이었습니다. 제가 시대상을 반영하여 안평대군이 궁녀들에게 시와 풍류를 배우게 하는 등의 모습으로 궁녀들이 여러 방면에서 많은 경험과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드리는데 이러한 면에서 조선시대에 이미 개방적인 면모가 나타났음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또한, 특이 천한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김 진사는 모든 면을 특이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엄격한 종속관계를 벗어나고 있는 사회상을 반영 하였습니다.나 : ‘종속관계’라는 것은 시대상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작 : 사실 저도 봉건적 사회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운영’과 ‘진사’가 수성궁에서 ‘유영’을 만났을 때에 그들은 계집종에게 술과 음식을 차리고 붓과 벼루를 가져와 시중을 들게 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 그 당시에는 여전히 봉건적인 계급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소설이 창작된 당시는 신분제가 동요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가난해서 형편없었던 의복 탓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후원으로 숨어들었던 ‘유영’이나 ‘특’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하던 ‘진사’를 통하여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여 무능력해진 양반을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정리하면 저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비판하고자 하였지만 대안책을 제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저 또한 봉건제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환경시의 첫걸음 ‘서울은 안녕한가’생태학적으로 읽기Ⅰ. 서론-1Ⅱ. 작가소개 및 시집소개1. 작가소개(고형렬)-12. 작가의 시세계-43.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 의의-5Ⅲ. 생태학적 관점으로 텍스트분석1. 1) 시 분석-52)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63) 작품에서 주로 다루고자하는 생태 환경적 문제-72. 1) 시 분석-72)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93) 작품에서 주로 다루고자하는 생태 환경적 문제-93. 그 외 작품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1) 태양에너지(1)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10(2) 생태환경문제-112) 오존층을 위하여(1)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12(2) 생태환경문제-12Ⅳ. 결론-13Ⅴ. 좌담 내용 및 역할 분담1. 좌담내용-142. 역할 분담-15-16Ⅰ. 서론(문제제기 및 연구 목적)생태시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생명의 개념, 즉 생태계 중에서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시를 말한다. 따라서 생태시란 생명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시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시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하는 시를 가리킨다. 때문에 이를 달리 생명시라 불러도 무방하다. 우리는 그래서 고형렬의 「서울은 안녕한가」) 라는 시집을 연구하여 생태시의특징을 파악하고 생태시가 담고 있는 의의와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과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려고 한다.Ⅱ.작가소개 및 시집소개1. 작가소개고형렬(高炯烈)출생 1954년 11월 8일 (전남 해남)데뷔 1979년 시 '장자'학력 속초고등학교수상 2009 제55회 현대문학상 시 부문2006 제8회 백석문학상2006 제38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06 제2회 일연문학상2003 제3회 지훈상 문학부문경력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 겸임교수시평사 편집인고형렬은 1954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여 속초 사진리에서 성장하였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등이서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1995년 최초의 환경시집「서울은 안녕한가」에서는 환경의 죽음과 죽음의 깊이가 용호상박하며 긴박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 속에서 고형렬의 시는 날렵함을 지니게 된다. 그가 서울의 죽음과 변증법적인 화해를 이루는 계기로 될 것인가. 비극적 인식이비극정 화해를 낳는 것. 환경의 죽음이 그렇게 죽음의 기이 속으로 포괄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고형렬이 놓여있다는 듯하다.)고형렬의 시세계는 민족과 통일을 노래할 때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할 때도 목소리가 크거나 거칠지 않았다. 다만 조용하면서도 힘을 가진다. 이런 힘은 시인이 세계를 한없는 연민과 슬픔과 따스함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다. 그것은 멀찍이 떨어진 관조의 자세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이웃의 일처럼 생활로써 살아내는 시각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루는 북한 땅은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와 친숙하면서도 쓸쓸한 공간이 되고(『해청』)), 전생이나 후생의 일들은 세밀한 묘사와 미시적인 것들에 대한 애정으로 현재 진행형처럼 생생하다(『성에꽃 눈부처』)). 고형렬 시의 또 하나의 힘은 시의 대상이나 생활을 묘사할 때 화자의 개입을 자제함으로써, 독자가 독서하는 행위 자체로 시 속의 사건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들을 읽는 순간 우리는 시 속의 인물이 되어 같이 먹고 느끼고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사진리 대설」)).3.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 의의고형렬의 「서울은 안녕한가」는 서울의 물?공기?먼지?교통?쓰레기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환경문제들 주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은 과연 안녕한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는 시집이다. 1991년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집으로 경제발전과 개발에 눈이 멀어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현대의 생태적 위기는 인간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기인한 것이다. ‘자연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세계’라는 단순화된 1차원적 사고를 하기 때문 때 그새 오염된 하천은 당연히 본래가 그랬던 것 인양 생각하고 이미 죽었다고 표현을 한 것 같다. 우리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그 기간에 하천이 이미 죽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인간이 성장해가면서 하천에 무관심함으로써 결국 하천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 ‘그 곳’이라고 지칭한 죽은 하천에 아무것도 살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아이, 어른할 것 없이 모두 벼 값이나 결혼 걱정을 할 뿐 하천에 무관심한 나머지 오염되어가는 하천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무관심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얼음이 얼면 어는가 보다, 빗물이 흐르면 흐르는가 보다와 같이 ‘~는가보다.’ 라는 표현을 쓴 부분인 것 같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관심이 없는 대상에 대해 흔히들 말을 할 때 예를 들어 “밥 먹나 보지 뭐.”, “지금 오는 중인가 보지.”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알몸으로 목욕을 할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답던 한국의 하천은 이제 도시의 하수도에서 더럽고 오염되어 흐르고 있다면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종합적으로 시에 대한 분석을 정리해보면 시인은 하천이 이미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 하천에서 어른도 아이도 살지 않고, 또한 사람들은 얼음이 얼고 빗물이 흐르는 자연의 과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자신의 이익이 되는 부분에만 관심이 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연의 변화에 무관심하다보니 이미 하천이 변해있을 때에는 본래가 더럽고 냄새나는 물만 흐르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시는 하천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보다는 인간들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기주의적인 사고를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은 제목에서 말한 그대로 하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들이 그냥 방치한 하천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더럽고 오염된 하천으로 변해간다고 서술하면서 인간의 지나친 욕망을 비판하고 있다. 흐르고 있는 하천을 두고 이미 죽었다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큰 적을 숨겼던 조국은이제 인간과 자연을 돌보라국토와 생명을 보호하라.이 시의 시작은 적이 사라지면서 더 커다란 적이 나타났다고 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적이 사라졌다. 그런데 더 커다란 적이 나타났다. 여기서 독자들은 사라진 적과 커다란 적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며 이 시를 읽어나갈 것이다. 그 다음 부분을 보면 그것은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그것’은 더 커다란 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커다란 적은 새로 생겨난 적이 아니라 이념의 적 속에 갇히거나 숨겨져 온 적이라는 점을 되짚어 주고 있다. 여기서 이념이라는 시어를 씀으로써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를 썼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서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고형렬 시인이 을 썼을 당시의 시대는 1990년대로 민주화 시대이다. 민주화 시대인 것을 감안해 봤을 때 우리는 이 시에서 쓰인 이념의 적으로 군사독재, 반공 등의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시의 다음 부분에서 그것은 사실은 적이 아니고 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오랜 우리들의 적이라고 하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적이라고 말한 사람인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적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타이와 공장을 예로 들어 결국 인간의 욕망이 커다란 적이 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조국은 분단된 한반도 뒤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는 무서운 적을 숨긴 것이다. 그래서 시의 끝부분에서 이러한 조국에게 숙제를 낸다. 인간과 자연을 돌보고, 국토와 생명을 보호하라고 말이다.시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볼 때 우리가 이 시를 그냥 가볍게 보았더라면 ‘적’을 ‘문제’정도로 봐도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썼을 1990년대 이전은 민주화 문제가 대두되었던 시기로 적이라고 말한 사람이 원래 우리의 적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민주화 문제에 진짜 적은 환경파괴에 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진짜의 적이 환경파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파괴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적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시의 일차적 목표가 된다고 한다.3) 작품에서 주로 다루고자하는 생태 환경적 문제생태환경문제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다루고 있기 보다는 환경파괴라는 큰 범위에서 환경파괴를 한 인간들의 욕망과 그 욕망을 교묘하게 이용한 조국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환경문제는 이 시를 썼을 당시의 시대에 발생한 환경문제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1988년 이후로 환경주의가 등장하였으며, 1990년대 난개발과 도시정책에 대한 반팔, 그린벨트 해제와 재산권 문제 간의 분쟁이 맞물리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가 쓰인 1990년대가 환경문제가 범지구적인 차원의 문제로 대두되었을 당시였는데 군 기지 환경오염, 플라스틱 산업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3. 그 외 작품 생태학적 관점으로 분석1) 태양에너지핵발전소에서 오는 전기는눈이 아프다핵쓰레기를 내는 핵발전소 전기는왜인지 모른다방사능 물질이 머리 위에서마치 수십 년을 통해서쏟아지는 것만 같다그 전등 아래에서 일하거나공부하고 있는 학생이전혀 모르게태양에너지를 사용하는 겨울은허리도 어깨도더없이 따뜻할 것 같다이 세계의 모든 아이들과나의 영원한 가족들이태양이 파괴만 않는다면100억 년을지구는 존속할 것이며배도 따뜻하고이 세계는 유일한 천국이리어떤 종교와 이념에 앞서서반자연의 에너지는뼈가 아프고 피가 마른다유전자는 상처를 입는다(1) 생태학적관점으로 분석핵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에 노출되면 여러 가지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받는다. 시를 보면 핵발전소에서 오는 전기는 눈이 아프다고 했다. 여기서는 특정 부위인 눈만을 들었지만 사실은 몸 전체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핵발전소에서 오는 전기가 핵쓰레기를 낸다고도 표현했다. 여기서 핵쓰레기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쓰레기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필요 없고 좋지 않은 물질인 것은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방사능인 것이다. 방사능 노출의 양이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손을 못 기와
김광섭의 생태문학-「성북동 비둘기」와 「금붕어」를 중심으로I. 서론1II. 작가 소개 및 작품분석11. 작가소개12. 작품분석31) 성북동 비둘기42) 금붕어5IV. 결론8(참고문헌)9Ⅰ. 서론김광섭은 생태문학의 맹아가 싹트던 1960년대, 그의 시집『성북동 비둘기』를 통하여 무분별하게 개발되는 사회풍토를 비판하고 있다. 이 시집 속에는 「산」, 「성북동 비둘기」, 「무제」 등 그의 정신의 특질인 근원에의 향수와 사회비평의식이 격렬히 맥동하고 있다. 현대적 의미의 관념을 간직하면서도, 관념어의 구사나 추상적 표현이 말끔히 가시어 구체적인 표현의 아름다움과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김광섭에 대한 문학 연구는 그의 활동 시기인 1930~1960년에는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 김광섭이 주목 받게 된 것은 1969년 발간과 더불어서 이다.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시적 평가를 받고 있는 후기시에 치중하고 있다.정태용은 김광섭을 순수문학적 성향이 강한 시인으로 언급하면서 시의 특성을 관념성과 자기성찰, 자기 응시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특성은 현실도피적인 성향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김광섭이 사회적인 시를 쓸 때 더욱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김현승등은 김광섭 시에 나타난 관념성이 시대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김현승은 현대시가 사상성을 강조 할 수밖에 없으므로 관념을 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시적표현이 관념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다.반면 김윤식은 한국시단에서 이질적이고 빈약한 관념성을 김광섭이 잘 보여준다고 하였다. 1930년대 시가 서정적이거나 모더니즘의 시에 편향 되어있던 것과 차별을 둔 것에 가치를 둔 평가 이다. 신경림은 김광섭의 관념성이 시에 대한 상호 모순적 가치에서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순진무구한 자세와 의지적인 모습이 서로 대조적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이 중 생태문학의 관점에서 「성북동 비둘기」와 「금붕어」를 통하여 자연에 대한 그의 관점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Ⅱ. 작가 소개 및 작품분석1. 작가소개1905 9월22일, 배우다.1915 경성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다.1917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읍내에 있는 서당에서 다시 한문을 배우다.1919 이학순과 결혼하다.1920 서울 중앙고보에 입학,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때 중동학교로 편입하다.1924 중동학교를 졸업, 일본에 건너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다.1926 와세다대학 제 1고등학원 영문과와 동경상대 예과에 합격, 영문과를 택하다.신입생 환영회에서 이헌구(당시 불문과 2년 생)를 만나 함께 자취 생활을 하다.1927 제 1고등학원 조선인 동창회 誌의 청탁으로 時「모기장」을 발표하다.장녀 眞玉 태어나다.1929 제 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다.1932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다1933 모교인 중동학교에 영어교사로 취임하다.신문과 잡지에 평론과 시를 발표하다.1936 장남 在玉 태어나다.1939 제 1시집 『憧憬』간행하다.1941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체포 구속되다.1944 3년 8개월 만에 출옥하다.1946 민중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다.조선신문인기자협회 총무부장에 취임하다.미군정청 공무국장에 취임하다.미군정청 해체로 민중일보로 복귀하다.1948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에 취임하다.1949 제 2시집 『마음』발간하다.1950 『文學』 창간호 발간, 1집 발행시 6?25 동란으로 중단하다.피란 중 대전에서 대한신문사장에 취임하다.1951 한, 중 문화교류를 위해 자유중국을 시찰하다.대통령 공보비서관 사임하다.1952 경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시론?평론?문예사조사?수필론 등을 강의하다1956 자유 문학을 발행하다1958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하다.1962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로 선출되다.1964 자유문학이 운영난으로 휴간되자, 정신적 타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이다.1965 서울 운동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가 뇌출혈로 졸도, 국립의료원에 입원하다.1969 제 4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발간하다.대한민국 문화 예술상을 수상하다.1970 국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되게 되었다. 경제구조의 전환과 함께 경제규모도 크게 확대되어 GDP 규모는 1962년의 23억 달러에서 1995년에는 4,554억 달러로 증가하였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62년의 82달러에서 1995년에는 10,136달러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1996년 말에는 선진국들의 모임인 OECD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경제규모의 확대는 선진국에서 대부분 백년, 2백년이 소요되었다는 점을 감안 때 우리나라에서 30여년 사이에 달성한 것은 환경측면에서는 많은 시사점을 지닌다. 한국 사회에서 환경 파괴 문제는 1960년대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60년대 이후부터 근대화, 도시화의 가속화 속에서 경제적 도약을 명분으로 대규모의 자연파괴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재개발이 시작되었던 1960년대에는 환경오염은 사회 문제 라기 보다는 공업발전의 상징으로 환영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1960년대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울산 공업탑의 비문을 들 수 있다.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명의로 되어있는 탑비에는 ".... 제2차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어 오염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열기 속에서 환경 파괴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실천이 이루어진 것은 근래의 일이다. 특히 문학에서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생태문학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생태계의 모든 구성원이 가진 생명의 가치를 인식하고 다양한 생명체의 공존을 지향하는 생명중심적 사유는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인간중심적 사고와 대립한다.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자연을 전체가 아닌 한 개체인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러한 사고는 자연을 사물화하는 결국 생태학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중심의 문화체계, 소비적 욕구를 생산하는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한 생활양식의 총체적인 변형이 요구되는 것이다.근본적으로 생명체는 삶을 추구한다. 자연과 인간은 생명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의 관념과는 달리 인간을 자연을 일부, 한 측면으로 보는 동아시아를 지배해 온 철학의 모습이 김광섭에서 잘 나타난다.시는 궁극적으로 각 작품마다 제각기 완결을 이루지만 시인의 생애라는 통시적인 면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시적 생애는 어느 한 시점에 해당 되므로 작품은 시인의 인식에 따라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김광섭은 자신의 속한 시대의 요구에 시의 적절하게 대처해 나갔고 이를 시로서 체화 했던 시인이었다.「성북동 비둘기」는 도시화의 부정적인 면을 그린 시로 김광섭의 대표작이다. 또한 「금붕어」는 1970년대 자연을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두 편의 시를 통하여 김광섭의 생태 의식과 그것이 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겠다.1) 성북동 비둘기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사람 가까이사람과 같이 사랑하고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성북동 비둘기」全文성북동 비둘기는 1970년, 개발로 인한 자연의 파괴와 당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이다.1연 1, 2행은 사람이 살 곳(번보여준다. 2연은 채석장의 소음을 피하다가 터전을 그리워하는 비둘기의 모습을 보여주며, 3연은 화자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연으로, 이제 더 이상 더불어 살지 못하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비둘기를 말하고 있다.이 시가 쓰인 1970년은 산업화의 시기이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이용하여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북동 비둘기에서 나타난 성북동 산의 채석장 또한 같은 이치이다. 잘 살아보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생긴 자연과 인간간의 불평등한 관계는 결국 자연의 터전을 빼앗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비둘기로 대변되는 자연은 채석장 소음으로 나타나는 폭력에 병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비극은 자연의 도구화와 관련된다. 자연을 도구로 보는 시각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갖게 한다. 인간은 자연의 우위에 있고 자연은 인간의 욕구 해소를 위한 도구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 위에서 철저한 과학의 발전에 따라 자연의 신비로움은 벗겨졌고, 결국 이용 가능한 도구로서의 가치만 남았다. 마지막 연인 화자의 생각은 이러한 1970년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2) 금붕어홍역에 걸린 듯몸이 쑤시다가배 불룩이 된 금붕어는비단옷을 입었으나돌아갈 고향이 없어긴 강 큰 물에서변변히 한번 놀 수도 없는 출세(出世)수심(水深)이 그리워서어항 풀 사이를 헤치며제법 뽐내고 가지만금방 바닥이 나서멀지 않은 장도(壯途)낯선 돌이지만 바위처럼 믿고입술을 대고 엎디어 쉬며하품하다가도수면(水面)을 보고해를 따라 올라가하느님께 매달려 죽는다하느님의 은혜 없음 아니라인간과 친교 두터우니수심(水深)이 얕아지며금붕어들은 쉬이 숨진다-「금붕어」全文금붕어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인위적으로 변질되어버린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이다.1연은 인위적인 처리에 의해 비단옷을 입게 되었으나 강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 금붕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연에서 금붕어는 수심, 즉 자연이 그리워서다.
Ⅰ. 서론············································································1쪽Ⅱ. 작품 외적 검토····························································1쪽1. 서지실태·······································································1쪽2. 작가와 창작시기, 시대상황·················································5쪽3. 창작의도·······································································8쪽Ⅲ. 문학적 검토·································································9쪽1. 「운영전」의 인물···························································9쪽2. 「운영전」의 구조···························································10쪽3. 「운영전」의 주제···························································10쪽Ⅳ. 현대적 변용 실태·························································11쪽1. 영화 ‘총희의 연·’·····························································11쪽2. 연극 ·································································12쪽3. 소리극 ····························································14쪽4. 책 ····················로운 활용 방안··························································15쪽1. 영화 · 드라마화 ·········································································15쪽2. 테마파크 ·····································································15쪽3. 한국어 교육 ·············································································17쪽4. 팝업북 ····················································································17쪽VI. 결론············································································18쪽(참고문헌)·········································································19쪽I. 서론남녀의 애정문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줄곧 문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는데, 그 이유는 작품에서의 남녀 애정문제는 개개인의 사랑이나 애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애정 성취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등의 수많은 갈등 속에 인간적인 삶을 억누르는 제도적 규칙이나 관념과 같은 사회적 현상과의 대립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조선 후기, 특히 임진왜란을 겪고 난 17세기에 이르러서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대폭 증가하게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에 창작된 애정전기소설들은 주로 전쟁 체험과 그로 인한 애정 파탄이라는 현실적 상황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는데, 이전의 애정전기소설들이 귀신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기괴하고 환상성을 지닌 남녀 간의 애정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한 것이다.왜구의 침략과 불안정한 현실적 사회로 인한 비극적 인식은 작품에 투영되어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운명을 비극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비극성은 소설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혼란스러운 당시의 사회상 애정에 대한 부동한 태도와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고전소설 중 유일하게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고 평가받기도 하는「운영전」에 대해 작품 내·외적 문제를 검토하고, 나아가서는 현대적인 변용 여부와 향후 활용 가능성에 대해서 접근해보고자 한다.Ⅱ. 작품 외적 검토1. 서지 실태「운영전」은 국내에 전하는 이본만 총 23종이 있으며, 국외 도서관에 소장된 것으로 6종이 더 있다. 이 가운데 한문본은 총 26종으로 모두 필사본이며, 한글 필사본 2종, 활자본 1종으로 총 3종의 국문본이 전한다.)우리 학계는 원전을 한문본으로 보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이본간의 선후 관계, 변이 양상 등은 제대로 가려내거나 밝혀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소장처제목서지적 특성형태특이사항국립중앙도서관「柳泳傳」매 행 24자 내외,매 면 10행 내외,총 55면,총 12652자.한문필사본표지 안쪽에 ‘柳泳傳卽雲英傳’라고 적혀 있고, 앞면에 ‘大明天啓二十一年’이라고 쓰여 있으며, 권말에 220여 명의 서명이 있다.)국립중앙도서관「雲英傳全」매 행 38~40자 내외,매 면 11행 내외,총 30면,총 12396자.한문필사본표제는「雲英傳」이라 쓰여 있고, 제목 옆에 ‘朝鮮國初安平大君事蹟’이라 쓰여 있다.서울대 규장각「雲英傳」매 행 10~11자 내외,매 면 10행 내외,총 51면,총 12676자.한문필사본一?文庫本서울대 규장각「雲英傳」매 행 20자 내외,매 면 10행 내외,총 66면,총 12543자.한문필사본정신문화연구원장서각「雲英傳」매 행 20자 내외,매 면 10행 내외,총 65면,총 12773자.한문필사본표제는『金華寺記』로 되어있으며, 이라는 제목으로 말미에 첨부되어있다.『雲英傳』필사본『한국야담자료집』15권에 수록되어있다.동양문고본「雲英傳」매 면 10행,매 행 12자.총 66면,총 12700자.한문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雲英傳」매 면 12행 내외,매 행 30자 내외,총 37면,총 11819자.한문필사본표제는『相思洞記』로 되어 있고 뒤에 로 수록되어 있다.고려대학교 한적실「雲英傳」매 면 10행 내외,매 행 22자 내외,총 12675자.한문필사본고려대학교한적실「雲英香語」매 면 10행 내외,매 행 20자 내외로 구성된 낙장본으로,총 글자 수는 12000~13000자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한문필사본표제는『雲英香語』로 되어있으며, 이어「相思洞記」,「英英傳」이 수록되어 있다.고려대학교한적실「柳泳傳」매 면 10행 내외,매 행 24자 내외,총 12676자.한문필사본말미에 歲在光?五年十二月, 旣望弄筆‘라는 기록이 있다.김동욱 소장「雲英寄遺恨柳生」매 면 10행,매 행 21자 내외,총 39면, 총 8706자.한문필사본『한국야담자료집성』 12권에 수록되어있다.연세대학교중앙도서관「雲英傳」매 면 10행 내외,매 행 20자 내외,총 12679자.한문필사본「諸馬武傳」과 합사되어 있으며 말미에 ‘己丑冬月十六日? 金郞書’라는 기록이 있다.연세대학교중앙도서관「雲英傳」총 12678자.한문필사본말미에 ‘戊子十二月日始?’라는 기록이 있다.조동일 소장「柳生傳)매 면 12행 내외,매 행 24자 내외,총 46면, 총 11691자.한문 필사본조동일소장본『相思洞記』內「柳生傳」)『국어국문학자료』9권에 수록되어 있다. 말미에 ‘庚戌八月初十日 午前十二時?’이라는 필사시기가 적혀있다.정신문화연구원장서각「雲英傳」매 면 12행 내외,매 행 22자 내외,총 25면, 총 12490자한문필사본「동파문답」과 합사되어 있다.정신문화연구원장서각「雲英傳」매 면 10행 내외,매 행 20자 내외,총 60면, 총 12369자.한문필사본「金山寺夢遊錄」과 합사되어 있다.영남대학교중앙도서관「雲英傳」총 12778자.한문필사본‘庚子季秋初二日 桂洞?書’라는 후기가 있다.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이희승 소장演訂「雲英傳」매 면 12행있다.한글활자본1925년 발행한 회장체 딱지본(신활자본)이다.이재수 소장「雲英傳」매 행 22자 내외,매 면 13행, 총 55면.한글필사본김광순 소장「雲英傳」매 면 12행 내외,매 행 30자 내외,총 29면, 총 12616자.한문필사본필사본『한국고소설전집』27권에 수록되어 있다.)익명의개인소장「雲英傳」매 면 12행,매 행 24자,총 40면, 총 12520자.한문필사본도표에 제시된 이본 외에도 고려대 아세아문제 연구소와 한글학회에 한문필사본「雲英傳」이 소장되어 있다고 보고 되어있으나 실상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일본 天理大(톈리대) 도서관, 淺見氏藏書와 古鮮書譜 帝國도서관목록 등에 한문필사본이 각각 소장되어 있다고 전하며, 일본 동양문고에는 한글필사본이 소장되어 있고 細井肇판 鮮滿叢書 11권에는 일본어 번역본이 게재되어 있다고 전한다.각 이본의 선후관계에 대한 연구는 아직 진행 중이며, 원본에 대한 추론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원문에 가까운 텍스트 선정을 위해 몇 가지 조건이 설정되었는데, 그 조건을 살펴보면 첫째는 한문본일 것, 둘째는 공통 서사단락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면을 볼 때 대체로 분량이 길어야 할 것, 셋째는 유사한 이본군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유형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인「柳泳傳」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반면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인「柳泳傳」은 몇 대목에서 중대한 하자가 발견되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인「雲英傳」과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을 근거로 장서각본「雲英傳」에서 국립중앙도서관본이 분화되어 나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각 이본에서 제시되는「운영전」에 대한 제목 역시「유영전(柳泳傳)」,「운영전(雲英傳)」,「운영기유한류생(雲英寄遺恨柳生)」,「운영향어(雲英香語)」,「류생전(柳生傳)」으로 다양하다. 이 작품을 유영에게 초점을 맞추어 볼 경우 유영은 등장인물인 동시에 전체 이야기의 서술자이다.『삼방요로기』의 필사자는「운영전」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작품이 이러한「유영전」적 성격도 지니고 있」은
??Ⅹ?Ⅸ. 출생과 성장박태원은 1909년 1월 6일에 서울 수중박골 (京城府 茶屋町 七번지)에서 아버지, 朴容桓(박용환)과 어머니 南陽 洪씨 사이에서 사남 이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密城이고 고려 忠宣王때 密城君으로 봉임된 陟의 二十五代 손이다. 박태원의 증조부는 종 9품의 관직을 지내고, 조부 역시 국장급의 관직을 지냈다. 박태원의 맨 처음 이름은 點星 이었는데 그것은 등 한쪽에 커다란 검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원이라고 그 이름을 고친 것은 1918년 8월 14일이다. 박태원의 집안은 조부 이전부터 川邊에서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박태원의 출생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서울 토박이라는 점이다.부친 박용환은 약방을 운영하였고 숙부 박용남은 병원을 하고 있었다. 박용환의 약학수업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박용남은 官立京城 醫學校 제 2회 졸업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천변의 다옥정은 주로 중인 계층들이 살고 있었던 곳으로 약국을 비롯하여 다방, 술집, 이발소등 근대적인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던 지역이다. 박태원 집안의 선조가 무관을 지낸바 있고 천변에서 살아왔으며 생업이 의약업이었다는 것은 곧 중인 계층임을 의미한다. 이 중인들은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경직된 사회와 국가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에 대변함으로써 어지러운 시기에 새로운 사회문화 형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층이다.그들은 조선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가장 비판적으로 인식한 계층이었고, 그래서 개화에도 적극적이었다. 박태원의 조부는 삼남매를 두었는데 박태원의 아버지가 약방을 했고 숙부 박용남이 의사였으며 고모 박용일 역시 신식교육을 받은 교사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박태원의 집안은 매우 근대적인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중인 계층의 서울 토박이라는 출신 계층상의 속성은 이후 박태원의 문학에도 영향을 미친다.또한 박태원이 살았던 곳이 청계천변이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청계천은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촌(충무로 지역)일대와는 달리 한국인들이 상권을 갖고 르륵 열고 “누구야?”하면서 박태원의 ‘갓빠’ 머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갓빠’ 머리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河童’의 머리라고 해서 일본의 세계적 양화가인 藤田嗣治가 파리에서 이 머리를 해 가지고 동경에 와 활보하여 크게 유향한 머리 스타일이었다. 머리를 뒤로 넘기지 않고 앞으로 길러 내려 이마에서 한 일자로 베는 식의 이 머리로 시내를 활보해 유명하였다고 한다. 구보의 장편 소설 『천변풍경』도 자신의 들창 밖에서 벌어지는 빨래터 이야기를 일본 작가 武田麟太郞의 『銀座八丁』에 견주어 쓴 것이다.박태원은 8살 때 큰할아버지로부터 한문수업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특히 이야기를 좋아해서 10살 경에는 웬만한 고소설을 모두 섭렵하였고, 그는 놋주발 뚜껑을 담보를 책을 빌려다 보기도 하였으며, 보름동안에 책상 밑에 50~60권의 책이 쌓일 정도로 독서광이었다.박태원은 1918년에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보통학교 4학년을 수료하고 1922년 열 네 살 되던 해에 경성제일 공립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이 제일고보 시절에 그는 본격적인 문학서적들을 읽기 시작하고, 문학을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과도 어울려 실제로 창작도 함으로써 습작기에 들어서게 된다.이 시절, 박태원의 학교성적은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영어만은 뛰어났으며, 성격은 쾌활하지만 경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박태원은 정규교육보다 문학수업에 더욱 열중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학과 공부는 등한시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정규교육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박태원은 신경쇠약 현상까지 일어나 3B水라는 신경쇠약에 먹는 약병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천재에게는 학교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후에 자전적인 글에서 밝히고 있다. 어쨌든 그는 문학 공부에 열중하였고, 이 시기에 상한 시력은 나중에 실명으로까지 이어진다.숙부와 고모는 박태원의 문학적 출발에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들이다. 박태원은 어려서부터 숙부와 고모가 구독하는 잡지를 읽으면서 문학에 일찍부터 흥미를 느습작기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고모 박용일 역시 인텔리 여성으로 여고 교사였는데, 이광수의 부인 허영옥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박태원이 1927년 학교를 그만 두고 문학에만 몰두하였을 때, 고모와 숙부의 주선으로 박태원은 춘원과 백화에게 문학적인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박태원은 음악, 미술, 영화 등 근대문화에 일찍부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늘 축음기를 가까이 했고, 바이올린도 연주하였으며 허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테니스도 즐겨 쳤다고 한다. 특히 그는 영화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고 현대회화에도 식견도 뛰어나고 직접 그리는 재주도 있었다고 한다.( 박태원의 동생 박문원은 동경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박태원은 1928년 3월에 아버지를 잃는다. 약국은 약전을 졸업한 큰형이 물려받는다. 박태원은 이해 경성제일고보에 복학하여 1929년에 졸업한다. 그리고 한해동안 泊太苑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였고, 단편소설과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때 이미 평론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던 것이다.박태원은 같은 해 동경으로 건너가서 동경법정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당시 박태원이 춘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당시 박태원의 심경을 알 수 있다.) 그는 그것을 통해 법정대학이 동경제대나 일고보다 수준이 낮은 사립대학이라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문학에 대한 열정만은 여전함을 알렸다. 박태원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학교에는 안나가고 영화관이나 술집만 다니는 생활을 하였지만 박태원의 문학활동에 이것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국제적인 감각이 넘치는 동경에서 최신예술인 영화나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며 그의 지성과 감성은 더욱 서구지향적이고 현대지향적으로 자리를 잡아갔기 때문이다.박태원은 당대 일본 및 서구 문학에 대한 흐름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어느 정도 확고한 문학관을 구축하면서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얼마 후 귀국 길에 오른다. 그러나 귀국 후에 박태원은 1년 이상의 침묵 기간을 지냈기 때문에, 1었다.하지만 1933년 가을경,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등이 1차로 탈퇴한 직후, 회원 보강을 위해 조용만이 박태원과 이상을 추천하면서 박태원은 구인회에 가입을 하게 된다. 조용만은 「30년대의 문화 예술인들」에서 그가 구인회 회원들에게 박태원과 이상 두 신입 회원을 인사시키자, 초면에 박태원이 무슨 익살을 터뜨려 기분이 좋아진 尙虛가 "글이 치렁치렁하더니 말도 치렁치렁 잘 하시는군!" 하고 10년의 지기를 만난 듯 구보를 반겼고, 그 후 둘의 사이가 급속히 가까워졌다고 박태원의 구인회 가입 첫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첫대면, 첫화합임에도 두 사람의 재담으로 회합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상허는 이들에게 회의 소집, 장소 선택 등 모든 잡무를 맡는 간사의 역할을 맡겼으며, 두 사람은 좋다꾸나 하고 응낙하였다고 한다. 구인회 가입 후, 그 동안 중단했던 소설 창작을 재개하게 되고)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언어와 장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라는 박태원 자신의 문학관과 구인회의 문학관이 일치하였기 때문에 동인들 사이의 공감대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모임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이렇게 기성 문단의 재편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활동으로 구인회는 1930년대에 카프 이후 최대의 영향을 끼치는 단체가 되었으며, 그 활동의 중심에는 박태원이 있었다.구인회 동인들 중에서도 특히 박태원은 이상과 매우 친했다. 둘 다 언변이 좋아 만담, 재담을 잘 하여 어느 회합이고 이 두 사람이 나타나면 웃음바다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장단이 척척 맞아 서로 주고받으면서 사람들을 웃겼다고 한다. 그 둘은 현대 예술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실험 정신, 전위성 등에 있어서 선구적이었으며,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림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각별했다. 특히 박태원은 영화에 관심이 더 많아, 이중노출, 몽타주 기법 등의 영화의 주요 기법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한 가능한 모든 실험적인 기법을 적극적으로 시도함으로써 박태원은했다.Ⅱ. 결혼과 일제 말기의 친일행적「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에서 새로운 기법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었던 그는 1934년 10월 27일 김정애와 결혼을 한다. 부인 김정애는 한약국을 하던 김중하의 무남독녀였으며, 숙명여고 졸업생 74명 중 1등으로 졸업한 후 교사로 있던 신여성이었다.박태원은 1935년 분가한 후, 형으로부터 거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원고료가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분가 후, 자주 이사를 하게 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종로 6가로 분가하여, 2년 뒤 1937년에는 관철동 12-4로, 1939년에는 예지동 121번지로 이사하였다가 1940년에 돈암동 487-22에 집을 짓고 정착한다. 그리고 1948년에는 성북동 39번지로 다시 옮긴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이 시기의 가난과 잦은 이사는 자화상 1,2,3 이라는 부제가 달린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그리고 박태원은 일찍부터 영향을 받아온 춘원과 김동인처럼 점차 군국주의 체제하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인 선전에 동조하게 된다. 이러한 박태원의 친일 행적은 에 가담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는 이후 로 발전한다. 그는 이러한 단체 활동을 통해 군국주의 체제를 긍정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그 작품들로는 1941년의 「아세아의 여명」, 1942년「군국의 어머니」와 방송소설집에 수록된 「꼬마반장」, 「어서크자」등이 있다. 또한 이 시기 박태원의 문학은 이전의 문학적인 기교가 퇴색되었고, 문학 활동의 범주를 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통속 소설 그리고 중국 소설이나 야담의 번역, 중국의 고전 정리에 한정시켰으며, 동네에서는 반장을 맡는다.이처럼 30년 이상 지속된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지화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당시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친일을 거부하기 힘들게 하였다. 그래서 박태원은 이렇게 소극적으로 현실에 순응하면서 재능과 감수성을 잠식당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한다.Ⅲ. 월북과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