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올해에도 크고 작은 화산 활동들이 전세계에서 발생되고 있습니다, 지난 3개월동안 발생한 화산들의 정확한 날짜와 장소들을 밝히시오.ONE--- 케루드 화산2007년10월16일 인도네시아 자바섬 동부지역에 위치한 케루드 화산 폭발 임박인도네시아 자바섬 동쪽에 위치한 케루드 화산의 폭발이 임박함에 따라 주민 대피령이 내려졌다.인도네시아 당국은 현지시간으로 16일 하루동안 306차례의 화산지진이 발생했고, 분화구에서 수증기가 치솟는 등 화산활도이 증가해 경계수위를 최고 단계인 4단계로 격상했다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화산 인근 수기와라스 마을 주민 3천여명이 긴급 대피하는 등 화산경사면에 거주하는 3만명의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TWO-- 소프탄 화산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북술라웨시 특별주의 소푸탄산(높이 1783m)이 25일 화산활동을 재개해 분출한 연기가 1500m 상공까지 치솟았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통신에 따르면 화산관측소는 소푸탄산이 이날 오전 9시15분(한국시간 10시15분)부터 연기를 뿜었으며 서쪽 산록에 위치한 실레안 마을이 화산재로 뒤덮혔다고 밝혔다.인구가 적은 소푸탄산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지금까진 대피하고 있지 않으며 화산관측소는 화산이 당장 분화할 위험성이 낮다고 전했다.소푸탄산은 술라웨시섬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한 화산 중 하나로 2004년 분화한 바 있다. 당시 연기와 용암이 화산 입구에서 분출해 경사면으로 따라 흘렀으나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THREE---크라카타우 섬인도네시아의 화산섬으로 유명한 '크라카타우 섬'이 화산재와 연기를 내뿜고 있어 또다른 화산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인도네시아 화산연구학자가 27일 밝혔다.순다해협에 위치한 이 섬은 이미 1883년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난 적 있으며 이로 인해 수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화산폭발로 기록되고 있다."크라카타우의 활동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소규모 폭발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인도네시아 화산연구학자 수로노는 말했다.또한 그는 "인도네시아는 현재 화산폭발에 대한 경고 수위를 한차례 높였다"고 말하며 화산 폭발 가능성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현재 인도네시아에는 환태평양 지진대라 불리는 단층선을 따라 150개의 화산이 존재해 있다.1883년 크라카타우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산폭발은 3000km 떨어진 호주에서도 그 굉음이 들렸으며 폭발로 인해 만들어진 화산암 가스와 재는 쓰나미와 결합돼 165채의 가옥을 휩쓸고 3만6147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또한 이 사고로 인해 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의 크라카타우 섬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Chapter 2판의 경계부에서는 끊임없이 지진이 발생하고 있으며 전세계의 지진관측소에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지진들 10개를 조사하여 발생시간, 발생지역, 지진의 세기 등등을 알아봅시다.1.발생시간 - 2007/08/22 16:26:00지진의 세기 - 규모-5.2위치- 일본 훗카이도 삿포르 남남서쪽 125km 지역지진의 위도-42.00 N 경도 -140.80 E2.발생시간 - 2007/08/29 12:00:19지진의 세기-5.6위치-대만 카오슝 남동쪽 152km 해역 , 위도-21.73 N 경도-121.39 E3.발생시간 - 2007/09/02 10:05:20지진의 세기-7.5위치-솔로몬섬 호니아라시 동남동쪽 432km 해역, 위도-11.83 S 경도-165.64 E4.발생시간 - 2007/09/07 02:51:28지진의 세기 - 6.5위치-대만 화련 동쪽 약 73km 해역. 위도-24.30 N 경도-122.30 E5.발생시간 - 2007/09/12 20:10:31지진의 세기 - 8.4위치-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벵클루 남서쪽 약 130km 해역위도-4.52 S 경도-101.38 E6,발생시간 - 2007/09/13 08:48:59지진의 세기 - 7.8장소-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벵클루 북서쪽 약 200km 해역위도-2.53 S 경도-101.00 E7.발생시간 - 2007/09/28 22:41:00지진의 세기 - 7.4장소-일본 혼슈 도쿄 남쪽 1561km 해역, 위도-21.90 N 경도-142.70 E8.발생시간 - 2007/09/30 11:08:29지진의 세기 - 7.0장소-태평양 괌 남남동쪽 약 340km 해역, 위도-10.48 N 경도-145.61 E9.발생시간 - 2007/09/30 14:23:36지진의 세기 - 7.3
REPORT제목 : 우주와지구보고서1과목명 : 우주와 지구담당교수 : 조헌구 교수님 제출일 : 2008년 4월 8일학과:법학과학번:23333성명 : 박인수(1) 최근 화성에 생명체가 살았다는 증거가 운석에서 발견되었다 라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웹 사이트에서 해당되는 정보를 찾아서 다음에 답하시오.1. 그 운석의 이름은 무엇이며 운석이 발견된 장소는 어디입니까?4.2 파운드(1.9 kg), 감자 형태의 운석(ALH84001라고 이름이 지어지는)은 운석 프로그램의 전미국 과학 재단의 남극탐색 연차 원정에 의한 Allan Hills 빙원(남극 대륙)에서 1984에 발견되었다. 존슨 우주 센터의 운석 처리 연구소의 다른 수천의 운석과 함께 ALH84001는 연구를 위해 보존되었다. ALH84001의 화성의 기원은 1993로 인정되었다.)2. 그 운석이 화성에서 온 운석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ALH84001는 유일한 화학 위에 기초를 둠으로써 화성에서밝혀진 세계적으로 신원이 확인되는 유일한 12개의 운석중의 하나다. 화성의 또 다른 운석그룹(EETA79001)은 화성으로 연결되는 키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1976에 화성에 도착했던 the Viking spacecraft에서측정되는 화성의 대기에 가스를 그 운석이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화성의 운석은 모두 지질학상 13억의 년에서 1억8000만까지 어리다. 그러나, ALH84001는 고대인, 45억년된 것이고 화성에 관해 우리에게 빠른 역사를 말하는 유일한 화성의 운석이다.3. 화성에서 온 것이 맞다면 어떤 과정으로 운석이 화성에서 올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운석은 화성의 표면의 아래에 약 45억년전 고체의 바위로 식어버렸다. 그 뒤에, 바위는 화성의 표면에서 운석의 충격에 의해 대규모로 부숴졌다. 데워지고 더욱 축축했을 초창기 화성의 유체는 광물의 퇴적물이 36억 살로 산정했던 탄산염의 형성을 가져오고 있는 바위로 파쇄를 통과했다라고 생각된다. 소행성의 충돌이 있던 1600만년전 화성은 뚫고 분출하고 혹성에서 벗어나는 데 충분한 힘을 가진 바위조각이었다. 그것이 13,000년 전에 남극 대륙에서 내릴 때까지 화성의 이 특별한 조각은 우주공간을 방화했다.)4. 그리고 생명체가 살았다는 증거는 무엇인지 밝히시오.조사팀이 화석의 삶의 증거를 발견했던 것은 운석의 파쇄에서 나온 탄산염에 있다. 작은 탄산염 소구체의 팬케이크 형체와 계층화되었던 광물의 발단은 팀이 화성의 유기적인 분자의 기원이 탄산염 파쇄 지역과 관련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흥분되었다. Stanford팀의 유기적인 분자(레이저 질량 분광계의 하나를 사용하고 있는 탄산염 파쇄 지역의 polycyclic한 향기로운 탄화수소라고 이름이 지어지는)의 배포의 지도를 만들었다. 존슨 우주 센터에서, 전달 전자 현미경을 사용하고 있는 상당히 높은 확대한 소구채의 광물 구성요소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시험은 완전히 화학 반응에서 만들어질 때 매우 다른 조건에서 형태를 이루는 2개의 광물(자철광과 철의 소구채라고 이름이 지어지는 철의 산화물)의 친밀한 관련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자철광과 철의 황화물의 세균의 추락은 지구상에서 함께 보고받았다. 가장 시각적으로 화석의 삶의 증거를 치는 것은 상당히 작은 것처럼 보이는, nannobacteria가 지구 바위로 최근 찾았던 탄산염 소구채 구조의 이미지이다. 직경 100 나노 미터까지 약 20를 측정하고 있는 화석화되었던 최초의 세포의 삶의 이미지는 전자 현미경을 조사하고 있는 고해상도를 사용하면서 얻게 되었다. 유기체와 화석의 특징의 발견은 새로운 고해상도의 도구로도 최근까지 가능하지 않았다.
덩샤오핑 평전현재 많은 자원과 인구를 가진 중국은 세계에서 빠른 경제 성장을 하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전국이 혼란스러웠을 때 그 누구도 지금의 중국을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국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요인에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값싼 노동력과 자원 등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을 들자면 중국에서 개혁 개방 정책을 시작한 것이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은 개혁 개방 이후에 매년마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며 빠른 발전을 하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덩샤오핑(鄧小平)은 개혁개방을 시작하여 중국의 발전을 이끈 주역이다. 또한 덩샤오핑은 발전된 중국을 만든 만큼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따라서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의 일생을 살펴본다면 중국이 근현대에 겪어온 변화를 알 수 있을 것이다.덩샤오핑은 1904년 7월 12일 쓰촨성(四川) 광안현의 작은 마을에서 덩원밍(鄧文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마을에서 지주로서 부유한 편이었다. 덩샤오핑의 아버지는 그에게 셴성(先聖)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성인들을 앞선다. 라는 뜻의 셴성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덩원밍은 덩샤오핑에게 장남으로서 많은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부유한 집안이었던 만큼 덩샤오핑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5살이었을 무렵부터 가정교사를 들여 기초적인 글자 등을 배운다. 이때 가정교사의 제안에 따라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현자가 되고자 한다. 는 뜻의 시셴(希賢)으로 불리게 된다.덩샤오핑은 1910년 셰싱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1915년 광안의 중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중등학교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숙사에 머물며 공부를 하게 된다. 이 시절 덩샤오핑은 당대에 벌어지는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면서 중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1918년 여름 중등학교 졸업을 하게 된 덩샤오핑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좀 더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의 동창생들은 대부분 고향으에 공부를 하겠다는 덩샤오핑에게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셴성, 시셴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덩원밍은 아들이 마을에 머물며 사는 것보다는 넓은 곳에 나가 출세하기를 바랐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덩샤오핑이 충칭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 중국은 군벌들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현재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별다른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고등학교를 계속해서 다니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런 이유는 덩샤오핑이 다니던 학교가 군사학교나 상업학교가 아니라 일반교육만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때 덩샤오핑은 신문에서 근공검학(勤工儉學)계획에 대한 광고를 보게 된다. 이 근공검학계획은 프랑스에서 일하며 유학할 학생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프랑스의 노동력 부족해결과 중국의 낮은 생활 수준향상을 위한 목적으로 실행된 것이다. 이 광고를 본 덩샤오핑은 프랑스에서의 공부가 지금의 학교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예비학교에서의 덩샤오핑은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아니었다. 특히 프랑스어는 간단한 말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결국 프랑스에 유학을 가게 된다. 다른 나라에서 말은 통하지 않겠지만 한번 부딪쳐 경험해보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이었다.배를 타고 프랑스 유학을 가면서 덩샤오핑은 많은 불편을 겪게 된다. 침대도 없이 배 밑층의 나무 바닥 위에서 잠을 자고 여행도중 중국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파리에 도착한 덩샤오핑의 프랑스 생활은 크게 두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1920년 10월에서 1926년 1월까지의 프랑스 생활 중 처음 삼년동안은 근공검학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노동과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후의 생활은 공산당 활동에 참여하면서 점차 혁명운동으로 바뀌게 된다.덩샤오핑이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게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근공검학이라는 계획으로 프랑스에 온 학생들의 유학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대사이한(李維漢)과 같은 인물과 만나게 된다. 특히 저우언라이와는 이라는 기관지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데 이런 원인으로 인해 덩샤오핑은 자연스럽게 공산당(청년동맹)과 인연을 맺게 된다.덩샤오핑이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청년동맹의 활동을 프랑스에서 단속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공산당 조직인 청년동맹은 노동자들의 시위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경찰의 단속을 받게 되어 그가 프랑스에 계속 있기는 힘들었다. 또한 프랑스 유학의 원래 목표였던 근공검학을 실천하기 어려웠던 것도 러시아로 떠난 이유일 것이다.1926년 러시아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동방대학과 중산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덩샤오핑은 이곳에서의 1년 정도밖에 생활하지 않고 중국으로 귀국하게 된다.덩샤오핑이 이렇게 빨리 귀국한 이유는 펑위샹(馮玉祥)과 관련이 있다. 당시 펑위샹은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데 자기 군대의 정치적, 조직적인 개혁을 위해 러시아에 인재를 요청하게 되기 때문이다.덩샤오핑과 일행들은 펑위샹의 요청으로 귀국하지만 얼마 후 국공합작이 붕괴되어 공산당 중앙이 있던 우한으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 덩샤오핑은 처음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나게 된다. 당시에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단순한 관계였다.얼마 후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로 이전을 하게 되는데 덩샤오핑은 2년 정도를 이곳에서 직원이나 서기로 일했다. 당시의 중국 공산당은 난창봉기, 추수봉기가 실패하고 국민당의 공격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이렇게 힘든 상황이었던 1929년 10월 덩샤오핑은 광시(廣西)지역에 파견되어 공산당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자신이 이끌던 부대가 국민당과의 교전과 덩샤오핑 자신의 부대이탈로 와해되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당의 공격으로 쉰우 지역을 빼앗기게 되어 중앙당 위원회에 비난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덩샤오핑은 좌천되어 모든 지도 권한을 박탈당하고 격주간지에서 일하게 된다.이 일이 있은 지 몇 개월이 흐른 1934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공격을 받아 129사단은 몇 차례의 전투에 승리하게 되어 옛날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게 된다. 또 덩샤오핑은 전장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벌어지던 당내투쟁을 피할 수 있었다.1945년 8월 15일 일본이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으로 그동안의 국공합작은 곧 무너지게 되고 중국에서는 다시 내전이 벌어진다. 내전기간 동안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이끄는 제129사단(제2야전군)는 다볘 산맥을 점령하면서 전세 역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다볘 지역의 확보로 공산당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되며 결국 국민당이 패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내전의 막바지에 제2야전군은 충칭을 탈환하여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이동하게 되고 전쟁이 일단락 된다. 덩샤오핑은 이후 공산당 서남국 서기, 충칭 시장 등의 역할을 하며 남서부지역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덩샤오핑은 이지역의 농업개혁을 완결하고 티벳 문제를 해결하여 마오쩌둥에게 인정받는 인물이 된다.덩샤오핑은 이러한 성공으로 마침내 1952년 여름 수도인 베이징에서 일하게 된다. 베이징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편에서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런 정치적인 암투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로 인해 덩샤오핑은 대약진 운동 때까지 꾸준히 승진하게 된다.대약진 운동은 시작된 후 부정적인 결과만을 남기고 실패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1962년 류사오치(劉小奇)와 덩샤오핑에게 당 중앙을 맡기고 우한으로 내려간다. 이 기간동안 류사오치가 시행한 정책들은 후에 마오쩌둥에게 우익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와의 불화를 눈치 채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높은 지위로 인해서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게 된다.1965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가운데 대학에서는 시위가 일어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작업조를 학교에 파견한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작업조에게 학생들을 지지하면서 학교 지도자들도 보호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작업신젠현에서 지내게 된다. 이 삼년 하방 기간이 지나고 마오쩌둥과 함께 문화대혁명동안 덩샤오핑을 몰락시킨 린뱌오(林彪)가 죽고 나서 덩샤오핑은 다시 복귀하게 된다.베이징에 온 덩샤오핑은 부총리로서 외빈들을 접견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덩샤오핑은 국제 연합 회의에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다. 뉴욕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미국의 발전상황을 보게 된다. 이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이 몇 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덩샤오핑의 지위가 다시 높아지면서 그는 급진론자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급진론자들이 펼치는 정책은 너무 파격적이고 이상주의에 가까워 현실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실용주의적인 덩샤오핑과는 맞지가 않았을 것이다.1976년이 되면서 여러 고위 지도층이 죽었다. 그 중에는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쩌둥도 있었는데 마오쩌둥 사후 정권을 잡은 것은 화궈펑(華國鋒)이었다. 이러한 이유는 마오쩌둥의 입장에서는 급진론자도 아니고 실용주의자도 아닌 화궈펑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덩샤오핑이 정치에서 물러났던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덩샤오핑은 4월 5일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려던 시민들의 시위를 막지 못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사인방이 몰락하면서 덩샤오핑은 다시 복귀하게 된다. 덩샤오핑은 복귀이후 조금씩 영향력을 향상시켜 결국 화궈펑을 밀어내고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이러한 원인은 우선 덩샤오핑이 정치운동의 희생자들을 복귀시키면서 화궈펑보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화궈펑은 산업부분에서 발전을 토대로 중국의 경제발전을 구상하여 무리한 산업투자를 하였다. 이런 무리한 산업투자는 결국 어려움에 직면하고 결국 화궈펑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국민총생산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덩샤오핑이 당과 정부를 지도한 1975년 중국 국민 총생산은 11.9%가 증가하였다. 하지만 그가 없었던 1974년에는 1.4%, 화궈펑이 지도한 1976년에는 1.7%의 성장밖에 하지 못한다.정권을 잡은 후 덩샤오핑은된다.
“오이환” 교수님의 동아시아의 사상을 읽고 난 후나의 많이 부족한 평론후기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던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국사과목은 거의 95~100점을 받았다. 대학생활 하면서 역사에 관한 관심이 더욱 증폭되어 역사관련 교양수업은 학기마다 빠짐없이 수강하고 있다. 이번 E-러닝 동아시아의 사상 과목을 통해서 한.중.일 3국의 역사와 사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숙제이긴 하지만 오이환 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역사에 관한 나의 지식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책에 관한 평을 쓰기전에 저자 오이환 교수님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저자 오이환 교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조선 중기 경상도 사림을 대표했던 남명 조식의 문집인 ‘남명집’을 읽고나서 오이환 이사람 대단한 사람이다. 오랜만에 괜찮은 책 읽었다라고 생각했었다. 어떤 사람일까라고 호기심으로 저자를 검색해보니 아~경상대 교수님이셨구나!‘ 경상대에 다니게 되면 수업한번 들어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때의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져서 이번 동아시아의 사상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저자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이 그 저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저자가 의도하는 생각이나 사상 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프로필을 검색해봤다.오이환 교수님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타이완대학, 교토대학에서 철학 및 중국철학사를 전공하였고, 교토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초부터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재직해 왔다. 저서로는 《남명학파 연구》, 《동아시아의 사상》, 편저로는 《한국의 사상가 10인?남명 조식》, 《남명집 4종》, 역서로는 가노 나오키의 《중국철학사》가 있다.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제1회 학술대상을 수상하였다.이 책의 분량은 약 200page정도로 총 12강으로 고대부분부터 근대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사상이 어떻게 발달하였으며 그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책을 읽기에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내용이 깊게 파고 들어가지 않아서 전문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과 함께 같이 읽어봐야 된다. 하지만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의 교양수업 참고서로는 안성맞춤인 교과서라고 생각한다.사람들은 철학이나 사상에 관련된 학문에 대해서는 많이 배타적이고 어려운 학문이라 꺼려 하는게 대부분이다. 이 책도 철학과 사상의 내용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려면 꼼꼼히 읽어야 된다. 역사지식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고생하지 않을까 싶다. 나도 한번 읽어 봤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거의 사상이 어떻게 발달하였고 어떻게 전파되었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또 어떻게 보면 읽기 쉬운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동아시아 사상의 중심인 중국의 역사를 토대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짚어가면서 사상이 한국과 일본에 어떻게 전파시키고 발달시키는지를 중점으로 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것이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고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