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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의 이해 강의 관련 영화 사쿠란 색채 분석
    강 의 명 :담당교수 : 교수님영화 속 색채 분석일본영화 ‘사쿠란(さくらん)’을 대상으로제 출 일 : 200 . .학 과 :학 번 :성 명 :Ⅰ. 영화 소개1. 감독 ‘니나가와 미카’니나가와 미카(?川?花, 1972년 10월 18일~)는 영화감독인 아버지 니나가와 유키오와 퀼트작가인 마야마 토모코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으며, 도쿄 출신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토호고등학교와 다마 미술대학 그래픽학과를 졸업하였고, 2001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기무라 이헤에 사진상을 수상하였다. 여러 가지 패션 잡지나 음악 앨범 자켓, 광고의 상업 사진촬영을 주로 하고 있으며, 약 3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단편영화인 (2003)으로 영화감독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7년 2월 24일 개봉한 영화 《사쿠란(さくらん)》(2007)의 감독을 맡았다. 일본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강렬한 색채와 질감표현에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수상이력1996년 제9회 사진3.3m 전 그랑프리1996년 제13회 캐논 사진 신세기 우수상1998년 제9회 코니카 사진 장려상2001년 제26회 기무라 이헤에 사진상2006년 제13회 VOCA 전 오오하라 미술관상공식홈페이지 http://ninamika.com/index.html※ 니나가와 미카의 작품들)※ 인터뷰 자료 - 2007. 9. 3. 무비위크, 김지현 기자) 니나가와 미카 감독-“손을 움직이지 않고 언어화했다”니나가와 미카 감독은 1972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 내 최고의 사진작가로 성장한다. 일본 사진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26회 키무라 이헤이상을 비롯한 다수의 사진작가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일본 최고의 순정만화가 안노 모요코의 원작 만화 을 영화화해 주목받고 있다.|사진작가에서 감독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이전부터 을 비롯한 안노 모요코의 만화를 모두 읽은 팬인데, 연출 제안을 받고 1년이 됐을 때인가, 갑자기 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원래 영화감독에 관심은 있었는가?지금까지 사진작가로서 일하면서 뮤직비디오나 CF 제작 자존심을 갖고 일하고 있었기에, 다른 영역에 의지 없이 진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을 하게 되면서 ‘이 작품이면 내가 할 수 있고, 멋지게 만들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을 선택한 이유는?먼저 시각적인 영화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 원작에서 여자들만이 아는 ‘리얼리티’를 느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은 여자에 대한 ‘리얼리티’가 있지 않나. 일본 평안 시대(794년~1192년)의 오래된 문서 중 하나는 “정말…요즘의 젊은 여자들은!”이란 제목이란다.(웃음)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은 역시 안 변한다. 나는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여자들의 리얼한 감각을 영화에 살릴 수 있었다.사진작가와 영화감독의 차이점은?영화감독은 실제로 손을 움직이지 않고 사령탑 같은 역할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그린 세계를 언어화한다.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반면 사진을 찍을 때는 손을 움직이며 언어보다 감성을 더 활용했다.2. 줄거리)벚꽃이 한창인 봄, 키요하는 8세 나이로 요시와라)에 팔려온 팔려오게 된다. 그녀는 거침없는 말버릇과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왈가닥으로 요시와라 최고의 문제아로 낙인찍힌다. 유녀(遊女)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이 싫어 번번이 도망치다 어김없이 요시와라의 일꾼인 세이지한테 붙잡히고 만다. 결국 오이란(花魁, おいらん))인 쇼히의 농간질에 넘어가 오이란이 되기로 결심한다.17살이 된 키요하는 하늘이 내려준 명기로 불리우며, 요시와라 최고의 유녀로 인기를 얻는다. 망아지 같은 성격과 신이 내린 미모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키요하는 오이란인 타카오의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잘생긴 얼굴에 순수한 마음을 가진 청년 소우지로에게 마음을 빼앗긴 키요하는 유녀에게 금지된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타카오의 계략에 넘어간 키요하는 소우지로에게 배신을 당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첫사랑의 아픔을 이겨내, 결국 요시와라 최고의 꽃, 오이란으로 성장한다.Ⅱ. 영화 속에서의 색곽인 만큼 그 배경색은 붉은 색 천지이다. 예로부터 ‘홍등가’가 상징하는 것이 사창가였던 것처럼 이 곳에서의 붉음은 남성의 뭇시선을 끌어내기 위해서 교태를 부리는 여인네들의 관능과 그런 여인네들을 바라보며 욕망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돈을 가지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탐욕스런 욕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요시와라를 들어가기 위한 문 역시 욕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나타내는 붉은 색이고, 유곽 안에서 몸치장을 한 체 손님을 욕망을 풀어주는 유녀들을 암시하는, 문 위의 수족관에 있는 금붕어도 붉은 색이다. 즉 요시와라의 빨간 대문과 거리에 매달린 홍등은 이곳에 들끓고 있는 사내들의 욕망과 여인들의 교태, 그리고 그 둘의 교접의 장소를 상징한다.(2) 가게 대청유녀들이 치장을 하고 나와 손님들에게 선을 보이는 가게의 대청은 온갖 현란한 색으로 치장이 되어있다. 각각의 유녀들은 그들의 성격에 따라 옷을 갖추어 입었지만, 그런 그녀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총천연색으로 도배되어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특히나 갖가지 색상으로 꾸며져 있는 격자무늬 문은 그 한 칸 한 칸이 가게에 있는 유녀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총천연색으로 된 문이 상징하는 것은 유녀들 각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가게의 유녀들이 선을 보이는 대청은 제각각 개성을 지닌 유녀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다양하고 화려한 색상으로 꾸며져 있는 것이다.(3) 현실 세계번번히 유곽에서의 탈출을 실패한 키요하는 자신의 정인을 보기 위해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인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로 나오는 그녀에게 현실은 투박한 무채색의 공간이다. 요시와라가 강렬한 조명으로 인해 원색의 의상과 배경이 눈에 띄는 곳이라면 현실 세계는 옅은 블루톤으로 다소 차가운 이미지를 주는 공간이다. 또한 길거리의 사람들은 무채색 계열과 감색의 옷을 입고 지나다니고, 원색의 요시와라와는 달리 흰 벽과 회색 지붕 일색이다. 즉 원색의 요시와라가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면 만일 그녀가 밖으로 나들이를 나온 것이라면 강변은 아름답고 생그런 곳이여야 한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간 곳은 어둡고 탁한 색을 지닌 강물로, 그녀는 이곳으로 뛰어들어 울게 된다. 혼탁하고 어두운 색의 강물은 그녀의 혼잡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탁류에서 그녀는 자신의 혼잡한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자신의 감정을 온갖 쏟아낸다. 즉 강물이 탁한 색을 띄는 까닭은 그녀의 온갖 감정이 뒤범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강물은 슬픔의 해방구이며, 배출구인 것이다.2. 키요하키요하는 그녀가 처한 상황과 그 당시의 감정에 따라서 그녀의 의상과 장신구가 변화한다.(1) 유곽에 팔려왔을 당시의 키요하는 별다른 장신구를 착용하지 않았고 어두운 색깔의 의상을 입고 있다. 전반적으로 회색과 갈색의 옷감에 어두운 보랏빛이 살짝 가미된 의상은 키요하가 어떠한 이유로 유곽에 팔려왔는지 대충 짐작이 가게 해준다. 그러나 이 옷에서의 안감과 옷매듭이 붉은 색이라는 점은 키요하가 유녀로서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후에 소히의 시동이 됐을 때는 진한 다홍색의 옷을 입는데, 이는 키요하의 오이란인 쇼히에게도 굽히지 않는, 대담하고 강인한 성격과 함께 어린 아이로서의 발랄함이 보여 진다고 할 수 있다.(2) 17살이 되어 처음 손님을 맞을 때부터 정인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까지의 키요하는 진한 빨강의 배경과 대조되는, 파스텔톤의 의상을 입는다. 배경과 대조되는 파스텔톤의 의상은 소박한 이미지를 주지만, 되레 옷에 있는 문양을 돋보이게 해주기도 한다. 언뜻 소박해보이나 화려해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의상은 유녀라는 위치와 함께 아직까지 사람에게 때 묻지 않은 순수성을 상징한다. 또한 이 때의 장신구는 옅은 노란색으로 조금은 단촐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유녀생활을 시작하는 단계인 키요하의 순수성과 앳된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나 파스텔톤의 옷 안에 붉은 색의 속옷이 보이는데 이는 그녀가 유녀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켜주면서 관능적인 그과 감색의 옷을 입고 간다. 이는 화려한 의상과 화려한 화장을 치장한 체 가식적인 미소를 띠고 있는 유녀 키요하라는 존재를 버리고 정인을 사랑하는 한 여자의 진실된 마음으로 정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러나 감색의 옷은 비에 젖으며 검정색의 옷으로 보이는 데, 이는 정인을 만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검정의 옷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4) 정인과의 이별 이후 강한 보색 대비의 의상을 입음으로써 강한 인상과 강한 화려함을 주게 된다. 이는 이별 이후, 사랑에 휘둘리지 않게 된, 보다 더 강인해진 그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성숙한 유녀로서의 키요하는 그녀의 위치에 걸맞게 화려한 옷을 입게 된다. 붉은 색과 노랑이 조화되어 화려의 극치를 보여주며, 빨간 입술색과 빨간 담뱃대는 그녀가 유녀로서 보여주는 관능과 욕망을 상징한다.(5) 오이란이 된 이후 키요하의 옷과 방은 빨강과 검정, 황금의 조화를 이룬다. 이 세 가지 색의 조화는 보다 더 강한 화려함을 나타내지만, 각 색마다 의미를 갖기도 한다. 황금색은 유녀로서의 최고의 위치인 오이란의 자리, 즉 오이란의 위치에 오른 키요하의 고귀함을 상징한다. 또한 검정색은 그녀의 강인한 카리스마와 성품을 나타내며, 빨간색은 교태와 관능을 파는 유녀라는 신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색이 조화를 이루며 키요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띄게 되지만, 되레 그것은 그녀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세 가지 색이 조화를 이룬 그녀의 방은 오이란으로써의 위용을 상징함과 동시에 신비감을 유발한다. 또한 보다 더 강해진 반면, 전과 달리 천방지축이 아닌 조용한 키요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하양-보라-검정의 조화 외에도 하양-보라-검정의 의상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옷은 신분이 높은 손님을 맞이할 때가 아닌,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과 그녀가 편안히 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입게 된다. 이러한 의상은 하양-보라-검정의 조화는 화려함
    예체능| 2009.02.23| 9페이지| 5,000원| 조회(1,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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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수서원 답사 보고서
    강 의 명 :담당교수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소수서원을 다녀와서제 출 일 :학 과 :학 번 :성 명 :1. 일정표 - 차례2008년 6월 7일07 : 10 출발11 : 10 경상북도 영주시 도착1) 소수서원 원외-1① 당간지주(숙수사지)2) ② 성황숲2) ③ 취한대④ 백운동 경(敬)자 바위⑤ 소혼대⑥ 경렴정⑦ 성생단2) 소수서원 원내① 강학당2) ② 문성공묘2) ③ 직방재, 일신재④ 학구재, 지락재⑤ 전사청⑥ 영정각⑦ 고직사⑧ 사료관3) 소수서원 원외-2① 탁청지2) ② 백운교2) ③ 광풍정4) 소수박물관16 : 10 경상북도 영주시 출발19 : 10 도착2. 답사기ooo교수님의 ‘000000’를 들으면서 사림문화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토대가 되었던 조선시대에 관련된 문화를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요약, 정리한 내용이 전부였기 때문에 새롭게 배우는 부분도 있었고, 또 더 깊게 배우는 부분도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 답사지로는 그 전에 가보지 않은, 알고는 있지만 더 배워보고 싶은 곳을 정하기로 했다. 서원에 대해서는 사립고등교육기관이라는 것과 강학과 향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원이 사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원을 답사 1순위로 꼽았고, 그 중에서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을 답사지로 결정하게 되었다.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에 위치한 곳으로, 영주 시내에서 27번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가면 소수서원에 도착한다. 영주시와 순흥면에서는 소수서원을 보수?복원하여 문화관광지로서 개발을 하고 있다.※ 소수서원에 대해서)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 선생이 고려 말의 유현(儒賢)인 안향 선생의 연고지에다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는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명종 5년(1550)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주춧돌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 숙수사 옛터에 세워진 것임을 알게 한다. 서원 건립 시 비록 배척했던 종교인 불교에서 사용하던 물건이라도 성리학자들이 개의치 않고 필요에 따라 재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소수서원처럼 옛 절터를 서원으로 사용하게 된 배경은 배움의 도장으로서의 서원은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아울러 선현을 모시는 곳이라 산수가 뛰어나고 한적한 곳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황은 “서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경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교육적 성과가 크다‘고 말한 바 있다.한편 사찰에서 서원으로서의 기능 전이는 문화교체에 따른 공간점유의 계승이라는 측면도 있으나 새 질서의 수립이라는 정책적 측면의 의도도 있었다.2) ② 성황숲서원 경내로 들어가기 전, 당간지주 맞은편에 있는 죽계천을 징검다리 건너면 성황숲이 나온다. 큰 나무들과 온갖 풀들이 어울려서 다소 어둡고 습한 이곳에는 금줄이 둘러져있고, 그 안에 돌탑들이 있다. 처음에는 미신이라 하여 무속을 멀리하던 선비들이 살던 곳에 성황당이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였으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나 자신을 넘어선 절대적인 무언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사람이 사는 공간 중에서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주변에 있는 돌을 주워 탑 위에 올려놓고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되길 빌고 성황숲을 걸어 나왔다.2) ③ 취한대성황숲에서 몇 발자국 걷다보면 시원한 그늘에 있는 취한대를 보게 된다.죽계천을 바라보고 있는 취한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경자바위 윗부분에 터를 닦아 대를 쌓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 이름 한 것을 본 받아 1986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취한대’란 이름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천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 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翠’와 차가울 ‘)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만다.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예전의 붉은 칠이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 것이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붉은 칠을 칠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새빨간 색이 칠해져 있어서 붉은 칠을 한 전설이 안타깝기보다는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으로 새빨갛게 페인트칠을 하는 것보다는 아마도 빛바랜 붉은 칠이 더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 싶다.⑥ 소혼대소혼대는 죽계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서원의 정문 밖 영귀봉의 중턱에 있으며 이곳에는 숙수사의 별대(別臺)로 쓰였던 건물 주초자리가 남아있다. 원래 통일신라때 세워진 숙수사의 별대였으나 서원이 들어선 후 이 자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던 곳으로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손님을 배웅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소혼이란 근심으로 넋을 잃는다는 뜻인데, 대개 방문객들이 여기서 작별을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소혼대’란 이름은 중국 남송(南宋)시대 강엄의 ‘암연소혼자 유별이이의(?然消魂者 惟別而已矣)’이라는 이별을 노래한 옛 시 「별부(別賦)」에서 따온 것이다.⑦ 성생단강학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정문 앞에 위치한 성생단은 홀기에 따라 춘?추 향사 때 제물인 희생(짐승)의 적합여부를 심사하고 잡던 곳으로, 향사 전날 선택한 제물을 성생단 위에 올려두고 원내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피며 제물로서의 합당여부를 검토하는 품평단이다. 제물로는 임금이나 하늘에 드리는 제사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 쓰였고, 그 외에는 보통 돼지가 쓰였다.성생단은 정사각형 평면에 정방형으로 흙을 북돋아 잔디를 심었으며 기단외부로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2) 소수서원 내(강학당으로 들어가기 전에 찍은 소수서원 정문- 휴일이라 학당은 후진을 양성하는 강학공간이다.2) ② 문성공묘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사당으로 규모는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집으로,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좌(柱座)를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고 첨자를 내어 그 위에 소로가 주심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보 방향으로는 쇠혀(牛舌)를 내고 안쪽으로는 보아지 모양을 하여 툇간의 보를 받치는 초익공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자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건물의 좌측과 뒤편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사방 돌담을 두르고,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두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初丁日)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하고 있다.( 아쉽게도 문성공묘를 잠겨있어서 관람객들은 안을 볼 수가 없었다.)현판 글씨는 성균관 명륜당(明倫堂)현판을 쓴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의 글씨이다. 사당에는 묘(廟)와 사(祠)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사당이 사(祠)라 칭하며 조정 내에서 많은 논의를 통하여 모든 대신들의 동의가 있고 이를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이 묘(廟)라 칭하고 있다. 그 예를 들면 조선 역대 임금들을 모신 종묘(宗廟)가 있고 성균관에는 공자님을 모신 문묘(文廟-공자의 존칭인 大成至聖文宣王廟의 줄임말)가 있다. 또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을 현충사라 하고 충장공 권율 장군의 사당을 충장사라 한다. 따라서 그 명칭만으로도 소수서원의 문성공묘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사당들 중에서도 그 격이 특별함을 알 수 있다.안향은 고려말 중국으로부터 주자학을 최초로 도입하여 학풍을 진작한 공으로 동방주자학의 시조이자 안자(安子)로 추앙 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신라의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면에는 각 칸마다 판문을 달았고 내부는 마루를 깔았다.한편 장서각의 위치는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서책은 으뜸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의 오른쪽에 자리했다. 이 또한 서쪽을 높게 여기는 우리나라 고유사상 ‘이서위상(以西爲上)’의 한 표현으로 선현들의 가르침을 간직한 책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서원의 장서각은 강학공간에 부속되는 주요건물로서 선현들의 문집 등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며, 목판을 제작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규모가 큰 서원은 장판각을 따로 두기도 했다. 대개 장서각의 구조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은 땅에서 떨어뜨려 마루의 형태를 취하고 환기구나 살창을 설치한다.⑥ 학구재, 지락재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 일신재(直方齋, 日新齋)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었다. 학구재란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건물의 형태를 살펴보면 중앙의 우물마루 좌우로 각각 온돌방 1칸을 둔 학구재와 달리 지락재는 1칸의 온돌방 외에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로 처리해 외부공간과 마주하도록 개방했다.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의 ‘工’자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⑦ 전사청전사청은 문성공묘 뒤쪽에 남향으로 자리하며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해두던 곳으로, 건물의 규모는 전면3칸 측면1칸이며 2칸은 마루로, 나머지 1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그 위치는 문성공묘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 춘추향사에 집사들이 제물을 장다.
    인문/어학| 2009.02.23| 31페이지| 5,000원| 조회(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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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문화유산 강의 관련 불교문화유산 레포트 평가A+최고예요
    강 의 명 :담당교수 :불교문화유산- 우리 역사와 문화를고이 간직한 보물 창고제 출 일 : 200 . .학 과 :학 번 :성 명 :Ⅰ. 불교 문화 유산에 대해서삼국시대부터 도입한 불교로 인해 불교의 사원인 절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고이 간직한 대표적인 보물 창고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의 절반 이상이 불교 문화 유산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알기 위해서는 불교 문화 유산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Ⅱ. 불교와 절에 대한 이해?1. 불교의 발생과 전파1) 불교란 어떤 종교인가?불교를 간단히 정의하면 석가모니를 모범적 모델로 삼아서 그의 가르침을 밑바탕으로 정신을 수양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부처를 스승으로 삼고 세상의 온갖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종교이다. 누구나 스스로 수행하고 정진하여 부처가 될 수 있으니,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은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만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2) 불교의 발생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기원전 7세기 인도의 왕족으로 태아났다. 그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며 흔히 석존, 다시 말해 석가모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외쳤다. ‘하늘 위와 하늘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다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여기서 ‘나’는 석가모니 자신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극심한 신분적 차별 속에서 살아가던 당신의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해당된다. 다시 말해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인간의 운명은 절대적인 신에 의해 좌우되거나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다는 숙명론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종교사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3)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석가모니 열반 후 급속한 발전을 보이던 인도의 불교는 이후 여러 계파로 나뉘어 서 그것이 바로 ‘죽림정사’이다.인도에서 생겨난 승려들의 수행처를 인도말로 상가람마(samgharama)라고 했다. 이것이 精舍(정사)라고 번역되었다. 정사는 거주지 즉 거주하는 곳이라는 뜻이다.‘가람’은 인도말 ‘상가람마’를 중국에서 ‘승가람마’(僧枷藍摩)로 표기하다가 줄여서 가람으로 불렀으며 ‘寺(사)’라는 명칭은 불교가 중국에 전파될 때 당시의 관청이름에서 유래했다. 한나라때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머물게 하던 관청으로 ‘홍로사’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중국에 온 인도의 승려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머무는 곳을 寺(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중국에서는 절을 가리켜 사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院(원)은 주위에 회랑이나 담장을 두른 집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사와 원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寺(사)를 넓은 의미로 院(원)은 절내의 특수한 기능을 하는 곳을 가리킨다.한편 절을 寺刹(사찰)이라고도 하는데 刹(찰)이란 탑이나 깃대의 중심부를 일컫는 말이다. 대체로 절 앞에는 ‘찰’ 즉 당간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찰이 곧 절을 일컫는 말이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되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절에 오면 ‘절’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승려 아도가 ‘毛禮의 집’에 숨어 살았는데 모례 즉 털례가 덜로 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2)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전통 사찰우리나라에는 1만여곳의 사찰이 있는데 서울 조계사를 중심으로 25개 교구로 나누어져 각 교구를 관할하는 중심사찰이 있다. 경기도의 용주사, 봉선사, 강원도의 신흥사, 월정사, 충북의 법주사, 충남의 마곡사, 수덕사, 경북의 직지사, 은해사, 고운사, 불국사, 대구의 동화사, 경남의 해인사, 쌍계사, 통도사, 부산의 범어사, 전북의 금산사, 선운사, 전남의 백양사, 화엄사, 송광사, 대흥사, 제주도의 관음사가 각 교구의 본사에 해당하는 큰 사찰이다.흔히 삼보사찰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삼보 사찰의 삼보는 불,법,승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문에 잡귀를 물리치는 비방이나 부적을 붙였다. 용(龍)자나 호(虎)자를 써서 붙이기도 하고, 입춘대길 또는 개문만복래 등의 글귀를 써서 붙이기도 했다. 또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절에는 문이 많다. 부처가 있는 절 중심부의 대웅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관문을 지나야 한다. 무협지에서 무술의 고수가 되기 위해 여러 위험이 있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듯이 부처를 찾아가는 길은 멀기도 하다. 부처를 찾아가지 위한 절의 문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이 그것이다.1) 일주문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건축 형태와는 달리, 일주문은 일직선상의 두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두개의 기둥이 큰 지붕을 받치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건축형태이다. 게다가 기둥은 땅을 파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초석 위에 얹어 놓기만 한다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일주문은 정교한 과학적 균형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건축물인 것이다. 서양의 건축가들도 일주문의 건축 역학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겉모양의 안정감을 무시한 채 독특한 양식으로 일주문을 세운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여기서 기둥을 일렬로 세운 것은 일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거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한마음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부처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면서 이 문에 들어서라는 것이다.2) 천왕문과 금강문첫 관문인 일주문을 통과하여 오르다 보면 절의 중문에 해당하는 또하나의 문이 나온다. 이번에는 제법 문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다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험상궂은 모습의 장수 네 명이 문을 지키고 서서 출입하는 자를 조각의 예술성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성이란 말에 특별히 주눅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면 된다고 본다. 바라보았을 때 무언가 느낌을 주는 불상이 종교적으로도 성공한, 잘 만들어진 불상이 아닐까 한다.1) 불상 조각의 기준불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보통 사람과는 달리 독특한 모습이 보인다. 이마 가운데에 있는 반짝이는 보석이라든가, 봉긋하게 솟아 있는 머리 위 등이 특이한 모습 등은 불상에 부처의 존엄성과 신성함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과는 다른 특징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를 32길상이라고 하며 이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80종호라고 한다. 이러한 특징은 인도 불상에서부터 중국, 한국, 일본 기타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불상 조각의 기준이 되고 있다. 경전에도 32길상을 벗어나서는 불상을 만들 수 없다고 되어 있다.머리 위에 돋아난 부분을 육계라고 하고 눈썹 사이의 흰털은 백호라고 하는데, 모두 불상 조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백호는 부처의 길상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인데, 빛을 발하는 백호는 실제로는 수정과 같은 보석으로 표현한다.2) 불상의 광배와 대좌? 부처가 앉는 자리는 보통 연꽃 위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지만 잎에는 더러운 것이 묻지 않고 미끄러져 오염되지 않으며, 맑은 꽃을 피운다. 또 꽃잎 하나하나가ㅏ 바큇살 같이 생겼다. 이것은 윤회를 상징하는 수레바퀴, 다시 말해 법륜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연꽃은 부처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꽃이다. 때문에 부처는 연꽃 모양의 대좌인 연화좌에 앉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신성한 것이나 연꽃 위에는 부처나 보살만 앉을 뿐 다른 무리들은 앉을 수 없다. 아울러 연꽃은 불교의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조형화되어 사찰 건축 양식이나 기와, 광배 등 불교 미술의 주요 문양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3) 불상의 재료 및 자세불상을 만드는 재로는 다양하며 아무 제한이 없다. 금불, 청동불, 철불, 석불, 건칠불, 소조불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이 출현했다. 미륵은 현재는 도솔천에서 중생의 구제를 위해 고민하고 있는 보살이지만, 세상이 혼란한 말법 시대에는 이 세상에 내려와 부처가 되어 인간을 교화할 것이라는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전에는 미륵보살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고, 미륵불을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미륵전은 미륵에 의해 새로이 펼쳐지는 용화세계를 상징한다고 하여 용화전이라고도 핟나. 삼국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도솔천에서 중생의 구제를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③ 명부전명부란 저승을 말한다. 따라서 명부전은 저승 세계를 절에 옮겨 놓은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저승의 신판관인 십대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한다.4) 그 외① 조사당절에서는 부처나 보살만을 모시는 것은 아니다. 승려를 모시는 전각도 있다. 조사당은 절의 창건주 또는 후대에 존경받는 스님의 영정이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② 장경각부처의 가르침을 책으로 엮어 놓은 것이 불경이다. 이 불경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을 장격각이라 한다. 불경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존하고 있는?전각을 장격각 또는 판전이라고 한다. 봉은사 판전은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으로 더 유명하다.③ 가람각가람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말 그대로 절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전각을 말한다. 부처가 있는 수많은 호법신중이 있는데도 절을 지키는 별도의 신을 모신다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온갖 잡신과 다른 종교의 신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불교의 관대함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5) 토속신이 수용된 건물불교가 여러 나라로 전파된 뒤에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변형되어 발전했다. 불교의 포용력과 관대함이 각 나라의 토속 신앙을 수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군상을 세우는 것마저 우상숭배로 생각하는 개신교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료라고 할 수 있다.① 산신각산신각에는 대개 산신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항상 호랑이와 함께 묘사되어 있어 쉽게 구별된다. 있다.
    인문/어학| 2009.02.23| 24페이지| 3,000원| 조회(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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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욱 단편 나가사키 내 사랑 비평
    강의명 :교수명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본김경욱의 제 출 일 : 200 . .학 과 :학 번 :성 명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본 김경욱의 목 차1. 머리말2. 객체로서의 여성의 모습3. 주체로서의 여성의 모습4. 맺음말1. 머리말김경욱의 은 39세의 유부녀와 27세의 대학생의 불륜이 주요내용이다. 주인공 ‘나’는 27살의 휴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곳에서 39세의 유부녀 ‘별’을 만나게 된다. 이 둘의 만남은 어찌 보면 타락한 현대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부유한 연상녀와 가난한 연하남의 원조교제로 치부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매개로 일어나는 관계도 허다하다. 따라서 주인공 ‘나’가 소설 속에서 ‘갑’과 ‘을’의 계약관계를 그들의 관계로 대입시킨 것으로 그 둘의 관계를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나가사키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인 ‘나’의 자아 찾기에 연관을 지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 ‘나’에 초점을 맞추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 간의 매매 관계 형성이나 도덕, 윤리 등의 잣대가 무너진 현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하는 인간의 모습보다는 주인공 ‘나’가 말하는 ‘별’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이해관계에서 확장하여 ‘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여성의 위치와 성적 주도권의 변화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에 대해 비평을 하고자 한다.2. 객체로서의 여성주인공 ‘나’가 본 ‘별’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활과 미래에 대해 행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결혼을 하는 과정도 그랬고, 결혼을 한 뒤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p.13-14별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상대는 졸업식 날 아버지가 데려온 남자였다. 당시 남편은 별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대학병원의 촉망받는 외과의였단다. …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성실한 사람이라는 짤막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표정이 쓸쓸했다. 별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에 인색했다.p.15몸매유지를 위해 제왕절개를 원했지만 남편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자연 분만했단다.p.19-20남편과 오페라를 보고 왔다는 별은 몹시 침울했다. 오페라가 재미없었냐고 물었더니 묵묵부답이었다. 성난 얼굴인가 싶더니 급기야 눈시울을 붉혔다. 자기 생일인데 남편이 좋아하는 옷을 차려입고 남편이 보고 싶어 하던 오페라를 보고 남편이 즐기는 음식을 먹고 남편이 애호하는 와인을 마셨다고 했다. 무엇보다 내내 남편의 병원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는 것이었다.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자랐을, 그리고 현재에도 풍요롭게 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을 하지 못한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를 안고 살지만, 실제로 정체성과 관련해서는 그녀의 삶은 돈에 의한 사육에 가까운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의 존재는 단지 남편의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 따라서 결혼생활의 주체는 그녀의 남편이고, 그녀는 그의 결혼생활에 포함되는 부속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즉 그녀의 존재는 결혼 생활의 객체이며, 그녀의 인생 또한 그녀 스스로의 인생이 아니라 남편의 삶에 종속되는 객체적 삶인 것이다.이는 과거 우리나라 여성의 결혼 생활과 다르지 않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라고, 결혼을 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르라는 ‘삼종지도’는 여성의 주체적인 삶보다는 그저 남성의 사회적, 가정적 위치에 종속된 여성의 삶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따라서 남편의 의사에 따라야만 하는 그녀의 삶은 조선시대 여염집 아낙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인간관계에서의 종속적인 행태와 마찬가지로 소비적 행태에서 역시 그녀는 남편의 물질적 산물에 부합되는 행동을 한다. 딱히 직업이 없는 그녀는 수영을 하고, 피부관리를 받고 외제차를 끌며 외국 브랜드의 옷을 입는다.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도 그녀가 소비하는 부분에 관한 표현이 있을 뿐, 경제적 생산에 관한 표현을 나타나지 않는다.p.16그녀는 늘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주문해 먹었다. 타미 힐피거나 랄프 로렌 티셔츠를 자주 입었고 폭스바겐 골프를 몰았다. 차 값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로 결재했다. 골드 회원이었다. 모토롤라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했다.p.17한 달에 몇 백만원이나 하는 피부클리닉 프로그램 덕인지 별의 민얼굴은 보기 좋았다.그녀의 소비활동은 단순히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피부클리닉으로 피부관리를 받고 수영을 하며 몸매관리를 한다. 그리고 멋지게 커피를 마시고 치즈 케이크를 먹는다. 골드카드를 꺼내드는 그녀의 삶은 외면적으로는 화려해보이지만, 실제 그녀가 사고하고 존재한다고 느끼게 하는 행동은 없다. 이는 그녀가 읽는 책에서도 나타난다. 요시모토 바나나부터 에쿠니 가오리까지, 그녀가 좋아하는 일본작가들의 책들은 감성에 호소하는 가벼운 문체의 소설들이지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사고를 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p. 24나는 남편 품에 몸을 내맡긴 채 계속 울먹여. 투명인간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 나는 점점 지워지고 있어. … 지워진다고? 내가 물었다. 말 그대로야. 언제부턴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이목구비의 윤곽이 클렌징크림으로 지운 것처럼 흐릿해. 갑자기 시력이 나빠졌나 의심이 들 정도야. 나도 모르게 화장이 점점 짙어져. 백화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다. 거울 속에 웬 가부키 배우가 있는거야 남편과의 외출 후 돌아와 화장을 지우고 있노라면 덜컥 겁이 나. 이 화장을 모두 지우면 내 얼굴도 사라지는 건 아닐까.그러나 종속적이고 객체적이며 소비적인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점점 자기 자신에 대해 찾기 시작한다. 이전의 삶이 지루함과 권태의 연속이라면 ‘나’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에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 ‘별’은 그녀만의 세계 구축에 힘을 싣게 된다. 이는 남편이 ‘별’에게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그 행위의 주체자로, 그리고 ‘나’를 그 행위의 객체로 만들면서 이루어진다.3. 주체로서의 여성p.19별은 자기주장이라는 것이 없는 자신을 혐오했다. 자기 세계를 갖고 싶다고도 했다. 별은 남편이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얻기 위해 그날 밤 나를 가졌다. 충동적인 섹스를 통해 별은 내밀한 자기 세계를, 나는 우아한 스폰서를 얻었다.p.18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사준다. 게다가 밥값부터 모텔비까지 둘이 만나서 쓰는 경비 일체를 부담한다. 다른 건 몰라도 모텔비만큼은 내가 치르고 싶다고 했더니 웃으며 말했다. 딴에는 수컷이라고. 한 번은 내 곤궁한 형편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았더니 십만 원짜리 수표를 내미는 것이었다. 장학금이라고 생각하란다.p.23남편과의 데이트가 끝나면 별은 나와 영화를 보거나 대중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 별이 보고 싶어 하는 영화를 보고, 별이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장을 찾았다. 남편과는 칸 영화제 수상작을 보고 나와는 로맨틱코미디를 보았고 남편과는 현약 4중주를 듣고 나와는 비의 공연을 보러갔다.p.28남편과의 삶에서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나와의 만남을 통해 찾으려는 듯 별은 나와 만날 때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했다. 만나는 시간과 장소, 만나서 할 일, 심지어 체위까지. 나와 시간을 보낼 때 별은 대담했고 적극적이었으며 활기에 넘쳤다.p.36나는 별에게 받기만 해서 그녀에게 준 것이 하나도 없다. … 그녀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 한다. 섹스를 할 때조차도 콘돔을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서 끼워준다.‘별’은 경제적인 주도권을 바탕으로, 남성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고, 경제적인 결핍을 지닌 ‘나’는 그녀의 주도권에 이끌려가게 된다. ‘별’이 남자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생물학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미성숙한 남자여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나’는 그녀의 종속물이 된다. 그녀는 ‘나’와의 만남을 토대로 남편과 하지 않은 것들을 하고자 한다. 과거 그녀의 삶이 남편의 기호에 따른 삶이였다면 ‘나’와의 만남은 그녀의 기호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는 물질적인 것을 보상으로 ‘나’와의 만남을 지속했으며, 그러한 만남을 그녀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와의 성행위에서 체위까지 자신의 기호로 점령했다는 것은 남편과의 성행위에서 억눌려있음을 암시하며 이를 해소하고자 ‘나’와의 자유분방한 성행위를 한다.이는 현대여성의 성생활과도 연관이 있다. 과거 여성들의 입에 성행위에 관한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지만, 그녀들의 결혼 후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성행위를 통한 생식활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행위는 쾌락보다는 생식에 치중한 행위였고,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여성들의 성생활은 남성들에 비해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여성들의 성생활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의 우리나라 흥행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성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매체가 없었다. 그러나 네 여성들의 평범한 일상(이 일상에는 성생활도 포함이 되어있다.)을 그린 이 드라마는 케이블에서 방영한 이후 커다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 가장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영위한 주인공인 ‘사만다’는 유명배우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성행위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관계인 육체관계에서의 우위에 올라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적인 주도권을 잡고 있는 ‘별’은 ‘나’보다 사회경제적 우위에 올라서는 것과 동시에 근원적인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문/어학| 2009.02.23| 7페이지| 2,000원| 조회(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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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문화유산 강의 관련 풍속화 레포트
    강 의 명 :담당교수 :풍속화(風俗畵)- 조선시대 사람들의 멋제 출 일 : 200 . .학 과 :학 번 :성 명 :Ⅰ. 풍속화의 흐름과 의의)1. 풍속화의 보편성넓은 의미의 풍속화는 일정 시개의 세정(世情)과 풍습을 나타난 그림 전체를 지칭한다. 사회 각층의 생활상을 소재로 하되 생활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의례?신앙?놀이?잔치?생업장면 등이 모두 포함된다.우리 나라와 문화적으로 긴밀한 중국의 풍속화는 일찍이 인물화의 한 분야로서 발전해왔다. 오늘날 중국의 사회민속파로 불리는 역대 화가들은 당대의 사회상과 풍정을 관찰하여 세밀하고 힘찬 필법에 따라 묘사하였다.장택단의 중 핵심부분인 무지개다리(홍교) 부근)또한 일본에서는 17세기 신흥도시로 크게 부각된 에도를 중심으로 우키요에(浮世?)가 꽃을 피웠다. 아울러 경제적인 번영을 배경으로 각양의 생화장면이나 유녀(遊女), 광대를 소재로 한 야꾸샤에와 미인화의 두 부류로 나뉘어 발전하였고 향락적인 훈화도 목판화로 많이 제작되었다.2. 조선 이전 그림의 풍속적 소재조선후기(1700~1850년경) 화단에서 크게 유행한 풍속화는 동시대의 진경산수화와 더불어 크게 풍미되었던 화목으로, 당대에는 속화(俗畵)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풍속화는 이들 속화 외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꾸준히 제작되었던 궁중 제반 행사를 담은 의궤도와 양반 관료층의 아취와 시정을 드러낸 계화도 등의 기록화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 조선시대 풍속화의 성격을 관(官) 또는 공공적(公共的)인 성격을 띠는 것과 시정적인 내용의 것으로 양분하거나 사인풍(士人風)과 화원(畵員風), 그리고 여속(女俗)과 춘의(春意)가 두드러진 것으로 삼분하기도 한다.풍속을 다룬 그림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분명히 제작되었을 것이나 고구려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그 현존 예가 극히 드물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풍속화 연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존한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묘실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 및 양식에 의해 세 시기로 구분함이 일반적이다. ‘사신도’가고려불화에 있어 일본 교토 지은원(至恩院) 소장 등의 세부에서 풍속화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오늘날 다수 현존하는 조선시대 )도 같은 양상으로 풍속화 범주에 속한다.3. 조선시대 풍속화의 기원과 흐름조선시대 풍속화는 그림이 지니는 독자성과 예술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미술사학계 회화사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아왔으며 타분야에 비해 두드러진 연구성과를 이룩하였다.조선시대에 풍속화가 크게 유행하였던 시기는 영조(1724~1776)부터 순조(1800~1834) 초까지다. 이 시기는 전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아울러 일반 서민계층의 사회적 역량과 자각의식이 점차 부각되는 때이다. 당시 문헌에 나타난 속화(俗畵)라는 용어는 양반사회의 전통적인 시각으로 볼 때 문기(文氣)가 결여되었다 하여 천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반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들의 정서와 삶의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였던 시정의 잡사, 양반의 풍류, 경직도, 여색이 담긴 춘의도 등을 지칭하는 개념이었다.조선 후기 풍속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일반화되어 있다.첫째는 서민경제의 발달에 의한 향락생활의 추구과 서민의식의 성장에 따른 문화적 욕구의 확산에 기인한 풍속화는 실학의 발달과 연관을 두는 등 내재적 요인에서 찾는다.둘째는 조선 초부터 국왕의 안일과 향락을 경계하고자 제작한 무일도(無逸圖)나 중국에서 전래된 경직도(耕織圖) 등과 관련시켜 그 기원을 앞선 시기의 화풍이나 외국과의 교류에서 찾는다.이것은 문화발달의 범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 기인한다.셋째는 사상사의 측면에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등장과 동일 맥락에서 해석하였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주자성리학을 조선적으로 새롭게 발전시킨 문화적 자긍심에서 비록된 제양상의 한가지로 본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 후기 사회문화 전반에 팽배한 긍지와 자신감이 조선의 자연과 조선인의 삶을 그림의 소재로 확산시켰다는 것이다.모든 분야의 그림에서 과감하고 새로운 변화는 전문적인 직업화가가 아닌 여기적인 문인화가에 의해740) 또한 과 같은 풍속화를 남겼다. 특히 조영석의 미완성 화첩인 《사제첩(麝臍帖)》이 문중에 비장되어 오다가 최근 공개되어 조영석이 속화에 쏟았던 남다른 관심을 엿볼 수 있다.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경직도류를 풍속화에 원용한 및 몇몇 소품을 남겼으며 문인화의 높은 격조를 잘 드러낸 이인상(李麟祥, 1710~1760) 또한 ? 등을, 18세기 화단에 있어 예원의 총수인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은 진경산수 및 속화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 자신 또한 같은 이 분야의 유작이 있다. 따라서 그 또한 풍속화단의 흐름과 발전에 있어 간과될 수 없는 화가이다. 이들 문인화가들은 18세기 중엽 이전 비교적 이른 시기의 풍속화를 남기고 있다.문인화가 외에 화원 풍속화가로서 시대가 이른 사람은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남리(南里)라는 호를 하사받은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을 들 수 있다.조선 후기 풍속화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와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의 두 천재 화가를 정점으로 만개하게 된다. 이들과 함께 풍속화에서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한 화가로는 신한평(申漢枰, 1735?~1809 이후)이 있다. 그는 30년 이상 화원직에 종사하였으며 어진 제작에도 세 차례나 참가한 자비대령화원이었다. 신윤복의 부친이기도 한 신한평은 를 남겼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신윤복 풍속화의 진원지를 짐작할 수 있다.이외에도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은 윤두서 그림을 모방한 와 시를 짓고 그림 그리며 활 쏘는 모습을 세 폭에 담은 를 남기고 있다. 문인화가에 의해 시작된 속화는 다수의 뛰어난 화원들에 의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4. 풍속화의 절정과 쇠퇴김홍도의 김홍도는 도석인물화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여 어진제작에도 선발되었고, 산수?인물?화초?영모?사군자?불화?서예 등 전통회화의 모든 분야에서 예외 없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천재화가였다. 그는 남종 문인화와 실경 산수화의 기법을문인화풍의 산수화와 영모 분야에서도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다. 김홍도와 달리 문헌상의 기록이 영성하며 아직까지 정확한 생몰년이 밝혀져 있지 않다. 신윤복의 속화는 당시 파격적인 소재인 기방, 기녀 그리고 양반과 기녀의 풍정을 주제로 하였으며 도시적인 세련미가신윤복의 깃들어 있다.이 두 거장과 함께 삼대 풍속 화가로 꼽히는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김홍도와 친연성이 큰 풍속화첩과 병풍류를 남기고 있으며 몇 가지 주제를 함께 다룬 정형화된 양상을 살필 수 있다. 이외에도 풍속화는 김석신(金碩臣, 1758~1816 이후)?이재관(李在寬, 1783~1837)?백은배(白殷培, 1820~1900 이후)?유숙(柳淑, 1324~1368) 등 일군의 화가들에 의해 큰 조류를 이루었다.김득신의 한편 19세기에 이르러 풍속화는 김정희 등 청대 고증학에 근원을 둔 새로운 문인화풍의 강세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목되는 것은 중인계층인 여항문인(閭巷文人)들의 모임을 다룬 그림들이 다수 남아 있어 화격과는 별개로 시대 변천을 알려주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 시기의 진경 산수는 영?정조대의 절정기와는 달리 지도와 같은 형상으로, 풍속화는 조악한 춘화로 잔존되며, 김준근(金俊根)의 《기산풍속화첩》에서처럼 외국인을 위한 민속화류로 변모하여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많이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5. 풍속화의 의의조선 후기 화단을 풍미했던 풍속화는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첫째, 풍속화는 소수의 화가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유행한 것이 아니라 문인화가와 직업화가의 구별없이 동시대 대부분의 화가가 두루 참여하여 괄목할만한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진경 산수화본에 의지하던 구태의연한 관념 산수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실제 산천을 화폭에 담아 어엿한 회화미로 승화시켰듯이, 조선시대 풍속화 역시 화본이나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닌 살아 숨쉬는 화가 주변의 인물을 모델로 했따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진경 산수와 맥을 같이 하면서 다채로운 내용을 소재 측면에서 중차대한 의의를 지닌다. 현대 한국화가 나갈 진로와 방향을 제시하는데 조선시대 풍속화의 힘과 영향력은 실로 크다 하겠다. 화가는 그가 몸담고 살아 호흡한 그 시대를 바탕으로 출발하되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불멸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을 최고의 지표로 삼는다. 조선시대의 풍속화는 단순한 과거기록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명품이며 수작들로 높은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그 생명력은 생생하게 오늘날까지 이어져 새로운 창작의 밑거름이자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일반인들은 감상을 통해 선인들의 미의식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함께 삶에 대한 낙천성, 익살과 여유가 깃든 유연한 삶의 자세 등을 읽을 수 있다. 그림 이면에 담긴 무형의 정신을 깨닫는다. 이것은 바로 전통 문화에 대한 효용성을 뜻한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통하여 맑고 밝은 민족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이 지닌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Ⅱ. 풍속화의 소재조선시대 풍속화는 그 소재에 따라 유교적 이념에 따른 것, 사대부들의 아취와 풍류에 따른 것, 그리고 백성들의 생업과 휴식에 따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1. 유교적 이념에 따른 풍속화조선시대 풍속화의 소재 중에는 유교적 정치이념이나 도덕규범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되는 것이 많다. 유교적인 덕치를 위하여 역대 제왕이나 본받을 만한 인물을 그린 영정, 충효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등의 , 민생과 관련된 등의 빈풍칠월도류 회화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궁권이나 관아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를 그린 기록화를 비롯하여 도시 풍정과 농촌 향속을 묘사한 것에 이르기까지 유교적인 소재의 범위는 실로 광대하다. 이와 같이 권계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사실을 그림으로 제작하게 된 목적은 국가와 백성을 다스리는 군왕이 이러한 그림들을 항상 보고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치국의 도를 펴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는 백성들의 생활상을 담은 그림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백성들의 생업의 노고를 깨닫게 하고 바른 정치를 펴도록 하는 정교적다.
    인문/어학| 2009.02.23| 12페이지| 3,000원| 조회(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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