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통일정책 - 닉슨 독트린 내용 - 주한미군 감축 -> 자주국방과 한반도 평화정책 추진 필요성<중 략>1993 통일정책 - 3단계 3기조 통일방안내용 - 3단계(화해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 3기조(민주적 국민합의, 공존공영, 민족복리)의 통일정책김영삼 정부의 통일 정책1994년 8월 15일통일정책 -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내용 -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3원칙(자주, 평화, 민주) + 3단계통일방안(화해협력, 남북연합, 통일국가완성
귀족연립정권의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그동안의 연구사 정리에 대한 필요성을 절 감하였다. 기본적으로 학계에서는 귀족연립정권에 대해 비교적 수긍하고 받아들이 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귀족연립정권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귀족연립정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향, 귀족연립정권을 인정하지 만 그 시기를 다르게 보는 경향, 마지막으로 귀족연립정권을 일시적 현상으로 생각 할 뿐 대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연구도 존재한다. 이에 따라 연구사 정리가 필요 하다고 느꼈고 앞으로의 연구 과정에 필요한 과정이므로 이 글을 쓰게 됨을 밝힌 다. 귀족연립정권 연구에 있어 그 시기만을 바라보기 보다 그 시기와 연관 된 다른 주 제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했다. 우선 귀족연립정권의 단초가 되는 ‘대대로 (大對盧)’에 대하여 정리해 보았다. 대대로는 그 선임과 관련하여 상쟁기사1)가 등장하고 그것으로 귀족연립정권의 단초가 되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정리는 꼭 필요 하다고 할 수 있다. 대대로는 대로에서 파생 된 것으로서 이와 관련 되어 대로가 등장하는 시기와 대로의 성격 그리고 대대로가 언제 처음 등장하고 대대로의 성격 에 대해 각기 다른 시선의 연구 논문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상위 5관등으로 군국정사(軍國政事)를 관장하던 회의체2)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해 중기 이후의 회의 체에 관련 된 견해들도 살펴보았다. 회의체 자체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여 그 견해 가 소략하지만 귀족연립정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의체에 대한 이해도 분명히 필 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짧지만 그 견해를 정리해보았다. 다음으로 귀족연립정권을 인 정하는 측면에서 각기 다른 귀족연립정권의 시기에 대한 견해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 기간은 각기 달라 6세기 중반 이후부터 멸망, 혹은 일시적인 기간 등 각각의 견 해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견해가 나오게 된 근거에 대해서도 귀족연립정권을 이해하 는데 필요 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지도 – 제작 17세기작가 – 가마카미 히사요시우산도를 독도로 표시하고 울릉도와 우산도를 조선령으로 표시하고 있다죽도 도해일건기 내부지도 (제작: 1836년)작가 – 하치에몬죽도도해일건기는 울릉도에 불법으로 도해 한 하치에몬을 신문한 기록으로 내부에 하치에몬이 스스로 그려 넣은 지도에 보면 울릉도를 죽도, 독도를 송도로 기록하면서 그 색을 조선반도와 같은 붉은색으로 표시하면서 죽도와 송도가 조선령으로 인식 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선사 문화1. 구석기 문화- 구석기 시대는 석기를 다듬는 방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 된다.<중 략>2. 신석기 문화 (기원전 8,000년전 경)- 빙하기가 끝나가고 작고 빠른 짐승이 나오면서 석기의 사용법도 발전하게 되었다. 작은 석기를 점점 갈아서 사용하게 된 간석기가 그것이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되었고 지열을 이용하기위해 움을 파서 만든 움집이 지어지면서 작은 마을이 형성 되었다. 곡식을 생산하는 생산자가 되면서 그것을 저장 할 토기를 만들게 되었다. 농경의 시작으로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원시적 형태의 종교가 탄생하게 되었다주거바닥원형의 둥근 모서리가운데 화덕자리남쪽 출입구와 주변의 저장구덩이생활농경은 후기에 번성 아직은사냥 채집, 어로가 주된 경제평등한 혈연중심의 씨족사회종교애니미즘 – 자연물 숭배토테미즘 – 특정 동식물 숭배샤머니즘 – 초월적 존재인 샤먼을 통해 하늘과 연결됨을 믿음
논문고구려 국내성 천도에 대한 재론-장지명의 故國을 중심으로-이우열국문초록기존의 국내성천도와 관려되어 여러 설이 제기되어 왔다. 儒理王代 천도설, 太祖王代 천도설, 新大王代 천도설, 山上王代 천도설 이 그것이다. 유리왕代의 천도설은 비교적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설이며 기존 학계의 통설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설이다. 그리고 태조왕代의 왕계 단절, 신대왕의 졸본으로 가는 시조제사 기사 그리고 『삼국지』 고구려전에 전하는 “更作新國”의 산상왕 기사 등을 각각 근거로의 단초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설은 어느 정도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종래의 연구성과를 제시하고 각 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지적하고 또 하나의 설을 제기하고자 한다. 또 하나의 異說을 제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국내성천도에 대하여 재론의 여지를 두고자 함이다. 기존의 여러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모두 졸본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시기와 그와 관련하여 儒理王代의 위나암성의 묘사를 중심으로 그 위치가 지금의 집안인지 환인 지역인지를 중심으로 하는 논의만 진행 되어왔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도 물론 지금의 연구 성과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졸본과 국내성 지역만을 놓고 논의가 이루어 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삼국사기』太祖王代의 홍수기사를 중심으로 다른 異說을 제기하는 근거로 삼고자 한다.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은 그 기록의 묘사를 통해 산성으로 묘사 된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이 성의 위치를 밝히는 연구에만 집중할 뿐 필자가 근거로 제시할 太祖王代 홍수기사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은 듯 하다. 필자는 이러한 이유로 太祖王代 천도설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는 기존의 太祖王代 천도 혹은 改都설과는 다른 지금의 집안 지역이 아닌 집안 시대와 졸본 시대 사이에 있던 또 하나의 王都를 계루부와 國의 의미 그리고 태조왕代의 홍수 기사를 근거로 제시하며 추정 하고자 한다. 제기하고자 하는 說은 기존에 太祖王의 왕系 단절에 근거를 두못하게 하는 한계로도 지적 된다고 할 수 있다.초기 왕계의 문제유리와 송양의 관계『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2대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 解氏성을 전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전승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사서의 전승에 유의하여 다음 기사가 주목 된다.2년 가을 7월 다물侯 송양의 딸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았다유리왕 2년에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는 기사이다. 유리왕과 송양의 딸과의 혼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류와 온조가 유리와의 왕계에서 밀려 남으로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지게 되는 의문점은 주몽 역시 토착계와의 결합을 통해 고구려를 건국 했다는 기록에 대한 의문이다. 이 같은 기록이 사실이라면 주몽이 건국초기 토착계를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왕권이 공고해 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기사를 보아도 추정이 가능하다.2년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임금을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한 까닭에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송양의 항복을 받고도 그곳을 직속령으로 삼지 않고 다물도로 이름하고 송양을 그곳의 임금으로 봉한 것은 주몽이 아직까지 내적인 왕권을 공고히 하지 못한 방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재주를 가려 이미 송양의 기를 누른 기록이 존재 함에도 송양이 바로 항복하지 않고 그 1년 후 나라를 들어 항복한 것 또 한 그 방증의 하나로 볼 수 있다.이런 가운데 아무리 부여에서 가진 첫 아들이라 해도 주몽이 유리를 태자로 삼는데에는 정치적 무리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토착계인 비류와 온조 세력이 이를 수긍 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유리왕이 즉위 직후 송양의 딸을 받아들여 왕비로 삼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부여에서 남하한 유리세력은 토착계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송양을 선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송양 역시 주몽의 출현으로 지역의 주도권을 내준 것을 못마땅하게 여 성은 환인 지역의 오녀산성이다. 오녀산성에는 ‘天地’라 불리우는 못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 못에는 최대 168㎥ 물을 저장 할 수 있는데 이는 168,000리터의 양이 된다고 한다. 이는 오녀산성의 식수가 하나의 왕성을 형성하는데 절대 부족함이 없는 식수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초기부터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불안정한 초기국가단계에서는 산성의 입지가 더 합리적이지 않나 생각 되는데 그래서 필자는 이 오녀산성이 왕성이자 도성이었다고 생각한다.이 가운데 유의 되는 것은 태조왕대의 홍수기사와 산성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태조왕대의 왕도가 국내성 역시 아니었다. 이는 국내성의 고고학적 발굴로 3세기 이전으로 축성을 볼 수 있는 면에 무리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국내성은 1975년 발굴에 발견 된 토축으로 인해 漢 대의 縣城으로 오해 되기도 했지만 2003년의 같은 북벽의 발굴에 토축은 발견 되지 않았고 이 같은 축성은 연천군 고구려성과 비슷하여 고구려만의 독특한 축성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장 이른 시기의 와당으로 ‘갑술명’와당이 발견 되었는데 247년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았다는 기록을 비쳐 보면 3세기 중반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가지를 토대로 생각해 볼 때 집안의 국내성은 태조왕대의 왕도라고 볼 수 없다. 홍수기사처럼 물에 잠기고 백성의 집이 떠내려 가는 등의 기사에 등장하는 왕도는 오녀산성과 지금 집안의 국내성 두곳 다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國內 위나암성에서 國內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國의 의미한자 사전에 國을 보면 그 두번째 뜻으로 도읍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 부여에 나오는 영고에 대한 기록중의 ‘國中大會’ 에서도 國은 나라가 아닌 도성을 의미한다. 또 國을 왕도 범위 전체를 國으로 인식했던 느슨한 개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의 해설서인 『춘추좌씨전』의 은공 11년 편에도 “國은 국내 지역에 다다른 것이라면 과연 國內 위나암이라고 썼을 필요가 있었을까?? 위나암이 굳이 붙은 이유는 저 지역이 같은 왕도로 인식되는 國內이고 그곳 중 위나암 이라는 곳에 도착한 것이라고 설명이 가능하다. 즉 國內 위나암성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國內가 아니라 위나암성인 것이다.장지명의 故國의 의미앞서 살펴 보았듯이 國의 의미는 왕이 사는 도시 즉 도읍을 가리킴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고구려 국왕들의 장지명에서 故國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장지명에 故國을 가진 왕들은 다음과 같다신대왕 – 故國谷고국천왕 – 故國川고국원왕- 故國原王고국양왕 – 故國壤그리고 비문으로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일컬어지며 그 장지명이 국강상으로 나오는 광개토 태왕이 있다. 이 국강상은 고국원왕의 이칭으로 고국원왕이 묻힌 故國源이 국강상임을 알 수있다. 즉 광개토 태왕과 고국원왕이 묻힌 곳은 동일한 故國인 것이다. 고국원왕과 광개토왕의 사례를 근거로 故國의 용례를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고국원왕의 이칭이 국강상왕인 이유는 평양 천도 이전 故國原이 國岡上으로 불렸음으로 추정 할 수 있는데, 당시 국내성이 당대의 인식의 國(王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후 평양 천도 이후 國岡上이 이전의 왕도라는 의미의 故國이 붙고 여기에 岡과 언덕이라는 의미가 통하는 原을 사용하여 故國原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구려가 427년 長壽王代 平壤으로 천도한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國이 왕도로서의 의미를 지닌 만큼 평양 역시 천도 이후 國이라는 의미로 불러졌을 것이다. 즉 故國이라는 장지명과 그 왕호 정리는 평양천도 직후 정리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비의 墓上立碑의 구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광개토태왕비는 장수왕대인 414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광개토 태왕의 묘상입비로 모든 전대의 왕의 묘에 비가 세워졌고 이 작업이 마무리 되고 수묘인제정과 법률들이 강화되어 제정 되어지고 난 후 의 연장작업으로 선대 왕들의 장지명 및 그에 의한 장지명왕호가 논의되고 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에 대해 신뢰성을 준다. 즉 이 기록 속의 “계루지고지”를 필자는 계루부 고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 되었던, 왕계의 변화로 계루부의 중심지가 되었던 그 곳, 즉 太祖王代의 계루부 중심지라고 보고 있다. 계루는 고구려의 계루부와 통한다. 그리고 舊唐書가 쓰여지거나 혹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멸망한 나라의 국호인 고구려와 다르게 계루라는 이름으로 고구려 왕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대의 기록은 천남생 묘지명의 “계루성업” 이라는 글씨를 보아도 확인 된다.舊唐書에 계루지고지는 천문령 전투의 대조영의 승리 기사와 이어진다. 천문령 전투에서 고려 유민과 말갈족이 합세하여 같이 협력하는 모습은 이 곳이 고구려의 중심지 역학을 하던 곳임을 연상 할 수 있다. 그리고 천문령 전투 기사의 같은 단락에 이어지는 “계루지고지”는 천문령부터 계루지 고지의 시작이 됨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럼 이 천문령과 동모산은 과연 어디 일까?대조영은 요령에서부터 계속 동진하였다. 이는 강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용강산맥이 있는 근처가 지정학적으로 분리가 이루어지는 그 지점일 것으로 보여진다. 필자는 퉁화시 일대로 보고 있다. 퉁화시에 있는 자안산성은 지정학적으로 서면의 퉁화분지가 한눈에 들어오며 고고학적으로 한 군현 현성이자 치소로 여겨진다고 하지만 한 군현 현성의 치소가 소규모 토성인데 비해 자안산성은 2.7키로 미터 규모의 대형석성이고 후기에 僚,金대 기와편이 출도 되고 주변의 관애 시설 등으로 보아 고구려때 역시 활용 되엇을 것으로 보여지는 산성이다. 당과의 전투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그 불안감은 여전했을 것이고 주변에 강이 흘러 자연적인 해자 역할까지 하면서 동진해왔던 대조영이 서면을 보기에 적합했던 이곳을 조심스럽게 동모산으로 추정해 본다. 그리고 이 주변에 있는 고구려초기 적석묘 역시 고구려 이후부터 사용 되었을 성으로 여기진다.이 자안산성으로부터 서북쪽에 해발 1082미터가 되는 산이 존재 하는데 이 지역이 천문령 즉 하늘 문 고개라고 일컬어질만큼 높은 고개를 뜻할 만큼 높은 곳이 AT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