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목인박물관답사기1 가는 길나의 답사기 그 마지막, 목인 박물관은 인사동에 위치해 있었다. 앞선 글에서 처럼 지방에서 대학을 올라와서, 여태 서울을 온지 군대2년을 제외하고서도 4년이 되었지만, 어째선지 인사동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박물관을 둘러보고 꼭 인사동 거리를 둘러보리라 다짐하고, 학교에서 151 버스를 탔다. 약 25분여를 지나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서 안쪽으로 들어가니 목인박물관을 알려주는 팻말이 보였다.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외부의 모습에 약간 신기했다. 더구나 1층은 내부수리 공사중인 건지 인테리어를 다시 하는 건지,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에 일하는 인부정도만 조금씩 돌아다닐 뿐이었다. 아무튼 2층으로 올라가니,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표를 끊어주며 ‘나오시면 차도 드리니 드시고 가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왼편으로 바로 여러 가지 목각 탈들이 벽에 걸려있었다.2 입구의 벽에 걸린 목인(木人)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박물관(박물관이라고 하기에도 조금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는)의 그 입구에는 손바닥 만한 것부터 큰 박 크기 정도까지의 다양한 목탈 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 ‘화상’이라는 탈이 유난히 인자하면서도 익살스런 표정으로 나의 눈길을 끌었다.『화상』: 소원을 비는 자의 마음이 진지하고 깨끗한가를 판단하고 소원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정성스러운지를 판단하고 신으로 하여금 소원을 이루어지도록 해 준다고 한다. 화상의 이마에 있는 동그란 무늬는 일설에 의하면 부처님의 두 눈썹 사이의 백호(흰눈썹)를 표방하였다고 한다. 불교에서 이는 지혜와 광명을 의미하는데, 광명을 무량세계에 비춘다고 한다.입구로 들어가니 왼쪽벽에 목인 의 뜻이 적혀있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종교나 주술,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써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 무덤 장식용인 목용(木俑), 종교 목상(불상 등), 귀신을 쫒고 복을 부르는 신상(神像), 제례 시에 사용되는 상여장식용 조각, 혼예 목안 등이 있다고 한다. 역시 선조들의 여러 가지 희망사항을 담아 정성을 들여 만든 작품 들일 것이다. 그리고 입구 안쪽으로 여러 나라들의 독특한 탈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입구의 크고 작은 다양한 모습의 탈들, 가운데 탈은 언뜻 보기에 큰데다가 무서웠으나, 좀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당히 익살맞아 보이는 얼굴 이었다 ^ ^3 내부 작품들과 감상 -1) 각국의 탈안에 들어가서 사실 처음 느낀 점은, ‘왜 이렇게 작품들이 간격이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을까’ 였지만, 이내 1층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한국 일본 중국 등 세계 각지의 목인(木人)(주로 아시아의 것이 많았고, 일부 티벳 등 불교권 나라의 탈들도 눈에 띄었다)들이 초등학교 미술시간이 지난 교실 후의 풍경을 연상케 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그것과는 사실 많이 다르긴 했다. (아니 어쩌면,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한 교실에서 만든 듯한 느낌은 가질 만 했다.) 분명히 그 공사에 쫒겨 2층으로 올라와 다른 친구(작품)들과 잠시 지내고 있으리라... 어쨌든 그 탈들은, 때로는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익살스럽거나 정겹기도 해서, 어떤 뛰어난 예술작품을 보는 느낌이 아니라 격식없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이런 작품들에는 그것을 만든 작가도, 특별한 전문적 기술도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 사람들만의 독특한 손재주와 느낌을 살려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나 바라는 소원들을 이입하여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나 또한 초등학교때 그러한 것을 만드는 것을 회상해보며, 즐거웠던 어린시절을 잠깐 추억해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탈들이 전시된 곳에서 2개 정도의 계단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는 다른 방에는 평소에도 볼 수 있는 목예품과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들이 혼합되어 눈길을 끌었다.부드러우면서도 해맑아 보이는 두 목상, 부드럽게 깎아내린 질감과 아주 잘 어울리면서, 마음까지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작품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한국의 목인이다.3 내부 작품들과 감상 -2) 삶 속에서 만들어진 목인다른 방으로 들어가니, 입구에서 아주 큰 얼굴이 나를 반겨주었다. ‘용수판’이라는 것이었는데, 말 그대로 용의 머리를 한 판이라고 한다. 그 아래에 있는 설명을 보니, ‘잡귀를 쫒는 벽사의 역할을 하며,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는 물고기를 입에 문 형상이나 인면형(人面形)으로 분류할 수 있고 후기로 갈수록 형식의 타파로 희화화 되었다’ 라고 되어있었다. 내가 본 용수판도 얼굴이 익살궂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후기의 작품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생각보다 꽤 크다. 길이가 1m정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를 드러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이 꽤 웃기다.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벽면내에 가족의 가계도를 나타낸듯한 그림이 있었는데, 그건 솔직히 아무리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누가 왜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었다. 그치만 느낀건 캐릭터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이 넘치고 산신령 무도사, 선녀 등 어떠한 민담같은 요소들도 들어가 있는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분명한건, 그걸 만든 사람은 남편이 가계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어린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의국립중앙박물관답사기1 가는 길3곳의 주제 중 첫 방문기. 우선은 지방에서 운 좋게 서울로 유학(?)을 와서, 넉넉히 못한 삶의 환경을 핑계삼아 문화생활은 전무하던 나에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정말 오랜만의 예술의 양식(糧食)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수업이 대부분 저녁에 끝나지만 다행히 수요일에는 오후 9시까지 개관을 하고 있어서 해가 떨어질 무렵 학교에서 출발하였고, 도착했을 땐 이미 거의 해가 저물었다.입구에 도착하니 우선 그 규모에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잘 꾸며진 주변경관과 저녁이라서 켜진 여러 가지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들어가는 길에는 작은 석탐들도 나무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가운데는 작은 인공호수 (청룡탕 보단 훨씬 크리라..) 와 대리석으로 된 쉼터가 있었고, 그 옆을 끼고 올라가는 멋진 계단이 있었다. 마치 영화제에 참석하는 듯한, 혹은 어떤 멋진 공연을 보러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2 입구입구와 내부규모 역시 압도될 정도였다. 깔끔하고 밝은 조명이 인상깊었고, 안네데스크에는 각종 감상에 도움이 되는 자료와 도움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기분이 벌써부터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레드카펫이 깔려있어서 한발한발 들어가며 밟는 느낌이 괜찮았다.3 감상1)1층 : 고고관과 역사관이곳은 한마디로 ‘고대 역사’의 전개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특히 철기문화가 보급된 시대의 유물과 무덤들을 복원 혹은 축소복제 하여 전시해 놓고 있었다. 국사책에서만 보았던 화폐 대용수단인 ‘명도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고대의 저장수단인 토기들도 눈길을 끌었다.명도전과 동 시대의 토기들다음으로 원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의 유물들과 후삼국시대의 유물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귀족들이 사용했던 금(金)제 귀걸이 및 장신구들은 섬세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그리고 국보인 백제 금동대향로도 있었다. 실제로는 당연히(!!)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보이는 약간은 빛이 바랜 모습이었으나, 아마 원래대로였다면 정말 대단한 예술성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교수님이 설명해주셨듯 그 크지 않은 향로 하나에 지극히 섬세히 새겨진 요소를 보고싶었으나,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백제 금동 대향로와 금귀걸이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신라금관이었다. 작은 공간에 빛을 받으며 홀로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데, 주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아주 가까이서 볼 수는 없었으나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여서, 한번 써보고 싶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신라 금관그 외에도 무기(칼이나 화살촉)라든지, 십이시장의 원숭이상, 통일신라시대의 토기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발해의 여러 유물들도 한번씩 감상하면서 고고관을 나왔다. 그리고 옆의 역사관으로 향했다.역사관은 우리의 대표적 기록문화 유산인 한글, 금속활자를 비롯하여 금석문, 문서, 지도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활자기술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는 임진자 금속활자와, 북한산의 신하 진흥왕 순수비, 그리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목판, 화엄경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에피타이저를 먹고 메인을 먹는 느낌으로, 회화미술과 공예미술들이 집중되어 있는 2층, 3층으로 발걸음을 향했다.2)2층 : 미술관1 감상2층에는 미술관1 과 기증관이 있었는데, 기증관에는 잘 모르는 사람의 이름만 쭉 나열되어 있어서 그런지 그리 호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시간도 애매하다고 판단하여 기증관과 3층의 아시아관은 밖에서만 지나가면서 보는 정도로만 하기로 결정했다.이 곳에는 불교미술과 관련된 작품들이 많았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아주 큰 불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팜플랫에는 야외의식용 불화라고 써있는 ‘부석사 괘불’ 이었다. 이 큰 그림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오래 올려다 보면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림의 설명과 함께 보는데,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등 가르침을 전파하는 부처와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부처 등 모든 사람들의 염원과 행복을 기원하는 뜻의 불화인 것 같았다. 안에 묘사된 사람이 무려 70여명에 이를 정도고, 그 중심에 석가모니불이 자리잡고 있었다.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다양한 크고작은 불교미술의 그림들이 이어져 있었다. 표정은 때로는 온화하고, 또 때로는 약간 무섭게 보이기도 하는 부처의 모습도 간혹 보였다. 보면서 느낀점은 부처는 주로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떤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그림중에 좀 특이했던 것은, 고려시대의 화엄경 그림이었다. ‘푸른 종이에 금선묘’라고 설명되어 있는 이 그림은 작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섬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정교하고 뛰어난 불교미술의 수준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 했다.부석사괘불 과 화엄경 그림(사진의 사람은 저입니다^^;)다음으로 본 것은 궁중장식화와 민화 였다. ‘곽분양의 즐거운 장치’라는 그림은 10자 병풍으로 된 것인데 한가운데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이 수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가마에 앉아 즐기고 있는 듯한 그림이다. 아마도 큰 벼슬을 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행복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문자그림 이라는 것도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문자와 그림이 조화가 되어서, 아마 그 한자의 뜻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넣은 듯 했다.곽분양의 즐거운 잔치 와 그림문자민화도 다양하게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전혀 무섭게 생기지 않은 호랑이 그림과 청룡의 그림이 있었다. 둘다 왠지 수다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어서,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그리고 송시열의 초상화와 이채 초상화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둘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냥 보고 넘어가는 정도였다)다음으로 본 것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 이었다.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들의 모습, 서당에서 회초리를 맞는 듯한 모습(책에서만 본적이 있다), 춤추는 아이의 동적인 모습 등 자신의 훌륭한 솜씨를 서민들의 생활모습으로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김홍도의 ‘서당’과 ‘춤추는 아이’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화에서 쓰인 여러 가지 옛날 물감의 재료들도 전시해 놓았는데, 색깔이 매우 선명하고 곱게 느껴졌다. 옛날엔 공산품도 없던 시절인데, 자연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꽤 신기했다.3)3층 : 미술관2 감상
나의간송미술관답사기1 가는 길10월 26일 오후 3시, 간송미술관의 전시 마지막 날, 지난주의 국립중앙박물관 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새로운 기대를 품고 발걸음을 향하였다. 지방에서 살다가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지만, 관심 가지지 못했던 문화, 예술에 대한 감상을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게 되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그 강렬한 느낌은 어느새 만족감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던 터였다.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린 나는, 결국 길치인 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택시를 타기로 했다. 찾아본 약도에서는 성북초등학교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선지를 말했으나, 왠지 택시기사는 잘 모른다는 듯이 말했고, 간송미술관 을 간다고 했더니 바로 ‘아~’ 라는 말이 나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손님이 한 11만 번째 정도 되시겠네요. 어제 제가 태운손님께서 10만 번째 정도 일꺼라 하셨으니.” ...‘11만 번째?’ 겨우 2주 남짓한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은 서울 외곽에 있는 미술관인데 그렇게 사람이 많다는 건가? 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어리둥절 하면서도, 새삼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신윤복의 ‘미인도’를 볼 수 있어 더욱 사람이 많은 것이라고는 인터넷을 통해서 어느 정도 조사하고 가는 길이었다.2 입구 풍경철문이 보이는 입구에 도착하니, 약 500m정도의 사람들이 초등학교 안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였지만, 역시 그 열기는 대단하구나 싶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대학생 쯤 되어보이는 사람들도,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온 가족도, 중고등학생들 까지도 다양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렇게 차가운 바람을 쐬며 1시간여를 기다린 후, 드디어 ‘철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식물원을 연상하게 할 만큼의 크고 작은 나무들 사이로 본 전시장인 보화각이 보였다. 실제로 보기에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과연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입구에서는 불교적인 여러 개의 석상과 작은 석탑이 서 있었다. 이끼가 끼어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듯이 보였으나. 석상의 그 표정은 매우 온화해 보여서, 쌀쌀한 날씨 속에 기다리고 있는 관람객들을 위해 미소를 지어보이는 듯 했다. 또한 하얀 공작새 우리를 길 왼쪽에 배치하여 볼 수 있어서 지루함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입구에는 통제를 하는 사람들, 그림과 글씨에 대한 해설집을 판매하는 사람들, 그리고 1,2층에서 나오는 사람들 등으로 매우 혼잡했다. 정상적으로 관람을 하는게 매우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층으로 입장 했다.3 1층 관람대부분의 전시그림과 글은 벽에 큰 것이 걸려 있고, 그 아fot부분에 작은 다른 작품과 제목, 설명 등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쪽의 그림의 이름도 봐야했었지만,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전시장으로 인해 제대로 보는 것이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에 있는 산수화는 잠시 조급한 마음을 잊게 해줄 만큼 여유가 있고, 부드러움이 있었다. 고등학교 미술책에서 보던 자그마한 그림으로는 ‘여백의 미’라고 해봐야 낙서 몇글자 하기 힘든 공간이었는데, 전시되어 있는 그 그림을 보니 바로 그 여유로움을 주는 여백의 미 라는것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었다.산수화 옆에는 일출 그림, 그리고 대나무를 표현한 그림이 있었다. 대비되는 느낌의 표현, 담채화와 수묵화의 표현의 차이가 대비되어, 각각 다른 느낌을 주어서 흥미로웠다. 부드러운 색채와 필체의 일출 그림은 따뜻한 느낌을 주었고, 대나무를 그린 수묵화는 그 대나무의 한 마디마디의 표현과 잎의 끝이 뾰족하나 날카로워 보이지 않는 매끈한 표현이 좋았다.그리고 다음 벽면에는 추사 김정희의 힘있는 서예 필체가 걸려 있었다. 사실 서예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어서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궁서체를 예쁘게 잘 쓰는 것만이 예쁜 글씨라고 알았던 나에게 그 서체는 정말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배경지식이나 나의 수준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거침없는’ 자신감 있는 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만은 확실히 들었다.그 오른쪽 벽에 있는 그림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1층의 하이라이트 라고 할 수 있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다. 우선 볼 수 있었던 것은 김홍도의 ‘마상청앵’ 이라는 그림이었다. 한자 그대로 선비가 말 위에서 홀연히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그린 담채화인데, 선비의 실제적인 동선, 그리고 옆의 버드나무의 섬세한 묘사, 그리고 충분한 여백으로 인해 한적해 보이는 배경을 표현한 것까지 그 뛰어남을 다 알수는 없겠지만 짐작은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림이었다. 김홍도만의 고유의 그림의 느낌이란게 이런 느낌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김홍도 『마상청앵』마지막으로 사람이 가장 많았던,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았다. 사실 이 그림을 보자마자 약간은 실망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말 미인 맞아?’ 라는 것이었다. 미의 기준은 시대마다도 개인마다도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볼 수록, 무언가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고 얇은 입술과 얇은 눈썹을 보며 저런 여성들이 조선시대에는 미인이겠구나, 생각도 들기는 했다. 그림자체가 약간 색이 벗겨진 것 같아 완전한 느낌을 줄 수 없는 그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특히 치마부분의 원래 색은 상당히 단아했으리라 생각이 드는데, 많이 색이 바래서 아쉬웠다.신윤복 『미인도』그리고 전시실 가운데에는 서책과 같은 작은 사이즈의 산수화들이 놓여있었다. 그림이 작았지만 색이 곱고 섬세한 묘사가 되어 있는 그림들이라서 꽤 마음에 들었다. 보고 있는데 옆에 어떤 젊은 커플이 있었는데, 그 중 남자가 공부를 해왔는지, 여자에게 신윤복의 친구가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해 주는 것을 듣고, 혼자 속으로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4 2층 관람1층 관람을 끝내고 2층으로 향했다. 1층보단 덜했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2층 입구에서 나를 반기고 있던 것은 먹으로 바지런히, 혹은 개성 있게 쓰여진 붓글씨였다. 2층은 1층에 비해 2배정도는 더 넓은 공간이었는데, 왼쪽에는 대부분 글씨가, 오른쪽에는 수묵화와 담채화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찬찬히 보려 하긴 하였지만, 주로 한자이기에 뜻이 알 수 없어 그런지 무언가 와 닿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운데에 전시되어 있는 것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혜경궁 홍씨의 ‘궁서체’ 로 쓰여진 하나의 글이었다. 세로로 쓰여진 그 글씨 (짦은 편지나 상소문 같은 것이라 하는게 나을 듯 싶다)는 조금은 자간이 삐뚤하였지만, 바지런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이 그대로 나는 듯 했다. 내용은 아마도 나라의 어떤 일에 대한 안위의 걱정과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한 글인 듯 했다.
Chapter (8-3) We Can't Just Sit Back and Hope일찍이, 스필버그가 8살 때 그는 영화제작에 빠져있었다. 비록 그가 영화를 몇 편 보지도 못했고, 거의 대부분이 디즈니 만화였지만. 그는 시각적 이미지에 매료되었던 것을 떠올린다 - 만화책, 미술 그리고 텔레비젼. 심지어 그의 부모님이 그가 매우 어렸을 때 이불정리하기 대신에 그에게 시계를 하고 다니게 한 것조차도... 그는 글을 매우 느리게 읽었다. 그는 보통소년들처럼 읽지 못했다. 단지 쳐다봤다고 그가 말했다. 시각적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야기하기라는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어떠한 강요가 그로 하여금 이야기를 하게 했는지 물었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내 욕구가 내가 주목의 중심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하면서 웃었다. 이것은 그것만큼이나 간단하다. 나는 새로운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리고 눈에 띄고 싶었다. 내가 발견한 무엇은 내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3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우리는 가족에서 각자의 지위를 위해서 매일 싸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부모님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내 여동생은 특별한 것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더 특별한 것을 하기로 생각했다. 나는 캠코더를 가지고 있었고,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캠코더는 8mm코닥으로 아빠에게 빌린 것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을 내 영화의 배우로 쓸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시시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즐겁고 천진난만하게 설명했다. 그것들을 죽이고 죽여서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내 8mm영화를 부모님의 반응을 보기위해 갖다 드렸다. 이 얼마나 독창적으로 가족내에서 내 지위를 찾았는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사람들은 그것과 나에게 관심을 가졌다. 나는 후에야 내 3번째 혹은 4번째 8mm영화가 취미만이 아니라 경력을 쌓을 수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영화가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스필버그가 10때, 그의 부모님은 이혼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충격이 그의 영화에서 테마로 되풀이되었다.- 어린이가 이혼에 의해 집을 떠나게 되고, 어린 생명이 갑자기 불완전해진다. 그는 그의 영화 E.T에서 외계에서 태어나 그의 형과 말없이 떠나간 아빠를 동경한다. 그는 10대 후반에 그의 가족들과 애리조나에서 북캘리포니아로 이사한다. 그곳에서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학교공부를 게을리 했고 그의 성적에 그것이 반영되었다. 졸업 후에 그는 어떤 영화학교에서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Cal State at Long Beach 에 다녔다. 이 기간동안, 그는 소녀와 소년이 모하비 사막에서 바다로 히치하이킹 하는 것에 관한 로드무비인 22분짜리 단편영화 Amblin을 만들었다. 이 작은 영화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Amblin은 베니스와 애틀랜타 그리고 시드니에서 상을 받았고 그 후에 TV프로덕션인 Universal Sheinberg의 편집장으로 7년 계약을 했다. 무엇이 그의 영화를 성공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것들을 바꿨을까? 나는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가 대답했다. 내 영화의 90% 이상이 옛날 방식이다 Frank Copra나 Preston Sturos가 그랬듯이 내가 만든 많은 필름이 아마도 50년전의 작업이고 아마 내가 구식의 가치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대에 뒤진 사람이다. 나는 진흙에 빠진 스틱처럼 구식이다. 나는 재현을 매우 좋아해서 내아들이 나를 retro라고 부른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나에게 티비를 많이 보지 않게 한 것처럼 내 아들에게도 티비를 많이 보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 아들이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을 감시하는 것은 큰 실수라 생각한다. 나는 나이가 들어 준비가 미비한 채로 갑자기 깨닫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필버그는 자식을 매우 사랑하고 보호적인 아버지다. 여기서 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시장 안에서 섹스와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지 묻는다. 나는 못한다라고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대신 나는 정부가 감시관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방송이나 극장, 또는 비디오나 레코드의 내용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검열과 좋은 안목 그리고 책임이라는 좋은 라인이 있다. 이세기는 고통 받고, 마을에서 폭력이 난무한다. 나는 그가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지 묻는다. 나는 언제나 매우 희망적입니다. 스필버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앉아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룹, 지역사회. 종교, 영향을 미치는 세계 모든 곳에서 활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앉아서 총과 마약이 사라지는 희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말할 의무가 있고 세상을 고칠 일을 해야 합니다.
Chapter (8-1) Guggenheim Museum U.S.AGuggenheim Museum U.S.A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In 1932, New york's Museum of Modern Art assembled what was clearly meant to be a definitive exhibition of modern architecture. It presented the work of Frank Lloyd Wright along with that of Le Corbusier, Ludwig Mies vander Rohe, and Walter Gropius, two leaders of Germany's revolutionary design school, the Bauhaus. On that occasion, Wright commented, "I warn you that having made an excellent start, I fully intend not only to be the greatest architect that has ever been but also the greatest of all future architects."1932년 뉴욕에 현대 미술관이 모여들었는데, 그것은 명백히 현대 건축양식을 정의내리는 의미있는 전시회였다. Le Corbusier, 독일의 혁신적인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의 두 지도자인 Ludwig Mies vander Rohe와 Walter Gropius의 작품과 함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작품이 따라서 전시되었다. 그 때 라이트는 말했다. "나는 멋지게 시작해서, 완전히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써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건축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지을 작정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Wright's pride in his own work was understandable . When his three co-exhibitors were still in grade school, he was already designing remarkably innovative houses, any one of which could have established him as first among contemporary architects. With the help of devoted assistants, Wright had created dozens of these houses, year after year. By 1932, Wright's work had become highly individualistic-often with hints of expressionism that would surface in his design for the Guggenheim Museum.라이트의 자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세 공동전시자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그는 이미 두드러지게 혁신적인 집들을 디자인하고 있었으며, 그 집들 중에 어떤 집은 동시대 건축가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그의 명성을 확고히 다지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이트는 헌신적인 조수들의 도움을 받으며, 수년간 수십 채의 집들을 지었다. 구겐하임 미술관 디자인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주의적 단서를 지닌 채, 1932년까지 라이트의 작품은 매우 개인주의적이 되었다.Frank Lloyd Wright's childhood had been shaped by a New England heritage of liberal Protestantism and an acceptance of the "natural philosophy" that was expressed in the writings of Walt Whitman and Henry David Thoreau. These two American writers believed that much of modern human anguish was due to urban environments and loss of contact with nature. The human foot had been made to touch earth, not concrete, and human dwellings were meant to be in harmony with their natural surroundings. In the spirited and energetic atmosphere of the times, it is perhaps not surprising that Wright also developed that insistence upon absolute freedom of mind that marks the true pioneer as well as the renowned artist. This is why he so often seemed more concerned with finding the proper form for an idea than with pleasing his clients. To Wright, the artistic integrity of his work was far more important than its practical function. Once, when the owner of one of his houses called to say that rain was dripping on him from a crack in the ceiling, Wright is said to have suggested that the man move his chair.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년기는 뉴잉글랜드의 자유로운 신교적 전통과, 월트 휘트먼과 헨리 데이빗 쏘로우의 저서에서 표현되었던 '자연철학'의 수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두 미국 작가는 현대인들의 많은 고뇌가 도시 환경과 자연에 대한 접촉의 상실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발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흙에 접촉하도록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거주지는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운명지어졌다. 활발하고 생기넘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라이트 또한 마음의 절대자유야말로 유명한 예술가뿐만 아니라 진정한 개척자의 특색을 이룬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렇게도 자주 고객의 즐거움보다는 이상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형식을 발견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인 것처럼 보였던 이유다. 라이트에게 있어서 작품의 실용적 기능보다는 예술적 완성도가 더 중요했다. 언젠가 그가 디자인한 집들 중 한 집주인이 천정의 틈 사이로 빗물이 떨어진다면서 라이트를 부르자, 라이트는 집주인이 의자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Both Wright's genius and obstinacy came to play their roles in his design for the Guggenheim Museum in New York City. In the ealy 1940s, Solomon R. Guggenheim, who was committed to the development of modern painting, found himself in need of more space to house a growing collection of pictures. He decided that a museum of modern art ought to be the work of a leading modern architect. lronically, he turned to Wright, a man known to have little liking for twentieth-century painting, and commissioned him to design the new museum. Wright's creation is one of the most orginal buildings in the world, a museum with its own place in the history of art. Yet as a picture gallery, it is a failure. Ultimately, the only thing it displays well is it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