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1 _ 진중권#. 가상과 현실(원시예술) 에셔, 석판, 1943년도마뱀들은 그림에서 나와서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에셔는 평면과 공간의 대립을 지워버림으로써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두꺼운 벽을 무너뜨린다.? 벌거벗은 눈19세기 말에 처음 발견된 인류 최초의 예술인 구석기인들의 동굴벽화는 생생한 자연주의적 묘사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 미술사가)에 따르면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념적 사유로 무장하지 못한 구석기 시대 원시인들의 ‘벌거벗은 눈’이 그들의 놀라운 자연주의를 설명해주는 것이다.신석기 시대에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정착생활을 시작한다. 농경은 고도의 추상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유능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자연현상의 공통성을 깨닫고 ‘사계절의 순환’이라는 개념을 뽑아냈다. 그 뒤 인간들은 외부세계를 파악, 정복하기 위해 추상적, 기하학적 사유에 의존한다. 그럴수록 그들은 ‘보이는 대로’가 아닌 ‘아는 대로’ 묘사하게 되었다.? 유희, 노동, 주술예술의 기원을 설명하는 세 가지 가설을 살펴보자. 첫 번째, ‘유희기원설’에 따르면 원시예술(벽화, 집단무 등)은 ‘남아도는 에너지의 방출 통로’라고 말한다. 두 번째, 예술은 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가설이다. 말하자면 수렵무, 전쟁무는 힘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서 춤을 추었단 얘기다. 세 번째, ‘가상’을 통해 ‘현실’의 소망을 이루려는 주술적 신앙 때문이라는 가설이다. 벽화나 수렵무 속의 ‘가상’이 그들에게는 곧바로 ‘현실’이었다. 그때는 예술이 주술이고 주술이 예술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고달픈 삶 속에서도 예술 활동을 계속했던 건 이것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지식 체계이자 정보 저장과 전달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행했다.? 황금가지세계가 아직 젊었던 시절, 은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에셔의 세계 2 - 평면의 균등 분할다시 을 살펴보자. 그림 속의 도마뱀들을 보면 여러 마리가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이게 바로 두 번째 주제 ‘평면의 균등 분할’이다.#. 가상의 탄생(고대예술과 미학)? 오시리스의 땅약 3,000년 전 이집트의 아침은 매일 아침 신관이 동창을 열지 않으면 해가 하늘에 입장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얘기로 데이비드 흄(David Hume, 영국의 철학자)은 아침에 해가 뜨리라는 기대는 매번 그랬기 때문에 생긴 습관일 뿐, 꼭 그래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실수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사물들 속에서 공통된 요소를 뽑아 ‘개념’을 만들고, 다양한 현상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안정적 연관을 찾아내 ‘법칙’으로 확정할 수 있다.이집트 예술은 그리스 예술과는 다르게 벽화나 회화에 그려진 인물은 대개 머리는 옆을 향하고, 상체는 앞을 향하며, 다시 발은 옆을 향한다. 이렇게 사물의 특징을 측면에서 묘사하여 되도록 사물의 형태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묘사 방식을 ‘정면성의 원리’라 한다. 중요한 건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는 인물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들의 예술은 하나의 시각적 추상인 셈이다. 빌헬름 보링거(Willhelm Worringer)는 그리스처럼 인간과 자연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관계가 이루어지는 축복받은 땅의 사람들은 ‘감정 이입 충동’을 갖게 되어 유기적이며 자연주의 적인 양식이 발달한다. 하지만 이집트처럼 자연환경이 척박한 곳에선 광막한 외부세계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내적 불안감을 불러일으켜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 충동’을 갖게 되며 추상적ㆍ기하학적 양식이 발달한다.?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그리스 회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암포라’와 같은 도자기 표면에 그려진 그림으로 이 그림이 이집트 회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용사의 발이다. 그리스인은 과감하게 정면에서 보이는 다. 비극의 기원은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불리던 합창가다. 제의가 예술이 된 거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는 그리스 예술이 조형예술의 맑고 투명한 정신인 아폴론과, 깊고 어두운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광포한 힘, 디오니소스적 충동 이렇게 두 가지 충동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비극이 주는 지혜는 가혹한 삶의 진리다.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아폴론의 아름다움으로 감성화한 것이 바로 비극이다.? 원형극장에서플라톤-시란 거짓말이고 ‘영감’또는 ‘광기’의 산물이다. 광기의 시와 기술적 시로 구분한다.아리스토텔레스-시도 진리를 말할 수 있다. 시인의 임무는 ‘일어날 법한 일’을 말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시는 테크네이고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시의 본질은 ‘모방’이다. 시 중에서 비극이 으뜸인 것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흥분시킴으로써 오히려 그걸 진정시키고 정화한다. 비극은 플롯, 성격, 사상, 대사, 노래와 장면이라는 6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특히 플롯이 비극의 생명이자 영혼이다.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악행이 아닌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불행해져야 한다. 플롯은 다시 급전과 발견과 파토스로 이루어진다. 급전이란 사태가 갑자기 반대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이고 발견은 자신의 운명을 깨닫는 것이며 파토스는 찢어지는 고통이다.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그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 관계없는 에피소드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된 것을 ‘삽화적 플롯’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플롯의 통일성을 깨뜨린다. 비극은 주인공의 운명이 급전되기 전까지를 ‘갈등’, 그 뒤를 ‘해결’이라 하여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갈등을 훌륭하게 짜놓고 해결에서 실패하는 경우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 부른다.#. 가상을 넘어(중세 예술과 미학)? 빛과 어둠태초에 근원적인 일자는 선이자 미 그 자체다. 여기서 빛이 흘스콜라 철학막스 드보르자크(Max Dvorak)에 따르면, 비잔틴부터 후기 고딕까지 중세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보다 영적인 세계를 담으려는 경향이라고 한다. 이때 사람들은 로마의 공회당 ‘바실리카’의 형태를 빌려 최초의 성당일 짓게 되는데, 이는 뒷날 서유럽 성당 건축의 바탕이 된다. 서유럽 건축은 11세기에 이르러 로마네스크라는 독자적인 건축양식 속에 닻을 내린다. 바실리카 성당엔 고대식의 기둥이 사용되었지만, 로마네스크 성당에선 아치공법이 사용된다. 중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고딕이라는 위대한 양식을 낳는다. 이 변화의 토대는 늑재 궁륭이하는 기술로 고딕 성당은 사람들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중세의 조형예술은 독자적인 의의를 갖지 못하고 성당 건물에 종속되어 글을 모르는 민중에게 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데 주목적이 있었다. 중세 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의 재현을 포기하고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담으려 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형체로 ‘정신’의 계기를 강조하고 빛과 화려한 색채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스런 ‘관조’를 표현하는 게 중요한 특징이다. 여기서 중세 미학은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로티노스라는 걸 알 수 있다. 중세 후기 예술에 나타난 자연주의적 경향을 ‘고딕 자연주의’라 부른다. 드보르자크는 중세예술을 이상주의와 자연주의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성당에서플라톤의 ‘기하학적 원자론’은 세상 모든 것이 두 개의 직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다. 하나는 정삼각형을 반으로 자른 것(30도, 60도, 90도)이고, 다른 하나는 정사각형을 대각선으로 자른 것(45도, 45도, 90도)이다. 플라톤은 이 삼각형들을 붙이고 모아서 만든 정다면체들이 네 개의 원소를 이룬다고 보았다. 정사면체는 불, 정육면체는 흙, 정팔면체는 공기, 정이십면체는 물. 물론 원소가 네 개밖에 없다고 한 건 그의 한계지만 이 이론을 토대로 그린 에셔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평면의 균등 분할을 이용하면, 그림을 사방종말론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 상태 속에 붙잡아놓으려 했다.#. 가상의 부활(근대 예술과 미학)?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이란 말은 기술과 학문을 포함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고 조형예술은 여기에 끼지도 못했으나,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조형예술은 학문으로까지 승격된다. 조형예술이 인문학과 같음을 보장해준 게 바로 ‘원근법’이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oti)는 모든 면에서 서로 적대적이었다. 다빈치가 회화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면, 미켈란젤로에게는 조각이야말로 예술 중의 예술이었다. 다빈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과학적 관ㅊ찰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다빈치는 예술엔 반드시 따라야 할, 모든 사물이 네 가지 원인에 의해 생긴다는 보편적 법칙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그런 보편적 규칙이란 없으며, 미와 예술의 법칙은 ‘개별적’이고 ‘일회적’이어서 예술가는 ‘눈의 판단’에 따른다. 다빈치는 예술의 목적을 외부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두었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의 창조’에 있었다.? 뒤러의 실험실‘원근법’은 대상의 크기를 거리와 반비례로 줄여나가는 것으로 그걸 이용하면 평면에 ‘깊이’를 줄 수 있고, 주관에 좌우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투시원근법의 객관성 실험을 통해 증명하였다.? 에셔의 세계 6 - 3차원 환영의 파괴 에셔, 1945년원근법의 본질은 2차원의 평면에 2차원의 환영을 창조하는 데 있다. 그게 가능한 건 우리의 망막이 평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위 그림의 도리스식 기둥들을 에셔는 위 아래로 슬쩍 업어놓음으로써, 3차원의 황영이 결국 눈속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바로크의 거장17세기 예술을 바로크 예술이라 부른다. 바로크란 말은 좁은 의미로는 전통적 고전주의와 대
포스트모더니즘이 발생하게 된 당시 사회 문화적 현상 연구1.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완벽히 파악하거나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다양한 그리고 때로는 서로 모순적인 요소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축부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80년대 이후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 왔으며 이들 영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에 대한 많은 예들이 있지만 이러한 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일치된 견해도 없다.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메시지 지식을 분류하거나, 단일화 하거나, 하나의 틀 속으로 묶는 것 등에 반대하는 입장 에 배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포스트모더니즘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그 내용을 모두 담지는 못하지만 ‘탈근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말의 구조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가장 근접한다고 생각된다. 탈근대주의라고 했으니 말 그대로 근대를 벗어나자는 말이 되겠다.처음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학문의 영역 속으로 끌어들여 이에 대한 학술적 논쟁을 유발시킨 사람은 리오타르( J. F. Lyotard )이다.2.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배경경제적 측면 ― 다국적 자본주의의 소비사회에서는 소비를 덕목으로서 정당화하거나 주체적 자아 및 비판의식의 해체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필요한데 이 이론적 근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되었다.사회적 측면 ―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기호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의미 또한 기호적으로 생성되므로 인간과 사물의 기호화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필요한데 이 이론적 근거로서 등장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문화적 측면 ― 현대인은 과거와는 다른 문화적 경험을 통하여 많은 가치관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를 정당화하기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강요된 현상이라기보다는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부에 풍미해있는 현상이다.3.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포스트모더니즘의 첫 번째 특징은 불확정성이다. 불확정성이란 현대문화의 여러 가지 특성들인 애매 모호성, 불연속, 임의성, 반역, 곡해, 무작위, 해체, 변용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분열함을 거부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는 절대성이란 없으며 삶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두 번째로는 단편화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파편화 되어가는 인간 삶의 총 체화를 시도한다. 자본주의 속에서 예술의 상품화를 거부하는 것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작품이 전반적인 상품유통 속에 편입되어 단편화를 위한 단편화를 거듭하는 것이다.세 번째는 탈 정전화현상이다. 정전이라 함은 이제껏 고전이라 모셔져왔고 혹은 보편적 가치의 구현물처럼 생각되어온 것들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런 것들이 한낱 지배 이데올로기를 표방하거나 서구 중심주의, 엘리트주의, 남성 중심주의의 표상이라며 비판한다. 이러한 탈정전화는 필연적으로 대중주의를 탄생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소위 고급문화나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 대중 속에 위치하는 예술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는 추리소설, 공상과학소설, 여성문학 등이 등장하고 미술에서도 코카 콜라병이나, 슈퍼맨의 만화를 이용한 앤디 워홀의 작품들이 높이 평가받게 된다.네 번째로는 대중주의 현상이다. 고급문화와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이 역력히 드러나며 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마르쉘 뒤상의 기성풍 이론은 예술의 기존 관념을 깬 것으로 이미 만들어진 즉 주변의 흔한 대상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하였고 앤디워홀은 스프깡통, 브릴로 상자 등 대중적인 사물을 이용하여 기준을 거부한다. 예술은 가치판단이나 가치 지향적 요소가 개입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4. 포스트모던 사회학 이론미국의 사회학자 더글러스 켈너(Douglas Kellner)는 1988년 사회학 저널에 게재된 그의 논문 '사회학 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몇 가지 도전과 문제점들'에서 "예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토론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새로운 사회학 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사회학 이론은 1970연대 후반부터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들리아르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과격한 정보유통으로 모방과 허상이 만연되고 이들이 다시 새로운 사회질서와 문화경험을 만들어내는 사회라고 했다. 또 다른 프랑스 사회학자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1984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의 탄생은 모더니티의 큰 희망의 종말을 고한 것이며 과거에 생각 되었던 하나의 완벽한 사회이론이나 혁명적인 사고방식의 불가능함을 알 리는 것이다"라고 했다.반면에 또 한 명의 다른 유명한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사회학자인 프레데릭 제임슨은 1984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자 문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 소비자 사회의 새로운 문화형태라고 규정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문화적 빈혈에 빠진 혼성모방예술, 즉 패스티쉬라고 했다. 그는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스트 예술은 새로운 의미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여기서 제임슨이 말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하이모더니즘에서 추구하던, 예술의 본질을 파고드는 미니멀리즘의 의미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이 더 이상 창조능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는 것이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던 예술은 필연적으로 예술적인, 그리고 미학적인 실패를 할 것이며, 더 이상 새로움의 창조정신은 사라지고, 과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오늘날 예술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스타일이나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조해낼 수 없다 수 없는 다원화주의의 팽배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유일 독선적인 세계관의 종말이요 단 하나의 사상의 추구에 대한 반발이며 무엇이든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차이점에 대한 경의라고 볼 수 있겠다.5. 포스트모던 문화와 예술의 확장앞에서 본 이런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사회적 변화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문화 혹은 예술에 대한 개념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심지어는 예술에 대한 미학적인 기준이나 판단까지 변화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시각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소위 말하는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 전체를 위한 예술의 추구가 일어난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늘날 전토예술이 실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늘어나지는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요즈음 대부분의 대중문화 경험은 상업적인 형태로 전달되고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문화미디어와 문화상품들이 대중문화 선도의 주역이 되고 있으며 그 형태도 갈수록 국제화되고 있다.또한 이러한 다국적 미디어와 다국적 상품을 통한 국제적인 문화교류는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 문화의 세계화에 따라, 문화의 국경 개념도 현저히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 각국은 국가문화와 국가정체성 확보라는 쉽지 않은 새로운 이슈를 떠안고 있다. 사실 국가 개념에서 보면 각국의 정부는 확장되고 있는 세계문화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요구받고 있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폴 월리스(Paul Willis)가 말했듯이. 각국의 정부는 한편으로는 그들 국가 외부에서 국제적으로 일어나는 문화교류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단결이라는 의미에서 그들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이중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이다.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은 그의 유명한 저서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세 가지로 나눴다. 기술경제구조, 국체, 그리고 문화를 바로 그 세 개의 중요rse, Democracy)'에서 그동안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무용에서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해오던 것이 도리어 역으로 무용 발전의 흐름을 정확히 연구하는데 혼란만 초래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60 연대 초기 모더니스트 무용의 과격한 이탈과 일시적인 모호함을 무용발전의 한 역사로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런 그의 무용 역사개념은 무용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석을 체계적으로 가능케 한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되고 있다.데이비드 미첼 레빈은 무용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는 두 개의 명확한 다른 시기로 나눠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다른 예술에서는 모더니즘의 일부인 모더니스트 시대로서, 1960연대 초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무용흐름을 말했다, 아직도 하이 모더니즘의 전통적인 요소인 본질을 파고드는 무용의 추구, 즉 미니멀리스트 무용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 시기는 다른 예술에서의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인 포스트모더니스트 시대로서 1980연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본다. 여기서는 그동안 모더니스트들이 탐구해오던 모든 모더니즘의 찌꺼기가 완전히 제거되어 버리고 철저히 배격된다. 따라서 무용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연대부터 시작되어 1970연대 말까지 계속되었던 포스트모던 무용과 1980연대 이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무용 두 개로 나눌 수 있다.7. 포스트모던 무용과 포스트모더니스트 무용우리가 포스트모더니스트 무용의 개념을 정확히 포착하려면 그 이전에 탄생하여 진행되었던 포스트모던 무용의 개념부터 먼저 철저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먼저 포스트모던 무용의 발전 상황부터 살펴보겠다. 모더니즘의 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모더니스트 예술에서는 음악, 미술, 조각, 건축 등 모든 예술작품들이 가장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요소만으로 축소되어 표현되었다. 마찬가지로 1960연대 초반부터 시작된 모더니스트 무용에서도, 무용 움직임의 본질, 즉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움직임을 추구했다. 예를 들면, 당시 저드슨 무용단에서 공연다.
1장_ 리더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모든 역사는 리더십의 무대였다국가 조직의 흥망은 그 나라 리더의 리더십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가 조직이 허술했던 시기 리더십이 부족한 리더의 오판과 잘못된 방향 설정으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같은 국난을 초래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처럼 강력한 리더십으로 부국강병과 만주정벌의 눈부신 역사도 있었다. 역사 속의 사례에서 보듯이 리더 한 사람의 리더십이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알 수 있다.? 새클턴, 히틀러, 처질, 칭기즈칸새클턴, 히틀러, 처질, 칭기즈칸은 리더십을 거론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새클턴은 솔선수범으로 구성원을 이끌어 책임감이 강한 리더십으로 남극점을 정복한 인물로 그의 리더십은 지금까지도 화제다. 권위적인 리더십의 상징으로 불리는 히틀러와 영감을 주는 리더십의 상징인 처질, 이 두 사람의 결과를 보면 리더의 리더십이 자신과 팀원 나아가 국가까지 승리할 수 있는 요건이 되기도 하나 망하게 하는 요건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칭기즈칸은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도록 하여 비전을 설정하고 비전 성취역량을 키우고 에너지를 부여하고 철저한 능력 위주의 지휘관 선발과 권한 부여를 통해 몽골인의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신바람’과 ‘피눈물’을 꿈으로 결집시키고 실현시킨 리더였다.? 리더가 조직의 운명을 좌우한다리더의 리더십은 조직의 전부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기업이나 사회의 승망성쇠 역시 리더와 리더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호랑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어도 아차! 하는 순간 양의 무리에 패하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당하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직의 운명이 리더에게 달렸다는 것은 명심하자.? 리더십의 진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우리 기업은 지금까지의 서구 중심적 경영 패러다임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서구 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안으로 눈을 돌려 첫째,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는 상호 존중과 배려, 셋째는 사회적 책임 의식, 넷째는 자아실현에 기초한 자발적 참여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상하 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감 있는 의무 완수 및 목표 도달 의지와 더불어 책임을 지고 협조하며 임무범위 내에서 자립적이며 창조적으로 행동하려는 준비상태를 요구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면 이심전심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형 리더십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새로운 리더십의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3장_ 이심전심, 리더와 팔로워를 연결하는 다리? 이심전심이 만든 흥의 조직문화지금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혁신적ㆍ창조적이면서 유연하고 즉각적인 리더십이 적용되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나타나므로 조직 상부의 권한 위임을 기다리는 수동적, 피동적 시스템과 구성원의 자세는 빨리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하나의 마음과 뜻으로 공감대를 이루면 감동의 경지까지 도달하여 마침내 어떤 목표도 신명나고 흥겹게 성취할 수 있는 우리 고유의 ‘흥의 조직문화’를 만들어 연계시킬 수 있다.? 리더와 팔로워의 공감 패러다임이젠 ‘나를 따르라’ 식의 지시형 리더십 시대는 없다. 기존의 일방적인 지시, 명령, 통제로 리드해온 방식을 벗어나 공감과 감동을 기반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리더의 역량을 구비해야 한다. 이제 리더는 도덕성과 인격을 바탕으로 한 지식(know)과 실천(do)을 보여줘야 한다. 조직을 구성하는 리더와 팔로워 사이의 공감 패러다임으로 리더뿐 아니라 조직 구성원 모두가 하나 되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조직을 만들어야만 21세기 시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리더와 팔로워 사이의 흐름21세기는 문화, 가치 중심의 형이상학적 요인이 리더십 성립에 많이 작용하게 되면서 리더와 팔로워 사이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지속적으로 증가될 것이다. 이런 점을 살펴 우리 동양적 문화와 가치, 지혜가 숨쉬는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강화시킨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람의 셀프리더로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 향상에 힘을 기울여 궁극적으로 자아실현을 달성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넷째, 팔로워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다섯째, 리더는 기지적 상황 대처 능력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가변적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여섯째, 리더 양성을 위해서 교육 훈련과 권한 위임은 필수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일곱째, 리더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최고의 리더십으로 가는 길, 위성지학 / 리더에게 미치는 영향 / 실천 전략동양적 사상을 근본으로 삼는 위성지학은 정신적 기반을 바탕으로 자신의 덕성을 완성하기 위한 학습을 말한다. 최고의 리더는 칠정(본성의 자연적인 감정)뿐 아니라 사단(선천적인 도덕적 능력)까지 포괄해 가정과 이웃, 조직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위성지학의 리더는 타인을 존중하고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공동체를 추구한다.위성지학의 실천 전략으로 첫째, 욕망을 관리하라. 둘째, 절제로 자신의 지켜라. 셋째,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자기쇄신하라. 넷째, 금욕주의를 즐겨라.? 리더십의 날개, 위실지학위실지학이란 인간의 기능적, 실용적 능력 향상을 위해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 학습을 뜻한다. 지혜를 갖고 끊임없는 수신을 하여 얻게 되는 위실지학을 통해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최소한의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 위성지학과 위실지학의 조화이상적인 위실지학과 위성지학의 조화는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가 충돌하지 않고 융합하여 균형감 있게 발전을 이룩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학습과 함께 지혜로운 삶이 요구된다. 따라서 지혜로운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위성지학과 위실지학을 모두 갖춰야만 한다.? 조직 구성원보다 더 뛰어난 자기계발을 하라자기 계발을 자신의 능력, 가능성의 계발, 자력, 자아계발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기계발은 자기 자신의 정신적 재무장을 목적으로 하는 9가지 지수? 지혜와 기지 그리고 9가지 지수꾸준한 학습을 통해 풍부한 지식을 쌓았더라도 지혜와 기술적인 측면의 기지적 상황 대처를 위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면 리더십을 적절히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리더라면 거의 모든 방면에서 상황에 맞는 방법을 적용하는 고차원적인 지혜와 그 못지않게 기지를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앞으로 설명할 9가지 지수(도덕ㆍ지능ㆍ감성ㆍ카리스마ㆍ개발ㆍ열정ㆍ공존ㆍ비전ㆍ지조지수)를 원활하게 상호 적용시켜야만 한국형 리더십을 효과적으로 창출할 수 있고 그것이 기지적 상황 대처 역량의 리더십 구성이자 리더십 구현의 성공이다.? 도덕지수도덕지수(Moral Quotient)는 도덕성을 측정하는 지수로 9가지 지수 사운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기지 발현 시 핵심적인 작용을 한다. 이러한 MQ의 학습은 위성지학을 통해 확고하게 다진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MQ의 생활화와 모범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체득되고 연마된다. 리더가 MQ를 직접 실천해 보인다면 팔로워들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고, 이는 조직의 도덕화를 다지는 일에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또한 리더는 투철한 도덕적 가치관을 지향하여 조직을 이끌어날 때만이 리더 자신과 조직이 동시에 살아남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자신의 고정관념을 허물고 반성과 성찰을 통해 매일 자신과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진정한 도덕을 기반으로 한 리더십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능지수지능지수(Intelligence Quotient)의 기능은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확보한 지식을 적절히 활용해 창의적인 성과를 내는 것과 위기 상황에서 변함없이 발휘되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생사가 걸려있는 긴박한 문제도 창의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그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IQ는 리더에게 창의력과 융통성이라는 중요한 지혜를 안겨준다. 이러한 창의력과 융통성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뇌의 특성을 이해, IQ를 계발하는 것이 을 갖추고 있으며 타인의 동참을 유도하는 능력을 뜻한다. 리더와 팔로워 사이의 관계 속에서 리더가 팔로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CQ의 극대화인 것이다. CQ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문제 해결능력을 키워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결해야 한다.? 개발지수예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전문성 그 이상의 것을 부단히 요구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분야의 전문성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서둘러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개발지수(Development Quotient)의 계발에 나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DQ의 지속화를 위해서는 자기 계발의 기회인 시간 관리를 철저히 계산하고, 새로운 시각과 지속적인 노력을 갖춰야 한다.? 열정지수열정지수(Passion Quotient)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열정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조직 구성원들이 끊임없이 열정을 갖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려면 리더가 먼저 열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동기부여를 하며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또 모든 사람들이 목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조직원들의 마음속에 안정과 신뢰를 형상하는 것이 중요하다.PQ의 극대화를 위한 살천 방안을 살펴보면 첫째, 중간 목표부터 설정하라. 비교적 손쉬운 중간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조직원들이 계속해서 열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둘째, 계획적으로 목표를 수립하고 달성하라. 주어진 업무에 대한 목표달성을 통해서 얻은 성취감은 또 다른 동기를 부여하고 PQ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공존지수공존지수(Network Quotient)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재는 지수를 말한다. 여기서 NQ와 처세술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흔히 처세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연줄이나 배경을 이용해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면 NQ는 수평적 네트워크 사회에서 있다.
18세기 예술비평목 차예술이란 무엇인가예술비평의 흐름예술비평의 성립 요인1) 예술개념의 확립2) 오늘날 예술가의 탄생3) 새로운 대중의 형성4) 인쇄술의 발전과 언론의 탄생5) 예술작품 표출수단의 활성화예술비평으로서의 무용비평1) 무용비평의 서막2)영국의 정기 간행물3) 무용비평가들의 기여결론예술비평이란 무엇인가예술작품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그 가치를 평가하고자 하는 활동으로써, 예술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독자와 예술가에게 새로운 관점과 활력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예술비평의 흐름18세기 이전 예술에 대한 논평은 Aristotle의『시학』에 근거18세기 오늘날 예술비평의 형태가 가시화되기 시작19세기 전문적인 예술비평 확립예술비평의 성립 요인1) 예술개념의 확립미술 빙켈만(Johann J. Winckelmann,1717-1768) 이후 미술의 절대가치를 논의하면서 장식미술과 분리된 ‘fine art’의 개념이 확립음악 무용, 음악, 언어 등 여러 장르를 포괄하는 의미였던 ‘music'이 18세기에 이르러 노래하고 연주하고 작곡하는 특수한 정신활동으로 간주되고, 미적 계기를 그 본질로 하는 자율적 예술로 성립문학 이전까지 역사, 철학, 웅변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던 ‘문예(belles-lettres)'라는 개념이 와해되고 ‘문학’이라는 개념이 나타남무용 사를르 바뙤 Charles batteux의『단 하나의 원리로 환원된 예술들』을 인용하여 무용을 하나의 예술형태로서 인정하기 시작루이스 드 쿠작『고대와 현대의 무용, 무용에 관한 역사적 논문』(1754)- 움직임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 이론서- 의미 없는 움직임에 불가하였던 발레에 대해 비판- 움직임의 내적 표현성에 근거한 무용을 주장장 조르쥬 노베르『무용과 발레에 관한 편지』(1760)- 18세기 후반에 발레의 위상을 높여준 비평적 저술다음과 같은 저서들은 18세기 무용, 특히 발레 전반에 대한 비평적 논의에 영향을 미쳤다.2) 오늘날 예술가의 탄생기독교적 권력문화를 창조 도구 궁정문화 발전 권력계층의 연예ㆍ오락적 작품을 만듦 새로운 금융자본 발달 오늘날의 예술가 탄생3) 새로운 대중의 형성18-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점진적인 산업화는 널리 분포되어있던 인구를 도시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러한 도시화는 대중의 형성을 촉진시켰다.18세기의 감상자&독자층은 대체로 도시 부르주아로 너무 제한되어 있었고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교조적이었다. 예술가들 역시 비록 18세기 후반에는 독립하기 시작한다지만 여전히 자기와 관련된 좁은 사회집단과 지나치게 강한 연결을 갖고 있었다.4) 인쇄술의 발전과 언론의 탄생지속적인 인쇄술의 발전은 행상문학의 소멸과 함께 출판의 상업화를 가져왔고 언론을 탄생시켰으며 저널리즘 비평의 출현을 예고했다.간행물들의 대량생산은 예술비평의 독자층을 확장시켰고, 18세기 두 독자층인 부르주아와 민중계급의 분할을 약화시키면서 다양한 독자층을 상대적으로 단일화, 동질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5) 예술작품 표출수단의 활성화18세기 사회ㆍ문화적으로 예술을 관망하는 시각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예술작품을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진 것이 되려 하였다. 다른 한편 예술작품의 창조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서, 여러 전문적인 생산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일반 상품과 같은 조건으로 재배되고 생산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작품을 표출하는데 있어서 여러 전시체제와 공개 연주회, 극장 공연 등을 활성화 시켰고 동시에 그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비평의 영역과 역할 또한 확대시켰다.예술비평으로서의 무용비평1) 무용비평의 서막초기 무용비평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중엽 프랑스 궁정발레 시대에 이른다. 이 시기의 무용비평의 관점은 다소 포괄적이고 피상적이었다. 발레가 아직 기교상으로나 그 의미상으로 완전히 정립되지 못하고 궁정발레로서의 정착기를 거치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장 로레트 Jean Loret (1610-1665)음악 애호가로서 시인, 저널리스트로 활약그의 저서『역사의 시상 Muze Historique』에 실린 그의 발레에 대한 광범위한 취재는 무용의 기교나 안무보다는 궁정발레의 사회적 가치 또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기술그 무렵 최초의 예술무용인 발레가 하나의 독립적인 극장예술로 정착하지 못한 오페라-발레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 역시 아직 전문성을 띠기 어려웠고, 무용의 상황에 대해 썼던 얼마 되지 않는 글들마저도 미적 평가가 거의 없는 보고서에 지나지 않았다.2) 영국의 정기 간행물발레의 역사에서 18세기 전반기는 최초의 예술무용형태인 발레가 프랑스에서 발전하는 과정으로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초기 단계였다. 특히 영국에서는 무용이 아직 진정한 예술로서 구조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고 비교적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그 논의 역시 드물었다.18세기 초 영국에서는 초기의 역사적인 간행물들이 속속 발간되었다.Richard Steele 『Tatler』(1709-1711)Joseph Addison 『Spectator』(1711-1712, 1714)Jonathan Swift 『Examiner』(1710)Samuel Johnson 『Rambler』(1750)특히, 『태틀러 Tatler』와『스펙테이터 Spectator』에서
미국 포스트 모던 댄스의 발전 과정1. 포스트 모던 댄스의 분리 : 1960년대초기 포스트모던 댄스 안무가들은 신체의 사용 및 무용의 사회, 역사적 기능의 측면에서 역사적 현대무용이 이루어 놓은 일정한 성과들을 추방하고 개선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현대 무용이 이루어 놓은 일정한 성과들을 추방하고 개선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현대 무용 단체는 신체를 자유케 하고, 무용을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거나, 사회적, 정신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대신, 발레 이상으로 대중들과 괴리된 채 지식인을 위한 고고한 예술 형식으로 발전해 왔다. 현대 무용이 그려낸 신체적 윤곽은 다양하게 과장되었으며, 젊은 안무가들은 대가의 절대적인 폐쇄적인 길드제 내에 수용되기 어려웠다. 비록 머스 커닝햄이 교조적인 현대무용으로부터 본질적인 분리를 이루어 냈지만, 그의 작품은 특정한 기술적 내용적 제약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커닝햄 은 현대 무용과 포스트 모던 댄스의 경계에 선 인물이다. 그의 수직적이고 활기찬 움직임 양식과 우연 기법의 사용은 현대 지식인의 신체적이고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안무의 형식적 요소를 강조하고, 장식과 음악을 댄스로부터 분리한 점을 볼 때, 커닝햄 의 작업은 모더니스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작품과 그의 동로 존 케이지의 이론이 여타 포스트 모던 안무가들에게 긍정적으로건 비판적으로건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규범적인 현대 무용과 1950년대 아방가르드의 규칙들을 파괴함으로써 포스트 모던 안무가들은 무용의 의미 대신에 무용의 매체를 전면으로 하는 이른 바 ㅡ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대신 단지 조명하고 경험의 길을 열어주는 것ㅡ이라는 문화적 경향에 부합하는 것이었다.초기 포스트 모던 안무가들의 무용은 냉정한 형식 분석이 아니라 매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무용의 구저만이 아닌 본질, 역사, 기능이 의문의 주제가 되었으며, 1960년대 후반은 정치적, 문화적 격변을 예고하면서 묵인과 유희적 반란의 정신이 만연되었다. 절은 세무가들은 자신의 무용을 통해 현대 무용의 신화, 영웅 심리적 비유들로부터 결별 하였으며, 동시에 우아한 발레와 심지어 포스트 모던 댄스의 유사한 영향 관계들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분리기는 1960년대부터 1973년까지 걸쳐 진행되었고, 특히 처음 8년간 포스트 모던 댄스의 몇 가지 주제들이 제시되었다.그 첫번째 주제는 역사에의 참조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들 안무가들이 거부한 유ㅠ산을 재인식하는 방법으로 설정되었다, 이본느 레이너의 '세 개의 바다 풍경', '간편한 아침 식사'(1963)가 제시한 훌륭한 현대 무용의 공연방법과 같은 것들은 과거 역사와 자신의 역사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 밖에도 시공간과 신체의 새로운 사용 및 무용의 개념규정과 같은 주제는 새로운 무용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를 실천을 통해 탐구함으로써 현재와 과거를 통찰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10 분 동안 뭉쳐진 무리들 위를 번갈아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몬느 폴티의 '허들'(1961), 실제 시간 속에서 옷을 입고 벗는 동작을 담은 스티브 팩스턴의 '플랫'(1964) 등의 작품 속에서 현대 무용의 특징인 프레이징의 역학은 박탈된 채 시간은 단조롭고 반연극화된다. 공간의 사용은 분절화와 장소 개념에 의해 탐구 되었다, 폴티는 초기작 '로울러'와 '시소'(1960)를 화랑에서 공연하였고, 테리사 브라운은 닭자으 지붕과 주차장에서 공연하였다.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연출자에 의해 완벽한 야외공연이 실행되었고, 이에 따라 야외 공연에의 충동은 안무가의 미학적 선택에서부터 연출가의 상업적 전략으로 변이 되었다. 이시기에 화랑과 박물관은 가장 보현적인 포스트 모던댄스 공연 현장이 된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시각 예술가들이 대상의 정적인 묘사로부터 공연을 통한 표현으로 관심이 이동을 보인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신체의 문제와 그 사회적 의미가 전면에 부각되었고 그리하여 신체는 비유적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 무용의 주제가 된 것이다.포스트 스를 통하여 신체의 실험이 태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한 형식이 서구의 무용기법을 특징지웠던 통제를 풀어버리는 이완 기법이다. 서구의 무용 기법을 특징지웠던 통제를 풀어버리는 이완 기법이다. 안무가들은 자연스러운 신체를 탐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숙련되지 않은 무용수들을 기용하였다. 신체 실험의 또 다른 형식은 순수 에너지의 방출이다. 이것은 특히 팩스턴과 레이너의 ‘말, 말들’(1963)에서와 같은 누드 작품이나 레이너의 2인무 ‘지역’ (1963)에서의 성적 이미지의 표현으로 나타난다.초기 포스트 모던 안무가들의 무용을 규정하는 문제는 시공간과 신체에 대한 탐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rlxk 예술과 무용의 본질에까지 확산된 성질의 것이었다. 게임, 스포츠, 경연 대회, 걷거나 뛰는 단순한 행위, 음악 연주나 강의시의 몸짓, 그리고 심지어 영화의 움직이는 장면이나 언어의 정신 작용까지도 무용으로서 표현되었다, 사실상 포스트 모던 안무가들의 무용은 그 내용에서만 아니라 문맥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러한 무용의 경계짓기의 시작이 시공간과 신체의 과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현대 무용과의 분리가 이루어 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1968년부터 1973년까지는 적어도 세가지 주제가 개발된 과도기였다.그것은 정치와 관객 참여, 그리고 비서구적 영향이다. 참여, 민주주의, 협동, 사회생태학과 같은 정치적 주제가 명료해졌고, 연극과 무용이 보다 정치적이 됨에 따라 정치 운동에서 연극적 방법이 원용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안무가들이 무용에 집단적 인원을 동원시켰던 바, 이 시기에 레이너의 작품인 ‘전쟁’, ‘트리오 A’ 및 가두 시위가 이러한 움직임에 부응한 것이며, 특히 대작 ‘끊임없는 프로젝트’(1970)는 단지 무대와 공연 양식의 실험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지도력과 통제의 문제를 부각시킨 작품이다. 또한 팩스턴의 ‘제목없는 강의’. ‘아름다운 강의’, ‘관객’, ‘수행’, ‘정맥 강의’, ‘윈터 솔저와의 공동 작품’등의 작품은 모두 전쟁, 검열 민사소송,의 책임과 같은 문제를 표면화시킨 것들이다. 1970년 그랜드 유니언은 즉흥 공연을 위한 집단으로 새로운 지향을 보였고, 팩스턴 등은 소위 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한 대체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대체적인 사회 관계로 발전되었다. 즉 이것은 떨어지는 신체적 기법, 2인무, 그리고 신체적인 즉흥과 관련되는 것인 동시에 그 형식 속에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연기는 가능한 세계의 전형인 삶의 양식을 투사하였고, 그 속에서 즉흥은 자유와 적응을, 보조역은 신뢰와 협동을 각각 상징한 것이다.비서구적 형식과 움직임의 철학에 의한 주제는 비록 존 케이지와 선 철학의 영향으로 포스트 모던 댄스의 초기부터 나타난 것이지만, 무용수들이 태극권이나 합기도를 정식으로 배우기 위해 강습소를 찾으면서 보다 확산되었다. 아프리카와 동아시가에 대한 미국인의 매혹은 포스트 모던 댄스나 흑인의 부활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쿵푸 영화나 힌두교 제식, 모택동주의자들, 동양과 아프리카의 의상등에서와 같은 다양한 문화 형식 속에 나타났으며, 그것은 이들 국가의 권력 관계의 변화 및 베트남 전쟁의 충격을 반영한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는 시간과 신체에 대한 기존 태도에 있어서 동서양 간의 가치관에 갈등을 야기 시켰다. 역사적, 정치적으로 복합적인 이유 때문에 1960년대 흑인 무용 운동의 미학적, 사회적 기능은 지배적인 백인 포스트 모던 댄스운동과는 첨예하게 분리되었다. 비록 흑인 무용이 이 시기 흑인 안무가들에게 중요한 원천으로 작용하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포스트 안무가들은 동양적 형식에 치우쳐 있었던 것이다.2. 분석과 비유, 그리고 형이상학 : 1970년대7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 모던 안무가들 사이에 무용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새롭게 출현한 양식은 환원적이고 실제적이며, 객관적 현실성을 띤 것이었다. 음악이나 조명, 의상, 받침대 같은 표현적인 요소들은 무용에서 제외되었다. 무용수들은 기능적인 옷을 입었고, 평탄하고 잘 비추이는 공간춤추었다. 순수하고 단순한 움직임의 충분한 독법을 위해서 반복과 도치, 수학적 체계, 기하학적 형식과 같은 구조적 장치들이 허용되었다. 첫 번째 단계의 포스트 모던 댄스가 그 이론적 추진력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논쟁이었다면, 이 시기 분석적 포스트 모던 댄스의 단계에 있어서는 철저한 계획에 의존한 것이다. 이러한 분석적 포스트 모던 댄스에서 움직임을 무보, 노동과 여타 일상적 움직임을 암시하는 신체적 태도, 언어 상의 언급, 부여된 과제 등을 사용함으로써 개인적 표현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객관적이 된다. 이러한 모든 전략들은 60년대부터 사용은 되었지만 70년대 이르러 지배적인 경향과 보다 더 계획적으로 조직되었다.반환상주의자들은 구절보다는 스텝이나 몸짓을 더 강조함으로써 세밀한 관찰을 요구하고 무용의 최소단위까지 밝히고자 하였다. 비유적인 포스트 모던 댄스는 의상, 조명, 받침대, 인물, 분위기 등과 같은 연극적 요소들을 포괄한다. 이러한 표현적 비유와 현상화의 방식을 통해 이 부류의 아방가르드 댄스는 역사적 현대 무용과 유사성을 지니지만 포스트 모던적 재생과정과 기법을 갖추고 언어와 영상을 결합하고 정적인 것과의 반대구조를 사용, 지붕이나 화랑, 여타 행위 장소와 같는 체계에 참여하고 있기에 포스트 모던 댄스로 간주한다.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포스트 모던 댄스의 원동력은 감소되었다.현대 무용이나 발레, 흑인 무용과 가장 뚜렷하게 변별되는 것은 음악성과 리드미컬한 조직에 대한 거부 였으며 극적인 구절화, 대조, 해결과 같은 원리 역시 배제하였다. 분석적 포스트 모던 댄스는 직접적 참여나 장치의 폭로를 통해서 관객들을 안무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러한 무용이 비록 의미의 표현을 배제했지만 무언가를 의미하였다. 또한 객관성의 추구, 현실적 양식, 일상적이고 냉정한 태도, 사실에 즉한다는 의식 등 역시 의미를 배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용의 취지의 핵심적 측면을 이뤘던 것 이다. 그랜드 유니언은 비록 그들이 극장을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탈신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