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京劇?譜의 起源검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극이 형성되기 전에 가면과 분으로 치장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가면의 사용은 종교적 주술성이 강한 고대의 원시가무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춘추시대 역귀를 쫓는 의식에서 청동가면을 쓰고 악귀를 쫓았다고 하며, 북제(北齊)때 삼군의 수장인 난릉왕(蘭陵王)은 용모가 아름다워서 일부러 무서운 현상의 목각가면을 쓰고 전쟁에 나가 매번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가면의 사용이 이미 보편화 되어있다는 것을 반영해주고 있다.가면은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다양한 장르의 공연예술에서 자주 사용이 되었다. 하지만 배우의 감정을 생동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노래 부르기도 불편하여 점차 귀신이나 동물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당대 이래로 이러한 가면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분칠 화장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당나라 시대의 대표적 가무희인 에 등장하는 술 취한 붉은 얼굴의 소중랑(蘇中郞)이나 골계희인 에서 어리석은 참군(參軍)이 분으로 화장한 모습을 보면, 이 시기부터 분 화장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분 화장은 오대십국 시기에 상당히 유행하였으나 화장법이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송·금나라에 이르러 연극의 틀이 갖추어지면서 분 화장도 발전하여 ‘깨끗한 화장’과 ‘그리는 화장’두 가지의 화장법이 생겨나게 된다. 깨끗한 화장은 외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분을 살짝 바르고 눈과 눈썹만 그린 화장으로 ‘원래얼굴[본검(本?)]’?‘깨끗한 얼굴[결면(潔面])’ 또는 ‘준수한 분장[준분(俊扮)]’이라고 불린다. 그리는 화장은 극의 예술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익살스러운 역을 하는 부정(副淨)과 부말(副末)배우의 얼굴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화장을 하고 그 위에 선과 약간의 문양을 그려 넣는다. 중국연극의 틀이 완성된 원나라 시대 연극에서는 극의 내용이 광범위해지면서 다양하고 많은 극중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극중 인물의 다양한 성격을 표현 바탕을 잡고, 다시 얼굴모양에 따라 더 세분화되고 상징화되는 것이다.배역은 모두 개별성이 있기 때문에 정확히 같은 두 개의 검보는 없다. 검보의 유형은 대략 12가지 정도가 있다.1)구안면형(球顔面形)구안면형은 사람의 얼굴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에 검보분장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유형이다. 먼저 기본색상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러운 얼굴을 과장하기 위해 얼굴 전체에 주색(主色)을 발라 그것을 피부색으로 정한다. 그리고 다른 색으로 눈, 눈썹, 코, 입과 미세한 주름과 얼굴의 굴곡을 정밀하게 그려서 원하는 안면 표정을 만드는 것이다. 구안면형의 대표적인 배역으로는 포공(包公)이 있다. 포공은 흑검으로 그려졌는데, 사사로움이 없는 공정한 성품을 가졌고 흔들림 없이 법을 집행하는 청관(淸官)임을 표현하기 위해 흑검에 미간을 찌푸려 주름진 하얀 눈썹을 그려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그의 심정을 표현했다.2) 삼와안면형(三瓦顔面形)구안면형의 변형으로 한 가지 색상을 주색으로 하고, 그 후에 흑색 혹은 다른 색으로 눈, 눈썹, 코는 과장하거나 확대하여 그린다.이 분장의 다른 형태로는 입체삼와안면형(立體三瓦顔面形), 첨삼와안면형(尖三瓦顔面形) 화삼와안면형(花三瓦顔面形), 노인삼와안면형(老人三瓦顔面形)등이 있다.입체삼와안면형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눈썹, 큰 눈, 둥근 코와 입을 덮은 풍성한 수염이 특징이며, 주된 색상은 홍색, 백색, 자주색이다. 충성스럽고 용감한 전사같이 긍정적 인물을 표현하는데 많이 사용된다.첨삼와안면형은 대체로 와미(臥眉) 혹은 첨미(尖眉)이며, 눈 모양은 부릅뜨고 있거나 치켜 올라간 모양도 있으며, 대체 콧구멍이 좁고 뾰족하다. 턱수염은 입을 덮는 긴 것이거나 입을 노출시키는 짧은 것을 쓴다. 주로 쓰는 색상은 백색?홍색?남색?자색?황색등의 색상이 있으다. 용감한 대장, 보통의 지방 호족이나 악질적인 역할도 표현하므로 다소 복잡한 유형이라고 볼수 있다.화삼와안면형은 눈, 눈썹과 코 주위에 복잡하고 외관이 다채로운 무늬를 가지고 있다. 수염은 보통 적색이나 차지한다. 주로 백발이 성성하고 일편단심 충직한 노장수를 표현하는데 쓰이며, 주로 적색,흑색,또는 자색이 쓰인다.5)파화안면형(破花顔面形)파화안면형은 화삼와안면형에서 발전된 것이다. 양 볼의 주색을 빼버리고 앞이마의 주색만 남겨둔다. 다른 색상의 여러 가지 문양은 얼굴의 다른 부위에 칠해지고, 형태와 구성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며 복잡하고 단절된 선으로 표현된다. 안면은 깨끗하거나 막대모양의 수염 또는 검붉은 수염을 가진다. 거칠고 투박한 전사를 나타내고, 성격은 긍정적인 성격과 부정적인 인물 모두를 표현한다.6)비대칭안면형(非對稱顔面形)좌우대칭으로 이루어 지지 않은 분장이다. 주로 악한이나 범죄자를 표현한다. 주로 삐뚤어진 성격의 소유자며 녹색과 같은 검보에서 흔하지 않은 색상을 사용한다.7)도사안면형(道師顔面形)삼와안면형과 비슷하다. 신장모양의 눈주위와 코, 입주위의 꽃문양 등이 특징이다. 이마의 중앙에는 적색 진주와 비슷한 것이나 9개의 점이 있으며 이것은 배역이 불교 수도자로부터 유래했음을 보여준다. 백색, 적색, 황색, 또는 청색을 사용하고 백색이 가장 일반적이다. 얼굴은 말끔하거나 곱슬 수염을 가지고 있다.8)환관안면형(宦官顔面形)주로 성격이 좋지 않고 항상 세도를 부리며 백성을 폭정으로 다스리는 환관을 표현한다. 홍색과 백색 두 가지 색상만을 사용한다. 뾰족하게 그려진 눈썹은 교활함의 상징이고, 눈 주위는 주방용 칼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 백성을 맘대로 학살하는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수염이 없는 아래로 처진 입은 잔인함과 기만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이마에는 원광(圓光)을 그려서 거세를 한 특수 신분임을 표현했으며 양 볼에 그려 넣은 살쪄서 잡힌 주름으로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지내는 자가 가지는 표정으로 표현했다.9)주괴안면형(鑄塊顔面形)안면중앙부에 신발모양이나 금은주괴와 유사한 모양을 그려넣는다. 일반주괴안면형, 반대주괴안면형, 다색주괴안면형이 있다.일반주괴안면형은 삼와안면형과 비슷하며, 전사나 하층민의 장군을 표현한다.반대주괴안면형은 눈썹 윗부분이아들이는 전통 문화적 관점에서의 색채와 결합하여 오랜 세월동안 지켜져 정해진 사용 규율을 형성하였고, 각기 다른 색상은 극중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1)붉은색사람의 얼굴색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대부분 혈기가 왕성하고 충성스러우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표현한다. 붉은 얼굴의 남자를 ‘홍생(紅生)’이라고 부른다. 『삼국지연의』에서 의리있는 장수로 묘사되는 관우(關羽)와, 자신을 인정해 준 제갈량에 대한 변함엇는 충성심을 지킨 강유(姜維)가 대표적인 인물이다.2)자주색자주색은 혈기가 있으면서도 중후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진 인물을 표현해준다. 자주색은 붉은색과 검은색의 중간색이기 때문에 붉은색과 검은색 얼굴의 특색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주로 나이든 인물을 나타낸다.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이자 중후한 재상인 상우춘(常遇春)과 황권을 찬탈하려는 황후를 설득했다는 강직한 원로대신 서연소(徐延昭)등이 있다.3)분홍색분홍색은 살색이라고도 불린다. 충성스럽고 용감하지만 나이가 들어 혈기가 떨어진 인물은 표현한다.에서 어굴하게 아버지를 잃고 청운산에 은거한 하옥봉(何玉鳳)에게 무예와 사랑을 가르쳐준 백발의 협객 등구공(鄧九公)과 에서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고아 조씨를 도와주는 의리의 노장 위강(魏絳)이 대표적인 인물이다.4)검은색검은색의 얼굴화장은 강직하고 엄숙한 성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역할로는 강직과 청렴의 대명사인 송나라 시대의 판관 포공과 양산박 108명의 영웅 가운데 흑선풍이란 별명을 가진 어리석지만 솔직한 성격의 이규가 있다. 이들은 모두 검은색 분장을 하고 있지만 성격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정직한다는 점은 같기 때문에 모두 얼굴을 검게 화장하는 것이다.5)흰색흰색은 화장품의 종류에 따라 유분이 없는 분백(粉白)과 유분이 있는 유백(油白)으로 나뉘며 상직하는 의미가 각자 다르다. 분백은 속셈이 깊고 음험하며 교활한 성격을 상징적으로 묘사해 주는데 얼굴 전체를 하얗게 칠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난세의 간웅 조조와 명나라 흡사한 인물이다.9)금·은색금색과 은색은 흔치 않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주로 신선이나 요괴를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대표적인 배역으로는 치수의 신 이랑신(二朗神) 이 있다.4. 京劇?譜의 ?法경극무대에서는 배우가 분장한 얼굴색과 모양만으로 극중 인물의 신분과 성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배우의 이마, 눈썹, 눈, 입 등에 다시 여러 가지 문양이 그려짐으로써 극중 인물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 더욱 강조된다. 각기 다른 색과 얼굴모양 그리고 문양으로 각각의 개성이 그려지면 배역은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1) 눈썹의 화법눈썹은 검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물의 성격적인 특징과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가장 직접적이고 수단이라 할수있다. 미와(眉瓦) 혹은 미와(眉窩)라고 부른다. 미와는 전체 얼굴간의 비례가 관건이 되므로 경극의 배우들은 모두 미와 그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 미와의 화법은 매우 다양하다. 직선인 눈썹을 정상이라고 할 때, 눈썹의 형태가 조금 구부러진 것은 그 성격이 보통사랍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눈썹 위에 자잘한 무늬가 있는 것은 그 성격이 강직하거나 사납다는 점을 나타낸다. 눈썹형에는 본미·유엽미·세미·직미·노미·점미·입미·당랑미·응미·수자미·호미미·봉퇴미·간미 등이 있다.①본미(本眉) : 배우의 진짜 눈썹이며, 거기에 색채와 형태상에서 조금 과장을 더 보탠것이다. 일반적으로 유검(??)분장을 하는 정항 배역에 쓰인다.②유엽미(柳葉眉) : 모양이 버들잎처럼 생겼다. 본미에서 변화해 나왔으며 눈썹의 양 끝이 조금 뾰족하다. 이 눈썹은 문의 검보에 쓰이는지 무의 검보에 쓰이는지에 따라 금 함의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문인에게 유엽미를 그리면 폄하의 의미를, 무장에게 유엽미는 칭찬의 의미를 가진다.③세미(細眉) : 본미와 유엽미에 비해 조금 가늘다. 일반적으로 선량하고 충직하여 온화한 성격을 가진 배역에 TM인다. 경극에서 홍색 정검의 분장을 한 배역은 대부분 세미를 그린다.④직미(.
차기 주석 习近平목차1. 중국 권력구조 - 과거의 지도자 국가운영 기조 - 5세대 지도자 2. 习近平은 누구?? 3. 习近平의 성향 4. 중국 국내 전망 - 문제점 - 정책 방향 5. 习近平의 외교 전망 6. 중국과 한국의 관계 7. 결론1. 중국 권력구조과거의 지도자 국가운영 기조5세대 지도자공청단(共靑團) :공산주의 청년단 태자당 (太子黨):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후손2. 习近平은 누구??3. 习近平의 성향시진핑 : 자기이익을 챙기면 안되며 법을 잘 지켜야 하고, 양심적이어야 한다” 시진핑 : 몇 백 명의 간부를 잃더라도 몇 백만 군중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정치전문가 가오쯔카이 : 사회안정과 공산당 통치를 매우 중시하지만 대중 앞에서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매우 신중한 사람청렴자기 관리 엄격4. 중국 국내 전망문제점 일본 · 베트남 등과 영토분쟁 → 국민감정 폭발 미국 · 유럽연합(EU) 위안화 절상 → 신경전 중국 내 반체제 인사 류사오보 변호사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 결정 → 인권문제로 지탄받음 마오쩌둥 전 주석 비서 출신인 리루이 등 개혁성향 공산당 원로 → 언론 · 출판 · 집회의 자유 요구4. 중국 국내 전망정책 방향 12 · 5규획 (2011 ~ 2015) 성장 일변도 → 내수진작 · 민생보장등 분배위주 포용성 성장 (소외된 지역 · 계층 중심으로 발전) 중공업과 수출 주도형 정책 → 내수 중시, 첨단산업 위주로 경제체질 개선 추진 중국 실정에 맞는 기초 공공서비스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강화 → 도시와 농촌간 격차 완화5. 习近平의 외교 전망南北日美실 리우 호강 경경 쟁6. 중국과 한국의 관계12월 한국 방문 時 习近平 : “求同存異” 강조 동일한 것은 함께 추구하고 이견은 남겨둔다. 親韓파 ???7. 결론신 중 함정치 외교 → 겸손, 자중경제 → 시장지향적, 개방적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무정부주의자 파금(巴金)의 일생과 작품 ≪가(家)≫의 인물들목차1. 서론2. 동경에서 현실로3. 갈등. 내려놓음. 대가4. 결론5. 참고문헌1. 서론파금(巴金, 1904~2005)은 몇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까지 오른 유명한 현대 문학가이다. 그가 대문호의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기간을 거치고 난 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간의 문혁기간 동안 그는 4인방(四人幇)의 횡포에 끊임없는 사상개조와 박해를 받았다. 그 이유는 그의 머릿속 깊숙이 자리했던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적 사상) 때문이었다.1920년대에는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국가들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기존 체제와의 융합을 시도하였으나, 이 과정은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문학가들 역시 서양의 자본주의(資本主義)에 굴복하여 더 이상 국가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학이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파금이 추구한 무정부주의 역시 이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이론 중 하나였다.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共産主義)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다는 입장은 같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노동계급의 대표자 격인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생산, 분배에 관한 모든 것을 국가가 장악하고, 자유 역시 상대적인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 무정부주의는 국가가 있으면 독재와 불평등이 끝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국가자체를 부정함과 동시에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그 입장을 달리한다.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는 당연히 파금이 주장한 무정부주의 사상은 받아 들여 질수 없는 것이었다. 비단 중국뿐만이 아니라, 국가체제를 유지했던 모든 국가들은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국가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는 국가 존속에 커다란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필자는 이 글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사상과 전혀 다른 체제를 가진 사회 속에서 살았던 무정부주의자 파금 일생과 또한 그것을 작품 ≪가≫에 나타난 인물들과 연관시켜 살펴보고자한다.2. 동경의 본명은 이비감(李?甘)이고, 1904년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봉건 지주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여명의 집안 어른들과 30여명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어린 시절 파금의 사상을 형성시키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빈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고통 속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파금에게 가르쳤다. 하지만 사랑으로 그를 보살폈던 어머니가 파금이 10살 무렵 세상을 뜨고, 3년 후 아버지 역시 그 뒤를 따르자,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어른들은 집안의 재산을 탕진했고, 형제, 자매들은 자신들을 옭매는 봉건집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파금은 이런 집안에서 19년 동안이나 살며 봉건예교(封建禮敎)가 얼마나 허위적인 것이고, 어떻게 형제자매들의 행복을 앗아가는지를 직접 목격했으며, 가마꾼들과 하인들이 하는 하소연에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게 되었다. 이 속에서 어린 파금은 봉건 가정과 제도에 대해 불신과 반감을 가지게 되었었고, 규제가 없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1920년 파금은 성도외국어전문학교(成都外國語專門學校)에 입학하게 된다. 그해에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 1842~1921)이 쓴 )을 읽는다. 그 내용은 파금이 추구했던 삶과 같은 내용이었고, 또한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나는 세계에 이런 책이 있으리라고는 도대체 생각하지 못했다. 이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말하고 싶었으나, 무어라 정확히 말할 방법이 없었던 내용이다. 그것들은 얼마나 명확하고 합리적이며 웅변적인가.” 라고 말하기도 했다.1921년 그는 이라는 무정부주의 간행물을 읽고 그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반월(半月)의 회원이 된다. 그는 이 간행물을 통해 )라는 문장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는다. 노동자들에게 투쟁에 참가 할 것을 호소하며때 발표된 것이다. 하지만 여성 단발 금지령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반월(半月)은 폐간되고 만다. 이후 그는 무정부주의를 내세운 조직 '균사(均社)'를 조직하여 활동하며,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처했다.1920년대에 무정부주의 활동은 상해, 북경, 남경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펼쳐졌다. 파금 역시 1923년 더 넓은 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치고자 상해로 떠난다. 상해에 도착한 파금은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사상을 가진 동지들과 무정부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그들과 함께 간행물 을 발간하여 무정부주의 사상을 퍼뜨리는데 힘썼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북경으로 가 새로운 동지들과 함께 간행물 을 창간하여 편집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파금의 활동은 주로 글과 번역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시카고 무정부주의자들의 여덟 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을 소개한 , 시카고 무정부주의자들의 법정투쟁, 재판과정을 기록한 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 , 등의 글을 발표했다. 또한 ≪과학적 아나키즘≫, ≪러시아의 비극≫, ≪재산이란 무엇인가?≫, ≪아나키즘의 사회학적 기초≫등의 번역서도 발표하게 된다. 이 시기에 파금의 활동을 보면 무정부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한 노력들을 살펴 볼 수 있다.1927년 중국내에서 무정부주의는 점점 쇠퇴해가기 시작한다. 이에 실망한 파금은 무정부주의를 좀 더 깊이 연구하고자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지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프랑스에서 파금은 중국에서 혁명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도망자라고 평가하며 괴로워했다. 그리고 자신이 격은 고통을 토대로 하여 처녀작 ≪멸망(滅亡)≫)을 집필했다. 파금은 자신과 같이 무정부주의 사상을 가진 동료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중국의 정치상황과 무정부주의를 현실에 어떻게 결합시킬까? 에 대해 토론하였다. 또한, 무정부주의와 관련된 작품들을 번역하는데도 힘썼다. 이시기에 파금의 번역서를 보면 ≪인생철학(人生哲學):그 기원과 그 발전(其起源及其發展)≫, ≪科學的無政府主義之戰略(과학적 무정부주의의 전략)≫,공산주의(無政府主義與共産主義)≫ 등의 작품이 있다.3. 갈등. 내려놓음. 대가1928년 파금은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상해에 정착한다. 그는 프랑스에서 연구한 무정부주의를 현실에서 펼치고자 했지만, 이때의 무정부주의 활동은 겨우 상해에서만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무정부주의 운동을 펼쳤던 동료들이 정부의 관리가 되어있었다. 필자는 이때부터 무정부주의와 현실 사이에서 파금의 갈등은 시작된다고 본다. 이미 ≪멸망(滅亡)≫을 통해 작가로 이름을 올린 파금은 귀국 후 2년 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프랑스에서와 같이 무정부주의 작품들을 번역하고 출판사에서 편집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1931년 파금은 작품 ≪가(家)≫를 발표한다.파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고(高)씨 집안을 만들어 냈다. 필자는 이 고(高)씨 집안을 당시 중국으로 보고 글을 써내려 가려 한다. 고(高)씨 집안을 대표하는 어른인 고(高)씨 할아버지는 봉건사상을 깊숙이 받아들여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권의적인 인물로 표현했다. 고씨 집안의 장손 각신(覺新)은 집안의 어른들의 뜻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거역하지 못하고 따르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동생들에게 무저항주의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촌누이와의 결혼도 집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대신 점괘로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그 후, 미신 때문에 만삭이었던 자신의 아내까지 잃고 나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고통스러워한다. 이런 각신의 태도는 현실에서의 파금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무정부주의라는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현실과 결합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따르게 되는 파금의 삶과 고통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는 인물이 바로 각신인 것이다. 반면 막내인 각혜(覺慧)는 모든 면에서 각신과 대립한다. 그는 집안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물로 편집 일을 하면서 구제와 구사상을 공격하는 글을 쓴다. 할아버지인 고씨 영감으로 인해 연하자 집안을 떠나는 봉건사상을 반대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필자는 각혜가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을 파금이 중국의 봉건주의적 사상을 벗어나 무정부주의 사상을 향해 떠나는 것이라 보고 있다. 후에 파금은 각혜에 대해 “각혜가 나의 자화상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나의 모습이 있다” 라고 했다.하지만, ≪가(家)≫ 이후로 발표한 파금의 소설들)을 보면 각혜처럼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인물들보다 각신처럼 봉건제도로 인해 희생당하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들을 통해 파금은 봉건예교에 대한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자연스럽게 무정부주의를 내려놓고 작품에 대한 창작과 현실세계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파금은 그전에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정부로부터 높은 신뢰를 받아 작가협회 부주석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1950년 파금은 자신은 무정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무정부주의 관점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며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공식적으로 포기한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고, 1950년 말에는 사인방 중 한명인 요문원에 의해 무정부주의자로 비판받았다. 요문원은 파금의 작품이 청년들의 사상을 파괴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파금이 다시 요문원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쓰자, 요문원은 파금의 작품 ≪가(家)≫를 무정부주의, 애정주의, 개인주의의 혼합체라 비판했다. 또한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요문원은 파금을 무정부주의, 반동분자)라 칭하며 박해했다.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파금은 홍위병)들에 의해 외양간이라는 감옥으로 끌려가 사상개조를 받고 사상보고서를 썼다. 홍위병들의 박해는 그의 가족들에게 까지 미쳐 그의 아내인 소산(蕭珊)은 홍위병의 허리띠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파금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암에 걸렸으면서도 제때 치료받지 못해 문화대혁명 기간인 1972년 결국 사망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1976년 까지 파금은 그 시대 많은 지식인들처럼 온갖 박해를 받다.
..PAGE:1..PAGE:2당 현종과 양귀비와의 순수한 애정극50척으로 이루어진 곤곡(崑曲)처음에는 침향정(沈香亭)으로 불렸음.10년에 걸쳐 3번이나 원고를 개정한 뒤 완성시킴.희곡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조집신(趙執信)이 제보(製譜), 오서부(吳舒鳧)가 문장을 검토, 서영소(徐靈昭)가 음률을 바로 잡음.음악적으로 명대(明代) 이래의 남곡(南曲)을 집대성하여, 곤곡 (崑曲) 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짐..PAGE:3 의 작가홍승(洪昇) [1645-1701]호 : 패촌 (稗村)자: 방사 (昉思)출생지 :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중국 청초(淸初)의 극작가대표작 : , 등.강희 28년(1688)에 황후의 국상기간에 을 공연하여 탄핵 받게 되었고, 학적에서 재명 되었음.고향에 돌아와 강희 43년(1704)에 술에 취해 배에서 떨어져 익사...PAGE:4 의 줄거리당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하여 그녀의 오빠 양국충을 재상에 임명하는 등 양씨 일가가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한편 양귀비의 양자인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양귀비와 그 오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긴 병사들이 반기를 들어 양귀비를 죽일 것을 현종에게 청한다. 결국 현종은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매어 자진할 것을 명한다.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는 도사의 힘을 빌어 현종과 천상에서 재회하게 된다.
아Q는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나약하고, 또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무시와 멸시를 서슴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직장 상사에게는 머리만 조아리고 있다가 부하직원들에게는 독설도 서슴지 않는 현대 사회 속 우리의 모습과도 너무 비슷해서 씁쓸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글귀는 단지 글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책이 편찬된 시간부터 오늘날까지 무려 89년 동안 이런 모습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에 한심함을 느꼈습니다.또한 자신이 무시하고 멸시하던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난 후의 아Q의 정신승리법은 그 상황만 놓고 보면 그럴듯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사람이 과연 발전할 가능성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 소설속의 아Q도 전혀 발전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현 시대에 사는 우리 역시 아Q와 같은 정신승리법을 배운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수없이 면접에서 낙방한 사람이 아Q와 같은 정신승리법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틀린 점은 찾지 못하고, 오히려 면접관이 자기와 안 맞는다. 여긴 눈이 낮다.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만 시키려고 할 겁니다. 물론, 자기는 속 편할지 모르지만.... 평생 취업은 못하겠죠. 안타까운 것은 아Q가 살았던 그 당시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아Q의 정신승리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마지막으로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장면은 개혁의 의미도 모르는 아Q가 개혁을 하겠다고 나섰던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2년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과연 그렇게 집회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지금도 인터넷에서 그날의 촛불집회를 검색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따라갔다. 친구따라 갔다. 술 마시러 나갔다. 이런 글들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광화문 앞에서 술을 마시고 떠들고 놀던 사람들이 뉴스에도 보도가 되었구요. 그때 그렇게 촛불집회의 본질도 모르고 군중을 따라 길거리로 나섰던 사람들과, 개혁의 의미도 모르면서 반역을 외치던 아Q가 겹쳐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