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우즈법 제정이후 인디언들의 생활1885년 메사츄세츠 상원의원 헨리 도우즈가 제안한 도우즈법은 1887년 의회를 통과했다. 이법은 인디언들을 백인들의 생활관습과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한 법이였다. 그래서 이법에 의해 동화되어진 인디언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 이법의 근본적 문제는 인디언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은 개인화된 농경이나 생활단위에서 살아온 민족이 아니고 전통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비록 1891년 25년간의 토지양도 제한을 해제하기 위하여 개정되었지만 이법은 근본적으로 인디언의 토지를 백인들에게 개방하기 위해 고안된 법률이었다. 체로키 족의 ‘매리 콥 애그뉴’는 “우리 인디언은 남북전쟁이후 우리의 가정을 재건하고 있었으면 그것은 잘되어 가고 있었다. (중략) 그런데 백인들은 옛날 조지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땅을 탐욕하고 있다. 백인들은 아직도 인디언을 야만인으로 보고 있으며 지능이 모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간주한다” 라고 말했다. 도우즈법 시행이후 20년간 미국정부에 양도된 인디언의 땅은 5300만 에이커)에 달한다. 이유는 인디언들이 농경을 해봤지만 경험부족, 기술이나 장비 부족으로 백인과 경쟁이 되지 않았고 경제적 생활이 어려워짐으로써 생활비 조달의 방법으로 처분을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빈자가 된 인디언은 시민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인종차별의 높은벽 때문에 취직도 힘들었다. 이법의 시행당시 1억 3천 8백만 에이커였던 인디언의 땅이 1934년 4천 8백만 에이커로 줄기에 이르렀다. 결국 법 자체의 문제와 인디언의 반대투쟁으로 폐지되었다.2. 제1차 세계대전과 인디언정책(1) 미국내에서의 인식변화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인디언 사회는 “멸망해 가는 인디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인구는 전쟁, 질병 그리고 굶주림 등에 의한 사망자 급증으로 237,196명이라는 최저수준으로 감소하였고, 그들 소유의 땅은 155만 평방마일에서 1910년 59만 평방마일로 줄었다. 그나마 남은 땅은 도우즈법에 따른 토지소유 개인화 또는 백인화 등으로 부족 공동체의 소유가 붕괴되고 말았다. 한편 이시기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세계의 열강들은 식민지 경쟁에 혈안이 되면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이 사건은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새로운 전환점으로 다가오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병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인디언들은 12,000명이 참전하게 되었다. 일부부족의 반대가 있었지만 후방에서도 1만 여명의 인디언이 적십자사 등에서 봉사했다. 인디언 전사들은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며 결국 미국은 승전국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능한 야만인이 아니라 백인보다 훌륭한 전사였음을 미국인들에게 각인 시켰으며 인디언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 이러한 결과는 인디언정책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쳐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또한 이후에 존 콜리에와 안토니오 루한의 노력으로 인디언 토지권리보호를 위한 푸에블로토지법이 1924년에 제정되었고, 같은 해 인디언 시민권법이 통과되어 인디언들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여하였다. 1926년에는 토지의 면적을 줄 일수 없다는 법이 제정되었고 또한 같은 해 메리암 위원회를 구성되었다. 메리암 위원회는 인디언들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3년간 연구하여 1928년 메리암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를 기초해서 메리암 위원회는 연방정부의 인디언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구조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된다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건의사항을 토대로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추진하였다.(2) 세계공황과 인디언 재 조직법이렇듯 인디언에 대한 정책이 바뀔 때쯤에 세계 대공황아 벌생하게 된다. 미국이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후버대통령은 공황의 구제책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인디언 정책에 대한 모든 건의는 실행될 수 없었다. 1932년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의회는 국난을 헤쳐갈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루즈벨트는 공황으로 고통 받는 서민계층의 구제를 선언하였고, 이때 잊어져있던 인디언 정책도 혁명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1933년 인디언의 토지매매를 중단시켰고, 인디언생활의 개선책의 일환으로 교육기회의 증대조치를 단행했다. 파괴된 인디언사회를 재건하기위한 법으로 인디언 뉴딜이라고 불리는 인디언재조직법을 제정하도록 의회에 요청했다. 인디언 사무국은 인디언총무국장 존 콜리에와 내무부장관 해롤드 이크스의 참석 하에 인디언정책개혁을 위한 청문회를 개최했다. 이 청문회에서는 토지분배의 중지, 도우즈법 폐지, 부족자치정부의 수립, 동화정책 대신 다원주의 문화정책의 채택 그리고 사법제도의 창립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 안은 입법을 위해 의회에 송부되었다. 그러나 입법화 과정에서 대폭 수정되었다. 대부분이 생략되었고 다만 도우즈법의 효력정지에 그쳤다. 의회는 건의사항의 대부분을 삭제 또는 폐기하고 모든 것은 연방정부아래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전제로 법안을 만들어 1934년 하워드법을 만들었다. 이 법률은 신규의 토지분배를 금지하고, 연방정부의 감독하에 자치를 허용하며 자원보호나 경제적인 사업에 연방정부가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률을 인정하고 따르는 문제는 부족의 투표로 결정하게 하였고 그 결정에는 1년의 시한을 두었다. 이때 많은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77개의 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1개의 부족이 승인하였다. 이 법률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연방지원금이나 부족대표의 자율적 선출등) 도 있었다. 이는 과거 백인정부가 인디언을 야만인으로 생각했던것에 비하면 많이 진전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1차대전에 참전하여 헌신적으로 싸운 젊은 청년 들 덕분에 인디언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음을 입증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3. 제2차 세계대전과 인디언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1차 대전에 그랬었던 것처럼 인디언 병사들을 모집했고 2만 여명이상이 징병되었다. 그리고 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인디언들은 ‘나바호’어를 암호로 사용하여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였고 나바호언어는 군사작전암호로 널리 활용되게 되었다. 특히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 전투에서도 큰 활약을 보였다. 이렇듯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인디언들은 자신들도 백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전쟁터에서 뿐이었다. 돌아온 미국에서는 인디언들은 여전히 2류 시민이었고 뉴멕시코나 아리조나에서는 주법에 의해 투표권도 인정되지 않았다.(1948년 소송에서 승리하여 선거권을 얻게 된다.)그래서 이들은 미국사회에서 실망하고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인디언들의 승전공로와 희생이 전부 무시당하지는 않았다. 전후 미국정부는 인디언들이 억울하게 손해를 본 사안에 대한 보상을 위해 인디언 청구 위원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불법토지분배, 철도개설, 연방정부의 감독을 피해 주정부가 행한 토지수용 그리고 사기 등 부정한 방법으로 인디언 부족의 땅을 빼앗은 경우 입은 손해회복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법에 의해 1976년 까지 8억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4. 관리종결 (TERMINATION)뉴딜정책으로 비대화된 행정기구의 개편과 40년대 국방지출의 증대로인한 적자예산문제의 해결책을 자문하기 위해 1947년 민주, 공화 양당의원으로 구성된 후버위원회가 출범하였다. 동위원회는 1949년 인디언행정을 주정부로 이관하고 지정거주지에서 원주민을 일반사회로 이주시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미국의 주류사회에 통합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리고 연방정부의 인디언 관리행정을 종결하고 인디언 재조직법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대에 후버위원회의 권고에 근거하여 상하양원은 는 결의안을 가결 시켰다. 이로서 관리종결정책이 채택되었다. 인디언 사무국의 국장 딜론 마이어는 새로운 인디언 정책으로 관리종결을 공식선언했다.
인디언의 유래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이번 수업을 하면서 인디언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유럽인인 콜럽버스가 15세기 후반에야 발견한 미지의 대륙에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하여 한번 알아보기로 했다.종래의 학설에 의하면 「인류는 약 2백만 년 전에 동부 아프리카에서 진화되어 1백만 년 전에는 유럽과 아시아로 펴졌으며 1만 2천 년 전에 이들이 베링해협을 거쳐 북미대륙으로 건너갔다.」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일 먼저 아메리카 땅에 건너 온 종족은 인디언인데 이들이 아시아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서 왔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인디언들이 어디에서 언제쯤 건너 왔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처음의 미국인"이라는 책을 저술한 G. H. S. 부쉬넬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신세계로 인간이 이주하는 데는 지리와 기후 등의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신대륙에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베링 해협이었다. 배가 발명되어지기 전에 인디언들은 마른땅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 대략 B.C. 25,000년에서 9,000년 사이에는 동북아시아와 알래스카가 넓은 평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위스콘신" 이라고 불려 지는 제4빙하기에는 지금보다 해면이 훨씬 낮았고 물은 얼음에 잠겨 있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캐나다와 미국의 북부 지방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고 넓은 평원으로서 아시아 대륙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가 대략 B.C. 25,000년경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쉽게 알래스카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B.C. 18,000년경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막혀 버렸는데 그것이 약 8,000년 동안 계속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B.C. 8,000~5,000년 그 이후부터는 기후가 따뜻해져서 빙하기가 끝났다고 본다. 추운 날씨가 지나가고 B.C. 5,000년 사이에는 현재보다 훨씬 따뜻한 날씨가 계속 되었을 것으로 본다. B.C. 8,000~5,000년 사이에 기후가 따뜻해져서 대양이 물로 가득 채워짐에 따라 이제는 육지로 건너오지 못하고 배를 타고 건너왔다. 베링 해협 지금도 얼음 위로 걸어서 건널 수 있는데 배를 언제부터 사용해서 베링 해협을 횡단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B.C. 7,000년경에 이미 북유럽에서 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인디언들은 훨씬 그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 같다고 한다.그런데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은 순수한 아시아 사람들이었느냐? 아니면 동북아시아에서 잠시 머물었다가 건너온 유럽 사람들이 아닐까? 또 그 이주는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을까?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을까?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세 대학에서 모인 세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스탠포드 대학의 조세, H. 그린버그 교수와, 애리조나 대학의 스티븐 제구라 교수, 그리고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크리스티.G.터너 교수 팀이 신세계의 선사역사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이 세 대학의 세 사람의 학자들은 언어, 혈액형, 현존하는 고대 인디언들의 치아형태 등을 연구한 결과, 세 개의 추측을 이루는 이주자들이 아시아에서 신세계로 이주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 세 이주 무리들을 열거하면 그 첫 번째는 1만 5천년 전에 현재의 시베리아 레나강 계곡의 "아메린드"혹은 "알곤컨"이 이주하였고, 둘째는 6천년 전에 현재의 시베리아 알단 강 유역의 "아타바스칸" 혹은 "나-데네"가 이주하였으며, 셋째는 4천 년 전에 소련과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걸터앉아 있는 "아무르"강 분지의 "에스티모 알륫" 에 이주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세 무리들은 차례대로 이주했기 때문에 먼저 건너간 사람들은 남미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늦게 온 무리들은 북쪽에서 머물게 되었다.인디언의 뿌리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언어를 연구한 그린버그 교수는 2백 개가 넘는 그들의 언어들을 세 가지의 부류로 분류하였다.그 중 "아메린드"가 가장 큰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넓은 지역에 펴져 있었고 또 가장 오래된 언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타바스칸"혹은"나-데네"는 캐나다와 북캘리포니아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아파치"나 "나바호"도 이 나-데네를 사용해 왔다. 그 다음의 에스키모-알륫 어는 북아시아 언어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다. 그린버그 교수는 시베리아의 원시 언어를 연구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인디언의 언어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는 언어의 유사성을 통해서 인종학적인 유사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인디언들은 그 이주 연대가 서로 달라도 많은 점에 있어서 상호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유래와 그들의 신세계 이주에 관하여, 언어 인류학자인 그린버그 교수와 인종학자인 제구라 교수 및 인류학자인 터너 교수는 서로 연구결과를 놓고 종합 토론을 전개한 결과, 인디언의 언어가 종래 생각했던 것처럼 2백 혹은 3백 개가 아니고 단지 세 개의 언어 군으로 축소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