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許筠)1. 삶과 의식의 형성허균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89년(선조22년)에 생원이 되었고 1594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1597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녀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며 무뢰배들의 청탁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는 당대에 통용되던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로인해 스스로가 밝혔듯이 '불여세합(不與世合)', 즉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꾸짖고 뭇사람들이 멀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를 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그는 서얼(庶孼)들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할 만큼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었다. 광해군이 통치하던 당시는 당쟁이 격화되고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드러났으며,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가 동요되던 시기였다. 허균은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와 예학에 사로잡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수용하였고 그로써 급진적 개혁사상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하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기존의 가치와 사고방식에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후세의 문인들과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더욱이 자신의 문집 어디에도 「홍길동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고전소설 작자로서의 영예를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1-1. 명문가의 출생과 시련그의 가계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초당 허엽(1517-1580)을 부친으로 허성(1548-1612), 허봉(1551-1588), 허초희(1563-1589)로 이어지는 문명을 날리던 집안으로 그의 문학적 재질과 주변의 환경은 남달랐다.그러나 그는 출세와 파 노력은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으나 그에게는 언제나 양면적인 평가가 뒤따랐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즉 제도적 검증과 그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의식과는 언제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현실과 자신이 소망하는 결과 사이의 괴리가 굴곡진 삶을 낳았고 볼 수 있다.)1-2. 사승(師承)과 교우(交友), 그리고 현실과의 만남허균은 고문(古文)은 중형인 허봉을 통하여, 문장은 유성용에게서, 시는 이달(李達)로부터 사사했음을 "이생에게 답하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위 세 사람은 모두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이고, 시인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허균과 둘째 형의 관계는 단순한 동기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문학적인 영향만이 아닌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성격 등에서도 서로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달은 허균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더욱 깊은 시각을 시사했을 것으로 본다. 서얼 출신으로 벼슬에는 나갈 수 없었으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당대에 떨쳤던 이달이 천재적 재능과 감수성을 가진 허균에게 준 영향이 지대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것은 허균이 뒷날 서얼 출신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가졌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스승 이달로부터 시작되겠지만 꼭 정치적인 부분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교류한 서얼들이 대부분 문장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거나 예술가들이었던 것을 의미한다. 서얼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폐해가 심각함을 자주 상소문의 형태로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조선사회의 대표적 악법의 하나였다.이처럼 허균은 가학(家學)에서 출발하여 시문을 전수 받았으며, 당대의 명망가에게서는 문장을, 시는 서류에게서 배웠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문학적 수업의 과정에는 대부분 비분의 가정과 현실과의 거리가 많았으며, 교우(交友) 또한 대개가 불우한 처지이거나 때를 만나지 못한 문인들, 또는 예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은 그의 천재적 재능과 문벌에 관계없이 앞으로의 삶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제왕이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임금은 공과 사를 분명하게 밝힐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요체는 바로 '정기심(正其心)'에 있다고 강조한다. 바른 마음, 그것이 학문의 근본이며 이는 나라를 다스릴 때 "밝음으로써 아랫사람을 살피고, 믿음으로써 신하에게 맡긴다.")는 「정론(政論)」과 연결되는 것이다. 「정론(政論)」에서는 나라를 다스릴 때는 유능한 신하가 있어야 하며 권신(權臣)이나 소인배가 있으면 임금은 이상적인 정치를 펼 수 없다고 하였다. 「관론(官論)」에서는 행정의 수월성을 얘기하였는데 이는 비능률적이고 고비용의 정치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들은 그가 현실정치에 대하여 그만큼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며, 그가 꿈꾸는 정치적 모델의 한 제안이기도 하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오직 '임금'뿐이며, 나라의 흥망도 임금에게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는 「소인론(小人論)」에서 '당대 사회에는 군자가 없으며 조정에는 소인배가 들끓어 그 폐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현실정치의 실상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즉 제대로 된 군자가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이며 이에 "지금의 국가에는 소인도 없으니 군자 또한 없다.")라고 갈파한 것이다. 비록 그가 유교적 예속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자유분방한 삶을 살며 하늘이 준 본래의 성정에 충실하고자 했으나 당대 사회를 향한 이 무서운 직설적 표현은 그가 바라는 '군자의 정치', 아니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제대로 된 정치를 갈망하는 꿈이 서려있는 것이다. 또한 「후록론(厚祿論」)에서는 관리에게 의식주를 해결할 정도의 넉넉한 봉록을 주어야 부패와 착취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병론(兵論」)에서는 군정(軍政)의 난맥상을 예로 들면서 모든 계층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으로 보아도 상당히 실용적이면서 개혁적이다.특히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설은 「호민론(豪民論)」과 「유재론(遺才論)」이다.하늘이 재능을 부여함은 균 호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홍길동전'의 주인공 길동은 호민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요즈음의 이른바 군자소인이란 서로간에 큰 동떨어짐이 없다. 자기들과 뜻을 같이하면 모두 군자로 여기고, 달리하면 모두 소인으로 여긴다.)「유재론(遺才論)」에서 그는 국가의 경영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재를 적소에 두고서야 그 뜻하는 바를 기대할 수 있는데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벌열층(閥閱層))이면 출세하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적서의 차별에 의하여 인재를 뽑는 현실을 향해 "하늘이 낳아주었는데 사람이 그것을 버리니 이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짓이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생각에는 적어도 인재의 등용에는 '평등의 원칙'이 존재하였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학행과 재식'의 유무에 따라 소인과 군자로 나누어야 하듯이 인재의 쓰임도 그 능력에 따라야 함은 하늘아래의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한결같이 이러한 의식을 고수하며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인재로서 서자(庶子)와 개가(改嫁)한 집 자손을 들었다. 적서차별을 부르짖는 『홍길동전』이야말로 그의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부당한 차별로 불행하게 살다간 인물들의 전기를 쓰기도 하고 시선집인 『국조시산』에서는 서얼들의 시를 수록하기도 하였다.2-2. 종교에 대한 관심허균은 당시에 이단시되던 불교와 도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이때 출가를 생각했을 만큼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다면 평생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여 자주 파직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삼척부사에서 파직당하고 난 뒤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禮敎寧拘放(예교녕구방) : 예교가 어찌 자유를 구속하리오浮沈只任情(부침지임정) : 부침을 오로지 정에 맡겨두리라.君須用君法(군수용군법) : 그대들은 그들의 법을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어지러운 당쟁의 현실과 가정의 불행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불교에 심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었다. 도교에 대해서는 주로 양생술과 신선 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허균은 노자를 비롯하여 31열선에 대한 찬(贊)도 지었으며, 단학 수련에도 상당한 수준을 보였다. 또한 은둔사상을 동경하여 4천 권이 넘는 중국 선가(仙家)의 서적을 발췌하여 '한정록'으로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서학에도 관심을 가져 중국에 사신을 갔을 때는 이에 관한 기도문을 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또한 이단시되던 양명학에 대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지녔다.허균은 기존의 성리학적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에 이단시되던 여러 방면의 사상과 지식을 폭넓게 관심을 갖고 수용하는 열린 시각의 소유자였다. 또한 억압받는 백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신분 질서를 부정하고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3. 허균의 문학관3-1.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성리학의 문학관은 문학이 성정(性情)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성(性)은 선하기만 한 마음의 바탕을 뜻하며, 정(情)은 악할 수도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허균은 성(性)과의 관계를 떠나서 정(情)을 그 자체로서 긍정하고자 하였고, 「문설(文設)」에서 정(情)을 도(道)와 연결하여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감히 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즉 하늘이 부여한 남녀의 정욕이 성인이 내놓은 윤리의 분별보다 앞선다는 말이다.그는 백성의 진솔한 감정이 토로된 국풍(國風), 곧 민요를 시도(詩道)의 정도(正道)로 삼았으며, 자연스런 감정을 발현하기 위하여 '현실의 체험'을 중시하거나 '인간의 꾸밈없는 마음의 경지를 포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문장이 부귀공명의 편안함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더욱더 묘경(妙境)에 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유배생활을 통해 터득한 바일 것이다.허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피아노 협주곡 5번 E♭장조 Op. 73 2악장원제는 Konzert fur Klavier und orchester No. 5 ‘Kaiser’ Op. 73이다.로맹 롤랑이 ‘걸작의 숲’이라고 부른 베토벤(독일) 제2기의 정점을 형성한 명곡으로, 그 웅혼 장려한 아름다움은 확실히 「황제」의 이름과 어울리지만 이 이름은 작곡자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고 후세의 속칭이라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별명은 베토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며, 이것이 어떤 특정 인물을 지목한 것도 결코 아니다.이 곡은 1808년 쓰이기 시작하여 1809년 완성되었으며, 런던과 라이프치히의 출판사(Clementi-London, Breitkopf & Hartel-Leipzig)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베토벤은 귓병이 악화되어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불편을 느낄 정도였으며, 결국 베토벤이 이 곡을 연주할 수는 없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협주곡이 청중의 앞에서 연주되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었다. 또한 곡을 완성한 1809년은 나폴레옹 군이 빈을 점령하여 경제적인 궁핍도 극에 달하고 불안에 떨던 시기였다. 전란 때문에 연금 수입이 두절되고 있던 베토벤(독일)의 생활도 몹시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 빛나는 승리감에 넘치는 명작과 그것을 결부시킬 에피소드는 그다지 없다.이 곡의 초연은 빈이 아니고,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1811년 11월 28일 거행되었다. 독주자는 당시 라이프치히, 하우리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시나이더(Schneider)였는데, 초연 당시 좋은 평을 받고 성공적으로 끝났다.빈에서는 그 다음해인 1812년 2월 15일에 피아노 교본으로 명성을 떨친 체르니(Czerny)가 독주자로서 케른트나르트 극장 무대에서 연주되었는데, 이 때의 평은 좋지 않았다.베토벤이 작곡한 5곡의 피아노 협주곡 스스로 초연하지 못했던 곡은 제 5번 협주곡이 유일하다. 제3번 교향곡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작곡된 곡들이 아주 간결한 어법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악화되는 귓병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E♭장조, 혹은 C단조의 간단한 으뜸, 딸림화음을 유니즌(Unison)으로 효과적인 화성전개를 통해 강한 음악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베토벤 특유의 작곡기법이 극단적으로 잘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베토벤이 작곡한 5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 「제5번」은 여성적이고 우아한 「제4번」과 함께 널리 애호되고 있다. 그의 좋은 이해자이자 보호자였던 루돌프 대공에게 바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후 베토벤의 생존 시에는 다시 연주되지 않았다.제1악장에 독주 피아노의 전주를 넣고 제2악장과 제3악장이 끊김이 없이 이어지는 점을 제외하고 대개는 전통적인 협주곡 형식에 의하고 있다. 관현악은 표준적인 2관 편성이다.감상 곡에 해당하는 2악장은 Adagio un poco moto로 B장조, 4/4박자, 조금 빠른 느낌의 아다지오, 변주곡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악장은 이 곡의 가장 뛰어난 악장으로 우아하기 그지없는 주제 선율이 현악기(바이올린)를 타고 흘러나오다가, 피아노 독주가 약음으로 선율을 이어받아 느긋하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동일한 형태의 변주가 한동안 진행되고, 중간에 새로운 조성의 변화가 한 번 등장한 후 독주 피아노가 다소 고조된 악상을 연주하면서 새로운 변주로 이행한다. 뒤를 이어 주제는 목관악기로 옮겨지고 피아노가 이것을 아름답게 장식하여간다. 마침내 E♭장조로 바뀌며 피아노가 이어지는 끝 곡 론도의 주제를 약음으로 느리게 예시한다. 자유로운 형식의 변주이기 때문에 명확한 구분은 없으며, 앞 소절의 화음을 바로 트릴로 이으며 악상이 변화하는 형식을 지닌다.감상을 위해 엘렌 그리모가 2008년 6월 3일 도쿄 산토리 홀에서 연주한 실황을 들었다. 감상을 위해서 듣기 시작했지만, 엘렌 그리모의 아름다운 모습과 곡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선율이 합쳐져 곡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보통 기준에 비교하자면 나는 평소 서양음악을 꽤 즐겨 듣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협주곡의 2악장들은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인지 안 들어도 그만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했던 악장이 2악장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의 2악장은 그것이 가지는 아름다움이 남달랐다. 물론 내가 느낀 느낌은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의 과 달리 는 웅장함이나 강인함을 요구하고 드러내는 곡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2악장에서 주제를 피아노가 연주하는 부분은 그 우아함이 쇼팽이나 모차르트에 비할 나위도 없이 빼어나다고 생각했다. 2악장과 3악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넘어가는 곡의 특성상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의 1악장과 3악장이 밝고 명쾌한 분위기로 일관되어있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지만, 2악장의 전개를 보면 애절하면서도 평화로운 기운이 느껴져서 그 위험을 단번에 제거하고 있었다.라는 별칭이 붙은 베토벤의 5번 협주곡 중 2악장은 물론 이 곡이 특정인물을 지칭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위적이고 냉철한 지배자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고뇌하고 번민하며 슬퍼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인간적인 황제의 면모를 아름답게 그린 것 같다.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모음곡 중 “솔베이지의 노래”노르웨이 작곡가인 그리그는 러시아의 5인조 작곡가들(발라키레프(Balakirev), 무소르그스키(Mussorgsky), 보로딘(Borodin), 큐이(Cui),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y-Korsakov))과 체코의 스메타나, 드보르작 등과 함께 유럽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나라의 음악가로서 노르웨이 민속 음악에 기초한 개성 있는 음악을 추구하였다.그리그의 는 같은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의 5막의 극시 《페르귄트》를 바탕으로 작곡되었고, 1876년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서 초연되었다. 입센의 《페르귄트》는 1867년 출간된 극시이다. 《페르귄트》의 내용은 이러하다.페르 귄트는 몰락한 지주의 아들로서, 어머니 오제의 절실한 소원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재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지나친 공상에만 빠져있다. 페르는 애인 솔베이지를 버리고 마을 결혼식에서 다른 남자의 신부인 잉그리드를 약탈하여 산 속에 숨어버린다. 그러나 금새 싫증이 나서 산 속을 돌아다니다가 산속 마왕에게 붙잡혔다가 가까스로 도망친다. 다시 마을로 돌아온 페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맞고 또 다시 모험을 찾아 바다로 떠난다.모로코와 아라비아 등지를 전전하며 부자가 됐다가 거지가 되기도 하는 파란만장한 생활을 하던 페르는 마지막으로 신대륙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발견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전 재산을 싣고 귀국길에 올랐지만, 육지를 눈앞에 두고 폭풍우를 만나 배가 가라앉고 목숨만 간신히 보전한다. 페르가 그의 집에 돌아갔을 때 그 곳에는 백발이 된 옛 연인 솔베이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는 그녀를 안고 “당신의 사랑이 나를 구원해 주었소.”라고 말한 뒤 그녀의 무릎을 베고 그의 삶을 마감한다.입센의 《페르귄트》는 근대인의 부(富)와 권력 추구에서 오는 정신의 황폐, 인간의 과대한 야망의 덧없음을, 그리고 자기를 버리고 간 방탕한 연인을 백발이 될 때까지 가슴 속에 간직한 여인의 청순무구를 대조하여 최후의 구원을 발견케 하는 작품이다. 또한 이는 입센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분방한 상상력을 구사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입센의 작품을 바탕으로 그리그가 부수음악을 작곡하였다. 다섯 개의 전주곡을 포함하여 행진곡, 무곡, 독창곡, 합창곡 등 총 23곡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시극의 초연이 있은 후에 편곡을 통해 각 4곡으로 된 두 가지 관현악용 조곡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1모음곡의 제3곡 ‘아니트라의 춤’과 제2모음곡 중 제4곡 ‘솔베이지의 노래’가 잘 알려져 있다.‘아니트라의 춤’은 어머니가 죽은 뒤 아내를 버리고 여행길에 오른 페르귄트가 아랍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춤에 넋을 잃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현악합주에 트라이앵글을 곁들여 편성, 동양적이며 관능적인 선율을 잘 살리고 있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페르의 꿈속에서 솔베이지가 베를 짜면서 그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로, 페르를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영원한 사랑이 담겨있다. 요즘은 대부분 독일어로 부르지만, 원래는 그리그의 국적인 노르웨이어로 된 가사가 붙어있었다. 애수를 띤 바이올린의 선율로 해서 많은 청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이다.‘솔베이지의 노래’의 가사는 이러하다.Der Winter mag scheiden, der Fruhling vergehn,Der sommer mag vervelken, das Jahr verwehn,Du kehrest mir zurucke gewiß du wirst mein,Ich hab es versprochen, ich harre treulich dein,A---------Gott helfe dir, wenn du die Sonne noch siehst,Gott segne dich, wenn du zu Fussen ihm kniest,Ich will deiner harren, bis 여 mir nah,Und harrest du dort oben, so treffen wir uns da,A---------찬 겨울이 지나고 봄 돌아오면그 여름은 시들어 세월 흐르네.그대는 돌아오리, 내 그대여.약속대로 나 기다리겠네.아--------그대 항상 주님이 도우리라.무릎 꿇고 기도하면 주님이 축복하리.그대 올 때까지 나 기다리겠네.저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나리.아---------‘솔베이지의 노래’는 영화에서 주로 여주인공이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사랑하는 사람-를 기다릴 때 자주 등장하는 곡이라는 인상이 담겨있는 곡이다. 감정을 하나로 단정 지어서 말하기 어려울 때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가 어울리는 듯 하다.애닳는 가사와 그에 어울리는 선율이 듣는 이로 하여금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나 역시도 줄거리를 자세하게 알기 전부터 곡에서 풍겨지는 아우라만으로도 비극적이고 애잔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헨델(Georg Friedrich Handel)오라토리오 중 “할렐루야”오라토리오란 종교적인 제재를 극적으로 다루어 독창·합창·관현악에 의해 상연되는 성악곡의 형식으로 무대 위의 연기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 기원은 오래 전 16세기 중엽에 로마의 성 질로라모(프랑스) 델라 카리타 기도소(오라토리오)에서 열리고 있었던 성서의 낭독회에 비롯된다고 일컬어지고 있다.는 헨델(독일)의 스무 곡이 넘는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며, 오페라에서 실패하고 오라토리오로 전향한 그가 승리를 확정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오라토리오 를 완성한 것은 56세 때인 1741년 9월 14일이었다. 헨델이 를 쓰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깊은 감동 속에 사로잡힌 채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특히 감상부분인 ‘할렐루야 (코러스)’부분의 작곡을 마쳤을 때는 너무 감동한 나머지 “하늘이 열리며 위대한 신의 모습이 보였다.”고 외쳤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그는 대단한 정력가이며 규모가 큰 곡에 몰두하면 침식을 잊고 단숨에 써내려가는 습관이 있었다. 이는 354페이지나 되는 의 총보를 불과 24일 만에 완성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당시 런던에서는 많은 비판을 받아오던 실의의 헨델(독일)이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있는 필하모니 협회의 의뢰에 의해 완성한 것으로 그의 종교적인 정열을 남김없이 전한 역작이다. 그렇지만 바흐(독일)의 오라토리오나 수난곡처럼 교회에서 상연하기 위해 작곡한, 이른바 교회 음악이 아닌 점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메시아란 본래는 히브리 어로 ‘기름 부은 자’를 의미하는 말인데, 보통 ‘구세주’라 번역되고 그리스도교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전곡은 3부로 이루어져 제1부에서는 그리스도 탄생의 예언과 성취, 제2부에서는 수난과 속죄, 제3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영원한 생명을 다루고 있다. 대본은 헨델(독일)의 친구 제넨즈(Charles Jenens)가 구약·신약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의 초연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거행되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등 사회의 그늘에 있는 계층에 깊은 관심을 두고 그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던 헨델은 더블린에 설립된 출감자 보호회 및 자선병원 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 음악회에 를 들고 갔다. 이 여행에는 연주회의 높은 효과를 고려하여 독창자로 소프라노 아바리오, 알토 쉬퍼라는 두 여류 성악가와 오르간 주자 마릴레인을 데리고 갔다. 연주회장은 600개의 객석을 갖춘 신축 홀이었으며, 참가한 연주자는 합창단이 남성 열 네 명과 소년 여섯 명이고 관현악단 서른 명이었다. 오늘날 기준에는 회장이 좁고 연주 규모도 작지만 당시의 신문에서는 “도취한 청중의 기쁨과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라고 평하고 있었다. 이 연주회의 성공은 그의 높은 예술성과 인간애의 결실 뿐 아니라 자선을 위한 기금 모집의 목적도 달성하게 했다. 이어 1743년 3월 23일, 코벤트 가든의 왕실 가극장에서 런던 초연을 가졌을 때 영국의 왕 조지 2세가 참석하였는데, 「할렐루야 코러스」부분에서 몹시 감동하여 기립했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으며, 이 때 역시 자선 음악회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로 인하여 오늘날에도 그 대목에서는 전원이 기립하는 습관이 남아 있다.헨델은 로 완전히 재기했고, 오라토리오 작곡가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 후 헨델은 를 32회나 직접 공연했고, 그 모두가 자선 음악회였으며 수익금은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그리고 헨델 생애의 마지막 연주가 된 곡 역시도 이었다. 1759년 4월 6일, 코벤트 가든에서 이 곡을 지휘하던 중 갑작스럽게 떨어진 시력과 체력을 정신력으로 지탱하며 연주하다가 마지막 곡인 ‘아멘 코러스’가 끝나고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무대에서 내려온 뒤 병상에 누웠고,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1부(예언과 탄생), 2부(수난과 속죄), 3부(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구성되어있고, 독창(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과 혼성 4부 합창, 그리고 관현악(오늘날에는 2관 편성에 의한 경우가 많고, 그것에 통주 저음 악기가 참가)으로 이루어져있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할렐루야’ 합창은 제 2부의 끝부분에 나온다. 이 곡은 장대하고 힘이 넘치는 작품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의 연주 시간이 너무 길어서 전 곡을 연주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할렐루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2부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전능하신 주가 다스리신다.’로 시작하는 구절은 모든 성부와 악기들이 유니즌(Unison)으로 연주하게 하고, 이것을 ‘할렐루야’라는 구절과 결합시킬 때는 폴리포닉(Polyphonic, 동시에 여러 개의 음을 소리 낼 수 있는 악기, 또는 그 상태)한 짜임새를 선택했다. 그리고 ‘왕의 왕’이라는 구절에서 호모포닉(Homophony, 어떤 한 성부가 주선율을 담당하고 다른 성부는 그것을 화성적으로 반주하는 형태)한 짜임새로 바뀌다가 다시 ‘주가 길이 다스리시리.’라는 구절에서 폴리포니로 전환된다. 즉,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할렐루야’와 ‘왕의 왕’ 등에는 가사가 잘 들릴 수 있도록 호모포닉을 설정하고, 메시야의 공덕을 기리는 부분에서는 폴리포닉을 설정함으로써 가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Hallelujah!For the Lord God Omnipotent reigneth.The Kingdom of this world is become the Kingdom ofour Lord and of his Christ;and he shall reign for ever and ever.Hallelujah!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Hallelujah!할렐루야!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이제현의 문학관과 『역옹패설』1. 생애와 활동이제현(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말 고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뚜렷한 문학관을 지니고 창작활동은 했던 문인이자, 원(元)과의 대외 교섭에서 수완을 발휘하고 네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 오른 외교관이며 정치인이자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학자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饑翁), 본관은 경주(慶州), 시호는 문충(文忠)이다.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관 병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그는 “과거를 본다는 것은 작은 기예일 뿐이다. 이것으로 나의 큰 덕성을 기르기에는 부족한 것이다”라고 하여 과문(科文)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장인으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7세 (1303년) 때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22세(1308년) 때 예문관·춘추관에 선발되었다. 28세(1314년(충숙왕 1)) 때, 처음으로 고려에 도입된 성리학을 백이정으로부터 배움으로써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같은 해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琅)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34세(1320년(충숙왕 7))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고, 37세(1323년) 되던 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67세(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인재 선별의 안목을 발휘하였다. 70세(1356년(공민왕 5))에 문하시중이 되었다가 다음 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1367년 7월에 향년 81세로 병졸(病卒)하였으며,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와 『역옹패설』이 있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蓬正)의 제자였고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고 있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2. 이제현의 문학관1) 문이재도관(文以載道觀)문이재도관(文以載道觀)이란 문(文)과 도(道)의 관계에서 도(道)의 전달에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두는 관점이다. 즉, 도의 전달을 본(本)으로 문(文)의 수식을 가치 있는 것임을 강조하였다.「상중서도당서(上中書都堂書)」,『상백주승상서(上伯住丞相書)』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국익수호에 효용을 발휘하였다.) 이제현은 문학의 기능을 도의 전달에 두고 있지만 그 수단으로서 문예적 기교의 가치도 인정하였다. 그는 해학과 장구(章句)의 수식 등 문예적 기교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보다 확대된 문학관을 열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익재의 입장은 다음의 진술에서 알 수 있다.내가 대답하기를, “둥둥 북치는 모습을 그린 격고장이 「시경(詩俓)」의 패풍 속에 들어 있고 여러 사람이 너울너울 춤춘다는 구절이 있는 빈지초연장(賓之初?章)이 「시경(詩俓)」소아(小雅) 속에 편입되어 있다. 더구나 이 기록은 본래 한가하고 답답함을 몰아내기 위하여 아무거나 기술한 수필이다. 거기에 해학이 있은들 무엇이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또 공자는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것도 아무 용심(用心)함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였다. 장구(章句)를 수식하고 아로새기는 일이 장기, 바둑을 두는 일보다는 오히려 좋지 않겠는가. 또 이러한 것이 아니라면 이름을 패설(稗說)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또한 익재는 불교나 도교 등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 그 점을 표현한 문장도 문장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리학만이 아닌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의 제 사상을 모두 긍정한 재도적 문학관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익재가 성리학자로 보기보다는 전통적 유학자의 사상에서 성리학으로의 변화를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던 사상가로 판단했던 사실과 연관된다.)정리하자면 익재의 문학관은 전통적 재도론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재도론을 받아들인 것이며 이것은 도를 넓게 해석한다. 그리하여 불교와 도교의 사상과 문학까지도 수용하는 포용성을 보여주게 된다. 또한 도의 전달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문예적 기교도 인정하고 있어 내용과 형식의 적절한 조화를 강조한 것이다.2) 고문관(古文觀)익재는 여러 차례 과거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우선 그는 과문(科文)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해 변려문의 양식적 완화를 초래하고 있다. 익재의 경우 완벽하게 변려문의 형식을 고수하지 않았다. 『사표(謝表)』)는 용사와 전고, 환유 등 전형적인 변려문의 수사적 기교를 사용했으나 부화(浮華)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걸퇴전』은 왕에게 올리는 공식적 문장이면서도 변려문의 형식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원승과 수가의 고사를 들어 전고를 사용했다.) 또한 각 문체에 따라 쓴 90여편의 작품이 『익재난고』에 전하고 있는데 이 글들은 대부분 고문의 전범으로 평가되고 있다.3. 문학론1) 풍격론(風格論)풍격은 겉모양과 품성, 인격을 통해 드러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시작품에 적용하면 풍신(風神)은 시의 형식에, 품격(品格)은 시의 내용에 해당된다. 이러한 풍격 형성에 언(言), 의(意) 기(氣) 등이 그 동인이다.“옛 사람의 시는 눈앞의 경물(景物)을 묘사했지만 뜻은 말 밖에 있어서 말은 끝났으나 맛은 끝이 없다.”)인용문이 의미하는 바는 시를 지음에 있어 눈앞의 경물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말고 말 속에 많은 의미를 함축하여 여운과 암시를 지니라는 말이다.) 익재는 수준 높은 풍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어의 선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했으며 시어의 함축적, 비유적, 상징적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될 때 시어는 새로운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익재는 이러한 예로 도연명의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가지고 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본다.’라고 한 시에서 유유자적하는 은자의 생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진여의의 ‘문을 여니 비가 온 것을 알겠구나. 늙은 나무가 반신이 젖었으니’에서 소리 없이 비가 내린 정적이고 청신한 의경(意境)을 의재언외(意在言外)로 잘 표현하였다.)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언어로 쓰인 시는 읽을수록 의미가 새롭고 깊어지는 시로 격조 높은 시라 할 수 있다. 익재는 기(氣)를 풍격 형성의 한 요인으로 설정하여 기상이 활달한 시를 격조 높은 시로 파악하였다. 또한 작가의 개배은망덕한 인간으로, 평소 돌봐주지도 않았는데 해마다 찾아오는 제비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부각시켜 풍유라는 기법으로 대립시키고 있다.②는 정윤의(鄭允宜)가 지은 증혐사시(贈?使詩)로 나라일로 급한 인간과 그것을 모르고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의 울음을 대조시켜 뻐꾸기를 풍유하고 있다.익재는 이 두 시를 미묘하고 완곡한 것으로 평하고 있다. 즉, 수사적인 기법이 시의(詩意)의 표현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또한 익재는 수사적 기법 중 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다음 두 작품을 통해 살펴보자.③ 海霞不雨樓林表 바다 노을 비도 오지 않았는데 수풀 위에 깃들고,野燒無風到樹頭 들불은 바람도 없는데 나무끝에 올랐네. - 양비경, 강수 -④ 山圍故國周遭在 산은 고국을 빙 둘러 있고,潮打空城寂寞回 조수는 빈 성에 부딪쳐 쓸쓸히 돌아가네.淮水東邊舊時月 회수의 동쪽가에 돋던 달은夜深還過女墻來 깊은 밤 여장 넘어 비쳐오네. - 유우석, 금릉오제-③은 금나라 말엽의 양비경(楊飛卿)이 강수(江樹)에 대해 지은 시로 붉은 노을, 들불을 통해 곱게 물든 단풍을 떠올릴 수 있도록 시각적 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④는 유우석(劉禹錫)의 금릉오제(金陵五題)가운데 하나로 시각적심상 이 외에도 청각적심상이 나타나 함께 어우러져 공감각적 심상을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익재는 이러한 수사적 기법은 시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에 시의 내용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기교는 배격하고 있다. 즉, 복중사(腹中事)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수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2) 작시상의 방법익재는 본질적인 문장표현기법 외에도 시의 격식, 시구의 배열, 시어의 취재나 사용 방법등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점화(點化)), 대우(對偶)), 집구(集句)), 용자(用字))등과 같은 작시상의 방법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익재는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영유시(詠柳詩)에 비의한 진화(陳?)의 영유시를 정치유려(情致流?)한 작품으로 평하고 있는데, 이는 점화를 통해 시의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경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