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서론 -------------------------------------------------------2Ⅱ. 본론 ---------------------------------41. 선의 의미 ------------------------42. 선의 본질 --------------------------53. 선(禪)과 깨달음의 상관관계 ----------------------------8Ⅲ. 결론을 대신하여 - 선을 통한 자아의 발견 ----------------13참고문헌 ------------------------------------------------------15Ⅰ. 서론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통신분야의 성장으로 지구는 하나의 촌락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면서 전세계적으로 모토가 된 것 중의 하나가 ‘Fast'이다. 좀 더 빠르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게 현대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Fast Food'로 볼 수 있다.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바쁘게 살아가는 지금의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고 그 흐름 속에서 바쁘게 살아간다.하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 나타난 부작용은 심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Fast Food'만 볼 때 비만이 늘어나고 면역체계가 약해져 쉽게 질병에 걸리는 등 건강생활에 적신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것은 비단 ’Fast Food'만의 문제는 아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인에게 밥먹을 시간조차 없는 생활속에서 그나마 끼니를 챙겨먹을 수 있는 것이 ‘Fast Food'임을 감안할 때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그러면서 생겨난 새로운 바람이 웰빙과 함께 찾아온 ‘Slow'이다.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자연의 흐름과 맞는 리듬을 가지고 살아갈려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그것과 함께 요가와 참선은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정서적 안정을 찾아주고, 신체리듬을 바로잡아주는 효과와 함께 웰빙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여기서는 현대생활에 바쁘게 쫓겨가는스크리트어 dhy?na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중국어로는 禪那라고 음사하다. 선 에서 뒤의 ‘나’자가 탈락되어 중국에서 Ch'an, 한국에서는 선, 일본에서는 Zen이라 한다. dhy?na는 명상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yoga(요伽라고 음사함. 원래 브라만교에서 바르게 앉아서 호흡을 고르게 하고 생각과 마음을 통제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불교에 도입되었음.)나 sam?dhi(三昧라 음사하고, 正受라고 의역함.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을 의미함.)와 구별되지 않고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이 sam?dhi의 의역어인 定과 합쳐서 禪定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음역인 禪과 의역인 定이라는 용어는 인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용어가 가리키는 명상체험은 불교가 성립된 때부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 받아 왔다.)첫째 선불교의 교설을 학술적으로 말하면 思辨的 神秘主義(speculative mysticism)이다.선에서 개인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그 경험이 삶 바로 그 자체일 때 개인의 주체적인 경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선은 정신적인 내적 체험을 강조한다. 그 결과 내적으로 경험한 사실은 자신만이 알 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고, 또 내적 체험으로 얻어진 지혜의 작용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신비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험한 내용을 사유하고 언어문자로 표현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변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정신적인 개오를 얻기 위한 가장 좋은 실천방법은 좌선이다. 좌선을 통해서 얻어지는 마음의 통찰력은 근본경험(foundation experience)으로서 고차원적인 체험이다.둘째 선은 단순히 심리학도 철학도 아니다.동양인의 정신 가운데서도 선은 불교의 방대한 사상체계를 수용하여 더욱 풍부하게 만든 중국정신의 가장 놀랄만한 英華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진지한 관심거리이다. 선은 분명ㅇ히 불교에서 나왔지만 중국인의 ragmatic)인 경향, 그리고 일상생활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복잡한 것보다는 간단한 것을, 간접적인 것보다는 직접적인 것을, 이론적인 것보다는 실천적인 것을 선호하는 민족이다. 이런 경향이 선에 잘 받영되어 있다. 그리고 선이 생활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은 항상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현실을 초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넷째 선은 바로 인간 그 자체이다.선을 학문적으로 정의 내리고 있는 철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선학이지 선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은 결코 논리와 분석의 기초 위에서 세워진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은 분명히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의 논리와는 정반대이다. 선은 사고 논리나 개념이 아니고 마음 그 전체이다.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지적인 요소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앟는다.다섯째 선에서 가르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만약 어떤 사람이 선에서 무엇을 가르치냐고 묻는다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고 대답하야 할 것이다. 선에서 가르침이 있다면 그 것은 개개인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며,) 선으 그 길을 제시할 뿐이다. 기독교의 창조주는 자신의 피조물을 만드는데 분주하지만 선은 그 창조의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지접 만들어 나가도록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선에서 가르침이란 것으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 외에 특별히 기초교리 혹은 기본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으 없다.여섯째 선은 종교가 아니다.선은 일반적으로 널리 이해하고 있는 의미의 종교(religion)는 아니다. 선은 숭배해야 할 신도 없고, 특별히 지켜야 할 종교적 의식도 없으며, 죽은 사람들이 내세에 갈 수 있는 결정된 미래의 거처도 없다. 이처럼 선이 종교라고 말하고 싶지만 신을 부정하고 있고, 또 대단히 이지적이며 철학적이다. 그러면 선이 철학이냐 하면 철학도 아니다. 왜냐하면 선은 실천적 생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은 단순히 종교도 철학도 아니면서 종교적 철학 잇는 인간의 정신일 뿐이다.일곱째 선은 모든 대립적인 것을 초월해 있다.선은 긍정이나 부정 등 여러 가지 대립적인 것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편과도 관련이 없다. 선은 그런 대립뿐만 아니라 이분논적인 논리도 넘어서 있다. 선은 대립이 없는 곳에서 더 높은 긍정을 발견하고자 한다.이상으로 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대략 그 윤곽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사실 선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면 내릴수록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선은 정해진 의미도 없고, 사상도 없고, 의식도 없고, 형식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선을 이런 식으로 그 범위를 한정하면 선은 죽어 버린다. 그러나 선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서는 선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에 대하여 좀 더 부연설명을 덧 붙인다.)2)선의 본질선은 진정한 마음의 본성을 통찰하여 마음이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마음 그 자체를 수련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혹은 지정한 정신의 본질을 꿰둟고 들어가는 것이 선불교의 근본 목표이다. 그러므로 선은 일상적인 의미로 쓰고 있는 명상이나 좌선 그 이상의 것이다.선수행은 존재하는 것의 근원을 꿰뚫어 볼 수 잇도록 마음의 눈을 여는 일이다.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어떤 곳에 고정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신의 유일성이나 그의 무한한 사랑과 전지전능, 도는 사물의 無常性 등에 대하여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은 이러한 것을 단호히 배척하단다. 선에서 역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 획득뿐이다. 명상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적인 정신활동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선에는 생각을 고저할 만한 대상을 절대 설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명상을 해도 선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다. 선에서 행하는 모든 명상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선은 자각하거나 느끼지만 추상하거나 명상하지는 않는다. 선은 실재를 꿰뚫고 들어가 마침내 거기에 몰입하여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명상은 선이 아니고, 선은 일신론도 범움지이는 마음이다. 선은 개념을 다루기를 싫어하고 살아 숨 쉬는 삶을 다루기 때문에 근원적이고 창조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송대 佛果?悟(1566~1642)가 ‘선의 본질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는데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자.“그것(선)은 그대의 얼굴 바로 앞에 나타나 있다. 그 순간 모든 것은 그대에게 주어진다. 현명한 사람에게는 한 마디의 말로 그 진리를 확신 시킬 수도 있겠지만 한 마디 말에도 이미 잘못은 범해진다. 하물며 글로 쓰거나 말로 표현하거나 논리적인 언설로 선을 운운하게 될 때 선의 본질은 그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선의 커다란 진리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 그대의 내부에서 이것을 찾으려고 해야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대의 마음은 모든 형태를 초월해 있는 것으로서 자유롭고 고요하며 만덕으로 충만해 있다. 마음은 스스로 六恨과 四大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모든 것이 그 마음의 빛 속에 녹아 있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을 떨쳐버리고 이성을 ENldj 넘어 곧 바로 부처님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된다. 이것 밖에는 어떤 실재도 없다. 그래서 달마는 서역에서 왔을때 다만 이렇케 말했다. ‘바로 그대의 마음을 찾아내라 (直指入心). 나의 가르침은 특이한 것으로 경전에 구애 되지 않고(敎外別傳), 진정한 마음, 그것을 전할 뿐이다(單傳正印)’라고 했다. 선은 문자나 경전과 관계가 없다(不立文字). 선은 그대가 단번에 실상을 포착하여 거기서 평화로운 안식처를 발견하기를 바랄 뿐이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분별심이 작용하여 대상을 구별하게 되고 과념에 사로잡혀 편견만 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미혹에 빠져 선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佛果克勤禪師心要』(『속장격』권 120)”라고 원오의 글은 참으로 선의 본질을 잘 밝혀 주고 있다. 선의 근본정신은 우리 존재 내부의 움직임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외부적이거나 혹은 부가적인 것에 의존함이 없이 가능한 한 가장 직접적인 거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