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가나안과 이스라엘 역사』Ⅰ. 가나안과 이스라엘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가나안’은 지중해의 동편 해안(오늘날의 레바논과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지형학적 용어였다. 그러나 고대 저자들은 가나안을 종종 민족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이것은 땅 자체가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민족적인 용어였다. 그러나 가나안인들은 문화의 다양성과 경쟁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진정으로 하나 된 민족적 그룹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도 또한 ‘가나안인들’이었다. 고대 가나안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가나안인이었다. 이 용어는 점차 의미의 변화를 일으킨다. ‘가나안인들’은 최후에는 ‘페니키아인들’과 일치하게 된다.고대 기록물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문제가 있는 용어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성서에서는 공동의 호칭으로 사용되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라는 용어는 단지 고대 이집트의 문헌들 중에 단 한번 언급되는데, 이것은 이집트인들이 고대 시대 전체를 놓고 볼 때에 이스라엘인들과 인접해 있었고, 가나안의 모든 거주자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의 문헌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용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분명한 것은 이집트의 관점으로부터 볼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그룹들 중 단지 한 그룹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의 다른 고대 이웃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용어에 관심이 적었거나 관심이 거의 없었다. 한편 이스라엘의 왕들을 언급하고 있는 신앗시리아 저작물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이라고 거의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앗시리아 저작물들은 비트 후므리 왕조라는 이름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오므리의 집[왕조]’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과 매우 밀접한 일부 이웃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다.민족적 정체성은 친족 관계의 이야기를 통해 규정되는데, 주로 이 이야응해 왔다.초기와 중기 청동기 시대의 시리아-팔레스틴(주전 3500~2000년 그리고 2000~1550년)시리아와 팔레스틴은 초기와 중기 청동기 시대 동안 나뉘어져 있었고 서로 관련이 없는 문화들이었다. 점차 시리아는 힘찬 문화적 공동체로써 출현했으며, 이들은 주로 메소포타미아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이집트와 일부 경제적인 접촉을 했었다. 팔레스틴은 문화적 침체기였으며 드문드문 사람들이 거주했고 대부분 그 고장에서의 거래가 행해졌다. 이들은 외부세계와 접촉하기도 했는데, 오직 이집트로 한정되어 있었다.Ⅲ. 후기 청동기 시대세 경쟁 세력들팔레스틴에서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1200년)의 시작을 힉소스의 추방으로부터 본다. 이집트에서는 힉소스 추방이 제2중간기 시대(제13왕조~17왕조; 대략 주전 1750~1550년)의 말과 새로운 왕국(제18~20왕조; 주전 1550~1070년)의 시작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연대기적으로 새로운 왕국이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1200년)와 초기 철기 시대(주전 1200~900년)에 겹치게 됨을 주목해야 한다.가나안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집트의 제18왕조와 제19왕조 그리고 제20왕조 초기의 이집트는 시리아-팔레스틴에서 방해받지 않고 이집트의 존재를 알리고, 통치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제19왕조가 철기 1기를 시작(주전 1200년)할 때와 제20왕조로 전환되면서 팔레스틴은 이집트 권력의 확실한 통제 가운데 있게 된다. 따라서 가나안은 후기 청동기 시대 시작(주전 1550년)부터 철기 1기의 처음 몇 세대들(주전 1135년)까지 이집트의 지역이었으며, 또한 십여 년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후기 청동기 시대 일상생활(주전 1550~1200년)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가난의 시기였는데, 그 이유는 이집트의 과세 때문으로 보인다. 부의 대부분이 거대 도시의 중심지들에 밀집되었으며, 그곳에 이집트의 지역 총독들과 군대들이 거주했다. 통치자의 화려한 모습이 가나안 백성의 사회조직 통제에 필수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에 총독은 부유가가 이웃 도시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하나의 제국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 도시 국가들 중 둘이 특히 강력해졌는데, 그것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다.앗수르와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의 자신들의 영역들을 통치할 때, 그들은 매우 점진적인 문화적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또한 앗수르에 의해 통치를 받던 북쪽 도시들과 지역들이 특정 지역적 국가로써 출현했는데, 그곳이 바로 앗시리아 왕국이다. 그와 유사하게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벨론의 지역 소유권이 바벨로니아 왕국에게 있게 되었다.지역적 연결의 더 큰 의미의 예는 바벨로니아에서 볼 수 있으며, 바벨로니아에서는 종교적 강조의 변화를 가져온 고대 신년 축제의 재편이 있었다. 축제는 오랫동안 지역적으로 거행되어 왔었지만, 철기 초기 바벨로니아는 그 지역의 모든 신들 위에 군림하는 바벨론의 신, 마르둑의 왕권을 기념했다. 신년을 축하하는 동안 인접 도시들의 신들이 마르둑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바벨론을 ‘방문’했으며, 이것은 그 신들의 상들이 그 행사를 위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끝나면 자신의 본래 도시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르둑이 모든 신들 중에 가장 높은 신이며, 신들의 신으로서 여겼다.동시적이지는 않지만, 이 종교적 축제는 증대되는 ‘단일 신앙적’ 신에 의해 선택된 자로서 왕의 위엄을 높여 주었다. 헤노-테이즘은 고대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흔하게 있는 신앙의 일종이었다.Ⅳ. 철기 1기가나안 물질문화 안에서 블레셋인들 찾기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은 고대 문서들이 펠레셋(또는 블레셋)을 언급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펠레셋을 찾아내는 데에는 어려워하지 않는다. 이 그룹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토된 다양한 고대 문서들에서 그 존재가 입증되고 있으며, 이들은 성서에서도 또한 언급되고 있다.만약 해양 민족의 가나안 정책들에 대해 찾고자 하고, 해양 민족이 에게 해 지역으로부터 온 것으로 본다면, 우리는 팔레스틴에 있던 에게 해 지역을 대변하는 물질문화를 찾는 것이 더 합리적일지 모른다. 주전 12세기 팔레스 100000명 이상까지 증가했다. 이런 전체적인 인구수를 비교해 볼 때, 철기 1기는 팔레스틴 전체 보다는 요단 서편의 고지대들 안에 있는 유다 산악 지대의 북쪽 인구가 더 빨리, 그리고 눈부시게 증가되었다. 철기 1기 최고 절정기에 적어도 30000명의 수가 정착했으며, 이것은 요단 서편 산악 지대의 이전 시기와 비교했을 때 아주 경이적인 숫자이다.철기 1기 동안 촌락에 정착한 인구 조밀도는 세대들에 따라 변동이 심했으며, 작은 지역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즈르엘 계곡과 예루살렘 사이의 중앙 산악 지대와 같은 일부 지역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 동안 소수의 촌락들만이 있었는데, 철기 1기의 세기들을 지나면서 약 300개 작은 촌락들에 인구가 거주하게 되었다. 이들 중 절반은 성서에서 므낫세라 부르는 지역(이즈르엘에서 대략 세겜까지)인 북쪽 지역에 밀집되었다. 베델에서 예루살렘까지 의 지역을 성서는 베냐민 땅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지역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점령된 적이 없었으며, 철기 1기에 약 50개 지역들에 가옥들이 있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므낫세와 남쪽으로는 베냐민 사이에 있는 에브라임 지역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점령되지 않았는데, 철기 1기 동안에는 약 100개의 촌락들이 형성되는 놀라운 증가를 가져왔다. 갈릴리는 철기 1기에 약 60개의 공동체들이 가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중 약 40개의 촌락들이 북부 갈릴리에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다 산악 지대는 후기 청동기 시대 동안 모두 점령되지 않았는데, 철기 1기 동안 12개 이상의 촌락들이 형성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모압 지역에는 후기 청동기 시대엔 인구가 거의 없었으나, 철기 1기에는 100개 이상의 작은 촌락들이 형성되었다.철기 1기 고지대 촌락 생활촌락은 서로 혈연으로 직접 관련되었던 사람들이었거나, 혹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성서에서는 이들이 혈연관계로 형성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미쉬파하라는 단어는 보통 ‘씨족’으로 번역된다. 같은 지리적인 지역에 위치한 미쉬하포트의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왔다. 학자들의 다수는 역대기의 저자가 사무엘서와 열왕기로부터 직접 자신의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베꼈다고 믿는다.한편 주전 10세기에 거대한 통일 왕국이 존재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가설을 두 가지 논점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사무엘서와 열왕기가 주전 10세기에 기원된 사건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으며, 이스라엘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던 시기에 히브리어 문서의 전승이 있었다고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히브리어 문서는 그 왕국에 대한 상세한 것들을 그 다음 세대에 믿을 만하게 전달한 저술을 말한다. 둘째, 그들은 주전 10세기 팔레스틴에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졌고, 전 지역을 통치하는 왕조가 존재함을 고고학적 자료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통일 왕조를 지지하는 진술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다윗이 가나안에 있는 통일된 정치 국가를 만들었고, 솔로몬이 그것을 다스렸다고 결론짓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통일 왕조가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통일 왕조의 지지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뉜다. 일부 역사가들은 열왕기상 4장 21절의 내용을 따르면서, 솔로몬이 직접 팔레스틴을 통치했고, 봉신 왕들을 세워 시리아를 통치했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에 통일 왕조는 유프라테스로부터 이집트까지 모든 땅을 통치했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가들은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성서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비역사적이라고 인식하며, 솔로몬 제국은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이집트 국경까지 확장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통일 왕조 가설의 지지자들은 다윗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그리고 블레셋 해안 동편부터 요단 동편까지의 땅을 정복했다는데 동의한다. 페니키아인들과 블레셋인들은 다윗으로부터 독립된 상태였으나, 페니키아인들은 다윗과 동맹을 맺었고, 블레셋인들은 다윗의 군사력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대부분의 시리아-팔레스틴 다른 민족들은 다윗-솔로몬 정권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있었다. 솔로몬이 죽은 시기는 다윗이 이 왕국을 세운 후 40년에서 8.
현대교회사제 1 부 웨스트팔리아로부터 프랑스 혁명까지제1장 현대 교회사의 주요한 주제들교회사 가운데 웨스트팔리아 평화조약 이후의 시기는 가장 복잡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입니다. 이 시기에는 진젠도르프, 웨슬레, 슐라이어마허 같은 이들이 등장하였지만, 종교개혁과 같은 거대한 새 조직이나, 운동을 창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비록 모라비안들이나 감리교 등과 같은 중요한 새 집단들이 출현하였으나, 유럽의 교단 지도는 1648년 이후 거의 변화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결여는 단지 유럽에만 해당될 수 있는 말이고, 현대 기독교사의 으뜸가는 중요한 주제는 유럽 밖으로의 지리적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50년 이후 4세기가 지나자, 유럽의 인구는 7~8배가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1500년 이후 대양 너머의 지역들이 철저하게 탐험되었으며, 1914년까지는 인간들의 거주가 가능한 모든 대륙들이 서구에 잠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럽인들의 확장이 기독교가 널리 확장되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지만 1914년 이후 비유럽 집단들의 부상이 두드러져서, 가까운 장래에 중심축이 비유럽인들에게로 다시 옮겨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확장은 주로 반동 종교개혁의 기치 아래 시행되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를 잠식해 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6, 17세기의 지리적 확장이 반동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생겨났다면, 이들의 활동이 한동안 퇴조의 모습을 보이던 18세기 후반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거대한 규모로 재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1914년경에는 비서구인들 사이에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 기간 동안의 교회의 내부 역사를 살펴본다면, 신앙과 문화 사이의 부단한 상호관계를 우선 점검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신앙에 의하여 문화생활이 침투되고 변화 받았으며, 어떤 때는 교회된 지역이 세속화되는 모습입니다. 이 식에는 후자의 모습이 보다 더 우월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 관계를 조금 관습, 도덕률, 취미, 그리고 심지어는 언어까지도 다른 평민 계급과는 판이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독재 통치자들은 무조건적 복종을 항상 설교하였던 루터파 설교가들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전쟁이 끝난 후, 대중들에게 거의 노예적인 굴종을 강요하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궁정 설교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주와 교회의 관계는 루터 당시의 비상시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전쟁이 끝날 즈음엔 이러한 비상체제가 영구적으로 고착되었으며, 영주들은 종교개혁 이전 주교들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자기들의 것으로서 요구하였습니다. 영주들은 자기들이 직접 임명하였던 ‘교회 회의’를 통하여 일체의 재정문제들을 관할하고, 성직자들을 임명하였으며, 권징도 실시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에 들어서자, 교회는 독일 절대 국가 내에서 세속 정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영적, 정신적인 자유는 소멸된 지 오래였습니다.제5장 개혁파 전통, 앵글리칸주의, 자유교회 칼빈주의종교전쟁의 짐을 주로 담당하였던 것은 국제적 칼빈주의였으나, 1648년까지 칼빈주의는 제국 내에서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와 같은 공식적 위치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에 개혁파에 속한 이들은 프로테스탄트 진영 가운데서도 가장 국제적이요 에큐메니칼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연합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공동체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개혁파는 네덜란드의 도르트에서 국제대회를 개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네덜란드, 영국,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들 안에 있던 개혁파 교회들은 새로운 발전을 기할 수 있는 여유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형성의 시초는 17세기 초에 네덜란드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영국인들이, 19세기에는 미국인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모양으로, 이 세 지역에 있는 교회들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루터파 혹은 로마 가톨릭 영토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대문화에교회의 분계선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학적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앵글리칸들은 도시와 공직과 전문직을 독점하였던 신사계급이었습니다. 독립교파는 중하층이었으며, 침례교 신자들은 가난한 공인들과 서기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이 시대 영국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라면 복음주의 부흥운동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큰 유익을 얻은 것을 비국교들이었습니다. 이 이유 중 하나는 국교회의 입장으로서는 이처럼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재빨리 적응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교회 안에서도 복음주의적 경건주의는 평신도들 사이에서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복음주의의 또 다른 결과는 비국교파와 국교가 보다 더 근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부흥운동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엄격한 안실일주의였습니다. 1787년에는 복음주의파의 요청에 따라 국왕이 주일을 범하는 것, 신성 모독적 언사, 술 취함, 음란한 서적 그리고 부도덕한 오락들을 금하는 칙령을 발하였습니다. 복음주의적 자발적 단체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사회개혁의 승리는 노예매매의 폐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시킨 것이었습니다.복음주의저거 자발적 단체들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형태는 보다 에큐메니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복음주의 동맹’의 조직이었습니다. 19세기의 부흥운동은 교파들 간의 국내외적 연대를 공고히 해야겠다는 필요성과 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되었습니다.제15장 미국의 이민들과 개척지대의 교회들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종교 형태는 가장 개인주의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앙이었습니다. 즉 청교도 교파 내의 경건주의적인 복음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으며, 신학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이어받고 있었습니다.프랑스의 불신앙이 유럽의 종교와 사회들을 전복시키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새로운 일단의 부흥운동의 물결이 일었는데, 곧 ‘제2차 각성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각성운동을 이끌었던 가장 주요한 신학 사상은 ‘일관성 있는 칼빈주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돌프 스토액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루터교 사회사상, 즉 지주 신사계급과 국왕들이 하층민들을 너그럽게 다스리는 독재적인 사회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들이 죄악으로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영주들이 국내외에서 당연히 무력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제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라고 설명하였던 루터교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단지 계급제도를 정당화시키고자 하는 합리화 이론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독일 안에서 완전 소외 혹은 개별적인 세력권으로 존재하였던 이들은 제국의 가장 심각한 내부문제가 되었습니다.이 시대의 루터교 교회의 윤리에 미처 예상치 못한 압력을 가중시켰던 것은 산업혁명과 함께 도래하였던 민족주의의 물결이었습니다. 또한 철저하게 반기독교이었던 사회주의자 진영 외에도 식자층에는 기성교회에 대한 혐오감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독일 국교회들은 상당히 불안한 기반 위에 그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명목적 기독교는 일반적인 에티켓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습니다.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은 루터교 교회들보다는 산업주의와 민족주의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융통성 있게 잘 대응하였습니다. 루터교 교회가 거의 획일적으로 군주정체, 귀족주의, 수동적 순종을 주장하였는데 반해, 개혁파 교회들은, 비록 적극적이지 못하였는지 모르나, 자유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평화운동, 사회개혁 혹은 사회주의들과도 광범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제20장 영국의 기독교1870년 영국 교회의 주류는 아직도 ‘복음주의’였습니다. 복음주의자 외에도, 이들의 숙적 입장에 있었던 앵글로-가톨릭들도 여러 방면으로 그 사역을 확장하여 이 시기에 점차 교세를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영국 교회 안에는 게릴라전의 양상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가능하였던 앵글리칸과 자유 교회인들 사이의 협력이 점차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이러한 복음주의자들과 앵글로-가톨릭파들 사이의 괴리는 앵글리칸들과 자유 교회주의심각한 경제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에 볼셰비키 혁명까지 가중되었습니다. 이러한 몰락의 분위기는 문화계와 아울러 신학계에도 전달되었으며, 신학적 토론에서는 종말론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제23장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 자유주의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30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는 괄목할 만한 신학적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소위 '현대주의'신학의 발흥에 가장 책임이 있는 인물은 바로 교황 자신이었습니다. 레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학문적 빈곤성을 잘 깨닫고 있었으므로, 이를 고쳐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그의 회칙 '아이테르니 파트리스'는 신학교와 대학들에서 토마스주의의 연구를 거의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움직임들의 결과로 토마스주의에 반대하는 학파들도 토마스의 해석에 준하여 스스로의 입장들을 정의하게 되었고, 많은 가톨릭 사상가들이 공통의 용어들을 사용하게 됨으로써 결국 토마스주의는 전체 문화계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과 철학 방면에서 데카르트파, 스코투스파, 플라톤주의자들에게 대항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신토마스주의자들을 지원하였던 것입니다.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현대주의'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저유주의'라는 용어를 대체하여 동일한 형태의 신학과 정치적 경향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스켄디'회칙으로 인해 '현대주의'이단을 정식으로 정의하고 정죄하였습니다, 파이우스 교황은 1910년 '현대주의'잔재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반현대주의 서약을 강행하였습니다. 이 서약의 내용은 '파스켄티'회칙들에 들어있는 정죄조항들을 전면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과 교사들은 이 서약을 하든지 아니면 그 직책을 박탈당했습니다.제24장 프로테스탄트 선교, 1796~191418세기 말까지만 해도 프로테스탄트는 주로 북서 유럽 주민들의 종교로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와이즈만 추기경은 프로테스탄트가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
목 차1. 서론Kohlberg 의 도덕발달 이론의 배경과 연구 방법2. 본론1) Kohlberg 의 도덕발달 단계a. 인습 이전 수준b. 인습 수준c. 인습 이후 수준2) Kohlberg 도덕발달의 특성3) Kohlberg 도덕발달의 이론적 비평4) Kohlberg 도덕발달을 기독교교육에 적용3. 결론요약 및 정리1. Kohlberg 의 도덕발달 이론의 배경과 연구 방법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Kohlberg는 스위스의 심리학가 Piaget 의 연구에서 힌트를 얻어 1950년 후반에 도덕발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콜버그는 9세부터 23세에 이르는 아동과 청소년을 미국의 중산층과 대만, 말레이시아, 터키, 멕시코, 마야 인디안 촌 등에서 70내지 100여명을 무작위 추출하여 3년마다 대담을 통해 연구하였고, 1958년 미국 중산층의 소년들을 실험한 후 그의 이론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피아제가 도덕발달의 구조를 기초하였다면 콜버그는 그 단계를 기초하였다 할 수 있으며, 피아제가 도덕발달에 관한 성향을 묘사했다면 콜버그는 그 특성을 구체적으로 분류한 편이다. 피아제와 콜버그는 도덕적 판단의 성장은 발달을 통한 과정임을 확실히 하였다.도덕적 판단의 성장은 규칙을 명심하도록 하는 과정이 아니라 인지적 재구성 과정(a process of cognitive restructuring)이다. 도덕적 성숙의 정도는 무엇을 하느냐는 행동의 차이가 아니라 행동을 뒷받침 하고 있는 이유에 달려있다. 자신이 도덕적 판단이나 도덕적 행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이유가 도덕적 성숙의 수준이나 단계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2. Kohlberg 의 도덕발달 단계1) 인습 이전 수준 (pre-conventional level)이 수준에서는 옳고 그림에 대한 반응이 신체적이거나 감각적인 행동의 결과에 의해서 해석된다. 대체로 청년기 이전 아동기에 해당한다.* 1단계: 처벌과 복종 지향행동이 사람에게 주는 의미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물리적 결과가 선악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벌을 피하기 위, 실제적 의미로 해석된다. 인간관계는 마치 시장에서의 관계처럼 이해 관계적 차원에서 해석된다.2) 인습 수준 (conventional level)이 수준에서는 가족이나 집단, 그리고 국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가치 있게 지각되는 단계이다. 이 수준의 특성은 집단을 귀하게 여기고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되어 사회화의 속성이 나타난다. 이 수준에서는 자신의 가치의식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집단에서의 소속감이 그 의식을 강화시켜준다. 연령적으로 청소년 초기의 특성에 비교된다. 자신이 집단에서 갖는 소속감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만족을 얻는다.* 3단계: 착한 소년, 훌륭한 소녀식의 대인 상호적 일치 지향착한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돕는 것이며,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행동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취하는 행동과 같은 고정 관념화된 이미지에 일치되려는 편이다.인습 수준은 비로소 행동이 동기에 의하여 판단되는 때이다.* 4단계: 법과 질서 지향옳은 행위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권위, 고정된 규칙,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즉 고정된 규칙에 대한 권위와 순종을 그 규칙 자체를 위해 중시한다. 사회질서 유지와 자신의 의무이행을 주시하는 시기이다.3) 인습 이후 수준 (post-conventional level)이 수준에서는 일정한 타당성을 갖고 있는 도덕적 가치와 원칙을 따르려는 입장이다. 이전의 단계들이 사회제도에 대하여 적절한 지각을 갖게 되는 편이라면, 이 수준에서는 모든 제도에 적용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관심을 갖게 된다. 때로는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여 스스로 양심에 비추어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존엄에 관심을 갖게 되는 원리이다.* 5단계: 사회계약 또는 법률적 지향어떤 것이 옳은 행위인가는 사회전체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의견일치를 본 바에 의하여 정의된다. 법률적 견해를 강조하지만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일반않기 위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복종한다. 사람과 재산에 대한 물리적 피해를 피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처벌회피와 권위자의 막강한 힘에 따르는 행동은 옳은 것이다.자아 중심적 관점.타인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며 자신과 행위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의 관점을 관련시키지 못한다. 행동들은 심리적인 관심보다 물리적 이해에 따라 판단된다. 행위자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이 혼재 되어 있다.2단계:개인주의,도구주의,목적, 교환누군가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있을 때만 규칙을 따른다. 옳은 것은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한다. 옳은 것은 공정하고 동등한 교화, 동의를 의미한다.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인식하며 자신의 이익과 필요에 따른다.구체적인 개인주의적 관점.모든 사람은 추구해야 할 자신의 이익이 있으며 이러한 이익간의 갈등이 유발될 경우 옳은 것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2수준.인습수준3단계:상호적인 대인관계의 기대,관계성, 동조친밀한 사람의 기대에 맞추어 살거나 형제, 친구 등과 같은 일반적인 자신의 역할 기대에 따라 살아간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선한 동기를 가지고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신뢰, 충성, 감사의 마음과 같은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자신과 타인이 보기에 착한 사람이 되려는 욕구, 타인에 대한 배려, 황금률에 대한 믿음, 전형적인 착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과 권위를 유지하려고 한다.인간관계 속에서의 개인적 관점.개인적 이익을 우선하고 타인과의 공유된 느낌, 합의, 기대를 인식한다. 황금률에 따라 다른 소년의 입장이 되어보고 서로의 관점들을 관련시킨다. 아직까지는 일반화된 사회 체계적인 관점을 고려하지 못한다.4단계:사회체제와 양심동의하고 있는 현실적인 의무를 행한다. 법은 규정된 사회적 의무와 갈등하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존중되어야 한다. 옳은 것은 사회, 집단, 제도에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런 상대적인 규칙들은 사회계약이기 때문에 항상 공평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삶과 자유와 같은 절대적인 가치와 권리가 대다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어떤 사회에서든지 지지되어야 한다.사회계약에 의해서 모든 사람의 복지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법을 재정한다. 지키려는 의무감에 의해 가족, 우정, 신뢰, 노동의 의무를 진다. 법과 의무에 대한 전반적인 유용성에 대한 합리적 결론,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기초해 있다.사회에 선행하는 관점사회에 대한 애착과 계약에 선행하는 가치와 권리를 합리적으로 인식하는 개인의 관점을 말한다. 합의, 계약, 객관적인 공평성, 권리행사 과정의 공식적인 기제에 근거해서 관점들을 통합한다. 도덕적·법적 관점을 고려하며, 때때로 그것들이 갈등하고 통합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6단계:보편적인윤리원칙들스스로 선택한 윤리적 원칙에 따른다. 특정 법이나 사회적 합의는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에 타당하게 된다. 만약 법이 이런 원칙을 위반하면 법이 아닌 원칙에 일치하는 행동을 한다. 원칙들은 정의의 보편적인 원리이자 한 개인으로서 평등한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말한다.보편적인 도덕원리를 타당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인간의 존재를 믿고, 보편적인 도덕원리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느낀다.사회적 조화에 기인한 도덕적 관점.도덕성의 본질과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그렇게 대우 받아야 한다고 인식하는 합리적인 인간의 관점이다.(Kohlberg,1984, pp174-176)3. Kohlberg 도덕발달의 특성1) 불변의 연쇄를 이루고 있다. 모든 단계는 독립성을 가지며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반드시 순서에 따라 각 단계를 거쳐 간다. 전 단계를 순서대로 거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건너 뛸 수 없다. 도덕발달은 다른 모든 발달처럼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진행되며 하룻밤 사이에 도덕군자로 변신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 각 단계의 사람은 한 단계 위 단계에는 관심이 이끌리나 두 단계 위에는 이끌리지 아니하발생한다. 도덕적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해결하려는 인지적 판단이 서지 못한 상태를 불균형이라 한다. 인지적 판단으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인지적 구조로 전환하여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발달의 특성이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 잘 적응해서 문제가 없을 때는 발달을 기대할 수 없다.) 즉 인지의 문제 해결 필요에 의해 발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4. Kohlberg 도덕발달의 이론적 비평1) “추론 훈련을 통해서 도덕적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콜버그의 주장에는 전통적 도덕교육과는 반대 개념이다. 전통적인 도덕교육은 도덕적 행위를 규범적으로 배움으로써 전수되었다면, 콜버그는 그 행동이 가능하도록 뒷받침 하고 있는 인지적 구조의 재조정, 즉 행동의 판단과 이유를 알 수 있는 논리적 체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 규범으로 습득된 도덕적 행위는 상황에 따라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판단과 이유를 가지고 있을 때는 그 행동은 전자보다 더 지속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교육은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나름의 수준과 방법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몸에 베게”하던 도덕교육을 “생각에 베도록”하는 것이다. )2) 콜버그의 추론훈련에 대한 논증에 대하여 “도덕적 판단과 이유를 확립하면 실천할 수 있는 힘까지 수반되는가?”) 라는 비판이 대두된다. 이러한 도덕적 판단이 자동적으로 그 행위를 실천할 수 있도록 추진하는 힘까지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콜버그의 이론은 도덕적 성숙의 인지적 차원을 해결하였지 그 정의적이며 행위적인 차원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콜버그의 이론에 설명된 도덕적 판단과 이유확립이 여전히 심리 구조적 측면에 제한되어 있고 그 역동적 측면인 동기형성의 차원까지 포함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생각에 베게”한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하면 “마음에 베도록”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3) 사람들이 6단계를 거쳐 발전한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구조적 특성만을 말한다면 6단계와 같)
목 차서론프랑크푸르트학파란?본론1. 사상적 배경1) 계몽에 대한 비판2) 부정의 변증법3) 마르크스의 사생아4) 역사적 배경2.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1) 생활방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2) 사고의 차단 비판3) 문화산업에 대한 비판4) 이데올로기적 면역3.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의의와 한계결론서론- 프랑크푸르트학파?1931년 호르크하이머(Max Houkheimer, 1895-1973)가 프랑크푸르트 대학 내에 설치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참가한 여러 학자들 T.W.아르비노, H.마르쿠제, W.벤야민, E.프롬, F.L.노이만 등을 비롯하여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재건된 연구소에서 배풀된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의 제 2세대의 연구자들을 지칭한다.본론1.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적 배경1) 계몽에 대한 비판합리성의 개념을 사회 분석의 유용한 도구로써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베버였다. 베버가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해명하려고 했던 것은, 서양 문명의 주된 흐름으로서의 삶의 점진적인 합리화라는 주제였는데, 그는 이를 '세계의 탈미신화'라고 명명한다. 베버에 의하면 삶의 합리화는 인간 생활과 사회구조의 세속화와 현상을 초래했는데, 이는 서양사의 독특하고 지배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인 사실은 합리화의 진전 과정이 이성 자체와 계몽의 진보에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프랑크푸르트학파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베버의 이러한 주제를 계승하여 '이성의 도구화'라는 낱말로 비슷한 사회역사적 상황을 표현한다. 서양 근대성을 특징짓는 합리성은 형식적 합리성 혹은 주관적 이성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베버의 형식적 합리성은 주어진 일반적 규칙이나 목표를 달성키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계산해내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주관적 합리성을 도구적 합리성과 동일시하며 양자를 혼용하면서, 근대를 기점으로 하여 이성은 그 본질적 포괄성을 상실하고 도구화되어 삶의 모든 영역에 깊이 침투했다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이성은 원래 규범적 목표들을 판단하고 목표들 사이의 충돌을 조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미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극대화시키는 기능적인 성격도 지닌다. 이성의 이러한 두 측면 사이의 긴장관계야말로 완전히 합리적인 사회의 실현을 지향했던 계몽사상의 퇴락을 이해케 해주는 열쇠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근대적 이성 안에 내재해 있는 이러한 긴장 관계를 '계몽의 변증법'이라고 부르면서 포괄적 이성에 대한 도구적 이성의 우위가 근대 서양의 행로를 특징짓는다고 주장한다.헤겔 '관념론적 변증법'마르크스 '유물론적 변증법'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정신- 대상- 정신·절대정신의 자기의식·절대자는 '정신',·절대 정신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진리의 기준을 계속 정정해가는 과정·주체 우위론적 관념론·이성의 부정성 강조·주체 우위론적 관점-실존주의·개념은 사유하는 주체 속에서만 실존하며, 주체의 활동임·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될 수 없음·객체 우위론적 관점-구조우위·한 번 부정된 것은 사라질 때까지 부정일 수밖에 없음2) 부정의 변증법3) 마르크스의 사생아인간의 사회화 역사에 대한 이해 및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을 위하여 다양한 사상들과 마르크스주의를 개별적으로 결합했다. 인간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지만, 그들의 사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마르크스주의프랑크푸르트학파하부구조분석정치경제학분석객체의 철학상부구조분석철학중심(도구적이성비판)주체의 철학4) 역사적 배경1) 1917년 러시아에서 성공한 혁명이 왜 유럽 전역에 퍼지지 않았는가?- 왜 자본주의의 성숙은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혁명을 불러오지 못하는가2) 파시즘의 등장- 왜 극렬한 공황 이후에 사회주의가 아닌 파시즘이 독일 사회에서 등장하였는가3) 유럽제국들은 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가이러한 역사를 바탕으로, 왜 이 정해진 역사 진행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고민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지나치게 노동을 특권화함으로써 노동이외의 요인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유물사관이 내세우는 경제적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사회 변혁을 위한 인간(주체)의 진행 정도가 사회 변혁의 조건(객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이유는 허위의식인 이데올로기가 작용한다고 주장한다.2.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상1) 생활 방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문화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풍요로운 문화를 소비하고 그 부산물로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문화 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문화가 상품화됐으며 문화 상품은 돈으로 교환되기 위해서 생산된다. 이는 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해방의 가능성을 탈취하고 문화를 저속화 시킨다. 문화 과정에서 문화 상품 소비자와의 관계는 수동적인 자세이다. 우리는 문화의 역사성이나 역동성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기계적이고 관료적인 합리화는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더욱 용이하게 만든다. 거대한 관료주의는 자본가를 생산 현장에서 분리시키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노동자들의 불만과 실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현상을 초래하였다.2) 사고의 차단 비판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계급의 지향적인 면들이 점차 그 모습을 잃어 가고 있듯이 정신 세계에서도 점자 사고적인 면이 사라지고 단순한 형태로 변해 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실증주의는 인간의 세계에서 사고의 부분을 축출하고 사고의 기능을 단지 수동적인 것으로 변화 시킨다.3) 문화 산업에 대한 비판문화산업은 무엇보다도 독점자본주의의 문화적 형식에 해당한다. 문화산업이 중계하려는 것은 계급지배이다. 문화 산업이 대상으로 삼는 주 수용자는 원자화되어 있고 속임수 앞에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대중이다.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든다. 통계의 시대에 대중은 화면 속의 백만장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에는 너무나 영리하지만 큰 숫자가 만드는 환상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나 어리석다.4) 이데올로기적 면역문화 산업은 대량으로 대중문화를 찍어내면서 때로는 진보적인 사상마저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진보적 성향의 예술품들도 그 탐욕 앞에서는 아무런 행세도 하지 못하고 시장의 흥정 대상으로 내물리게 된다.3. 의의와 평가
목 차Ⅰ. 서론패러다임의 사전적 정의Ⅱ. 본론1. 패러다임에 내포된 의미2. 패러다임의 구조① 세계관적 패러다임② 범례적 패러다임3. 패러다임의 기능① 서술적 기능② 규범적 기능③ 평가적 기능④ 발견적 기능Ⅲ. 결론Ⅰ. 서론 - 패러다임[paradigm]의 사전적 정의☞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쿤(Thomas Khun)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패러다임'은 '사례·예제·실례'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語)에서 유래한 것으로, 언어학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즉 으뜸꼴·표준꼴을 뜻하는데, 이는 하나의 기본 동사에서 활용(活用)에 따라 파생형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쿤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로 정의하였다.쿤에 따르면, 과학사의 특정한 시기에는 언제나 개인이 아니라 전체 과학자 집단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범적인 틀이 있는데, 이 모범적인 틀이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전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학 위에서 혁명적으로 생성되고 쇠퇴하며,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된다.쿤은 이러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하나의 패러다임이 나타나면, 이 패러다임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계속 연구·탐구 활동을 하는데, 이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한다. 이어 정상과학을 통해 일정한 성과가 누적되다 보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차츰 부정되고, 경쟁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난다. 그러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한 시대를 지배하던 패러다임은 완전히 사라지고, 경쟁관계에 있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의 패러다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고, 항상 생성·발전·쇠리적 행위에 적용하여 사용하였다. 어린이들이 모방하여 본받을 만한 범례로 이솝 우화가 이런 의미에서 전형적인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다 19세기 이후 언어나 민속이 하나의 지적 학문으로 진전되면서 패러다임 개념도 도덕적, 윤리적 맥락에서 벗어나 언어나 문화 형식을 분석하는데 이용되었다. 언어 문법에서 동일한 어근, 어간에서 나온 어형이 변화되는 일련의 방식 내지 모델을 하나의 패러다임이라 일컫는 것이 그 예이다.패러다임 개념이 학계에서 획기적인 관심을 끈 것은 쿤이 1962에 발표한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가 계기가 되었다.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곧이어 전개된 과학철학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과학철학 논쟁은 20세기 전반을 주도한 논리실증주의들 및 반증주의자들과 이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과학철학을 제기하는 일단의 새로운 철학자들 사이에서 전개 되었다. 헴펠(C.G Hempel), 카르납(R Carnap), 포퍼(K.R Popper) 등의 논리실증주의자와 반증주의자들은 과학철학을 ‘과학의 논리’로 규정하고 고전 경험론과 현대 기호 논리학을 개념적 무기로 삼아 과학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해명하고자 하였고, 특히 경험을 기술하는 단칭 언명과 이 단칭 언명이 확증하거나 반박하려고 하는 보편 언명인 이론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분석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쿤을 비롯한 핸슨(N.R Hanson), 폴라니(M Polanyi), 파이어아벤트(P.K Feyerabend), 툴민(S Toumin), 라카토스(l Lakatos), 라우단(L Laudan) 등의 새로운 과학철학자들은 과학 분석의 중요한 도구로써 형식 논리를 거부하고 실제적인 과학자의 탐구 활동에 기초한 과학사에 대한 연구로 대체하면서, 과학이 실제 역사와 부합하는 과학론을 제시 하려고 하였다. 패러다임 담론은 실증주의 과학철학의 형식적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중심논리였다.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이후 과학 철학에 한정되지 않고, 인문, 사회과학에야 하며, 어떤 질문이 대답되어야 하며. 그 질문들이 어떻게 물어져야 하며. 얻어진 질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어떤 규칙들이 지켜져야 하는지를 정의하는데 작용한다. 패러다임은 하나의 과학 안에서 가장 넓은 합의의 단위이며 과학적 (하위) 공동체를 서로 구분하는데 작용한다. 패러다임은 패러다임 안에 있는 범례, 이론 그리고 방법과 도구를 포섭하고, 정의하고 그리고 상호 연결시킨다.② 패러다임은 과학에서 세계관의 기능뿐만 아니라 모델로서의 기능도 갖는다. 패러다임은 그 자체는 비어있지만 형태를 부여하는 형식, 고정적이고 특정적인 의미를 잉태하지 않지만 모든 의미의 씨앗을 내포하는 구조 내지 형성물이라 할 수 있다.이제 쿤의 패러다임 담론에 내포된 의미를 천착해 보자. 쿤에게 있어 패러다임 개념은 한편으로는 과학사학적으로 과학 진보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 틀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철학적으로 논리실증주의, 반증주의 등 합리주의적 과학관을 비판하는 논거였다. 그는 이른바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정통과학이 주장하는 과학관을 거부했다. 정통과학에서 과학은 객관적인 지식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갖추고 있으며, 축적을 통해 끊임없이 진리를 향해 진보한다. 그러나 쿤은 "과학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어느 한 집단의 산물이 고 집단의 공통된 속성이며, 그 공통의 요소들은 과학자 집단의 구성원들의 심리적 구조 안에서 양육되고 훈련됨으로써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정통적 과학관과는 달리 쿤은 과학에는 대상에 과학자의 세계관이 반영되지 않은 객관적인 관찰이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과학의 대상에 이르는 방법도 어떤 객관적인 논리적 규칙이나 방법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자 사회의 표준적인 규칙을 받아드림으로써 대상과 상황을 유사성의 그룹으로 분류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란 객관적 지식이라기보다는 통상과학의 표준적인 예 혹은 모델에 유비(analogy)나 은유(metaphor)에 의해서 형성되는 암묵적인 앎(tacit knowing)일 뿐이다. 이를 입증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쿤의 패러다임 개념에서 두 개의 층차적 의미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여기서는 ‘세계관적 패러다임’과 ‘범례적 패러다임’으로 부르고자 한다.① 세계관적 패러다임'세계관적 패러다임'은 패러다임이 과학에 갖는 세계관적 토대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인식, 가치, 신념 등 전반에 관여하지만, 다른 한편 세계관은 과학을 정상과학으로 승인하는 철학적 토대가 된다. 세계관과 패러다임은 과학을 매개로 하여 볼 때 많은 의미를 공유하지만, 세계관(세계관으로서의 패러다임)은 과학을 ‘미리 짜여지고 상당히 고정된 상자' 속으로 자연을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세계관은 그래서 과학자들에게는 세계를 보는 '개념적 조직망(conceptual network)'이라 할 수 있다. "공약(commitment)의 강인한 그물망 - 개념적· 이론적· 기기적, 그리고 방법론적인 - 의 존재는 정상과학을 수수께끼 풀이에 관련짓고 있는 비유에서 주된 원천이 된다. 그것은 성숙된 경지의 전문 분야 연구자들에게 세계와 그의 과학이 둘 다 과연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규칙을 제공하는 까닭에, 연구자는 이들 규칙과 더불어 기존의 지식이 정의해 주는 난해한 문제들에 확신을 갖고 집중할 수가 있다." 패러다임을 통해서 과학의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개념적, 이론적, 기기적, 방법론적 조직망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은 문제의 영역을 규정하고 문제풀이의 방법을 제시하는 세계관적 기능을 갖는다.세계관은 패러다임의 기초가 되지만, 반면에 패러다임이 세계관을 바꾸는 측면도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유도되어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채택하고 새로운 영역을 들여다보게 된다. 패러다임의 변화들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 활동의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과학자들이 그런 세계를 다루는 일은 오직 그들이 보고 행하는 것을 통해서인 만큼, 우리는 하나의 혁명이 있은 후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세계의 그런 측면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낱말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어느 시대의 어느 전문 분야를 면밀히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양한 이론들의 개념적, 관찰적, 그리고 기기적인 응용에서의 그들 이론의 되풀이되는 유사-표준형(quasi-standard)의 설명들이 나타난다. 이것들은 교재, 강의와 실험 실습에 구현된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들이다." 쿤은 패러다임의 범례적 역할을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들', ‘모형’, ‘유형’, ‘유사-표준형'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개념에서 보듯이 패러다임은 구체적인 문제풀이에 적용되는 공식이자, 따를 만한 규칙이며, 참조해야할 교과서이다.이렇게 볼 때 패러다임의 세계관적 역할이 '자연'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범례적 역할은 ‘과학'을 구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과학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을 구성하는 세계관이 성립되어야 하며, 이를 토대로 과학적 문제가 구체적으로 설정되고 방법론이 모색될 수 있다. 패러다임의 세계관적 수준은 패러다임의 범례적 수준의 철학적 토대가 된다.3. 패러다임의 기능이러한 층차적 인식구조를 가진 패러다임은 과학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크게 서술적 기능, 규범적 기능, 평가적 기능, 발견적 기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① 서술적 기능서술적 기능은 패러다임을 통하여 과학이 비로소 설명될 수 있음을 말한다. 과학은 특정한 패러다임에 의해 성립되고 또한 패러다임은 과학활동이 추구 하는 최종적인 목적이 된다. 패러다임은 과학활동의 출발점이자 목적지가 되는 것이다. 쿤은 정상과학 활동을 퍼즐 맞추기나 수수께끼 풀이에 비유한다. 이 놀이의 특징은 미리 해답이 주어져 있다는 점과 그것을 풀어나갈 방법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패러다임은 퍼즐과 수수께끼를 푸는 제기하거나 방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해답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의 탓일 뿐이지 과학 이론의 흠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 한 수 위의 표현은 ‘자기 연장을 나무라는 사람은 변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