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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의 기원과 발전
    축구의 기원축구의 원조는 중국인이다. 약 오천년 전에 중국 곡예사들은 다리로 공을 가지고 춤을 추었다. 한참 후에 초창기의 축구 경기를 개발한 것도 중국에서였다. 골대는 가운데에 있었다. 선수들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 풍습은 왕조를 거듭하면서 계속되었다. 기원전 기념비의 부조와 기원후의 몇몇 조각에서는 명나라인들이 아디다스제와 비슷한 공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대 이집트인들과 일본인들도 공을 차면서 놀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무덤 대리석상에는 무릎으로 공차기하는 그림이 나타나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황제는 양발을 사용하는데 능했고, 네로 황제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군사들의 튼튼한 다리로부터 브리튼 섬으로 새로운 것이 유입되었다. 수세기가 지난 1314년에 에드워드2세는 큰 공을 가지고 경합을 벌이는 이 게임은 신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해악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규정하는 판결문에 도장을 찍었다. 축구는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해냈다.사람들은 무더기로 모여 시합을 했다. 선수, 시간등 모든 것에 제한이 없었다. 마을 전체가 다른 마을 전체와 시합을 하기도 했다. 발길질과 주먹질을 예사로 하며 공을 밀면서 목적지까지 가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제분기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경기장도 수 킬로미터로 넓어졌다. 수일동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마침내 왕들은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금지시켰다. 에드워드 3세는 ‘축구를 어리석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운동’으로 규정했다. 헨리4세, 헨리5세가 조인한 포고령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금지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사람들은 축구를 더 많이 즐기게 되었다. 금지에 대한 충동적 욕구가 얼마나 큰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줄 뿐이었다.플로렌시아에서는 축구를 칼슘이라고 불렀다. 아직까지도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그렇게 불리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열렬한 축구팬이었고, 마키아벨리는 실제 선수였다. 27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참가했고, 그들은 세 줄로 분산되어서 공을 차고 상대편을 으깨기 위해 손과 발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기에 참여했으며, 넓은 광장이나 아르노에 있는 꽁꽁 언 얼음판 위에서도 경기가 열리곤 했다. 바티칸의 정원에서는 클레멘트 7세, 레온9세, 우르바노 8세 교황들이 칼슘 놀이를 하기 위해 종종 팔을 걷어붙이곤 했다.멕스코와 중미에서의 가죽 공은 기원전 약 500년 전부터 성스러운 의식을 바치는 태왕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축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볼리비아의 아마존 지역에 사는 인디오들에 의하면 단단한 고무공의 뒤를 쫓아 달려가면서, 손을 사용하지 않고 두 개의 막대기 사이에 공을 집어 넣는 전통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8세기에 스페인 신부 한 명이 알토 파라나에서 예수회 선교에 나섰다가 만난 과라니족들의 오랜 풍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들은 우리처럼 손으로 공을 치지 않고 맨발의 발등으로 찬다비록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이나 치첸이사의 그림 일부에서는 공을 발이나 무릎으로 차는 것이 나타나곤 하지만, 멕시코와 중미 인디오들은 일반적으로 공을 엉덩이나 앞발로 때리곤 한다. 천년이 훨씬 넘는 어느 한 벽화에서는 우고 산체스의 할아버지가 왼손으로 경기하는 모습이 나타나있다.경기가 끝나게 되면 공은 여행의 절정에 달하게 된다. 태양은 ‘죽음의 길’을 가로질러 동이 틀 때 도착하게 된다. 그러면 태양이 뜨게 하기 위해 피를 제물로 바친다. 몇몇 학자들에 의하면 아즈테카인들은 승리자를 제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이 머리를 자르기 전에 몸에 빨간색 리본으로 그림을 그린다.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은 대지를 풍성하게 만들고 하늘의 자비로움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피를 기꺼이 헌납한다.축구, 그 빛과 그림자/ 에두아르노 갈레아노/ 예림기획/축구의 발전1. 경기의 규칙과 그 변천1885년 이전에 대영제국 밖으로 축구를 수출한 영국인들은 자국에서 규정된 규칙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규칙들이 통일성을 지녔다거나 완성된 체계를 갖췄던 것은 아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영국을 추종하는 경향을 저지하고 경기를 자국화하려 시도했지만, 대다수의 유럽국가들은 영국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벨기에와 스위스 연맹들은 1886년 국제평의회가 제시한 영국 규칙을 주저없이 자신들의 정관에 도입하려 애썼다. 프랑스에서는 u.s.f.s.a가 영국의 규칙을 전파하는 데 앞장섯다.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영국과의 경기를 열망했으므로 이러한 해결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f.i.f.a도 이러한 움직임에 보조를 맞췄다.초기의 심판들은 규칙조차 잘 모르는 자격 미담인 사람들이었다. 경기장 위에서 그들의 행동은 우유부단했고 주장들과 설전을 벌이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축구와 럭비를 혼동하여 난폭하게 상대를 향해 돌격하거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는 선수들이 경기에 참가한 때라면 더욱 심각했다.1925년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칙이 정해지면서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옛 규정에서는 공격수와 골키퍼 사이에 두 명이 있을 때 적용되었지만, 새 규정에서는 한 명만 있었도 오프사이드가 선언되었다.2. 훈련의 발전유럽 대륙의 축구는 재빨리 영국 축구의 특성을 받아들였다. 승패 여부에 달린 이득의 증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기에 이기려는 의지, 결국 정예멤버를 양성하여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팀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감독의 도움이 필요했다. 대부분 영국인이었던 감독은 전문가로서 대접을 받았고 주장의 지위를 빼앗았다. 감독은 신체단련을 강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프로 선수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이다. 초기에는 경험론에 따른 건강 관리와 폭음폭식 금지에 기초하는 단순한 영양관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기에 대비한 훈련은 점차 과학적인 모습을 갖추었고 선수 하나하나의 근육조직에 대해서까지 관심이 미쳤다.1920년대부터 정신훈련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지식 수준에 비추어 뒤처진 것임에 틀림없다. 감독들은 선수들이 각자가 맡은 위치와 역할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불어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정이 다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주요 팀들은 최소한의 결함이라도 간파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장 유능한 심리학자들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아프리카에서는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주술사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다. 회교국가들에서는 경기장에서 기도를 올리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한편 라틴 아메리카의 선수들은 후원자들이 양초를 밝히는 가운데 성호를 긋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적이고 전술적인 훈련이다.
    예체능| 2012.06.08| 3페이지| 1,000원| 조회(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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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원,명의 관리 등용법
    송? 원? 명의 관리 등용법Ⅰ. 序論중국의 과거제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온 중요한 연구과제였다.) 시험선발을 특징으로 한 과거제도는 대개 남북조에서 싹트고 수나라에서 시작하여 송? 원대에 완비된 후 명대에 완성되었다. 과거는 중국 전통사회에서 가장 앞섰을 뿐 아니라 근? 현대 서양사회에 대해서도 폭넓은 영향을 준 제도였다. 이는 오랜 발전 중 시종일관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었기 때문이다.)과거의 성립은 남북조시대, 그 중에서도 특히 북조의 현재주의 선거에서부터 그 시작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성격상에서는 양한시대의 찰거제도와 유사하지만, 이미 생명력을 읽고 구품중정제도로 대체된 한대의 찰거와 남북조시대의 문벌주의에 대항해 새롭게 출현한 현재주의 선거를 한가지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오히려 수를 거쳐 당대에 기본 틀을 갖추게 되는 과거제도와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한다.)당?송을 거쳐 명? 청 대에 이르기까지 황제권 중심의 문신관료 지배체제를 지탱시켜 준 근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과거는 그 본질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분과거인 고시진용”이고 다른 하나는 “투첩자진”이다. 그러나 이 두 요소는 함께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남북조시대로부터 당초에 이르는 시기까지는 첫 번째 요소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가 당 중조 측천무후 대에 와서야 비로소 두 번째 요소의 분명한 확인 가능하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과거제도의 성립은 역시 당 중조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그럼 지금부터 송? 원? 명의 관리 등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本論1. 송의 관리 등용법중국사 내에서 과거를 말할 때 송 대는 다른 시대보다 특히 주목받는다. 과거가 제도적인 측면에서 완비된 시기, 또는 중국이 명실공히 과거사회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송 대이기 때문이다. 송 대 과거제도의 의미로는 두 가지 요소가 보통 지적된다. 과거합격자 수의 급격한 증가와 전시의 성립이 그것이리는 치자와 피지차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황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신권과의 관계가 독특하게 운영되었다고 보여 진다.한편, 전시과제체의 성립으로 과거를 통한 관리진출에 실패한 응시자들의 원망이 당대에는 귀족 관료계층에게 집중되었으나 송 대에는 황제에게 집중되면서 많은 낙제자들이 서하와 요 그리고 고려 등 인접국으로 귀화해 주변국의 정치제도의 발전과 황권강화를 이룩해 후일 송조에 대한 침략 위협 등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그 결과 인종 가우 2년(1057) 전시과에서 탈락을 없애고 등수만 정하게 되었고, 급속한 관리수의 증가를 가져왔다. 송 대는 과거제도를 통해 대대적인 관리를 선발해 당대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는데, 태종시기 22년 동안 진사과에 근 만 명을 선발하였다. 따라서 인종 대에는 매 과 4백명을 넘지 못하도록 인원수를 제한하였고, 낙제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차례 낙제한 사람에게 특별히 응시과목 출신이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송 대는 학문의 수학여부가 과거시험을 통한 관리진출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정치와 학문의 일치를 이루었으며, 학문발전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러 신유학(이학, 성리학)의 완성을 가져왔다. 그러나 학교 교육이 과거시험에 예속되어 학문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었으며 특히 실용적인 학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당과 송 시대의 과거제도 통용상의 두드러진 차이는 최종시험으로 실시되던 이부시와 전시에서 찾을 수 있다. 당의 경우는 향공 또는 생도고시와 체부시를 거쳐 최종 선발이 귀족관료들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부시에서 확정되었으나 송 대에는 향시와 성시를 거친 후 황제가 전시를 통해 최종 합격자를 직접 결정하였다. 이는 송 대의 황제권이 관료권보다 우위에 서게 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내용임과 동시에 이부시의 소멸과 전시의 창안이라고 하는 당송간의 변화는 이 전시가 새로운 전통으로 되어 명?청 대까지 과거제도 운용상의 최종 결정단계로 계속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에서 제도적으로도 커다란 의미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 기록을 보면, 당대의 과거시험 중 엄밀한 의미에서 송 대 전시와 같은 시험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의 성격이나 실시주체를 볼 때 이들과 과거의 마지막 단계로서 황제가 직접 관시하도록 규정되어 있던 송 대 전시와는 그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당 대와 송 대 전시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송 대의 전시는 태조 개보 6년(973)에 시작되었다 할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의 제도로서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개보 8년이었다. 그리고 개보 8년에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전시는 32년 뒤인 진종 경덕 4년(1007)에는 “관시진사조제”가 제정됨으로써 조직과 운영을 위한 기본골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전시의 체계는 이후에도 시행과정 상에서의 계속적인 보완작업을 통해 보다 더 복잡하게 발전해 나아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2. 원의 관리 등용법원대 초기 새로운 정권이 설립되면서 과거제도가 즉각 시행되지는 않았다. 역대의 황제들도 과거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고려를 했으며 과거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황제에 따라, 중신의 성향에 따라, 그리고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원대의 과거는 시행과 중지를 반복했는데 최초로 시행된 과거는 1238년의 무술시이다. 거란족 유생이었던 야율초재는 원 태종 오고타이의 신임을 얻어 조정에서 요직에 중용되었다. 야율초재는 몽고족이 통치하던 한인 거주 지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적절한 관리선발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태종에게 유학으로 인재를 선발하자고 건의했다. 이때 시행되었던 과거가 원대 과거제도의 시작이었고 이를 무술시라고 부른다. 무술시는 송 대의 과거와 비교하면 엄격한 체계가 정비되지 않았다. 노시와 회시 두 종류뿐이었고 문의만 틀리지 않으면 선발이 되는 시험이었는데 이 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원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직을 얻은 사람도 요직과는 거리가 먼 지방의 의사관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술시는 원대라는 이민족 정권일, 23일, 26일에 걸쳐 3회 실시했다. 시험 과목은 민족에 따라 구분된다. 첫 시험일, 몽고인과 색목인은 경문 5조를, 한인과 남인은 경의 2문, 경의 1도를 시험 치른다. 두 번째 시험일, 몽고인과 색목인은 책 1도를, 한인과 남인은 고부와 조, 고, 장, 표에서 1도를 시험 치른다. 세 번째 시험일, 몽고인과 색목인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한인과 남인만 책 1도와 경사, 시무에서 선택하여 치른다. 몽고인과 색목인은 시험 내용도 비교적 쉽고 합격자 수에서도 혜택을 받았다. 규정에 따라 전국의 합격자 300명은 회시에 참가하는데 그 중 몽고인, 색목인, 남인, 한인은 각각 75명이었다. 남인은 호광, 강절, 강서, 하남의 4개 행성에서만 선발했고 몽고인과 색목인, 한인은 전국에서 선발했다.회시는 향시를 치른 다음 해의 2월 초에 시행했고 향시와 마찬가지로 총 3일간 실시했는데 2월 1일, 3일, 5일이었다. 과목은 향시와 기본적으로 동일했지만 더욱 엄격한 규정을 두었고 몽고인과 색목인, 한인과 남인을 구분하여 시행했다. 주목할 점은 과목별로 표준 학설을 규정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전을 시험 볼 때, , , , 의 사서는 주희의 에 근거하여 답안을 작성해야 했고 은 삼정과 주희의 학설을, 는 주희의 문인 채심의 학설을, 는 정이의 제자 호안국이 지은 전에 근거해야 했다. 에 고주소를 허용하는 것과 에 , , 삼전의 병용을 허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회시에 정주이학이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규정은 이전 시기의 과거제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규정이었다. 향시와 마찬가지로 몽고인, 색목인은 2일간 시험을 보고 한인, 남인은 3일간 시험을 봤는데 한인과 남인의 시험이 훨씬 어려웠다. 몽고인과 색목인이 한인과 남인의 시험에 참가하여 합격했다면 1등급을 올려서 관직을 수여하는 규정도 있었다. 회시의 합격자수는 100명으로 제한했는데 몽고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 각각 25명이었다.전시는 정시라고도 불렸으며 회시가 끝난 다음 달인 3월 7일에 한림국사원에서 거행적이었다. 지방기구인 성?로?부?주?현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다루가치의 경우도 몽골인이나 색목인이 담당하였다.)3. 명의 관리 등용법명은 과거시험의 형식과 내용에 엄격한 제한을 두는 성문형식인 팔고문 제도를 실행했다. 팔고문은 태조시기에 유기의 건의에 의해 8단계의 문장 구성형식을 규정한 것으로 이학가의 전주를 위주로 했다. 이는 과거시험 문장 구성에 있어서 응시자 자신의 학문이나 사상을 나타낼 수 있는 융통성이 제한되어 폐단이 컸다. 성조 영락제는 한림원학사 호광 등에게 명해 과거시험의 표준해석으로 『성리대전,『사서대전,『오경대전』을 편찬했다. 그리하여 문체가 고정되어 자유로운 학문연구와 사고를 제한함에 따라 지식인 계층의 사상이 경직되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강화되어 가는 전제주의적 교육정책에 지식인들이 적응하게 되었다.과거시험은 향시, 회시, 전시 등 3단계로 나누어 실시했다. 향시는 포정사가 주관해 3년에 한번 실시했는데 합격자를 거인이라 칭했다. 각 성의 거인들은 이듬해 수도에 가서 예부가 주관하는 성시에 응시했고, 성시 합격자들은 다시 황제가 주관하는 전시에 참가했다. 전시에서는 순위만 정할 뿐 탈락은 없었으며, 합격자는 갑과 출신이라 했으며, 통칭 진사라 불렀다.)명대의 과거는 객관적으로 공정한 방향으로 발전하였지만, 사상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그 주요한 특징은 몇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다.첫째, 과거는 반드시 학교에서 유래한다. 즉 명나라 초 과거가 완비되어 개방적 학교교육체계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과거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대개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과거 준비자의 문화를 높이고 통일시킨 유학적 소양은 제도를 보장하였다. 또한 과거응시자의 정식화와 개방정도의 제고도 전제조건이었다.둘째, 향시 하에서 명 중엽 이후 각 성, 직제 관학의 주도로 향시 예비고시에 해당하는 “과고”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과고는 과거의 가장 낮은 단계의 시험이었다. 이로 인해 송?원대의 3단계 고시제도는 4단계로 바뀌어 과거제도의 규범과 수준을 제갖는다.
    인문/어학| 2012.06.08| 8페이지| 1,000원| 조회(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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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의 역사는 무엇인가 를 읽고
    카의 『역사는 무엇인가?』를 읽고레오폴트 폰 랑케는 흔히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랑케는 역사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헤로도토스, 크세노폰, 투키디데스에도 자연히 관심을 가졌다. 특히 투키디데스에 대한 졸업논문을 썼던 만큼 투키디데스에 집중했던 랑케는 투키디데스의 비판적인 역사학적 방법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과학적인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과거 사실의 절대성과 객관성뿐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사료에서 탐구하고 추출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또한 과거 사실 그 자체를 위해, 사료의 저자와 연구자의 오류와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랑케는 역사를 과거 사실 그 자체를 발견하려고 하는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서 제시하고자 했다.하지만 카는 랑케를『역사는 무엇인가?』에서 랑케를 '실증주의자'라 표현하였다. 랑케의 'wie es eigentlich gewesen'을 사실의 객관성만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함으로써 역사인식이 기본적으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의미연관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카는 랑케와 같은 실증주의들을 본문내용에서 '그들은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부르짖는 실증주의자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사실숭배에 바쳤다. 그들은 사실들을 먼저 확인하라, 그리고 나서 그 사실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라고 말한다.’ 고 표현하고 있다.카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숭배에 반대의 의견을 드러내었다. 본문 내용을 더 살펴보면, ‘19세기의 사실에 대한 숭배는 문서에 대한 숭배에 의해서 완성되고 정당화되었다. 문서는 사실의 신전에 있는 계약의 궤였다. 경건한 역사가는 머리를 숙이고 문서에 다가가서 공손한 어조로 문서에 대해서 말했다. 만약 문서 가운데 있으면 그것은 곧 사실이었다.하지만 우리가 문서에 손을 댈 때, 그 문서들, 즉 법령, 조약, 대부 장부, 청서, 공식 서한, 개인적인 편지, 일기 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 그 어떤 문서도 그 문서의 필자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이상의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그 필자가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일어나야 한다든가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것, 혹은 다만 그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남이 알아주었으면 싶었던 것, 단지 자기가 생각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뿐인 것 이상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역사가가 문서를 연구하여 해독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사실이라는 것은 문서에 실려 있건 없건 역사가의 손으로 처리되어야만 비로소 역사가들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표현이 허용된다면, 역사가가 사실을 이용한다는 것이 곧 이 처리과정인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랑케가 말하는 ‘자아의 소거’를 이용한 사실추구는 카가 말하는 제한성에 의해 실현되지 않는 불가능한 것이다.카는 사료의 소실보다도 사료를 저술한 저자의 제한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사료는 사료제작자가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것을 기록하기도 한다는 점이다.카는 이것의 예로 슈트레제만이 남긴 자료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슈트레제만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 국제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로카르노 조약과 이에 따른 독일의 국제연맹가입을 성공시키는 등 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다. 여기서 서방이란 독일 기준으로 서쪽에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을 의미하고 서방정책이란 이들 국가에 대한 외교정책을 의미한다. 슈트레제만 사망 후 그의 비서 베른하르트는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6년의 문서를 추려 3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성공한 서방정책만을 중심으로 사료를 선별했고 중요하지 않는 사료는 제외시켰다. 그 후 한 영국 출판업자였던 서턴이 슈트레제만의 유산을 축약한 번역본을 출간하였는데, 이는 독일판을 3분의 1로 축약한 것으로 슈트레제만의 서방정책을 더욱더 중시했다. 말하자면 슈트레제만의 동방정책은 영문판 사료선집에서도 제외된 것이다. 후에 슈트레제만의 원사료를 본 학자들은 베른하르트와 서턴의 사료선집이 얼마나 지나치게 서방정책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는 지 깨닫게 되었다. 원사료가 남지 않았다면 슈트레제만의 동방정책 노력은 잊혀 졌을 것이고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여기서 카가 강조한 것은 ‘슈트레제만의 원사료’이다. 슈트레제만은 회담기록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주장은 늘 적절하고 설득력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다른 외교상대방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고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즉, 슈트레제만의 사료는 당시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가 일어났다고 믿었던 것만을,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원했던 것만을, 아니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료의 선별 과정은 베른하르트나 서턴이 아니라 슈트레제만 자신이 시작했던 것이다.카는 슈트레제만의 원사료뿐 아니라 법령, 조약, 대부 장부, 청서, 공식 서한, 개인적인 편지, 일기 등 다른 사료들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이 모든 사료들이 그 사료를 작성한 저자들이 생각한 것, 즉 그가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 그가 일어나야만 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것 , 혹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생각해주기를 원했던 것, 심지어 자신이 생각했다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한 것을 말해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카는 사료가 그 이상 말해줄 수 없다고 확실히 주장한다. 슈트레제만의 원사료에서 보는 것처럼, 과거에 대한 사실은 저자의 선택으로 항상 오염되어 있다.카는 덧붙여, ‘물론 사실과 문서는 역사가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나 문서를 신주 모시듯 해서는 안 된다. 사실이나 문서가 스스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주장을 마무리하고 있다.카를 비롯한 과학적 랑케에 대한 비판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역사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공감이 아닌 ‘상상적 이해’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눈으로는 과거를 조망할 수도 없고 과거에 대한 이해 얻을 수도 없다.’그러나 카가 랑케에 대해 주장했던 부분은 모두 옳다고 할 수 없다.첫째, 랑케는 카가 오인했다고 표현했다시피 실증주의자가 아니었다. 랑케는 실증주의자인 comte의 ‘사회가 일정한 법칙으로 움직인다.’ 라는 주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랑케는 사회의 법칙성이 아닌 경향성을 중시했고, 각 시대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역사의 개체성을 강조했다. 그 시대의 가치는 그 시대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다음 시대가 그 전보다 더 발전하거나 진보한 시대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의 개체성에 어긋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랑케에게 ‘실증적’이라는 표현은 맞지만 ‘실증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인문/어학| 2012.06.08| 3페이지| 1,000원| 조회(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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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학과 근대사상의 연결관계에 대하여
    실학과 근대사상의 연결관계실학사상은 한국사의 내재적 근대화 과정에 나타난 사상이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근대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란 인류가 중세봉건사회에서 탈피하여 현대와 유사한 생활형태를 이룩한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옥자 교수는, 근대사회의 특징으로 첫째, 인간중심주의의 추구, 둘째, 과학적 기술문화의 성취, 셋째,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채택, 넷째, 시민사회의 대두, 다섯째, 민족주의를 내건 국민국가의 형성을 들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여러 특징을 고려할 때, 한국사에서 근대의 기점이나 근대화의 성취에 대한 논의는 결론이 나지 못할 정도로 논의가 분분할수 밖에 없다.그러나 실학 사상이 근대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한다. 곧 실학은 근대사상을 배태한 싹이라고 볼 수 있다.실학사상에 나타난 근대사상이 정치사상에 끼친 영향을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1. 실학에 나타난 근대사상은 개화운동의 원류가 된다는 점이다.1876년 개항 이래 우리나라의 정치사상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위정척사의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개화사상이다. 대체로 개화사상을 주장하는 세력은 외래사상의 수용을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전통사상에서 탈피할 것을 주장했다. 개화사상이 외래사상의 수용을 주장한 이유는 개화사상의 원류가 근원적으로 실학의 근대사상에 있었기 때문이다.외래사상의 선진문화를 흡수, 소화하여 나라의 힘을 키우자는 주장은 16세기 말 실학사상이 대두됐을 때부터 계속돼 왔다. 실학사상이 19세기 중엽 한반도의 특수한 정치상황에 편승하여 하나의 변혁논리로 발화한 것이 개화사상이다. 이 두 사상의 연계성은 특히 사상과 인맥 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첫째,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계성을 사상 면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개화사상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1876년 개항 이후 개화운동이 여러 종류의 집단에 의해 주장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화사상의 내용은 대체로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민족 주체의식의 고취, 둘째, 이용후생과 무실역행의 방법론 표방, 셋째, 국제관계에 대한 안목의 확대, 넷째, 문화개방의 제창, 다섯째, 민중 참여범위의 확대, 여섯째, 상공의 장려 등이다.이러한 개화사상의 내용이 바로 실학사상의 내용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17세기 이후 지속돼 오던 실학사상이 1870년대의 특수한 정치상황에서 개화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개국이 강요돼 서구세력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서구세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래의 실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그 모습을 달리 하게 된 것이다.둘째,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관계를 인맥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기로 하자.개화운동의 선구자로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개화운동의 주역들을 지도하거나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박규수는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을 지도했으며 박규수가 죽은 후에는 유대치가 이들을 지도했다. 강위는 김옥균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와 같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의 주역들을 키우누 선구자들이 박규수, 강위, 유대치, 오경석 등이다. 특히 유대치는 김옥균 등에게 등을 해독해 주어 개화운동을 자극했다.이러한 개화운동의 선구자들은 실학 사상가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이고, 강위는 오경석과 더불어 실학사상가인 추사 김정희에게서 배운 사람이다. 이와 같은 인맥으로 보더라도 개화의 선구자들은 실학 사상가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 틀림없다. 개화사상은 정치권력 밖의 지식인들의 산발적인 정책건의가 아니라, 정치권력 주도층의 정책 목표로 추진된 하나의 실학사상인 것이다.2. 한국적 민권사상의 효시라는 점이다.두 번째로 실학에 나타난 근대사상이 후세에 끼친 영향으로는 민권사상을 들 수 있다.실학에서 말하는 근대성의 특징을 민권사상과 관련지어 볼 때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모든 개체는 저마다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민(民)개체도 군(君)개체도 모든 다른 개체와 마찬가지로 그 개체만이 가지는 고유한 기능이 있다. 둘째, 민(民)개체는 군(君)이나 신(臣)개체의 기능성도 민(民) 자신의 기능적 개체성과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있다. 셋째, 모든 개체는 상호 기능적 보완관계에 있다. 민(民)개체가 자기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하려면 다른 개체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실학사상에서 말하는 민권사상이 군왕이나 관료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이들과 평등한 관계에서 상호 보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한다는 논리에 밑받침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이러한 실학의 민권사상은 19세기 이후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정치적 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쳐 왔다. 동학혁명이나 3.1운동에 이르는 우리나라 근대기의 혁명운동에는 실학에서 나타난 이와 같은 근대적 민권사상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그것은 기존 질서를 인정하면서 대립이 아니라 공존의 관계에서 개혁을 추구하려는 데서 그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민중이 개혁을 추진하는 방법에 잘 드러난다. 집권층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 보완성, 그리고 존재상의 평등성 논리를 바탕으로 폭력이 아닌 타협과 건의의 형태로 개혁을 도모한 것이다. 동학혁명이나 3.1운동에서 보인 민권운동의 비폭력성, 무저항성의 근본원인도 이러한 실학의 근대적인 민권사상을 바탕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문/어학| 2012.06.08| 3페이지| 1,000원| 조회(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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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운동에 대하여
    서양현대사목차1. 신좌파2. 68운동이란?3. 68운동의 원인4. 68운동의 전개- 각국의 68운동5. 68운동의 성격6. 68운동의 영향별첨: 저항의 촉진(베트남전)1. 신좌파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전후의 피폐된 경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드골 대통령이 직접 강력한 대통령 중심 체제의 제 5공화국을 수립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GNP 성장률은 연평균 5%로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또한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 재건을 외치며, 외교 정책에서도 신중을 기하여 프랑스는 과거의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그러나 정국의 안정과 경제적인 발전 속에서 한편으로 국민들은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고, 과거와 같은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좌파 세력은 다시 연합을 도모하게 되었다.1960년대 들어서서 서구 산업 사회에 대한 불만을 계기로 구미와 일본의 학생들이 궐기하여, 격변속으로 빠져들었다.)당시 미국에서는 1964년 버클리 대학과 1968년 콜롬비아 대학을 거점으로 학생 운동이 일어났으며 서독에서는 SDS)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나 서독의 정치 사회 및 민중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프랑스 대학생들에게서 신좌파)적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1967년 가을로 볼 수 있다. 대학 교육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단이 되어, 그 세력이 68년 5월 혁명으로 연결되었다.주도자는 다니엘 콘벤디트라는 독일인이었고 혁명 세력은 학원을 점령하고 시가지로 나갔다. 또한 근로자들까지 합세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노동총동맹이 파업을 선포함으로서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 과격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신좌파란?1960년대를 들어서면서 중심국 내에서의 기성체제에 대한 불만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불만은 사회적 약자로부터 나왔는데 여성, 흑인, 제3세계 민중이 바로 그들이었고, 이들에 의해 68운동이 전개되게 되었다. 한편 기성체제에 통합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참여를 세대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왜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경험과 희생만을 내세우며 학생들이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기성세대들이 물질적인 것에만 치중하며 자본주의의 틀 속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1960년대의 새로운 세대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지적 자유라는 사실을 기성세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68세대가 주장한 소비사회와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반감은 문화적으로는 재즈와 로큰롤로, 특히 프랑스에서는 춤과 노래로 소일하는 예-예(Ye-Ye) 열풍)으로 나타났다.③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 : 프랑스의 정치 상황 역시 새로운 세대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1968년 당시 프랑스에서는 19558년에 제5공화국이 출범한 후 샤를 드골(1890~1970)이 10년째 정권을 잡고 있었다, 좌파 세력은 계속해서 약해졌으며 우파 세력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제4공화국이 집권한 14년 동안 스물네 차례의 내각 개편이 있었던 데 반해, 제5공화국은 1958년부터 1969년까지 내각 개편을 단 세 차례밖에 하지 않았다. 이는 드골 정권의 안정 국면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드골 정부의 카리스마적 중앙집권제와 의회 기능의 약화는 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왔다. 드골이 강조했던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관료 행정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일 처리를 가능하게 했지만 대중들은 자율성의 박탈을 느꼈다. 시위 당시의 ‘드골 10년, 지긋지긋하다’라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이, 권위를 내세운 드골 정부에 대한 반감은 68운동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1967년부터 실업 문제가 고개를 내밀었고 지역 간 불균형과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 역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1968년 초에는 1964년보다 실업자가 네 배나 증가했으며 그 중 절반이 25세 이하의 청년낭트에 있는 쉬드 아비아시옹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함께 공장 점거를 단행하였고 15일에는 르노-클레옹에서도 파업이 발생했다. 참가자는 1만 1천 명에 달했으며, 그 파급력은 매우 컸다.? 노동자의 연대와 분열5월 17일에 파업자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이제 노동자들은 노조의 지시를 받지 않고 스스로 파업을 선택했다. 철도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고, 5월 18일에는 우편배달이 정지됐다. 하지만 이날부터 노동총연맹, 프랑스민주노동연맹, 노동자의힘이 흐름을 이끌어 나갔다. 이들은 노동자와 학생들의 결합을 불신하고 있었다.공산당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통제 밖에 있던 좌익 운동가들을 경계했다. 조르주 마르셰가 무정부주의자 다니엘 콘 벤디트를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공산당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면서 사회당과 연대 전략을 고수하려고 했다. 이들은 14일부터 ‘자유 수호’를 위한 민중 시위에 참가했지만 이들에게는 좌파 간 협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노동총연맹 역시 좌익 운동가들의 모험주의적 태도를 비판했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은 좌파 연합을 위한 협상만이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리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학생과 노동자에게 그들의 통제 밑으로 들어올 것을 끊임없이 주장했다.5월 22일에 추방령이 내려진 다니엘 콘 벤디트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에 노동총연맹은 거부 의사를 밝혔고, 이에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의 분리는 명확해졌다. 노동총연맹은 독자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고 24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파리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파리와 리옹에서는 각각 사망자 한 명이 발생하였고 이어서 퐁피두는 의회에서 노조와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노동총연맹, 프랑스민주노종연맹, 노동자의힘은 협상을 받아들였다.5월 25일부터 퐁피두의 주재 아래 그르넬 협상)이 시작되었다. 27일 아침에 노동총연맹의 총비서 조르주 세기와 단독 협상을 마친 퐁피두는 정부와 경영자의 협상 안을 최종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 파업 중인 노동자들의 입장은 노조 지도부와 달 손실 역시 매우 컸다. 입영 대상자인 학생들은 병역 거부 운동을 전개했고 탈영병이 속출했다. 학생들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부당한 폭력에 항의했다. 미국 정부가 전쟁의 정당화를 위해 제시했던 문명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공식적 말과 베트남에서 벌인 실제 행동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의 권위와 전통 가치들에 대한 저항이 싹텄다.미국에서 운동의 첫 번째 시기는 히피들이 전개했다. 그들은 비폭력과 평화를 뜻하는 이른바 ‘플라워 무브먼트’를 전개했다. 학생들이 당시 히피들의 메카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버클리 대학에 최초로 운집한 일은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운동은 또한 점거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대학의 자유 언론을 위한 것이었다. 1964년 9월 버클리 대학에서 경찰이 인종평등회의에 소속된 학생을 체포하려고 하자 학생들은 자유 언론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태로 버클리 대학의 총장이 해임되었다. 1968년 1월 16일에는 사회 운동가 애비 호프먼과 비폭력 운동에 잠시 참여했던 제리 루빈이 국제청년단을 창설했으며, 이후 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항한 일종의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상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1968년 여름 민주당 전당 대회 동안 학생들은 경찰과 무력 충돌을 준비하는 동시에, 페가수스라는 이름의 돼지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자 했다. 1969년 8월 15일 뉴욕의 전원 도시 베델 평원에서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무대였다. 정치권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정치적 생명력을 잃고 대통령 후보 출마를 포기한다. 차기 대통령으로 닉슨이 당선되지만 그 역시 베트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결구 미국은 베트남에서 벌인 지지부진한 전투와 국내에서 들끓는 반전 운동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군대를 철수하고 만다.한편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자 그동안 전개해온 흑인 민권 운동의 비폭력 전략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킹 목사가 죽은 후 4비판을 의미했다.68운동은 강한 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권위주의를 자각한 이 세대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제3세계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자본가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런 맥락에서 당시 운동의 핵심 요소였다. 68운동은 확실히 반자본주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좌파의 색채가 강한 운동이었으나 구좌파의 생각처럼 학생들이 단순히 반자본주의라는 좌파 이데올로기를 신념 체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순간 혁명은 중단된다’, ‘내일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늘의 권태를 보상하지 못한다’ 같은 당시의 구호는 구좌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따라서 68운동의 세대들은 좌파의 저항 정신을 옹호했을 뿐 좌파의 권위적 이데올로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68운동은 이외에도 자연에 대한 인류 문명의 권위주위를 비판하고 핵무기와 환경 파괴에도 반대했다. 이 역시 강자에 대하 저항과 약자에 대한 보호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적자생존의 논리를 신봉하는 진화론적 권위주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해 이후 인종 차별 문제, 소수자와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커다란 사회적 기여를 했다.④ 욕망과 상상력의 해방: 68운동은 성 본능을 정치적 무기로 변형시켰다. 당시의 구호들은 성해방이 기존 사회의 권위를 파괴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처음으로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나타난다. 68운동의 구호인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혁명을 하게 된다’는 구호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거대하고 엄숙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기보다는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이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만국의 노동자여 즐겨라!’로 바뀌었다.68세대는 모든 구속과 터부에 저항하며 욕망과 상상력을 해방하고자 했다. 이것은 기성 질서가 강요한 금욕주의적 논리를 깨뜨리기 위함어졌다.
    인문/어학| 2012.06.08| 18페이지| 1,000원| 조회(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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