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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사의 경제와 정치
    남북한의 토지개혁당시 토지제도는 농업생산력이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와 조응하지 못해 현실성이 떨어지고, 지주계급의 약화와 농민과 자본계급의 힘의 강화라는 배경아래 토지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남, 북한의 토지개혁 문제의 목적은 동일하였으나, 그 방법은 달랐다.북한의 토지개혁은 대중장악을 위한 카드였으며 개혁의 대상은 지주와 부농이었으며 철저한 지주 타도 정책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으로 몰수의 대상은 토지를 5전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와 종교 단체, 그리고 그 외 일본제국주의자나 조선인 민족반역자 소유의 토지, 계속 소작 주는 토지, 지주의 농업용 가축, 농기구, 주택, 기타 일체의 건축물 등이었다. 또한 소작지와 연결된 일체의 부담과 부채를 면제하고,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로부터 차용한 부채도 일체 면제되었다. 농민소유의 소규모 산림을 제외한 산림 및 지주 소유의 관개시설의 국유화가 진행되었다.몰수된 토지는 고농, 토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경작권만 분배하고 처분권은 주지 않아 경작하는 농민만이 토지 소유가 가능했으며, 경작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이는 토지에 대한 매매, 소작, 저당이 불가능 하여, 완전한 토지소유가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 없어 농민은 토지에 결박되어 농촌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길이 닫히게 되어 후에 국가가 이를 회수하여 협동농장으로 이행 되었다.북한의 토지 개혁은 1946년 토지개혁법령을 발표하자마자 한달만에 속전속결로 해결되었으며, 위로부터 실시했으나, 지주의 저항이 거의 없었고, 비폭력, 평화적 개혁으로 직접적 생산자인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었다. 그러나 토지비옥도차이, 1인당 소유토지양의 불균등 등이 일어나, 토지분배의 균등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남한의 토지 개혁은 1949년 농지개혁법의 제정으로, 북한과 달리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을 채택하였다. 소작지와 3정보 이상의 자작지를 정부가 전부 몰수하여로 된 것은 지주와 부농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으며 상한지가가 평년작의 15할이라는 수준은 당시 지가수준에 비해 낮은 편이었고 실제 농민의 부담은 경감되었다.남한은 북한과 달리 토지를 분해함에 있어서 경작권은 물론이고 처분권도 제공했다. 이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의미하여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져 자본주의 발전의 길이 열린 것이다. 유상몰수, 유상분배로 인해 계급갈등이 최소화되었으며, 토지를 받은 농민은 현물로 갚기로 되어 있어 54년까지 상환을 원칙으로 하였다. 여기서 현금으로 갚음으로써 당시 인플레이션으로 농민에게 유리하였다. 농민들은 토지를 비교적 싼 가격에 사고, 토지의 배타적 소유권을 획득하여 자본주의가 확립되었다.남한은 농지개혁으로 인해 반봉건적 지주적 토지소유는 해체되고 농민의 토지소유가 확립되었으며 유상 몰수 유상 분배의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이었으며,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미군정 시기의 대한정책해방 후 1945년 9월 9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부 포고 제 1호에 의해서 대한민국에 미군정은 시작되었다. 먼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아베총독을 9월 11일 해임하고, 하위직 행정기구는 그대로 저부 운영하기로 하고 다음날 총독을 대신할 군정장관에 7사단장 아놀드 소장을 임명하고 총독부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12월부터는 미국인과 한국인의 양국장제를 실시하고, 1946년 가을부터 한국인 관리들이 각 부서에서 행정의 책임을 맡고 미군은 자문역으로 후퇴하게 되고, 1947년 2월 안재홍 민정장관이 취임하면서 5월 17일 군정청이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하게 된다.미군정 내에서 정책자문 역할을 수행한 한국인들 중에는 일본에 협조했던 인사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미군정은 한국 민주당 측 인사를 대거 기용하였다. 초기 군정의 한국인 충원이 주로 한민당 인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미군정과 한민당간의 결탁현상이 일어났다.미군정은 한민당 이 외의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좌익을 배제하고, 우익에 대한 묵시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1946년 9이승만 세력이 미국의 종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국무성은 군부의 미국이 궁극적으로 한국에 손을 떼야한다는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였으며, 이에 미국은 1947년 10월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고 결국 미국에 의해 제기된 탁치 안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이로 인해 미소협상의 최종안인 탁치 안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냉전이 한반도에 명시화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유엔 이관에 이은 독립국가의 수립이 미군철군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그 후 1948년 2월 26일 소총회는 유엔한국위원회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 지역에서 총선을 실행하자는 미국 안을 가결하였다. 이에 5 ? 10선거가 미군의 무장력에 의존한 강압적 분위기 아래서 이루어졌다.미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한 단독정부의 정통성을 제공해 주려고, 노력을 전개하였다. 제 3차 유엔총회가 열리기전부터 유엔회원국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마침내 1946년 12월 12일 총회는 미국의 주도아래 한국에 관한 결의문이 채택되어다. 이로써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역에 걸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결의하려고 시도 되었던 미국의 의도가 부분적으로 관철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단지 남한만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사실도 암시한 것이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미군정은 끝이 났다. 트루먼과 이승만은 물러나는 하지중장의 과업을 칭송하였지만, 미국공식목표인 민주적이고 독립된 통일 한국 건설에 실패하여 결국 미군정의 대한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한국 전쟁의 기원과 성격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당시에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은 세계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한반도는 결국 우익과 좌익으로 양분되어 남북의 이질적인 분단국가를 수립하게 되였다. 이에 남북한 모두 통일의 의지가 있었으나 남에는 이승만의 과격한 반공정책인 북진통일론이, 북에는 김일성의 국토 완전론이 주요 통일론으로 무력통일론이 부상하였다. 이는 라고 제의한다. 이는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오랜 대일 항쟁과 국공 내전으로 많이 지쳐있었고, 최강대국 미국과는 싸우기 힘든 상태였다.중국의 입장에서 전쟁은 소련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정쟁을 하지 않을 시에는 미국과 소련사이에서 실리를 취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으며 대만을 탈환하기 위해 미국세력과 싸워야 했으며, 이를 한반도를 무대로 싸우면 이득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결국 김일성 박헌영이 소련과 중국을 설득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적 급진주의와 낭만주이로 인해 한국 전쟁은 북한. 소련. 중국의 동상이몽 속에 구상부터 국제전쟁의 성격을 띠었다.이에 미국은 전쟁징후는 포착했으나 세계 2차 대전이 종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당시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대전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소련이 그런 무모한 수를 둘 것이라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은 발발했으며, 준비가 없었던 미국은 당황했다. 당시 한국의 주미대사 조영옥은 트루먼을 찾아가서 파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미국은 UN을 끌어들여서 미군이 아닌 UN군으로 참전하게 되어 그 결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전쟁으로 확대 되었다.전쟁이 나자마자 한, 미군은 계속해서 밀렸으나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의 대 성공으로 전선이 차단된 북한군은 무질서로 퇴각하여 거의 궤멸됐다. 이에 한국-UN군은 서울까지 빠른 속도로 진격하여 탈환하기에 이른다. 그런대 여기서 계속 진격해서 올라가야하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발생하였다. 이에 맥아더는 처음부터 올라갈 생각이었고, 트루먼은 미국은 전쟁피로가 누적되어 있고, 재정상태가 좋지 못해 원래의 목표인 원상회복에서 끝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대승으로 고무되어 북진을 승인하여 빠르게 북상하게 된다.이에 중국은 계속 진격을 강행할 시에는 군대를 투입할 것이라는 경고 메세지를 계속 통보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연합군이 술에 계속 후퇴하게 된다. 이에 트루먼과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에 영국 수상은 핵무기를 사용하면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며 만류하여 결국 핵무기 사용은 포기하게 된다. 계속 된 공방전이 이어지다가 1951년 봄에 서울을 탄환하고 38도선 위로 진격하게 되었으나 그 부근에서 전쟁은 고착화 된다. 이러한 상황이 이어지자 맥아더는 동아시아 전역에 전쟁을 확대하여 핵무기를 사용하고자 했으나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릿지웨이를 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릿지웨이가 전황을 전진 시켰으나 미군의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으며, 중국을 궤멸시키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하여 협상을 통한 종전을 결심하게 된다. 이에 전쟁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고, 결국 38도선 경계로 계속 되는 소모전이 종료된다.휴전협상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경계선 획정과 포로교환문제였는데, 먼저 경계선획정문제는 미국은 예전의 38선을, 중국은 현재 전선을 분계선으로 설정하고자 했는데, 이는 중국측의 제의가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포로교환문제는 미국 측의 자유송환의 원칙이 받아들여졌다.그러나 이승만은 반공포로가 석방되기 전까지 휴전협정을 거부해왔으며, 통일 정부를 지향했다. 그러나 중국이 미국의 휴전제의를 수락하였고, 이에 이승만은 현대식 군대의 증강에 미군의 비용 지원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결국 휴전협정은 체결되었다.이로써 끝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승만에게는 강력한 방위태세와 정치적 안정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반면 미국, 중국, 북한은 본전도 못 건지고 막대한 손해를 초래했다. 전쟁의 결과 분단의식은 내면화 되어 서로가 원수가 되고,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고,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제거하고 통일을 하는 것은 한반도의 이념대립의 최전선이라는 지정학적 이유와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결국 타협과 협상이 아니라면 통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한국 전쟁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박정희 경제개발의 성격이승만 정권은 미국 원조 경제체제 하에 있었다. 학생세력을
    인문/어학| 2014.07.07| 6페이지| 1,500원| 조회(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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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대사 정치,경제,사회,문화
    조선후기 산업발전과 사회·경제체제조선 후기에는 산업이 발전하고 유통경제가 성장한다. 우선 농업 생산의 변화부터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 전기의 벼농사는 볍씨를 뿌린 땅에서 그대로 키우는 직파법(直播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지주층의 토지 겸병과 지주제의 확대에 따라 그 소유지가 축소당한 일반 농민들은 농법의 개량을 통해서 그 활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이앙법으로 그 생산량을 늘린 것인데, 이는 수리 시설의 확충으로 가능한 변화였다. 또한 퇴비와 분뇨, 석회 등 시비법(施肥法)의 개발과 농기구의 개량과 더불어 일부 농민들은 논농사보다 인삼, 고추, 담배 등 상품 경작에 주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농업기술의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진전은 토지경영에도 변화를 가져와 종래의 특권적 관료·양반 지주에 대항해 비특권적 지주가 출현하게 되었다. 지주제의 변동은 지주권의 약화와 전호권(佃戶權)의 성장을 수반하였고 지대 수취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종래 분반타작(分半打作)을 원칙으로 하는 타조법(打租法)이 점차 도조법(賭租法)으로 바뀌어 갔고, 도조법은 또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생산물 지대에서 화폐지대로서의 금납제(金納制)로 바뀌어 갔다.상공업의 발달을 보자면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관청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상인인 공인(貢人)의 대두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어용적 성격이 강하였던 육의전(六矣廛)이 상권을 독점하고 있었으나 공인의 대두와 사상(私商)의 활동으로 점차 그 세력이 침식되었다. 또한 대외무역은 통제를 받는 공무역보다 두 나라 상인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인 후시(後市)가 성행하여 만상(灣商)과 송상(松商) 등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거부(巨富)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외무역과 국내 상업이 활기를 더해감에 따라 금속화폐가 요구되어 숙종 4년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한 이래 많은 화폐가 발행되어 17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수공업은 종래의 관영(官營) 수공업이 쇠퇴하고 사영(私營) 수공업이 성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관영 수공업의 쇠퇴는 부역제(賦役制)의 변동과 상품 화폐경제의 진전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원래 관영 수공업은 장인(匠人)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부역제로서 운영되었었다. 그러나 부역제의 전반적인 해이와 더불어 18세기 말에 정부가 공장안(工匠案)을 폐기함으로써 공장(工匠)들은 독립하여 사영수공업자로 전환되었다. 수공업 제품의 유통 및 수요 증가는 그 원료 생산을 촉진시켜 광업의 발달을 가져왔다.다음으로는 사회체제의 개편이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층과 농민층의 분해도 나타났다.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 등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은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붕괴시켜 나아갔다. 지배적인 사회집단인 양반층도 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집권양반층과 지방의 토호세력으로 전락된 토반(土班) 그리고 서울과 지방에서 이미 오래전 몰락한 잔반(殘班) 등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한편 토지 경영의 변화와 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는 신분상의 변화를 가속화시켜 권세 있는 일부 양반·관료층에 의한 민전(民田)의 겸영이 심해지고 지주층의 땅이 확대되어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많아진데다가 17·18세기를 통해 인구가 크게 증가함으로써 농민층의 분해를 더욱 촉진했다. 또한 서민지주가 성장하였으며 농업 노동자층도 출현하였다. 신분적으로 가장 낮은 처지에 있었던 노비계층도 그 신분 해방의 길이 넓어져감에 따라 그 신분 세습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부의 각급 기관은 예하의 노비를 사실상 부지할 수 없었으므로 오히려 이들을 양인으로 만들어 군포를 받는 것이 세수입을 늘리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통치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부패와 탐학이 늘고, 양란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국토가 황폐화 되자 민생이 피폐하고 국가 수취 체제도 파탄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경제체제의 개편을 감행하게 되는데, 전세제로 문란한 공법을 폐지하고 토지 1결당 4두를 징수하는 영정법을 실시한다. 또한 대동법을 실시하여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는데 하지만 이는 각종 부과세를 늘려 오히려 농민 생활의 궁핍을 가중시켰다. 군역제로는 영조 대에 균역법을 채택하여 1년에 군포를 1필 납부하도록 하였다.당쟁과 조선후기 정치조선왕조는 문신 양반이 주도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쟁이 유례없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시시한 사건을 가지고도 시비를 하였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특수한 권력 투쟁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이기면 정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당쟁이라는 용어는 붕당간의 정치적 대립과 투쟁을 나타낸다. 당쟁은 선조 대에 사림파들이 정치적 우세를 확보하면서 훈척신들의 정치적 비중이 쇠퇴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선조 8년경의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그것이었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의 계기가 된 것은 심의겸에 대한 태도였다. 동인은 심의겸을 척신으로 간주해 배격, 서인은 심의겸이 척신이기는 하지만 사림을 옹호했던 점에서 우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인은 이이를 중심으로 학통을 뚜렷이 하였다.그러나 이이 사망 이후 서인은 중앙정계에서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동인 정여립 모역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를 벌인다. 서인은 무고한 동인계 인사들을 장살하거나 귀양 보냈다. 이러한 서인에 대한 대응에서 동인은 온건한 남인, 강경한 북인으로 갈라진다. 남인은 이황, 북인은 조식 학파가 중심이었다. 왜란 발생 후 일본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던 북인이 선조대 후반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북인은 광해군 세자 책봉 즈음하여,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연히 대북이 실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광해군이 밀려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서인이 주도하는 가운데 일부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북인은 인조반정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현종 대에 붕당간의 갈등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예송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인조의 차자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종통상으로 어떻게 처우하는가라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효종을 위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는데, 효종이 왕통을 이은 것, 차자인 것 중 어떤 것을 중시할 것인가하는 것이 초점이었다. 서인과 남인의 의견이 갈렸으나, 결국 차자로 인정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이 때 효종의 비 장씨가 사망하자 이에 대한 자의대비 복제가 또한 논란이 되었다. 장자부로 인정하는 상복, 차자부로 인정하는 상복 두 가지가 또 논란이 된 것인데, 이때는 남인의 장자부로 인정하는 기년복이 채택되었다. 따라서 남인의 집권 명분이 확고히 되었다.숙종 초기 정국은 예송 승리 남인이 주도하였다. 숙종 대에는 정국이 급변하면서 집권당이 자주 바뀌었다. 숙종 6년 경신환국 때 남인이 실각하게 되는데 이 때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노론은 철저히 숭명의리를 고수하였고 소론은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실리를 중시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다시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남인은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된다. 숙종 대 후반의 정국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노론이 우세한 상태로 지속된다.이 때 영조가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붕당관계를 재편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붕당의 이해관계를 격렬히 내세우는 부류는 어느 쪽이든 제거하고 주장이 평온한 자들을 중용하여 의견대립을 줄이는 탕평정치를 구상했다. 그는 산림의 정치적 기능을 부정하고 이조전랑의 자천제를 폐지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신하들 사이에 탕평책에 대한 찬반을 두고 새로운 붕당이 만들어지는 등 개혁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정조대에 이르면 탕평론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그는 조정의 인재들을 대폭 교체시켰다. 척신과 환관을 제거하고 소론, 남인 노론 중의 준론에 해당하는 계열이 중용되었다.그리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규장각 설치, 장용영 창설, 수원성 축조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왕위가 어린 순조에게 물려지며 탕평의 시대는 끝이 난다.이 후 정치는 국왕의 외척에게 돌아가 세도정치로 귀결된다. 당시 세도가들에게는 유교적 사상, 윤리는 수단에 불과했다. 관리들은 수탈을 일삼고 농민들은 저항을 일으켜 혼란에 빠졌으며, 유교적 윤리를 갖추지 못한 세도가들은 외세의 물결에 대응을 전혀 강구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는 결국 엄청난 민족적 손실과 고통으로 이어졌다.조선후기 실학과 문화발달실학은 17, 18세기 조선후기에 전통 유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학문이자 사상이었다. 당시 전통 유학이었던 성리학은 현실의 모순을 개혁하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허구적 사상으로 여겨졌다. 실학은 이에 대응해 근대 지향적 사상으로 실용적 학문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실학은 ‘예학적 실학’, ‘양명학적 실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은 유학 해석에 있어서 주자설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조선 후기 사회모순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것이다.당시 조선은 농촌 사회가 몰락하고 상업과 수공업이 활기를 맞는다. 따라서 신분제에도 동요가 일어나게 되는데, 반면 정치는 노론 일당 체제로 귀결되며 체제유지 모색에 급급했다. 또한 대외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명에서 청으로의 교체가 일어나며. 고증학이 등장하고 서학이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 변화가 조선에도 차츰 유입되었다. 따라서 실학자들은 이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실증적 방법으로 현실 학문을 연구하게 된다.
    인문/어학| 2014.07.07| 4페이지| 1,000원| 조회(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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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와 이슬람 세계
    고려와 이슬람 세계, 그 만남의 역사目 次1. 머리말2. 고려 초 이슬람과의 교류1) 고려와 이슬람과의 교류 배경2) 고려와 이슬람과의 교류3. 고려 말 이슬람인의 귀화1) 이슬람인의 고려 귀화의 배경2)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3) 경주 설씨의 시조 설손(?遜)4. 고려 속에 녹아든 이슬람 문화5. 맺음말1. 머리말한국의 역사와 이슬람 문화. 그것은 어쩐지 어색하고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속속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수업시간에 처용가(處容歌)의 처용(處容)이 이슬람 인이 아니었는가 하는 언급을 들은 적이 있다. 전해내려 오는 처용의 외형적 특징이 한국인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검은 피부, 큰 눈, 우뚝한 코, 검은 털을 가진 처용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이슬람 인의 얼굴과 유사하다고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이슬람 인이 설화에 등장할 만큼 우리 사회에 깊숙이 존재하고 있었던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이렇듯 한국과 이슬람과의 교류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후기로 가면서 점차 상업과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는데 그에 따라 이슬람과의 교류도 더욱 확대되지 않았을까 한다. 이 시대를 이어 고려시대에서도 이슬람과의 만남은 지속, 확대되는데 이번 과제물에서 바로 이것을 주제로 다뤄볼까 한다.고려시대 초에는 신라시대에 그러하였듯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하지만 말에는 원나라를 통해 우리의 문화가 이슬람 문화와 마주하게 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앞으로 점차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이슬람 문화와 관련된 당대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고, 또 이와 관련한 인물에 대해 살펴보겠다. 또한 이슬람이 우리에게 남긴 문화의 예를 살핌으로써 그에 좀 더 쉽게 다가서보도록 노력하겠다.2. 고려 초 이슬람과의 교류1) 고려와 이슬람과의 교류 배경고려는 이슬람과의 교류에 관한 자료가 특별히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나, 그 태생부터가 개방적이고 대외적인 국가로 대외교류에 유리하였다. 나라를 건국한 태조 왕건부 있었다. 개경의 시전과 관영상점은 상품의 공급기지, 거래처 역할을 맡았고, 외국인 전용 숙소만 해도 10여곳이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 개경과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국제 무역항으로 떠올랐다.또한 이러한 고려의 정책에 더하여, 이슬람 세계에서는 압바스조 이슬람제국(751~1258)이 전성기를 맞음으로서 마침내 고려와 이슬람의 교류의 물꼬가 트이게 된다. 고려 초기에 해당했던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의 전성기는 이슬람문명이 세계를 향해 종횡무진으로 파급되어 급기야는 그 물결이 직·간접적으로 한반도까지 밀려왔던 시기이다.2) 고려와 이슬람과의 교류《고려사》를 살펴보면 “회회(回回)”, “대식국”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기사가 적지 않게 보인다. 이것은 이슬람 문화와 관련을 갖는 것으로, “회회”는 이슬람를 상징하고, 회회인은 이슬람교 신봉자인 무슬림, 대식국은 현재의 페르시아를 의미하므로 이슬람국이라고 보면 된다.그 중에서 고려 초의 이슬람과의 교류 기사를 살펴보겠다.° 대식국(지금의 페르샤)에서 열라자 등 1백명이 와서 토산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게 하였다. 또 그들이 돌아갈 때 금, 은, 옷감 등을 선물로 주었다.° 신사일에 대식국의 만하, 선나자 등 1백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대식국 상인 보나가 등의 와서 수은, 용치, 점성향, 몰약(沒藥, 방부제), 소목(蘇木: 외과용 약) 등 귀한 물품을 바치니 왕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한 뒤 돌아갈 때, 비단 옷을 선물하였다.고려 초기에 아랍상인들은 100여명씩 무리를 지어 진귀한 공물, 즉, 수은, 몰약, 소목과 같은 방물을 가지고 개경을 찾아 진상했다. 고려왕도 그들에게 선물을 주고 후대하는 등 호의를 베푼다.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이 시기에는 상업, 무역적인 교류가 많았고,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형태로 기록이 존재하지만 말엽에 오면 우리의 생활 깊숙이 이슬람 문화가 침투하는 것을 사료 형태로 살펴볼 수 있다. 이슬람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는 것이다.3. 고려 말 이슬람 뿔뿔히 흩어지고 고려와의 교류도 단절된다. 고려 중대에서 교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이유에 있다.하지만 고려 말에 이르면 다시금 그 교류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이슬람을 적극 수용한 원나라를 통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라 이슬람의 유입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이를 자세히 다루기 위해서는 고려후기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려 후기, 충렬왕이 살았던 시기는 몽골의 쿠빌라이가 원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다. 또한 이러한 원나라의 힘에 굴복한 고려는 그들의 명령을 따르는 제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려가 원의 공공연한 지배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원 황실과 고려 왕실간의 통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일찍이 고려왕들은 후비들을 왕실이나 귀족가문에서 맞아들였으나, 몽골과의 오랜 항쟁이 끝나고 나서 고려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을 해야 했다. 원이 고려왕을 부마로 삼고자 한 이유는 고려를 감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가 컸다. 이후 고려왕은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물론이고 원황실에 충성을 한다는 의미로 충(忠)자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충렬왕 대 이후에 고려로 온 원계인(元系人)에 관해 살펴보면,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주로 충렬왕 때 온 자들로 유배(流配), 결혼, 혹은 파견 근무자이며, 둘째는 개인적인 출세를 목적으로 귀화(歸化)해온 자이고, 셋째는 공민왕(恭愍王) 이후 원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망명해온 지식인, 관료, 기술자들이다.이 중 이슬람의 교류와 가장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첫 번째 경우이다. 원 제국에서 이슬람 인들은 몽골인에 버금가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제국의 내정은 물론 원정을 비롯한 대외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슬람이라는 이질 문명이 그 신봉자도 아닌, 그저 이용자일 뿐인 유목민의 등에 업혀 반입된 것이다. 원 조정에서 ‘문화 교수’의 특수한 입지를 점하고 있던 색목인 무슬림들은 원제국의 고려 경략과 간섭에 동참하여 사신·역관·근위병·겁령구 등 여러 가지 직분으로토지와 재물을 약탈함은 물론 원에 붙은 가문과 혼인을 맺고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무슬림들은 다소 부정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그렇다면 이슬람 문화를 지닌 그들이 고려에 귀화한 예를 살펴보기로 하겠다.2)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원에서 파견되어 온 무슬림의 경우로, 원나라 공주의 겁령구(怯怜口)를 통해 고려에 진출한 경우가 있었다는 언급을 앞에서 하였다. 이 대표적 인물이 ‘장순룡’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삼가’이다. 장순룡은 충렬왕의 몽골비인 제국대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다. 그는 원래 원나라에서도 고관을 지낼 만큼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고려에 파견된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며 높은 지위까지 올랐고 귀화하여 개성의 개풍군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고려인과 결혼하였다. 그가 바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덕수 장씨의 시조이다.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치스러운 모습, 왕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고려사 열전에도 ‘폐행’에 분류되어 있을 만큼 그러하였다. 하지만 상반되게끔 고려로부터는 지속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고 경제적인,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려에 처음 와서 충렬왕이 낭장으로 임명한 후 충렬왕 3년에 장군, 15년에 대장군, 18년에 부지밀직사사, 23년에 찬성사 세자이사가 되었고 그해 12월 검의참리직을 맡았다. 이렇듯 고려 내에서 이들의 역할을 실로 컸으며 점차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장악해나가게 된다.3) 경주 설씨의 시조 설손(?遜)설손의 첫 이름은 백료이다. 그는 회골(回?) 사람인데 대대로 설련하(?輦河)에서 살았으므로 설(?)을 자기의 성으로 삼았다. 그의 고조 악린첩목이(嶽璘帖穆爾) 때로부터 원나라에 귀순하여 대대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 설손은 원나라 순제때에 진사에 합격되어 한림 응봉 문자 선정원 단사관(翰林應奉文字宣政院斷事官)을 역임하고 단본당 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어 황태자에게 경서를 가르쳐 주었다. … 홍적이 대녕을 육박하자 원나라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에 망명하였는데, 공민왕과의 친분으로 정치적·경제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 후 고려에 귀화하여 이색과 이제현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다.그의 아들로는 설장수가 있었는데, 그의 활약 또한 고려사에도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이에 따라 고려 말까지 정계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후에 이성계를 도와 개국에 참가하는 등 고려 말 조선 초까지 활발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4. 고려 속에 녹아든 이슬람 문화이와 같이 고려 말에는 ‘준 몽골인’의 형태이긴 했지만 이슬람 문화가 고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오게 된다. 이슬람 인들이 고려사회에 귀화하여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며 정착한 만큼 이에 따라 그들이 고려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도 어느 정도 있지 않았나 추측해본다.사실상 그들이 고려에 귀화해 활약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여러 문화적 전통들은 우리 역사에 잔류한다. 지금부터는 바로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쌍화점유명한 고려가요인 쌍화점(雙花店)의 주인공은 ‘회회아비’라는 사람과 ‘고려여인’이다. 여기서 회회아비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슬람인이다. 그와 상화를 사러간 고려여인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 고려시기부터 지금 흔히 말하는 국제 연애, 혹은 결혼이 존재했다니 어쩐지 재미있게 느껴진다.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이질적인 두 문화, 그리고 인종과 모습이 다른 두 남녀의 사랑 뿐만이 아니라 또 있다.여기서의 ‘쌍화(雙花)’가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원래는 ‘상화(霜花)’로 무슬림 고유의 빵, 만두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 ‘쌍화점’도 원래 ‘상화점(霜花店)’으로 그 음식을 파는 가게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 사회 내에 이슬람 문화는 정말 속요에 등장할만큼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소주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보편적인 서민 술로 인기 있는 ‘소주’가 이슬람의 문화라는 것이다.흔히 우리나라 3대 토주의 하나로 꼽는 소주의 연원.
    인문/어학| 2014.07.07| 7페이지| 1,500원| 조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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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근대사의 인식
    한국 근대사를어떻게 인식할 것인가目 次1. 머리말2. 한국 근대사의 쟁점과 연구 동향3. 기존의 한국 근대사 인식과 한계4. 새로운 한국 근대사 인식과 실천5. 맺음말1. 머리말한국의 근대사는 현대에 이르는 지금까지도 한국사에서는 엎뒤락 뒤치락 논쟁을 펼치는 이른바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다.그 논쟁은 역사적 관점이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관에 따라, 팽팽한 대립을 이루기도 하지만, 근대라는 역사가 현대와 가장 가까운 역사이자 현재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에 따른 대립도 뜨겁다. 이렇게 역사를 자신의 입장,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입장, 즉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역사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왔던 또 배우고 있는 역사와 그 교육과정은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혹여 그것을 그대로 믿고 이해하여 체화되었다면, 각 개인에게 차곡차곡 쌓여온 역사적 사고와 인식들은 과연 오롯이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결국 내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이 과제물은 우선, 뜨거운 쟁점을 많이 안고 있는 한국 근대사에 대해 개괄하고, 모순과 이해관계로 엉킨 역사를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보고 이해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제시하겠다. 그 후, 기존의 역사 인식을 제시한 뒤 반성하고 비판할 것이며, 이 한계점에서 과연 새로운 역사 인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미흡한 소견을 제시하겠다.2. 한국 근대사의 쟁점과 연구동향한국 근대사의 시기는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이 주요한 기점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1876년의 개항을 근대의 기점으로 드는 설도 있는데, 이 경우는 내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외적으로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는 근거를 들고 있다. 또는 민란과 병인양요로 인해 반침략 반봉건의 시대적 과제가 제기되었다는 1860년대를 지적하기도 하며, 사회·제도적으로 큰 변화가 가해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또는 동학농민운동 전후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대사에서 현대사로 이어지는 기점은 1919년의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나 1945년의 독립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렇듯 한국 근대사는 개항과 외부의 침입, 자본주의의 유입, 민의 성장, 그리고 식민시대 등 혼란스러운 과도기적 시점에 놓여있었다. 외부적 변화도 컸지만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한다. 하지만 곧 제국주의적 세계물결 속 일제의 식민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민족적 비극과 고통의 시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노력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끝내 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현대사로 접어든다.이에 따라 식민주의로 지배되었던 역사연구에서 주체적인 다양한 역사연구가 진행된다. 그러나 개방적인, 거시적인, 비교사적인, 총체적인 연구경향보다는 닫혀있는, 미시적인, 국수적인, 개별적인 분위기 또한 없지 않았다. 또한 학문적 동지로서 개방된 연구경향보다는 학연과 스승들의 벽에 갇혀있는 듯한 연구 동향을 보인다.그 연구동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개항기에 대한 연구는 일제하 일본 관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들은 정체성론을 내세우며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성장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이다.이러한 일본 주장에 대해 60년대 이후 한국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의 극복으로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켰고, 정체성론을 부정하며 내재적 발전론을 내세운다. 이에 따라 개화운동, 임오군란, 위정척사운동,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한국의 근대화와 관련해 서구적 근대화의 당위성에 바탕을 두고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개화파가 연구되었으며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이어서 외세에 대항한 위정척사운동 또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80년대에 들면 민중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개화파, 독립협회, 애국 계몽운동이 비판받고 민중운동 의병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하지만 90년대에 이르면 그러한 추세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며,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근대의 기점, 근대성에 대한 인식들이 등장하며 그에 따른 연구가 다방면으로 진행된다.한국 근대사는 현대, 그리고 현재와 가깝게 연결 지어진다는 특징 때문에 자신이 처한 입장과 이해관계에 유리한 쪽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경향을 떨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대사는 어느 분야보다도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경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근대사의 과도기적 성격 속에 실제 존재했던 각종 모순들과 그 때문에 현재에도 이어지는 그 모순적 사고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절실한 것이다.3. 기존의 한국 근대사 인식과 한계우선 우리가 배워온 역사는 왕조중심의 역사, 즉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의 역사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즉 다수의 민중을 배제한 부분적인 역사를 배워온 것이다. 이는 지극히 지배 엘리트적 역사연구였다고 하겠다. 부분을 보더라도 전체 속에서 봐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인 것이다. 다수의 민중의 모습은 우리 역사 속에 현저히 축소되어 있고, 그들이 사회적 모순에 대한한 역사들도 왜곡되고 은폐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관점으로 서술되어 온 역사는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진정한 삶의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체를 소수의 지배자들에 둘 것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으로 두어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민중이다. 지배계층에게 집중 되어 간과해온 민중의 역할을 다시금 인식하려 노력해야할 것이다. 특히 민중의 역할의 두드러지는 근대사에서, 지배계층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민중을 간과하는 인식은 정말이지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또한 한국 근대사 연구는 지금까지 근대화의 관점, 즉 서양 우위적 관점에서 연구되어 온 경향이 있다. 서양이 근대화에 성공한 것을 모티브로 삼아 그 성공 요인들과 과정을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의 태동’이라는 관점으로 찾아내어 ‘한국 또한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방식과 한국 근대화의 모색이 과연 옳은 것일까. ‘강자가 정의다.’라는 상대주의적 철학 용어가 떠오른다. 강자가 기준이 되고 모법답안이며, 그렇지 않으면 자체적으로는 성장할 수 없는 미숙한 존재라는 것. 이것은 누가보아도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힘의 논리에 따른 억압적 사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놀랍게도 이러한 의식이 팽배하다. 그리고 그 힘의 논리에 편입하려는,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도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다.4. 새로운 한국 근대사 인식과 실천앞에서 기존의 역사인식, 즉 크게 지배계층 중심적 역사인식, 또한 서구 중심적 역사인식을 살펴보고 비판하였다. 이를 토대로 새로운 한국 근대사 인식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왕조 중심의 역사는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사료 또한 많고 접근하기도 쉬우며 체계화하기에도 용이해 선호될 것이다. 받아들여지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왕조, 즉 지배계층 또한 민중이 만들어낸 것이고, 민중이 없다면 그 또한 의미가 없다. 민중이 없는 역사는 발전도 나아감도 없을 것이다. 지배계층은 모순을 갖고 있고, 점점 더 사회를 모순화 시키기 쉽도록 구조화되어있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민중이며, 따라서 민중을 ‘모순의 담지자’이며 ‘역사를 바꿔가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역사에서는 민중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는 왜 간과되는 것일까.과거 전 시대에 걸쳐 사회적 모순에 맞닿아 있는 민중들이 모순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한 역사를 여기저기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근대사에서는 그 의지가 더욱 특별하다.조선 말기는 중세봉건체제의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으로 민족적 모순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모순 속에 당시 농민들은 모순의 담지자로서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물론 처음부터 농민들이 모순의 담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순이 축적되어 그들의 삶에 침투되기 시작하자 농민 스스로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한 노력의 최대점인 갑오농민전쟁은 농민이 사회적 모순의 담지자로서 동학과 사회개혁으로서의 실학사상이 하나로 결합되면서 변혁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의 움직임에 조선 조정은 난이라 규정하여 외세까지 끌어들여 진압하였으며, 결국 체제유지에 급급하다가 결국 외세에 국권을 빼앗기게 되는 비극적인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조선말기의 지배계층은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체제유지에만 신경이 기울어져 있었으나, 이에 비해 농민들은 모순의 담지자로서 농민 봉기를 통해 모순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이처럼 민중의 역할을 조명함으로써 간과되었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왕조사적 인식에서 탈피하여 민중의 역사를 더욱 연구하고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새로운 인식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다음으로는 서구 중심적 발전이론이다. 서양의 산업화의 길을 답습할 경우만 공업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근대화론'은 그러한 공업화의 시도가 다른 지역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유독 동아시아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의 성공은 서구식 공업화의 답습이라는 요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동아시아 고유의 역사적 특질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는 서구 중심적 발전이론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어학| 2014.07.07| 5페이지| 2,500원| 조회(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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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될 수 없는 고통,하느님의 구원은 가능한 것일까.-영화 ‘밀양’을 통해 본 구원의 의미目 次1. 머리말2. 영화 의 줄거리3. 종교를 통한 인간의 고통 극복1) 종교의 발현과 ‘구원’의 의미2) ‘구원’의 한계점4. 영화 이 주는 ‘구원’의 의미5. 맺음말1. 머리말‘종교사회학’이라는 넓은 범주에서 나는 어떤 주제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가 한동안 고민이 많았다. 책도 뒤적여 보고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으나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사실 나는 평소 종교를 믿어온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종교를 접하며 미간을 찌푸려온 일들이 더 많았다. 지나친 선교활동, 자기만 옳다는 배타성, 그리고 이해관계에 휘말려 속물적인 이익집단처럼만 보이던 종교. 따라서 여지껏 종교를 부정적만 바라봐왔던 것도 사실이다. 종교와 관련한 주제 선정이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그러던 중 주말의 무료함에 영화를 검색하다 우연히 이창동 감동의 영화 ‘밀양’을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이것을 과제 주제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 영화는 생각할 거리가 무척이나 많았다.하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주인공이 겪는 고통의 과정,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하지만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모습에 주목하여 ‘인간은 왜 종교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하는가, 그리고 그 구원이라는 것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과제를 작성해 볼까 한다.2. 영화 의 줄거리주인공은 평범한 여자 ‘신애’이다. 하지만 불행하다. 그녀는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에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온다. 내려가는 길에 우연히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카센터를 운영하는 종찬과 인연을 갖게 되고, 종찬은 신애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 주위를 맴돈다. 신애는 조그만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밀양에 정착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업신 당하지 않으려 소위 ‘있는 척’으로 여기저기 땅을 보러 다니는 둥 없는 재산을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 되어 아들이 다니던 학원 원장에게 아이를 유괴살인 당한다.이로써 밀양에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했던 신애는 깊은 절망과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를 믿던 약국 아주머니를 통해 접하게 된 기독교 신앙으로써 신애는 이 고통과 아픔을 극복하려 한다. 어느덧 신애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독실한 신앙심을 갖게 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스스로 용서하기로 마음 먹는다.하지만 찾아간 교도소에서 살인자가 누구보다도 평온한 표정으로 이미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았으며 구원을 얻었다고 말함으로써 신애는 더욱 깊은 절망과 참담함을 맞는다. 내 아들을 죽인 자를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용서 했다니, 그 배신감과 참담함에 신애는 몸부림친다. 그녀는 도둑질을 하고, 목사의 설교에 ‘거짓말이야.’를 외쳐대는 노래를 틀며, 교회 사람을 성적으로 유혹하는 등 하늘에 강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망가질 뿐이다. 결국 심한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되고 손목을 긋고 자살기도를 하는 등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치료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온다. 종찬은 변함없이 그녀의 옆을 지킨다.영화 은 이렇게 세 가지 국면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와 정착하려는 시기, 두 번째, 어린 아들을 잃고 깊은 고통을 얻지만, 종교의 힘으로 평온을 얻게 되는 시기, 세 번째, 살인자의 구원을 받은 모습을 본 후, 깊은 절망감을 얻고 종교에 강하게 저항하는 시기이다.이번 과제물에서는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넘어가는 부분을 주목해서 인간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지워지지 않는 고통에서 종교는 어떠한 역할하며, 그 역할은 왜 깨어지고 인간은 파괴로 치닫게 되고 마는가를 살펴보겠다.3. 종교를 통한 인간의 고통 극복 의미1) 종교의 발현과 ‘구원’의 의미‘구원’이라는 것을 살펴보기 전에, 종교는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종교사회학 수업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혼돈, 즉 ‘카오스’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질서를 추구하며, 그 질서 안에 존재하기를 바라고 그 안에서 안정을 얻는다. 이 질서라는 것은 복수의 개념과 비슷한 것인데, 동그라미가 있는데, 한 쪽 면이 찌그러지면 반대쪽이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것처럼, 일정함을 유지하는 것이고, 즉 충격이 있으면 그 만큼의 회복이 있어야함을 의미한다.인간들은 이처럼 질서, 즉 코스모스를 추구하려는 본성이 있는데, ‘인간의 삶은 과연 그러한가?’ 가 바로 문제이다. 인간의 삶을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모순, 즉 지상에서 해결 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바로 ‘죽음’같은 것이다. 죽음이라는 모순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으며, 인간의 삶에서 모든 것들이 정지하고 마는, 소멸하고 마는 가장 극단적인 모순이다. 지상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로 ‘천상의 세계’가 등장한다. 지상의 세계를 넘어 천상의 세계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화의 창조, 종교의 탄생과 직결된다.하지만 인간의 모순은 ‘극복’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갖는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며, 상실의 상태는 똑같이 유지된다. 우리가 얻는 것은 ‘위안’이다. 그러하다고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위안하고 공포감을 해소하는 것이다.즉 종교는 공포스러운 모순의 세상 속에서 인간들에게 위안감과 일정 해소감을 제공하며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는 오랜 시간을 지속하고 거쳐 오며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왔다.현대의 종교는 무수히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많은 개인적, 사회적 순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시간을 거쳐 온 만큼 세속화되기도 하고 이해관계에 얽혀 왜곡된 형태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종교의 발현, 그 기능은 여전히 종교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측면에서의 오늘날 종교를 살펴보겠다.힘들고 아픈 일이 있을 때 의지하듯 교회를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섭리나, 모든 이가 겪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삶의 깊은 고통, 수많은 반복된 모순들 앞에서 우리는 ‘하늘이시여. 내가 무슨 잘 못을 했다고 이런 시련을 주나요.’ 외치기도 한다. 설교하는 자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은 그 뜻을 향해 한없이 기도한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종교에 우리에게 주는 모순의 위안, 해소는 종교의 발현과 함께 여전히 우리의 삶 깊숙이 녹아있는 것이다.기독교에서는 이를 ‘구원’이라고 한다.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이라는 일반적인 뜻을 넘어 ‘하느님이 죽음과 고통에서 인간을 구해낸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일 것이다. 기원을 살펴보면 종교며 신은 혼돈, 무질서를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나, 현재 인간은 그 신에 의해 ‘구원받다’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평화와 안정은 여전히 고통에 휩싸인 인간이 얻는 것이다.‘밀양’에서 주인공 ‘신애’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후 깊은 절망에 빠져있을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약국 아주머니가 항상 말했던 그 하느님을 찾아간다. 그 아주머니는 ‘아픈 영혼, 상처받은 영혼에게는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아이를 잃기 전엔 흘려들었던 말들이었다. 신이 어디있냐고, 심드렁하고 무심하던 신애가 교회를 찾은 것이다. 신애는 교회를 찾아 기도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마침내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며, 마침내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까지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2) ‘구원’의 한계점앞에서 살펴본 ‘구원’, 즉 위안의 종교는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영화에서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이 마음이 온전하다고 믿기에는 신애는 사실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연애를 하듯 가슴이 뛰고 설레는 일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집에 돌아오면 식탁에 차리지도 않고 싱크대에 서서 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아들이 그리워 눈물 흘리고, 살인자의 딸이 사내아이들에게 맞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리는 등 내면에는 여전히 고통과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준다.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신앙을 통해 극복하고 감춰 보려 해도 그러기엔 너무나 가혹한 고통이 주어졌고, 그를 감내하며 살아가기엔 인간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마침내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하러 가지만, 이미 하나님을 통해 구원을 받고 용서를 받았다며 평온한 미소를 짓는 살인자를 신애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신애는 돌변한다. 영화가 끝나도록 하늘을 향해 강력하게 저항하고 몸부림친다.그토록 소중했던 ‘구원’은 어디로 간 것일까. 남편의 죽음, 잇따른 아이의 죽음이 신애에게는 끝없는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구원을 믿었고 신의 앞에 앉았다. 하지만 평온한 살인자의 구원과 용서의 고백에 신애는 하느님, 즉 신의 정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을 믿고 살인자를 용서하려고 마음까지 먹은 자신에게 신은 ‘살인자를 먼저 용서하는’ 배신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순간, 신애의 현실의 고통과 상처가 신앙적 믿음을 비집고 나와 짓누르게 되고 만 것이다.왜였을까. 신애가 믿은 종교는 지극히 위로적인, 해소적인 기능에 의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신애가 겪은 현실의 모순과 상처는 도무지 지상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위안을 얻기 위해 찾은 종교가 신애의 마음에 안정을 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덮여있는 상처와 고통이 언제고 드러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앙의 힘으로 누르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인간적 고통, 실존적인 인간의 문제인 것이었다.
    인문/어학| 2014.07.07| 6페이지| 3,000원| 조회(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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