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 1853.3.30 ~ 1890. 7.30 )태양의 화가 , 그의 삶 . 어린 시절 (1853~1869) 빈센트 반 고흐는 1853 년 3 월 30 일 , 네덜란드 남부의 노르트브 라반트 주에 있는 브레다와 인접한 쥔더르트에서 출생하였다 . 아버지 는 개신교 ( 네덜란드 개혁교회 , Dutch Reformed Church) 목사 인 테오도뤼스 반 고흐이며 , 어머니는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 ( 1819~1906) 이다 . 고흐는 이 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 안나는 1 년 전 같은 날 빈센트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빈센트라고 지어 주었다 . 또 , 반 고흐는 그의 할아버지인 빈센트 반 고흐 (1789~1874) 와 이름을 같이했다 . 할아버지 역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 그의 집안은 종교적 활동과 미술추구했다 . 1855 년에는 여동생 안나 ( Anna) 가 태어났다 . 그리고 반 고흐가 태어난 지 4 년 후 , 그의 아버지의 아름을 딴 동생 테오가 1857 년 5 월 1 일에 태어났다 . 이어서 여동생 엘리자베스 ( Elizabeth) 와 빌헤미나 ( Wilhelmien), 막내 남동생 코르넬리스 ( Cornelius) 가 태어났다 . 반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였으며 ,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 1860 년에 그는 200 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준데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다 .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 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기까지 3 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 1864 년에는 32 km 떨어진 학교에 다녔는데 , 그는 가족을 집에 놔두고 떨어져 있는 것을 싫어했고 ,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회상하곤 했다 . 1866 년 9 월 15 일부터 1868 년 3 월까지 그는 틸뷔르흐에 위치한 제 2 빌렘 칼리지에 다녔다 . 빈센트 반 고흐는 자묘사되어 있다 . 테오는 빈센트의 삶을 통틀어서 경제 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 1873 년에 그의 회사는 그를 런던으로 , 다음에는 파리로 발령했다 . 그는 점점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 1876 년에 구필은 동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는데 , 이는 고흐가 가게에서 영업활동을 할때 , 손님들과 그림에 대한 관점차이로 언쟁을 자주 벌였기 때문이었다 . 그는 잉글랜드 켄트 주의 감리교학교 램스게이트에서 견습교사가 된 다음 1877 년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 보리나주 1878 년에 신학교를 그만둔 그는 보리나주로 알려진 벨기에의 가난한 광산촌에서 평신도 설교자가 되었다 . 광산에서 설교활동을 하던 고흐는 고용주들의 착취를 받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대다수 노동자들을 매우 걱정했다 . 결국 그는 6 개월 후에 해고되었고 보수 없이 일을 계속 했다 . 이 기간 동안 그는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 1880 년에 , 빈센트는 그의 동생 테오의 제안을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짧은 기간 동안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안톤 모브로부터 그림 수업을 받았었다 . 비록 빈센트와 안톤은 곧 예술적인 관점의 차이로 헤어졌지만 , 헤이그 미술 학교의 영향은 그가 빛을 다루는 방식과 그의 붓 자국의 산만함에서 빈센트의 작품에 눈에 띄게 남아 있다 . 그러나 어두운 색조를 선호하는 그의 색채 사용에서는 그의 스승과 차이를 두었다 .1881 년 ~ 1890 년 그가 예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1880~90 년의 10 년뿐이었고 , 처음 4 년 동안은 기법을 익히면서 오로지 데생과 수채화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다 . 먼저 브뤼셀 아카데미에 데생을 공부하러 갔다가 1881 년 네덜란드 에텐에 있는 아버지의 목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자연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 반 고흐는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했지만 , 곧 독학의 어려움을 느끼고 좀더 경험이 많은 예술가의 지도를 받고자 했다 . 1881 년말 그는 헤이그에 정착하여 네덜란드 풍경화가 안톤 모베렸는데 , 이 주제들은 농부의 일상생활과 그들이 견디는 고난 ,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들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 프랑스 탄광지역을 다룬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 제르미날 Germinal〉(1885) 은 고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 그의 많은 그림 , 예를 들면 〈 베짜는 사람들 Weavers〉 과 〈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은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 점차 그는 뇌넨에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림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인식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 할스를 연구하면서 , 전통적인 끝손질기법이 시각적 인상의 참신함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고 베로네세와 들라크루아로부터는 색채 자체가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것을 배웠다 . 그뒤 루벤스에 열중하게 되어 ,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안트웨르펜으로 갑자기 떠났다 . 루벤스의 단순한 표현수단 , 솔직한 표현방법 , 색채들을 결합하여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 등은 고흐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 같은 시기에 고흐는 일본 판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발견했다 . 전통적 아카데미 화풍의 원칙에 따르기를 거부했던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던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서 비난받기 일쑤였고 , 3 개월 뒤 1886 년에 느닷없이 안트웨르펜을 떠나 파리에 있는 동생 테오에게 갔다 . 아직 습작에 전념하고 있던 반 고흐는 파리에서 툴루즈 로트레크와 폴 고갱 등 근대 미술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을 만났다 . 그는 이들을 통하여 당시 프랑스 회화가 이룩한 발전에 눈을 떴다 . 또한 테오는 호우필 화랑에 있는 인상파 그림들을 그에게 보여주었고 카미유 피사로와 조르주 쇠라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그에게 소개했다 . 이 무렵에는 고흐도 인상파의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 1886 년 봄부터 1888 년 2 월까지 파리에서 화법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을 창조해냈다 . 몽마르트르를 그린 초기 작품에 완전한 효과 ' 에 열중해 있었고 , 결국 1888 년 2 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 그후 12 개월 동안 ( 첫번째 전성기 ) 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 마을과 그 주변풍경 , 자화상 ,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 집의 안팎 , 해바라기 연작 , 〈 별이 빛나는 밤 〉 등이다 .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 남부 인상파 화가들 ' 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 노란 집 ' 1 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 1888 년 10 월 이곳에 온 고갱과 2 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 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 그리고 2 주일 뒤에 ' 노란 집 ' 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 과 몇 점의 정물화 및he Asylum〉·〈 삼나무 Cypresses〉·〈 올리브 나무 Olive Trees〉·〈 알피유 가족 Les Alpilles〉, 의사들의 초상화 , 렘브란트 · 들라크루아 · 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 이 시기 (1889~90) 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 좀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 ( 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 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 동생 테오와 북부지방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1890 년 5 월 파리에 도착했다 . 나흘 뒤 , 호메오파시 ( 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 가셰가 사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 4 년 전 뇌넨을 떠난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 옥수수밭 , 강이 흐르는 골짜기 , 농부들의 오두막 , 교회 ,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 화풍도 달라졌다 . 북부의 햇빛 속에서 ,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