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립식펀드와 펀드의 시작과 목 명 : 담당교수님 : 공 학 부 : 학 번 : 이 름 :목 차펀드의 개념과 펀드의 종류31위험성이 적은 적립식펀드32적립식 펀드의 장점33펀드의 가입방법과 CMA통장34펀드의 수수료란?35펀드통장의 보는 방법과 수익률계산36펀드의 개념과 펀드의 종류펀드와 적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위험성이고, 위험성을 피하여 펀드투자를 하는 방법에 관하여 알아보자. ※ 개인이 운영(주식), 타인이 운영(펀드)로 간단히 해석할 수 있다. 펀드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다. 투자하는 도시에 따라서 투자하는 방법과 종류 운용하는 회사 등 다양한 상품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목표와 자신의 투자할 방향을 생각해보자. 1. 매달 적금형태로 투자하는 방법(적립형펀드) 2. 목돈을 한번에 투자 하는 방법(선취형펀드) 부가설명 1.위험성이 적은 적립식펀드매월 일정금액으로 주식형 및 채권형 펀드에 투자함으로써, 주가 상승 시에는 추가이익을 추구하고 주가 하락 시에는 꾸준히 평균 매입단가를 낮추어가는 형태의 투자방식입니다. 즉 적립식펀드는 적금과 마찬가지로 목돈을 불려가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투자를 할 수 있지만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주식시장에서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에 매월 적금형태로 투자하게 되는 적립식 펀드 투자는 적절한 매매타이밍을 잡기 어려운 개인투자자들에게 가장 적합한 투자방식으로 이미 금융선진국인 미국, 영국 등에서는 보편화된 투자방식입니다.적립식 펀드의 장점과감한 투자를 원하시는 분은 NO! 안전한 투자를 원하시는 분은 YES! ※ 적립식 펀드는 주식의 1주의 가격이 1,000원일 경우 매달 10만원의 투자를 하면, 100주를 구입할 수 있고, 주식의 가격이 오르면 적게 사게 되고 주식의 가격이 떨어지면 많이 사게 되기 때문에 항상 수익률은 일정하다고 보면 됩니다. 주식의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투자를 하여야 이득을 볼 수 있으며, 단기투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보조설명 1.) 기간은 3~5년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이 기간 동안이 평균비용 최대효과를 볼 수 있는 최적의 기간) 환매 시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 주식의 가격에 상관없이 수익률이 일정하지만, 최종적으로 환매를 할 경우 최종적인 주식가격에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수에 따라 수익률 이 결정됨으로 환매시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적립식펀드 투자 3계명펀드의 가입방법과 CMA통장펀드 자체만 이용하시는 분들은 은행에서 이용하시는 것이 설명과 투자할 수 있는 상품의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기 때문에 은행에서 하시는 것이 편하고 20대의 경우 직장인과 또한 은행에 갈 시간이 없는 분들은 CAM 계좌를 이용하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부가설명 2. CMA통장의 개설방법은 각종 3금융권 즉 증권회사에 가서 은행과 동일한 방법을 만들 수 있다.적립식펀드 가입방법?펀드의 수수료란?펀드는 1~2% 안팎의 수수료를 내야 합니다. 이는 매년 꼬박꼬박 내는 것인데, 만기 때 한꺼번에 내지는 않고, 매일 매일 알게 모르게 뜯어 가는 구조입니다.장기로 가입하는 경우 그 수수료 부담도 만만찮을 수 있습니다. 적립식펀드는 채권형 펀드에서 해외펀드까지 다양한 펀드로 구성되어 있 어 펀드 별로 수수료도 다양한데 우리나라는 평균적으로 2.5~3%정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펀드에 비해서도 1% 가량 바가지 수수료를 부과하고 있다는 비 난을 면키 어렵습니다. 부가설명 3.적립식 펀드 수수료는?펀드통장의 보는 방법과 수익률계산적립식 펀드 통장보는법주식의 단위가 1주 2주 할 때 '주'이듯이 펀드의 단위는 '좌'다. 총 잔고좌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총 펀드의 수다. 기준가격은 펀드를 사고 팔 때 쓰이는 가격으로서 1000좌당 얼마 형식으로 표시한다. 펀드는 설정된 후 1년에 한번씩 그 동안 얼마나 이익이 났는지 결산하고 이익금을 투자자에게 돌려준다. 이때 이익금은 별도의 요구가 없는 한 현금으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펀드를 다시 사서 재투자하게 된다. 부가설명 4. 펀드 통장을 보고 수익률 계산 하기 1. 투자평가금액= 총 잔고좌수×(기준가격÷1000) 2. 투자수익률= (최종 투자평가금액-투자원금)÷투자원금×100{nameOfApplication=Show}
유교가 한국문화에 미친 영향(유교의 정의,기원 유교의 시대별 관찰 및 각 분야별 영향집중조사)(삼국시대 당시의 지도와 지명)- 목 차 -1. 유교의 정의와 기원(1) 유교의 정의(2) 유교의 기원2. 유교의 시대별 전개과정(1) 삼국시대(2) 고려시대(3) 조선전기(4) 조선후기3. 유교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1) 정치에 끼친 유교의 영향(2) 학문에 끼친 유교의 영향(3) 경제에 끼친 유교의 영향(4) 민주주의에 끼친 유교의 영향(5) 국민 정서에 끼친 유교의 영향(6) 성별 차이에 관한 유교적 관찰4. 결론5. 참고문헌유교가 한국문화에 미친 영향1. 유교의 정의와 기원(1) 유교의 정의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고, 인간본래의 의미를 찾아서 행복이 넘치는 대동세계를건설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유교의 진리는 공자(孔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공자는 인간의 본성이 어질다는 인(仁) 사상을 기초로 하여 인도주의를 주장하였다.인은 사랑의 원리요, 착한 마음씨로서 모든 사람이 본디 타고난 고유한 인간성이다.그러므로 사람은 하늘 땅 사이의 만물 가운데서 가장 신령한 존재이고, 가정과 나라 및세계를 경영하는 중심체이다.인간다운 삶은 바로 이 인간성을 밝혀서 지혜롭고 착하고 용기있는 인격을 갖추어 자연법칙에투철한 하늘 땅의 도덕을 지키고, 사회질서에 철저한 인생의 윤리를 실천하여 행복한가정, 밝은 사회,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데서 인간의 본의(本義)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2) 유교의 기원한반도에 유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전설은 없다. 학계에 주장되는 논의들로는우리 나라가 유교종주국이라는 은?주시대 발단설, 진?한시대 유입설, 삼국시대 기원설,고구려 태학설립 기준설로 나뉜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김충렬은 유교와 유학의 전래시기를 따로 구분하여 유교는 B.C. 4세기 경에 연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왔고, 유학의B.C. 1세기경 한사군시대에 수용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삼국 각 나라는 이러한 유교를받아들여 국사를 찬술하고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형성된 시기와 그 발전의 순차도 한문의 습득 순서와 일치하고 있으며,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따라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으로 한문과 유교가 전래되어 수용되었다.삼국이 언제부터 한문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고증하기 어렵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문자를 사용하였고, 저자와 연대는 미상이지만 역사를 기록한 『유기(留記)』1백권이 전해 왔으며, 영양왕 11년(600)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왕명에 의해 이를 간추려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30년(375)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라는 백제의 역사책을 지었다. 신라에서는 백제를 통해 한자를 배워 진흥왕 6년(545)에 거칠부(居漆夫) 등이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삼국시대에 한문과 더불어 전래된 유교는 주로 한대(漢代)에 성립된 경학사상이었으며, 따라서 삼국의 유교는 공자(孔子)?맹자(孟子) 사상과 함께 한대의 경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유교사상은 정치 원리?예속?법제 등 삼국시대의 사회 생활에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개인 윤리와 사회?국가 윤리에서도 삼국이 당면한 사회 국가 질서를 정비하고 체계화하는 데 필요한 원리를 유교사상으로부터 원용하였다. 특히 삼국이 공통적으로 유교사상을 활용한 것은 제도적인 측면과 교육체제에서였으며, 생사관과 세계관에서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개인?사회?국가를 연계시킬 수 있는 확고한 행동윤리이자 강령으로서 효와 충을 받아들여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고구려의 경우 유교가 전해진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유추할 수는 있다. 고구려의 태학은 중국에서 한나라 무제(武帝) 때 오경박사를 두고 태학을 세운 것을 본받아 설립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교과 내용은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문선(文選)』등이 중심이었다. 고구려에 태학이 건에 안정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서경(書經)』『요전(堯典)』 에 보이는 "요임금의 공훈이 넓게 퍼졌으니 공경하고 밝으시며 환하고 깊은 생각에 안정되어 진실로 공손하며, 사양하여 빛을 사방에 비치시며 상하에 다다랐다"라는 표현과 흡사하다. 이는 유교 경전의 정치 원리를 표준으로 삼은 단적인 예이다. 이 밖에 유교의 정치 원리인 덕치주의(德治主義)?왕도정치(王道政治) 등이 이해되고 수용되었음이 도처에 보인다. 생활 속에서 유교가 수용 전개된 사실을 살펴보면 혼례(婚禮)?상례(喪禮)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부모와 남편의 초상에 3년 동안 복을 입게 되었다던가, 묘제(墓制)의 침향(枕向)이 동쪽에서 중국의 습속인 북쪽으로 바뀐 것은 유교사상의 예법에 영향을 받아 사생관과 습속이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유교 윤리로서 강조된 것은 효라고 할 수 있다.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 숭배를 더욱 성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른 국사(國社)와 종묘(宗廟)를 새로이 세우고 중요시하였다.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한 국가 질서의 수립이나 중국 문화의 수용에서는 고구려보다도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서서 일본 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곧 백제는 일찍부터 한자를 사용하여 진한(辰韓) 때에 이미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였고, 서로 부를 때는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과 비슷하였다고 『삼국지』『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혼인하는 예법은 대략 중국과 비슷하고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삼년간 복(服)을 입는다"라고 하였다. 상례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법식이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 의식에 영향을 끼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교가 백제의 사회?국가적 교화나 제도에 윤리적인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음은 "반역을 일으킨 사람이나, 전쟁에서 퇴군(退軍)한 사람, 그리고 사람을 죽인 자는 목을 베며, 도둑질을 한 자는 사실은 일본에 대한 문화의 전수이다. 백제는 한자와 유학을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여 토착화하고 일본에까지 문자와 학술을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계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오경박사?천문박사?의박사 등이 일본에 많은 왕래를 하였음은 『일본서기(日本書記)』와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왕인과 아직기(阿直岐)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고, 지금 일본 동경 우에노 공원에는 박사 왕인비가 있으며, 대판부 하내군에는 왕인묘가 있다. 일본 학자들은 박사 왕인을 일본문화의 시조로 손꼽는다.신라는 삼국 가운데 한문의 도입과 유교의 전래가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가장 뒤떨어졌다. 반면에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적절하게 토착화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으로 삼았다. 특히 정치이념과 사회질서 속에 유교 정신을 수용한 것이 신라유교의 특색이며, 이러한 사실이 역사 기록에 산재되어 있다. 마운령비(磨雲嶺碑)에는 "순수한 풍습이 베풀어지지 못하면 참된 도리가 어긋나게 되고, 훌륭한 교화가 펴지지 못하면 사특한 것이 다투어 일어난다. 따라서 제왕이 통치이념을 세우는 것은 모두 자기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아니함이 없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절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서 유교 정치이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 때 승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安民歌)』에도 애민사상과 민본사상이 나타나 있다. 『안민가』 가운데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백성은 백성 구실 다할 양이면 나라는 태평에 멱감으리라"고 한 것은 『논어』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백성은 백성다워야 한다"라는 정명(正名) 사상과 부합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귀산(貴山)과 추항(項)이라는 화랑에게 준 교훈으로 유학사상을 수용 섭취하여 개인?사회?국가 윤리로 실천해 나가는 실제적 과정을 보여준다.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써 하며,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하며, 배워 참된 인간성을 함양하는 본원을 습득케 하였으며, 『효경』을 통해서는 부자(父子)를 위시한 인간 관계에 친애하는 정서를 기르게 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논어』에서 말하는 충(忠)과 『효경』에서 말하는 효(孝), 곧 충효사상을 일관되게 강조하여 가정윤리와 사회국가의 윤리 근간으로 삼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을 들 수 있다. 강수가 그의 아버지와 나눈 유명한 문답에서 당시에 유교와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하는 것이 비교된다. 그는 불교와 유교 중 어느 것을 배우겠는가 하는 아버지의 질문에 "소자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불법(佛法)은 속세를 떠난 외교(外敎)라 하니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불법을 배우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유자(儒者)의 도를 배울까 하나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그는 스승에게서 『효경』?『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을 배웠다 한다. 그는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아 부부의 예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며, 실천적인 유학자의 진면목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설총은 자(字)가 총지(聰智)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였다. 방언으로써 구경(九經)을 풀어 설명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비록 실전되었으나 이는 우리 나라 유교사상 최초의 경전해석서이며 실질적으로 유교를 소화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만 그의 『화왕계(花王戒)』 한 편이 전하는데 비록 우화 형식의 글이지만 유교사상의 체계를 지녔던 인물로서 현존하는 최초의 글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설총은 고려 현종 12년(1021)에 홍유후(弘儒候)라는 벼슬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양된 동방 18현 가운데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최치원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의 고유사상과 유?불?도 3교에 대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그의 글로는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여러 비문이 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문창후(文昌候)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최치원에 이르어지는
개고기 찬반론에 관한 보고서1. 저희 조는 개고기 찬반론에 관한 사전 토의내용보고입니다.(1) 이번 조별토의 과제 수행임무 편성 및 각자의 역할조명조원임무역할7조사회자중립적 상황에서 토의를 이끌어가고, 찬반의 발언권을공정하게 배분하며, 결과를 이끌어 내는 역할입니다.찬성(3명)중립적인 관점에서 동물엔 관심이 없지만, 반대하는원인을 모르는 찬성입장 의견입니다.z개고기를 평소에 즐겨먹으며, 개고기가 몸에 잘 맞고주변사람들이 좋아하는 편이어서 자주 먹는 입장에서의찬성입장 의견입니다.무슨 문제로 태클을 걸고 또한 타국 문화에선 마찬가지로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한국에서만 문제가 제기되는 것같아 반대하는 사람들을 납득시키도록 하는 찬성입장의견입니다.반대(3명)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야만적이며, 기르고 가족처럼생각하는 강아지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 납득이 되지않는다. 라는 입장의 반대의견입니다.법 또는 외교적 문제로 한국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으며,수출과 수입 또는 여행에서의 한국인의 이미지를생각해서라도 즉 국가를 위하여서라도 개고기를 먹는문화는 금지시켜야 한다. 라는 입장의 반대의견입니다.개를 기르는 입장이며, 동물을 사랑하는 동물애호가이며, 평소에 강아지를 좋아하고 기르는 사람들이가족처럼 생각하던 강아지를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되며,반대편 입장에서 이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가회가 되었으면 하는 입장입니다. 라는 입장의 반대의견입니다.※ 저희 조는 동일한 쟁점과 첨부자료가 겹치지 않도록, 사전토의를 통하여 각자의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명확히 나누어 논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며, 각자의생각과 의견을 공유하여 토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점과 전문적인 조사와 각개인의명확한 의견을 통하여 토의내용을 이끌어 내었습니다.(2) 토별 토의내용 결과저희 조는 교수님이 내주신 개고기논쟁에 관하여 각자의 찬 반 되는 생각에따라서 역할을 나누었으며, 나눈 역할에서의 각자 생각을 들어보고 각자 임무를정하여 전문적인 자신만의 생각을 조사하여 수업시간에 반대신문식토론과2인1조 토론의 변형된 3인1조토론 방식을 겸한 토의를 하여 결과를 이끌어내기로 합의하고 위와 같은 준비를 하여, 토의내용결과를 이끌어 내겠습니다.기타 수업시간 포인트1. 올바른 문장사용설득력, 시종일관성, 결론의 명확성, 자료의 정확성, 발성, 용어, 태도의 적절성토론논제의 서술, 예상쟁점발견, 논증, 반증 방법강구 증거자료의 수집과 검증토론의 개요작성※ 주장과 논지를 분명하게 제시, 먼저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 상대방을납득시켜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유도할 것2. 토론의 기본적인상식시작은 찬성에서 시작하며 반대는 그다음 그리고 마지막 발언도 찬성에게 있다.시간은 찬성이 2의 비율 반대는 1의 비율이며, 이유는 찬성에서 자신의 의견을 도찰시켜야 함으로 반대는 그 의견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공평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의 종류에는 반대신문식토론이 있다.(청문회, 죄인 추긍 등...)3. 자리배석(회의장소: , 시간: 토의시간 약 시간)사회자찬 성반 대개고기 논쟁 찬반 진행사항1. 찬성 3명, 반대 3명 사회자1명을 기준으로 토론진행(1) 찬성 우선 발언권 부여(5분부여)(2) 반대편 발언권 부여(2분~3분부여)※ 계속 이런 식으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수렴하여, 결과를 유추해나감(3) 마지막으로 찬성 발언권을 부여(10분)※ 사회자 재량으로 반대 여론 수렴하여, 토의를 마무리2. 우리나라 음식(개고기) 과연 문화인가 아닌가?(1) 우리나라의 고유문화라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듯이 먼저 한국 사람들이한국문화를 이해하며, 나아가 각국의 문화를 존중해 준다면 개고기 문화에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최소한 모든 동물이마찬가지이겠지만, 강아지는 많은 사람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이기에 동물 확대및 최소한의 보호를 해줘야 할 것이고 나아가 법적인 문제 보단 한국사회의문화로서 토론과 토론을 하여 다른 나라에서처럼 문화로서 인정받기 위한자세가 필요 할 것이고 이것에 대한 찬성 반대 여론을 듣고 결과를 아래와같이 유추해 나아가보자.3. 토론의 마무리(판정의 근거, 정확한 이유), 이의가 없어야한다.(1)토론의 우열의 평가우리나라에도 문화가 있는데 왜 다른 나라의 말을 듣고 한국인끼리 논쟁을 하는지 모르겠고, 제 생각엔힘이 있는 나라에 영향을 받아서 생긴 논쟁이 아닌가( _찬성)개고기문화가 한국에 생긴 이유는 보릿고개 시절에 먹을 것이 업어 개고기를 먹게 된 것이 나중에 효능이알려져 음식문화가 생긴 것인데 원래는 한국의 문화가 아니며 구지 피해를 감소하면서 개고기 문화를지켜야 할 명분도 문화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_반대)비록 중립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찬성입장이지만 왜 개고기를 반대하는지 모르겠고, 알아본 결과 개고기는몸에 좋고 장과 위장 및 기타 기관을 튼튼하게 한다고 알고 있는데 왜 못 먹게 하는지 모르겠다( _찬성)개고기를 어떻게 먹으며, 모든 동물이 애완동물로 기를 수 있지만 강아지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기르는애완동물로 요즘 들어서는 같이 산책도하며, 사람처럼 기르는 동물 중 한 종류인데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모르겠고 다른 대체되는 음식을 찾으면 되는 게 아닌가?( _반대)사회자 : 이쯤에서 결론을 보면 문화로 찬성을 하기엔 이지숙님 말을 듣고 나니 일리가 있으며, 개고기는한국문화가 아니라 가난한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 먹게 된 것인데 나중에 효능이 알려져 먹게 되고 정착된문화를 한국문화로 받아들이고 왜 이렇게 피해를 감수하고 지켜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 이상 찬성의 입장에선우리나라의 문화로 외치며 이것을 명분으로 발표하는 건 의미가 없으며, 중간 의견으로 사회자 본인은반대의견이 우월함을 판단하여 문화이외에 다른 의견을 받도록 하겠습니다.찬성( ) : 음식문화는 각국의 고유한 문화이고, 각 나라별로 특이한 문화들이 있는데 개고기 문화가우리나라의 고유의 문화는 아니지만 음식문화로 서로 공격을 하는걸.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며프랑스의 거위는 목까지 음식을 채워 죽이고, 일본은 원숭이의 뇌를 먹는 한편, 기타 타 나라에서는배안에 있는 새끼를(돼지, 소등…….)먹는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개고기 음식문화도 음식문화로 받아들이고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사회자 : 찬성의 의견은 각 나라는 각국의 서로의 문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과, 음식문화는 각 나라별로다르므로 서로 인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반대쪽 의견은 강아지는 과거와 다르게 현대사회의가족과 같은 존재로 의미되며, 또한 개고기 문화는 가난한 시절 먹을 게 없어 먹게 된 음식으로서
신부와 편견 감상문1813년에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인도를 주제로 리메이크 한 작품으로서 결혼을 주제로 다루는 작품이고, 뮤지컬형식이며, 작품은 2006년, 거린더 차다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먼저 전작인 오만과 편견에 대하여 알아보고, 영화를 오만과편견 원작의 영화와 비교를 하면서 리포트를 작성해 보려고 합니다.오만과 편견의 배경은 아마도 영국의 문화적 특징을 기초로 한 작품이며, 영국의 문화의 특징은 자신의 국가의 문화를 유난히 존중하는 국가이고, 아직까지도 왕실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국가이며, 영국의 국민들은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전통을 중시하고 보존하려 노력한다는 것이 오만과편견의 배경이 됐던 것 같다.먼저 인도는 영국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신부와 편견을 수업시간에 보면서 중점을 인도는 영국의 지배를 오래 받았다는 것과 왜 인도여성들이 이런 결혼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다.오만과 편견은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베넷가의 다섯 자매 중 둘째인 엘리자베스에 초점이 맞춰져 내용이 전개된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인 엘리자베스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자존심 강한 여인이다.대저택에서 열리는 댄스파티에서 그녀는 윌리엄 다아시를 만나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엘리자베스의 지적인 매력에 깊이 빠져든 다아시는 그녀를 둘러싼 화려하지 않은 배경에 대한 거부감을 억누르고 청혼을 하게 된다.여기서 그는 시대적 상황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아온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 체 오직 자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자신의 배경에 그녀가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지만,앞에서 밝힌거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믿음을 바탕으로 결혼 하는것이라는 생각을 갖고있는 그녀는 오히려 다아시를 질책하며, 청혼을 거절하게 된다.처음에는 다아시도 현실을 믿지 못하고 잠시 방황을 하게 되지만 끝내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그 사이 엘리자베스에게는 여러 가지 상황적 설정과 여러 인물간의 갈등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만을 더욱더 고집하게 되고 아마도 그런 상황들은 더욱 다아시에 대해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인간이라는 모습을 더 진하게 남기게 되는 계기가 된다.여기까지에서 비춰지는 영화에 대한 모습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다뤘고 조건이 좋지 않은 여자쪽 입장에서만 배려하고 조심스레 소재를 다뤘다면 지금부터는 억눌린 시대적 상황속에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 두가지 분류의 여성상을 보여준다.여주인공인 그녀 역시 그에 대한 편견은 자신의 옳지 못한 판단과 시대에 억눌려서 너무 비판적이였다는 잘못된 생각임을 인정을 하며 둘의 사랑은 진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R e p o r t과 목 :담당교수님 :- 목 차 -1. 알렉산더의 탄생과, 알렉산더의 약력2. 알렉산더의 발전과정(중요한 전기들)3. 알렉산더의 외교관계(타국의 지배과정)(1) 페르시아원정(2) 소아시아와 이소스 전투(3) 지중해 해안지방과 이집트의 정복(4) 아시아 원정(5) 인도침공4. 알렉산더의 원정과정에서의 야만적인 행동5. 인간적 특성(통치와, 이미지)6. 알렉산더의 리더십의 목표7. 알렉산더의 리더십의 종류별 관찰8. 알렉산더 리더십의 단점과 교훈9. 알렉산더의 말년10. 참고문헌11. 알렉산더의 연표공 학 부학 번이 름1. 알렉산더의 탄생과, 알렉산더의 약력(1) 알렉산더의 탄생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그리고 에피루스의 거칠고 격정적인 왕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는 실천적 인물이자 군사적인 천재로 야심만만하고 세련되고 사교적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방법이든 쓰는 무자비한 책략가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에게서 군사적 재능과 냉철한 합리주의를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신비주의, 낭만성, 격정적인 기질을 물려받았다.필립포스는 격정적이고 자존심이 매우 강했던 왕비 올림피아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를 신이라 여겼던 왕비와 추종자들, 심지어 아들에게까지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의 교육을 위한 투자에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언뜻 생각하기엔 아들을 꺼림직하게 생각하는 필립포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기원전 4세기의 약 20여년 동안에 마케도니아는 필립2세에 의해 문명화한 희랍 강국들 중 지도적인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는 그 당시 지도국으로서의 문명을 갖추지 못했고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마케도니아인들을 야만인이라 무시하곤 했다. 당시 마케도니아인이 대체로 군인들과 행정관을 배출하고 있던 반면 그리스인들은 문화적 명성을 획득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더욱 그러하였던 것이다. 필립은 야만의 동양으로부터 그리스인들리인으로 유럽에 남겨두고 다르다넬스(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그는 보병 약 3만 명과 기병 5,000여 명(그 가운데 1만 4,000명가량이 마케도니아인이었음), 그리고 그리스 동맹에서 파견한 7,000명가량의 연합군을 직접 지휘했다.원정군은 측량사?기술자?건축가?과학자?궁정관리?역사가 들을 대동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처음부터 무제한 원정을 벌일 생각이었던 것 같다.호메로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낭만적인 행동으로 일리움(트로이)을 방문한 이후 그는 마르마라 해 부근의 그라니코스(지금의 코카바스) 강에서 사트라프 3명이 이끄는 페르시아군과 최초로 마주쳤다(BC 334.) 페르시아군의 계획은 알렉산더가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육박전으로 그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이 거의 성공을 거둘 뻔했으나 페르시아군의 전열이 깨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다리우스 수하의 많은 그리스 용병들이 학살당했으며 2,000명의 생존자들은 사슬에 묶여 마케도니아로 송환되었다. 이 승리로 소아시아 서부가 마케도니아군에게 노출되었고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진해서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참주들은 추방되었고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가 시행한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민주주의가 자리잡았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장차 자신이 취할 범(汎)헬레니즘 정책을 예고했다.이 정책은 이미 그라니코스에서 탈취한 300점의 갑옷?투구를 아테네로 보내 아테네 여신에게 공물로 바친 데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그 공물은 '소아시아에 거주하는 야만인들에게서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더와 스파르타인을 제외한 그리스인들'이 바치는 것으로 공표되었다. 그러나 도시들은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그는 칼라스를 헬레스폰토스 지방 프리지아의 사트라프로 임명해 페르시아 대왕의 계승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밀레토스가 페르시아 함대의 접근에 고무받아 저항을 하자 알렉산드로스는 강공을 펼쳐 그곳을 점령했다. 그러나 많은 비용이 드는 자신의 해군을 해체했으면서도 해안도시들을 점령함으로써 "페르시아 함대를 육지에서으나 다리우스는 자기 휘하의 박트리아 기병대와 그리스 용병대를 이끌고 메디아로 피신했다.알렉산더는 이제 바빌론 시와 그 지방 전역을 점령했다. 바빌론을 그에게 양도하고 항복한 마자이오스가 마케도니아인 군사령관과 함께 통치권을 행사하는 바빌론 사트라프로 인정받았으며 지극히 이례적으로 주화를 만드는 권리를 부여받았다.이집트에서처럼 그 지방의 제사장을 후원하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수도인 수사도 항복했으며 금화 5만 탈렌트에 상당하는 막대한 보물을 내놓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가족을 이곳에서 편안하게 살도록 조치했다.오욱시안 지방의 산악부족을 격파하고 그는 이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 페르시아 본토로 진격해들어갔으며 사트라프 아리오바르자네스가 지키는 페르시아 관문고개를 우회하는 데 성공해 페르세폴리스와 파사르가다이로 진입했다.페르세폴리스에서 그는 범그리스권의 보복전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크세르크세스 궁전을 불태웠다. 그 의미가 어떻든 이 행동은 이후에 전하는 이야기에서는 아테네 출신의 고급창녀 타이스의 부추김으로 술취한 김에 벌인 장난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BC 330년 봄에 알렉산드로스는 북쪽의 메디아로 진군해 수도인 엑바타나를 점령했다. 테살리아인들과 그리스 연합군은 본국으로 보내고 이후 그는 순전히 혼자 힘으로 전쟁을 치렀다. 마자이오스를 사트라프로 임명한 데서 드러나듯이 제국에 대해 알렉산드로스는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마케도니아인들과 페르시아인을 연합해 지배세력을 구축하려는 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시 백성들의 그에 대한 된 오해가 더욱 증폭되었다. 다리우스 추격전에 계속 나서기 전에 그는 페르시아의 보물을 모두 모아 하르팔로스에게 맡기고 하르팔로스가 엑바타나에서 재정장관의 자격으로 그것을 관리하도록 했다.파르메니오도 또한 메디아에 남아 보급수송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도록 조치했다. 아마도 이 노병(老兵)은 그에게 성가신 존재가 되었던 것 같다. BC 330년 한여름에 알렉산드로스는 동부 지방을 향해 빠른 속도로다.바미안과 고르반트 계곡을 끼고 힌두쿠시 산맥을 다시 넘으면서 알렉산더는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짐을 진 절반의 부대는 기병대 지휘관인 헤파이스티온과 페르디카스의 인솔 아래 키베르 고개를 지나가도록 보내고 한편 자신은 공성병기열(攻城兵器列)과 더불어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산맥을 지나 북쪽으로 나아갔다. 스와트와 간다라를 지나 진격한 끝에 인더스 강 서쪽과 부네르 강 북쪽으로 몇 ㎞ 거리에 있는 거의 난공불락의 산정도시 아오르노스(지금의 피르사르)를 급습했는데 이는 참으로 인상깊은 탁월한 공성술을 보여준 쾌거였다.BC 326년 봄 알렉산더는 아토크 부근에서 인더스 강을 건너 탁실라로 진입했다. 그곳의 통치자인 탁실레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히다스페스(지금의 젤룸) 강과 아케시네스(지금의 케나브) 강 사이의 땅을 지배하는 자신의 경쟁자 포로스와의 싸움을 도와주는 데 대한 보답으로 코끼리와 병력을 제공했다. 6월에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강 좌안에서 최후의 큰 전투를 치렀다. 그곳에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니케아(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와 알렉산드리아부케팔라(그곳에서 죽은 자기 말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본뜸)라는 2개의 도시를 건설했으며 포로스는 그의 동맹자가 되었다.알렉산더가 히파시스(아마도 지금의 베아스) 강 너머의 인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가 갠지스 강에 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조차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계속 진격하기를 갈망했으며 히파시스 강까지 나아갔을 때 그의 군대가 명령에 불복해 더이상 열대우림지대를 뚫고 행군해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심신이 지쳐 있었고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주요지휘관 4명 중 한 사람인 코이노스가 그들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군대의 결심이 완강하다는 것을 알고 알렉산드로스는 회군하는 데 동의했다. 히파시스 강변에서 그는 올림포스의 12신에게 바치는 12개의 제단을 세웠으며 800~1,000척가량의 함선을 지었다. 이어서 포로스를 남겨놓고 절반의 병력은 배에 싣고 절반은 양쪽 강둑을 따라 3개 대열로 인더스 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은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그의 장례는 바빌론에서 왕실장으로 치러졌으며 화장용 장작에만 1만 탈렌트의 비용이 들었다. 아마도 이때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에게 헤파이스티온을 영웅으로 기리도록 하는 일반명령을 공표하면서 그와 관련해 자신이 신과 같은 영예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오랫동안 그는 자신의 신성(神性)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그리스인의 사고 속에서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그어져 있지 않았다. 전설에는 자신들의 업적으로 신과 같은 지위를 획득한 인간들의 예가 여럿 있었다. 알렉산더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의 업적을 디오니소스나 헤라클레스의 업적과 비교해보도록 고무받은 적이 있었다.이제 그는 자신의 신성에 대해 확신을 갖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도록 요구하게 되었다. 그의 요구가 어떤 정치적 배경을 깔고 있었다고 볼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과대망상증과 정서적 불안정이 점점 심해지는 징후였다.그리스 도시는 강요에 못이겨 그에 따랐으나 종종 반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스파르타의 포고령은 이런 식이었다. "알렉산더가 신이 되기를 바라니까 그를 신으로 삼도록 하자."BC 324년 겨울 알렉산더는 루리스탄 산악지방에 사는 코사이아족을 상대로 잔혹한 보복전을 벌였다. 다음해 봄 바빌론에서 그는 리비아인들과 이탈리아의 브루티움인, 에트루리아인, 루카니아인이 보낸 하례사절들을 영접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과 켈트족, 이베리아인, 그리고 심지어 로마인까지 사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것이다.그리스 도시에서도 알렉산더의 신적 지위에 걸맞게 화관을 쓴 대표사절을 보냈다. 네아르코스의 항해로를 뒤쫓아 그는 이때 티그리스 강 하구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고 인도와 해상교역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위해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예비 탐사를 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관리였던 헤라클레이데스를 파견해 히르카니아(카스피) 해를 탐험하도록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의 관개시설을 개량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