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쇼와(昭和) 20년 9월에 죽었다”?반딧불의 묘? 에니메이션에 나오는 세이타의 음성이다. 이 영화는 고등학교 때 에니메이션으로 본 적이 있다. 내용이 워낙 슬펐던지라 모두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세츠코, 세이타 남매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그저 가엽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기껏해야 시대배경 정도만 알고 있었지,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에니메이션을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무엇인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조사하던 중 나는 이 영화에 대한 극히 상반된 의견을 보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혹자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일본 최고의 영화”라 하였고 혹자는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 영화는 일본을 두둔하는 영화다”라고 하였다.같은 영화를 두고 이렇게 상이한 평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이 작품을 하나 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이 영화 곳곳에는 전쟁의 비극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있다. 전쟁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삶이요, 생존의 문제이다. 전쟁은 두 남매를 굶줄이게 만들었고 그들의 살아갈 힘을 앗아갔다. 또한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은 사람마저 변하게 만든다.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점점 악해지는 인간의 모습은 ‘하사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전쟁을 통한 자국민의 비인간화 모습을 부각시킨 듯하다.처음에는 누구보다 온순하고 따뜻했던 그녀가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변해간다. 두 남매가 밥도 못 먹고 점점 냉대받는 모습,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남매가 처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나 후반부에 “일본은 반드시 승리한다. 일본이 질 리가 없어, 그럴 리가...”하고 말하면서 허망해하는 세이타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세이타는 단 한 번도 일본이 패망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 컸던 것 같다.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격변화를 보이는 사람이 이모로 나오는 ‘하사코’라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행동에 비난을 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자기 아이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기에 나는 그녀가 변해가는 과정을 엄마의 마음으로써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덮어주고 싶었다.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나 또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야 말로 전쟁을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인물일 것이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게 된 그녀이지만 “전쟁은 이제부터야!” 라고 외치며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의 어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자식을 위해서는 배고파도 배고픔을 참고,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이러한 모습을 더 부각시켜준 것이다.그리고 이 영화에서 ‘반딧불’ 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딧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세츠코가 반딧불이 다 사라졌을 때 반딧불의 무덤을 만들어주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을 밝혀주고 사라져버린 반딧불을 고사리같은 손으로 정성껏 묻어줄 때는 세츠코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고, 후에 세츠코도 반딧불을 따라 갈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있는 듯 했다. 반딧불은 영화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공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는 火垂る를 한자로 풀어보면 ‘불이 내린다’는 뜻이고 반딧불의 색깔이 공습할 때처럼 빨갛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통하는 점이 있다. 또한 반딧불처럼 짧은 삶을 살다가 간 세츠코, 세이타 남매의 삶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남매는 반딧불에 유난히 애정이 깊었고 이들의 방공호에서의 생활의 고통도 가끔 이 반딧불로 잊곤했었다. 우는 세츠코를 달래주는 것도 반딧불이었다. 반딧불이 마치 두 남매의 분신처럼 느껴졌다.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두 남매의 죽음에 슬퍼하고, 하사코의 변화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영화가 우리의 공감대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너무나도 상이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이 영화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작품성,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한국이나 중국의 아시아인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잊을 수 없고 영화가 일본인들의 역사태도와 맞물려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대해서 아시아국가에 대해서 진지한 사과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 당시에는 모든 나라가 제국주의였고 일본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사과가 행해지고 그와 관련된 영화가 단 한편이라도 나왔다면 당시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갔던 두 남매의 이야기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치즘을 행했던 독일은 과 같은 나치시대를 성찰하는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기도 하는데 그에 견주어보면 아쉬움이 남는 점은 있다.
제목 유럽의 건축양식서론 - 건축의 시작본론 - 유럽의 사조별 건축양식1.고전건축(1) 그리스 건축(2) 로마 건축2. 중세건축(1) 초기 기독교 건축(2) 비잔틴 건축(3) 사라센 건축(4) 로마네스크 건축(5) 고딕 건축3.근세건축(1) 르네상스 건축(2) 바로크 건축4. 근 현대건축(1) 신고전주의(2) 낭만주의(3) 절충주의결론서론 - 건축의 시작산길을 걸을 때, 바다를 항해할 때가 아니라면 인간은 언제나 건물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러나 집을 짓는 것과 건축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동물도 집을 지을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의 흰개미들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보금자리를 만든다. 새들도 둥지를 짓는다. 그러나 인간은 건축이란 것을 만들어 냈다. 건축은 집을 짓는 과학이고 예술이며, 시적으로 표현하면 집을 단순한 피난처에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주는 세련된 마법이다.건축이라는 예술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줄뿐만 아니라 당혹감과 분노를 안겨 주기도 한다. 그러나 파르테논 신전의 장려함과 마하발리푸람에 있는 사원들의 우아함, 중세 고딕풍 성당의 야심 찬 모습, 그리고 하늘 높이 치솟은 20세기의 마천루에 이르기까지, 건축은 계속해서 능동적으로 변신을 모색해 온 예술이다.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부터 건축은 시작되었다. 21세기 초인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수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옛 조상들처럼 수렵으로 연명해 가기보다는 한 곳에 정착해서 땅을 경작하며 살고 싶은 욕구가 사람들에게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농경의 발달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 고대 문명 발상지에 살던 사람들은 최초의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 도시들에 그들은 안정된 집과 사당, 그리고 신전과 궁전을 세웠다. 이처럼 건축의 탄생은 도시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농지의 확대로 도시가 발전하고 도시의 확대로 농지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건축이 더불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유럽의 건축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유역의 문명과 이집거의 모든 로마 제국의 건물에 사용되어 로마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로마 건축의 벽은 조적조나 콘크리트조였으며 기타 지지하는 구조로 기둥이 사용되었는데, 콘크리트 재료의 발견으로 아치 사용이 더욱 촉진되었다. 볼트는 주로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했고, 아주 중요한 기념 건물에는 원형 평면 위에 돔을 얹었다. 디자인에서 로마 건축은 선·면·매스·볼륨 등으로 이루어진 공간구성이 뛰어나며 이 점에서 로마인들은 전(前) 시대의 지중해 사람들과 다르다. 로마인들은 비록 이전부터 전래되던 것이라도 그들의 취향에 맞게 다시 고쳐 사용했다. 로마의 오더는 그리스의 3가지 오더에서 유래했지만 토스카나식 오더와 복합식 오더를 더하여 5가지 오더로 발전시켰다. 로마의 오더는 그리스 것보다 비례가 더 가늘고 주신에 홈이 없으며, 점차 세부 장식화되어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조를 자아내기 위한 것으로 사용되었다.로마 신전 건축은 낮은 3단의 그리스 신전 기단과는 달리 정면에만 계단이 있는 높은 단으로 되었고, 동서방향의 장축을 자유롭게 변화시킨 결과 입구 정면이 강조되는 건물이 탄생했다. 프랑스 님(Nimes)의 메종카레는 대표적이다. 로마인들은 원형 신전도 세웠는데, 현존하는 가장 큰 원형 신전은 판테온이다. 모든 신에게 봉헌한 판테온은 하늘을 표상하며 돔과 로툰다는 수평과 수직의 축을 통합한 구조로 로마 건축을 대표한다.공화정 말기부터 공공욕장은 로마인들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황제들의 욕장은 이상적인 설비를 갖추고 아치, 원통형 볼트, 돔 등의 구조법을 구사했으며 카라칼라 욕장(217),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298~306), 막센티우스 욕장(313)이 유명하다. 타원형 투기장으로 가장 큰 것은 로마의 콜로세움(70/72~82)이다. 이밖에도 긴 U자형의 전차경주장(circus), 개선문 등이 있으며, 급수시설, 공공욕장, 광장의 분수 등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이는 고가수로교(高架水路橋)를 아치와 콘크리트를 사용해 건설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점령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카푸트로 사용되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때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양분되고 그후 유럽이 서방의 교권(敎權)과 동방의 제권(帝權)으로 갈라지면서 그리스도교 교회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로마의 4대 대성전 중의 하나로 사도 바울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성당인 바오르 대성당의 정면 외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2) 비잔틴 건축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4년 보스포루스에 새 수도를 세우자 로마의 많은 예술가들이 함께 이주했다. 따라서 비잔틴 건축의 초기 양식은 로마 건축에 바탕을 둔 바실리카 교회 평면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독립적인 비잔틴 교회의 특성이 발전해, 5세기 때의 실험을 거쳐 로마의 장방형 평면과 대비되는 중앙집중형·정방형 평면이 6세기 중엽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크게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중 하기아 소피아 성당(532~537)이 가장 대표적인데, 장방형의 바실리카식 평면과 중앙집중형 평면 형식의 개념을 모두 수용한 교회당이다. 구조적특색으로는 상부의 돔이 하부의 펜덴티브에 의해 지지되는 점을 들 수 있다. 사각형 평면에 원형 돔을 얹는 방법에는 스퀸치(squinch)를 두어 사각형 평면을 팔각형 평면으로 바꾼 뒤 돔을 얹는 것과 펜던티브를 사용하는 것이 있다. 펜던티브는 그때까지의 역학적 해결법과는 다르게 추력으로 반력을 고안한 건축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의 하나이다. 후기 비잔틴 건축은 콘스탄티노플과 발칸 반도 전역에 남아있는데, 중기 비잔틴 양식을 계승한 돔은 작고 높으며 외벽은 벽돌 등으로 장식되었다.러시아 예술은 비잔틴 양식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는데, 건축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전역에 전파되어 러시아 절충주의 건축의 특성을 이루었다. 중심 돔, 즉 쿠폴라의 디자인과 지지방법은 러시아 건축의 중심주제가 되었고 비잔틴 건축 양식을 지역에 맞게 바꾸어 추운 날씨와{폭설에 적응하도록 좁은 창문과 급한 지붕, 불거져 나온 듯한 돔 형태의 러시아 교회 건축이 발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은 로마, 비잔틴 제국, 이슬람 세계, 스칸디나비아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950~1050년에 구조·스케일·디자인·볼트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건축에 조각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새로운 로마네스크 양식이 생겼다. 이것은 1075~1125년에 전성기를 이루고 이후 쇠퇴했다. 1090년 이후에는 첨두형 아치를 사용한 교차 볼트법이 개발되어 가볍고 강하고 개방적인 것을 추구하면서 건축 외관에 변화가 생겼다. 그후 이 양식은 독일·폴란드·헝가리·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등지로 퍼졌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된 아미앵 대성당이 1220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다.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원을 대표하는 2개의 교파였다. 1077~85년 재건된 클뤼니 수도원은 당시 가장 큰 로마네스크 교회였으며 긴 비례, 다발 기둥, 첨두 아치, 특수화된 벽식구조와 볼트 시공법 등 고딕 양식의 탄생을 알리는 많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시토 수도회는 1098년 창립되어 급속하게 퍼졌다. 시토 수도회 건축가들은 첨두 아치를 사용하고 반(半)고딕이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개발했다. 부르고뉴의 영향으로 드디어 파리 근교 생드니 수도원에서 고딕 건축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따라 영국에서 발달한 노르만 양식은 목조 지붕으로 된 네이브, 볼트로 된 아일, 장식된 내부, 공간감 있는 트랜셉트, 깊이있는 성소가 특징이다. 더럼 대성당은 노르만 양식의 대표적인 예이다[피사 성당, 투스카니 지방, 북이탈리아, 1063∼1118년경]{{{전경 내부단면 평면(5) 고딕 건축13세기초 프랑스에서 발생되어 르네상스 건축이 발생된 15세기까지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중북부 유럽에서 전개된 중세의 건축양식으로 초기 기독교 시대, 로마네스크 시대에 걸쳐 형성된 중세 교회건축을 완성함으로서 역사상 종교건축의 절정기를 이루었다.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고딕 건축이 성행했다. 고딕 건축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비롯되어 12세기 중반부터, 지역에 따 사용해 수평성을 강조했다. 직업적인 건축가가 등장하고 교회와 함께 세속적인 건축을 본격적으로 설계한 것도 르네상스 시기로, 이러한 건물은 건축가들의 중요 과제가 되었다.르네상스 건축은 선과 면을 바탕으로 한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건축가들은 원이 가장 완전한 기하학적인 형태라고 여겼으므로, 신에게 바칠 건물도 가장 완전한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해 교회 형식을 라틴 십자형에서 중앙집중형으로 바꾸고 점대칭, 원형, 정사각형, 그리스 십자형 등 변형을 발전시켰다. 또한 건축의 비례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알베르티는 비례와 연관시켜 건축을 정의하면서 더 추가하거나 빼내거나 변화시킬 수 없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인체비례와 건축비례 간의 조화를 발견하고 이를 건축이론으로 발전시켜 설계에 반영했으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투시도법을 고안했다. 르네상스는 건축이론이 발전한 중요한 시기였는데,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의 영향으로 많은 건축가들이 건축서를 저술했다. 알베르티의 〈건축십서〉가 1485년 발간되었으며 건축이론은 16세기 후반에 더욱 번성했다.고전을 추구한 르네상스 건축이 고대 유적이 많은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로마에서 일어나리라는 예견은 당연한 것이었다. 14세기와 15세기초 이탈리아인들은 로마 건축을 부흥시키려 했으나 로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도시였다. 그대신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되었다. 1401년 피렌체 옛 예배당 정문 설계경기에서 낙선한 금속세공가 브루넬레스키는 이에 자극받아 건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르네상스 건축을 열었다. 1418년 중세 건축가들이 해결 못한 피렌체 대성당 돔 설계경기에 당선된 그는 고딕식 내용의 구조이지만 드럼을 도입한 르네상스식 돔을 처음 만들었다.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비종교건축은 팔라초이다. 고전 양식의 장대한 수평띠, 정형화된 창문과 출입 개구부, 상층으로 갈수록 거친 있다.
주제: 암각화(巖刻?) 유적이 갖는 의미Ⅰ.머리말Ⅱ.본문1. 암각화의 개념2. 암각화를 새기는 목적3. 한국의 대표적 암각화 유적(1) 울주 반구대 암각화(2) 울주 천전리 암각화(3) 고령 양전동 암각화Ⅲ.맺음말Ⅰ.머리말우리나라에서 암각화는 1971년 동국대학교 불적조사단에 의하여 처음으로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울산을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울산지역뿐만 아니라 국내 암각화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발견이후 1975년, 1977년 등 몇 차례에 걸쳐 암각화를 조사하였고 1984년에 종합적인 조사보고서가 간행되는 등 그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면서 1995년 6월 23일 국보285호로 지정되었다.암각화는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 사회의, 일종의 기록수단으로 보고 여기에는 구체적인 형상이외에도 많은 흔적이나 기호 등이 여기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에 암각화를 연구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암각화를 '종교적 제의에서 사용되는 상징 언어이고 그림의 이미지를 통해 신과 인간의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보는가 하면 '언어는 존재하지만 글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그림언어 '나 ' 종교적 관념이나 신화에 대한 기호' 등으로 보고 있고 결국 공통적으로 '암각화‘가 선사시대 그리고 문자이전 사회의 종교적 제의에 사용된 일종의 표현수단'이라 여기기 때문에 암각화를 연구하게 된다.따라서 매우 사실적인 형상들이 그려져 있는 반구대 암각화에도 당시 제작인들의 종교관념, 생활상, 그리고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는 그림으로 보고 구체적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많은 형상들도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나, 아직 그 의미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남한에 16곳에서 발견된 암각화의 대부분은 추상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지만 반구대 암각화는 동물과 인물을 주로 그렸으며, 어로를 실제적으로 표현하고 있고, 고래 면각들은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사실적 표현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 선사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라스코 동굴 벽화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며, 가까이는 중국이나 시베리아 각지에 분표하는 암벽 위의 물감그림들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물감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암각화와 구분하여 암채화(巖彩畵)라고 부르기도 한다. 암각화와 암채와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로 바위 그림 또는 암화(巖?)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암각화는 구석기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고 청동기시대에 와서 가장 많은 제작이 이루어졌다. 처음에 사람들은 주요한 식량이 되는 대상들과 사냥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벌이는 의식과 관련된 그림들을 새겼다. 주로 춤추는 사람이나 악기를 부는 사람, 사냥하는 모습이나 이들을 총괄 지휘하는 제사장 등을 새겨 놓고 그 앞에서 실제로 춤추고 노래하고 주문을 외며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였을 것이다.암각화를 새기는 방법에는 쪼아낸 그림, 갈아낸 그림, 그어 새긴 그림이 있다. 쪼아낸 그림은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두드려 쪼아서 형상을 묘사한 것으로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대표적이다. 갈아낸 그림은 쪼아낸 뒤에 그 부분을 갈아서 더 깊고 매끈하게 만든 것으로 남원 대곡리 암각화가 대표적이며, 그어 새긴 그림은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바위면을 그어서 가는 선으로 묘사한 것으로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대표적이다.2. 암각화를 새기는 목적그림이 새겨진 바위들은 대부분 단단하고 높아서 어떤 경우는 새기기에 매우 위험함 곳도 있고 또 수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험한 곳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겼는가? 장식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어떤 종교적인목적이 있었을까? 물론 그것은 단순한 장식은 아니다. 우리나라 암각화가 있는 곳은 모두 강가의 절벽이거나 바로 강에 붙어 있지 않더라도 강과 인접한 곳이다. 또 그림이 새겨진 절벽 바로 밑에는 제사를 지내거나 어떤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보아 종교 의식을 거행하기 위게 살아가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후손들이 안전하게 계속 이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개체 보존과 종족 보존의 목적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 유지는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여 해결할 수 있으며 종족 번성은 성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량확보를 위해 가장 주된 먹거리이자 수렵의 대상인 동물들이나 이들의 번식을 위한 교미 그림을 새겼다. 또 종족 보존을 위한 목적으로 남자나 여자의 성기를 새기거나 성교 행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선사시대에는 특정한 사람만이 신과 통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부분 제사장 곧 샤먼이 담당하는 종교 의식을 통해 신에게 소원을 전달하려 하였다. 암각화에는 이러한 종교 의식을 묘사한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샤먼이나 춤추는 모습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처럼 암각화는 당시 사람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작된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다.3. 한국의 대표적 암각화 유적(1) 울주 반구대 암각화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 234-1번지 태화강변에 자리잡은 ‘반구대’는 높이 약 70m, 너비 약 20m에 이르는 바위 절벽이다. 바위 그림이 새겨진 곳은 그 중 물에 가까운 아래 부분이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은 거의 북쪽을 향하고 있어 낮에는 대부분 해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철이면 해가 뜬 직후 햇빛이 동쪽으로부터 비스듬히 비추어 바위면에 새겨진 그림들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겨울에는 해가 질 무렵 해가 바위면에 잠깐 머물다 가는데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어서 해가 비추는 동안 암각화를 대상으로 어떤 의식을 거행하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암각화는 여름철에 제의를 올리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암각화의 바로 앞은 경사진 단이 이루어져 있어 사제가 제의를 주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강 건너의 언덕이나 강바닥에 모였을것이다.반구대 암각화에서 다루는 소재는 주로 동물이며, 그 밖에 인물상과 배있는 것 등 면각 위로 덧새겨진 선각화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면각화를 새기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선각화를 새겼겠지만 면각화를 새긴 사람들과 선각화를 새긴 사람들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것은 선각화가 면각화를 최대한 살려가면서 새겨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면각화는 대체로 일정한 구역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선각화는 되도록 중복을 피하며 면각화가 없는 곳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되도록 빈 공간을 찾아 서로 훼손하지 않으면서 새겨진 것이다. 이는 모두 새끼 밴 동물을 새겨서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고 있는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면각과 선각이라는 표현 기법도 완전히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면각에서도 선각 기법을 이용한 그림이 있고 선각에서도 면각의 기법을 이용한 것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면각화와 선각화의 선후 관계는 뚜렷이 인정되지만 어느 정도 같은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우선 면각화의 내용을 보면 고래 떼와 같은 동물상과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물상, 제사장과 같이 속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동물, 하늘로 올라가는 배 등이 묘사되어 있다. 바위면 왼쪽에는 스무 마리 이상의 고래들이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승천하는 듯 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그 중 큼직한 몸통의 머리쪽 내부에 작은 물고기 형태를 양각으로 남겨둔 상이 있으며, 내부를 텅 비우듯 묘사한 상도 있다. 이렇게 임신을 묘사하거나 배 부분을 강조한 상은 생식의 의미로 설명 할 수 있다.또한 제사장으로 보이는 인물상도 다수 표현되었다. 춤추는 듯한 모습으로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사제들의 성기는 과장하여 크게 표현하였다.물속과 땅위를 연결하는 양서류를 속세와 영계를 연결하는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개구리뿐 아니라 거북과 고래도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거북은 양서류로 물속과 땅을 오가며 사는 동물이고 고래는 물에 사는 동물이면서 육지 동물처럼 새끼를 낳는 포유류에 속한다. 반구대 암각화에 거북과 고래가 표현된 까닭은 단지 지의 연결선을 뚜렷하게 나타낸 것이다.선각으로 표현된 육지동물은 호랑이, 표범, 멧돼지, 사슴 등으로 바위면 왼쪽 위에는 그물에 갇힌 동물이 있고 왼쪽과 중앙의 경계 부분에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류 동물들이 있다.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대에 관해서 신석기 시대부터의 작품인지 아니면 청도기 시대의 작품인지 여러 설이 있다. 이 암각화에서 면각화와 선각화의 양식에서 시대적 차이는 분면하게 들어나지만, 덧새긴 선각이 먼저 그려진 면각화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제작된 것으로 보아 두 문화가 동떨어진 문화가 아니며 연속성이 있을 것으로 본다.(2) 울주 천전리 암각화울산 광역시 을주군 두동면에 위치한 천전리 암각화는 반구대 유적의 상류에서 발견되었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바위면 앞으로 높은 산봉우리가 솟아있어 해가 뜨면 잠깐 볕이 들다가 곧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오전 늦게 햇빛이 비치면 기푹하게 갈아 판 추상도형의 모습이 드러난다. 암각화가 있는 바위면 앞으로 약간의 평지가 단을 이루고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바위면은 비교적 매끈한데, 보다 고대의 동물,인물상 위에 선각의 글씨와 그림을 새기기 위해 바위를 평면으로 다듬은 것이다.면각으로 새겨진 동물상은 쪼아파기로 얕게 새겨져 있고 마멸과 훼손이 심해 지금은 바위면의 오른쪽과 왼쪽 끝에 약간 남아있으며 중심부에는 비교적 깊게 새긴 것만이 일부 남아있다. 그러나 군데군데 남아있는 상을 통해 처음에는 상반부 전체에 가득 새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면각화의 주제는 사람의 얼굴, 사슴, 고래와 비슷한 물고기 등으로 약 40여 점이 있다.암수 한쌍이 묘사된 사슴은 몽골과 중국 북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상으로 역시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본다. 바위면의 가장 중심부에 크기가 작은 동물 사이로 작은 꽃모양이 보이는데 이 모양을 태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슴의 큰 뿔과 태양의 숭배는 북방문화의 영향과 관련하여 볼 수 있다.천전리 암각화의 상단부에는 바위를 쪼아낸 뒤 깊게 갈아내어 만든 추상도형이 여러 점 표현되어 있다. 이 도
나라야마부시코 (楢山節考)...한편의 단편영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잔상들이 남는 영화이다.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가장 사실적, 현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인간의 본능을 간파해내는 그 힘에 숨이 막힐 정도이다.그곳에서 하나의 생명은 단순한 축복일 수만은 없으며, 때론 저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바로 생명에 대한 메시지를 다루지만, 다른 영화처럼 무조건적인 생명에 대한 경이를 다루지는 않는다.이 시대에는 생존이 우선 이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람이 태어난다고 해서 막연히 축복해줄 수만 있는 그런 시대는 아니었다. 치열한 생존본능만이 공동체를 지배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소금, 곡식 한 자루에 팔려나가 가계를 도울 수 있었던 딸들을 바랬고, 아들은 자연스레 영아살해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논가에 버려진 아이가 나오는 장면은 지금도 섬뜩하여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또한 이곳에서 며느리를 새 식구로 맞이한다는 것은 새 생명의 잉태와 노동력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생산력 확보를 위해 존재할 뿐이고 결혼은 생존을 위한 제도화 된 형태일 뿐이다. 생존과 직결된 것 만이 중요한 곳이 바로 이 곳 사람들의 이야기다.이 영화에 빼놓을 수 없는 묘미는 영상미를 들 수 있다. 산에 새하얀 눈이 내리는 오프닝 장면은 자연 순환의 거대한 법칙을 일깨워주는 듯하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곤충, 동물들의 모습은 엄숙함마저 느껴진다. 영상미를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은 단연 영화 엔딩 부분에 눈 내리는 장면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버리고 가다가 눈이 내리자 다시 돌아가서 눈이 온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보통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눈 내리는 장면이 이토록 슬프고 애절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눈이 오면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전설처럼 오린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새 하얀 눈은 우리를 슬픔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이 영화에는 다른 영화에 비해 성관계를 맺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온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사실적으로 그리고자한 감독의 의도가 들어갔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의 성관계 맺는 장면에서 동물들의 교미장면이 겹쳐지는데 이것은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성관계를 맺는 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닌 동물적 본능 같은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나라야마 부시코에서의 인간은 생존의 법칙에 따르는 모습을 띄지만, 그 법칙을 지키고 순응하기 위해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도 보인다. 이는 나라야마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미타영감과 그의 아들, 나라야마에 가기위해 준비하는 오린 할머니와 어머니를 나라야마에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그의 아들 타츠헤이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이러한 부분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무엇인가가 다르다는 대립성을 보여주는 듯 하기도 하다. 인간이란 것이 반드시 지켜야할 법칙이 있음에도, 그 법칙을 따라야 하는 것을 당연히 알면서도 고민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옛 풍습으로 알려진 ‘고려장’을 떠올려봤다. 이 풍습이 전설로만 남아 있다는 말도 있고, 일본이 만들어낸 왜곡된 풍습이란 말도 있고 확실한 진위는 잘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소재와는 비슷하다. 어릴 적 만화영화로 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일본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나라야마에 가야하는 법칙에 따르는 오린 할머니와 원치는 않지만 어머니를 나라야마에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에 힘들어하는 타츠헤이를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빗대어 보자. 제 부모를 버릴 수 있겠는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오린 할머니다. 그녀는 더 이상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다. 그리하여 나라야마로 갈 준비를 한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만큼 쇠약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돌절구에 자신의 이를 깨버리기도 하는 그런 인물이다. 70살이 되면 나라야마에 가야한다는 그 법칙을 철저히 지키는, 누구보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이리석어 보이는 그녀의 확고함은 아들을 강하게 세우려는 어머니로서의 의지이기도 하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회의 법칙을 지키려는 오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내일 나라야마에 가면서도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그녀의 모습에 숙연해진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오린 할머니는 신금을 울리는 존재라 말하고 싶다. 죽음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완숙함의 경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ocu 결혼과 가족-나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본 바람직한 부모상은 어떠한 것인가?*서론*우리는 ‘관계’라는 틀 안에서 서로 연관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한 관계 중에는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등이 있을 것이고 이들 관계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자녀의 인격형성, 가치관 형성 등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바람직한 부모의 역할이라는 것이 모범답안처럼 존재하는 것일까?*본론*바람직한 부모의 모습을 논하자면 나의 부모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 곧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부모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고 내가 잘못된 길을 걸으려 한다면, 따끔하게 훈계해 주시고 나에게 부족함 없이 대해주신 분들이 바로 우리 부모님이셨다. 내 부모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바람직한 부모가 되려면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살펴보자.첫째, 자녀가 좋은 환경에서 행복한 아이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해야한다고 생각한다.이는 아이가 긍정적인 성격을 갖느냐, 부정적인 성격을 갖느냐의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성격이란 것이 한번 형성되면 바꾸기 힘든 것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긍정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게 부모가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태어난 것이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교사이신 아버지, 전업 주부이신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학교에 가면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고, 그 관심이 싫지 않았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그 관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매사에 긍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둘째, 자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부모가 되자는 것이다.학교를 끝내고 집에 오면 어머니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시고 맛있는 간식을 준비해주셨다. 간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하루 일과를 이야기 하는 것이 어머니와 나에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는 부모님과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우리가족은 다른 시간은 몰라도 아침식사시간은 반드시 함께 보냈다. 그 시간은 모두가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으며 서로 대화가 오가는 시간이었다. 서로 있었던 일과를 이야기 하기도하고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소소한 신변잡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와 부모님의 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오가는 대화가 많다보니 가끔씩 의견 차이를 보이거나, 갈등이 있을 때도 대화로 풀려고 했다.차근차근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에 이야기를 들고, 그러다보면 차츰 상대방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었다. 무작정 화만 내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대화를 하다보면 의견차도 많이 좁혀지고 다툼이 많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현재 나는 부모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내고 있다. 같이 살지는 않지만 자주 전화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중요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충분히 상의를 한 후에 결정을 내리는 편이다.셋째, 자녀를 믿어주자는 것이다.내가 맏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나를 많이 믿어주셨다. 나 또한 부모님의 나를 믿어주시는 만큼, 모든 일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단돈 100원이라도 필요하면 꼭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곤 했다. 정말 사소한 일이지라도 부모님께 거짓이 없으니 나도 떳떳하고 부모님 역시 ‘미라는 거짓말은 안 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 좋아’ 라며 나를 칭찬해주셨다. 나를 항상 믿어주시는 부모님이 고마웠고 그 고마움의 보답으로 거짓 없는 행동을 하리라 다짐했었다. 이처럼 아이들은 부모님이 믿어 주는 만큼, 그 고마움에 거짓 없는 행동으로 부모가 신뢰할 수 있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넷째,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어릴 때부터 아이의 견문을 넓혀주자는 것이다.우리가족은 내가 어릴 때부터 주말이면 다 같이 작은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들리지 모르지만, 차를 타고 교외지역으로 나가서 점심을 사먹고 사진도 찍고 돌아오는 길에는 온가족이 목욕탕에 가는 그런 것이었다. 친구들이 “너희 가족은 정말 대단해! 어쩌면 주말마다 그렇게 같이 다니니?” 라고 부러워하곤 했었다. 이처럼 부모와 자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으면 아이는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낄 것이다. 아이는 여기서 기본적인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되고, 그 정서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올바른 인격, 성격,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 성격, 가치관이라는 것이 한번 정립되면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의 인격, 성격, 가치관형성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나는 부모님 덕분에 유명한 곳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는데 그때의 경험들이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이처럼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해주고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제공해 주는 것 또한 바람직한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다섯째,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분명히 나누고, 아이에게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우리 부모님은 나를 어떻게 꾸중하셨던가? 생각해보았다. 부모님은 항상 같은 편이셨다. 그러나 나를 대하는 방법은 조금 다르셨다. 어머니는 나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셨고, 아버지는 무섭고 엄하게 나를 꾸중하셨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어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평소에는 그렇게 자상하던 아버지인데 내가 잘못만 하면 호랑이로 변하셔서 무서워서 많이 울었었다.부모의 역할 중에 ‘아버지는 무섭게’ ‘어머니는 온화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잘못된 것은 따끔하게 야단치고 지적하는 것이 올바른 부모의 모습이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감싸주고 보듬어주기만 한다면 아이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때로는 단호한, 권위적인 부모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 때 부모는 갈팡질팡 해서는 안 되고 일관성 있는 모습으로 아이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