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유신체제와현대 한국정치목차Ⅰ.서론Ⅱ.유신체제의 등장Ⅲ.유신체제의 유지Ⅳ.유신체제의 붕괴Ⅴ.결론Ⅰ.서론지난해 우리나라 18대 대통령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박정희 대통령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고 말을 한다.한편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강력한 독재 권력이었던 유신체제의 대한 비판이며, 둘째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대기업 중심의 잘못된 방향의 경제성장이라는 것이다. 경제학과 학생으로서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으로 극심한 양극화가 발생 되는 등 많은 부작용이 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유신체제는 경제부문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의 분명한 過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레포트를 통해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유신체제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보고 싶어서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Ⅱ.유신체제의 등장ⅰ.사회, 경제적 무질서의 정도1960년대 초부터 박 정권에 의해서 추구된 노동집약적 수출주도형 산업화의 결과 제3공화국 하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거의 모든 사회집단들의 생활수준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함께 절대 빈곤층의 비율이 감소되었으며, 개발도상국의 기준에서 보아 상대적으로 평등한 소득분배가 유지되었다.이러한 경제적 성과라는 일반적 배경 속에서 한국 경제의 어두운 측면도 존재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농민, 도시빈민, 노동자 등과 같은 민중계층이 경제성장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한국 상품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해 저임금이 지급되었던 산업노동자들을 포함한 도시민에게 저정희 정권이 ‘반공’을 국시로 선택한 사회적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곧 빨갱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ⅱ.국가안보박정희의 10.17 특별선언에 따르면 체제변화가 필요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강대국들이 긴장완화라는 명목 하에 “제3국이나 중소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체제변화를 정당화할 만큼 심각한 국가 안보 위기를 야기 시킨 것은 아니었다.1960년대 후반에 북한의 대남 도발행위가 급증함으로써 안보문제가 보다 심각하게 대두되었었다. 또한 닉슨 대통령이 ‘닉슨독트린’을 선언하면서 주한미군을 2만 명 철수 시키는 등 한반도 안보에 대한 우려는 심각해져갔다. 그렇지만 1969년 이후 북한의 대남도발행위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북한은 군비를 삭감하게 된다. 따라서 유신체제가 성립된 1972년 10월경에는 안보문제가 과거에 비해 심각한 이슈가 아니었다.ⅲ.남북대화와 민족통일10월 유신이 선포되기 이전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상황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국민들에게 민족통일의 기대를 불러일으킨 남북대화였다. 1971년부터 시작된 남북한 간의 접촉은 미, 중 관계 개선과 관련된 국제환경적 변화의 직접적 결과였다.엄격한 반공주의와 지속적인 북한의 남침위협 속에서 살아온 남한 국민들에게 7.4 공동성명의 내용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극소수의 야권지도자들은 7.4공동성명의 발표 이면의 정치적 동기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것을 환영했다. 이렇게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와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고조될 무렵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유신체제의 성립이 선포된다.박정희에 따르면 체제변화가 필요한 구체적 이유는 북한 정권이 그 주민들의 모든 언행에 대해 완전한 통제를 행사 중요한 측면은 대통령 한 사람에게 극단적으로 집중된 국가권력과 장기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그 체제는 박정희가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야당에게 뿐만 아니라 집권층 내에서의 권력이양조차도 불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박정희가 체제변화를 단행하기로 한 결정의 저변에 존재한 것은 권력에의 의지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민주제도가 적합하지 않다는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5.16쿠데타를 주도하여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군사정권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그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비생산적인 정쟁을 비롯한 쓸데없는 낭비 요소를 없애야 했다. 국가 발전을 저해한 것은 소모적인 정쟁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양식이었다. 따라서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 제도보다는 독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ⅴ.강한 국가와 약한 사회1961년에 박정희가 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 사회집단들에 대한 통제를 위한 국가의 강제력은 절대적 의미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박 정권하에서는 중앙정보부가 평상시 국내 정치통제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정보부는 국가안보뿐만 아니라 정권 안정을 도모하고 박정희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거의 모든 문제에 활발히 개입하였다. 정보부는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국가권력이 강화된 또 다른 이유는 박 정권에 대한 군부의 지지였다. 박정희는 엄격한 규율과 결단성에 입각한 통치방식으로 인해 그리고 경제적 업적 때문에 군부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Ⅲ.유신체제의 유지ⅰ.새로운 프로젝트의 실패박 정권이 유신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던 프로젝트는 남북대화였다.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은 남북대화를 통한 평화적 민족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유신체제의 성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그렇지만 남북대화는 1973년 9월에 사실상 결렬되었다. 남한은 남한대로 자신들의 주장만 펼쳤고, 북한은 북한대로 자신들의 주장만 계엄포고령을 위반한 죄로 구속되어 2-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 반대자들과 일반 국민들의 강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반대활동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그러나 1973년 여름에 일어난 두 사건이 정권의 입지를 약화시켜 반대세력이 저항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하나는 남북대화의 사실상 결렬이었고, 다른 하나는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김대중이 일본에서 납치된 사건이었다. 일렬의 사건들로 학생들의 반대데모가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침묵했던 미국정부도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한국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였다.학생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갈수록 확산되었고 그 강도도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학생데모의 발생과 함께 기자들의 정치적 불만도 표출되었다. 주로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형태를 띤 기자들의 집단행동은 서울의 주요 신문사와 방송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이러한 강력한 유신반대에 대해 정부는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무력으로 제압하려고 했다. 제3공화국의 정치체제와 비교해 볼 때 반대세력에 대한 이러한 조치는 분명히 아주 심한 것이었다. 정치반대에 대한 이러한 초강경 조치들은 일시적으로 학생시위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적이었지만 정권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속된 사실로 인해 기독교계 일각에서 심한 동요가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박 정권의 억압적 통치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비판이 증가하고 있었다.ⅲ.국가안보 프로젝트와 긴급조치 9호에 의한 통치반대운동을 약화시키고 정권의 입지를 강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외문제, 즉 인도차이나 사태였다. 1975년 4월 30일 월남 패망 뉴스가 언론에 보도되자 정부 내부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이런 안보불안으로 인해 학생운동과 야당의 개헌운동은 중단되게 된다.박정희가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명칭의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 조치였다. 긴급조치 9호의 선포 이후 반 정권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다.ⅳ.국가에 대한 박정희의 통제유지유신체제의 성립이 이후 국가 내부구조의 기본적 특징은 유지되었다. 즉 국가는 아주 중앙집권적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권력은 대통령 1인에게 고도로 집중되었다. 국가의 강제적 도구들, 특히 군부,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에 대한 대통령의 강력한 통제는 국가 내에서 박정희의 권력을 유지함에 있어서 핵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유신체제하에서 일어난 일부 변화로 박정희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여권은 국회를 수적으로 장악하긴 했지만 국회의 제도적 약화로 인해 실질적 독자성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체제유지와 관련된 중요한 정치 현안에 있어서 여당의원들은 박정희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거수기 역할을 했다.ⅴ.정치적 반대세력의 확산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이후 학생시위를 비롯한 반정부활동이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이는 정권의 강압성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이 해소되었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유신체제하에서 일어난 새로운 현상 가운데 하나는 민주회복을 위해서 투쟁하는 반체제단체들의 등장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 친북한 성향의 단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보수단체로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였다. 반정부단체들은 소규모 조직으로 인해, 그리고 국가의 강압성 때문에 정권에 대항할 역량이 가시적 효과의 측면에서는 상당히 약했다.이에 맞서 정부는 정치질서 유지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교육기관 및 언론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대학의 경우 학생회가 폐지되고 학도호국단이 창설됨으로써 학생대표단체의 독자성은 사실상 상실되었다. 또한 학내 군사훈련의 강화와 함께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규율도 보다 엄격해졌다.Ⅳ.유신체제의 붕괴ⅰ.시위의 재개와 정치사회의 변화1975년 이래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대규모 학생시위가 긴급조치 9호 하의 강력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1977년 말부터 재개되기 시작했다. 1977년 10월 7일 약 1,500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민주회복과 학원의
1. 1960년대 남북한 비교1)남북한 통계비교가. 인구남한북한인구(1960)25,012천명11,430천명인구(1965)29,159천명12,408천명- 1960년대 당시 남한의 인구는 북한보다 2배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남한이 북한보다 농지면적도 넓고 농사를 짓기에 더 적합한 기후이기 때문에 남한의 토지생산량이 북한의 토지생산량 보다 월등히 높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구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예상된다.나. 수출실적비교남한북한수출실적(1960)33백만 달러154.0백만 달러수출실적(1965)175백만 달러210.6백만 달러- 1960년대 당시 북한은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반면 남한은 가발과 지하자원 등을 제외하면 뚜렷한 수출품이 없었다. 따라서 북한의 수출실적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다. 산업구조(1960년)남한북한농림어업34.9%23.6%광공업18.9%66.2%건설업3.1%서비스업43.1%10.2%- 남한은 북한보다 상대적으로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농림어업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북한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 북한은 군수산업 중심의 발전을 꾀했고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한보다 월등히 높은 광공업 비율을 볼 수 있다.2)분석-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대부분의 중공업 공장과 발전소를 가지고 있던 북한은 남한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조선’을 주장한 직후 군수산업 중심의 육성으로 산업중심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따라서 경공업과 농업에 대한 투자는 자연히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모든 산업의 생산설비를 제공하는 기초산업이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한 군수공업과도 직결되는 기계 산업 육성에 각별히 관심을 갖고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60년대 중반까지 공업부문의 급속한 성장을 통해 경제성장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기계 산업의 대부분은 군수부문의 산업이었으며 민간부문의 기계공업 분야와의 격차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군수중심공업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반면 남한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경공업 위주의 발전을 하게 된다. 가발, 섬유와 같은 저 숙련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발달하였고 정부는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게 되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미국에서 대규모의 차관을 받게 되었고 독일에서는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대규모의 차관을 받게 되면서 이제는 경공업 위주가 아닌 높은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에 눈을 돌리게 된다. 어마어마한 외화를 바탕으로 포항에 제철공장을 세우게 되고 울산에 중화학 공업단지를 세우면서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의 경제성장을 하게 된다.2. 2010년 남북한 비교2)남북한 통계비교가. 인구남한북한인구(2010)49,410천명24,187천명- 현재에도 북한은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기 때문에 남한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구이다나. 국민계정남한북한경제성장률(2010)6.2%-0.5%명목GNI(2010)10,146억 달러260억 달러1인당GNI(2010)20,759달러1,074 달러- 남한은 1960~70년대만큼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꾸준히 플러스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식량난, 전력난등으로 인해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과 북한은 약 19배 정도 차이가 나게 되었다.다. 대외 경제남한북한무역총액(2010)8,916.0억 달러41.7억 달러수출(2010)4,663.8억 달러15.1억 달러수입(2010)4,252.1억 달러26.6억 달러대미환율(2010)1,156.3원/달러101.0원/달러- 시장경제체제인 남한에 비해 페쇄경제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은 주변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함에 따라서 무역규모가 급속히 감소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무역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라. 에너지 산업남한북한석탄생산량(2010)2,084천M/T25,500천M/T발전설비용량(2010)76,078천KW6,968천KW발전전력량(2010)4,739억KWh237억KWh원유도입량(2010)872,415천 배럴3,854천 배럴- 북한은 남한에 비해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평양을 제외한 지역에는 전력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전력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공장 가동률도 현저히 낮은 편이다.마. 농수산물 생산량남한북한식량작물(2010)4,836천M/T-쌀(2010)4,295천M/T-수산물(2010)3,111천M/T630천M/T바. 광물생산량남한북한철광석(2010)513천M/T5,093M/T비철금속(2010)1,056M/T398천M/T- 북한은 철광석, 무연탄, 텅스텐 등을 비롯한 200여 가지 유용광물이 다량 매장되어 있다.사. 주요공산품생산량남한북한자동차(2010)4,271.7천대4.4천대조강(2010)58,912천M/T1,279M/T시멘트(2010)47,420천M/T6,278M/T화학비료(2010)2,815천M/T459천M/T화학섬유(2010)1,463천M/T30천M/T- 북한의 제조업 부문은 남한에 비해 형편없다고 할 수 있다. 군수공업과 국방비에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경공업과 제조업에는 제대로 된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부족한 전력난으로 인해 가지고 있는 공장마저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아. 사회간접자본남한북한철도총연장(2010)3,557km5,265km도로총연장(2010)105,565km25,950km항만하역능력(2010)830,022천톤37,000천톤선박보유톤수(2010)1,427만G/T80만G/T- 북한은 주로 철도를 이용하여 많은 재화들을 운송하고 있다. 반면 남한은 철도 보다는 주로 도로를 이용해 재화들을 운송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남한은 북한에 비해 월등한 선박 보유와 항만하역능력을 가지고 있다.2)분석- 1960년대에 비해 대한민국은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 냈다. 60년대 세계 최빈국에서 이제는 세계 10위권에 경제대국으로 그 모습이 바뀌었다. 그에 반해 북한은 경제성장은커녕 자국민의 식량난도 해결하지 못하는 최빈국에 머무르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잘 살아보자’라는 국민들의 뼈를 깎는 노력에 결과라고 생각한다. 잘 살기 위해서 근검절약을 생활화 하여 높은 저축률을 바탕으로 국가는 산업들에 투자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저임금 노동을 하고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독일에서 광부가 되고 간호사가 되고 또 베트남에 가서 남의 나라 전쟁을 하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은 고생하며 살더라도 자식에게 만큼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을 교육시킨 높은 교육열 등이 오늘날에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 석유파동과 IMF등 위기도 수차례 있었지만 국민들이 단합하여 수많은 위기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그리고 60~70년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방해한 지도자이지만 경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 시킨 지도자인 박정희의 독재가 경제적인 측면만 볼 때에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능한 지도자가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서 각 산업에 집중할 수 있어서 빠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