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건 기억 뿐-「엘 시크레토 : 비밀의 눈동자 The secret in their eyes」, 2009펑 펑 터지고, 긴박한 음악이 흐르고, 굉장한 특수효과. 돈으로 화면이 가득 메워진 영화들에 질렸다. 언제부턴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전미 박스오피스 순위였고, 영화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헐리웃 배우들의 다음 작품 선정이라던가, 스캔들이라던가 하는 구미를 당기지만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인 것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영화를 접했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아, 영어도 잘 못 알아듣겠는데…’하는 처음의 선입견 따윈 저 멀리 집어던지게 만드는 영화였다. 원래 이 작품은 부천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부터 눈여겨 봐 둔 작품이다. 2010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수상에, 부천 영화제에서는 온통 이 영화의 호평뿐이었다. 필자를 상당히 기대하게 만들었었지만 결국 보지 않고 가슴으로만 기억하고 있다가 이제야 마주하게 된 것이다.시각적인 영화◇미쟝센 : 영화는 전체적으로 그윽하다. 일본 영화에 일본 영화만의 감성이 있고, 그를 투명하고 깨끗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이 영화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남미 쪽 영화는 많이 보지 않아서 어떻다, 라고 정의하기 힘들지만 이 영화에서 만큼은 이쪽 영화가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특색 있는 영상미를 보였다. ‘그윽하다’라고 표현을 한 건 영화의 초점 때문이다. 각 컷마다 카메라의 초점은 그 컷의 주인공에 맞춰져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많은 컷들이 영상의 일부분을 앞에서(즉, 카메라와 가까운 거리에서) 무언가가 항상 가린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 혹은 기둥, 혹은 벽 등. 보는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다. 시야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사람을 어떤 초조함에 이르게 한다. 이 글의 후에 가서 말하겠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모호한 면이 있다.그렇다고 필자가 말한 ‘그윽함’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좋다. 그윽함이란 애초에 나쁜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단어가 아니다. 사람의 눈동자에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을 그만큼 분위기로, 영상미로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롱테이크 : 영화가 인상 깊을 수 있는 것은 비단 영상미 때문만이 아니다. 필자의 정신이 상당히 번쩍 들게 할 만한 장면이 있었는데, 영화 중간에 5분가량 이어지는 롱테이크 신scene이다. 영화 「올드보이」이후 롱테이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처음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영화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추격의 긴장감을 가장 잘 전달해줄뿐더러 축구장의 분위기도 잘 보여주고, 그 축구경기 관객들의 마음, 반응 하나하나까지 잘 보여주는 신scene이었다. 상공에서 축구장을 한눈에 보이도록 내려찍는 장면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관객들에게로 이어져서, 거기서 다시 고메즈를 찾는 벤야민의 입장으로, 또 한 번 관객으로, 이어서 고메즈를 찾은 후 추격 장면으로 이어지기까지가 모두 한 컷으로 끊김 없이 이어졌다. 시점의 혼용을 단적으로 가장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관객들에게 철저히 관객으로 남아달라는 당부 같은 장면.그렇다고 해서 또 완벽히 좋은 느낌만 드는 것도 아니었다. 필자는 아직도 이 장면이 왜 상공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시각적인 영화 : 이 영화는 상당히 시각적이다. 어느 영화나 시각적인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눈으로 ‘보는’ 매체가 영상이고, 영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영화니까. 다만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영화가 다른 영화보다 시각적인 것에 특화되어있다는 말이다. 영화 「엘 시크레토」는 ‘보여주기’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대표적인 것이 사진. 사진들은 영화 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며, 소설 속 내용과 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구분선에 사진이 존재한다. 사진을 통해 벤야민은 고메즈라는 실제 범인이 있음을 유추해 낸다. 그 역시 사진 속에서 이레네를 쳐다보니까. 그의 라이벌 검사보가 범인이라고 잡아넣은 살인사건 용의자가 실제 범인이 아니라는 것도 굳이 말로, 대사로 표현되지 않았다. 폭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 용의자의 얼굴에 폭력의 흔적으로 찍혀있으니까. 관객은 누구나 그것을 ‘보면서’ 지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누구나 이 영화를 봤다면 인상 깊었을 것이다. 두려움 ‘Temo’와 너를 사랑해 ‘Te Amo'는 알파벳 A 하나 차이라는 것. 감독의 계산도 상당히 치밀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A가 쳐지지 않는 타자기라는 장치를 끼워놓았으니까. 이 얘기는 잠시 후 마저 하자.모호한, 그러나 자연스러운 영화◇장르 : 영화 「엘 시크레토」의 장르는 멜로다. 그러나 ‘당연히’ 멜로, 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마지막 25년간 이루어 온 모라레스의 복수는 섬뜩하다. 고메즈를 향한 복수심과, 그를 잡는 긴박한 과정은 추리, 혹은 스릴러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추리 영화나 스릴러라고 딱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런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 안에 이런 다양한 장르가 조금씩은 녹아있다는 말이다. 파블로가 마시는 섞인 양주처럼.영화 전체를 포괄하는 건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 후에 남는 모라레스의 증오가 이런 장르의 모호함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를 벤야민과 이레네의 사랑 영화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릴리아나를 잃은 모라레스의 복수극으로 볼 것인가.앞서 말했던 미쟝센에서의 특징 역시 모호함을 만들어낸다. 무언가 시야를 가리고 있으면 답답하다. 사랑 영화는 영상이 답답해서는 안 된다. 물론 연인이 싸우는 장면이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랑은 따뜻한 단어이므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연출을 하는 것이 낫다. 하지만 답답함에서 만들어지는 불안감, 초조함은 이 영화가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진실과 허구 :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시각적인 영화’가 되는데 한 몫 한다. 소설은 ‘들려주기’보다 ‘보여주기’가 잘 이루어 져야 좋은 작품이니까. 아무튼 소설은 이야기이고, 이 창작은 작가가 가진 진실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영화 자체가 진짜 있었던 일이냐, 하는 것 따위의 말이 아니라 영화 내에서 배경이 되는 진실(벤야민과 이레네의 과거)이다. 그 진실과 벤야민이 지어낸 소설이 딱 구분 지을 수 없도록 섞여있다. 벤야민이 쓴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과거가 관객들에게 보여지지만, 어디까지가 소설 내용인지, 진실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레네을 향한 벤야민의 마음뿐이다.
연극 「루시드 드림」 감상문악惡 소리 나는, 그런연극을 보게 되며연극에게 퇴짜를 맞았다.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연극을 보기위해 부지런히 달렸지만, 8시 5분에 도착해버렸다. 5분의 차이로 극장에 들어가지 못한 나는 「루시드 드림」의 포스터처럼 어두컴컴한 그곳에서 어두컴컴한 표정으로 담배라도 한 대 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뛰어왔는데. 땀방울이 저 담배연기처럼 식어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결국 다음에 봐야 되는 운명인가보다, 하며 그곳을 떴다.웃기게도 다음날 다시 연극을 보러 가며 또 전날처럼 뛰었다. 연극 시작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같이 보기로 한 친구와의 시간약속에 늦을까봐 뛰었다. 지금에 와서는 공연까지 시간도 남았을 때인데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뭐 어떠냐, 어차피 5분 10분인데 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뛰어야 돼서 뛰었다. 늦었네 안 늦었네 하며 친구와 만나고, 공연을 보러 천천히 걸어갔다. 그때까지 난 공연을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루시드 드림’이 어떤 뜻인지 이제야 알았다. 자각몽自覺夢이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개입할 수 있다, 는 아주 흥미로운 뜻이었다.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연극 「루시드 드림」과 영화 「인셉션」은 그 스케일이나 투자비용에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그러나 다루고 있는 소재가 같은 만큼 그 복잡성은 비슷하다. 진행의 긴박함에서 오는 긴장감이 연극이라고 해서 영화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연극은 처음이었다. 오래, 곱씹게 만드는 연극.여태는 연극, 그 전에 희곡에 가장 필요한 것이 희극적 요소라고 생각해왔다. 코메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웃을 수 있게 만들고,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것. 작년인지 제작년인지, 그도 아니라면 신입생 때였는지 헷갈리는데,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교수님이 물어봤을 때 내가 대답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직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토록 무거운 연극이라니. 스토리를 따라가기 벅차서 멍하니 공연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연극. 웃을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끌고 내려가 밑바닥까지 가라앉아서,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연극이라니. 매력적이었다. 정말로, 연극을 보면서 단 한 번도 웃을 수 없으면서 진중하게 그 연극에 대해 몰입하고 생각해 본적이 처음이었다.다른 분들이 이 연극을 보고 감상문을 어떻게 쓰실지 궁금하다. 생각이 많게 하는 연극이니만큼 그 생각들을 모두 문장들로 술술 풀어 긴 문단을 만들고, 똑같이 진중한 태도로 연극이 던진 물음에 나름대로 답하려 하겠지. 나는 그게 안 될 것 같다. 이런 방식의 연극도 처음이고, 물론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이런 것을 보고 느낀 점을 감상문으로 쓰기 어렵다. 온갖 산만한 생각들이 이어지지 못하고 판을 친다. 벌써부터 느끼고 있다. 그래서 아마, 감상문의 문단은 끝까지 짤막짤막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얕다, 는 것이 이렇게 답답할 수가.꿈꿈을 꾸는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지만 분명 자신의 생각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꿈을 꾸어야겠다’ 생각하고 그 꿈을 꿀 수는 없지만 ‘그때 대체 왜 그랬을까’하고 계속 생각하면 ‘그때’가 꿈에 나올 수 있다. 또한 현실이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있으면서도 꿈의 세계는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릴 때 꿈에 고블린이 도끼를 들고 나와서 나를 내리 찍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꿈속에서 그 비현실적인 상황은 언제나 현실적이다. 난 진짜 내가 죽은 줄 알았다. 꿈에서 쓰는 초능력이 그 세계에서는 진짜 내 능력이라고 믿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매력적이다.‘루시드 드림’의 뜻을 연극을 보고 난 후에 알았다는 것이 한이 된다. 분명히 어디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하면서도 그 뜻을 기억해 낼 수 없었고, 연극을 보면서 더 헷갈렸다. 연극 내용 전체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무슨 주인공 이름이 루시드인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덕분에 더 헷갈렸다. 하지만 이제 루시드 드림의 뜻을 알고 있으니 거기서부터 생각하기로 한다. 자각몽. 꿈속에서 ‘와 이건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다’라는 생각이 가능할까? 아주 가끔, 가능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꿈에서 하는 짓이구나 하는 그 순간부터 꿈을 쥐락펴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쥐락펴락’도 어차피 꿈이다.연극 「루시드 드림」에서는 주인공이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닌지 불분명하게 나온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 그 상황이 현실에서의 상황인지 아니면 꿈에서의 환상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렇다. 환상. 사실 「루시드 드림」을 보고 자각몽에 대해 알았을 때 느낀 건데 잠시 ‘아 그게 자각몽이었구나’하다가 ‘가만, 그게 왜 자각몽이지? 왜 꿈이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과 현실이 헷갈린다기보다 연극은 환상과 현실이 헷갈린다는 편이 맞았다. 별 것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의문이 가는 것이다. 극 중 어느 부분에도 주인공이 잠에 드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현실과 현실이 아닌 부분을 구분하는 것은 조명과 이동원의 등장 동선이 무대의 오른쪽, 철창이 아니라 뒤쪽이라는 것 뿐.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나름의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 바로 연극이 우리에게 해주고자 하는 말이 ‘누구에게나 악마는 있다’라는 것이다. 연극은 인간의 어둡고 음습한 면을 부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 속에 존재하는 악마. 그것은 필히 애초에 존재했던 우리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았을 때 현실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환상이라면 악마는 우리가 직접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해야한다. 환상으로서 그 세계에 빠져버려 현실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만, 연극은 보다 근본적으로 내재된 어두운 면을 말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 최현석이 선배의 유물을 받으며, 그 후 이동원을 만나며 그 속의 악마가 벌건 눈을 떠버린 것이다.주인공은 꿈속에서 몇 번이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생각하다가, 어찌되었건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도끼로 내려쳐 죽인 것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살인을 해버린 것이다. 그는 꿈속에 나온 이동원을 자신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냈으며 그 또한 다른 모습을 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후반부에 가서 이동원과 최현석은 동일시되고, 아버지였던 목사가 십자가를 들이미는 것은 이동원이 아니라 최현석일 수 있다.게임이동원과 최현석이 헷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도통 스토리를 따라가기 힘들어진다. 어려우면서도 극을 '잘 짜여졌다, 완벽하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 따라가기 힘든 것 역시 작가의 의도인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해석한 극의 스토리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다가, 최현석이 이동원의 배다른 동생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스토리까지 떠올랐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꿈에 주인공은 영향을 받았고, 명백히 살인을 저질렀고, 자신 속에 있는 악마를 인정했다. 최현석의 의도인지 이동원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동원은 정신 이상으로 풀려났다. 이동원이 승리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극은 끝난다.그러나 풀려난 것으로 이동원은 승리자인가. 아니다. 그는 승자와 패자로 구분할 수 있는 게임을 벌이지 않았다. 단순히 최현석의 속에도 악마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극이 최현석과 이동원의 일종의 심리 게임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