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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영 - 손님 서평
    황석영 - 손님 서평소설의 주인공인 ‘류요섭’과 ‘류요한’형제는 개신교가 조선에 들어와서 얼마 되지 않아 어려운 가운데서도 신앙을 받아들인 선조의 영향으로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 되었고 류요섭은 미국에 와서 목회활동을 하고 형 요한은 교회 장로로 있다. 두 형제의 고향은 황해도이고 전쟁 때 월남하였는데 차츰 나이도 들면서 고향을 생각하다가 ‘재외동포 고향방문단’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그런데 고향을 가기 사흘 전, 요한이 죽고 그 때쯤부터 요섭은 꿈같기도 하고 생시 같기도 한 귀신들을 보게 되는데, 그 귀신들은 옛날에 고향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들도 있고, 동네 어른들도 가끔씩 보인다. 그 꿈이 하나의 줄거리가 조금씩 연결될 것도 같지만 단편적인 모습들로 인해 요섭은 혼란을 겪게 된다.요한을 화장하고 그의 유품으로 남은 뼛조각 하나를 챙겨 북한을 방문하러 갈 때 귀신이 된 형은 동생 요섭에게 다가와 나도 같이 고향에 가야겠다며 동생 요섭의 몸속으로 들어온다.요섭은 평양에 도착해 머물 때에도 기력 없는 듯 며칠을 보내다 황해도 신천 찬샘골에 가게 된다. 형의 귀신과 대화를 나누며 그와 하나가 되었다 둘이 되었다 하며 50여 년 전의 과거의 기억으로 들어가게 된다.그곳에서 요섭은 당시 기독 청년단이었던 형이 연루된 끔찍하고 잔인한 45일간의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요섭은 형 요한이 북에 남긴 아들 단열이와 부인을 만나고, 고향땅에 세워진 학살박물관을 참관하게 된다. 그곳에서 당시 민간인학살사건의 잔재들이 보고 생존자의 참담했던 그 때의 증언을 듣게 된다. 요섭은 그에 눈물짓고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지만 사실은 우익기독세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임을 알게 된다.서로를 죽이고 죽던 그 때의 설움을 당시 같이 살았던 동네 친구들과 고향 마을에서 먼저 죽은 마을 사람들이 요섭에게 모두 모여 자신들이 겪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요한과 요한의 아내, 두더지 삼촌과 이찌로, 이렇게 산자와 죽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가 자신의 한을 이야기하며 선도 악도 없는 곳으로 떠나게 된다.그렇게 소메 외삼촌 댁을 나와 참샘골에 들러 형 요한의 속옷을 태우고 뼛조각을 묻어주며 소설은 마친다.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읽는 동안 가슴이 꽉 막히는 답답함을 느끼며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없었다. 손님은 한국전쟁중인 1950년 10월 13일 이후 약 45일 동안 황해도 신천에서 3만 5천여명의 양민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신천학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자칫 자연스럽게 침묵 속에 묻힐 수 있었던 기억들을 다루면서 우리의 인정하기 싫은 실질적인 가해자를 제시하고 있다. 또 보다 지난 과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근원을 파악하며, 더 나은 현실과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것 같다. 사건은 정말 가슴을 칠만한 일이었고, 전쟁의 시작이 북측이라 하더라도 미국을 포함한 남측이 자행한 비인간적 폭력은 여지없이 고발되어야한다. 이러한 비판과 고발이 희생자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서로가 진정한 화해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연유에 손님을 읽는 내내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다.소설로 넘어가 보면 손님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류요섭의 고향방문으로 시작하여 신천학살사건에 결부된 여러 인물들의 회상 속으로 들어감으로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긴장감을 주었던 인물을 내면 심리 묘사 또한 인상적이다. 요섭이 형의 아들인 단열을 만나던 장면에서 과거와 자신이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원망하며 울던 단열에 비해 학살자의 가족인 요섭과 그 가족들은 그 덕에 살아있으나 그러기에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저나 삼촌은 가해자가 아니잖습니까?” 라는 요섭의 질문에도 “가해자 아닌 것들이 어딨어!” 라는 외삼촌의 대답은 학살이 몇몇의 잘못이 아닌 그런 잔인함이 가능했던 그 시대의 모든 이의 잘못이라는 것을 아무도 외면할 수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요섭 역시 아직도 꿈을 꾸는 과거 죄의식에 자유롭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학살은 기독교와 맑시즘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두 ‘손님’의 대립으로 전개되는데 요섭의 아버지 '류인덕' 장로는 동양척식회사의 마름으로 중농 이상의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토지개혁에 협조치 않아 곤욕을 치른다. 그 후 그의 소유 토지 일부를 몰수하는 데 공의하고 풀려나고 아들 요한은 이 일을 마귀와 기독교의 싸움으로 단정하게 된다. 그런데 토지개혁위원장이 이찌로(자작농들이 공동으로 고용한 동네머슴)이고, 마을 주민 가운데 천대 받던 이들의 구성이었다. 거기에 더 큰 모욕감과 반감을 샀고, 1950년 7월 17일 황해도 개신교 청년들은 '구국동지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반공투쟁을 결의한다. 요한과 상호가 활동했던 반공단체가 바로 이것인데 공산주의자들의 검속을 피해 구월산에 입산해 있던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 유엔군의 진격에 맞추어 은률과 신천 등지에서 봉기를 단행한다. 이것이 신천학살의 시작이었다. 개인적인 적개심이 동기가 되어 학살은 이미 종교를 등에 업고 무자비하게 진행된다. 입장이 다른 서로가 한쪽이 먼저 공격하자 보복하고 그것에 대한 보복이 계속 이어져 결국 누구를 왜 죽이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이 학살은 토지몰수의 모욕만으론 설명하기 부족하다.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확신 속에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신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착각 속에 마음 놓고 저지른 악행들. 믿음이, 신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소설을 통해서도 오늘 날 현재를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몸서리치게 피부로 느낀다. 그렇게 소설 손님을 통해 인간의 끝자락까지 보았으며, 서로간의 복수의 끝이 결국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08.06.30| 3페이지| 1,500원| 조회(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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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강인철
    한국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 서평- 강인철해방 이후 한국기독교회의 국가사회와의 관계와 그 정치사회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둔 연구서로서 종교영역에 대한 국가의 지속적이고 강도 높은 개입과 시민사회의 상대적 미성숙 및 국가 영역의 시민사회영역에 대한 전면적 침투, 피선교지 교회로서의 위치에 따른 대외적인 종교적 종속성 등 서구사회와는 상반된 특징들을 보여주는 기독교회의 다양한 내적 요인을 보여주었다.또 지금까지 1945년부터 제2공화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신교회를 대상으로 삼아 내부적 종교지형의 변동을 중심으로 놓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면서 형성되고 변화되어간 시민사회, 종교시장, 국가와의 복합적인 관련 방식을 분석해보았다. 얼핏 보기에 이 일련의 과정들은 한국 개신교회의 친미 반공 분단 체제로의 일방적 편입 과정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개신교회의 사회적 공신력 실추, 신흥 종파의 거센 도전, 그로부터 점증하는 종교적 혁신에의 사회적 압력이 있었다.그리고 이때까지는 확실하게 감지되고 있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변화하는 국제적 종교 정세의 변화, 그리고 그 같은 변화가 조성하는 압력에 저항력을 갖지 못한 종속적 구조의 심화, 교파분열의 결과 자유롭게 발양된 교파적 개성, 특히 기장 교단에 의한 자주성 확립에의 분투와 종교적 진부주의의 정치적 확장 가능성 제고가 되었다.이 모든 변화에의 구조적 힘들을 능동적으로 예언자 운동의 지향에 연결시킬 잠재력을 지닌 다양하고도 광범한 불만 세력의 성장, 변화를 갈망하는 종교적 수요를 식별하고, 이를 새로운 종교적 생산으로 전형시킬 능력을 갖춘 비판적인 지식인 집단의 축적 등 변화의 용트림도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변화의 기폭제는 1960년대에 등장한 국가의 강화된 종교 통제 정책, 원조의 감소와 종교적, 정치적 진보주의로의 대전환으로 압축되는 해외 종교 부분의 변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국가와의 연합 전략(예장 합동 등 보수교단들), 포괄주의 내지 절충주의적 전략(예장합통합, 기감등), 결국 국가와의 대결을 불가피하게 만든 민중 선교 전략(기장 등)의 세 갈래로 판이한 종교적 혁신이 시도되었다.국가와의 대결을 회피하는 한국 자본가층의 속성으로 인해 자본의 전면적인 철수가 이루어짐에 따라 기장교단의 선택은 민중적 성격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던 데 비해 보수 교단들은 원조의 감소에 대처하여 종교 권력 주고에 자본가층 평신도를 더욱 깊이 끌여들였다. 각각의 선택이 결코 순조롭게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그 선택들이 의미하는 바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교회 밖에 사람들의 눈으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영향력을 미치며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정치와 종교는 고대의 미분화된 상태로부터 중세 서양의 종교지상시대를 지나 근대에 들어 종교는 과학과 정치에 상당한 영역을 양보한 뒤 이제는 서로의 영역을 더 이상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국가 헌법마다 정교분리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즉 마음의 평화를 위해 종교가 존재한다면 사회문제는 주로 정치에 맡겨두어 역할분담을 하며 가능한 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줄 것을 약속한다.그러나 소위 정교분리라는 것은 양자가 서로 건강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어느 한 쪽이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 다른 한 쪽이 그 부분의 일부를 담당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사사건건 간섭하여 엉켜도 혼란스럽겠지만, 그렇다고 심하게 뒤틀린 것을 내 영역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방치하면 공멸하는 수도 있다. 꽉 막힌 분리주의 고집 때문에 삶의 근본인 행복 추구가 무참히 허물어지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따라서 종교가 스스로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회의 썩은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데 동참하는 것은 건강한 종교성을 지켜가기 위한 자기방어적인 측면이 강하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그런 깨어있고 건강한 종교만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것이다.그에 대해 강인철 교수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로 대표되는 한국 종교계의 사회적 영향력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영향력에 걸맞게 공신력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위기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인 인구 중 두 명 중 한 명은 3개 종교에 속해있는데 이 세 종교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고 시민사회의 주요 권력블록 중 하나가 되었다.이처럼 종교는 어떤 권력자도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으로 성장했지만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종교 내부에서 위기담론이, 종교 외부에서 종교권력에 대한 담론이 확산되는 양상이 바로 그것이다.한국의 몇몇 종교조직들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며 그 힘을 종교영역 내외에서 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개신교의 양대 교파 중 장로교는 수십 년 동안 수십 차례의 교파 분열을 겪었고, 감리교는 이른바 ‘서클정치’의 지배를 통해 분열주의적 성향을 보여줬다. 이런 것으로 인해 사회구성원들만 아니라 신자들조차 존경과 신뢰마저 잃게 해 사회적 이미지 역시 부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문제가 되는 또 하나는 종교가 개신교가 정치나 경제, 언론, 문화, 예술영역에 개입하는 것인데 우리네 교리를 내세워 여성의 권리, 동성애, 낙태나 이혼 등의 쟁점에 강력한 입장을 표명해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교리를 시민사회에 확대적용하거나 강요하려는 사례는 빈번하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20년간 계속된 민주화를 통해서도 주요 정당과 국회는 ‘국회조찬기도회’ 등의 신도모임을 조직했다. 이것이 실질적 ‘로비창구’역할을 담당한다고 한다.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해 특정 종교의 대학설립이나 선교활동을 제한하는 부정적인 모습들과 언론에 의한 종교비리 고발, Anti Christian, 반종교 사이트, 종교단체로 인한 환경파괴, 교회 내 권위주의적이고 차별적인 기제들, 재정운영의 불투명, 세습시도 등이 한 세기 동안 꾸준히 증가한 개신교의 힘과 영향력은 이제 더 이상 이렇게는 사용되어서는 안되겠다. 그러기에 개신교인들의 역할과 책무가 더욱 중요하게 되며, 우리 사회의 건강을 되찾는 데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겠다.
    독후감/창작| 2008.06.30| 3페이지| 1,500원| 조회(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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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건주의의 영향
    경건주의의 영향1) 근대 선교에 끼친 영향독일 경건주의운동의 직접적이고 가장 큰 소산이라면 그것은 선교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각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것이 처음으로 뿌리 박은 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였다 그리하여 노르웨이에서는 그린란드로 초대 선교사 한스 에게데와 노르웨이의 위대한 부흥가 한스 닐슨 하우게를 배출하였다 특히 에게데는 1721년 46명을 거느리고 그린란드로 떠났다 그는 불굴의 용기로 헤쳐 나가 글자도 없는 에스키모어의 문법책을 1776년에는 마침내 신약성경 전부를 출판하였다 이와 같이 그린란드의 선교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에게데 부자의 의해서 선교되었다덴마크에서는 그 나라 왕이 할레 대학의 프랑케에게 인도의 자기 나라 식민지로 보낼 선교사를 요청하여 할레의 두 선교사를 덴마크가 인도로 파송하게 하였다 바톨로메우 찌겐발크와 헨리 플루차우가 1705년에 인도로 가게 되엇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덴마크-할레 합동 선교 사업의 시초엿다 특히 찌겐발크의 어학 솜씨는 노라울 정도로 뛰어나 3년 만에 신약성경을 인도 안에서 쓰는 언어 중 어떤 언어로도 번역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타밀어 첫 번역을 하였으며 1714년 완결된 신약성겨이 나왔다이들의 선교원칙을 보면 첫째로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육의 필요서을 느껴 교회와 학교의 병행을 강조 했으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면 그들의 글자로 기록된 말씀이 이어야 된다고 필요성을 느껴 성경번역에 착수 하였다 셋째로는 복음은 주민들의 정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하여 저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넷째로는 선교의 목적은 명확히 개인적인 개심이어야 한다 다섯째로는 가급적이면 조속한 시일내에 인도인 교역자를 가진 인도교회를 출현시켜야 한다는 등의 원칙을 나름대로 세우고 일하였다 이에 대해 모이어는 "경건주의가 성행된 기간은 비교적 길지 못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생긴 전도정신과 선교정신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2) 모라비안 운동에 끼친 영향모라비안의 영적 지도자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심오한 신앙적 확신에 가득 찬 사람으로서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할레 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그는 경건주의에 큰 감화를 받았으며 항상 경건주의의 빛 아래서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였다 1722년 박해를 겪고 있던 보헤미아의 형제회가 그의 초청을 받고서 작센에 있는 그의 영지 내에 있는 헤른후트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헤른후트라는 말은 독일어 주님과 보호하심의 합성어로 '주님이 지키신다 '는 말이다대부분의 경건주의자와 비슷하게 진젠도르프는 루터파의 신앙전통을 따랐으나 때로는 루터파 정통주의의 사변적인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모라비안이 갖는 의의는 세계 곳곳에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큰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들이 선교하는 곳곳마다 영적 후손들을 성장시켰다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존 웨슬리가 새로운 광명과 영감을 받아 그로 하여금 놀라운 부흥운동을 하도록 한것은 모라비안에게서 받은 감화 때문이다 모라비안은 경건주의의 최상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고 하였다3)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에 끼친 영향경건주의가 영국에 전래된 것은 모라비안들에 의해서 된 것이지만 그것이 여국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데에는 웨슬리의 힘이 매우 컸다 그는 옥슾드 대학에서 성결 클럽을 만들어 경건훈련을 하였다 이 클럽은 내적으로는 경건엽습과 영적 수야을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외적으로는 복음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럴 즈음에 이 단체로 부터 북미개척 선교사 선발 청원이 잇어서 웨슬리 형제가 파견되어 가는 도중 배에서 모라비안파 선교사를 마나 그들로 부터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고 또한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평화롭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모라비안들을 보고 싶은 감명을 받았다 영국에 돌아오자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을 찾아가서 때마침 영국에 와 있던 피터 볼러를 소개 받았다 볼러는 웨슬리의 신학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과 온전한 성결과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선행이나 인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이상의 모든 체험은 순간에 얻는 다고 가르쳤다 그러던 중 올더스게이트에서 열림 모라비안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홀연히 회심하여 거듭나는 경험을 얻게 된 것이다 웨슬리는 두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첫째는 회심의 정서적 경험이었고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성화였다 또한 지금 실제로 죄를 벗고 성결한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강조하였다 웨슬리의 복음운동은 인간내심의 혁신운동이요 교회 혁신의 복음운동이었다4)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끼친 영향18세기 동안에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는 유럽에서 얼마 전에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개인 경건에 관한 각성이 여러 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운동과 다른 점은 이러한 각성이 모든 교파를 초월함으로써 미합중국을 형성하기까지 영향을 끼친 개신교 기독교를 형성하게 된 사실이다죠나단 에드워즈 조지 휘필드 및 그 밖의 위대한 설교자들에 의하여 뉴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대각성운동은 현대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종교 운동이다 이 운동은 회의주의와 불신앙 사상과 더불어 교회가 큰 싸움을 하는 중에 일어난 것으로 당시 도일에서는 진젠도르프 백작의 지로 밑에 헤른후트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웨슬리의 지도 및에 감리교 운동이 일어났다이 대각정운동은 처음에는 1730년쯤 펜실베니아에 있던 메노나이트파와 모라비안파에서 나타났는데 그 다음에 네덜란드 개척교회의 프레링하우젠의 부흥설교에 의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그 후 1734년 메사추세츠 주 노쓰앰프톤에 사는 백성들이 죠나단 에드워즈의 지도를 받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느 로크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영국 철학자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그가 신학으로 방향을 바꾼 뒤까지도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서 볼 수 있다 수년 후에 그는 웨슬리의 체험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의 경험은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광에 집중되어 있었다
    교육학| 2008.05.28| 3페이지| 1,000원| 조회(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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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뱅의생애와교육
    칼뱅은 누구인가?칼뱅은 쯔빙글리와 마틴 루터의 시대가 물러간 다음에 1509년에 프랑스 노용의 신분이 비교적 낮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2세에 카톨릭 교회에 나가서 성직자가 되었고, 14세에는 마르슈 대학에서, 1532년에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으로서 문학, 법률, 신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파리 대학시절에 종교개혁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에 있던 사람들과 알게 되었고 후에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이렇게 여러모로 하나님이 쓰시기 위한 그릇으로 준비되었던 칼뱅을 하나님은 갑작스러운 회심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참다운 양심의 평화를 찾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양심의 평화가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 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마츄런 교회의 대학학장 취임 연설을 통해서 해소하게 하셨고, 이때의 신앙고백으로 그는 개신교 교회를 위하여 일하기 시작했다.그의 나이 26살 때 기념비적인 저서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다. 이 책은 현대의 개신교 교리가 대부분 이 책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만큼 대작이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 인기를 가져왔고, 논쟁과 격찬의 대상이 되었다. 칼뱅이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목적은 개신교도들이 믿는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함으로써 동료들의 오명을 벗기고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개혁주의 편에 서기 위함이었다. 『기독교 강요』는 종교개혁기의 대표적 교리 해석서이다. 출판된 후 100여년간 유럽의 각 대학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었다.이후 칼뱅은 우연한 기회에 제네바로 내려갔고, 생애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당시 유명했던 종교개혁자 화렐을 만나고 그의 권유로 칼뱅은 본격적인 종교개혁가로서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최초의 종교개혁운동이 제네바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러나 곧 그곳에서 쫒겨나고 바젤로 가서 개신교 교회의 목사직을 맡았고 이후 두 아이들을 가진 과부인 이델레트와 결혼한다.칼뱅을 추방했던 제네바교회는 후회를 하고 그를 다시 불렀고 칼뱅은 1541년 제네바로 가서 두 번째 사역을 하게 된다. 칼뱅은 비로소 제네바에서 정치적 권한과 종교적 권한을 모두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칼뱅은 그의 생애가 끝나는 1564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초대교회와 같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꿈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성경에 기초한 교회와 국가의 건설이었다.1559년에는 제네바 아카데미가 문을 열고 칼뱅은 여기서 교수로 강의했다. 또한 그해에는 기독교 강요 결정판이 출판되었으며, 이것은 ‘칼뱅이즘’ 사상에 주춧돌이 되었다.칼뱅은 54세에 인생의 종말을 고했다. 후대의 학자들로 하여금 가장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인물로 평가되었다. 시의회는 그의 후계자로 10년 아래인 데오도르 베자를 지명했다. 동시대의 인물로 칼빈과 신앙과 신학이 일치했기에 시의회는 베자에게 칼빈의 후임의 자리를 주었다.칼뱅의 사상은 개신교 신학의 근본이 되었다. 종교 개혁 사상 역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러한 그의 신학사상을 대표하는 신학사상은‘ 예정론’과 ‘직업소명설’등이다.칼뱅이 우리에게 남겨준 몇 가지는 첫째,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둘째, 장로교회의 정치 틀을 세운 것이다. 셋째, 시민 사회에 관련된 그의 교리이다. 넷째,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다. 다섯 번째, 신학의 체계를 잡은 것이다.칼뱅은 성경의 권위를 성경 스스로가 증거 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에 의한 구원과 예정론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고 믿었다.칼뱅의 교육사적 측면1. 교육의 기초그의 교육의 기초는 1538년에 작성한 제네바의 학교의 프로그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배움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즉, 신?구약 성경이 기독교교육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자체에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칼뱅이즘은 성경의 기본적 권위를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기에 교육의 영역도 마찬가지로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2. 교육의 대상그는 교육의 대상을 사람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족한 상태로 태어나기에 교육을 통해서 부족을 채워주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그는 사람의 성장 과정을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으로 보았는데, 교육은 두 가지를 다 포함하지만 칼뱅은 영적인 부분을 더 중요시 하였다.칼뱅은 교육의 대상인 사람이 지녀야 할 지식을 몇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가 사람이다. 둘째, 사람이 불순종하여 범죄하므로 타락 하였다. 셋째, 타락으로 비참하게 된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들을 배워 알 수 있도록 지적인 요소를 남겨 놓았다. 넷째, 비참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셨다.3. 교육적 목적칼뱅의 교육의 목적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목적은 종교 교육 뿐 아니라 세속 교육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학생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라 했다. 목적 달성을 위해 단순히 가르치는 것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기에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의 삶의 총체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까지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은 과거,현재,미래의 삶 전체를 향한 목표이며, 학생들의 영적, 지적,육체적,문화적,직업적 가능성을 최대한 발전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영적인 삶의 개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 할 수 있도록 양육하여 봉헌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에 옳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며, 지적인 삶의 개발은 어른들의 지혜와 만나도록 하여 학생 자신의 탐구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며, 육체적 삶의 개발은 육체적 건강과 사회적응을 위해 습관과 기술 습득을 돕는 것이며, 문화적 삶의 개발은 문화적 유산에 대한 식별력을 일깨우고, 그것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하는 방법이나 수단을 탐구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며, 직업적 삶의 개발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4. 교육의 내용1) 지도교육-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활 속에 우리를 세워 섬기게 하신 상이한 지위에서 다스리거나 다스림을 받는데 필요한 지혜를 가리킨다.도덕교육- 이것은 궁극적 가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우리가 매일의 생활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법 등에 관한 교육이다.2) 칼뱅은 교육의 내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께 관한 지식은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과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그와 친밀히 교제하는 지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사람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께 관한 지식에 비추어서 우리가 사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땅위에서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가진 소유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니 하나님을 알므로 사람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5. 교육의 과정첫째, 하나님 중심이다.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성경과 피조된 우주로만 가능하다. 피조된 우주는 성경에 비추어서 해석할 때 올바른 인식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특별계시가 교육과정의 기반이 된다.둘째, 모든 과목과 연구 과정은 교육영역이지만 전체는 하나로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과목은 신중심적인 우주관에 기초하여 선택되어지는 것이다. 그는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광범위한 영역에 거쳐 교육과정을 제시하였는데, 그 시대에 중시하지 않았던 수학과 물리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 한 것으로 보아 수학과 물리학도 하나님 중심의 진리라고 생각했다.셋째, 그는 모든 과목의 우선 순위에서 신구약 성경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은 어학과 인문학으로 보았다. 영과 육이 함께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도 존중되어야 하므로 건강과 신체교육도 중요시 했고, 개인의 소명의식을 위해 직업교육도 적절히 제공되어야 한다고 했다.6. 교육의 방법첫째, 학생의 참여를 중요시 했다. 학생은 교육 자료에 영향을 받고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참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시편을 노래할 것, 주기도문, 신앙고백, 십계명을 불어로 암송 할 것과 논문 쓰기, 논쟁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등의 활동이 요구되었다.둘째, 교사의 인격을 통한 교육을 중요시 했다. 진리 전달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사의 인격으로 보았고 교사 자신의 인격의 자연적 표출이 곧 방법이 된다고 하였다.셋째, 다양한 교육방법의 활용을 중요시 했다. 자신이 사용 할 수 있는 특정한 방법이나 모든 방법을 개별적 혹은 결합해서 사용할 수 있다. 학생에게 진리를 전달하는 모든 방법이 다 가능하다. 그러나 교육활동은 그 궁극적 목표와 관련될 때만 가치가 있다고 보았고 특정 교육 목표에 따라 교사가 방법을 선택할 때의 기준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와 가장 밀접히연결되어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행동 법칙들과도 연결되어야 하며 학생의 정보를 종합하고, 그것을 성경에 기준하여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교육학| 2008.05.28| 4페이지| 1,000원| 조회(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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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를 읽고..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이 책의 저자는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님이시다. 시험과 과제를 위해 처음 열어보게 된 이 책은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 나에게 큰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책이었다. 사실 나는 간증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증문이라는 형식이 극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과 축복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싣고 있어서인 것 같다. 예수님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내게 감동과 울림을 주었는데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왠지 그것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자기 자신의 복만을 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편으로는 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전에 읽었던 책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에 대한 설명을 읽기 전 진부하게 느껴졌다.우리가 글을 쓸 때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말하는 이의 시점이다. 한 객관적 사실을 보는 관점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것이다. 이 책은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본 이라는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그 생애를 그의 딸의 입장에서 본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것으로 그 내용이나 강조점이 다를 수 있다. 나는 그런 측면의 기대를 하고 이 책을 읽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가 그러한 측면을 더 부각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자신이 본 아버지’ 라는 것을 쓰기는 매우 힘든 작업이었을 것임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측면을 더 강조하여서 자신이 느낀점을 기록하였다면 이 책은 이미 전에 있었던 과는 다른 또 새로운 면을 더 독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먼저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려 한다. 손양원 목사님은 빛도 없고 영광도 없어 보이는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다른 이들과 달리 더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본다. 그러다가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한늦게 학업에 열중하던 동인, 동신이 공산주의 사상에 들떠서 설치던 학교친구에 의해서 순교하게 된다. 손양원 목사님은 분노하는 대신 아들들을 죽인 학생을 살려내고자 동분서주하고 마침내는 양아들로 삼게 된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 역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순교하시게 된다. 즉 이 땅의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신 분의 이야기이다.예전에 김은국씨의 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던 시대, 암울하고 아무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시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만들던 조선 민족의 비참하고 슬픈 시대, 그러한 일제 치하의 시대에 과연 참 순교가 가능했을까? 정말로 그들의 순교가 그들 자신 내부속의 영적 투쟁 가운데 일어났던 것일까? 그 순교자의 순교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순교자는 있었더란 말인가? 그리고 오늘의 삶의 정황 가운데서의 이 시대의 참 순교자가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하신 전도서 기자의 말에 순응하고 “헛되고 헛되니 모두가 헛되다.” 라는 절대 희망 없음의 좌절이었다. 그러한 나의 생각은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표현한 것으로서의 긍정을 가능케 했다.그러나 나는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의 이러한 생각이 하찮은 나의 합리화였을 뿐이었고 죄인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한 회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처음 내가 이 책의 첫장을 펼칠 때 나는 나의 선입견에 대체로 만족한 상태였다. ‘그래, 손양원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지. 그 분이 아마 문둥병 환자들을 돌보신 분일걸. 참! 그 분이 순교를 하셨다던데. 참 어려운 시대였지. 그리고 그 분의 두 아들도 그렇게 죽었을걸? 공산당은 다 너무 잔인했다니까. 그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로까지 삼았다는 걸 보면 아마 손양원 목사님이란 분 아마 당시의 대단한 신앙가 이셨나봐. 난 못해! 어떻게 그럴수가 있겠어?’ 이런 정도의 내 이해는 특별히 그분에 대한 책을 읽은 것도 아니혜를 체험치 못한 미지근한 상태의 단순 지식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손양원 목사님은 사실 그 당시 시대를 이끌어가는 자리에 섰던 분이 아니다. 단지 그가 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이 보여주시는 삶을 순종으로 사셨던 분이다.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가르침으로 자녀들을 양육했기에 어린자녀들조차 순교의 자리를 피하기보다 그것을 굳세게 맞아들었을까? 기독교교육을 배우고 있는 나로서는 그 부분에 강한 도전과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했는가? 이 대답은 책속에 간단하게 나와 있다.먼저 그것은 손양원 목사님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다. 그 당시 사람의 눈으로 방법을 찾는다면 애양원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하나님을 잠시 부인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신앙대로 행동하고 감옥살이를 한다. 그로 인해서 나타난 가족들의 고초는 엄청난 것이었다. 자녀들이 굶주리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으며 급기야는 고아원에까지 맡겨지게 된다. 그것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또한 동인, 동신 그의 자녀도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특별히 동인은 미국유학이라는 그 당시에 갖기 어려운 진로를 앞에 두고도 순교의 자리를 그것과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유학을 다녀온 후에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더 빛나고 값어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그들에게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 힘은 저자가 이야기 한 것같이 다른 인간적인 힘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힘인 것이다.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것을 내어 이 땅에 사랑을 남기신 예수님과 함께 가르침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당하는 어떠한 치욕의 자리도 우리 혼자 겪는 것은 없다. 그는 그 안에서 예수님을 삶을 보며 그분의 길을 따라간 것이다. 혼자가 아닌 예수님을 닮은 길이었기에 그의 순교가 가능했을 것이다. 가끔 우리는 조그만 일을 하면다른 이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이면 그것으로 되지 않는가. 사실 사람이 모르는 것이 더욱 내게 좋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모습으로 타인의 모습을 판단하는 자신은 스스로에대해서 너무나 타이트한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 하고 애써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오늘도 절망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나의 작고 악한 모습을 이해하실까?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생각에 빠진 나에게 지금도 값없는 은혜로 감싸주실 것이다.위에도 언급했지만 그분은 그저 그런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신앙을 가진 분이 아니었었다. 그분은 참 그리스도의 제자였고, 그분은 목사였고, 그분은 그리스도를 닮은 친구였고 위로자였으며, 그분은 진실로 순교자였다. 여기서의 내 강조점은 참과 진실이라는데 있다. 거짓과 속임수, 살인과 저주, 무감각, 혼란, 타락의 시대에 이 책에서의 참과 진실은 전혀 다른 새로운 양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요즘은 참 그리스도인이 없는 시대요, 참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나기 어려운 시대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손양원 목사님을 통해 이 시대의 희망을 발견한다. 참과 진실은 모든 거짓과 속임수와 어둠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일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여기서 손양원 목사님의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참과 진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19세기 일어났던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은 인본주의적, 낭만주의적 사상의 배경하에 탄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 기술의 진보와 삶의 윤택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인간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 하면 된다.’ 라는 의지를 키워가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능력은 사랑을 생산하고, 미래를 생산하고, 꿈을 생산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삶을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생존까지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서로 죽이고 죽였던 세계 대전이다. 이 전쟁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이룩해 낼 수 있다고하여 쓰러져 있을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다시 예수님의 살랑과 희망을 전해야 한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희망 없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통해 희망을 보아야한다.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희망의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무 희망을 찾아 볼 수 없었던 일제 치하의 시대와 동족이 동족을 죽이고 죽이는 패역하고 쓸모없었던 6. 25 전쟁, 그 속에서 더 꺼져가던 인간애, 참사랑, 그러한 것을 손양원 목사는 그 삶의 자리에서 실천했던 것이다. 그것도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해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다룬 이 책이 현재 한국의 희망의 신학이 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비록 우리에게 커다란 목소리가 없어도 수많은 대중이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양적인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이 시대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내게 맡겨 주신 적은 사람들에게 실천하는 것이고 한사람이 얼마나 귀하고 값어치 있는 존재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피조물 한사람을 정말로 귀하고 소중하게 섬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나는 이 책이 간직하고 있는 그 내용에 다시한번 감탄한다. 그것과 더불어 그 내용을 증명하는 객관적 사실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 객관적 사실 속에서 참 목자였던손양원 목사님을 발견했다. 참 신학이 없는 교회의 모습이 허다한 이 세대에 나는 손양원 목사님이야말로 참신학자였음을 본다. 신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때때로 강단에서 외쳐지는 하나님의 복음이 신학적 반성없이 그대로 성도들에게 전해질 때가 많다. 그럼으로써 실족케 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있다. 참 복음이 복음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값싼 육신의 안위와 쾌락만을 좇아 은혜의 본질을 왜곡하고 그것이 참 기독교의 본질인이다.
    독후감/창작| 2008.05.28| 5페이지| 1,000원| 조회(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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