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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추픽추 잉카문화 세계유산의 설명과 보존과학적 문제점
    REPORT-마추픽추 역사보호지구-제가 레포트를 쓰기로 정한 세계유산은 페루의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입니다. 다른 여러 유적들도 많이 생각 해 보았지만 보존 과학적 측면에서 써야하는데 다른 유적들은 보존이 잘 되어있는 것들이 많아서 가장 보존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는 텔레비전에서도 소개가 많이 되고 해서 가보진 못했지만 어떤 곳인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앞으로 꼭 가보고 싶은 유적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또 마추픽추 역사 보호지구를 선택한 이유는 이곳에 살았던 인디언들이 몇 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과 조상이 같아서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생기는 것도 같다고 합니다.마추픽추는 안데스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잉카제국의 도시인데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때 유일하게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어서 그 찬란했던 잉카제국의 도시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마추픽추가 관광지로써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페루로 마추픽추를 보기위하여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급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몇 천년동안 잘 보존되어오던 마추픽추가 인간의 손길이 닿아 훼손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합니다.아직 마추픽추에 대한 비밀이 다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인위적인 훼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관광객 유치에만 눈이 먼 페루 정부는 이 위대한 유적을 보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유네스코와 같은 세계유산위원회에서도 훼손되어가는 마추픽추 유적지를 보호하기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을 내놓고 있는데 이러한 방책들은 법적 효력을 가지지 않아 페루 정부가 말을 듣지 않아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자기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훼손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등록 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는 세계유산 목록에서 해제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페루에서 경제적, 문화적 타격이 굉장히 클 것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권고사항을 지켜 마추픽추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먼저 마추픽추를 만든 잉카문명에 대하여 살펴보면잉카 문명은 1438년부터 1533년에 걸쳐 번성한 제국이며 현재 페루 영토에 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잉카인들은 점령과 평화적인 합방을 통해 안데스 산맥을 주축으로 하는 남아메리카 서부의 주요 영토를 제국의 일부로 편입했습니다. 1533년 사파 잉카라 불리는 마지막 황제 아타왈파는 점령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명령에 의해 살해당하고 잉카 제국의 멸망과 동시에 에스파냐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잉카문명의 특징은 정치·사회의 기구 편성에 나타낸 독특한 기술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고, 친족인 지배층과 일반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하여 중앙집권적 전제정치가 시행되었습니다.그러나 평민을 위한 사회보장이 완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잉카의 정체를 ‘신권적 사회주의’라든가 ‘사회주의 제국’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고 합니다.또 잉카 제국은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옥수수, 감자, 땅콩 등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 토목 기술이 고도로 발전 하여 곳곳에 남아있는 신전, 요새, 관개 수로 등은 당시의 건축 기술이 우수했음을 말해줍니다.이런 우수한 기술을 가진 잉카문명에서 만든 마추픽추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램 빙엄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마추픽추를 “잃어버린 도시” 또는 “공중도시”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 할 수 있어서입니다.처음 이 곳이 발견될 당시 1000여구의 여자 미이라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1만명 정도가 이 곳에서 살았다고 보여 지는데,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없어졌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마추픽추는 도시와 농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중 도시부분은 U자형으로 남쪽 지구, 수공업지구, 종교지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종교 지구의 주요 건물은 반원형 태양 신전인 ‘인티와트나(태양을 묶어두는 곳)’입니다. 이 신전은 7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 태양 신전에 닿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석조물 위에 높이 1.8m, 너비 36cm의 돌기둥이 솟아 있는데, 잉카인들은 천체의 궤도가 바뀌면 커다란 재앙이 생긴다고 믿고, 매년 동지 때 이 돌기둥 바로 위에 뜬 태양을 붙잡아 매려고 돌기둥에 끈을 매는 의식을 치렀다고 합니다.그러나 이 기둥을 해시계의 일부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즉 이 기둥이 만드는 그림자가 시각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술력을 감안해 볼 때 너무 단순한 추측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어쨌든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암반을 깎아 만들었으니 그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또 마추픽추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성스러운 광장(인티 칸차)’, ‘3개의 창이 있는 사원’, ‘성스러운 광장’ 북 쪽에 있는 11?8mzmrl의 주 사원(카르파우아시), 왕의 묘가 있습니다.이 마추픽추를 만든 이유에 대하여 학계의 논란이 많은데 잉카인들이 스페인 인들의 공격을 피해 산 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또한 자연재해, 특히 홍수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고 합니다.마추픽추의 건축 기술은 정말 높이 평가 받고 있습니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고 각 변의 길이가 몇 m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은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습니다. 얼마나 정교한지 종이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붙어있습니다. 정확하게 돌을 자르기 위해서 젖은 모래에 돌을 비벼 표면을 매끄럽게 갈았다고 합니다.다음으로 마추픽추 보존의 문제점에 대하여 알아보면마추픽추 보존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산사태 발생 가능성마추픽추가 높은 고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산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2001년 교토대학 지질학자들이 마추픽추의 산사태 위험성을 제기하며 이에 대한 유적의 안정성 평가와 산사태 발생 시 마추픽추 보존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실제로 1995년에 아구아스 깔리엔테(마추피추와 가장 인접한 마을로, 마추픽추에 오르려는 관광객들의 주요 거점지)에서 마추픽추로 오르는 도로로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고 한 달 후 다시 또 산사태가 일어났었다고 합니다.-과도한 개발1990년대 페루 정부는 마추픽추에 고급 호텔, 관광복합단지, 부띠크, 식당가 개발을 목적으로 케이블카의 건설을 허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학계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습니다. 페루 국민들도 유적의 훼손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염려하였습니다. 따라서 1999년 UN에서는 마추픽추 개발에 대한 사실의 올바른 규명을 위하여 평가단을 파견하였는데, 그 결과 케이블카가 건설될 부지는 마추픽추 유역에서 산사태 가능성이 두 번째로 높은 구역으로서, 케이블카가 설치될 경우 지속적인 인동이 산사태 발생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이에 UN평가단은 케이블카 건설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많은 편의시설로 인해 이미 마추픽추 그 원형이 훼손된 상태였음에 따라 평가단은 편의시설을 축소할 것을 권고 하였습니다. 결국 페루 정부는 2001년 케이블카의 건설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이 프로젝트를 백지화하지는 않아 여전히 마추픽추를 위협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2000년 페루의 INC가 마추픽추에서 맥주광고 촬영을 허가하여 촬영 중에 크레인이 넘어져 인티후아타나를 파손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인문/어학| 2009.11.09| 6페이지| 1,000원| 조회(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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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도예촌 답사와 분청사기의 변천과 제작방법 레포트
    R분청사기와 도자기의 변천-계룡산도예촌을 다녀와서 -E0DPOR학교학번이름T공주 학봉리는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를 생산하던 요지로서, 철화분청사기를 주로 생산하던 곳이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중간 시기인 15~16세기 번성했던 자기로 형태와 문양이 자유분방해 서민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도자기로 꼽힌다. 분장(粉粧)기법에 따라 인화(印花), 상감(象嵌), 음각(陰刻), 박지(剝地), 철화(鐵畵), 귀얄, 담금(덤벙) 등으로 나누어진다. 철화분청사기란 산화철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백제 고유의 도법으로 자연이 주는 친근함을 도자기에 표현하였다. 검붉은 태토에 귀얄칠한 막걸리색 분장토가 소박, 담백하며 시대에 앞선 추상적인 철화 문양이 놀라움을 줄만큼 미의식이 표현된 도자기로서 비대칭적인 형태가 조화롭다. 은은하게 발하는 복스러움, 그러면서도 대범하고 자유로운 필력은 이 지역 이 풍토에서 살고 있는 이의 심성에서 우러나올 수밖에 없는 분청사기의 특성이다.계룡산 인근의 질좋은 황토와 좋은 교통 입지는 일찍부터 이곳을 도요지의 명산으로 불리게 했으며, 이를 통해 탄생한 철화분청사기는 한국공예사의 철화청자와 철화백자로 이어주는 시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공주 박정자에 일본 도조비를 세우는 업적을 남기며 후대에 예술적 가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였다.분청을 이용한 도자기를 만드는것을 직접 해보기 앞서 사전 분청사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분청사기????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5세기 초에는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고 이후로 점차 쇠퇴하다가 16세기 중엽 백자에 흡수되기까지 약 200여 년간 만들어졌던 도자기 가운데 하나로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졌다.???분청사기란 이름은 1940년경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였던 고유섭 선생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이름을 붙인데서 비롯하였다. 곧 분청사기는 이 분장회청사기의 약칭으로 조선시대 전기의 그릇을 대표하는 것 가운의 특징을 보인다. 제작 방법은 태토 빚음 받침에 포개어 제작했으며, 유약은 청자유 계동의 투명유이지만 태토가 짙은 회흑색을 띠고 있어 유조는 여전히 암록색을 보인다.??2. 1420년∼1480년경????세종대왕의 치세 연간으로 민족 문화가 융성하던 시기인테, 이와 더불어 도자 공예에서는 분청사기가 기법상 다양한 발전을 보여 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의 양상을 보인다. 태토는 정선되어 밝아지고 유약은 잡물이 없어 투명해지며 고려적인 전통에서부터 조선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된다.???대접의 경우 인화기법은 듬성듬성하게 찍던 무늬에서 발전하여 그릇 전체를 가득히 채워 무늬 구도상 빈틈없는 짜임새를 보인다. 인화 기법에 사용되는 단독 무늬 조장에는 국화, 톱니바퀴, 원, 육각판 등의 무늬가 있다. 대접 내면에 주로 사용되던 연당초무늬는 변형하여 활달한 새로운 무늬로 변모한다.???1450년부터 1480년 동안에는 모든 기법이 무르익은 반면에 무늬가 해이해지고 유태에 잡물이 많이 섞여 막그릇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귀얄 기법이 현저히 증가한다.???이 때의 인화 기법은 무늬의 짜임새라든지 압인 상태가 고르지 못하고, 또 얕게 압인되어 백토 감입의 상태가 지저분하게 나타나 제작의 소홀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사옹원의 분원이 성립된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연권무늬의 경우에는 고도의 기술이 습득되어 그릇의 면에 골고루 시문되고 여백 없이 압인된 곳에 백토가 고루 감입되며, 특히 박지와 음각 기법이 특색을 이룬다. 박지와 음각 기법은 전라도 지방에서 크게 유행하여 전라도 분청사기의 특징을 이룬다.?3.? 1480년∼1540년경????후기는 쇠퇴기로서 1480년부터 1540년경의 약 60여 년동안이다. 이 시기에는 서서히 귀얄 기법이 사라지는 반면 담금 분장 기법으로 현저히 백자화하고 있다.???상감과 인화 기법은 쇠퇴해 가며 공주 학봉리 계룡산 기슭 일대에서 제작된 철화 기법과 같은 개성이 강한 지방 양식으로 발전한다. 이 시기에 유조는 녹색이를 가하여 흑갈색을 띠게 한 ?기법도 있다. 세종 때 활발하게 만들어졌고, 주로 전라도(고흥군 두레면)지방에서 많이 제작되었다.???제작과정은 [그릇을 성형한다]-[백토로 분장한다]-[원하는 문양을 그린다]-[문양을 제외한 배경에 백토를 긁어 낸다]-[유약을 입혀 굽는다] 으로 하며, 구워낸 그릇의 문양은 흰색, 배경은 회색이 된다.④음각기법???음각기법은 조화기법이라고도 한다. 백토 분장 뒤에 원하는 무늬를 선으로 조각을 하여 백색 바탕에 회색의 무늬가 새겨지게 하는 기법이다.???제작과정은 [그릇을 성형한다]-[백토로 분장한다]-[무늬를 선으로 표현한다]-[유약을 입혀 구워낸다]. 음각 기법의 무늬로는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 당초무늬, 물고기무늬, 잎 무늬, 버드나무 무늬, 인물무늬, 가옥무늬 등이며, 회화적인 사실 표현에서부터 추상된 무늬에 이르기까지 능숙한 필치를 구사했다.?⑤철화기법???백토를 분장한 후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물감)를 사용하여 붓으로 문양을 그려낸 기법이다. 이 때 그려지는 문양은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회화적인 것, 익살스러운 것 등 다양하여 서민들의 생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기법은 주로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충남 공주군 반포면의 계룡산 기슭에서 주로 제작되어 일명 '계룡산 분청사기'라고 한다. 무늬의 색은 철분이 포함되어 있기에 구워진 후에는 검은색으로 나타난다.⑥귀얄기법??귀얄은 일종의 풀을 엮어 만든 빗자루와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이 도구를 써서 백토를 발라 만드는 기법이다. 풀비로 백토를 순식간에 자유롭게 바르기 때문에 생동적인 운동감이 표현된 다양한 무늬효과가 나타난다. 대체로 분청사기의 쇠퇴과정에서 나타나고, 포개어 구워 대량 생산한 막사발에 많이 이용된 기법이다.⑦담금(덤벙)기법???백토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백토를 입히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붓 자국이 없어서 표면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굽 언저리에는 백토가 묻지 않지만 백토를 두텁게 씌우면 표면이 거의 백자와 같이 되므로 6 °의 경사면에 설치되었으며, 요실(窯室) 바닥은 사면이 사상(砂床)이며 칸막이가 있는 가마로 각 창살수는 2~3개였던 것 같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개 ·보수를 한 듯하다. 최후의 요상(窯床)은 지면 위로 올라와 있다. 특히 이 가마는 봉통 앞에 또 하나의 작은 봉통이 붙어 있고, 마름칸 옆에도 작은 봉통이 달려 있어 환원번조(還元燔造)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 가마 역시 상부는 파괴되었으며 현재 길이는 7 m, 너비는 최초의 것이 143~151 cm, 최후의 것이 112~130 cm이었다. 여기에서 비색(翡色)의 극치와 상감(象嵌)의 완성 등을 이룩한 청자편들이 발견되었다.고려시대의 가마는 자연경사를 이용한 등요(登窯)가 대부분이며 초기에는 칸막이가 없는 통가마였다가 중기부터 칸가마를 사용하였고, 요상은 층단(層段)이 아닌 경사면이며 바닥에 모래를 깔고 도짐이를 받쳐 번조하였다.조선시대의 가마는 전기에 고려자기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와 원(元) ·명(明)의 새로운 백자의 영향을 받은 백자가마로 대별된다. 모두 원번조가 주류였으나 분청사기 가마 중 일부는 산화염(酸化焰) 또는 중간형태인 중성염(中性焰)이 있었다.지금까지 조선시대 도요지의 조사는 충남 계룡산(鷄龍山), 전남 담양(潭陽) 한수동(寒水洞), 광주(光州) 북구 충효동(忠孝洞), 경기 광주(廣州) 도마치(道馬峙) 등 몇 개소에 이르나 계룡산을 제외하고는 퇴적층(堆積層) 조사에 그쳤으며 가마의 형태가 확인된 것은 계룡산 가마뿐이다.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가마는 산록의 경사면에 여러 개를 나란히 축조하고 모두 지면을 약간 파서 기다란 구덩이를 만들고 구덩이의 좌우 위턱에서 점토(粘土)로 벽과 천장을 둥글게 쌓아올렸다. 전부 칸막이 가마로서 칸마다 아궁이를 겸한 출입구가 우측에 있은 것으로 추측되며, 바닥은 사상(砂床)이다. 이들 조사된 4기의 가마에 대한 실측상황(實測狀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길이 13~41m, 너비 0.8~2.2m, 칸막이 수 5~13개, 창살 하더라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게 되면 소지의 입자가 고르지 못해 성형이 까다로워지고, 건조과정에서 균열이 발생하기 쉽다. 또한 흙 속의 기포가 소성 시 팽창하여 기물을 파손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성형을 하기 전엔 반드시 꼬박을 밀어 사용해야만 한다.중심잡기 - 물레의 속도를 이용한 성형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물레를 이용한 기물성형시 물레 위의 점토가 중심을 잃게 되면 양손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기물의 성형이 무척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얻고자 하는 형태를 얻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중심잡기는 물레성형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형에 들어가기에 앞서 물레판 위에 놓인 점토의 중심을 잡아주어 흔들림이 없도록 한 뒤 성형에 들어가야 한다.성형 - 원통형은 물레를 이용한 성형방법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구조로서 모든 기물의 형태는 원통형에서 시작하여 일련의 변화과정을 거쳐 원하는 기형으로 성형되어진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기벽의 두께가 일정한 원통의 성형이 가능해야 발이나 접시, 항아리, 병 등의 성형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항아리형은 앞서 보았던 원통의 기본형태에서 원통의 기벽이 내밀어진, 즉 배가 불려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항아리를 성형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벽이 두꺼운 원통이 만들어져야하며, 처음부터 전부분이 넓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또한 원통의 바닥부분부터 한번에 무리하게 배를 불리려고 하면 항아리의 키가 줄어들거나 주저앉을 수 있으므로, 서서히 조금씩 부풀리면서 차츰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정형 - 굽깎기는 성형 시 굽 부분에 붙은 불필요한 점토를 깨끗하게 제거하여 기물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불필요한 여분의 흙으로 인해 발생하는 기물의 균열을 방지하기 위한 과정이다.굽깎기는 기물의 상태가 너무 질거나 딱딱하지 않고, 손으로 눌러보아 변형되지 않을 정도의 굳기, 즉 굽칼의 사용이 용이한 반 건조(leather hard)상태에서 깎는 것이 일반적이다. 굽은 제작자의 취향과 기물의 형태에 따라 안굽과 한다.
    사회과학| 2009.11.09| 12페이지| 1,000원| 조회(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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