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목차Ⅰ 머 리 말Ⅱ 성리학의 이해1 성리학의 성립2 형이상학의 이해3 실천적 성격4 경세적 측면Ⅲ 성리학의 수용1 성리학 수용의 배경2 성리학의 전래Ⅳ 성리학의 초기 수용자1 안향(1) 생애(2) 성리학의 전래2 이제현(1) 생애(2) 학문과 사상3 이색(1) 생애(2) 학문과 사상Ⅴ 맺음말Ⅰ 머리말북송에서 시작된 新儒學의 학풍은 南宋의 주자에 의하여 朱子學으로 집대성되고, 남송의 주자학은 원을 통하여 고려에 전해졌다. 고려의 新興官僚로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송에서 원에 이르는 동안의 여러 학풍들을 선택해서 수용하게 되었다. 신진사대부들은 원간섭기는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대처하는 사상으로 성리학을 수용하였으며 이는 한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안향을 통하여 전래된 성리학은 당시의 訓?學 중심의 유교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다음 왕조인 조선의 성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초기 신진사대부가 수용했던 성리학에 대하여 논하고, 성리학 수용의 배경과 전래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성리학이 성격을 학문 자체의 성격보다는 고려후기 성리학이 전래되었을 때 당시의 상황과의 연계성을 따져 파악하고 이러한 성리학을 초기에 수용?발전시킨 儒者들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아 고려시대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Ⅱ성리학의 이해1) 성리학의 성립先秦時代에 도덕을 실천하려는 학문으로 크게 일어난 유학은 한 대에 경전을 수집?정리하여 그 자구를 주석하는 訓?學을 성립시켰으나, 송대에 이르러 정치적 사회 체제의 변화를 고려하면서 노장이나 불교사상을 가미하여 이론적으로 심화된 철학체계를 갖추었다. 천리를 논한 북송의 정호와 정이 형제를 이어 주돈이?장재등의 여러 학설을 남송의 주자가 집대성하여 철학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이다.)주돈이는 『太極圖說』을 지어 성리학의 우주론을 정립하였다. 『태극도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우주론은 太極에서 陰·陽이 생성되고, 음양이 변하고 합하여 오행(五行, 水·火·木·金· 관심은 우선 修己治人에 대한 그들의 이해방식 속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수기치인이란 윤리적인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는 修德者에 의하여 교화를 통한 이상정치가 이루어지는것을 일컫는 것으로 그와같은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이상을 이룩하기 위한 전제로서, 군주를 포함한 治者들의 수덕을 강조하는데, 이는 곧 덕치를 기본으로 민본정치를 구현하는 것이다.경세론은 유교의 근본원리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로 이해되고 있다. 곧, 『大學』에서 제시된 明明德과 親民의 기본강령이나, 유교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修己와 治人 또는 內聖과 外王의 원리에 있어서 친민·치인·외왕의 문제는 경세론의 영역으로서, 곧 명명덕·수기·내성의 문제인 修養論과 상응하는 두 가지 근본 원리의 한 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경세론은 내면적·인격적인 수양론과 상호 조화적인 관련성을 추구하는 것이 유교이념의 근본입장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만 경세론의 의미도 유교사상 속에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경세론의 고전적 형태는 유교경전 속에 상당한 깊이로 제시되어 있다.『書經』은 첫머리의 堯典·舜典·大禹謨 등을 통하여 聖王의 통치원리와 통치형태의 모범을 제시하였으며, 洪範篇에서도 통치의 실제적 과제와 원리를 아홉 가지의 범주로 집약하여 체계화시켜주었다. 서경에서는 천명사상과 덕치의 정치이념을 기초로 하면서 제도·법률·생산·재화·의례·천문 등 정치적 과제를 구체적이며 모범적인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경세론의 유교적 이상형과 연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周禮』는 주나라의 관직제도에 관한 기록으로 전하며, 여기서 제시된 육관제도는 남북조시대의 북주에서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정치제도의 기본 형식을 이루었고, 고려역시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공자도 춘추 말기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덕치 내지 예치의 정치이념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맹자에 이르면 왕도론을 통하여 민생 안정을 위한 井田制의 원리나 세법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기반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의 실현 독자영역 확보와 현실개혁 및 그 궁극의 목적이라 할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또한 이미 고려 유학의 수준은 상당한 정도까지 심화되어 신유학의 요소들을 胚胎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 사회의 유학은 이미 자체적인 성장과정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새 사상을 수용할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무신집권기 이전부터 내려온 사상의 전통이 儒者들이 권력과 타협하여 무인정권의 유지에 기여하는 동안에도 내면적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이는 무신집권기 이전의 문벌귀족사회의 이데올로기인 보수화된 유교에 대항하는 진보적인 성격의 유교였다. 그것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개혁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적 성격의 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규보의 경우처럼 무인정권하에서 무인정권을 부정하지는 못하였지만, 무인정권의 한계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무신집권기 이전의 진보적인 성격의 사상을 내면적으로 계승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신준·오처럼 정중부亂 후에 화를 피해 山門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지방자제들을 교육시켜 무신집권 이전의 사상을 계승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실비판적이고 또 다원적인 양상이었으므로 어떤 계기만 주어진다면 체계화된 논리로 설명되고 구체성을 띤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또한 원에서는 이미 송대의 성리학을 관학화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하지만 원은 성리학 전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중국의 한족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확고히 하기에 유리한 것들만 받아들였다. 또한 원은 원과 주변 국가의 지배 관계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로서 관학화 된 성리학을 주변국에 인위적으로 전파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성리학 수용의 전부는 아니었으며, 고려 사회 내부에서의 배경이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2) 성리학의 전래근자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도입은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 안향에 의해 최초로 전래되고 이어 백이정, 박충좌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수용, 발전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향은 1289년 원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들여왔다고 여겨지지만 실은 안향의 주자학 도입은 주자학을 처음 들여오고 최초로 주자를 경모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14세기에 들어와 백이정·우탁·권보들에 의해서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백이정은 원에서 10여 년간 머무르면서 주자학을 연구한 뒤 程朱書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우탁은 『주역』에 대한 정이의 程傳을 최초로 해득했으며, 권부는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주자학을 보급했다.한편 고려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萬卷堂을 통한 원과의 학술교류를 빼놓을 수 없다. 만권당은 충선왕이 1314년경에 설립한 기관으로, 한족 출신의 학자와 고려의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한족 출신의 문사로는 조맹부 등이 있었으며, 고려의 문사로는 이제현 등이 있었다. 만권당을 통하여 성리학을 비롯한 문물이 수용되어 고려의 신흥사대부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만권당에서 원의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고 충선왕을 따라 양자강 남쪽을 여행하였다. 이를 통해서 그는 원의 성리학과 아울러 주자성리학의 발상지에서 남송의 성리학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한 뒤에 이색 등에게 성리학을 전수하였다.이와 같이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전반에 고려에 수용된 성리학은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회개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현이 귀국하여 성리학을 전승하는 한편 사회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이제현의 문인인 이색에 의하여 성리학이 사대부들에게 급속히 보급되었고, 사회개혁이념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또한 공민왕의 개혁과 함께 성리학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급되고 사대부들에 의한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공민왕대에 있었던 성균관의 개수와 과거제의 정비는 신흥사대부들이 정계로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성균관에서는 이색이 大司成으로, 정몽주?이숭인 들이 敎官으로 있으면서 많은 朱子學者들을 양성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학풍은 국가적 차원갖는 것은 충렬왕 27년(1301)을 전후하여 행하고 있는 교육 활동이다.당시 고려사회는 무인집권기와 몽고의 침입, 삼별초의 난, 일본정벌 등 다난한 정치적 소용돌이가 연속되면서 교육은 거의 황폐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 상황에서 그는 위정자들이 행해야 할 당면과제를 교육의 부흥에 이념 설득하여 국학을 중건하고 기금을 마련하는 등 교육의 중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로써 교육은 중흥되고 이후 그의 이념을 계승한 학자들이 대량으로 배출되면서 고려후기의 학풍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게 된다.이러한 그의 공로는 사후 文廟에 배향되는 영광을 입게 되고, 조선시대에는 그를 배향하는 書院이 설립됨으로써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를 이루게 된다.(2) 성리학의 전래한국사상사에서 안향의 업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에 의한 성리학 전래이다. 충렬왕 15년에 왕을 호종하여 燕京에 가서 원의 학자들과 교유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을 접하게 된다. 그는 性理의 書를 보고 이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眞像을 模寫하여 다음해 3월 귀국할 때 가져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성리학이 전래된 시초이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晦軒先生實記』는연경에 머물면서 주자의 서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사하였다. 때에 주자의 서는 당시 우리나라에 행해지지 않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처음으로 이를 보고는 맹문의 정맥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여 그 책을 手錄하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을 모사하여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 주자의 서가 강구되었다.라고하여 안향이 성리학을 전래하게 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바로 의하면 안향은 충렬왕 15년에 연경에 있을때 성리학 사상을 수용하였고, 또 귀국 후 그의 행적에서 성리학을 이념적 기조로 하여 행동하고 있음역시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성리학의 보급에도 전력하였다. 이것은 『高麗史』열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후학들에게 ‘儒琴一張’을 보여 행동의 강령으로 삼도록 권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충렬왕 30년 국학을
원대 자기가 14세기 고려청자에 끼친 영향- 논문 1. 김윤정, 高麗後期에서 朝鮮初期 象嵌靑瓷에 나타난 元代 磁器의 影響, 2003- 논문 2. 박정민, 14世紀前半 象嵌靑瓷 硏究, 2006Ⅰ서론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이라고 하면 단연 고려청자를 제일로 꼽을 수 있다. 고려청자는 고려조 500 여 년 동안 비색의 순청자와 함께 음각·양각·철화·상감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상감청자는 상감이라는 독창적인 시문기법이 청자에 적용된 고려만의 독특한 자기이며, 고려 12세기 이후부터 고려청자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원 간섭기가 시작되는 13세기후반이후 상감청자는 질적으로 하락하면서 점차 쇠퇴했던 것으로 평가하여 왔다. 고려후기 상감청자는 13세기 후기부터 시문기법이나 표현이 새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상감청자의 전통을 고수하다가 14세기 이후에는 점차 쇠퇴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에 고려가 원의 제도권 안에 포함되면서 상감청자에 새로운 양식이 수용되었으며, 이것은 눈에 띠지 않는 변화이다. 고려후기 상감청자와 원대 자기의 기형과 문양을 구체적으로 비교·분석하여 고려청자가 원대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원대 자기가 고려청자에 미친 영향을 평가할 때 학자들 간에 미묘한 시각차가 존재한다. 원대 자기가 원 간섭기의 교류로 대거 유입되어 후기 고려청자에 기형과 문양을 결정하였다는 주장과 고려의 독자적인 상감문화에 유입된 원의 문화요소가 수용되어 원과는 다른 독자적 기형과 문양을 완성하였다는 주장이다.여기에서 비슷하지만 관점이 다른 주장들에 대하여 기형과 문양 두 가지 특징으로 나누어 요약?비교한 후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덧붙여 보고자 한다.Ⅱ 본론1. 전문 비교1) 논문 1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까지 상감청자에 원대 자기라는 새로운 도자 양식의 수용으로 나타나는 변화와 수용과정의 연구를 통하여 우리나라 도자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자는 본문에서 13세기 후반에 고려가 원의 제도권 안에 포함되면서 상감청자에 새로운 양식이 수용되었으며, 상감청자의 구연외반식대접과 고족배 기형, 용문·봉황문·어문·연화당초문·돌기문 등의 문양에서 원대 자기의 영향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려후기 상감청자에 나타난 원대 자기의 영향은 상감이라는 고려청자의 제작기법과 전통으로 재해석되었기 때문에 고려후기 상감 청자를 변화 없이 쇠퇴하는 것으로 평가되었으나 고려 14세기 상감청자는 쇠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원이 주도했던 도자문화와 변화의 궤를 함께 하면서 발전하고 있었다고 밝혔다.2) 논문 2는 14세기 전반 고려에서 제작된 상감청자에서 대량생산이라는 특징이외에 발견되는 원의 문화적 요소를 인정하고, 고려가 원의 자기문화를 취사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중국의영향보다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발전하였다는 점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자는 14세기 전반에 제작된 상감청자는 수요량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인화기법 등 보다 효율적인 제작기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귀적적인 우아함은 실용성으로 대체되면서 장식적인 경향도 뚜렷이 보인다. 이에 고려는 자기를 실용기로서 적극 활용하게 되고 그 수요는 고려에서 생산되는 청자로 감당이 가능한 만큼 막대한 자금과 노력이 소요되는 중국자기의 수입대신 국내산 자기의 양산이라는 방식으로 고려요업은 창조성을 발휘하며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14세기 상감청자 제작양상을 충선왕이 등극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제 1기와 제 2기로 설정한 후 제2기에서 상감청자의 기형과 문양이 정형화된 의미를 상실하고 단순하게 변하여 고려화 된다고 주장한 뒤, 이를 4가지 본래 있던 전통 기형과 3가지의 신경향이 반영된 기형을 통하여 밝히고, 문양 또한 4가지 전통 문양과 3가지의 신경향 문양을 통하여 증명하고 있다.2. 기형기형은 논문 2는 주로 고려의 전통기형이 원의 영향을 받은 것을 중심으로, 논문 1은 원의 영향으로 새롭게 탄생한 신경향의 기형을 중심으로 논하였다. 여기에서는 논문2의 7개의 기형예시 중 가장 인상깊었던 2개의 예시만 들어 두 논문을 비교하였다.1) 논문 1은 고려자기가 원대자기의 영향을 받은 증거로서 새롭게 탄생한 양식인 구연외반식대접과 고족배 기형을 예로 들고 있다.▶ 구연외반식 대접구연외반식대접은 저부에서 동체로 둥글게 이어지면서 동체의 외벽선이 밖으로 벌어지고 구연부분에서 외반하는 형태이다. 고려 13세기 후반경부터 새롭게 나타나는 기형으로 원대 난백유자기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원대전기에 출토되는 대접이 굽이 낮고 넓으며 동체의 측면선이 거의 사선으로 벌어지는 기형에서 후기 구연부분이 외반하면서 굽이 좁고 높으며 접지면으로 갈수록 벌어지는 형태가 고려 13세기 후반에 제작된 상감청자 대접이 구연부분이 외반하고 굽이 좁고 높으며 접지면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기형으로 변화하는 경향과 유사하다. 원대 경덕진 호전요에서 제작되었던 대접과 고려후기 상감청자 대접에서 보이는 기형의 변화가 비슷하다.▶ 고족배 기형고족배는 원가의 교류에 따라 고려에 유입된 대표적인 기형으로 중국에서도 원대에 들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기형이다. 잔이나 사발에 높은 다리를 달아 라마교의 신이나 위대한 인물을 위해 격식을 갖추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고려 14세기에 제작되는 상감청자고족배가 원조의 전용자기로 사용된 난백유고족배의 기형과 매우 유사하여 특수한 용도로 사용된 고족배가 원조의 전용자기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2) 논문 2는 고려자기가 원대자기의 영향을 받아 고려화 되어 독자적 발전을 이뤘거나 전통자기가 원의영향을 배제하고 스스로 발전하는 증거로 매병, 편호 등의 예로 설명하였다.▶ 매병매병은 고려청자가 제작되는 초기부터 전시기에 걸쳐 제작된 기형으로 14세기 전반에 제작된 매병이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매병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구연의 형태로 나팔형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형되는 이유는 상체가 과장되어 안정적이지 못한 그전의 광구형에서 중국기형의 효율성이 차용되면서 매병은 목이 길어지고 구연이 나팔형으로 술을 따르기 편리한 기형으로 전환된 것이다.▶ 편호중국의 기형을 받아들여 고려화된 매병과 달리 편호는 고려 자생적인 기형이다. 그릇의 몸통을 두드러 한면 또는 그 이상의 평평한 면을 만드는 도자제작의 전통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13세기 말부터 14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상감청자편호는 실용적인 도기 기형을 자기로 고급화 하여 재생산해낸 독특한 사례이다. 일부 중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기형이나 문양소재가 수요층의 취사선택을 거쳐 고려도자 제작에 흡수되는 반면, 원과의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지던 14세기전반에 편호와 같이 기형의 전개나 문양소재의 선택에서 고려 도자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상감청자가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였다.3. 문양문양은 같은 문양이라도 두 논문이 논하는 것들에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선 많은 예들 중 두 가지만을 예시로 들어 논문을 비교하고자 한다.1) 용문▶ 논문 1고려시절에는 이미 용문을 사용온 형태이며 송대에서 들어온 송대식 용문이었다. 이는 고려 12세기 말에 제작된 에서 상감기법으로 시문된 예가 있다. 그러나 14세기 작품인 와 의 동체에 표현된 용문은 앞다리를 앞으로 내민 황룡의 형태이고 가늘게 시작되는 용의 목은 원대 자기에 시문되는 용문의 특징이다. 이와같이 고려후기 상감청자의 용문이 주로 1350년 이전에 제작된 원대 자기의 용문과 비교되며, 1350년 이후에는 거의 비교될만한 자료가 없어 공백기와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논문 2용은 물과 관련된 초월적인 존재로서 삼국시대 이래 고분벽화와 다양한 공예품에 등장해왔다. 고대부터 원활한 치수는 통치자의 기본조건으로 따라서 물을 다스리는 용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용은 공예품에 권위를 부여하는 우리의 전통문양으로 14세기 일부 주병에 시문된 용문에서 원대 자기의 영향이 드러난다. 주로 용천요에서 제작된 용의 표현이 상감청자주병에 유사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상감청자 주병들에 등장하는 용문 사이에도 서로 표현의 차이가 있으며 특히 여의주를 앞다리로 들고 있는 표현은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이전에 제작된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도형으로 원대 도자의 요소를 일부 차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청자문화의 범주 내에서 변용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2) 봉황문▶ 논문 1의 봉황문은 꽃가지를 부리에 물고 있는 봉황문의 형태가 송대 요주요에서 12세기 전반 경에 제작된 청자의 봉황문과 유사한 것을 보아 송대의 영향을 받은것을 알 수 있다. 13세기가 되면서 봉황문의 꼬리형태가 양 갈래로 갈라진 깃털사이로 가운데 꼬리가 당초모양으로 길고 화려하게 표현되는것으로 변화하는데 이 역시 송대 정요자기의 봉황문의 형태와 유사한 것이다. 하지만 14세기가 되면서 두마리의 봉황의 꼬리가 동일했던 이전의 시기와는 다르게 봉과 황을 구분하여 꼬리 형태에서 차별화를 주고 있다. 봉황의 형태를 구별해서 표현하는 것은 중국에서도 송대 자기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용천요 청자나 원대 난백유자기 청화자기에서 보이고 있다.
1. 북로군정서의 대한독립군단재편과 해체1) 간도참변과 대한독립군단결성독립군에게 잇달아 참패한 일본군은 1920년 만주의 관동군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방에 살고 있던 무고한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 알려진 이 사건에서 3,469명 이상 되는 무고한 간도의 한국인이 살해당하였고 2,500동이 넘는 가옥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적의 대 병력이 간도일대에 투입됨에 따라, 만주지역에서는 군정서?사령부 등 군사기관과 병영을 설치할 수 없게 되어 북로군정서는 북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20년 10월, 청산리 대전역을 전후하여 간도 방면 독립군의 대부대는 북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의 세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노령(露領)방면으로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독립군 부대는 소부대로 분산 행군하여 1920년 10월 26일경 안도현 황구령촌 부근에 도착하였다.북로군정서는 이곳에서 청산리독립전쟁에 참가했던 다른 독립군부대들과 군사통일 문제에 원칙적 합의를 보고 북방으로 이동하여 밀산지방에 재집결하기로 합의하였다. 12월 말경 밀산에 도착한 대한군정서는 총재 서일의 명의로 독립군단체들의 군사통일조직 형성과 친일분자 처단과 경신참변 피해자 구출을 요청하는 격고문(檄告文)을 같은 무렵 도착한 여러 독립군단체들)에게 발송하였다. 밀산에 모인 북로군정서와 여러 독립군들은 군사조직을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아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독립군단의 부서편성은 각 단체의 인재를 망라하여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김좌진·홍범도·조성환, 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동녕, 여단장에 지청천, 중대장에 김창완·조동식·오광선 등이 임명되었다.) 병력은 휘하에 1개 여단을 두고, 그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소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렇게 편성된 독립군단의 독립군 총수는 3,500명에 달하였다. 대한독립단의 본부로서는 총재부를 두어 전체를 총괄하게 하고, 외교부를 부설하기로 했으며, 독립군 병사들로 2개 여단(旅團)을 편성하여 제1여단은 러시아령이만(Iman)시에 여단본부를 두고, 제2여단은 만주 영안현에 설치하기로 하였다.)조직된 대한독립군사이에서 만주독립군의 노령이주 문제가 검토되기 시작하였으며, 문창범·한창해·오하묵·박병길의 만주 한국 독립군의 러시아령 이주 문제에 관한 하바로브스크 소재 공산군 제2군단과의 교섭이 진전되어 이듬해 이만시에 체류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와 중로연합선전부 간부들의 안내를 받아 1921년 1월에 흑룡강을 건너 이만시로 들어갔다.2)자유시 참변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몇 해 동안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赤軍)와 멘셰비키(白軍)가 대립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과 외국의 무력간섭이 겹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반일 독립무장투쟁을 하는 한인무장대를 소탕하고자 하여, 한국독립군은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파에 가담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의 공산혁명을 일본에 수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레닌과 화친조약을 맺는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은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대한독립군단은 노령으로 이동하게 된다. 당시 노령에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백그레고리의 독립군, 오하묵의 자유대대, 박일리아의 이항군 등 조선민족의 독립군 부대들이 주둔해 있었다. 노령으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의 고려공산당과 朴일리아가 거느린 이항군(사할린의용대)의 세력과 합세를 하게 된다.)1921년 2월 러시아령 한인사회에서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이동휘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휘를 받는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군권을 장악하기 위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상해파는 한국인 무장부대들을 1차로 한국의 민족해방에 바로 직접 투입하려 하고,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은 한인 무장부대를 시베리아 해방에 먼저 투입한 다음 한국민족 해방에 투입하려는 노선차이도 있었다.이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정면대결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최니콜라이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東洋秘書部)에 한인무력군 통수권 장악을 위한 교섭을시도하였다. 이르크츠크파의 군권 장악시도를 지원하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1921년 3월 긴급하게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그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갈란다라시빌리, 부사령관에 러시아에 귀화한 한국인 오하묵을 임명하여 이만에 모인 만주와 러시아령의 모든 독립군부대들을 오하묵이 지휘하는 자유대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한국인의 적군(赤軍)을 편성하려 하였다. 오하묵은 이를 위하여 이만시의 대한독립단의 독립군부대들을 자유시 브라고웨시첸스크로 불러들였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1921년 6월에 대한독립단의 모든 독립군부대들이 갈란다라시빌리와 오하묵이 지휘하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산하에 들어와 통합할 것을 요구하였다.이에 대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독립단을 지원해 온 이동휘 계통의 상해파를 지지하는 사할린의용대(이항군) 등이 거부반응을 보이자 갈란다라시빌리와 오하묵 등은 사할린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명령하였고, 사할린의용대가 이를 거부하자 갈란다라시빌리는 러시아군 제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무력으로 공격케 함으로써 사할린의용대를 포함한 대한독립군단 산하의 독립군에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명, 포로 917명의 참혹한 희생을 내었다.) 이것이 자유시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 부르는 독립군의 참변사건이다.대한독립단의 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고. 다수가 살상되었으며 다수가 강을 건너 이탈하였고, 전군이 완전 무장해제 당하였다. 1921년 7월 5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대하여 전군 이르크츠크로 이동하길 명령하였으나 서일·김좌진·나중소 등 대한군정서 간부들은 비밀리에 자유시를 탈출하여 북만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머지 홍범도·이청천·최진동·안무 등의 간부들과 대다수의 병사들을 이르크츠크로 이동되었다.
고려전기 사상사의 경향목 차1. 머리말2. 현종대 이후 불교계의 경향3. 고려초기 유교적 정치사상의 성립4. 맺음말1. 머리말고려중기 현종대로 들어서면서 불교계는 선종 세력이 약화되고 교종의 세력이 강성하여 화엄종과 법상종이 양립하게 된다. 이 두 종파는 왕실과 귀족세력에 연결되어 대립하면서, 각기 다른 불교계의 교파와 사상을 나누고 절충하며 공존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신라 말부터 수용되기 시작한 유교적 정치이념이 고려 초기에 들어서 통치이념으로 정립되기 시작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고려 전기의 사상들의 경향을 불교계와 선종대의 유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2. 현종대 이후 불교계의 경향1) 화엄학파의 계승고려 초의 화엄종의 여러 교단은 일단 균여에 의해 정리되었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 종단 내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균여가 귀법사에 주지로 있을 때 같은 절에 거주하는 정수와 대립하였는데, 균여가 토착신앙을 강하게 표방하였다면 정수는 순수교리적 신앙을 내 세웠다. 또한 광종대 화엄종에 그와 상당히 성격을 달리하는 탄문이 있었다. 그의 교학은 화엄학에 기반을 두었지만 다른 경전에도 폭넓은 관심을 보인 점에서 원효의 사상에 접근하여 있어, 이는 뒷날 의천의 화엄교학과 비슷한 사상경향을 가졌다. 하지만 탄문의 법맥이 의천에게로 이어지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균여의 계승자로는 창운이 있었다. 창운은 개경중심의 고려문화가 난숙기로 접어든 시기에 살면서, 토착적인 신이(神異)를 강조한 고려초기의 화엄종 사상경향을 계승하였다. 창운과 함께 균여를 흠모하여 그의 전기를 남겨준 혁련정)도 이러한 불교경향에 동조하였던 인물이었다.창운이 활동하는 당시는 의천의 화엄종이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의천은 창운과 구별되는 일문을 이루어 고려 중기에는 의천의 화엄종이 융성하였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아들로 중국에 들어가 진수정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경덕국사 난원을 사승(師僧)으로 두고 창운?이기?악진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의천의 화엄사상은 두순다. 의상과 법장은 지엄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이지만 그 사상경향은 매우 대조적이었다.의상이 연기된 모든 법상의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음으로 근본적인 하나속에 통합된다는 성기취입(性記趣入)을 주장했다면, 법장은 연기된 모든 법상의 실체를 인정하여 그 차별상을 설정하려는 연기건립(緣記建立)을 주장했다. 화엄사상의 구조에서 이러한 차이는 균여파와 의천파의 차이로 이어졌다. 천태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여러 법상의 차별을 전제로 하는 구상론적 산가파의 사상이 의천의 사상과 가깝다면 그것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은 구성론적인 산외파의 사상은 균여의 사상과 비슷하다.의천은 법장으로부터 이어지는 중국 정통파의 화엄종을 계승했다고 자부하였으며 그런면에서 그의 사상은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균여의 사상은 광종대의 특수한 정치적 여건과 연결되어 보편성보다는 융회적이고 토착적 신앙을 강조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또한 고려중기의 법상종사상역시 균여의 성상융회사상과 맥락이 닿아있는데 현종대 이후 크게 등장한 법상종 승려들이 균여에 사상에 호감을 갖는 것에 대하여, 숙종대에 법상종과 대립하고 있던 의천이 균여의 사상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면들에서 고려 중기에 균여파와 의천파가 불교 사상경향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입장 등 여러 면에서 대립하게 되었다.3) 법상종의 대두법상종은 현종대에 현화사(玄化寺)가 개창되면서 크게 일어났다. 현종은 어릴때 헌애왕후의 핍박을 받아 12세에 법상종 사찰인 숭교사(崇敎寺)에 출가하였고 승려들의 보호를 받아 시해음모를 여러 번 넘길 수 있었다. 후에 즉위한 헌종은 현화사를 개창하여 부모의 명복을 빌었는데 이는 법상종이 크게 일어난 계기가 되었다. 법상종은 현화사를 중심으로 왕실의 비호 하에 종세를 급속도로 확장하였고, 안산이씨(安山李氏)와 경원이씨(慶源李氏), 수주최씨(水州崔氏)가문 등 문벌세력과도 깊이 연결되어 세속의 후원세력을 갖고 당시의 고려불교계에서 가장 융성한 교단으로 발전해 갔다.대지국사 법경은 현종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박해를 피해, 법상종의 이러한 사상은 화엄종 내지 다른 불교 종파와의 융회를 가능하게 했다. 법상종 사상이 화엄종사상과 융회될수 있게 되면서 신법상(新法相)사상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와 구별되는 이전의 법상종 사상은 구법상(舊法相)사상으로 관념되었다. 신법상사상의 융회적 성격은 고려시대 교학불교 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성상융회사상의 성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4)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유행고려중기 문벌귀족이 대두한 사회에서는 선종 세력이 약화된 반면, 교종의 세력이 강성하여 양립하였고 법상종과 화엄종이 대립하는 가운데 화엄종과 제휴하여 천태종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 이러한 정통의 종파 불교와는 구별되는 흐름으로서 이른바 거사불교가 융성하였다. 고려 귀족사회에서는 불교와 관계를 갖지 않은 문인관료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거사로 일생을 보내거나 심지어 아예 출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이들로 이자현?이오?윤언이?곽여등이 있다.고려의 거사 불교는 무신난 이전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안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문벌 귀족사회의 모순 속에서 나타난 것이어서, 그들의 불교사상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고답적이고 은둔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거사불교는 이른바 죽림(竹林)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또한 그들은 당시 교종계의 상황에 대해 품었던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선의 수행에 가장 비중을 두는 경향을 보였다.그러나 이들은 문벌귀족으로서의 출신배경이 교종에서 완전히 벗어나 선종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문벌귀족사회의 비리를 예견하고 그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교종불교에서 벗어나려고 선종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거기에서 미련 없이 떠나지 못하는 한계성을 가진 과도기적 불교사상을 가졌다.5) 선종계의 움직임문벌귀족사회가 동요되는 고려 중기에 거사불교가 나타나 선종수행을 병행하는 사상경향을 띠어가는데, 한편으로는 선종사상이 서서히 펴져가고 있었다. 특히 예종대에는 왕 스스로 선종에 관심을 갖고 선종 사원으 당에 들어가 숙위학생(宿衛學生)을 지내면서 적극적으로 유학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최치원?최승우?최원위 등이 대표적이다.이들 중 최치원이 무너져가는 신라국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면, 최승우나 최언위는 신라의 테두리를 벗어나 각각 견훤과 왕건에게 유교적인 정치이념을 제공하였다. 최치원은 유교와 불교를 같이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녔는데 이는 그가 진골귀족 중심의 사회체제를 개혁하려하면서도 신라국가의 틀 속에 머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는 달리 최언위는 왕건과 결탁하여 고려초기의 유교적 정치이념의 성립에 기여하였다.고려시대에 와서 유교는 통일신라 이후 사상적 성숙과정을 거쳐 새 시대의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교육과 과거에 있어 유교가 채용되고 법률과 예제에 있어서도 유교사상이 침전되었다. 고려 건국 후 왕건 때의 유교적 정치이념은 민심의 규합을 위한 조처를 강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바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것과 직결되었다. 이는 태조가 후대에 전한 십훈요(十訓要)의 일부에서도 나타난다. 이를 살펴보면 왕위계승에 대한 유교적 왕위계승원칙(3조)를 제시하였고, 군주로서 신하의 마음을 얻는 방법과 백성을 비리면서 민심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고 올바른 상벌을 강조하고 있으며(7조), 또한 백관의 녹봉제도를 마련하라는 것과(9조) 무일편(無逸篇)을 강조하고 있다(10조)). 또한 고려초기의 유교적 정치이념은 풍속의 교화나 치국에서의 근검과 절약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고려초기의 유교적 정치이념은 민심을 규합하려는 의도에서 성립되었지만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농토를 기반으로 편안한 생활을 영위시키려는 민본정신이 발로한 것으로 보인다.2) 성종대의 유교적 정치사상고려 초기의 유학은 경종과 성종대에 고려의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통치이념으로서 정립되었다. 특히 성종대의 유교적 국가론은 태조대 이후 백성의 평안을 추구해온 민본정신을 구현하려는 것으로 이는 최승로의 상서문(上書文)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최승로는 고려의 유교적 정치사상을 정립하는데 크게 정치를 실현하는데 인재등용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생각은 학교의 확장으로 이어졌고 이를 위하여 국자감(國子監)이 설치되었다. 이때의 국자감의 창건은 신라시대의 국학이 국자감으로 발전적으로 개편된 것이라 추측된다.) 또한 지방의 유학교육을 위해 그 이전부터 향교가 설치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고려 전기 유학의 특징은 그 교육적 측면에서 볼 때 국자감이나 사학의 경우를 막론하고 과거시험을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중심으로 보인다. 결국 당시의 유학교육은 고려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실천적인 성격이 지배적이었으며 학문적 이론추구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성종은 이미 시행하고 있는 과거제와 더불어 천거제(薦擧制)를 함께 고려하기도 하였다.) 성종대 유교정치의 구현 또한 학교를 포함한 옛 제도를 상고(尙古)하여 정비하려는 속에 도덕적인 덕목을 강조하고 실천적 윤리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유교의 실천윤리 즉 효와 절의를 강조하면서 풍속을 교화하는데 관심을 지속시키고 국자감을 통해 교수하는 과정에서 유교의 실천적 윤리를 확립하였다. 이는 고려 초기 유교정치의 통치이념으로 전개되었다.4. 맺음말고려 전기의 사상을 크게 현종대 이후 불교계의 동향과 성종대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현종대 이후 불교는 광종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선종의 세력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문벌귀족과 결탁한 교종의 세력이 강성하게 되면서 새로운 흐름을 보이게 된다. 화엄종에서는 균여파와 의천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법상종이 현종대에 들어서 종세를 확장하면서 교종의 두 세력이 양립하는 형세를 보인다. 이는 고려 초기와 중기의 불교계를 구분하는 중요한 흐름이다. 고려전기 유교역시 성종대의 최승로를 중심으로 통치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자리를 잡아가게 되는데 초에 풍속교화와 인재등용을 중요시하는 방향에서 하나의 사상으로 정립되어 가기 시작한다.결과적으로 고려전기의 사상의 큰 흐름은 ‘수신(修身)의 도’로서의 불교와 ‘치국(治國)의 도’로서의 .
많은 지식들과 사상들이 15세기 르네상스시기를 맞으면서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 졌다. 중세 암흑기동안 잃어버리고 잊혀졌던 많은 가르침들이 이제 인간 지식의 르네상스, 즉 재탄생을 불러일으키면서 다시금 빛을 보기 시작했다.르네상스 다음에는 교회의 지배력을 불식시킨 종교개혁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들이 유럽의 모습을 뒤바꾸어 놓은지 백 년이 넘은 후에도 여전히 철학은 스콜라주의라는 수렁 속에 처박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 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데카르트가 나타났다.그는 그전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대표되어온 스콜라학파를 정면에서부터 비판하여 철학에서의 주체를 신이 아닌 인간, 즉 나로 끌어옴으로써 서양철학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기원전 4세기 고대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양철학의 황금기 이래로 명맥이 끊겼던 철학사상을 다시 움직였다. 신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끊임없이 재해석 되어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들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철학의 주체를 인간으로 돌려 중세 암흑기동안 잃어버리고 잊혀졌던 많은 가르침들의 재탄생을 불러일으키면서 다시금 빛을 보기 시작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데카르트의 이론은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주의라는 최고의 작위를 수여받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데카르트를 근대 ‘철학의 창시자’, 혹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간주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따라서 서양근대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중심점에 자리한 데카르트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1596년 3월 31일 투렌 지방의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 죽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604년에서 1612년까지 데카르트는 앙리 4세가 세운 라 플레슈(La Fleche)의 예수회 학교에 입학. 훗날 프로테스탄트교를 탄핵한하고 응용해 보이고 있다. 1644년에는 엘렉터 팔라틴의 딸인 엘리자베드 공주에게 헌정한 《철학의 원리》가 출판되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형이상학과 자연연구가 간명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한편 이때부터 데카르트는 윤리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여러 사람들과 서신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당시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던 보헤이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엘리자벳에게 최고서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영혼의 정열에 관한 책으로 엮어졌는데 이것이 1649년에 출판된 《정념론》이다.데카르트가 저술한 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경계심이 강한 네덜란드에서 많은 논박을 당했다. 이는 논쟁으로 확산되어 더욱 가열되었기 때문에 우트레히트 의회는 1642년 3월 17일 새로운 철학에 관한 논의를 전면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첫째, 그 철학은 새롭다. 둘째, 그것은 젊은이들을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셋째, 그것은 여러 가지 거짓되고 불합리한 견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비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데카르트는 1649년 2월 네덜란드를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친분이 있던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 샤뉘의 주선으로 tm웨덴 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그녀의 개인교수가 되었는데, 여왕은 정신이 맑은 이른 새벽에 훌륭한 철학을 배우겠다는 요청을 했고, 이것은 은둔적 기질이 강했던 데카르트에게는 오랜 습관을 깨뜨려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650년 2월 1일, 이날 역시 데카르트는 이른 새벽 여왕에게 아카데미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고 돌아온 후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스웨덴의 추운 겨울 한밤중에 일어나야 하는 철학과 전혀 무관한 이 의무는 결국 데카르트가 이겨 낼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 후 열흘 뒤인 1650년 2월 11일 새벽 4시, 54세의 나이로 그는 결국 외롭고 고독했던 스웨덴 생활을 청산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데카르트의 주된 관심은 지적인 확실성의 탐구였다. 이를 위해 그는 권위관계를 타나내기 때문이다.데카르트의 방법은 직관과 연역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한 규칙들로 이뤄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규칙들이란 정신이 추론을 위한 적당한 출발점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안내자 들인 셈이다. 수년간 체계화하여 데카르트가 만든 규칙들은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에서 21가지, 《방법서설》에서 4가지가 있다. 이중《정신지도를 위한 규칙》에서 중요한 네가지 규칙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규칙 3〉우리가 하나의 주제를 탐구하고자 할 때 우리의 탐구방향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놓은 것이나 우리 스스로가 억측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명석 판명하게 알 수 있고 확실히 연역할 수 있는 것으로 향한다.〈규칙 4〉이것은 다른 규칙들이 엄격하게 지켜지길 요구하는 규칙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정확히 관찰한다면 우리는 거짓인 것을 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정신의 노력을 헛되이 허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규칙 5〉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한 명제들을 점차 더욱 단순한 것들로 줄여나가고, 더 이상 단순하게 되지 않는 명제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해서 이와 똑같은 단계에 의해 다른 모든 명제들의 지식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정확히 그 방법에 따르게 된다.〈규칙 8〉탐구해야 할 문제들 속에서 우리의 오성이 충분히 잘 직관적인 인식을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거기에서 잠시 멈추어야 한다.이보다 9년뒤에 나온 《방법서설》에서의 4가지 규칙은 다음과 같다.〈첫째〉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고 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내 판단속에 넣지 말 것.〈둘째〉내가 검토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가장 잘 해결하기에 필요한 만큼 작은부분으로 나눌 것.〈셋째〉나의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가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 피론주의는 더 철저한 입장을 취한다.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가 확실한 인식의 불가능성을 단언하는 것조차도 독단적이라고 주장하며, 명제들이 개연성의 차이를 가졌다는 것을 부정한다. 개연성에 대한 판단은 오직 인식과 진리의 기준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만 내려질 수 있는데, 이러한 표준의 존재 역시 의심의 대상이다. 따라서 피론주의자들은 다만 관습에 따를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피론주의는 16세기 말엽에 이르러 다양한 형태로 계승된다. 특히 몽테뉴가 취한 피론주의는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일련의 영향을 준 듯 보인다. 몽테뉴는 동물과 달리 이성과 도덕을 갖추고 있다는 인간의 고고한 지위를 부정하며 인간 능력의 나약함을 상기시킨다.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신념들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며, 사람들이 믿는 것은 정서, 의지, 어릴 때의 훈련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인에 의지하는 수가 있으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들의 신념이 도대체 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근거는 우리들의 감관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증거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인간 이성의 확실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받아들이는 현상들을 판단하기 위해 하나의 재판기구를 필요로 하며, 이 기구를 검사하기 위하여 하나의 증명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 증명을 검토하기 위하여 또 다시 하나의 기구가 필요하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의 순환 속에 빠져 있다.그에 의하면, 인간이 진리를 탐구하고자 할 때 곤경에 부닥친 자신을 발견한다면, 사리 있는 유일한 방도는 판단을 보류하고, 사물의 본성에 대한 참된 인식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현상에 대해 판단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그 현상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않는지를 아는 체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피론식 회의주의는 근대의 철학자에게 많은 지지자를 얻었고 데카르트의 사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는 그러한 회의주의의 방법론뿐만 아니라,(다분히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성에 대해서도 어떤 점에를 탐구하는 데에 머물렀다면, 과 에 이르러서는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근거를 발견하기 위하여, 의심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의심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것은 의 악마의 가설을 시작으로 한다. 흔히 전지전능하다고 말해지는 신에 대하여 그 전지전능함 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보는 것이다. 즉, 이러한 물음이다. 신은 하늘과 땅에 대한 감각적 지각뿐만 아니라 연장성, 크기, 위치 등의 단순한 본성들을 이해하는 데서도, 그리고 가장 단순한 산술적 계산을 하는 데서도 내가 잘못 생각하도록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어떤 전지전능한 악령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여 나를 속인다라는 가설에 의해, 판단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것을 의심, 또 의심한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놓으며 이것은 그 철학의 또 다른 시발점이 되었다.그러나 데카르트의 목표는 회의가 아니라 확실한 진리의 발견이다. 그의 회의는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의 회의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 회의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로 나아가려는 수단이었으며, 회의의 반전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동요하지 않는 진리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그의 회의가 절대적인 것이라면 이 회의는 한가지의 절대적인 진리에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그는 회의의 절대적 한계점에 서게 된 자신을 보게 되는데 이와 같은 회의의 극점에 이르러 데카르트는 극단적으로 그가 기만을 당하고 있다거나 모두가 환상이고 거짓이라 해도, 그러한 사실을 회의한다 해도 그가 전혀 회의를 가질 수 없는 마지막 한가지 사실이 남게 된다고 믿었다. 그것은, 즉 「생각한다」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긍정하고, 부정하고, 의지하며,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상상하며 감각하는 것으로써 이렇게 사유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어떤 무엇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이처럼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리가 매우 명석하므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