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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의 자연환경 및 인문지리적 특성(2018통계반영)
    Ⅰ. 자연 지리적 특성1. 지리적 위치[그림 1] 제주도 주변 지역삼다삼무(三多三無)의 섬, 그리고 감귤과 관광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제주도는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도 가장 큰 유인섬이다. 제주도는 한반도의 서남단, 동중국해 상에 위치하는 화산섬(火山島)으로서 전라남도 목포시와는 직선거리로 약 149km, 부산광역시와는 약 30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그리고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와는 약 255km, 큐슈(九州) 지방과는 약 265km, 중국의 상하이(上海)와는 약 528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림 1)제주도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동쪽으로는 일본의 큐슈지방, 서쪽으로는 중국대륙, 남쪽으로는 일본의 류큐제도(琉球諸島), 타이완(臺灣) 및 필리핀제도, 북쪽으로는 한반도와 마주하는 형국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위치에서 볼 때, 제주도는 선사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변지역과 인접 국가를 잇는 해양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2. 영역제주도의 총면적은 1,850.16㎢(2017년)로서 한국 전체면적(100,363.72㎢, 2017년)의 약 1.85%를 차지한다. 2006년 7월 ‘제주특별자치도’로 지정되면서 2시 2군이던 행정구역이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통합되면서 그 면적은 제주시가 978.7㎢(2017년), 서귀포시가 871.5㎢(2017년)로 제주도를 양분하고 있다. 행정구역의 편제를 살펴보면, 제주시는 4읍, 3면, 19동(96리 472통 4,212반)으로 이루어져 있고, 서귀포시는 3읍, 2면, 12동(76리 65통 1,253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도의 남단은 마라도로서 마라도는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해당되며, 서단은 한경면 차귀도, 동단은 우도 연평리의 비양등대, 북단은 추자도의 시루여(바위섬)이다.3. 수리적 위치제주도의 수리적 위치는 본도(本島)에 한정했을 때는 북위 33°11′27″~33°33′50″, 동경 126°09′47″~126°56′57″이고, 부속도서를 포함했을 때는 북위 33°06′37″~34°00′00″ 때문에 계곡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된다.(5)해안지형해안을 연해 절벽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은 화산쇄설성퇴적암류로 구성되어 있는 송악산, 산방산 및 성산일출봉 일대를 제외하면 조면암이 노출되어 있는 안덕, 서귀포 등지에 한정되어 있으나 극히 일부지역인 남원과 애월 지역에서는 예외적으로 현무암의 절벽이 발달하여 있기도 하다.따라서 제주도에 분포하는 폭포는 거의 전부가 조면암류로 이루어진 절벽에 국한되어 있다. 본도의 해안 곳곳에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바다로부터 바람에 의해서 운반된 해양성모래로 이루어진 소규모 사빈(砂濱, sand beach)이 발달해 있으며, 남동계절풍에 의해 바람의 방향과 유사하게 배열된 사구(砂丘, sand dune)를 형성하고 있는 곳도 있으며 동북부 해안지역은 대규모의 사구층을 형성하기도 한다.제주도의 남부해안지역 즉, 산방산-군산, 대포, 외돌개-서귀포, 남원을 잇는 해안선은 전체적으로 융기해안지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모슬포의 일부 해안지역은 해안단구의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5. 기후(1)기온제주도는 기후 분류학상 아열대성 기후권에 속하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화산도로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연중 온난 습윤한 해양성 기후특성을 보여준다. 이는 제주도가 따뜻한 쿠로시오 해류(Kuroshio current)의 지류인 쓰시마난류(Tsushima warm current)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제주도의 연평균기온은 11.7℃로 서귀포 지역이 가장 높고 한라산 정상부가 가장 낮다. 같은 위도 상에 위치한 세계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면 제주도의 연평균기온이 가장 낮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주도가 대륙 동안의 해양도서로서 겨울에는 대륙의 영향을 깊게 받아 저온이 되고 여름은 이와 정반대로 해양의 영향을 받아 고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30년간 제주도의 연평균기온을 보면 제주시가 15.9℃, 서귀포시가 16.7℃로 나타났다.[그림 4] 지역별 연 평균기온제주도의 겨울은 짧고 온난한 크기 때문이다.특히 1940∼1982년까지 43년간 북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자료에 의하면 총 110회의 태풍이 제주를 통과하여 전국 제일의 태풍 통과지역이 되고 있다. 따라서 제주에 있어서 겨울철이 폭풍의 계절이라면 여름철은 태풍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Ⅱ. 인문 지리적 특성1. 제주의 유래 및 연혁제주도 역사의 기원은 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打製石器), 골각기(骨刻器)등이 발견되고 있다.이후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 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제주의 옛 명칭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들 명칭 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三姓)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 라고 하는 삼신인(三神人)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毛興穴:현재의 삼성혈)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 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동쪽해상으로 들어온 삼 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入朝)하여 '탐라'(제주특별자치도의 옛 명칭) 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 선사시대 이래로 약 1,100여 년196,453(31.5%)127,988(20.5%)85,893(13.8%)624,395(100%)2016년98,117(15.3%)454,291(70.8%)118,455(18.5%)199,339(31.1%)136,497(21.3%)89,189(13.9%)641,597(100%)2017년98,727(15.0%)465,239(70.8%)120,007(18.3%)201,781(30.7%)143,451(21.8%)93,117(14.2%)657,083(100%)제주도의 연령별 인구구조 변화를 보면 14세 미만의 인구는 출산율 저하와 관련하여 조금씩 감소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50~64세의 인구는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제주도의 대규모 개발 사업 증가 및 은퇴 후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을 원하는 중장년층의 이주가 늘면서 사회적 인구 증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65세 이상의 인구는 2005년 약 10% 인 것이 2017년 14.2%로 연 0.35% 가량 증가하는 추세로 점점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특별자치도의 2017년 12월 31일 기준 주민등록인구통계 분석에 의하면 제주시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12.3%로 고령화 사회이며, 서귀포시는 16.9%로 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Ⅲ. 자연환경1. 제주도 형성과정화산섬 제주는 신생대 제3기말 플라이오세에서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걸친 화산활동의 산물로 형성되었다. 즉 신생대 제3기말 플라이오세에 기저를 구성하고 있는 현무암이 해상에서 분출된 이후, 신생대 제4기(1백20만 년 전~2만5천 년 전) 동안 계속적인 화산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성산층, 화순층, 신양리층 등의 퇴적암층과 현무암, 조면암질안산암, 조면암 등의 화산암류, 그리고 후화산작용에 따르는 각종 화산쇄설물 등으로 제주도(濟州島)가 형성된 것이다.제주에서의 화산활동은 크게 5회의 분출 단계로 구분되고 있으며, 110회 이상 용암분출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1)제1분출기(1백20만년 이전) - 기저 형성제재해 있는 자그마한 화산체를 말하는 것이다. 제주도의 기생화산인 오름 들은 제주도가 거의 다 만들어진 이후에 한라산 산록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다발적인 화산활동인 기생화산 분출에 의해 수십만 년에서 수 만 년 전에 주로 만들어졌다.하지만 한림읍 앞바다에 있는 비양도의 경우에는 『고려사절요』에 1002년 5월, “탐라의 산 네 곳에 구멍이 열리고 붉은색 물이 솟아나오다가 5일 만에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모두 와석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000년 전까지도 제주도에서 화산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그림 13] 용암동굴 분포도(2)용암동굴순상화산의 산록에서 흔히 나타내는 용암굴은 비교적 두꺼운 용암류가 흘러내릴 때, 표면이 먼저 냉각, 고결된 다음 그 중앙부의 용암이 계속 흘러서 제거되고 나면 동굴이 남는다.제주도에는 만장굴, 협재굴, 쌍용굴 등이 천연 기념물로 지정되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용암동굴은 1회 혹은 여러 번의 용암유출에 의해 형성이 된다. 여러 번 용암단위에 의하여 형성될수록 동굴형태는 다양하고 복잡하게 된다. 흔히 동굴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형성과정은 초기단계, 형성단계, 다층화단계, 2차 용암 유입단계, 붕괴단계 5단계로 구분을 하며 제주도의 용암동굴인 경우는 초기단계에서 직접 붕괴단계로 진입되는 동굴도 많이 분포한다.① 초기단계용암동굴 형성의 초기단계는 유동하는 용암류 내부에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용암에서 유리된 가스가 집합체를 이루어 작은 공동을 형성하는 것이다. 공동이 형성되는 곳은 깊은 곡(삼)을 이루는 상부이다. 현무암질 용암에는 많은 휘발성분이 용해되어 있어 이러한 공동의 형성을 용이하게 한다. 휘발성분이 풍부한 용암에서는 휘발성분 자체의 점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한 화학반응이 촉진되어 온도를 높여 점성을 낮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초기의 용암류의 유로에 따라 여러 곳에 형성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 단계에서는 공동은 그 속을 충진 하고 있었던 가스의 내부압력에 의하여 풍선이 부풀어 오었다.
    사회과학| 2010.04.07| 16페이지| 3,000원| 조회(1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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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안읍성과 낙안분지
    Ⅰ. 序說2009년 4월 20일과 21일에 걸쳐 전라남도 일대를 다녀온 이번 학술답사는 지리적인 측면보다는 경제적, 문화적인 측면을 더 고려하여 답사지가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광양제철소, 순천만, 죽녹원 등을 지리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으나 관련 내용이 부족한 듯하여 낙안읍성을 답사 보고서의 주제로 선정해 보았다. 낙안읍성 답사 당시 비바람이 몰아쳐 자세히 돌아보지 못하고 사진도 많이 찍지 못하였으나 낙안읍성이 현재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 시대적인 배경 및 지리적인 조건 등을 추가 자료 및 논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 보고서의 목적이다.Ⅱ. 낙안읍성 소개낙안읍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에 걸쳐 있는 평지성이다. 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낙안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592보”라고 했으니, 그 사이에 돌로 고쳐 쌓은 듯하다. 그 뒤 인조4년(1626년)부터 6년까지 낙안군수로 재임했던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고쳐 쌓았다.)1899년 편찬된 『낙안읍지(樂安邑誌)』에 의하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590척이며, 높이가 8척이다. 치첩(雉堞))이 660, 옹성이 6, 못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현재 성곽의 길이는 남쪽이 460m, 북쪽이 340m, 동쪽과 서쪽이 각기 310m로 모두 1,410m이다. 높이는 평균 4.2m, 폭은 위쪽이 3~4m, 아래쪽이 7~8m인데 커다란 돌로 넓게 쌓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면서 작은 돌로 쌓았다.) 1983년에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어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현재 성 안 41,018평과 성 밖 6,472평이 민속마을로 보호받고 있다. 성벽 안팎에 민가가 들어서, 성벽이 마을의 일부처럼 되어 있다. 실제로 성벽을 담으로 쓰는 집들도 많다. 전시용으로 복원된 민속촌이 아니라, 주민들이 조선시대의 세시풍속과 통과의례를 지키면서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낙안읍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읍성이다.)Ⅲ. 낙안 분지[그림 ] 출처 : 국가GIS통합포털1. 낙안 분지의 입지낙안 분지는 순천만 만입부의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해안 산간분지에 해당한다. 낙안 분지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순천시 낙안면 일부와 보성군 벌교읍 일부로 구성되어 있다. 분지 주변 산지를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는 보성군 율어면, 북서쪽으로는 순천시 외서면, 북쪽으로는 낙안면 목촌리ㆍ금산리, 북동쪽으로는 낙안면 창령리, 동쪽으로는 순천시 별량면, 남쪽으로는 벌교읍 벌교리와 행정구역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위도상 위치로는 대략 위도 34°50′~34°55′, 경도 125°15′~127°25′ 범위에 속하며 분지의 규모는 남북 약 7.5㎞, 동서 약 4.5㎞인 사다리꼴에 가까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그림 1)2. 낙안 분지와 주변 산지낙안 분지와 그 주변 지역의 산지와 하천의 배열에는 다양한 방향성이 나타난다. 분지는 서쪽의 존제산의 줄기인 큰봉(571m), 북서쪽의 백이산(582.0m), 북쪽의 금전산(667.9m), 북동쪽의 오봉상(588.9m), 동쪽의 제석산(560.3m), 남쪽의 부용산(192.8m)와 노강산(322.9m)으로 둘러 싸여 있다. 분지의 서쪽으로는 존제산(703.8m)-백이산-고동산(709.5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NE-SW 방향으로 이어지고, 분지의 동쪽으로는 제석산 산줄기가 역시 NE-SW 방향으로 나타난다. 부지의 북쪽으로는 금전산-오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NW-SE 방향으로 나타난다. 분지의 남쪽으로는 부용산-옥전리 뒷산(431m)-존제산(703.8m)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E-W 방향으로 나타난다. E-W 방향 산지에서 낙안 분지를 향하여 NE-SW 방향으로 노강산이 뻗어있다. 벌교천의 수구인 분지 남쪽의 입구 부분은 NW-SE 방향으로 좁게 열려 있으며, 이곳에 벌교읍이 위치해 있다.(그림 2)[그림 ] 출처 : 참조 논문에서 발췌3. 낙안 분지의 수계낙안 분지는 산지로 주변 지역과 단절되어 있어 독립적인 수계를 형성한다. 존제산-백이산을 경계로 보성강 수계와 분리되고, 금전산-오봉산을 경계로 순천의 이사천과 분리된다. 제석산과 부용산을 경계로 산의 남쪽은 남해안으로 직접 유입하고, 산의 북쪽으로는 벌교천에 합수하여 벌교읍 수구를 통하여 남해로 입수한다. 분지 내부에 나타나는 벌교천은 NW-SE 방향으로 흐르고, 낙안천은 N-S 방향으로 흐르다 벌교천에 합수하고, 교촌천은 NE-SW 방향으로 흐르다 낙안천에 합수한다.4. 낙안 분지 형성 과정낙안 읍성이 위치한 낙안 분지는 남해안에 인접한 산간 분지이다. 이곳은 암석차가 나타나지 않는데도 차별침식 되어 발달한 분지라는 특징을 보인다. 암석에 따른 차별침식이 인식되는 많은 산간분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암석 요인(lithological factor)은 분지 발달에 절대적인 요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1)지구조 운동 체계)낙안 분지는 호남정맥에 해당하는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발달한 분지로써 NE-SW 방향 산줄기와 곡지들은 규모가 크며 오랜 기간의 외적 영력 작용으로 다듬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와는 달리 E-W 계열 지형 요소들은 전자의 하위 개념 지형으로 나타나며, 외적 영력에 의해 별로 다듬어지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NE-SW 방향 단열대를 따라서는 오랜 기간의 외적 영력에 의한 차별침식이 진전되면서 이에 해당하는 곡지에는 넓은 지형면이 발달할 수 있었는데, N-S 및 E-W 계열 단열대는 그렇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NE-SW 방향 단열을 생성시킨 지구조 운동이 작용한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N-S 및 E-W 계열 단열을 생성시킨 것이 작용해 왔음을 시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지구조 운동 체계에서 낙안 지역을 포함한 남서 해안 일대는 태평양 쪽에서 한반도로 전달되는 압력이 가장 먼저 전달되는 곳이다. 그 결과 낙안 분지 배후의 산지는 남쪽이 급하며 배후 내륙 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한 경동 지형 윤곽을 나타내고 있다. 낙안 분지 범람원과 분지 북쪽 배후 내륙 산지의 곡저와는 200m 이상의 고도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그림 ] 낙안 분지 지질도 - 논문자료
    사회과학| 2010.04.07| 3페이지| 1,000원| 조회(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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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복지정책의 전개과정과 발전방안
    한국 복지 국가의 전개 과정과 발전 방안Ⅰ.序說한국의 복지정책은 중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경제 성장의 쇠퇴와 신자유주의 기조 속에서 기존 복지 정책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요구가 빗발치고 새로운 정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제, 고위 정책결정과 현장의 복지실천 등 모든 영역에서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하여 새로운 방향에 대한 기본 전략과 원칙에 대한 국민적 합의나 공론화가 충분히 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당국자나 여야 정치 지도층, 학계와 복지단체와 같은 전문가 집단들까지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더 절실한 복지 정책은 이런 소용돌이로 인해 당분간 표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이에 본 보고서는 아래에서 복지사회와 복지국가의 차이를 비교해 보고 정부수립 이전과 이후의 한국의 복지정책의 전개 과정을 살펴본 후 한국 복지 정책의 발전 방안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Ⅱ.복지사회와 복지국가1. 복지사회복지사회는 복지국가는 아니지만, 국가가 개인들의 복지에 개입하지 않아도 시민사회 내에서 개별 사회성원들의 복지가 이루어질 때를 말한다.) 유럽의 19세기는 인구 폭발, 산업혁명, 정치적 민주화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들은 불결한 주거환경, 빈곤, 실업, 질병, 부랑자, 음주, 범죄 등이었다. 자유시장경제가 자기 조절적 기능을 통해 빈곤문제를 해결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리라는 기대는 1870년대 유럽 전역을 휩쓴 경제공황에 의해 사라졌다. 대규모 실업과 빈곤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었다.이때 등장한 것이 사회보험이다. 질병, 실업, 노령, 산업재해 등으로 인해 생활이 곤란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사회보험으로 보조하거나 규제하는 국가개입이 나타났다. 이는 시장실패의 역기능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2. 복지국가복지국가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1943년 발표했던 『비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해서 사회입법을 단행하면서부터이다.) 일명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다. 복지국가는 전후 기간 동안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이었다. 새롭게 산업화되어 과도기에 있는 국가와 가난한 국가들에게 새로운 모델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한 세기에 걸친 투쟁의 절정이었다. 복지국가는 복지사회와 구분된다. 복지국가는 국가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복지사회를 의미한다.Ⅲ.한국 복지 정책의 전개 과정1. 정부수립 이전의 한국의 복지 정책⑴고조선한국의 복지정책은 그 뿌리가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하고자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제도적 보호정책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은 8조 법금을 만들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였고, 윤환법(輪環法)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하고 노나라로부터 양곡을 구입해 흉년으로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⑵삼국시대삼국시대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과 병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구증가정책에 힘을 쏟았다. 그 일환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휼하고 전쟁으로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관곡진급, 사궁구휼, 조조감면, 대곡자모구면, 경형방수, 종자 및 식량 급여, 이재 및 빈자에 대한 왕의 친순 및 위문, 책기감선, 역농방재, 조묘기도, 불사기도 및 기타 제방축조, 귀농정책, 양주 금지 등은 삼국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실시된 복지 정책이었다.)⑶고려시대삼국시대의 민생과 구휼의 여러 제도는 고려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불교의 자비사상이 큰 영향을 주어 구제 사업이 확장되고 제도화되었다. 정인지의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의 진휼로서 ①은면지제(恩免之制), ②재면지재(災免之制), ③환과고독진대지제(?寡孤獨賑貸之制), ④수한질여진대지제(水旱疾濾賑貸之制), ⑤납속보관지제(納粟補官之制) 등이 있으며, 구제 사업은 크게 항구적 구빈사업과 일시적 이재민 구제 사업으로 나뉜다.)⑷조선시대조선은 건국 초부터 불교 대신 유교, 특권층 중심의 소유제도 대신 신흥양반과 일반 백성들 간 이윤균점을 통해 중앙 집권적 왕조를 탄생시켰다. 자연히 구제 사업은 왕의 책임 하에 강력한 행정조치로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의 구제행정의 원칙은 ①빈민구제는 왕의 책임이며, ②구제를 신속하게 하되, 일차적 책임은 지방관에 있으며, ③중앙은 구제에 대한 교서 및 필요한 관계법을 제정, 공포하고, 구호행정을 지도감독하며, 구제에 노력한 지방 관리를 표창하는 것 등이었다.)⑸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의 구제 사업은 근대적 복지이념에 의해 시행됐다기보다는 식민정책의 포섭정책으로서 추진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 합병하기 이전부터 조선에 대한 수탈을 위한 각종 조사사업을 세밀하게 진행해 토지수탈과 각종 사업을 통제하고 조선인들의 생활 상태를 식민지 노예로 전락시켰다. 일제는 조선인의 빈궁화가 폭력적인 독립운동으로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특히 대공황의 여파와 태평양전쟁 도발, 강제징용 등이 일상화되면서 이른바 구호행정이 등장했다.)⑹미군정기미군정 기는 일제 강점기시대와는 큰 차이가 있었으나 주권이 미군정에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8·15광복으로 귀국동포들이 급증하였고, 좌ㆍ우 대립에 따른 각종 소요와 사회혼란으로 복지수요가 급증했음에도 미군정기의 복지정책은 임시 구호 적이며 시혜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2. 정부수립 이후의 한국의 복지 정책⑴정부수립 이후의 복지 정책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복지정책은 이상한 경로를 밟아왔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는 복지정책을 정권의 폭력을 은폐하고 집권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명분으로 삼아왔다. 5ㆍ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군인연금법, 산재법, 사회보장법 등을 제정해 정권기반을 안정시키면서 선성장-후분배정책의 안전장치로 이용하려 한 것이다. 장기집권을 획책한 10월 유신 이후에도 국민연금법과 의료보험법 등이 정권유지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과 세계화를 위해 국민 복지 기획단을 구성해 고용보험법, 국민의료보험법을 제정했고, 김대중 정부는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도입에 따른 대량실업과 빈곤층의 증가로 사회불안이 가중되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였다. 노무현 정권은 ‘참여 복지’를 새로운 복지정책의 이념으로 제시하여 국민이 정책 형성과정의 주체로써 서비스의 선택과 제공 및 평가 과정에 이용자로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다.⑵정부수립 이후의 복지 정책의 문제점이처럼 복지정책 결정 과정이 객관적 데이터와 조건에 대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제도마련이나 구체적인 서비스 프로그램의 시행으로 나타나지 않고, 정치적 필요와 목적이 우선시되면서 형식에 그치거나 복지정책의 기본적 원칙조차 무시한 편의적인 방법이 다반사로 이뤄졌다. 빈곤층과 저소득노동자가 우선돼야 할 의료보험이나 국민연금이 신분이 안정되고 상대적으로 고소득 직종에 우선 적용되는 ‘거꾸로 된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이 수십 년 지속되었기 때문에 복지 정책 결정과정의 관행과 타성은 하나의 풍토로 굳어져 있었다.민간정부가 들어선 이후 비로소 제기된 이슈를 공론화하고 복지정책으로 반영하거나 빈곤층과 저소득노동자층 등 그 동안 배제되었던 복지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 역시 편의적 방식을 극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부의 보건복지정책이 부족한 데이터와 부실한 자료 수집을 통해 입안되고 있는 실정은 국민과 국회의 입장에서 불신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이처럼 국가가 복지정책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구조에서 중요한 요소는 국민생활의 구체적 조건에서 발생한 요소가 아니라 정권의 ‘선언적 발표’와 ‘재원확보’였다. 경제부처와 협의하는 과정이나 집권당과의 논의에서 중시되는 것은 ‘전년도 대비 몇 % 한도’와 정치적 효과였다. 복지 정책의 보편성, 공정성과 합리적 효율성은 언제나 부차적이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현장의 요구와 수요, 정책의 목표와는 터무니없는 괴리가 발생하고,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는 ‘보여주기식 메뉴’들이 즐비하게 된 것이다.
    사회과학| 2010.04.07| 5페이지| 1,000원| 조회(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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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
    Ⅰ. 플라톤의 시간론우리는 시간을 시계를 통해서 확인한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시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시각 또는 순간이지 시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시간’이란 것은 시각이나 순간과 같은 것들의 상위 개념입니다.사실 ‘시간’은 우리가 볼 수도 만질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시간이 가고 있다고 말을 하지만 가고 있다는 것은 곧 그것을 볼 수 있거나 또는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간은 그런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우리는 그저 막연히 시간이 가고 있다고 말을 할 뿐 정작 그 시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1. 시간의 존재이러한 시간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플라톤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플라톤 이전에는 ‘시간’을 그저 어느 순간에 생겨나서 존재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뿐 본질이 무엇인지 논의된 바가 없었습니다.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중 하나인 『티마이오스』에서 신화의 형태로 시간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티마이오스』에는 신과 같은 절대자 ‘데미우르고스’가 있는데 그가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우주가 생성되기 이전에 영원한 존재인 이데아가 있고 거기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생성이 있으며 생성이 일어나는 공간이 있어서 그 세 가지를 통해 우주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그런데 필연으로 존재하는 생성은 제멋대로 운동을 하고 전혀 균형이 잡히지 않은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기에 데미우르고스가 질서를 부여하여 조화롭고 아름답게 만든 것이 우주입니다. 즉 제멋대로인 우주에 데미우르고스가 우주의 혼을 부여하여 마치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 것입니다.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우주의 본성은 본래 이데아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 본성인 이데아는 영원한 것인데 그로부터 생성된 질료에 영원을 부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주를 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두기는 했지만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데미우르고스는 영원에 대한 영구적인 모상(eikon, icon)을 우주에 부여하게 됩니다. 영원은 아니지만 영원을 닮은 것으로 부여한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우주가 생성되기 이전에는 낮과 밤, 연월 등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영원의 모상을 부여함으로써 우주 곧 천체는 이데아를 닮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간을 ‘영원에 대한 영구적인 모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질서하게 생성, 소멸하는 현상계로 하여금 영속적으로 진행하는 우주가 됨으로써 이데아 즉 영원을 지향하게 하도록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2. 시간의 인식또한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시간을 ‘수에 따라 전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곧 ‘수에 따라 진행하는 천체의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미우르고스는 천체, 즉 해와 달과 다섯 개의 행성(화성, 수성, 목성, 금성, 수성)을 만들어 일정한 궤도에 따라 순환운동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순환운동이 곧 ‘수에 따라 진행하는 천체의 운동’이며 이는 곧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플라톤은 이와 같이 『티마이오스』의 이야기를 통해 시간이란 것은 ‘영원에 대한 영구적인 모상’, ‘영원을 지향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천체의 운동을 통해 시간을 가시적으로 인식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Ⅱ.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1. 시간의 존재앞서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과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자연의 운동과 연관시켜서 관찰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신의 존재론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신화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시간과 운동 간의 일반적인 관계만을 확립하려고 하였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시간의 개념은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천체에서 출발해야지 그것을 넘어서 플라톤처럼 시간과 우주의 근원에 대해 묻는다든가 영원을 문제 삼는 것은 불가능한 물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천체는 무시무종하게 그냥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시간이 우주 초월적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은 우주 내재적인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시간을 ‘수에 따라 진행하는 천체의 운동’이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 시간을 운동과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시간의 기초를 천체의 순환운동에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운동과 관련된 어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운동을 떼어놓고 시간을 생각할 수는 없지만 운동이 곧 시간은 아닙니다.시간과 관련된 운동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운동이 아니라, 변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이로서의 운동에 해당합니다. 전이는 곧 연속성을 갖는데 시간 또한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므로 운동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또한 운동에는 전후관계가 있는데 이것은 시간에 있어서는 이전과 이후가 됩니다. 이전은 곧 과거이고 이후는 미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 사이의 연속은 크기로 발견되는데 이것은 수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의 연속성은 수의 연속성과 일치하고 이전과 이후 사이의 간극은 수로 측정이 가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정의하여 “이전과 이후 사이의 운동의 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운동은 시간의 인식 근거가 됩니다.2. 지금의 성격시간을 이전과 이후 사이의 운동이라고 할 때 전후를 연결하는 계기인 지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에서 보면 이전은 이미 없고, 이후는 아직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지금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이 바로 시간의 존재를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지금은 무한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다시 또 지금이 되고 또 지금, 또 지금 이런식으로 계속적으로 진행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시간의 시작이면서 다른 시작의 끝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연속인 것은 지금에 의해서이고 시간이 이전과 이후로 분할되는 것도 지금에 있어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과의 연관 속에서 우리는 이전과 이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 지금이 시간을 형성하기도 합니다.또한 지금은 시간적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방금’, ‘이제 곧’, ‘일찍이’, ‘진작에’, ‘옛적에’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3. 시간의 인식그러면 이러한 시간적 거리를 어떻게 인식하게 될까요?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의식(영혼)을 통해서 시간을 식별하고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을 운동의 수로 정의할 때 그 수는 인식되고 또 헤아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식되지 못하면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식할 수 있는 시간으로 따져볼 때 ‘지금’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분명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와 직접적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에 실재성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시간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Ⅲ.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1. 시간의 성립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주교이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하여 철학적 사상과 그리스도교적 시간 사상을 통합하고자 하였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며 시간론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를 인용하여 신은 첫날에 ‘하늘의 하늘’과 ‘땅’을 만드셨는데, 이것이 제1창조이며,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우리가 살고 있는 천지를 만들었습니다.여기서 전지전능한 신은 영원의 존재이며 ‘하늘의 하늘’은 영원에 닿지는 못하지만 영원성을 가지는 유구의 존재입니다. ‘땅’은 천지를 창조한 바탕이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없고 형상도 없는 무형 질료에 해당하며 시간적 세계 형성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은 영원도 유구도 아닌 무시간성을 가집니다.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이라고 하여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기 위한 바탕이 되는 것인 만큼 무언가 있는 것이지만 아직 형상을 갖지 않은 무형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셋째 날에 신은 이러한 무형의 질료를 바탕으로 가시적인 하늘, 땅, 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신은 시간도 함께 만들게 됩니다. 생성, 변화를 그 본질로 하는 천지에 신은 시간을 불어넣어 변화와 운동을 가능하게 합니다.시간은 신이 만든 것인 만큼 영원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무형의 질료인 ‘땅’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므로 ‘땅’이 가진 무규정성, 곧 신과의 불유사성을 가지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시간은 영원에 대한 단절인 동시에 무규정성을 끊고 영원에 닮아가는 양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무규정성을 끊고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라는 것이 존재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현재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와 달리 과거와 미래는 있지 않고 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면 시간은 항상 존재하는 영원한 것이므로 영원의 단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간은 천지에 존재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며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하지 않는 무에서 오거나 무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무규정성의 속성을 가진 시간의 모습입니다.2. 시간은 천체 운동이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천체의 운동은 시간이 아니라고 합니다.당시에는 천체의 운동을 시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천체의 규칙적 순환 운동은 시간을 측정하는 좋은 기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 시간이 될 수는 없다고 합니다.태양의 순환을 하루라고 보았을 때 그 하루가 여름에는 길고 겨울에는 짧아지게 됩니다. 계절에 따라, 위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3. 과거와 미래의 존재 근거앞서 설명하였듯이 시간에 있어서는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현재만 있고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현재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영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우리가 늘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와 미래의 존재 근거는 인간의 의식에 있다고 말합니다.우리가 보통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기억으로부터 이끌어집니다. 이러한 기억은 현재의 기억이지 과거 그 자체의 기억이 아닙니다. 이러한 과거를 ‘기억으로서의 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한 미래는 ‘기대로서의 현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 또한 현재의 기대로 인식되는 것이지 미래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문/어학| 2010.04.07| 5페이지| 1,000원| 조회(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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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를 여는 역사-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서평
    미래를 여는 역사, 한ㆍ중ㆍ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Ⅰ. 서론 - 본서(本書)의 의의한ㆍ중ㆍ일 3국은 고대로부터 서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관계였으며 또 서로 공통된 부분을 많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가 유사하며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탓에 전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고래(古來)로부터 형성되어 온 중국과 한국, 일본과의 조공관계(朝貢關係)가 근ㆍ현대에 이르러 서양 세력의 침입으로 와해되면서 일본이 가장 먼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됩니다. 한국은 20세기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중국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강국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본의 정복에 굴복하고 맙니다. 일본의 대륙 진출로 한국과 중국은 일본과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한ㆍ중ㆍ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맙니다.러ㆍ일 전쟁 이후로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논리로 아시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정복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라 비난하며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서로를 견제하게 됩니다. 현재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가해자라는 과거 역사를 반성하지 아니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대를 보유하려고 하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과정에서 동아시아 3국은 서로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고, 국민들도 객관적이지 못한 역사 교육을 통해 다른 나라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이에 ‘미래를 여는 역사(이후 ‘본서(本書)'로 씀)’는 한ㆍ중ㆍ일 3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각국의 근ㆍ현대사에 대한 편견과 왜곡을 해소하고 3국의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를 배우도록 하는데 그 의의를 가지고 탄생하게 되었습니다.Ⅱ. 각 사건에 대한 논평1. 강화도 조약(1876)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세와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운요호 사건을 고의로 일으킨 일본과 맺은 것입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 배경에 대해 본서(本書)는 당시 서양 열강이 조선의 개항을안타까워할 것입니다.하지만 ‘동아시아속의 한일 2천년사)’(이후 ’한일 2천년사’로 씀) 속의 강화도 조약에 대한 설명은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줍니다. 한일 2천년사에서는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것이 당시 조선의 대세였으나 청의 이홍장이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조선에 피력하면서 이를 조선 조정이 받아들여 서둘러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은 자국 내의 정한론을 들어 조선 조정을 협박하여 조약 체결에 있어서 유리한 내용을 마련하는데 사용합니다. 대신 일본은 강화도 조약 제1조에서 조선이 자주국임을 명시하여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정한론을 부인하게 됩니다.)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일본의 협박과 청의 배후조정에 따라 타율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게 됨으로 불평등 조약을 ‘서둘러’ 체결하게 된 것입니다.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은 조선 조정이 외교력에 무지했다기보다 근대 사회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에 휘둘리고 있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만 바라보며 일본의 정세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것이 주원인이라 생각됩니다.이러한 내용을 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와 본서(本書)에서는 생략함으로써 당시 조선이 청과의 군신관계를 얼마나 깊게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서술을 피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끊고 조선을 정복하고자 하는 일본의 야욕을 더 부각시키고자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2. 한ㆍ일 합병본서(本書)는 87 페이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것인가, ‘병합’한 것인가”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1905년에 체결된 ‘제2차 한ㆍ일 협약(을사조약)’에 대하여 일본군의 협박 아래에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이며 이를 전제로 체결된 1910년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도 역시 무효라는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두 조약이 모두 유효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주장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국제법학자 구라치 데쓰키치는 자신의 저서 (1899)에서 조약이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 요건으로 ‘합의의 완전성’을 들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조약 체결에 참여한 사람에게 폭력ㆍ위협 등이 가해졌을 때는 본인의 의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조약은 결코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렇듯 프랑스와 일본의 국제법학자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本書)에서 이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3국에서 동시에 출간되는 책이므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본서(本書)의 집필 과정에서 수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에도 등장하는 프랑시스 레이의 견해가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3. 일본의 2ㆍ26 사건1936년 일본에서 발생한 2ㆍ26 쿠데타 사건은 일본이 본격적인 군부독재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에서는 일본 내부의 갈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짤막하게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본서(本書)는 짧게나마 일본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일본이 어떻게 군부독재 체제를 확립하여 중국을 침공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본서(本書)에 정확한 설명은 되어 있지 않지만 황도파(급진파)의 쿠데타를 통해 기존의 온건 정치 세력이 모두 제거되면서 의회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군부독재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이후 정치판도에서는 황도파의 쿠데타를 진압한 통제파가 의회를 장악하고 군사비를 증가시켜 이듬해인 1937년 중ㆍ일 전면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이 얼마나 군사력이 강건하였으며 어떻게 중국과 전면전을 치르게 될 결정을 하였는지 이해되지 못한 부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민간인의 피해와 군수 시설의 파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분과 자원의 획득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본서(本書)는 미국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 문단에서 일본이 중국 도시에 무차별 공격을 한 것이 있으므로 일본도 그런 공격을 받아 마땅하다는 투의 내용입니다.194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전쟁의 막바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몇 년간 계속된 경제봉쇄정책으로 전쟁에 동원할 물자가 바닥 나 있는 상태에다 국민들의 전쟁 의욕 또한 바닥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미국은 소련의 아시아 참전에 자극 받아 전쟁을 미국 쪽에 유리하게 돌려놓고 싶었으며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지어 소련군이 조금이라도 더 남하하는 것을 막아보고자 하는 생각에 도쿄 및 주요 도시를 융단 폭격하고 심지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게 됩니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는 고등학교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와 세계사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미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이런 의도를 교과서에 실을 수는 없는 일인 듯 합니다. 다만 미국의 이러한 의도는 한일2천년사의 신탁통치 구상 부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이상과 같은 미국의 의도를 본서(本書)는 따로 설명하지 않은 채 일본인 민간 시설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서술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보도록 하고자 하는 이 책의 취지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5. 오키나와 전투본서(本書)는 178 페이지에서 179 페이지까지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장 전쟁이 치열했던 지역으로만 알고 있었던 오키나와 전투의 실상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특히 “이러한 오키나와 전의 쓰라린 경험에서 ‘군대는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 는 교훈이 평화에 대한 강한 염원과 함께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것입니다.”)는 부분에서는 이것이 비단 오키나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종교적인 참배일 뿐이라고 변명합니다.본서(本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된 이후 일본 사회에 침략 전쟁의 책임을 부정하는 풍조가 드러나면서, 보수 정치가와 유족회가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가 수호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를 내용으로 하는 야스쿠니 신사 법안은 국민들의 반대로 4번에 걸쳐 국회에서 부결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수파 정치가들은 수상과 각료들의 공식참배를 실현한다는 방침으로 전환하여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가 수호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추진하게 되었습니다.”)이상과 같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배경에는 보수파 정치인들이 깊게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국민들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가들은 그들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치르기 전의 상황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1936년에도 2ㆍ26 사건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한 일부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국민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습니다. 최근의 일본도 다수 우익이 의회를 장악하고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헌법 개정을 통해 강한 일본을 만들려 합니다.이에 대해 본서(本書)는 “왜 이제 와서 옛날 ‘일본 군군주의의 정신적 지주’이자 군 시설이었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왜 일본에게 침략당한 나라들의 국민감정에 다시 상처를 주려는 것인지, 왜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흠집을 내면서 일본과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우호관계를 훼손시키는 것인지, 또한 왜 일본 국내에서도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위헌으로 보는 판결이 나오고 있는지 일본 정치가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견해를 피력하여 한ㆍ중ㆍ일 3국 국민들의 우려를 대변하고 있습니다.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강한 일본을 표방하며 아시아 진출을 시도한 역사가 있습니다.
    독후감/창작| 2008.06.12| 7페이지| 1,5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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