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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틴제국의 성립과 문화.
    1) 비잔틴 제국의 성립2) 비잔틴 제국의 발전과 쇠퇴3) 비잔틴 제국의 정치와 경제4) 비잔틴 문화와 서유럽◇별책부록-서 로마 교회와 동 로마 교회는 어떻게 다른가?○동, 서 교회의 갈등(1054년 분리)○그리스 정교◆ 비잔틴 제국의 성립과 문화Constantinus의 遷都이후, 로마 제국의 동방과 서방은 서서히 이질화되어 가던 중, 마침내 Theodosisus 1세의 死後 동, 서 로마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동로마의 황제나 지배귀족층은 자신들이 기본적으로 로마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은 Justinianus 시대 때에 절정에 도달하였는데, 그는 군사적으로 로마의 舊土를 회복하는 노력을 시도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동로마의 역사는 결국 옛 로마와 다른 경로로 발전하게 되었다. 15세기 중엽에 그 운명을 다 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압박에 대한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한편으로 그 교회는 남부 및 동부 유럽의 문화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 비잔틴 제국의 성립? 성립 배경동로마의 비잔틴화(化) - 476년 서로마제국이 소멸된 이래로 콘스탄티노플의 지배자들은 게르만 민족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후기 로마사회의 기본 특성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6세기 이후 점차 지배층은 인종적으로 그리스 민족과 혼융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 최초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옛 로마 영토의 절반가량을 회복했다. 그는 대내적 개혁을 단행 하고 미술을 장려하여 문화를 진흥시켰다. 특히 법전 편찬에 착수 하여 ?민법대전?을 완성하였다.유스티니아누스는 상당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잠자지 않는 황제 라는 별명을 얻은 매우 부지런한 지배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 단력과 용기가 부족한 성격상의 결함이 있었다. 이러한 결함은 서 민 출신 황비 테오도라 (508~548)에 의해 보완되었다.서커스 조련사 딸인 테오도라는 아름다움과 지성을 역 국가로서의 명맥은 약 700년 동안 더 유지되었다.레오 3세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은 그 후에도 계속된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발칸반도에 위치한 불가르인의 위협이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마케도니아 왕조(867~1025)의 지배 하에서 또다시 부흥하였다. 황제 바실리오 2세(재위:976~1025)는 불가르인 국가를 침공 정복하여 비잔틴 세력을 중앙 유럽과 러시아에 깊숙이 침투 시켰다. 또한 동쪽에서도 이슬람 세력과 대치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11세기말 비잔틴제국은 국내 문제와 외침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특히 동쪽에서 셀쥬크 터키 민족의 침입과 서쪽에서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의 영토 팽창 정책으로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할 자체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비잔틴 황제들은 서방세계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십자군 운동이 일어났다.그리고 대토지 소유의 증가로 인해 자영 농민이 몰락하게 되어 세력이 점차 약해졌고, 13세기 이후에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의 유행으로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결국 15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1453).3) 비잔틴 제국의 정치와 경제①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caesaropapism)국가원수가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종교문제의 최고 심판자인 정치체계.이 말은 비잔티움 제국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쓰인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비잔티움 법률은 교회가 제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규정해 놓았다고 한다.또한 역사가들은 황제가 교리적으로 절대로 오류가 없다거나 성직자의 권리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비잔티움 그리스도 교회의 전반적인 인식이었다고 한다.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에 대한 황제의 직접적인 압력이 실패로 끝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한 제노(474-491 재위)와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 재위)의 노력, 로마와의 결합을 지지한 미카엘 8'준비적 배려'의 뜻이지만, 국가에 대한 봉사의 대가로 황제가 수여한 영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배려할 것을 서약한 데서 수여된 영지 자체를 이르게 되었다)는 수령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주어졌고, 양도나 상속으로 권리를 이전할 수는 없었다. 개인에게 주어지는 땅은 여러 개의 마을을 포함하는 커다란 지역인 경우도 있지만, 한 가족의 필요를 겨우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영지인 경우도 있었다.토지 수령자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농민들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갖는 주인으로서, 세금 징수권과 재판권을 가졌다. 마케도니아 왕조 말기 및 두카스 왕조에서는 아직 군역의무는 수반되지 않았으나, 콤네누스 왕조(1081-1185)의 알렉시우스 1세 치하에서 '프로노이아'는 군사제도의 토대가 되어 토지 보유자는 수여받은 땅의 가치에 따라 군사적 봉사와 병사들을 제공해야 했다. 알렉시우스 1세는 수도원의 땅을 압류하여 '프로노이아'로 재분배 함으로써 군대에 병사들을 공급할 토지 보유자의 수를 늘렸는데, 마누엘 1세 때에는 원로원 의원 및 다른 토지 수령자에게 '프로노이아'를 매각할 수 있었고, 팔라이올로구스 왕조(1261-1453)의 미카엘 8세 때에 이르자 '프로노이아'를 상속자에게 양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군사적 봉사의 의무도 그 땅과 함께 상속자에게 넘어갔다. 팔라이올로구스 왕조 때 봉건귀족들은 군사적 의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했지만 수여받은 땅은 계속 보유했다. 토지 수령자들은 토지와 토지에 딸린 소작인을 소유하여 국가 속의 국가를 형성하였고, 이것이 비잔티움 제국의 봉건화를 촉진하고 강화함으로써,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제도를 약화시켜 비잔티움 제국 쇠퇴의 한 원인이 되었다. 또, 이 제도는 제국령을 넘어서서 남 슬라브 여러 나라에 퍼졌고 이들 나라의 봉건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콘스탄티노플 :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제국의 문화적 중심일 뿐 아니라 세계무역과 산업의 심장부였고, 백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중세 유럽 최대의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방를 사형하였다.레오 3세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2세(재위:715~731)에게 성상 제거를 명했으나 교황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군대를 파견한다면 기꺼이 맞서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에서 성상 파괴는 궁극적으로 실패했고 843년 성상이 의식절차에서 다시 사용되었다.마침내 1054년에 이르러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정교 교회로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1054년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서로 상대방에 대한 파문을 선언하여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의 길에 들어섰다.⑥ 의의 :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크리스트교 세력을 보호 하였고, 그리스 고전 문화를 잘 보존하고 이를 서유럽에 전해 주어 역사 발전에 이바지하였다.⑦ 농업 : 농업은 비잔틴 경제의 중추였으며 국가는 농업생산을 높이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황제의 강력한 농업정책으로 개간과 식민이 대규모로 행해져서 8세기 초 농업생산은 현저하게 늘어났다. 곡물?올리브?포도 등이 농산물의 주종을 이루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양잠술이 성행하였다.소토지를 소유하는 자작농이 일반적이었으며, 이 계층이 제국의 군사권이나 황제권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8세기 초 이래 대농장이 점차 비잔틴 농업 시대의 추세를 이루었다. 그것은 귀족이나 수도원 소유의 대토지를 소작인이 경작하는 제도였다. 11세기 중반 이후 대농장제는 농업 전체를 지배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그 결과 자작농의 몰락과 제국의 쇠퇴를 가져왔다.⑧ 상공업 : 상공업은 6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는 동안 매우 번성하였다.화려한 비잔틴 문화는 상공업으로 축적된 경제적 부 때문에 가능하였다. 수공업은 무기?모직물?보석세공?상아제품?사치품?금속제품?유리제품 등 광범하였다. 특히 직물공업은 비잔틴 산업을 유명하게 만든 주요 산업이었다.수공업 길드는 원료구임, 제조방법, 제품판매, 노임, 가격, 이윤 등을 고정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강력한 국가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생산은 안정된 반면 기술적인 진보는 억제되었다. 수공업자나 상인들은 자신의 직종을 떠나서는 안그리스도교 미술의 후기 고전주의 형태를 양식화, 표준화하면서 발전했지만, 형태보다는 선이나 채색한 평면의 역동성에 기반을 두었다. 개성적인 얼굴형은 억제되고 표준 얼굴형이 채택되었으며, 몸매는 밋밋하고 옷 주름은 소용돌이 치는 선 형태로 만들어졌다.전체적인 분위기는 현세를 초월한 느낌이어서 3차원적인 개개의 인간상을 강렬한 선과 화려한 색으로 힘차게 표현함으로써 영적 존재로 대체시켰다. 비잔티움 양식의 형상은 대체로 사실적이지 않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상상을 통해 환상적인 해석이 가미되었다고 불신할 여지가 없으므로 자연주의적 고전주의 양식보다 더 간접적이기도 하며 더 직접적이기도 하다. 엄격한 정면 자세와 꿰뚫을 듯 커다란 눈을 그린 비잔티움 양식의 얼굴형, 그리고 외떨어진 인물의 배경으로 금색을 독특하게 사용하여 그 형상이 보는 이와 벽 중간 어디쯤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등으로 직접성의 효과가 증대되었다.비잔티움 제국에서 조상(彫像)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조각은 책 표지나 유물함 같은 물건에 곁들여졌는데, 이 경우, 작은 상아부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세련되고 부유한 사회층에서는 자수, 금 세공, 에나멜 세공 등 여러 가지 세밀한 예술이 번성했다. 사본 채식(彩飾) 은 기념비적인 회화나 모자이크만큼 감동적인 효과를 주지는 못하지만 유럽 곳곳에 비잔티움 양식과 도상을 퍼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 자체의 수준과는 별도로 비잔티움 미술은 유럽의 종교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 양식은 무역과 정복활동을 통해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퍼졌고 변형된 형태로 12세기 내내 지속되었으며 결국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비잔티움 양식은 또한 동방정교회의 확산에 힘입어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퍼졌고 비록 지방에 따라 수정되기도 했지만 17세기에도 원래 형식을 유지했다② 건축 : 건축은 비잔틴 문화 중 탁월한 예술 분야로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건축양식은 4~5세기에 이집트?시리아?소아시아.
    인문/어학| 2010.09.29| 16페이지| 1,000원| 조회(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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