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민족지의 재이해일제하의 , 등민영신문이 주장한 바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하는가?1919년 3 ? 1 운동은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물론 언론활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10년대의 무단통치가 1920년대의 문화통치로 변하면서 단순히 언론이 이전 시대보다 조금 자유로워졌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이 왜 문화통치를 시도했는지, 그리고 이 시기에 재등장하는 민영신문들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또한 이 민영신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문화통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이렇게 얕았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배운 '민영신문의 양면성'은 그동안 알고 있었던 문화통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민영신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틀을 제시해주었다.'민영신문의 양면성'은 20년대의 문화정치의 이중성, 토착자본의 이중성, 언론 상품의 이중성, 동양주의와 대세주의의 이중성, 이렇게 크게 네 가지이다. 이 중에서 언론 상품의 이중성과 동양주의와 대세주의의 이중성이라는 의견에 주목하게 되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역학관계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나타난 이중성과, 이 당시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동양주의와 대세주의 사이에서 보이는 논리적인 모순이 과연 민영신문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났을지 궁금해졌다.역사를 판단할 때 생기는 오류는 과거의 인물이나 사실을 현재의 기준에 의해 평가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기에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기준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상황 변인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들이 역사적 사실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와 는 보수적인 신문사로 알려져 있다. 이 보수적인 신문들은 일제하에 대표적인 민영신문들이다. 지금부터는 일제시대의 언론 상황을 살펴본 후에 이 시대를 대표했던 두 신문사가 주장하던 바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평가해야할 지 알아보려고 한다.일를 금지하고 철저한 무단정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가혹한 식민통치는 1919년 3 ? 1 운동이 터짐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 1 운동 이후 일제는 일제대로 군사적 강압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식민지 통치수법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나머지 보다 교활한 속임수로 민족 분열을 획책하게 된다. 그들은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간판을 내걸고 지주 ? 자본가와 지식인 등 식민지 상층부의 정신세계에 숨통을 트게 만들어주는 척하여 호감을 사면서 자기네 품속으로 끌어당기는 한편 당시 민족적 자주독립과 사회적 계급해방 의식에 눈을 뜨고 조직화되기 시작한 근로민중의 적극적 항일운동엔 폭력과 이간질로 더욱 거센 제동을 걸었다. 일제는 3 ? 1 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고 민중세력을 대변하는 지하신문들이 잇달아 쏟아져 나오자 이에 당황하여 선심이나 쓰듯이 근로민중과 대립세력인 지주 ? 자본가 세력에게 언론매체인 신문 발행을 허가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동과 지하언론에 대한 대항언론으로 앞장세우기에 이른다.)이런 변화로 1920년에 와 및 이 나오고 정치문제나 시사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과 같은 잡지가 나오게 되었다. 일제의 유화정책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일제는 유화정책의 뒤안에서 통치기구를 더욱 팽팽히 조여맴으로써 문화정치를 지탱했다. )일제는 침략전쟁을 전개하면서 언론 통제를 점차 강화한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언론 통제를 강화한 총독부는 1937년의 중국본토 침략을 계기로 우리나라 민족지를 모두 어용지로 전락시키고, 1940년에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아예 서울의 민영신문을 모두 폐간하고 말았다.)일제시대의 언론 상황에 대해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1919년 3월 1일 이후 다시 등장한 민영신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대표적인 민영신문 와 의 사회사상을 정리한 후에, 이들을 다시 평가해보려고 한다.민영신문의 재등장3 ? 1 운동인 시위운동으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지하신문이 쏟아져 나와 독립의 당위하여 독립선언과 동시에 전국에 배포했다. 그러나 을 낸 보성사는 독립선언서와 이 신문을 인쇄했다 하여 폐쇄 당했다. 이후 은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또한 이 신문은 3 ? 1 운동의 열기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지하신문이 여기저기서 족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도 큰 자극이 되어 3 ? 1 운동이후 해외에서 35종의 신문이 발행되었다.)(2) 의 창간)는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를 배경으로 창간준비가 이루어졌다. 초기의 편집진용은 15명으로 구성되었고, 는 창간호를 낸 후 격일로 3호까지 내고 장기 휴간에 들어갔다. 당시의 신문지법은 발행허가를 얻은 날로부터 2개월을 초과하고도 발행치 않을 때에는 발행허가의 효력을 상실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바로 이 조항 때문에 우선 3호까지 내고 휴간에 들어간 것이다. 는 4월 28일이 되어서야 4호를 냈으나 이때에도 아직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하여 일본인 소유의 대화인쇄소에서 신문을 찍었다. 그리고 5월 말에 가서야 비로소 제작상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는 자본금이 많지 않은데다가, 발행 주체가 친일단체여서 독자를 끌지 못하였고, 반면에 실무진은 반일 사상이 투철하여 수차에 걸쳐 총독부의 탄압을 받아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경영진이 바뀌어도 경영이 호전되지 않았던 는 1924년 9월 13일 신석우가 송병준에게 경영권을 정식으로 인수한다. 이로써 는 비로소 민족진영의 신문으로 거듭나게 된다.의 반일 언론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독부 당국은 의 창간주체가 중견실업인들인 만큼 친일적인 실업신문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 신문의 간부들은 대체로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에 참여한 실무진들은 투철한 반일사상의 젊은 엘리트들이어서 는 창간 초부터 수난을 겪게 된다. 급하게 신문을 창간한 후 곧 휴간에 들어갔다가 복간하자마자 는 총독부로부터 첫 압수조치를 당했다. 그리고 미국 국회의 원단 일행의 내한을 환영하는 논설을 실었다가 민영신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간조치를 당했다.5년에 시도하였으나 경영상 무리를 이기지 못하여 두 신문이 모두 중단한 것을 가 재시도, 이를 정착시켰다.의 반일 언론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신문은 창간 2주일 만인 4월 15일자 사회면에 3 ? 1 운동 첫 돌을 맞아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한 민중의 움직임을 보도하였다가 처음으로 발매반포금지의 행정처분을 받았다. 이것을 기점으로 는 잇달아 발매반포 금지, 삭제, 압수 등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20년 간 발행하면서 4차례 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63회, 압수 489회, 삭제 2,423회의 행정처분을 받았다. 정간을 당하여 신문을 발행하지 못한 날을 합하면 569일이나 되었다. 한편 가 제 1차 정간처분을 받아 신문을 내지 못하는 동안 이 신문의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인 장덕준이 시찰이란 명목으로 중국 간도에 갔다가 순직했다. 기자가 취재활동 중 실종되어 순직한 것은 장덕준이 한국언론사상 처음이었다. 또한 의 가장 대표적이면서 유명한 반일 언론활동은 1936년 8월 25일자 2면에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전재하면서 일장기를 말소시킨 사건이다.(4) 과 그 후속 신문의 부침)총독부는 1920년 와 의 창간을 허가하면서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의 민원식에게 을 허가했다. 국민협회가 내건 신일본주의란 조선인이 일제에 적극 참여하여 새로운 시정이 가능하게 하자는 주의로, 이를 바탕으로 국민협회는 참정론을 주창했다. 이런 노선에 따라 은 총독부 기관지인 이상으로 총독부의 방침을 지지하며 친일론을 개진했다. 이 신문은 민원식이 피살당하자 휴간했다. 이 없어져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2종으로 줄어들자 총독부는 최남선에게 의 발행을 허가했다. 그러나 경영분규를 겪으면서 경영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 종간하게 된다. 그 뒤 , , 등으로 제호와 발행인을 달리 하면서, , 에 이은 제3의 민족지로 맥을 이어갔다.)(5) 민영신문의 사회활동일제하에서 발행된 민영신문은 언론활동 외에 각종 사회활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은 신문사별로 벌인 것과 각 강좌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벌였다. 한편 언론인들은 친목회나 단체를 만들어 언론의 자유를 신장하고 공동의 권익을 수호하여 상호친목을 도모하였고, 총독부의 압제에 대항하기도 하였다.)민영신문의 사회사상와 등 일제시대에 발행된 민영신문에 대한 평가는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일제하의 두 신문을 문자 그대로 민족운동의 표상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로는 두 신문을 친일적 지주 또는 매판자본가가 소유했던 친일 언론으로 규정하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로는 당시의 언론이 처한 상황 때문에 한편으로 타협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민족주의적이었던 양면성을 고려하는 입장이다. 일제시대의 민영신문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민영신문의 내용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민영신문이었던 와 만을 대상으로 하여, 이 두 신문이 주장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즉 이들의 사회사상을 정리해보려고 한다.두 민영신문이 강조하는 주장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대외문제와 대내문제로 나누고 대내문제를 다시 정치, 경제, 사회로 구분하여 살펴보려고 한다.)(1) 대세대비론대외문제에 대한 인식은 당장 독립을 전취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투쟁주의를 지양하고, 대세를 기다리며 독립에 장기적으로 대비해야한다는 대세대비론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두 신문은 이런 준비론에 입각하여 동양공영을 강조하였다. 즉, 대외적으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동양의 전국이 위기에 처할 것이므로 한 ? 중 ? 일 삼국이 동양주의에 입각하여 공영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동양 전체가 서세에 먹힐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은 이들 신문이 동양주의를 수용하는 바탕이 되었다. 동양주의는 특히 중 ? 일 문제를 들어 일본이 대의를 저버리고 동양에 대한 침탈에 전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동양의 또 다른 중추세력인 중국이 실력 양성을 통해 자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신문이 동양주의를 강조한 것은, 개화기의 민영신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