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중국, 중국인에 대한 인식 변화와 이중성들어가며한반도와 중국은 역사를 같이하며 매우 오랜 기간 다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국가의 흥망성쇠가 국가의 이념적 성향과 맞물려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적대관계를 유지하기도 하며 때로는 여럿으로 갈라진 중국의 국가들과 다중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의 양상을 떠나 국제관계가 갖는 정치적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게 되었고, 중국의 배후지에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가 동아시아의 정세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자체의 정치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한중관계의 역사는 상당한 기간 동안 지배층의 측면 또는 정치의 측면에서만 이루어졌다. 민간의 차원에서 한반도와 중국이 접촉할 기회는 사신과 함께 간 상인들의 거래 등 무역의 관점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그 규모도 크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당시 지식인층이었던 지배층의 차원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접어들어 민간의 성장과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1882) 등의 체결로 민간 단위의 접촉이 잦아졌고 그로 인해 민간에서 중국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기존 지배층의 수준에서만 논의되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식이 민간의 차원에서 발전하기 시작한다. 민간 차원에서 논의되는 중국인식은 정치적 차원에서 논의되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으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이고 생활적인 측면이 강했다.중국과 중국인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이 혹은 중국과 한국이 어떤 관계를 형성했느냐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민간 차원의 인식은 사설 신문과 같은 언론이 만들어지고 일반인들이 중국에 대한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형성, 발전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중국에 대한 민간의 인식은 언론의 생성과 현실에서 중국인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어 나타났다.이 글에서는 20세기 전반을 전후하여 한국인들한국과 중국이 어떻게 관계 변화를 갖는가를 알아본다. 이어서 그로 인하여 지식인층의 중국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나를 살펴보고 그와 함께 민간의 차원에서 중국인식이 어떻게 형성, 발전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를 전개한다. 마지막 결론에서는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식의 이중성을 고찰하고 오늘날 변화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인식과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인식들을 살펴본다.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변화와 한중관계한반도와 중국은 오랜 기간 조공책봉관계로 이어져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가 일률적인 모습으로 긴 기간을 이어온 것은 아니다. 중국과 한반도에 형성된 국가들의 부침에 따라 관계는 다양하게 변화했고 때로는 기존의 조공책봉관계가 명분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전신은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중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려면 청의 탄생에 즈음한 시기의 한중관계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19세기 이전 중국 인식은 주로 정치적 관점에서 형성되었고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는 그러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청나라가 만주 지역에서 생겨나 성장할 시기 조선은 성리학의 국가로서 천자의 나라인 명나라와 관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질적인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했느냐를 떠나서 관념적으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천자의 국가와 봉국이라는 관계 속에서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성리학적 성향이 농후한 당시 지식인과 관료층에게 깊이 박혀있었고 실리에 반할 수도 있는 결정조차 성리학적인 관점에서 상국에 대한 의무로 내려지곤 했다. 명과 조선의 조공책봉관계는 청나라가 명을 대체한 뒤로도 이어지지만 그 관념적인 유대감은 매우 약해진다.20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청의 쇠락, 서구 열강의 진출과 일본의 부상으로 청이 더 이상 유일한 강대국의 지위에 있을 수 없게 되면을 확장하는 서구 열강들이 병존하는 지역으로 변하였다. 한반도에서는 중국의 쇠락과 다양한 세력의 활동으로 인해 중국을 기존의 상국이 아닌 객체로 보는 시각이 커지게 된다. 이와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신문과 같은 언론이 형성되고 한반도와 중국 간의 민간 이동이 많아지면서 민간의 관점에서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전쟁과 지배의 역사로 얼룩진 근대를 벗어나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부상이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중국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개혁·개방 이후 세계를 긴장시킬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에 필적할 만한 잠재적인 세력이 된 중국은 동아시아의 주목받는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한중관계의 중요성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기업, 단체들이 중국으로 진출하고 있으며 중국의 성장을 이용하여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다.중국 인식의 변화 : 명청교체기, 20세기 전후 그리고 오늘날명대(明代) 중국 인식은 지식인층이기도 했던 당시 지배층이 주도하였다. 성리학적 관점에 입각한 지배층은 실리적 관점에서는 다소 다른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였으나 관념적으로는 명을 대국이자 상국으로 인식하는데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임진왜란을 경험한 후의 조선은 명과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말로 지배층들의 중국인식에도 확실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2009, p.216.그러나 명이 쇠퇴하고 청이 부상하자 관념적인 조공책봉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결국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주인이 되면서 그러한 균열은 더욱 심해진다. 기존 명이 ‘중화’를 유지했던 민족적 정통성이 사라지고 이민족이었던 청이 중국의 황제를 자처하는 것은 성리학적 관점의 조선 지배층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또한 두 번의 호란으로 조선을 유린하고 조선 왕의 항복을 받아낸 청에게 조선이 긍정적인 인식을 갖기는 어려웠다. 결국 기존 명과 유사한 책봉관계로 청과’이 아닌 중국 자체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명과 청이 교체되는 시기 발생한 두 번의 호란은 민간 차원에서도 큰 비극이었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가 채 회복되기도 전에 당한 이민족의 침략은 민중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호란 이전 임진왜란 당시에 명은 원병으로 참전하였으나 민간에 대한 약탈을 자행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청나라 군사가 국토를 유린하였으니 중국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제국주의 열강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고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20세기 전후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위치는 흔들리고 있었다. 연이은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중국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은 사라졌고 조선에서 성리학적 관점에 입각한 기존 한중관계의 인식은 거의 사라졌다. 특히 청일전쟁은 서구열강의 개입으로 진행되고 있던 ‘화이질서’의 붕괴에 결정타를 가했다. 아사히신문 취재반 저, 백영서·김항 역,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창비, 2008, p.49~50.이 당시 조선의 지식인층이 중국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는 언론기사 혹은 문학작품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중국에 대한 인식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하 언론의 인식에 관련해서는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8 참조청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 인식으로 『독립신문』의 ‘천한 청(淸)’이라는 인식이 있다. 문명화되지 못한 청에 대한 인식으로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의 후진성에 대한 인식이다. 다음으로 중국의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기 전 조선 지식인들에게 퍼져있던 생각으로 동아시아 3국의 공영체제의 연장선에서 동양평화의 일원으로서 중국을 바라본 인식이다. 여기서 『황성신문』은 중국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나 『독립신문』은 그보다는 맹주로서 일본의 역할을 더욱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개혁모델로서의 중국이 있다. 특히 『황성신문』은 중국의 개혁에 관심을 보였고 『대한매일신보』역시 중국의 개혁에 주목했다. 당시의 신소설에서도 중국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데, 대부분 앞서 말한 일간지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본의 병합으로 인해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인식은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에 더하여 동병상련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박남용, 「한중 근대시에 나타난 타자적 이미지 연구」, 『중국학연구』제 37집, 2006.그러나 중국의 혼탁한 현실과 굶주리는 민중에 대한 내용의 동병상련적 입장일 뿐 중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이 시기 조공책봉체제의 동아시아질서가 무너지고 조약체제로 돌입함에 따라 한반도 역시 민간 차원에서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특히 1882년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은 중국 민간층이 한반도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는데, 이는 본격적으로 민간 차원에서 한국인이 중국인을 인식하게 되는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중국 이주민들의 거의 반수가 상업에 종사하였고, 그 밖에 농수산업과 공업, 자유업 등을 영위했다. 이하 중국 이주민의 생활양상에 대해서는 백영서, 앞의 책 참조중국인들은 요식업, 상업 등에 침투했고 이는 간상(奸商)으로서 부정적인 중국인의 이미지가 한국인에게 각인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은 자치적 조합제도인 ‘향’등을 이용하여 결속력을 강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했으며 대부분 독신자로서 낮은 수준의 의식주로 임금경쟁력을 높였다. 이농으로 인해 실업문제가 심각한 한국 노동자들과 중국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었고 한국 노동자 측은 총독부에 해결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갈등은 중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생성, 강화시켰고 이는 후에 중국인배척운동의 전개에 영향을 미친다.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은 일제 치하에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여기에는 일본과 중국의 영향도 있었다. 만주지방에 진출한 한국인들에 대해 일본은 ‘제국신민’을 보호한다는 측면으로 만주에 영사관을 설치하기도 했고, 한국인들을 보호한다는 일본의 명분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을8.
중국인의 한국 인식과 한국인 인식- 중국인 유학생의 인터뷰를 중심으로들어가며2012년은 대만과 한국이 단교한 지 20주년이자, 한국과 중국이 6.25 전쟁 이후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던 수교 20주년이다. ‘하나의 중국 정책(One-China Policy)’으로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 전 까지 한국은 대만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만은 한국과 비슷한 국가 상황과 정체를 가지고 우호적 관계를 맺어왔으므로 냉전시대 대만과 한국은 상호 인식에 있어서 급격한 변동을 겪지 않았다.이와는 달리 6.25 전쟁 당시 적국이었던 중국과의 수교는 그간 적대적이었던 혹은 적어도 친화적이지는 않았던 상호인식을 급격하게 변동시켜야 하는 문제를 낳았다. 수교 이전까지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재한 중국인들 역시 한국과 국교를 맺었던 대만 측의 비호를 받기 위해 대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수교 이전 한국의 중국 인식은 ‘중공’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인식으로 주로 부정적인 경향이 강했다. 특히 5.16 군사정변 이후 강화된 반공의 분위기는 중국에 대해 공산주의 국가 이외의 다른 종류의 인식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시작된 미중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중국과 접촉이 발생하고, 1992년 공식적으로 수교를 하게 되면서 중국과 한국은 공식적인 교류가 가능해졌다. 이에 중국인과 한국인은 직접 서로를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상호간의 적대적이던 인식은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의 체결을 통한 민간차원에서의 부정적 인식)은 상호인식의 저변에 이어지고 있고, 그 영향은 오늘날 생활 속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상호인식에서도 드러난다.이 글은 오늘날 생활세계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의 상호인식, 특히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살펴보는데 목적을 둔다. 글을 쓰기에 앞서 생활세계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중적 인식에 기초하여 이 글에서는 중국인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갖는 인식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러한 인식이 형성된 원인을 고찰해봄으로써 앞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의 상호인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간략하게 짚어보려 한다.1. 한국과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한국에 온 중국인 유학생들은 교포 2세와는 달리 보통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에 공부 등의 목적으로 잠시 머무는 학생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한국 인식은 중국에서 먼저 형성되었고, 한국에 온 뒤 생활하면서 그 인식이 강화되거나 혹은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한국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한 인터뷰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앞서 주지할 점은 중국에서는 북한(조선)과 남한(한국)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에 관심이 없는 외국인의 경우 북한과 남한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중국인 유학생들은 한국과 북한을 뚜렷하게 구분지어 인식하고 있다.중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에 오기 전에 형성된 인식은 1차적으로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는 중국 대중문화가 많이 확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중국을 이해하는데 있어 대중문화보다는 교육 혹은 신문기사와 같은 매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른바 한류(韓流)라는 대중문화의 확산적 흐름이 중국에 퍼지면서,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한 정보를 대중문화를 통해 접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인터뷰에서 유학생들은 중국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된 경로로 TV,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와 같은 대중문화를 꼽았다. 특히 증○○학생은 한국 MBC의 특정 드라마를 매우 인상 깊게 봤으며 한국에 대한 관심이 문화적인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언급했다. 그리나 정작 한국에 대한 교육을 얼마나 받았냐는 질문에는 두 학생 모두 거의 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인터뷰에는 자신이 중국에서 보았던 한국에 대한 인식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었는데 중국에서 한국은 ‘중국에 소속되었던 국가’, ‘나라도 작고 사람도 적은 소국’, ‘남녀불평등이 심한 나라’, ‘자원이 부족 그들이 중국에서 보았던 혹은 직접 견지했던 한국에 대한 인식보다 많이 호전된 모습을 보였다. 한국에 온 뒤의 한국 인식에 대한 질문에서 유학생들은 ‘시민들이 질서를 잘 지킨다’, ‘깨끗하다’, ‘도둑이 적다’, ‘서비스정신이 있고 친절하다’ ‘물가가 높지만 소득수준도 높다’ 등의 대답을 했다. 또한 이○○학생은 한국이 선거와 정당 활동 등 민주주의 정치를 잘 하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한국에 대해 뚜렷한 긍정적인 인식이 드러나지 않았던 중국에서의 인식에 비해 많이 호전된 모습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한국에 온 뒤에도 부정적인 인식의 일부분은 남아있거나 오히려 강화된 측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에 비해 한국 사회는 남녀의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남성이 집안일을 능숙하게 하는 경우가 많고, 남녀 간의 가사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유학생들은 한국에 오기 전 드라마 등에서 남편에게 존대하는 아내의 모습 등으로 한국의 남녀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한국 사회에서 직접 확인하면서 한국사회가 상대적으로 남녀의 불평등이 심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키게 되었다.2. 한국인에 대한 인식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한국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인식과는 구별된다. 일부 부정적인 인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긍정적인 인식을 견지했던 한국의 국가, 사회 인식에 비해 한국인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정적이다.중국인 유학생이 느꼈던 가장 큰 불만은 중국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었다.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차별한다는 생각은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국인이 중국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유학생들은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비위생적이고 가난하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또한, 중국 사람을 촌스럽게 생각하며 중국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학생은 유학생들만 듣는 한 수업시간에 강사가 ‘중국 학생들’이라고 지칭하며 학생 개개인이 아닌 중국 유학 차별’ 항목에 매우 긍정 혹은 긍정을 표시한 비율이 60.2%에 달했다.)인터뷰 중에 유학생들은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중국을 경시하는 모습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이나 일본에 친화적인 한국인들이 영어나 일어를 공부하는 것은 높게 쳐주지만 중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가치 있게 봐주지 않는다며 한국인들의 불균형적인 인식에 대해 비판했다. 설문조사 결과, 반한감정을 갖게 된 계기로 ‘한국인의 미국·일본 선호’ 항목에 매우 긍정 혹은 긍정을 표시한 비율이 59.1%에 달했다.) 일본, 미국과 외교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한국의 상황이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반영되었고, 그로 인한 불균형적인 시각이 중국인 유학생들에게는 더욱 부정적으로 비춰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한국인들이 중국인을 어떻게 인식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유학생들은 한국인이 중국인을 ‘오만하다’, ‘예의 없다’, ‘가난하다’, ‘미신을 잘 믿는다’, ‘촌스럽다’, ‘공산주의자들이다’ 등으로 생각하거나 그런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전반적으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대답이었으며 이는 실제 생활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이 느끼는 차별적인 느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중국인과 한국인의 인식이 대립할 개연성이 높아보였던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인터뷰 내내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역사 문제 대신에 유학생들은 한국인이 갖는 잘못된 인식으로 ‘한국인들이 대만은 중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대만은 중국이라는 관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인데, ‘하나의 중국 정책’에서 이어지는 관념을 중국인 유학생들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이 중국과 수교할 때 외교적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을 존중했다고 할지라도, 1992년까지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상황에서 형성된 인식은 한 순간에 바뀌지 못했다. 중국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는 과정에서도 대만에 대한 인식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었던 한국인들은 대만을 따로 인식하고 있다. 중국인 유학생과 한국인들의 인 곳의 사장이 ‘중국이 가난한 이유는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라고 말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에 강한 불쾌감을 표출했다. 또한 나이가 어려보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반말을 하는 모습도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존대표현이 많지 않은 현대 중국어에 익숙한 유학생들은 잘 알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가졌다.3. 소통의 부재한국인과 중국인의 인식차이는 서로의 문화적, 역사적 차이에서 오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아직도 개선되지 못하는 남녀불평등에 대한 인식의 문제나, 대만 문제 등은 서로 다른 사회상과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로 볼 수 있다. 또한 존댓말에 대한 문제 등은 문화적 차이로 발생하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제반 문제들은 상호간에 꾸준한 소통과 이해가 동반되어야만 그 차이가 줄어들 수 있지만 아직 그 가능성은 낮은 실정이다.중국인 유학생들이 지적한 한국인과 중국인의 문제점은 서로 소통이 부족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을 유지하고 상호 이해를 위한 노력을 견지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의 차이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를 했던 두 학생 모두 한국에 거주한 지 2년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느끼는 차별, 한국인과 중국인의 인식차이, 한국인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 등을 한국인에게 이야기 한 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한국인 친구에게 말했다가는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 있기에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다며 한국인과 중국인이 소통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지적했다.또한 증○○학생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 최근 발생한 서해안 조업문제와 같은 갈등을 한국과 중국 양 측이 모두 민족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감정이 격화된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갈등이 발생하면 민족적인 감정대립으로 나가기 때문에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서로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문제라는 한다.
조광조 :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어가며: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이상을 아는 것과 이상을 믿는 것은 다르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상을 안다. 수많은 정치 사상가들이 현실을 설명하는 날카로운 이상을 창조해냈다. 공자와 맹자가 이야기 한 왕도정치, 그에 반하는 법가의 패도정치는 모두 이상이었다. 정치가들은 국가의 통치방향을 결정짓는 이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상은 필연적으로 현실의 많은 부분과 타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가 사상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중국 한나라의 통치가 밖으로는 유가를 표방하고 안으로는 법가적 통치를 행했다는 뜻인 ‘외유내법(外儒內法)’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어떤 타협을 했든 당시의 정치가들이 이상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이상을 믿는 것은 이상이 실현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 이상은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던 순수성을 지키며 실재 세계에 적용되기는 힘들다. 이상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창조된 이론이지만, 현실은 무수히 많은 변수들이 얽혀있는 실재하는 세계이다. 그런 괴리를 수정하고 극복해서 결국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이상주의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상의 실현을 믿었던 사람이 바로 조광조였다.흔히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와 대비되듯 그런 조광조는 현실감각이 없었다는 평을 듣곤 한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이 일치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결국 같은 의미가 될 것이다. 조광조는 이상의 실현을 믿었지만 그 방법마저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조광조는 현실정치에 뛰어들었고 그 안에서 온 열정을 쏟아 이상을 설파했다.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이상을 공감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았고, 세력을 결집했으며 왕을 설득했다. 그러나 결국 현실정치에서 ‘패배’했으며 믿었던 왕에 의해 사사(賜死)되기에 이른다.이 글은 이상주의자이천해야 한다. 조광조는 유교사상을 공부했고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 책문에서 자신의 이상을 적어내어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이 알성시의 답안에서 조광조는 중종에게 처음으로 군왕이 갖춰야 할 덕목인 명도와 근독, 즉 ‘도를 밝히는 것’과 ‘홀로 있어도 삼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것이 바로 조광조가 중종에게 이상적인 군주가 될 것을 이야기 하는 시작이며 이후로 조광조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를 떠나 사사되기 전까지 중종이 이상적 군주가 되길 바라며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조광조는 ‘인군은 마땅히 도덕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군주가 먼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면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여 교화될 것이라 주장했다.) 유교의 이상적 군주는 인격을 완성한 성인(聖人)적인 존재로서 군주의 덕에 의해 백성들은 감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드리워진다.’)는 공자의 말은 감화에 대한 유교의 사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광조는 이런 사상의 연장선에서 중종이 학문을 수양하여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갖추기를 바랐기에 ‘중종의 학문이 성취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사관에 의해 평가받았다. 왕의 학문적 수양을 돕고 결국 모두를 감화시키는 군주가 되게 하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조광조는 중종이 이상적 군주가 되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이와 같은 이상적인 군주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조광조는 이상적인 군주관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군신관 역시 강조했다. 조광조는 알성시 답안에서 ‘임금이 스스로 정치를 다 떠맡는다 하더라도 대신들의 보좌가 없다면 어떠한 교화도 이루어질 수가 없’)으며 ‘진실로 대신들을 공경하시고 그들에게 정치 실무를 위임’할 것을 주장했다. 올바른 군주의 길을 통해 교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군주와 신하의 올바른 ‘군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조광조는 ‘삼공일지라도 역시 선비(士)이며, 임금의 한 몸으로 요구했다.) 또한 ‘임금의 과실은 대신이 먼저 규정(規正)해야’)하고, '기왕에 재상 자리를 둔 이상에는 전적으로 맡긴 뒤라야 대신이 그의 포부를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며 왕의 전제가 아닌 정치에서 재상의 비중을 강조했다.이런 자신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시키기 위해 조광조는 경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중종에게 이상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열정은 듣는 이들이 과하게 느낄 정도였고, ‘경전을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끊임없이 말해서 다른 사람은 한 마디도 낄 수 없었으며, … 함께 입시한 사람들은 매우 괴로워했으며 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 또한 ‘건의한 것은 반드시 국왕의 동의를 얻고자 해서 … 국왕은 피로와 권태를 느꼈으며, 하품을 하거나 용상에 기대 신음하기까지 했다.’)제 2장 조광조의 현실주의반정정권이란 정도로 돌아간다는 명분으로서 그 정권의 정당성을 지탱한다. 정당성에 대한 강한 필요성은 조광조와 같은 도덕적 근본주의자가 조정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도덕론의 확립을 통한 정권의 정당성 강화는 반정시대의 필연적인 문제의식이었고 사화가 생기기 2년 전 훈구세력의 거두인 남곤은 조광조를 추천하여 승진시켰을) 정도로 조광조는 정권의 필요에 부합했다.중종 역시 조광조가 필요했다. 반정정권의 왕이 가지고 있는 공신세력과 부실한 정당성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사림세력의 등용은 요긴하고도 절실했다. 특히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훈구파들에게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즉위시킨 훈구세력들은 정국공신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특혜를 누렸는데 이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왕이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왕은 자신의 친위세력을 형성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그에 따라 조광조와 같은 신진세력은 중종의 지지를 받아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이런 조광조를 중종은 가까이 하고 신뢰했었다. 후에 믿음이 사라지고 죽음으로 관계가 끊어지지만, 조광조의 소대에 나아갔다’)는 기록은 중종이 조광조를 가까이 했고 그의 말을 잘 들었음을 보여준다.정권에서 자신의 필요성을 인식한 조광조는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초를 다져간다. 비록 조정에 기반도 약하고 나이도 젊었지만 자신의 도덕론에 대해 자신했고 현실에서 그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열정은 기존의 어떤 훈구 대신들보다도 강했다. 그러나 조광조 자신도 당시의 상황에서 열정만으로는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조광조는 단숨에 이상이 실현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무릇 교화는 하루아침에 빨리 행할 수 없으니, 속히 하려 하면 급박하여 이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이상적 믿음을 공유시키려 노력했고, 자신의 개혁을 현실화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했으며 반대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한다.조광조가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었다. 이에 천거제도를 만들어 자신과 이상을 공유하는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이렇게 등용된 신진 사림들은 곧 조정의 요소에 배치되었는데, 그들 사이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며 세력을 형성한 조광조의 세력은 기묘사화 당시 홍경주가 ‘나라의 형세는 나날이 기울어지고 조정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조광조 일파의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훈구세력이 과장을 보탰을 가능성을 감안하고서도 당시 조광조의 세력이 한밤중에 사화를 모의해 일으켜야 할 정도로 컸다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또한 조광조는 정국공신의 개정을 통해 개혁의 걸림돌이자 위협이 되는 공신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정국공신 중에는 중종반정 당시 ‘혁명군이 궐내로 밀고 들어오자 소매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연산군을 뿌리치고 하수구로 도망’)치고서는 정국공신에 오른 인물 등 공이 뚜렷하지 않는데도 공신에 이름을 올려 특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동안 중종의 거부 등으로 인해 개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기반에 직접적 타격을 입게 되는 공신세력의 반격으로 사화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제 3장 중종과 조광조의 동상이몽조광조의 개혁은 훈구세력이 보기에 매우 급진적이었다. 조광조는 ‘일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으니 더디 할 것은 더디 해야 하고 빨리 할 것은 빨리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빨리 해야 할 것으로 추진한 일련의 개혁들은 훈구세력의 기반을 흔드는 것들이었다. 훈구세력은 더 이상 조광조와 그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정국공신의 개정문제에 이르러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 신진세력의 부상이 기존 세력에 의해 좌절당하는 역사의 반복이 다시금 벌어지는 것이다.사화가 발생하는데 꼭 필요했던 것은 바로 왕인 중종의 승인이었다. 당시 신진 사림이 차지하던 비중은 상당했고 훈구세력은 중종의 지지를 반드시 필요로 했다. 중종이 승인하지 않는 일은 반역에 불과하며 중종의 승인이 있어야만 역적을 단죄하는 명분이 설 수 있었다. 중종은 신진세력과 훈구세력 사이에서, 한때 총애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길렀던 신진세력을 버리고 훈구세력의 손을 들어준다.중종은 조광조의 열정적인 이상론 설파에 지쳤다. 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성장시킨 신진세력이 어느새 매우 강성해졌으며 공신들이 그러했듯 이번엔 신진 사림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실제로 조광조와 신진세력은 강한 도덕적 잣대를 왕에게 들이대며 왕의 수양을 강조했고, 소격서 폐지 등 중종이 반대했던 개혁들까지 밀어붙여 성공시켰다. 반정으로 집권한 왕이 또 다른 반정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정국공신의 개정은 이러한 중종의 걱정이 심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중종은 군림하는 군왕이 되길 원했다. 경국대전을 포함한 조선의 법전에는 왕을 규제할 수 있는 구절이 없다. 왕은 법으로 규정되지 않는 존재이며 구조적으로는 제제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조광조는 유교 사상을 적용하여 군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파하였고 군주가 스스로 도덕을 구현하길 바랐다. 법을 통한 규제가여준다.
정조의 탕평, 한 사람의 정치들어가며탕평(蕩平)이라는 말은 『서경(書經)』「홍범(洪範)」편에서 기자가 했던 ‘치우침이 없고 무리지음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며, 무리지음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평해진다’)라는 말에서 따온 합성어이다. ‘공론을 형성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돕는다’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붕당정치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부작용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숙종은 이런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몇 번의 환국을 일으키며 붕당의 대립적 성격을 격화시켰고 그 뒤로 붕당은 왕권과 혹은 붕당끼리의 강한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정치적인 세력을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다. 이런 붕당정치의 폐단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탕평의 정신으로 시행한 정치를 탕평정치라고 부를 수 있으며, 탕평정치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영조와 그 다음 왕인 정조의 정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흔히 영조의 탕평을 완론탕평, 정조의 탕평을 준론탕평이라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조의 완론탕평은 붕당세력에 의해 왕권이 뒷받침되던 영조가 붕당에 대해 비교적 완만한 태도를 견지하며 탕평을 시행했음을 뜻한다. 반면 정조의 준론탕평은 영조에 비해 비교적 강경하게 붕당을 누르고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을 시행하려 했음을 뜻한다. 두 왕 모두 붕당정치의 폐단을 인식하고 그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견지했다는 점은 인정받으나, 그 결과 나타난 역사의 전개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탕평정치가 반드시 순기능만을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영조와 정조의 정치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이 강조되곤 한다. 특히 정조는 정치적인 행적뿐만 아니라 정조 개인의 학문적 수양과 능력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는 그의 업적을 더욱 빛내주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정조시대의 정치를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정조의 탕평정치는 당시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을지는 모르나 정조 사후에 정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또한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권력의 집중화는 훗날 세도정치의 정치구조적 기반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서 신하의 권세가 강해지고 왕의 입지가 좁았던 당시의 정치적 불균형을 고찰한다. 그리고 정조가 자신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기 위해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였는지를 살펴보고 왕권의 강화로 인해 신권에서 왕권으로 권력이 옮겨가 새로운 불균형이 발생하는 모습을 밝혀낸다. 마지막으로 논의를 간단히 요약하고 정조의 탕평정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제 1장. 신하 중심의 정치적 불균형당쟁이 격하게 대립하며 붕당정치가 행해지던 시기, 왕권과 신권의 불균형은 심각했다. 성리학의 국가 조선은 왕을 현명하게 보좌하여 바른 길로 이끄는 신하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러한 신하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군주의 역할 역시 강조했다. 정도전, 조광조 등 조선 전기 학자들은 왕에게 신권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재상에 의한 정치를 설파했다. 그러나 성리학이 조선에 강하게 뿌리내리고 조선의 정치가 초기의 건강함을 잃어가면서 신권의 성장은 붕당정치라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붕당정치는 공론을 형성하여 국왕을 보좌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나 숙종의 환국정치 등에 의해 더 이상 건전한 공론이 아닌 권력과 목숨까지 걸려 있는 당론에 매달리게 되었다.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붕당정치의 폐단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영조의 탕평방식은 균형 있는 양 측의 인재 등용으로 나타났다.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이 격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영조는 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려했고, 특히 자신을 따르는 온건파들을 등용하여 왕권 중심의 탕평책을 시도했다. 그러나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 군주였다.) 경종 시대부터 조선의 당쟁에서 신하들은 임금에게도 당적을 붙였고, 왕은 당색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영조는 당쟁을 해소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노론에 미움을 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비극을 저지른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려 노력했지만 영조의 그러한 시도는 결론적으로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정조 시도를 계속했고 이는 정조가 즉위하는 것이 노론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이런 당쟁의 정치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 대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노론을 하루아침에 모두 척결할 수는 없었다. 노론 세력은 정조의 즉위 후 암살단의 난입, 주술을 이용한 저주, 다른 왕의 추대 등 세 번의 모역 사건을 벌이며 정조를 위협했고, 정조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과 싸워야만 했다.이런 상황 속에서 정조와 노론 중심의 신하들은 더 이상 군주와 그를 보좌해주는 신하가 아니었다. 정조는 왕이었으나 권력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과 투쟁했으며 스스로를 위해 신권에 의한 왕권의 억압을 타개하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탕평이란 이름의 일련의 정치적 시도를 감행했고, 이런 정치적 시도들은 일정부분 성과를 거두며 정조의 세력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정조의 탕평정치는 그 이름이 갖는 공공성과는 맞지 않게 자신 한 사람에게 강하게 집중된 형태를 띠었으며 여기에는 개인의 기억, 의지, 능력 등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제 2장. 한 사람에 의한 탕평정치사도세자에 대한 기억은 정조의 정치인생을 움직였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노론 강경파와 영조는 28세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고,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가 살려달라고 울면서 호소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비록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여 법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게 되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기억에 준하여 앞으로의 정치 방향이 결정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노론 대신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앞서 말했듯 세 차례나 역모를 꾀한다.정조는 영조와 달리 기존의 붕당을 배제하는 방식의 탕평정책을 시행한다. 화시키려는 수사였고, 실제로는 당론에 물들지 않은 신세력을 형성하려는 목적의 기관이었다. 규장각에는 서얼이 등용되기도 하였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관료들의 재교육을 담당하는 등 정조시대의 상징적 기구였다.) 장용영은 국왕의 호위기구로서 내영과 외영으로 나뉘었는데, 내영은 서울을 중심으로 했고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했다. 화성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정조에게 상징적인 기반이었다. 서울과 함께 이곳을 방어하는 장용영은 정조의 군사적, 정치적 뒷받침이 되었다.정조는 기존의 노론 세력들을 완전히 정계에서 몰아내지 못했고 그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지지해줄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요구에 부합한 세력은 바로 숙종 20년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쫓겨난 남인들이었다. 그 동안 정계에 진출할 길이 막혔던 영남의 남인들은 정조에 의해 다시 등용되고 정조 12년에는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80년 만에 남인이 정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정조와 남인의 관계는 영남 만인소에 의해 절정에 이르며 이를 통해 정조와 영남 남인이 하나임을 확인한 노론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정조에 의해 등용된 남인들은 정조의 정치적 의도에 편승해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고, 정조를 지지하는 입장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남인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왕권과의 균형을 취하는 대신, 왕권을 뒷받침해주고 왕의 세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정조의 입지를 강화해준 또 다른 조치로는 화성의 축조와 능행을 들 수 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했던 능행은 정조가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수행했던 조치로 볼 수 있다.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던 화성의 축조와 능행은 단순히 개인의 참배 목적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행사이자 백성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였다.) 백성들에게 중요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던 능행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기여했으며 ‘격쟁’과 같은 방식으로 듯이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호학의 학자군주로서 군사(君師)를 자임하고 학문정치를 지향했다.) 정조는 신료들의 스승으로서 그들을 이끌어나가고자 했고, 이는 정조 개인의 학문적 역량에 기댄 것이었다. 정조가 자신의 종기에 대해 스스로 진단하고 약 처방을 조절했다는 기록은 의학 분야에까지도 소양이 상당했던 정조의 지적 능력을 보여준다.이러한 정조의 군주 자신의 적극적인 정치개입을 긍정했다. 스승의 입장으로서 가만히 신하들의 말을 듣지만은 않는 학자군주적 성격도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관과 관련이 있다. 정조는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잘 다스리는 전통적이고 소극적인 군주관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서경』에 나오는 성왕(聖王)을 재해석하여 도덕적 모범자라기 보다는 비범하고 적극적인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강조하여 현실에서 실행하려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조는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을 새로이 형성했고, 자기의 기반을 차례로 닦아 나갔으며 스스로 신하들의 학문적인 스승 역할을 하려 했다.그러나 이와 같이 개인의 능력에 강하게 의존하는 탕평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이 아닌 왕권과 신권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뒤집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정조의 일련의 조치는 결국 기존의 노론세력을 누르고 왕의 세력이 강화되어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국이 형성되게 하였다.제 3장. 왕 중심의 새로운 불균형정조는 즉위하는 순간부터 사도세자를 언급하며 기존 정치세력인 노론과의 대결의식을 표방했다. 그리고 세력의 확대를 위해 자신을 지지해줄 신하들과 군사력을 양성하고 행궁이라는 상징적 행사를 통해 백성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또한 개인의 학문적 능력으로 군주이자 동시에 스승임을 자처했으며 정치에 개입하고 실천하는 적극적 정치 행보를 보였다.이런 정조의 노력에 의해 결국 집권 중반기에는 정조의 의도대로 왕권이 강화되었고 정국의 주도권을 일정부분 왕이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조의 탕평정치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 혹은 균형이라는 방향성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노론에
정치생명을 건 법흥왕의 결단, 그리고 그 정치적 상징성과 신화화들어가며527년 이차돈이 처형당한 사건을 지칭하는 말로 ‘이차돈의 순교’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신라에서 불교의 공인을 위해 목숨을 희생한 이차돈의 죽음을 순교라고 보는 것은 얼핏 보면 매우 자연스럽다. 이차돈의 죽음을 기점으로 신라에는 불교가 공인되었고, 그렇게 공인된 불교는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한반도의 중요한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차돈은 승려가 아니었다. 해동고승전에서 법흥왕은 이차돈을 ‘충신(忠臣)’으로 표현한다.) 삼국유사에서도 이차돈을 표현하는 말은 내양자(內養者), 충신(忠臣), 사인(舍人)과 같은 세속적인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왕의 측근인 이차돈이 왜 죽임을 당해야 했으며, 그의 죽음이 어떤 작용을 하여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는 당시 신라의 정치상황과 불교사상의 성격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제 1장 힘의 불교불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비폭력적이다. 불교는 속세와는 떨어진 종교로 생각하기 마련이며 권력이나 힘과는 더더욱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유교가 들어온 이후 불교가 주로 신앙으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유학이나 오늘날의 민주주의, 자유주의와 같이 뚜렷한 정치·사회사상이 받아들여지면 종교는 신앙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종교사상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날 몇몇 이슬람 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종교사상이 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차돈의 처형사건이 발생할 무렵 신라의 종교사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당시 법흥왕이 공인하고자 했던 불교는 북방계통의 불교로서 정치적 성격이 농후했다. 북방계통의 불교는 당시 북조 국가들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반영하여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중국은 한족 중심의 남조와 이민족 중심의 북조로 나뉘어있었는데, 북방계통의교를 탄압한 파불(破佛)이 일어나긴 했으나 북위 효문제(孝文帝)는 493년에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후 대대적으로 불교를 지원했다.) 이렇게 황제권의 지원을 받아 융성한 불교는 정치적 기능들을 수반한 종교·정치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신라에 전해졌을 때 단순히 신앙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으로서의 내용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과 정복전쟁을 정당화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개념이다. 이런 관념들은 통일된 왕권이 아닌 귀족연합적 성격의 신라에서 왕권을 강화하는데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신라의 기존 사상은 천신신앙과 같은 샤머니즘이었다. 샤머니즘에서는 인간의 모든 일을 결정짓는 것을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신의 작용으로 보았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인간의 노력에 따른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중요시한다. 또한 윤회의 개념은 살아 있을 때의 행위가 사후 세계를 결정짓는다고 본다. 현실에 중요성을 두는 사상은 현실 권력에도 힘을 실어줬을 것이고 이는 불교를 정치사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정치적 성격을 지닌 불교사상은 각 부족이 천신신앙에 기반을 두어 따로 성지를 가지고 있던 신라사회에 매우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인도에서 발생했지만 중국에서 변화를 거치며 농후한 사상적 깊이를 지닌 불교는 당시 동아시아에 있어 최신 사상이었다. 게다가 중국을 통해 들어오면서 불교는 불교문화를 포함한 각종 문화의 파급력을 지닌 일종의 흐름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불교가 그랬고, 구한 말 기독교가 그랬듯 사상의 전파는 상당한 문화의 전파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미 주변국들의 불교문화가 신라사회에 서서히 유입되고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고, 신라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내려왔다는 묵호자에 대한 기록에서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에 이미 불교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던 상황에서 불교를 기반으로 삼으려는 정치세력과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기존세력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제 2장 화가 이루어지는 그 과정 자체는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수많은 왕들이 신하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권력경쟁을 벌였고 그 와중에 희생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법흥왕 역시 왕권의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백제와 고구려가 이미 중앙집권체제를 굳히고 있을 때 신라는 아직 연맹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6부 연맹체제에서 왕이 대표의 역할정도를 수행하는 사회였다. 6부의 귀족들은 따로 천신신앙의 성지를 가지고 있었고 별개의 관직체계와 사병을 거느리는 등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이런 상황에서 법흥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율령의 반포나 관복의 통일 등 일련의 정책을 시행하였고 그 중 하나인 전시왕대비법의 제정 기록은 울진봉평비에 남아있다.) 그러나 울진봉평비의 비문을 보면 왕은 모극지 매금왕으로 기록되어있으며 6부 중 하나인 탁부에 소속되어있다. 왕은 6부 연맹체의 한 구성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입지를 가진 왕이 섣불리 권력 강화를 강행하다가는 반대파에 의해 정치력을 상실할 개연성도 충분했다.6부의 귀족들은 왕이 왕권을 강화하려 한다는 사실과 그를 위해서 공인하려 한 불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왕의 권력이 강해지며 기존 6부의 권력을 위협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을 추구한다는 것은 6부 귀족들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중대한 위협이었다. 귀족들의 입장에서 불교는 외래 종교에 불과했고 자신들이 관할하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개혁적인 사상이었다. 기존 체제 안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귀족들은 새로운 종교가 왕에 의해 공인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다양한 견제를 통해 그것을 막아왔다. 불교가 신라에 전래된 초기 소지왕 10년에(488) 궁주와 사통하여 왕을 죽이려 했다는 죄목으로 승려가 죽임을 당한 사건은 불교가 이미 왕실에까지 퍼졌으나 기존 세력에게 탄압을 받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화되어가는 왕권과 그것을 견제한 귀족들 간의 미묘한 경쟁·균형관계, 사회에 퍼져나가는 불교를 이다.법흥왕이 내린 정치적 결단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했다고 봐도 과하지 않다. 귀족의 권력에 대항하여 서서히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귀족들의 권력이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귀족들이 자신의 근간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버팀목인 신앙을 흔든다는 것은 왕과 귀족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왕에게는 왕권의 우위를 확정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고 반면에 귀족들에게 있어서 중앙권력으로 6부 사회의 예속을 부를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법흥왕이 불교 공인을 위해 이차돈을 희생시키겠다는 결단은 곧 귀족권력과 왕권의 균형을 깨고 왕권의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적 도박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차돈의 처형사건이 왕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되어 불교 공인이 실패로 돌아갔다면 신라는 더 오랜 세월동안 귀족들의 권력에 왕권이 예속되는 정치상황을 유지했을 것이다.삼국유사에서는 ‘향전에 말하되 염촉이 거짓 왕명으로 절을 지으라는 명령이 있다고 전하니 신하들이 와서 간하는지라, 왕이 노하여 염촉이 왕명을 거짓으로 전한 것을 꾸짖고 처형하였다고 한다.’)고 나와 있다. 왕과 계획을 짠 이차돈은 6부 귀족의 성지 중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으려 하고 이것이 왕명이라고 말한다. 6부의 귀족들은 그런 왕의 도전에 직면하여 곧바로 왕을 찾아가 천신신앙의 권위를 내세우며 이 기회에 왕권을 내리누르려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귀족들이 왕을 찾아간 자리에서 왕은 이차돈을 왕명을 거짓 꾸민 죄로 처형하라 명한다. 이미 반포한 율령에 따라 이차돈에게 죄를 물은 것이다. 6부 귀족들은 이차돈의 거짓을 듣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왕에게 찾아와 따지는 형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왕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율령제에서 이차돈의 죄 못지않게 중대한 죄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황에서 왕명의 지엄함을 참형으로 보여주었으니 6부 귀족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졌음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제 3장 정치적 상징성과 신화화큰 정치적 위험부담을 안았지만 왕권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불교는 다음 왕인 진흥왕이 국가권력과 효율적으로 결합시켜 신라 전성기의 구가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후 신라 왕정의 초석이 된다. 백률사 석당기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이 죽은 지 300년이 지난 통일신라시대 헌덕왕대에 세워졌다. 통일신라시대에 이 비를 세우면서 이차돈의 죽음에 많은 상징성을 가미했을 것이다.백률사석당기의 비문 내용은 마멸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려우나 비문의 일부가 전해진다. 비석의 본문에서 법흥왕은 불교가 유행하게 되면 나라는 풍요롭고 백성은 평안하며, 삼한을 통일하고 사해를 넓힐 수 있다고 한다.) 이어 내용을 보면 순교비의 주된 내용에는 이차돈의 순교를 기리는 것에 더하여 불교가 삼국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과 왕의 위엄이 강조되고 있다.이차돈 순교비에서 왕과 국가의 내용이 많이 포함된 이유는 당시 신라의 정치상황과 관계가 깊다. 이차돈 순교비를 세운 시기는 신라 헌덕왕대로 정치상황의 혼란이 가중되던 신라 하대이다. 당시 귀족들은 불교 사원과 연합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왕권을 위협했다. 실제로 왕위를 노린 귀족들의 반란이 발생했고 통치체계는 혼란스러웠다. 신라 왕실은 귀족과 결탁한 불교세력의 반발을 누르고 그들을 왕 중심으로 회유하는 한편 왕의 위엄을 강조함으로써 정권을 강화하려했다. 그 과정에서 고승을 추모하는 고승추모비들을 건립하게 되고 이차돈 순교비의 건립도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당시의 정치상황은 법흥왕 때의 정치상황과 유사한데, 그 상황을 희생과 지혜로써 슬기롭게 극복한 법흥왕과 충신의 모습을 강조하여 그 효과를 기대했던 것이다.이차돈의 처형사건은 불교의 신성성과 함께 왕권 확립의 기초를 증명해주는 정치적 상징성을 가진다. 처형하자 목에서 흰 젖이 솟아올랐다는 등의 신비한 현상은 이미 그 이전 불교 기록에도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을 차용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불교의 정당성을 한층 강화하고 아울러 그것을 위한 왕과 충신의 모습까지 강조하였다. 그 사건을 기리기 위해 수백 년이 지난 신라하대에 비석을 세운 것은 이차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