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청자1. 서론우리나라 청자(靑磁)는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로 형체를 만들고 잘 말려 섭씨 700 내지 800도에서 한 번 구워(초벌구이)낸 다음, 그 위에 철분이 1 내지 3퍼센트 정도 들어 있는 석회질의 유약을 입혀 1,250 내지 1,300도 정도의 높은 온도에서 환원염으로 구워내어 자화(磁化)한 자기의 일종을 말한다. 이 때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보석인 비취의 색과 유사하며 거의 투명하다. 그릇을 두 번 구워내면 태토(胎土)의 색은 흐린 회색이 되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 바탕에 비취색 유약이 입혀지게 되어 이를 비색(翡色)이라 일컫는데 연연한 아름다운 발색을 보인다.고려 자기 가운데에서는 특히 청자가 세련되었고 그 생산량도 많았다. 통일신라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토기만을 사용하였으며 통일신라 말경부터 자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은 자연스러운 인류 문화 발전의 현상이지만 고려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더욱 많이 생산되었고 같은 시대 다른 종류의 도자기에 비하여 공예적으로도 가장 세련되었다.중국 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두껍고 불투명하며 기형은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 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약과 유려한 선의 흐름, 탄력 있고 생동감 넘치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과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 문양등이 특색이다. 또한 세계에서 최초로 환원 번조로 자기에 붉은 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 기법을 창안해낸 것도 자랑스러운 공예문화의 일면이다.2. 청자의 발생(1) 토기와 청자와의 관계섭씨 600 내지 800도의 낮은 화도로 산화 번조 상태에서 구워낸 토기〔옛날 우리 표기는 와기(瓦器)〕에서 고화도(섭씨 1,100 내지 1,200도) 환원 번조의 도기(陶器)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 표면에 내려앉아 태토에 포함되어 있는 규사질과 합쳐져 녹아 붙어 회유(灰釉)가 된다.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釉藥·灰釉〕이라 한다. 이 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그 당시 신라 조정이 혼란하였지만 장보고의 세력은 신라 조정과 맞먹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이는 해상 활동에서 얻은 부의 축적과 성장이 컸으며 이에 따른 그 일대의 문화·경제·사회 부분의 성장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갔고 호남 지방의 광활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바다에서 얻어지는 풍부한 해산물 등으로 인해 이 지방이 다른 지방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어서 먼저 개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곧 경주 쪽보다도 완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일대가 오히려 먼저 청자를 사용할 수 있었고 점차 수요가 확산됨에 따라 자체 생산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이며 이러한 초기의 성공 예가 서남해안 일대의 초기 청자 가마들이다.우리나라에서 햇무리굽 청자가 많이 발견되는 가마에서는 그릇에 문양이 없다. 햇무리급 청자가 조금씩 발견되고 그 굽자리가 퇴화된 상태로 발견되는 가마터에서는 국당초문(菊唐草文)계의 음각문양이 조금씩 나타나며 좀더 지나면 양인각문양(陽印刻文樣)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국 쪽 보고에 따르면 수대에 일부 음인각(陰印刻)문양이 있으며 당대에는 월주요청자에 문양이 거의 없으며 당말 오대에 가서야 문양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초기 햇무리굽 청자에는 문양이 없으므로 그 시원을 9세기 중엽까지 소급(遡及)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 밖에 중국에서 발견된 햇무리굽 청자 가운데 편년이 가능한 자료를 모아 분석한 결과 거의 전부가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에 집중되었고 9세기 후반에는 약간의 예가 있을 뿐으로 10세기의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고식(古式)의 햇무리굽 청자는 늦어도 9세기 후반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학계에서 종래 고려 초의 토기라고 생각하던 토기(예를 들면 전남 영암군 구림리, 충남 보령시 진죽리 가마에서 발견된 토기)가 경주 안압지(雁鴨池) 발굴 조사 아래로 그 편년이 통일신라시대로 시정되고 있다. 안압지에서는 많은 도자기 파편이 나왔다. 이를 서 음각문양이 나오기 시작하고 또 말기 햇무리굽 대접에 음각국당초문(陰刻菊唐草文)이 있는 예가 최근에 발견되었다.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한 10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강진 용운리 요지의 초기 청자 II 형식의 말기 단계에서 햇무리굽 파편에 초벌구이한 음각당초문양(陰刻唐草紋樣)이 발견되었고 햇무리굽은 아니지만 일반 다리굽 청자 대접에 음각국당초문이 있는 예가 여러 점 발견된 적이 있다.국당초문(菊唐草文)이 출현하는 단계에서 햇무리굽은 퇴화되고 대접의 기형도 바뀌면서 작은 다리굽이 되고 대접 안쪽으로 구연이 약간 외반(外反)되는 곳에 한 줄의 음각대선(陰刻帶線)이 있게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우리 청자 최초의 문양 가운데 하나는 음각국당초문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발견되는 많은 초기청자 가마 중에서 강진 일대의 청자가 가장 세련되었다. 계속 그곳에서 청자를 생산한 이유는 서남해안의 청자요 가운데서도 강진 일대의 청자요가 다른 가마에 비해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 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의 해상 활동에서 비롯된 영향을 더욱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생각되고 처음부터 명품을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장보고에 의한 중국 청자의 수입과 청자 기술의 도입으로 서해안과남해안에 청자 번조 기술이 전파되었는데 특히 강진은 장보고 해상 활동이 중심이었던 완도에 가까웠다. 또한 청자를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인 태토, 물, 나무 등이 풍부하였고 해운(海運)을 이용하여 제품이 경주와 기타 지역으로 운반하기에 편리하였을 것이다.고려의 건국 뒤에는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서남해안 일대의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었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 있게 수용하고 정리하였기 때문에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초기 청자의 바탕이 매우 든든하였기 때문에 이후 고려 청자는 11세기 말·12세기 초까지는 중국의 섬서성 요주요 계통, 호남 장사요(長沙窯), 광주 서촌요(西村窯), 정요(定窯), 자주요계(磁州窯系)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곧 음·양각문양과 도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 고려적인 세련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청자, 백자의 기형과 의장(意匠)에 유연한 곡선 주조의 고려적인 풍모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유약·태토의 질과 번조 기술, 문양 표현 기법과 문양 자체가 또한 진일보하였던 것이다. 청자의 기형에서 일부 금속기를 모방한 주전자와 광구병 등은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으나 대접, 접시 등 일반 기명들은 구연이 유연하게 외반되는 등 유려한 면이 더 발전되어 단정한 가운데 예리한 맛이 깃들여 있다. 문양은 상감 기법의 시도가 조금씩 늘어나고 음각과 양각이 예리해지며 특히 양인각이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11세기 말경에 이르면 요주요식의 각개 문양의 주연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방법은 점차 사라지고 문양의 부조가 아주 낮아지면서 부드러운 문양이 된다. 또한 각개 문양의 중심 부위가 더 두드러지면서 그 문양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 주위를 음각으로 마무리하는 새로운 방법이 시도된다. 문양 표현과 소재도 공예 의장화된 당초문 위주에서 운학문(雲鶴文)과 작약문(芍藥文), 쌍룡문(雙龍文), 연동자문(蓮童子文), 연지문(蓮池文), 모란당초문(牡丹唐草文) 등 주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동식물의 사실적인 문양 구성이 주류를 이루며 전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실적이고 상징적인 동식물을 상형한 청자가 많아지고 기형도 공예적으로 세련된다. 또한 아직까지 애부분의 문양 구성이 당초문을 매체로 하여 연속성을 갖추고 있으나 절지문(折枝文), 운학문 등 단독 문양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종속 문양도 등장하기 시작한다.11세기 중엽부터는 이러한 도자 예술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 있어서도 문화사적으로 하나의 전기를 이루는 때였다. 곧 문종왕 치세(1046∼1082년) 동안에는 요, 송, 고려 사이에 비교적 평화가 유지되고 문물의 교류가 잦았으며 특히 송과의 빈번한 사절 왕래를 통해 얻어진 폭넓은 북송 문화의 자극은 고려 신흥 문화의 좋은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말하자면 이 기간 중에는 비록 청자 제작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보타낸 것이 아니라 꽃과 잎사귀의 화맥과 엽맥까지 나타내어 자연의 향기를 맡게 하고 있다. 이들 문양은 초기 상감과 병행 시문되는 경우도 있으며 문양의 종류도 모란, 운학 등 각종 당초, 포도동자, 연지문, 포류수금문, 운학문 등 매우 다종다양해졌다.음각은 가늘고 예리한 선도 남아 있으나 점차 선이 부드러워지며 또한 굵은 선이 등장하고 이 굵은 선이 반양각으로 변한다. 음각은 예리하고 유려한 선도 있으며 반양각과 같이 사용되기도 하여 선이 약간 굵은 것도 있다.투조(透彫)는 그 수량이 매우 적은데 이것은 한국 미술 전반에 흐르는 과식(過飾)을 좋아하지 않는 품성 때문일 것이다.노태문(露胎文)은 매우 희귀하며 청자 유약을 문양대로 베껴내어 문양은 태토에 철분이 배어난 갈색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양의 기명은 12세기 것인데 중국에서는 원대인 14세기 전반에야 비로소 노태문이 등장한다.절지문의 등장도 새로운 변화이다. 모란·당초·연화절지 등 단순한 것도 있지만 다소 복잡하고 복합적인 모란당초와 연당초절지문이 새로 등장한다. 또한 덩굴진 당초도 아니고 절지문도 아닌 회화적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연지문 포류수금문 등이 새로 등장하고 단독 문양익 운학문, 운문, 학문, 앵무문 등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기면의 중심 부위에 단독 문양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시기에 이르면 점차 그릇의 상하 부위에 종속문이 주문양 아래 위에 등장하면서 주문양과 종속문이 거의 함께 등장하는 시기로 이행되며 주문양과 종속문이 함께하는 새로운 문양 구성이 이루어진다. 또 이 시기에는 대접 등 안팎 면이 있는 그릇들에는 대체로 일면에만 시문이 있다가 12세기 중엽에 가까울수록 내외 양면으로 시문이 확산되기 시작한다.초기의 청자 상감류 청자 상감은 이미 초기 청자 II 형식 시기인 10세기 후반경에 매우 드물지만 그 실례가 있어 그 발생을 알 수가 있다. 10세기 후반경에는 아주 단순 소박한 문양이 있고 11세기에는 명문을 상감으로 나타낸 경우가 있을 뿐 그 기법이 아직 거칠고
아르누보 - 20세기 미술운동1.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1870년 이후부터 세계의 재건(再建)을 말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멀리 잡은 것일지 모른다. 1870년대에는, 이후 1970년에서부터 1920년대의 전위 그룹들에서 사용된 용어와 유사한 것으로 쓰인 위대한 이상향(理想鄕) 에 대해 출발해야 할 그리 절박한 필요성을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 그런 느낌을 갖지 않았다. 매사는 아주 천천히 지하수로를 통한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사회 정치적 세계에 대해 예술이 이전과 동일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당시 일어난 변화 혹은 미학적 반동은 이러한 균열을 지적해 주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가 재건되고 변형되어야 했다면 그것은 이미지가 아닌 형태에 의해서, 형태의 구성에 의해 이루어질 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프랑스에서 가장 현저하게 그리고 급작스럽게 감지되었다. 프랑스에서 이데올로기의 몰락은 대상과 형태로의 합리적인 접근을 위한 길을 닦았다. 실증주의철학의 점진적 우세에 의해 손쉽게 그리고 시의적절하게 이러한 접근이 이뤄졌다.영국에서는 심미적, 도덕적 사회개혁이 19세기 중반 이래 심미주의 미술운동(Aesthetic Movement)의 이름으로 계속 진행 중이었다. 이 운동은 당시 영국에서는 실제 아르 누보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아르 누보의 선구자로서 이 운동의 선배격인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동료 그리고 미술 공예 운동(Art and Craft Movement)을 뒤따른 그의 제자들과 불분명하나마 관련을 맺고 있었다. 모호하다는 관련이란 심미주의적 반동이 사회 전반은 아니라 할지라도 생활환경을 개혁하려는 야심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프랑스와 영국, 단지 이 두 나라만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바로 이들 두 나라에서 새로운 산업사회의 제 문제들이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두 나라는 미래의 예술로 향하는 두 갈래 길을 나란히 걷게 되었다. 하나는 대상과 형태라는 새로운 종(種)의 창조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스타일의 제 반성이었다.2. 영국에서의 심미주의 미술 운동아르 누보의 기원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1859년 윌리엄 모리스가 건축가 필립 웹(Philip Webb)의 도움을 받아 건축한 레드 하우스(Red House)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정해볼 수 있다. 레드 하우스는 이전까지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모방한 데 대한 강한 반발로서, 비대칭과 도발할 듯이 자유로운 설계 등을 외형에서부터 과시하고 있다. 즉 타일이나 벽돌 등, 사용된 재료의 생생함과 평범한 특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또 건축물과 인테리어 장식 사이의 개념적 통일이 필요함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후 1895년 반 데 벨대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지은 집은 그 이유에 있어서나 정신적인 면에 있어, 직접적인 모리스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1861년 모리스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회화, 판화, 가구 그리고 금속공예를 위한 순수미술노동자 의 공방을 만들어 개인적인 체험을 풀어나갔으며, 이로써 서구미술에 있어 새로운 시대의 출발 (니콜라스 페브스너(Nikolaus Pevsner)을 기록했다. 즉 예술가(특히 화가)는 전체적인 삶의 현장을 책임지기 위해 자신의 스튜디오나 상아탑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됐다.1876년 휘슬러는, 런던 48번가 프린시스 게이트에 있는 자신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프레드릭 레일랜드(Frederick R. Letland)의 저택 식당을 개조하면서 명백하게 이와 유사한 외관을 채택했다. 그러나 공작룸(Peacock Room)이란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 이 방은 어떤 새로운 방향을 나타내는 신호가 되었다. 공작의 깃털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추상적인 패턴, 전적으로 비대칭적인 무늬들의 배열, 평범한 색채사용, 빈 공간과 채워진 공간간의 세심한 대비 그리고 무엇보다 휘슬러 자신이 이 방에 이름붙인 청색과 황금색의 조화 등은 휘슬러와 그의 동료들이 꿈꿔온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로 생각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휘슬러의 발전 그 자체는 새로운 미학의 탄생을 예고했다. 에 도착해 처음에는 꾸르베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 후 그는 모네와 전기 라파엘파와 접촉하면서 1860년대 내내 리얼리즘을 타파해 나갔다.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형식화(심포니라는 음악적 제목의 출현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는 그로 하여금 1870년 이후 완벽한 예술적 독자성을 이룩하게 했다. 휘슬러는 1873년 이 시기에 가장 공들인 작업 중의 하나인 레일랜드 부인의 초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술적 독자성을 평가받았다. 강조된 색채의 섬세한 조화 등 이 모든 것들은 심미주의 운동에 선구자적 요소로서 많은 것을 제공해 주었다. 휘슬러가 보여준 이 파문은 브뤼셀, 글래스고우, 비엔나로 확산되어 갔다.꽃과 같은 귀부인 모습과 함께, 선과 색채의 조화, 또 한편으로 생생한 형태로 표현한 공작의 외모에서 볼 수 있는 장식과 원래의 구성 기능, 이 두 가지는 후에 아르누보의 상징적인 요소로 나타났다. 특히 두 번째 것은 곧이어 존 라 파르그(John La Farge)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나타났다. 존 라 파르그는 예술적 행적의 여러 면에서 휘슬러와 필적할 만 했다. 1877년 라 파르그가 스테인드 글라스에 사용한 여러 기법들, 즉 드로잉이나 색채를 통한 재료의 내적 특성에의 강조(이점에서 티파니(Tiffany)의 색채유리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주된 모티프의 단호한 비대칭성, 색채 영역에서의 실제적인 분리 등은 대서양 저편에서 공작품의 화려한 벽지에 대한 직접적인 공감을 나타냈다. 심미주의는 이들을 통해 무엇보다 시대의 운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형식을 통해 일상생활의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휘슬러에게는 조화로운 전체라는 개념이 중요한 역할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휘슬러가 전기 라파엘파와는 달리 회화작품의 프레임을 추상적인 무늬로 장식한(쇠라가 곧 뒤따라 보여준 것과 같은)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훗날 휘슬러는 자신이 아르 누보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1885년 자신의 유명한 저서인 「10시의 강연(Ten O'Clock Lecture)」에(Mallarm )에 의해 불어로 번역된 이 책에서 그는 아르 누보란 있지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 단지 예술만이 있을 뿐이다 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0년대 그의 작품들은 형식주의 및 아르 누보가 채택하고자 한 모든 열망들을 정확히 이끌어 주고 있었다.이와 나란히 전기 라파엘파 운동은 자체적으로 현격한 방향전환을 수행하고 있었다. 주요 발기인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는 당시 첼시에서 세상일과는 초연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말년(1882년 사망)무렵에는 자신의 초기 회화에 보인 병적인 침울함과 신비주의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었다. 당시 윌리엄 모리스는 그와 정반대로 특유의 강인한 호전성을 보였었다. 1873년과 1877년 사이에 그려진 로제티의 는 8부작 연작의 하나로 그의 회화의 최종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주제가 지적해 주듯이 본질적으로 문학적이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이탈리아 소네트였으며 복잡한 도상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당시 휘슬러의 회화와 확연히 구분되었다.그러나 영국에서 아르 누보의 선구가 된 본질적인 부분은 전기 라파엘파와 휘슬러라는 두 타입의 회화간에 벌어진 충돌을 넘어서 다른 영역, 즉 장식미술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모리스의 이론, 즉 과거의 미술이나 문학에 매료되면서도 산업상의 기술에는 적대적이며, 예술가들의 엉터리 영감보다는 장인들의 작업을 존중하는 그의 이론( 즉 영감이란 이야기는 단순한 넌센스다. 그러한 것은 있지도 않다. 단지 장인정신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일의 거부, 응용미술의 복권,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에서의 예술가의 역할에 관한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점에서 아르 누보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모리스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된 미술 공예 운동이 1880년대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사실이었다. 몇몇 길드(중세 장인들에 대한 존경에서 유래한 이름)의 결성은 몇 년간 이 운동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됐다. 1882년 아더 맥머르도의 센추리길ewis F. Day)(맥머르도와 공동)의 미술노동자의 길드 , 1884년 이들이 결성한 홈 아트와 산업협회 , 그리고 대중에게 그들 작업을 알리고자 1888년 결성한 미술공예 전시협회 등이 그것이다.1880년대 초 맥머르도가 디자인한 면직물 와, 그보다 전에 모리스가 디자인한 이라는 근대적 벽지는 서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재능있는 길드조합의 장인이 심미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리스의 에 보이는 조밀하게 소용돌이치는 잎 무늬, 표면을 체계적으로 메운 연출, 대칭성에의 신뢰(훗날 1880년대에 더욱 강조됨) 등은 정확한 자연주의적 관찰과 중세 타피스트리정신에 모두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반대로 맥머르도의 면직물에서는 계산된 비대칭성이 연출되었으며 색채가 서로 다른 두 개의 모티프 시리즈가 겹쳐지고 더 양식화한 반면, 단 하나의 긴 인동초무늬만이 시문되어 공간구성이 조밀하지 않음으로 해서 표면은 확연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센추리길드의 잡지인 『호비 호스(Hobby Horse)』는 1886년부터 정기적으로 간행되었으나, 그 표지는 1884년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셀윈 이미지(Selwyn Image)가 공동의 이념을 가지고 디자인한 것으로 했었다. (셀윈 자신은 휘슬러의 「10시의 강연」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잡지는 이러한 새로운 사상을 제시해 넓게 퍼져 나갔다. 그런 점에서 아르 누보 발전에 있어 미술 출판의 결정적인 역할이 기대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헤이우드 섬너(Heywood Sumner)가 『물의 요정』의 영어번역본에 꾸민 책장정은 책에 실린 요정의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았다. 여기서 요정은 회화적이며 감상적 구성을 통해 탄생하고 있다. 신체는 거의 볼륨감을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반면 드레스, 머리카락, 해조류의 이상 과대표현은 장식의 계속성과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그리고 또다른 관심은 미술공예 운동의 디자이너 특히 월터 크레인이 보인 꽃과 선의 양식에서 두드러졌다. 1889년 크레
색채 심리 - 마음을 치유하는 컬러 테라피1. 서론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인 1947년 두 사람의 미국 여성교육자 알 슈우라와 하트 위크가「페인팅과 퍼스널리티」라는 레포트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우연히도 같은 해에 스위스의 심리학자 막스륙사가 발표한「컬러 테스트 심리학」과 같이 이후의 색채 심리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선구적인 것이었다.알 슈우라 등의 연구는 유아의 그림을 고찰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자유로이 그린 대부분의 낙서 같은 그림에서 색의 쓰임을 분류하고 사용된 색채와 심리 상태, 건강 상태와의 관련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예를 들면 노란색은 행복하며 적극적인 아이 . 보라색은 침체되고 우울한 기분을 가진 불행한 아이 등 각각의 색채가 상징하는 심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구였다. 더욱이 이후의 연구에서 이 색채가 상징하는 의미는 성인의 경우와도 상당한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왜 아이들, 특히 유아의 그림이었던 걸까? 바로 여기에 알 슈우라 등이 실시한 연구의 열쇠가 있었다.유아는 어느 정도 감각에 의존해 색을 선택한다. 즉 선입견이 적은 만큼 선택한 색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게 된다. 4∼5세 정도까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파란 태양이나 빨간 바다를 그리기도 한다. 아직 형태 그 자체를 그릴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의 중심은 색 이다. 그러한 그림에는 기분의 변화가 반영된다.당시 미국에서는 심리학이 한창 성행하고 있었다. 정신분석을 비롯해 산업사회의 요구로 대중심리를 연구하기 위한 심리학도 발전해 있었다. 인간의 무의식적 욕구를 어떻게 하면 파악할 수 있을까라는 방법론의 하나로써 프로이드의 꿈 이론이나 롤샤츠하 실험 등 심리학에서는 시각 이미지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시대 배경 혹에서 무의식 이 표현되는 아이들의 그림이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기성 관념에 의해 색채의 순수한 욕구가 억압되기 이전의 아직 무의식적인 상태가 남은 유아의랑하고,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쉽지 않은 게 분명하다. 뭉크 자신도 언제나 행복한 인간 관계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느 여성과의 갈등으로 권총을 발사시켜 자신의 손가락을 잃어버리기도 했다.공포와 싸우면서 살려고 하는 인간의 에너지는 처절하다. 그러나 그 순간 인간은 내면에 흐르는 피와 호응해서 빨간색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나에게 실감토록 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그림이었다. 어린이가 빨간색에 손을 뻗는 것은 여러 가지의 계기가 있으나, 특히 빨강이 형태는 없으면서 거칠게 칠해졌을 때 그것은 정신적인 탈피의 아픔과 적지 않게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어떠한 종류의 절박감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의 사랑이 손아래 형제에게 옮겨지면 드디어 홀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온다. 그 때 갑자기 미친 듯이 빨간색을 칠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흡사 야생동물이 스스로 힘을 기르기 위해서 울부짖는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생명력을 발산시키려고 하는 색이 바로 빨강이다.인간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린이들이 빨강을 좋아하는 심리, 그것은 고대(古代)인들이 빨강이라는 색에 최초의 생명을 부여한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 각지의 고대 문명에서 특히 죽은 사람을 매장한 성역에 빨강이 쓰여진 예가 많은 것은 왜일까. 불의 색, 피의 색인 빨강, 결국 생명의 상징인 빨강과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려고 한 고대인의 간절한 기도가 연관된 것은 아니었을까.빨강은 죽음의 불안을 초월하려고 했던 천재 화가의 그림에서, 또한 어디에든지 있는 어린이들의 낙서 가운데도 홀연히 모습을 나타낸다. 빨강이란 색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삶을 고양시키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빨간색에 묘하게 마음이 끌릴 때가 있다. 여성이 일을 하러 출근하기 전에 빨간색의 루즈를 칠하는 순간, 남자가 빨간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원초적 빨강의 기억이 깨 하는 같은 이름의 형이 있었다. 양친은 생후 얼마 안 되어 죽은 형과 같은 이름을 고흐에게 붙인 것이다. 고흐의 탄생은 양친에게는 죽은 아기의 환생과 같은 의미였음이 틀림없다. 양친의 사랑이 자신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자라지 못한 형의 대신인 것일까. 고흐의 지나칠 정도의 자기 탐구, 그리고 자신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려는 강한 충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그런 시각도 틀리지 않다. 더욱이 얄궂은 운명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유일하게 물심양면으로 고흐를 지지해준 동생 테오가 훗날 그의 아들이 태어났을 때 빈센트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노란 방 을 그린 아를에서의 시기, 고흐가 더욱 가까이 곁에 두고 싶었던 사람은 존경하는 화가 고갱이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공동 생활은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겨우 두 달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윽고 고갱은 타히티로 떠나고 고흐는 정신 발작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고흐의 말년의 비통함을 알면 일견 빛나는 것처럼 그려진 노란 방 의 그림에는 표면의 밝음에 감춰진 그의 끝없는 어둠을 보는 듯하다.빛이 강할수록 그로 인한 어둠도 깊고 날카롭다. 그 어둠과 비교해 한층 두드러진 노란색의 빛을 추구했던 고흐에게 있어서 노란 방 의 그림은 결국 얻을 수 없었던 사람과의 행복을 이미지 속에서 정지 화상 으로 영원히 새긴 작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4) 기쁨에 넘친 감정을 나타낸다.사람은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에 끌리는 색채도 변화해 간다. 희망 , 기대 , 응석 , 외로움 , 기쁨 , 행복 , 만족 , 만남 , 실제로 이들 감정을 나타내는 말은 어느 조사에서 확인 한 것이다.물론 색이 어떤 기분을 내포하는 가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으므로 이것만으로 노란색이 표현하는 정신을 결정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노란색을 추구할 때에 무의식적인 심리의 방향성은 알 수 있다. 구태여 한마디로 묶어 말한다면, 기쁨에 가득 찬 감정 또는 만족되리라는 기대감 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서 그림에서 중용을 느끼게 하며 차분함이 감돌게 한다. 이와 같은 초록색의 세계는 세잔의 성격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 팔레트 위에 미묘한 단계의 구별되는 색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혼탁하지 않은 화면을 만들 수 있었다.(3) 부드러움과 엄격함의 색그렇지만 세잔의 생애가 전부 온화했던 것만은 아니다.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와의 갈등, 부인과의 불화로 괴로움을 겪었으며, 화가로서의 성공은 만년이 되어서도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조용하고 평온하게 보이는 초록색의 배우에는 확고한 그의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세잔은 인생의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 노력의 성과가 이론적으로 정당하다고 스스로 느낄 때까지, 침묵 속에서 작업하고 싶다 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색조 관계가 정확히 결정되어 있으면 조화는 스스로 완성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성과의 하나가 무엇보다 조화 였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자연이 보여주는 온화함과 존재감의 조화에서 보듯이 세잔의 회화관이야말로 변용이 풍부한 초록색을 사용한 것이다. 어딘가 리큐의 철학과도 연관되어 있는 초록색의 정신과 만나는 듯하다.초록색은 부드러움뿐만 아니고 늠름함과 엄격함을 감추고 있으며, 그 두 가지가 조화될 때 마음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노란색과 파란색처럼 극단적인 색이 섞이어 만들어진 초록색의 성질, 그 자체라고 생각된다.5. 파랑의 심리 - 상실과 재생의 마음(1)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푸른 꽃』독일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Novalis)의『푸른 꽃』은 시인을 꿈꾸는 한 청년이 꿈의 이미지에 이끌려 다양한 여행을 경험하고, 결국 꿈의 예고대로 동경했던 여성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하인리히는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며, 공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만남을 계속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 간다.(2) 물 -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신화푸른 꽃에 이끌리는 여행, 이 여행은 동시에 하인리히가 자신의까.(2) 빨강의 앙양 과 파랑의 침체위기의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왜 보라색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보라색을 만드는 기본 색이 빨강과 파랑이라고 생각할 때, 보라색이 되기 전에 빨강과 파랑으로 상징되는 정반대 감정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그러나 인간의 생명력은 바로 균형을 회복하려고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할 때 빨강과 파랑의 두 가지 색을 포함한 보라색은 갈등을 해소하려는 심리에 효과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닐 까. 보라색을 아름답게 느끼는 감각 그 자체에 회복하려고 하는 생명력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3) 애증의 마음이 융화된 치유의 색보라는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다. 동시에 빨강의 요소이기도 하며, 파랑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양(陽)이기도 하고 음(陰)의 색이기도 하며, 또 그 두 가지 색이 혼합돼 있다. 이 보라색의 포괄적인 복잡한 성질은 성별을 초월하고, 내면의 사랑과 증오, 강함과 약함, 희망과 절망...그러한 상반된 마음이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어떤 것이다.7. 분홍의 심리 - 행복의 이미지(1) 분홍색은 싫어?평소 많은 사람이 막연하게 분홍색은 여성이 좋아하는 색이라든가, 여자의 색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색에 따른 성별의 표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리의 공중화장실 등의 표시에도 남자는 파랑이나 검정, 여자는 분홍색이나 빨강 등의 색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사용되는 신발이나 물감통 등도 여지없이 성별에 따라 색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익숙해져 버린 색채 표시의 영향은 의외로 큰 것이다.어느 색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 가는 그 사회나 문화가 어떤 형식을 나타내고 잇는가, 결국 어떤 기호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분홍색이 여성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사회에서는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서 그 색채가 여성 이미지와 결부되어 버리는 것이다.(2) 행복감을 이미지화 하는 색동시에 색에는 시대나 문화를다.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1. 극사실주의의 개념슈퍼리얼리즘·포토리얼리즘·라디칼리얼리즘·샤포포커스리얼리즘·포토아트라고도 한다. 같은 시기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시도된 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처럼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며, 또한 감광제(感光劑)를 캔버스에 발라 직접 프린트하는 경우도 있다.2. 포토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추상이 지배하던 뉴욕과 서유럽의 예술의 중심지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예술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 새로운 예술은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 아트가 힘겹게 획득한 성과를 거부하는 듯이 보였으므로 놀랍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수년간의 투쟁 끝에, 비대상적이며 추상적인 예술은 결국 이미지의 객관적인 명확성을 최대한으로 강조한 새로운 예술양식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위협받게 되었다.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새로운 리얼리즘은 일종의 갑작스러운 예술적 반동으로 보였다. 새로운 예술은 비대상주의라는 형식주의적 발명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보수적이고, 거의 반동적인 현상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흔히들 알고 있듯이, 사회적 리얼리즘 예술이 20년대 러시아에서의 구성주의의 자율적 탐구를 저지한다는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일어선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그러한 비교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포토 리얼리즘은 어떤 면에서는 주류를 이루는 모더니즘 미술을 거부한다기보다는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주의와 미니멀리즘에 동기를 부여했던 수많은 문제들과 예술적인 도전들이 포토리얼리즘 작품들 속에서 고려되었다. 초기에는 이런 점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으며, 사실 60년대 후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토리얼리즘 예술을 비웃었다. 그 스타일이 반동적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일시적인 유행일 뿐이었다. 아니면 단지 주의를 끌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꾸며낸 행동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은 장난이었다.많은 평론가들, 거래상들, 출판업자들은 이 스타일을 진지하게 취급하려 하지 않았지만 소수의 선구자들은 지원을 해 주었다. 1965년에서 1968년 사이에 전시회가 드문드문 열리고 평가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로버트 벡틀, 존 클렘 클라크, 척크 클로스, 오드리 플랙, 말콤 몰리 등의 작가들이 대중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반 카프를 제외하고는 어떤 개별적인 작가도 포토리얼리즘 양식의 잠재성을 집중적으로 전개시킬 의욕도 능력도, 모험심도 없었다. 즉, 루이스 마이즐이 1973년 소호의 프린스 가에 그의 두 번째 화랑을 열기까지는 아무도 없었다. 포토리얼리즘은 그렇게 성년이 되었고 그간 고대해 왔던 지속적이고 완전한 관심을 획득하게 되었다.포토리얼리즘 미술을 지속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로 말미암아, 그것이 대체 어떤 스타일인가를 더욱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편으로는 예술적 유산, 혹은 문맥을 검토할 수 있는 기회와 더불어, 또 한편으로는 새롭게 부상하는 작가와 작품과 더불어, 새로운 미술의 몇 가지 중요한 특성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반지성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으로 보였던 하나의 양식이, 사실은 반세기간의 추상과 비대상예술을 통해 전개된 미적 원리가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확장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루이스 마이즐이 1966년 뉴욕에 첫 번째 화랑을 연 이래로, 그는 오늘날 새로운 리얼리즘 양식의 토대를 형성한 리얼리즘 작가들의 작품을 강조하였다. 그의 초기의 참여의 결과로서, 이 책은 그 놀라운 일관성에 대한 독특한 개관이다. 모더니즘 미술의 범위 내에서, 현재의 포토리얼리즘 양식만큼이나 두 사람-마이즐과 카프-의 열정과 관리, 지원에 그렇게 의존했던 어떠한 단일한 운동, 혹은 양식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미술사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하나의 장이었다.포토리얼리즘 미술의 진로가 끝에 달했다고 한다면 시기상조일 것이다. 이 스타일에 관계하여 깊숙이 참여하고 있는 새로운 작가들이 많이 있다. 유용한 주제의 범위가 탐색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포토리얼리즘이 예술과 그 주제에 대한 통상적인 접근 방식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았듯이, 미술비평에 대해 가지는 의미도 아직 검증되지 않은 채로 있다.포토리얼리즘의 의미가 아직은 완전히 감지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확실할 것이다. 이 양식의 범위 내에서 탐구하고 실험할 여지는 대단히 많으며, 수용자, 새롭게 관심을 가지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는 마이즐 같은 관대한 안목 있는 이들의 지원으로, 오늘날 존재하는 바와 같은 예술의 개념 자체가 심화되고, 도전받고, 확장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추상표현주의 초기의 몇 년은 흥미롭고 놀라운 것이면서, 그 이후는 수많은 폭넓은 관심사가 드러나고 대단히 많은 예술적인 도전이 소개되는 수 십년 간의 지속적인 활동이 뒤따르게 된다. 리얼리즘의 발견의 완전한 의미를 탐색하려면 더 많은 작가, 화상, 비평가, 사상가들의 정력과 헌신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시작일 뿐이다.3. 포토리얼리즘의 양식과 기법1960년대 초반, 팝 아트가 막 국제 미술계의 주의를 끌기 시작할 무렵,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다양한 배경의 작가들은 새롭게 정당성을 획득하면서 전위적인 미국 미술의 주류로 복귀한 구상적 표현을 진전시키는 작업에 이미 착수하고 있었다. 지극히 다양한 철학적, 예술적 기초를 지닌 이 작가들은 결국 뉴 리얼리스트 라는 집단을 만들어냈다. 사실, 팝 아티스트들도 이 잡동사니 같은 이름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당시에 알아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누구나 뉴 리얼리스트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단지 당시가 추상 이후의 시기였고 그러한 용어가 그런 작가들을 예전에 리얼리즘 운동을 하던 이들과 구별해 주었기 때문이다. 금새, 리얼리즘 계보의 다른 분파들을 기술하기 위한 수많은 다른 말들이 나타났다. 이런 것들 중에는 슈퍼 리얼, 매직 리얼, 샤프 포커스, 라디컬 리얼, 하이퍼 리얼, 로맨틱 리얼 등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의미가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정말로 설명적인 것은 없다. 매직 리얼리즘이란 용어는 알프레드 바가 1942년 미국적 형식의 초현실주의를 기술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했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프랑스인들이 이 책에 나온 작가들의 작품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1972년 재니스 화랑에서의 전시명칭인 샤프 포커스 리얼리즘은 사진을 암시하는 것이었지만 전시에 얽매이지 않는 단순히 장난스러운 명칭이었을 뿐이다.
현대미술에 나타난 오브제1. 서론현대미술에 있어서 오브제의 영향은 중대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세는 현실의 오브제가 직접 화면에 등장하게 되는 입체파의 파피에 꼴레로부터 시작되어 다다이즘에 와서 과거 합리주의가 가졌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정신이 반 예술로 정리되는 새로운 예술의 출발점으로서 본격적인 오브제에 유래되는 것이다. 즉 허구의 세계를 대변하는 이미지가 에 와서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의 참 모습을 파악하려는 순수한 조형적 대상으로 보게 되면서 나타난다. 또한 일차대전으로 말미암아 종래의 합리주의에 대한 유감과 비판정신이 거부와 단절의 의지라는 현대적 특성과 더불어 현대를 특징짓는 기계 문명속의 예술, 즉 오브제 의식으로 싹튼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의 오브제 의식에서 지금의 소비문화에 이르기까지 오브제의 실체는 실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없는 많은 의미와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다. 각 시대가 갖는 문화와 환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의 오브제를 제시해 주며 또한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많은 법론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 오브제의 일상적 도입은 종래의 예술에 대한 반 예술의 성격을 띄게 되어 회화를 오로지 그리는 행위에 만족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은 일상적인 사물과 행위가 곧 미술이 된다는 예술의 포괄적인 확대와 창조활동의 범위를 넓히게끔 되었다.2. 본론1) 오브제의 미술사적 고찰현대미술의 접근에 있어서 오브제 미학은 독자적 영역을 창출하고 있으며 필연적인 표현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넓은 의미에서 오브제는 대상을 보고 그렸던 인상주의 이전의 모든 회화와 동굴벽화에까지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 의미로 오브제는 환영미술을 거부하는데서 그 시작을 알린다. 이러한 오브제는 입체주의의 꼴라쥬의 형식으로 처음 등장하여 산업사회의 급진적인 발달과 함께 현대미술의 발전을 모색케 해주었다.오브제미술은 평면회화에서 마르쉘 뒤샹의 레디메이드로서의 오브제로 일상적인 미술의 영역을 허무는 탈기호의 성격을 보여준다.이렇게 일상생활의 접근하여 인식하게 된 오브제는 팝아트를 거쳐 현대미술에까지 그 소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무한하게 확장되었다.2차 세계대전 후 미술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고 그 중심이 자본주의인 미국으로 옮겨진다. 추상표현주의로부터 네오 다다를 거쳐 팝 아트로 이어지는 일련의 미술사적 흐름 속에서 로버트 라우젠버그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다다의 반 예술이 아닌 일상생활과의 관계를 밀착시키고 호흡하게 해 줌으로써 이른바 컴바인 페인팅이라는 새 용어를 만들어 내었으며 예술과 생활이라는 두 차원의 세계를 결합시킨 대표적인 작가이다.다다와 컴바인 페인팅에 나타난 회화로서의 전위성에 관한 본질적인 차이와 일상생활과 다양한 이질적인 세계간의 표현방법은 무엇인가? 다다이스트들의 급진주의적 활동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라우젠버그도 회화라는 장르 의 확장을 가져왔고 이는 더욱 확대되어 미술에서 혹은 예술에서 장르 라는 개념의 와해를 초래하였다. 일상적인 사물들과 거리에서 발견된 쓰레기 등으로 제작된 미술품은 이제까지 추상표현주의의 극단적인 형이상학적 추구에 의해 미술로부터 외면당한 관객에게는 사실주의적 일상성으로 접근의 가능성을 남겨주었다.라우젠버그의 컴바인 페인팅이 미술개념의 확장을 가져온 것은 꼴라쥬에 의해 도입된 오브제의 성격과 다양한 이미지의 혼합에 있다고 본다. 그가 사용한 일상적인 이미지 도입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차원의 미술개념인 것이다. 컴바인 페인팅에 나타난 다양성과 이질성, 복합성이라는 특성은 회화의 전통적 재현을 부정하는 환경적 요소의 오브제를 예술적 측면으로 확대함으로써 대중성과 현실성에 기여하는 팝아트에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후 회화와 조각을 초월한 행위미술,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 다양한 현대미술의 개념을 확산시켜 주었다.2) 입체파와 꼴라쥬꼴라쥬 기법은 12세기경, 일본의 서예가들이 불규칙적인 모양의 종이 조각을 붙여 만든 소위 파피에 꼴레 에 해당되는 바탕 위에 시를 쓰기 시작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외에도 꼴라쥬의 기원은 가죽공예, 앨범, 기도서, 시집, 카드, 책의 표지등에 실이나 금은의 조각을 붙이는 행위로써 사용된 것을 들 수 있으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기능공이나 민속예술가 아마추어 등에 의한 산물로 미술사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지엽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이러한 비예술적인 오브제의 활용은 전통적인 창조적 방법론에 어긋나므로 20세기 이전까지는 회화예술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왔으나, 1912년 피카소는 그의 작품 에서 최초의 꼴라쥬 작품을 제작한다. 레몬, 오이, 유리잔, 파이프, 신문이 있는 까페의 정물 정면에서 등나무 의자의 무늬가 인쇄된 유화 천 조각을 부착함으로써 전통적 방법을 전혀 사용함이 없이 의자의 존재를 시사해 준다. 그려진 문자 JOU JOURNAL'을 의미하듯이 등나무 의자 일부의 모사물이 의자 전체를 의미한다. 후에 피카소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의 꼴라쥬에 실제의 오브제나 오브제를 의미하는 오브제의 일부도 도입하게 된다.브라크는 에서 목탄으로 사람을 그려 넣고 인쇄된 벽지를 사용하여 배경이 나무판처럼 보이게 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같은 재료와 같은 방법으로 을 제작, 나무의 나이테가 인쇄된 벽지 및 조각을 부착시켰다. 인쇄된 벽지는 피카소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가장 사실주의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부분으로 등장할 수 있지만 보는 사람은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이것이 서양미술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현대적인 오브제인 꼴라쥬이며, 이러한 표현기법의 변화는 공간, 색채, 선적인 움직임과 질감 등 조형적 수단에 있어서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꼴라쥬는 현대미술에 있어서 그림은 꼭 물감으로 그려야 한다는 전통적인 회화관에 대한 파괴로 현대미술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즉 꼴라쥬는 회화상의 조형적인 표현 목적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현실을 보다 확고하게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도입된 것이다.손으로 그리지 않고 주위의 사물들을 임의로 선택해서 화면에 부착시켜 작품을 만든다는 이러한 생각은 입체주의 이후 미래주의, 다다 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한다. 다다이스트들과 초현실주의자들은 포토몽타쥬, 프로타쥬, 앗쌍블라쥬 등의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 등에도 파급된다.3) 다다와 레디메이드산업혁명이후 급격히 변화한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불안한 현실의 상태는 새로운 정신적 자유를 갈망하는 이상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정신은 기존의 미학적, 윤리적, 사회적, 도덕적 기존체제를 부정하게 되고 모든 것에 대한 초월과 기존의 가치관의 해방을 부르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갈망은 전통의 권위와 이성의 우위 그리고 예술의 기존가치나 형식을 모두 부정하는 다다이즘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킨다.부정성을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삼는 다다의 대표적인 인물인 마르쉘 뒤샹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작품 뿐 만이 아니라 작가 자산의 행적가지도 너무나 다다적 이기에 그의 작업을 일관된 논리로 명쾌하게 분석해 낸다는 것은 난감하기까지 하다.당시 부르통은 다다를 무의 마음상태 로 보았고 이것은 곧 새로운 예술개념의 추구이기도 했다. 이러한 다다의 행위는 모든 예술이 최우선적으로 토대를 두어야할 보편적인 의식과 의지를 깨우는 기반이 되었으며, 기존의 모든 가치를 원점으로 돌려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려는 정신이기도 했다.그들은 예술의 개념을 표현에서 선택으로 변모시켰다. 그 하나의 예로서 뒤샹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 즉 병결이나,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음으로서 일상의 생활 기물들을 예술품으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기존 예술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행위에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으며 이 이론은 현대 기계문명의 모순을 교활하고 야유적인 방법으로 통쾌하게 반박한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의 행위는 미적 퇴보가 아니라 미적 발전을 위한 도약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