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근세음악 (조선 전기~임진왜란 이전)1. 세종조의 성공적인 음악 사업유교의 예악 사상을 중시한 조선조에는 건국 초기부터 예와 악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음악을 잘 알았던 박연을 등용하여 한국 음악사상 가장 방대한 규모의 음악 정책을 펴 나간다. 박연은 조선의 제례악을 기록한 악서의 내용이 고전인 [주례]와 맞지 않고 시행되고 있는 제례악이 심각하게 어그러져있음을 확인한다. 세종은 박연의 제안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가 예악을 바로잡는 일에 솔선하게 된다. 세종 이전까지 이루어진 예악 정비의 일들이 고려로부터 전승된 부실한 음악전통을 가리는 수준이었다면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좀 더 근본적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① 조선의 표준음을 내는 율관 제정세종조의 음악 사업은 세종 8년 편경의 재료인 ‘소리나는 돌(경석)’이 남양에서 발견되고 율관 제정에 필요한 ‘거서’가 생산됨에 따라 크나큰 원동력을 얻는다. 국가의 음악 기틀을 새롭게 다져 보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자마자 희귀 재료인 경석이 발견된 것은 곧 편경의 국내생산이 가능해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악기도감을 세우고 여러 의례에 사용할 악기를 제작하던 터에 경석이 발견되었음으로 세종조의 악기 연구와 제작은 새로운 차원에 진입하게 된다. 편경 제작은 먼저 기준음 높이를 정하는 일에서 출발 하였다. 조선이 독자적으로 황종 율관을 제정한 일은 후대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만세토록 전할 정악을 일으키게 한 것’ 으로 평가되고 있다.② 아악 곡의 선정악기제작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는 한편, 1430년에는 제례 및 조회 등의 국가의례에 사용할 아악곡이 선정되었다. 세종 12년부터 정인지 등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연구한 뒤 세종은 음악의 이론과 실제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제례악과 조회아악은 원전의 일부를 선별 하였다.즉 세종 12년에 완성되어 [세종실록]악보에 수록된 제례아악과 조회아악은 예악의 원전에 수록된 내용을 조선에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연주를 위한 근본적인 연구와 응용을 모두 거쳐 조선의 신제아악을 정한 것이며 이것이 복잡한 이론적인 체계에 매이지 않고 현실에서 실제 연주될 수 있도록 간명하게 다듬어 현실적인 전승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③ 회례 아악의 제정세종 13년 8월부터는 국왕과 신하가 함께 어울리는 공식 연회인 회례연(매년 정월 초하루와 동지에 열리는 잔치로 연회 중 가장 규모가 크다)에서 아악과 남악을 써야한다는 논의가 시작된다. 박연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국가의례음악을 ‘아악화’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자 국가 원로 맹사성은 절충안을 내놓는다. 회례연의 전반부에서는 아악을, 후반부에서는 향악과 당악을 쓰자는 내용이었다. 서로다른 의견이 팽배한 가운데 맹사성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세종15년 정월 근정전에서 거행된 회례연에서는 아악, 당악, 향악이 연주되었다.2.신악의 창제와 전승①신악 창제의 경위세종은 건국과 국태민안을 위해 애쓴 선왕들의 공덕을 더 간곡하게 표현할 수 있는 노랫말을 짓고 이를 의례에서 악무로 연행함으로써 군신이 함께 모인 의례와 연회에서 건국의 의의를 깊게 새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에 전래의 향악, 아악, 당악 등의 요소를 조화시킨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신악이다. 신악이란 세종임금이 조종 공덕의 선대함과 건국하는데 겪은 어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취악과 향악을 참고하여 새로 작곡한 ,,,등의 곡이다. 신악의 내용은 [악학궤범]5권중 에서 향당 합주에 맞추어 여기(女妓)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과 향악 연주에 맞춘 ,등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다. 정재는 여기36명이 문(文)을 상징하는 약적을 들고 정재는 71명의 무인의 복색을 갖추고 춤을 춘다. 그리고 는 8명의 여기가 춤을 추는데 한문 가사를 가진 과 한글 가사를 가진 ,의 내용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신악의 내용은 모두 1447년 (세종29년)에 정간보로 기보되어 [세종실록]의 [악보]에 실려 있다.② 신악의 전승세종은 위의 음악들을 각종 국가의례에서 쓰고자 하였다. 역시 이나 처럼 종묘제례와 조정의 의례 및 연향에서 두루 연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악이 제정된 후 가장 급히 논의되었던 것은 그 활용 문제였다. .. 그러나 아쉽게도 세종은 신악이 연주 제도에 채 정착하기전에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세종의 음악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정인지 등의 노력에 힘입어 단종2년에는 문소전의 제향 및 대소 연향에서 신악을 일부 포함하여 사용하는 절차가 정해진다. 그리고 세조6년에는 “지금부터 ,,,의 신악을 익히고 구악을 다 폐지하라”는 단호한 명이 내려지기도 한다. 마침내 세조10년에는 종묘제례악에 향악을 쓰고자 했던 세종의 뜻을 이어 신악 중 과 을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함으로써 영구히 전승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③ 정간보의 창안과 음악의 기록세종은 이 음악을 기록으로 영구히 남기기 위해 특별한 기보법을 창안하는데, ‘정간보(음의 시가를 기보할 수 있는 유량악보)’ 라고 하는 악보이다. 아악의 경우 음 길이가 균등하기 때문에 음의 높이만 표기하면 연주가 가능하여 음 이름을 글자로 표기하는 율자보를 쓴다. 하지만 향악은 음마다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음의 길이를 표기해야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종조의 정간보는 ‘한국음악의 고유한 특성’을 담아야 하는 ‘음악적 필요’에 의해 탄생된 악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은 자신이 새롭게 창안한 정간보를 이용해 ,을 포함하여 무려 520쪽에 달하는 분량의 악보를 제작 하였으며 현재까지 [세종실록]에 수록되어 있다.3. 세조조의 주요 음악 사업세조대에 이르러 여러 가지의 중요한 음악사의 업적이 이루어지는데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일이 ‘제례 속악’의 탄생이다. 12세기 이래로 우리나라에서는 제례에 아악을 연주해왔다. 그런데 세조조에는 이러한 전통을 깨고 조선왕조의 선현들을 위한 제사에서 속악을 연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속악이란 궁중에서 연주되는 아악을 제외한 향악과 당악 등의 음악을 가리키는데, 세조대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속악은 바로 세종조에 작곡된과 을 가리킨다. 세조는 임금이 되기 전 수양대군 시절에 세종이 신악을 창제할 때 적극적으로 도운 적이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세종이 이 음악을 지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한편, 세조는 이 음악을 악보로 기보하면서 또 한 가지의 음악사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 세종조의 정간보를 수정, 보완하여 효율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즉, 서른두 칸의 정간에 율명을 쓰던 세종대의 정간보가, 여섯 개의 대강이 있는 열여섯칸의 정간에 숫자로 음의 높이를 나타낸 ‘16정간6대강 오음약보’로 변한 것이다. 이밖에 세조는 중국과의 사대관계 때문에 생략하고있던 원구제사(하늘에 제사-황제만이 천제를 지낸다는 명분)를 부활하였다. 세조는 등극 후 원구제를 부활하여 시행함으로써 강력한 군주의 위엄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원구제를 위한 아악을 새로이 제정하고 악보로 기보하여 남겼는데 이것이 [세조실록]에 수록된 신제 아악보이다.
국악- 고려 시대의 음악이씨 조선의 건국이념은 척불 숭유에 있었으나, 고려조는 전통적인 무격의식과 아울러 불교를 숭상하였다. 따라서 그 음악에 있어서도 불교적인 행사와 아울러 그 영향을 받은 것도 적지 않았다. 고려 태조가 그 말년인 26년에 박술희에게 친히 주었다고 전하는 기육에, ‘내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다.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일이고, 팔관은 천령, 명산대천,용신을 섬기는 일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가감을 운위하는 자는 일절 금하라’라고 한 바와 같이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적인 행사로서 얼마나 중요시 하였나 함을 알 수 있다. 이 연등회와 팔관회의 의식에는 반드시 가무백희가 곁들여 밤낮을 계속하여 연악을 즐기는 풍습이 성행 하였고, 따라서 여기에서 소요되는 비용이 막대하여 그 폐해도 적지 않았다. 한편 고려 광종 이후로 당악이 들어오고 다시 예종 때에는 송의 신악과 대성아악이 들어오는 등,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한 때 중국계음악이 풍미하였다.향악향악은 고려로부터 전래하는 한국 고유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나 최치원의‘향악잡영’5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금환과 같은 중국의 잡희와 월전,대면,속독,산예와 같은 서역계의 무악까지도 향악이라고 한 점 등, 당 이전에 들어온 외래음악은 모두 향악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때에는 향악을 속악 이라고도 하였다. [고려사]악지 속악조에 의하면, 동동, 서경별곡등 이어로 된 24편과 한문 가사인 풍입송,야심사등이 소개되어 있다. 삼현 삼죽 박판 대고로 편성하여 연주하였던 통일신라시대의 향악 전통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여기에 통일신라시대에는 향악 편성에 들지 않았던 선율 악기인 해금과 피리, 장단을 짚어주는 악기로 장구가 첨가 되었다. 이 중 피리와 장구는 이미 삼국 시대음악에 들어있던 것이라 고려의 향악에 포함 된 것이 좀 뒤늦은 감이 있을 만큼 자연스럽다. 고려시대의 향악은 이처럼 유연한 지속음을 내는 현악기 해금과 음량이 큰 관악기인 피리, 그리고 장단을 치는 타악기 장구가 기존 구성에 더해지면서 변화된 음량과 음색으로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①향악 노래고려시대의 향악 노래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 향가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향가의 전통은 균여대사의 를 거쳐 예종의 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점차 쇠퇴한다. 한편, [고려사]의에는 고려노래 29곡과 고구려,백제,신라노래 11곡이 소개되었다 아직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노래에 얽힌 내력이나 주제만 설명되어있을 뿐이므로 형식이나 가사는 알 수 없고 주제 정도를 파악 할 수 있다. 예종의 ,기철의 ,장연우의,정서의,채홍철의등은 고려시대의 저명인사들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정과정은 향가의 전통이 서서히 쇠퇴해 갈 무렵에 탄생된 노래이다. 정서는 고려시대의 문인으로 인종과는 동서지간이었다. 그리고 이질인 의종이 즉위하자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동래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때 정서는 세상이 조용해지면 곧 다시 부르겠다는 의종의 약속을 믿고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오래도록 다시 올라오라는 전갈이 없자 임금의 무심함을 향가에 담아 노래하였다. 한편 정과정은 만,중,삭이라는 빠르기에 따른 세틀 형식을 갖추고 진작(또는 삼진작) 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은 ‘대엽조의 노래’,즉 가곡의 연원이라고 한다. 노래 중간에 나오는 ‘아으’라 하는 차사는 신라향가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시대 향악 노래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곡으로 평가되고 있다. 향가의 옛 전통을 이은 고려의 노래가 조선의 노래로 이어지는 핵심 고리를 지닌 노래인 셈이다., ;고려의 노래중에는 한문 가사를 가진 향악 노래도 있었다. 대표적인 노래가 이 두 노래인데 은 임금의 선정과 태평성대를 기리면서 장수하시길 축원하는 내용이며,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래는 궁중 연회가 마무리될 때 부르던 노래여서 파연곡이라고도 했고, 궁중연회에서 고정으로 불렀기 때문인지 조선시대까지도 꾸준히 전승되었다. 특히 은 조선시대 음악원의 시험곡이 될 만큼 중시되었고 조선시대 중기까지 선비들이 즐겨 연주하는 거문고 연주곡으로 전승되었다.②향악기먼저 [고려사]악지에 전하는 향악기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현금,비파,가야고,(⇒신라 삼현)대금,장고.아박,무애,무고,해금,필률,중금,소금,박}. 삼현과 삼죽의 여섯 악기는 신라때부터 향악 편성에 있어서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고 장고와 피리도 신라시대의 유적 그림에서 볼 수 있으므로 해금만이 고려시대에 새로 등장한 악기라고 하겠다.당악①당악의 뜻통일신라 이후 고려에 걸쳐 당나라의 음악이 수입됨으로부터 전래하는 음악과 당나라의 음악이 양립하게 되었다. 당시(唐詩)에 대하여 향가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고, 당약재에 대하여 향약재라고 하게 되듯이, 당악에 대하여 그것과 구분하기 위하여 향악이라 하게 된 것이다, 이같이 당악 대 향악 이름이 사용됨으로부터 정재나 악기의 구분법에 있어서도 당악정재,향악정재 / 당악기, 향악기라고 구분하게 된다. 당악정재는 일종의 가무희이다. 고려시대 당악정재의 특징은 송에서 유행한 대곡의 영향을 받아 규모가 아주 커졌다는 점이다. 당 대에는 대개 독무나 이인무, 삼인무 등이 주류를 이루다가 송 대에 들어서는 수 십명에서 수백명에 이르는 무용수들이 함께 추는 군무형태로 바뀌었다. 또 송에서는 노래와 사문학에 결합된 새로운 공연예술이 완성 되었는데 이러한 송의 가무희가 고려시대의 특성에 맞게 수용되어 뿌리를 내린 것이 곧 당악 정재로 분류되는 가무희이다.②당악곡고려때 당나라의 음악이 들어오게 된 것은 광종 때이다. 즉, 당에 악기와 공인을 청하였고 충숙왕때 까지도 그 자손들이 대대로 그 업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의 음악도 알아볼 길이 없다.;당악의 정재를 출 때 중간중간에 여기(女妓)들이 부르는 노래가 곧 ‘사’이다. 송의 사악은 이처럼 가무희에 고정적으로 편입된 것 외에 독립 된 성악곡도 있다. 구양수,유영,조기,조단례,소식등 중국 송대의 명 문장가들이 지은 사의 명작들도 포함되어 있다. 사악은 대개 ‘만’과 ‘령’이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되어있다. 만은 대개 전단과 후단에 59자 이상의 문자가 들어가고 음악적으로는 16박이 1구가 된다. ‘령’은 ‘만’보다 노래하는 글자 수가 적으며 8박이 1구를 이루고 ‘만’보다 짧다. 령의 1구에는 대개 7자 이내의 가사를 노래하며 박이 들어가는 위치는 에서 보는 것처럼 규칙적이다, 대개 한글가사 한 글자에 음 하나가 붙고 악구에 비해 글자 수가 적을 때는 일정한 방식으로 늘여 부르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다.,; 낙양춘과 보허자의 두 곡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유일무이한 송의 사악이다. 그러나 이 두곡은 원래 노래로 부르던 것이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차 그 가사는 부르지 않게 되고 기악으로만 연주되어 마치 기악곡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한편 낙양춘은 후세로 내려오면서 규칙적인 장단에서 불규칙적인 장단으로 변질되어 현재에 이르고, 보허자는 향악화 되면서 여러 가지 변조방법에 의하여 많은 파생곡이 생겼다.
*정악이란?*정악은 곧 아정하고 고상하며 바르고 큰 음악이라는 말로, 과거 궁중음악의 일부를 포함하여 민간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모든 음악을 지칭하며 속악의 대칭으로 쓰인다. 정악이라는 호칭은 구한말 1909년 ‘조양 구락부’가 발족하면서부터 표면적으로 공칭화 하였다. 정악은 거문고. 가야금, 등 줄로 된 현악기가 중심이 되며. 여기에 관악기를 곁들여 조주하는 형식의 합주를 줄풍류라고 한다. 정악에 속하는 음악을 여러 갈래로 분류해 보면, 먼저 관현악 합주에는 거문고 중심의 음악(줄풍류)과 향피리 중심의 음악이 있고 관악 합주에는 향피리 중심의 음악(대풍류,삼현육각)과 당피리 중심의 음악이 있으며 취타에는 대취타, 취타, 길군악이 있다. 그리고 성악곡으로 가곡, 가사, 시조가 있다.Ⅰ.궁정악1. 제례악의식용 음악이 궁정악 중 제례악은 환구단제(천신제), 종묘대제(왕, 왕후제), 문묘석적제(공자와 그의 제자의 제), 선농제(농사제)...이와에 일월성신제, 산천풍우제, 경모궁제 등이 있으나,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만이 전해진다.① 종묘제례악: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신위가 있는 종묘에서 제사 때 쓰이는 음악의 총칭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등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종묘제례는 역대 제왕과 왕후의 제사를 지내는 왕실의 전통 제례의식이다. 종묘제례악에는 조고와 문덕을 노래한 ‘보태평’과 무공을 칭송하는 ‘정대업’이 있으며 또한 7음으로 되어있는 진찬이란 곡이 있다. 이들 음악은 원래 회례악무에 사용하기 위해 세종때 만들어졌던 악곡이다. 종묘제례악은 종묘의 제향에 연주되는 음악으로 중요무형문화제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례의식에는 각 절차마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여러 음악을 연주하며 동시에 종묘악장(宗廟樂章)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문덕(文德)을 찬양하는 문무(文舞)인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무덕(武德)을 찬양하는 무무(武舞)인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곧 일무(제례의식에 추는 춤)들고 무무(武舞)를 팔일무로 춘다. 진찬(進饌)ㆍ 철변두(徹邊豆)ㆍ송신례(送神禮)에는 아악곡(雅樂曲)을 아뢰고 악장과 일무(佾舞)는 없다.종묘제례악은 장엄하고 웅대한 음악이며 500여 전에 전승되던 고취악(鼓吹樂)과 향악(鄕樂)이 제례악(祭禮樂)으로 승화되어 전승되어온 귀한 음악이다.(신라 향가나 고려 가요가 오늘날 가사만 전하여 지는데 비하여 종묘제례악은 500년 전의 선율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전하고 있어 그 의의가 매우 크다.)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와 함께 2001년에 유네스코지정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② 문묘제례악: 문묘는 문선왕묘의 준 이름으로 공자, 곧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문묘에서는 공자가 주신이지만 그의 제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와 설총, 최치원 등 우리나라에 덕이 높은 분들을 포함해 112명을 제사한다.한국의 문묘제례악은 1116년(예종 11) 하례사(賀禮使)로 중국 송(宋)나라에 갔던 왕자지(王字之)·문공미(文公美)가 돌아오는 길에, 휘종(徽宗)이 보내준 대성아악(大晟雅樂)에서 비롯된다. 이 대성아악은 환구(?丘)·사직(社稷)·태묘(太廟)의 제향과 더불어 문묘제례에 썼다. 그러나 고려 말·조선 전기를 지나는 동안 점차 고식(古式)이 어그러져 제례절차·악기·악장 등이 지극히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졌다.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박연(朴堧)을 중심으로 한 여러 신하가 《주례(周禮)》 《통전(通典)》 《율려신서(律呂新書)》 등 중국의 옛 전적을 참고하여, 아악의 정비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8음(八音)의 구비, 아악보 찬정(撰定), 새로운 아악의 제정 등 옛 주나라 때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산일(散逸)되어 광해군 때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준하여 복구하였으나, 연이은 병자호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그 뒤 여러 차례 아악 복구사업을 펴다가, 영조 때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는 성종 때보다 규모가 축소된 것이며, 이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난 속에 이어진 문묘제례는,27종이다. 경모궁제향에는 6명 일무로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를 추었으나 지금은 추지 않는다.2. 연례악연례악은 궁정아악의 하나로 궁중의 조회나 의식, 연향 등에서 사용되는 악, 가, 무 전체를 말하며, 비교적 소곡들을 따로 연악이라고도 부른다. 연향은 원자탄생, 왕세자책봉, 정초원정, 동지조하, 왕 ? 왕비 ? 왕세자의 생신, 단오절, 추석절 등의 하례나 문전과 전시, 외국 사신의 접빈 등을 말한다. 연례악 곡으로는 [고려사]악지?[증보문헌비고] 등에 200여곡이 전한다. 그런데 당악계통의 사악이었던 낙양춘과 보허자는 기악곡으로 바뀌어 지금 전해지고 있다.이들 음악들은 왕세자의 등가 ? 궁중의 연향 ? 정재의 반주음악 등에 사용되었으며 모두 향악화 되었다. 향악계통의 음악으로는 정읍 ? 여민락 ? 만파정식지곡 ? 영산회상 등이 있다.① 정읍(=수제천): 원래 ‘정읍사’를 노래하던 성악 반주곡이었는데, 지금은 가사 없이 관악기들의 합주곡으로 쓰인다. 전래하는 아악곡 중 아장 오래된 악곡으로 약 1300년전 신라시대에 만들어져 궁중의 연례 및 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각 장단이 불규칙적이고 주된 가락을 담당하는 피리가 한 장단 끝내면 대금, 해금,아쟁, 당적, 등이 이어서 연주하는 연음 형식으로 되었다. 또 이 정읍의 명칭을 빗가락 정읍이라고도 하는데 빗가락이란 의 조명으로 네 번째 남려(南呂)가 기음이 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름의 동동이란 곡이 있는데, 수제천이 빗가락 정읍인데 반해 세가락 정읍이라 불리는 곡이다. 그러므로 정읍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② 여민락: 조선을 세운 이씨 조상들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의 가사 위에 곡을 얹은 음악이다. 즉, 용비어천가 1장,2장,3장,4장 그리고125장의 가사만 관현악 반주에 얹어 노래 부르던 성악곡이었으나, 지금은 기악곡으로만 남아있다. 여민락은 세종대왕이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현재 전하고 있는 여민락에는 관현합주로 이루어진 곡 외에도 역대 행악으로 많이 쓰이던 여민락름이 [고려사],[악학궤범],[증보문헌비고] 등에 전한다. 한편 정재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나눈다. 당악정재는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온 궁중무를 말한다. 지금까지 전해온 당악정재는 포구락뿐이다. 죽간자 2명이 개장과 수장을 앞서 갈라서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행악정재는 한국 전통적인 궁중무를 말한다. 굽혀 엎드렸다 일어나서 춤추다가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른 다음, 다시 춤추다가 굽혀 엎드려 절하고 일어나서 퇴장하는 자유로운 형식을 갖는 것이 향악정재의 특징이다. 다음은 자주 공연되는 몇 가지의 정재이다.처용무(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기원된 향악무),검기무(검무),수연장(고려 성종, 군왕의 장수를 추구하는 내용),포구락(고려 문종, 편을 갈라 춤을 추되 채구를 풍류안에 넣으면 봉화가 삼지화三枝花를 주고 넣지 못할 때는 봉필이 뺨에 점묵 한다.), 헌선도, 향발무, 연화대, 무고, 아박([고려사]악지에는 동동으로 되어있다.), 학무, 몽금척, 첨수무, 춘앵전, 선유무 등이 있다.4. 군례악군례악은 구군악 이라고도 하며 취타악(불로 치는 음악)을 말하며 장수의 개선이나 군중행렬에 쓰였다. 중국 한나라 이래 고취악의 영향과 원나라 제도를 도입하여 썼으며 고취, 취각, 취타 등으로 불린다. 악기의 편성에 따라 대취타, 소취타로 분류한다. 취고수는 대개 타악기 중심으로 편성되고, 세악수는 적, 해금, 피리, 장구 등 취 악기와 선율 악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현재의 대취타는 태평소, 즉 호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정한 음정을 갖지 못한 취악기와 타악기로써 편성된다. 다시 말하면 정조대왕의 능행도에 나오는 전부의 취고수의 악기 편성을 축소한 것이 현재의 대취타의 편성이다. 관현합주로 연주되는 이 취타는 대취타곡을 전체적으로 2도 올려서 변조한 음악이다.① 대취타: 대취타는 그냥 취타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으로 무령지곡 이라고도 한다. (원래 대취타는 궁중에서는 선전관청에 매여 있었고, 오영문 즉 용어령, 훈련원, 어영청, 총융영에도 있었으며 각 지방의 감영에 빠른 노래나 악곡을 좋아한 그 당시 사람들의 취향이 가곡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갈래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는 조선후기 음악양식의 공통된 특징이다. 요컨대. 조선 전기의 만대엽은 17세기에 이르러 하향의 추세를 보이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17세기 전반부터 등장한 중대엽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기에 성행하였다. 그러나 18세기부터 등장한 삭대엽에 밀려서 중대엽은 하향길에 들어섰다. 이러한 역사적 변천과정을 거쳐 삭대엽이 18세기부터는 풍류방의 중심을 차지하였고 그 후 삭대엽의 많은 변주곡이 파생되면서 오늘날의 가곡 한 바탕이 형성되었다.①가곡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고도 한다. 1969년 11월 10일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상류사회에서 애창된 시조 및 가사와 함께 정가(正歌)에 드는 성악곡으로서 판소리·민요·잡가와 같이 하류사회에서 불려진 성악곡과 구별된다. 시조의 시를 5장형식에 얹어서 부르는 가곡은 피리·젓대·가야금·거문고·해금의 관현 반주에 맞추어 불리며, 그 예술성은 시조와 가사에 비하여 아주 뛰어났다.한국의 전통가곡은 명칭상 서양의 작곡기법에 의하여 창작된 가곡과 같으나, 그 음악적 특징은 엄연히 구별된다. 전통가곡은 16박 또는 10박의 장구장단의 반주에 의하여 연주되고,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로 짜여졌으며, 24곡으로 한 바탕을 이루고, 사람의 구분에 따라서 남창가곡·여창가곡·남녀창가곡 등으로 나뉜다.가곡의 기원과 발달은 조선시대의 거문고 악보에 보이는 만대엽(慢大葉)·중대엽(中大葉)·삭대엽(數大葉)에 근원을 두고 있다. 만대엽·중대엽·삭대엽은 모두 현행 가곡처럼 초장·2장·3장·중여음·4장·5장·대여음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만대엽은 가장 느린 곡으로서 조선 초기에 발달되어 중기까지 많이 불리었으나 후기에는 차차 불리지 않게 되었다.한편, 만대엽보다 조금 빠른 중대엽도 18세기경에는 이미 많이 불리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삭대엽이 점차 성행하게 되어 조선 말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