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대외교류신라가 통일 이후 당 및 서역, 일본 등과도 교류했음은 분묘에 부장된 도용과 괘릉의 석인상 같은 이 시기의 각종 유적과 유뮬에서 알 수 있다. 또 산국사기 잡지의 기록은 외국에서 각종 물품을 수입했음을 말해준다.8세기 이후 활발해진 당과의 교류에서 신라는 당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왕경의 시가지 계획은 궁성남면 개념을 수용했고, 방은 16개의 소구로 분할하는 등 당의 장안성을 참고하였다. 당에서 수입한 대료적 물자는 도자기로서 안압지와 황룡사지, 부소산성, 미륵사지, 왕경지구의 건물지, 완도 청해진, 화장묘의 장고기 등 왕경과 지방의 사찰이나 성터에서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었다. 도자기 수입은 9세기대에 집중되어, 이시기 상휴층의 생활용기로 사용된 듯하다.당과의 교류는 사리용기의 형태나 장식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간지를 수용하여 분묘를 12지상으로 장식하거나 시간이나 출생을 알려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등 일상생활에서도 당과의 교류는 영향을 미쳤다. 물질문화에서는 일상용기의 형태나 보상화문, 비조문 등 와전과 토기의 문양에도 교류의 흔적이 나타난다.서역과의 교류는 서역인상의 토용과 양탄자 등의 자료가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신라가 서역과 직접 교류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대립관계에 있던 신라와 일본은 7세기 초부터 사절을 파견하고 교섭을 시작해, 삼국통일 이후 활발히 교류하며 신라 물품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그러한 증거는 일본 정창원에 금동가위, 신라먹, 신라금, 숟가락 등으로 소장되어 있다. 정창원에느 752년 일본에 온 신라인에게 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인들이 매입 예정 품목과 가격을 적어 정부에 제출했던 문서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가 있는데 신라의 문물이 일본에 많이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발해☆ 시대 개관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어 통일신라와 남북국을 이루다가 926년에 멸망했다.그 역사는 선왕의 즉위를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1대 고왕 대조영 : 당나라로부터 탈출하여 동모산에 건국2대 무왕 : 대외정복을 활발히 벌여 영토를 크게 넓힘3대 문왕 : 57년간 재위하면서 내부의 문물제도 마련에 주력.특히 불교의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을 자처하고 황제 용어인 황상이나 조고를 사용.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고구려왕처럼 천손을 자칭했을정도로 국력을 상승시킴.그가 사망한뒤로는 내분이 이어지다가10대 선왕- 왕권을 강화하여 중흥을 맞이함.- 요동방면과 신라반면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사방의 국경선과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이 이때에 마무리됨- 9세기 후반이 되면 당나라 과거시험인 빈공과에서 발해 학생이 신라 학생을 누르고 수석을 차지하는 일이 발생발해사신이 당나라 조정에서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이 벌어지기도 함이런 국력 상승을 발판으로 9세기에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란 영예를 얻음그러나 10세기 초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거란의 침공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멸망 뒤에 일부는 고려에 들어와 한국사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현지에서 거란통치에 저항하면서 부흥국가를 세웠으며 일부는 거란족이나 여진족에 흡수되어 들어갔다. 유민의 활동은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까지 기록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다가 사라지고 만다.☆ 영토와 문화발해 영역은 현재의 만주 동?중부와 연해주 남부, 북한 일대에 걸쳐있었으며, 그 크기는 통일신라의 4~5배, 고구려의 1.5~2배 정도이다.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는 가장 오랜 기간 수도였던 상경을 포함한 5경지역으로서, 그 가운데 함경남도에 있던 남경을 제외하고는 만주지역에 집중되어있다.지배층은 고씨를 비롯하여 고구려계 인물이 주축을 이루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에 가장 활발히 왕래하였고 일본, 신라,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자주 교류하였다. 이에 따라 발해문화에서는 고구려와 말갈 및 당나라의 요소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밖의 지역에서 유입된 것들이나 발해 독자적인 문화요소도 발견된다.상층문화는 초기에 고구려문화가 주축을 이루다가 문물제도가 정비되면서 당나라문화로 변모하는 경행을 보이는데, 특히 지방제도, 도성제도, 무덤양식 등에서 이러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발해는 8세기 전반기까지 고구려식 지방제도를 채택하였으나 당나라 제도를 수용하면서 부주현제로 전환하였다. 건국지는 산성 중심이었으나 그 다음의 도읍지부터는 당나라 수도를 모방하여 평지성 체제가 채택되었다, 또 최상위층의 무덤은 초기에 석실묘 일색이었으나 점차 당나라 양식의 전축묘를 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석실묘인 정혜공주 무덤에서 전축묘인 정효공주 무덤으로의 변화가 이를 잘 반영한다. 정혜공주는 고구려처럼 3년장을 치렀지만 정효공주는 5월장을 치른 차이도 보인다. 그렇지만 와당 문양, 불상 양식, 쪽구들(고대 온돌)과 같은 요소에서는 고구려문화가 후기까지 그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북방의 쪽구들은 북옥저에서 발원하여 고구려를 거쳐 발해로 전해졌고, 이후 여진족-만주족으로 계승되었다.반면에 기층문화는 말갈문화가 중심이 되었다. 토광묘나 말갈식 도기인 통형관이 이 문화를 대표하는데. 발해 중심지보다는 변두리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지방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아래에 수령을 대표로 하는 말갈집단들이 있었으니, 중앙권력은 지방세력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하고 이들 위에 얹혀 있었다. 지방 유적에서 토착 말갈문화가 압도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EH 이것이 발해가 쉽게 무너질 수 있는 한 원인이 되었다.☆ 연구경향과 쟁점발해 연구는 중국, 남북한, 러시아, 일본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영토가 지금의 중국, 북한, 러시아에 걸쳐 있었으므로 고고 발굴과 그 연구는 주로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과 북한에서는 성터나 절터, 무덤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데에 비해서, 러시아에서는 소규모 발굴을 다년간에 걸텨서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택하기 때문에 주거지 발굴에 강점을 지니고있다.발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1933년과 1934년에 상경성(과거의 동경성)에서 실시되었고, 그 후 팔련성, 서고성으로 확대되었다, 그당시의 발굴은 일본연구자들이 주도하였다,. 해방 후에 중국인의 손으로 처음 발굴한 것이 육정산고분군으로서, 이때에 정혜공주 무덤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은 1980년대부터 이루어졌고, 대상 범위도 성터와 무덤에서 절터, 가마터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지역적으로도 5경을 벗어난 지방사회로까지 넓어졌다.러시아 연해주에서는 1958년에 코프이토 절터, 1960년에 아브리코스 절터를 발굴하면서 비롯되었다,. 1970년대 들어 다시 발해 유적에 관심이 모아졌고, 근래에는 크라스키노 성터가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남한 연구자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유적 발굴에 동참함으로써 고고 자료의 일차적 습득도 이루어지고 있다.북한은 1963~65년에 중국과 함께 만주의 발해 유적을 공동으로 발굴하였으나, 역사적 해석의 충돌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1980년대 들어서는 함경도 일대의 유적 조사에 힘을 기울여 다수의 유적을 확인하였으니, 최근의 발해사 인식은 함경도 지역에서 조사된 자료들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한편, 발해는 일본과 외교를 맺어 활발히 왕래하였으므로 이에 관한 기록이 일본에 많이 남아 있다. 또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발해 유적을 조사하였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발해 사신의 활동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때때로 발견되기도 한다.이에 비해서남한의 연구는 문헌연구를 중심으로 가장늦게 출발하여 연구의 축적이 적은 편이다. 아울러 유적 현장에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고고 연구에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고고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발표되기 시작하고 있다.
이때까지 수많은 독후감을 과제로 해봤지만 이러한 『중세유럽의 도시』같은 역사도서로 독후감을 써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평소에 독서를 많이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항상 독후감을 쓰는 도서들은 이야기 형식으로 무언가 교훈을 느끼게 하는 도서로써 내가 느낀 점을 쓰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이 독후감을 쓰려고 계획하면서 이런 지식과 정보를 담은 책으로도 무언가를 알게 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남들이 취미로 읽는 소설조차도 잘 안 읽는 나는 고작 읽는 책이라고는 시험 공부할 때 쓰는 대학교 교재들뿐이다. 게다가 이런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해서만 깊게 나온 책을 읽어본 적이 부끄럽게도 많지 않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세도시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한 장에서 두장으로 다루어진 세계사 책이나 한 단원 정도로 나와 있는 대학교 교재에서 읽은 내용과는 다르게 아주 그 시대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지루하다거나 흥미없지는 않았다. 항상 참고서에 나오듯이 ‘이런 사건으로 인해 이런 결과를 낳았다.’라는 간단명료한 말로는 역사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건의 발생요인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요번에 유럽봉건사회의 형성과 발전이라는 수업에서 중세도시의 발전에 대해서 배우면서 중세도시의 발생과정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에 5가지 선택 교재 중에서 앙리 피렌느의 『중세유럽의 도시』를 선택했다. 이 책은 내가 공부하면서 가지고 있던 의문점을 풀어주고 알고 싶은 상세한 부분에 대해 설명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교재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인터넷을 통해 책과 저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저자인 앙리 피렌느는 1차대전 중의 벨기에 학자로써 대전 중 저항운동가로서 역사서술에 있어서 그것을 경제적인 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또한 세계대전의 주제인 게르만족의 유럽 내의 정치적 헤게모니행사를 막기 위한 학문적 장치로서, 이 같은 경제사적인 면을 강조했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앙리 피렌느는 유럽의 전반에 걸친 역사를 기존의 정치중심의 서술에서 경제중심의 서술로 바꿔 새로운 역사서술을 전개하였다. 또한 중세유럽의 발전과 변동의 중심이 이슬람 세력과 같은 외부세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들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중세유럽에 형성된 도시를 살펴보기 위해 8c, 9c의 중세유럽사회 상업의 쇠퇴와 부활, 도시의 형성이라는 구조에서 설명하였으며, 도시 내의 제도와 도시민들의 기원과 설명, 중세 유럽의 도시가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들을 설명하였다.역사란 서서히 쌓여 움직이기도 하지만 갑자기 변화하기도 하듯이 앙리 피렌느는 중세유럽의 발전과 변동의 원인이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라고 강조하였다. 상업이 쇠퇴하면서 나타난 중세의 크나큰 변화와 그 시대 유럽도시의 변화를 알기위해서는 그 원인인 이슬람의 침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슬람 침공이전의 메로빙 왕조는 이민족이 세운 국가였음에도 지중해적 요소가 남아있었지만, 이슬람세력의 팽창과 동시대에 형성된 카롤링 왕조는 더 이상 그러하지 못하였다. 경제사적인 모습에서 해양 국가였던 메로빙 시대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상업과 교역이 중심인 사회였지만, 샤를마뉴의 카롤링 왕조시대는 외부와의 교역은 있을 수 없는 폐쇄적인 내륙 국가였다. 카롤링 왕조시대는 일부 파피루스, 향료의 수입 등이 있었지만 점차 중단되거나 미비한 것들이었다. 또한 이슬람 세력을 확장해 지중해의 완전장악에 들어갔으며 이와 함께 북해지역에서는 노르만인들의 침공과 약탈로 인해 유럽사회는 완전 고립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의 9c의 모습에서 상업은 존재할 수가 없었으며, 화폐에 있어서도 금화가 점차 사라지고 은화가 유통되었다. 이시기에 상업의 흔적이라고는 포도주, 소금 등의 필수품의 운송, 불법적인 노예무역과 유태인의 중개를 통한 소규모의 거래는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것들은 정규적?정상적인 상업 활동, 항상적?조직적인 교류, 전문적인 상인계층이 수행하는 교역행위 등의 교환경제의 본질들이 사라졌다. 다시 말해 이슬람의 침입으로 상업이 사라졌다고 단언할 수 있다.나는 중세도시의 발생과정에서 상인집단의 형성에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농업중심인 중세사회에서 십자군전쟁을 통해 막혀있던 지중해가 다시 열리면서 해외상업이 다시 활기를 띄어 상업이 부활하였다고 하더라도 기존에 농업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어떻게 전문상인들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궁금했었다. 상업이 유행했던 베니스는 지리적으로는 서유럽에 속했지만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서는 서유럽과는 이질적이었고 이슬람세력에 의해 동방과 교류가 단절되었던 시기에도 비잔틴 령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과 계속해서 교류를 하였기에 베니스에는 활발히 항해활동을 하였던 상인이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업이 미비하였던 유럽내륙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전문상인들이 출현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책에서 나온 성 고드릭의 전기를 통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성 고드릭은 11세기 말경에 링컨셔의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생계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모든 시대의 불행한 자들처럼 그도 해변에서 파도에 떠밀려 온 표류물을 줍는 자였다. 이루 그는 어떤 행운의 표류물로 인해서 행상인이 되어 등에 짐을 지고 도처를 편력하였다. 결국 그는 약간의 자본을 축적했고, 어느 날 편력도중에 만난 일단의 상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그는 이 시장에서 다른 시장으로, 한 정기시장에서 다른 정기시장으로,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편력하였다, 이처럼 직업상인이 된 그는 급속하게 축재하여, 동료들과 조합을 결성하고 그들과 공동으로 상품을 선적하고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 덴마크 ? 플랑드르의 해안을 따라 해상교역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그러한 조합은 아주 번창하였고, 그 조합은 어떤 상품을 선적해서 그 상품이 귀한 지역으로 운송하고, 다시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상품을 선적하여 이런 상품의 수요가 많아서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운송하였다. 몇 년이 지나자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이런 용의주도한 사업으로 고드릭은 큰 부자가 되었다.이 이야기는 어떻게 한 평범한 사람이 부유한 전문상인으로 거듭났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당시 행운과 특히 상황이 그의 재산형성에 크게 작용하였다. 즉, 어떤 행운의 표류물로 인해서 우연히 행상인의 길로 들어섰고, 상인들과의 조합을 통해 크게 성장한 것이다. 여기서 상인 조합을 형성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11세기 사회에는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였기 때문에 개인의 진취성으로는 성공하기엔 부족했고 상인들의 편력생활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래서 협동에 의존하고 집단을 형성해서 방어를 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정기시장과 상설시장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 상인은 법정에서 그의 집단동료들을 자신의 편을 들어줄 증인이나 보증인으로 세웠다. 그리고 자본이 부족해서 혼자서는 많은 상품을 도매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공동으로 다량의 상품을 구입하였다. 한 상인의 신용은 그가 속한 집단의 신용에 의해 높아졌고, 그럼으로써 그는 경쟁에서 쉽게 이겨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여기에서 나는 성 고드릭이 부유해진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상인이 될 수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유럽내륙에 전문상인층이 등장한 시기는 10세기이며 11세기부터 가속되었다. 이 시기 인구증가는 토지의 부족으로 이어져, 토지로부터 유리되고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이 임시취업을 하거나 약탈과 강도짓을 하는 방랑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취직이 되거나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항구나 시장주변으로 가서 하역인부로 일하며 외국어나 여러 지역의 관습과 경제상황을 배우게 되었다. 방랑자들은 수완과 명석함으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으로 물건을 팔면 쉽게 부를 축적하여 신흥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구 증가로 인해서 토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서 상업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유럽내륙에도 전문상인들이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이렇게 보면 영주의 밑에서 힘들게 농노로 사는 것보다는 장원을 빠져나와 상인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상인들에게도 힘든 사정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의 애매한 신분이었다. 「6장-도시의 형성과 부르주아지」를 읽으면서 개인의 신분문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교구에 소재하고 있던 교회법정은 교회법뿐만 아니라 상속문제 ? 신분문제 ? 결혼문제에 관계없이 성직자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문제를 다뤘다. 특히 개인의 신분문제는 더욱 복잡했는데, 도시 형성기에 개개인의 신분은 아주 대조적이고 다양하였다. 상인은 사실상 자유민으로 다뤄졌으나 새로운 일자리를 얻으려고 도시로 몰려든 많은 이주민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거의 인접한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이 도망쳐 나온 장원의 영주들은 쉽게 그들을 발견하고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태어난 촌락의 사람들이 도시로 왔을 때 우연히 그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부모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농민들의 대부분이었던 농노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상인들이 태어났을 때에 신분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를 향유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들은 상인들이 누린 이런 자유를 주장할 수 없었다.따라서 대다수의 직인들은 도시에서도 그들이 탄생할 때의 신분인 농노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의 새로운 사회적 신분과 전통적인 법적 신분 사이에는 분명히 모순이 있었다. 그들이 그런 신분을 감추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영주가 그들이 원래 자기사람이었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그들은 영주를 따라, 도망쳐 나왔던 장원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 소 유- 법정 스님 지음이 책은 35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복원된 불국사에 여유가 없어짐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독서에 대한 내용, 살아가면서 겪는 오해, 흙에 대한 애착 등 각각의 주제로 나뉘어진 이야기들은 간결하고 이해하는데도 무리가 없어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담긴 뜻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곤 하였다. 또한, 『무소유』가 종교인이 썼음에도 종교적 색채가 짙지 않고 일상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고 생각된다.무소유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 법정 스님은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사람들은 무언가를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자신은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가지기를 원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이렇듯 보통 사람들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도 더 많은 것을 바라는데 반하여, 법정스님께서는 단지 자그마한 난초 두 분에도 소유로 인해 나타나는 불안감과 집착을 느끼셨다. 스님께서는 난초를 친구에게 주었을 때야 비로소 소유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듯한 해방감과 홀가분함을 느꼈다고 하셨다. 나 자신도 돈이 생기면 이것을 어떻게 잘 사용할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져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오래 사용할까 고민을 한다. 혹시라도 이 물건이 흠집이라도 나면 짜증이 나고 화가 치솟는다. 왜 가지고 싶은 걸 가졌음에도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 할까? 행복하려고 소유한 것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졌다. 그야말로 사서 고생한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이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모르고 계속 소유하려고만 했던 내가 정말 부끄러웠다.소유는 이렇게 개인적인 고통을 만들기도 하고 더 크게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전쟁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법정스님은 인간의 역사를 소유사처럼 느껴지신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항상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겪었고 발전해 왔음을 볼 수 있다. 개인의 작은 소유욕이 모여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을 보면 소유욕의 엄청난 위력을 느끼며, 만약 사람들이 비록 간단하지만 삶에서 실행하기엔 어려운 무소유를 실천한다면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무소유로부터 시작된다면 거창할 것 같은 세계 평화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이번 학기에 어느 교양수업에서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을 접하게 되어서 이 도서를 더 깊이 알아보려고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라서 두꺼운 명작 도서를 읽을 자신이 없어서 우선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1997년 소피 마르소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였다.‘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이 안나 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레빈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여 끝나는 가하면 책에서도 레빈의 비중이 상당히 많았다. 이것을 보니 교양수업 ‘러시아 명작의 이해’시간에 톨스토이에 대해 배운 것이 생각났다. 톨스토이는 청년 시절 대학을 중퇴하고 시골로 내려가 지주가 되어 농촌 생활에 뛰어들었다. 이 때 그는 농민들의 생활과 농업 기술을 새롭게 개선해 보려 하다가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실패를 맛보게 되었다. 이 시절의 톨스토이는 바로 ‘안나 카레니나’ 속의 레빈의 모습이기도 하다. 레빈도 도시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새로운 농업 기술을 시도해 보지만, 자신의 뜻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또한 톨스토이가 그리 행복하지 않은 가정생활을 하다가 결국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레빈의 결혼 생활에 비유할 수 있다. 레빈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 키치와 힘겹게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에까지 이르지만, 잦은 싸움이 계속되면서 그가 바라던 아름다운 결혼생활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런 점들을 보면 안나 카레니나는 그 당시 톨스토이의 생활과 사상을 알아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안나와 브론스키‘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언뜻 보면 브론스키와의 첫눈에 반한 열정적인 사랑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결말을 비극적으로 만들어 그들의 사랑을 더 안타깝고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결코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무조건 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알렉세이와의 답답하고 의무적인 결혼생활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브론스키와 첫 눈에 반했고 서로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고, 서로 함께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며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들도 현실의 어려가지 문제에 부딪쳐 사랑이 식어갔다. 알렉세이가 처음부터 이혼을 해줬더라도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가고 절망하여 서로에 대해 불만만 쌓여가 결국 서로가 멀어졌을 것이다. 또한 안나가 결혼하기 전에 만났더라도 그들이 영원히 아름답게 사랑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레빈과 키치 부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겨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누구의 반대도 없이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했다. 그리고 레빈이 원하던 데로 시골로 내려가 자식과 함께 꿈꾸던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빈의 환상과는 달리 그들도 역시 작은 이유로 싸우고 다투고 있다.세상에는 영원하고 완벽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고 알렉세이처럼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사랑 없이 의무만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겉보기에 ‘안나 카레니나’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이 현실에 부딪혀 완성되지 못한 브론스키와 안나의 뜨거운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사랑의 결말이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한다는 자체이다. 분명 안나와 브론스키는 자신들의 사랑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안나는 유부녀였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그녀는 이혼을 해야했고 사교계에서는 나쁜 소문이 돌 것이며 브론스키의 어머니도 반대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의 결말을 어떻게든 모드에게 축복받을 만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의 사랑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들은 자신의 사랑이 운명이라고 믿었고 완벽한 결말을 향해 하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는 자체가 너무 행복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안나가 자살한 것은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식어가고 브론스키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레빈은 이런 대사를 한다. “꿈속에서 난 결국 죽을 거란 걸 알면서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사랑을 모른 채 죽는다는 게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이런 공포를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안나 카레니나도 그랬으니까...”레빈도 역시 시골에 내려가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농사 경영에 힘을 쏟으면서도 그는 사랑에 대해 강하게 열망했다. 그는 이대로 삶이 흘러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가 비록 한번 실연을 맛봤지만 아직도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키치 뿐이며, 그가 항상 불안해 하고 완전하지 못하다고 느낀 것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고민 끝에 다시 용기를 내서 자기 인생의 사랑인 키치에게 다가갔다.▲ 알렉세이의 용서를 구하는 안나 사람은 역시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만약에 세상에 아무도 자신을 챙겨주고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들 것인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안나도 가정을 버리고 사랑을 택했지만 그 사랑마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살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식어가는 자신의 사랑을 보면서 절망감에 빠진 안나가 참으로 안쓰럽다. 안나가 말했듯이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을 때 그냥 죽었으면 행복하지 않았을까 한다. 남편인 알렉세이에게 용서를 구했고 또한 알렉세이는 브론스키를 용서하면서 그녀가 안도감을 가지고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죽었다면 행복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과 남편의 이혼거부에 힘들어 하면서 브론스키와는 절대 행복하게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녀가 브론스키를 그저 잠깐의 사랑이라고 잊고 예전처럼 그대로 살았더라면 그녀는 행복하게 인생을 보낼 수 있었을까? 그녀는 항상 그녀의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고상하고 답답한 사람들에게 갇혀 살고 있었다. 그런 생활에서 브론스키는 하나의 희망이었다. 어쩌면 안나와 브론스키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어두운 결말을 가지고 있는 불타는 사랑을 하리라는 안나의 운명인 것이다.시대상황을 보면 여자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힘든 시대라는 걸 알 수 있다. 유부녀와 청년의 사랑은 남자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훈장처럼 자랑 거리가 된다. 여러 여자를 사로잡는 청년은 매력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더욱 인기가 높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사교계에 몸 담고 있는 안나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실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안나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냥 그런 말 많은 사교계는 신▲ 남편 알렉세이와 안나경쓰지 않고 이혼한 후 시골에 내려와 살았으면 좋으련만 그의 남편 알렉세이는 안나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세료자를 차지하려 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이혼을 거부하는 등의 장애물을 안나에게 안겨준다. 그저 안나와 함께 있으면 되는 브론스키와는 달리 안나는 이렇게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요즘 사회와 비교해보게 된다. 소설에서 보면 연애는 얼굴보고 할지 몰라도 결국 결혼은 조건을 보고 해야 한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싶다. 예전에는 어른들만 그런 얘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요즘 젊은 층도 연애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하고 할지라도 결혼은 사랑이 없어도 조건을 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여러 가지 사랑에 대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건을 보고 결혼한 안나는 결코 행복해 하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갈구했고, 레빈도 자신이 사랑하는 키치와 결혼 했지만 잦은 다툼이 있어 완벽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였다. 안나가 진정한 자신의 사랑을 선택하는 데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으며 결국은 현실에 부딪혀 식어가고 만다. ‘안나 카레니나’를 보면 어떤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정확히 확신할 수가 없다.레빈은 마지막에 안나를 잃은 슬픔에 젖은 브론스키가 전쟁터에 나갈 때 기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반복했어요. 나는 누군가? 왜 여기 있으며 무엇 때문에 사는가? 갑자기, 그런 건 날 때부터 아는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엔 그렇게 생각 안 했거든요. 옳은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는 것도 누가 가르쳐줘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알아낸 건 없어요. 알고 있던 걸 새롭게 보는 거죠.”우리는 분명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태어난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태어날 때부터 알고 태어나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어떤 식으로 사랑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 지는 사랑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품고 새롭게 찾아보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