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의 배경1) 일본 사회의 우경화2) 자유주의 사관2.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의 실태1) 임나일본부설2) 일본의 식민지 정책3.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의 시사점Ⅲ. 결론* 참고 문헌 *Ⅰ. 서론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과의 과거사 청산 등 한일 관계는 여러 면에서 얽혀있다. 특히 일본 역사 교과서의 한국사 서술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의 사회에서 일본이 한국보다 국제적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제적 우위 속에서 일본은 역사 교과서 편찬에 있어 한국사 서술부분에 많은 왜곡을 가했다. 역사 교과서 왜곡의 문제는 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그 파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양국의 적대감을 더욱더 증폭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역사 교과서 왜곡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의 배경과 실태 그리고 그것이 주는 시사점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의 배경1)일본사회의 우경화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의 배경은 일본사회의 우경화를 그 출발점으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는 전반적으로 급속한 우경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 우익세력들은 ‘이제야 말로 일본 국가 및 일본 국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때’ 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무엇보다 자국중심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고가 강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또한 일본은 교육기본법을 개정하기 위해, 2004년 6월 초당파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신교육기본법’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전통과 문화의 존중, 애국심 함양, 도덕성 육성이다. 교육기본법이 개정되면 구체적으로 나타날 변화로는 국가 및 국익 중심의 교육과 애국심 강조, 교육내용에 대한 교육행정과 국가권력의 개입, 현직 교직원에 대한 관리와 통제 강화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우익세력들은 일본이 저지른 과거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거나 미을 요구한 것이다.더불어 이러한 일본의 우경화가 정당이나 국민여론 차원에서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일본의 경제적 불황이 큰 몫을 차지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사회적, 개인적 불안이 민족주의와 뒤섞여 맹목적 애국심으로 단순화 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2)자유주의 사관자유주의 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데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고, 이 다양한 관점을 억누르지 말고 공개적으로 토론해 보자는 논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다른 나라도 흔히 있었던 일로 일본만 지나치게 가혹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불만에서 ‘그런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역사교과서에서 관련 서술을 빼야 한다는 논리로 옮아간다. 후지오카는 세계의 군대가 ‘위안부’나 그 부류인 제도를 갖고 있는데, 일본인만 음란하고 어리석은 국민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인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며,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일본의 ‘국익’의 중요한 일부라 하고, 일본군 ‘위안부’ 난징대학살을 비롯한 가해 사실을 ‘반일적, 자학적, 암흑적’이라고 비판하며, “교과서에서 삭제하라”고 주장하였다.)2.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의 실태)1)임나일본부설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서술 부분...조선 반도의 가야 여러 나라와 깊은 관계를 가졌으며 백제와도 손을 잡아 여러차례 신라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했다. 야마토 정권의 왕은 5세기경에는 대왕이라 불리며 중구그이 남조에 사자를 보내 조선반도의 남부에 대한 지위를 얻고자 했다.조선반도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가라라 불리는 몇 개의 소국이 있어, 왜와 왕래가 잦았다. 가라의 소국들에 신라가 세력을 뻗었을 때 백제는 왜의 세력과 연합하여 신라와 싸우기도 하였다.... 조선 중국과의 외교는 대왕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대왕은 중국의 황제에게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왜왕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 대륙의 앞선 문화도 야마토 정권이 우선 도입하게 되었다. 야마토 왕권은 가라(임나)와 연계를 돈독히 했으며, 또한 백제와 연합소국이 분립하여 있던 가라(임나)지방의 구가들과 연합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여 싸웠다. ...5세기에 야마토 국가의 대왕은 왜왕으로서의 지위와 조선남부를 군사적으로 지위 할 권리를 중국의 황제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중국의 남조로 여러번 사자를 보냈다....고대 한일 관계사 중에서 최대의 쟁점이 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 문제이다. 임나일본부설의 골격은 4세기 후반에 일본 조정이 한반도 남부에 출병하여 백제, 신라, 가야를 복속 시켰는데 특히 가야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직할기관을 설치하여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에서의 활동을 계속 하였다는 것이다. 근대 일본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로 취해진 대표적인 왜곡역사상이다.일본측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 근거는 [일본서기]에 바탕을 두고 있고, [광개토대왕비문]을 야마토 정권의 임나 지배를 부동의 출발점으로 하고 [송서] 왜인전을 제삼국 사료로써 중시하였다.임나일본부라는 말은 일본서기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고사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이나 중국의 당시 기록에서도 왜가 조선 남부를 지배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우선, [일본서기]는 7세기 중엽에 확립된 천황의 권위와 천황기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서 일본학계 내에서도 그 신빙성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비판이 제기 되고 있다. 대체로 5세기 이전의 기록은 신화적인 전설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일본부’란 용어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일본’ 이란 국호는 7세기말경에 비로소 나타난다.한편 414년 장수왕에 의해서 압록강 중류유역의 통구에 세워진 광개토왕비에는 영락10년(400)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서 왜를 추격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당시 왜가 임나가라를 거점으로 한반도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결과 광개토대왕비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비문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이를 어떻게 읽은 것인가? 라는 학계에 다양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은 앞으로 검토되출몰하여 노략질함으로써 한반도의 고대 왕국 세력과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처럼 일본이 한반도 남부지역을 무력 점령하고 이를 위한 통치기구가 설치되어 오랫동안 지배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이밖에도 임나일본부설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첫째, 약 200년간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면 한국 측 기록에 조그만 단서라도 남겨져 있을 터인데 그러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왜왕의 가야 지배를 입증 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셋째, 당시 일본열도는 통일정권이 형성되지 못한 채 여러 소국의 분립상태에 놓여 있었으므로 바다를 건너 식민지를 경영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의문이며,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가야는 왜보다 약 반세기 앞선 선진문화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왜의 가야지배가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또한 임나일본부를 유지하려면 대병력의 동원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나룻배를 타고 어찌 수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겠는가도 의문으로 제기되고 있다.2)일본의 식민지 정책일본 교과서의 한국사 서술 부분일본은 총감부를 조선총독부라 하고 토지 조사를 강행했다. 그로 인해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하거나 어쩔 수 없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치도록 강제하여 조선민족으로서의 자각을 없애고 일본으로 동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일본인은 조선인들을 식민지 민족으로서 차별하였다.병합 후 일본은 한성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각지에 일본군을 두고 경찰을 지배하에 넣고 식민지를 진행시켰다. 우선 토지제도를 고쳤는데 그때는 국가와 극히 소수의 지주에게만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농민은 경작할 땅을 잃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일본과 만주로 이주했다. 그 뒤 일중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 총독부는 조선 사람들을 일본에 동화시키고자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고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했으며 신사참배를 의무지웠다. 이러한 황민화 정책은 조면에서도 일본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던 조선 사람들은 이러한 동화정책에 깊은 분노를 가졌다.1910년 8월 29일 한국은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식민지 정책으로 무단 통치를 전개하였으며 이것을 동화교육 이라는 미명하에 한국인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나아가 민족문화를 말살시켜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려는 교육정책을 실시했고 식민지 경제체제를 확립하는 방법의 하나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토지를 약탈했다.3.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전환하였지만 이것은 더욱 식민지화를 강화하는 정책이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서술은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일본 교과서는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배와 침략성을 언급하였다. 하지만 간단하게 비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 진실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무단통치에 대한 내용 중 토지조사 사업에 의한 토지수탈 또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토지조사 사업은 근대적 토지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효율적인 토지약탈과 식민지 지배를 위해 확립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분명히 서술해야 한다. 이 밖에도 우리 나라 산업침탈은 대부분의 교과서가 다루지 않고 있다.3.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의 시사점교과서 왜곡 문제는 교육을 국가가 관리하는 운동의 일익으로 나서서 국가주의 운동 전체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이에 대응함에 있어서도 전체적인 시야 속에서 주시하며 대응해 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일본 국가 내부의 문제만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라는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교과서 운동역시 국가를 초월한 양심적인 세력들의 연대 활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는 일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이 호전적이며, 천황 중심의 역사관을 갖고 자국 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과거 청산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날이 갈수록 두 나라는 계속 적대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