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문화 운동사 레포트한국 토착교회의 형성사 연구 paper역사학은 현재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과거에서 찾으려는 과학적 시도이다. 현재는 과거에 물어야 하고 과거는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한 역사학에 바탕을 둔교회사는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한국교회가안고 있는 문제점과 관심에서 과거의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다.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자면 한국 기독교 전통은 서구 기독교 역사와 신학이 보유한 보편적 가치와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한국의 정치, 문화, 종교 전통 속에 뿌리를 둔 민족적 가치와 이념을 가지고 있다. 복음의 수용과 해석의 주역이었던 개종 1세대들은 기독교 역사나 문화보다는 한국의 토착종교와 문화에 보다 익숙하였고 그런 배경에서 복음을 해석할 때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기독교는 서구 기독교 전통 및 한국의 전통종교와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제3의' 전통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신앙과 신학의 뿌리를 규명하려면 한국교회의 '초기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한국교회사를 보는 사관으로서 여기서는 "토착교회사관"을 제시한다. 토착교회사관은 기존의 한국교회사 사관과 '연결되면서도·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 토착사관은 몇 가지 점에서 기존 교회사관과 공통된 점을 가지고 있다.첫째, 토착교회사관은 교회의 역사를 복음의 선교역사로 본다는 점에서 '선교사관'과 일치한다. 둘째, 토착교회사관은 복음의 수용-해석-적용 과정이 신앙의 내면적 형성과 그 외향적 표현이라는 점, 그리고 복음의 구체적 적용대상이 '민족상황'이라는 점에서 '민족교회사관'과 일치한다. 복음이 선교의 내용이라면 민족은 선교의 현장이다. 따라서 복음은 민족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셋째, 토착교회사관은 복음의 사회 개혁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기독교 복음의 관점에서 불의하고 왜곡된 가치관과 사회구조에 저항하는 기독교의 역사에 관심을 둔다. 이 점에서 민중교회사관과 일치한다.이 토착교회사관은 민족-교회-복음으로 이루어지는 삼각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 모든 사실에 관심을 두지만 특히 다음 세 가지 점에 관심을 둔다.첫째, 토착교회 사관은 토착교회 형성과 발전에 관심을 갖는다. 여기에서 토착교회란 한국이라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교회를 의미한다. 토착교회는 토착전통과의 관계를 단절, 배척의 개념이 아니라 연결, 완성의 개념으로 정립한다. 토착교회는 한국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이며 그것을 통해 세계 기독교 역사에 참여하는 교회이다. 둘째, 토착교회사관은 토착신앙의 형성과 발전에 관심을 둔다. 셋째, 토착교회사관은 한국교회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관심을 둔다. 토착교회사관은 과거교회 역사 속에서 토착화작업의 흔적과 결과물을 찾아서 그것이 한국교회에 어떻게 계승, 발전, 변형되었는지 추적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 한국교회 신앙 및 신학의 연원을 규명해냄으로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정체성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를 읽고작년인 2007년도는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Again 1907년"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기독교에 많은 집회와 행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한국교회의 부흥을 부르짖는 장이 펼쳐졌었다. 하지만 역사의 소견이 짧은 나로서는 1907년 일제 강점기때 평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 졌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오늘날 기독교에 어떤 의미가 있어 Again 1907년을 외치는지 궁금하였다. 물론 평양은 과거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부흥이 대단 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 왔었지만 정확한 역사적 배경이 궁금하던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 내용은 33개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서술해져 있는데 에피소드 한편 한편마다 가슴 뭉클한 한국의 사도행전을 읽는 감동으로 채워져 나갔다.선조들의 신앙이 어떤 의미로, 어떤 상황 속에서 복음을 받아 들였는지 또한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말씀을 실천했는지는 하나하나 나에게는 충격의 감동으로 다가 왔다. 특히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 선생의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민족을 위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서신에서 사도바울의 모습을 보았을때는 가슴이 뭉클 하였다.조상들의 신앙의 위대함은 말씀의 순종에서 나오는 실천이었다. "거듭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화두는 부흥운동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중생과 성결의 체험을 한 토착 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문제라고 한다. 어떤 분은 "처음에 성경을 외우려고 애를 썼으나 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절을 외운 다음 이웃을 찾아가 그 말씀대로 그에게 실천했습니다. 그랬더니 외워지는 것이었습니다."고 고백하는 내용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 졌다.요즘 통계들을 보면 세계최대 종교는 이슬람교가 되었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25%까지 가던 개신교 인구가 17.5% 정도 가 된다는 이야기를 보았을 때 왜 복음의 파워가 점점 약해지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왜 사회가 교회에 등을 돌리는지에 대한 해답은 조상들처럼 실천하는 믿음이 없기에 이런 일이 벌어 지지 않나 싶다. 확실히 느낀 건 믿음은 역시나 행동 이었다. 선조들의 신앙의 유산이 귀하기만 하다.
신명기적 역사신명기적 역사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부터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될 때까지의 역사(여호수아로,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까지 이르는 명칭)이중편집설(크로스)>편집자 dtr1(제일 신명기역사가)은 당시 사람들에게 요시야가 재시행하려고 했던 모세 계약에 순종하도록 격려했고 이를 통해서 다윗 왕국을 복원시키기 위해 시도한 것으로 여겨졌다. dtr2는 포로기 때의 인물로 포로의 책임을 므낫세에게로 돌린 인물이었다.여호수아서1-12장: 가나안 정복(여리고, 아이성 정복)13-22장: 가나안 땅의 분배(지파 평등주의)23장: 고별 설교, 24장: 세겜 언약주제: 율법(말씀)에 대한 순종(땅: 하나님의 선물)*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모델들1. 이주모델: 가나안땅으로 이사, 평화로운 정착 과정2. 정복모델: 이스라엘 민족이 군대를 이끌고 와 정복3. 혁명모델: 내부적인 정치적 소요와 사회적인 혁명의 결과(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불만)사사기주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우상을 섬기고 배교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주위의 다른 민족 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셔서 그들을 억압하였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 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 백 성들을 구원하였다.가장 훌륭한 리더십을 보인 사사는?사무엘상하여기에서 다루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바뀌는 시점주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계신다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지도자들이 피해야 할 것(교만, 사리사욕, 우상숭배)다윗왕을 통해서 인과응보사울이 왕 되는 과정: 기름부음->제비뽑기->전쟁승리열왕기상하다윗왕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시기로부터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유다에서의 가정 선한 왕과 가장 악한 왕: 요시야 / 므낫세요시야: 율법책에 따라 종교개혁을 성취시킨 왕1. 우상 철폐: 야웨 순수화 신앙2. 지방산당철폐- 야웨신앙의 중앙화3. 유월절 준수4. 잃어버린 영토 회복(북왕국의 땅)북왕국 악한 왕: 여로보암 (우상숭배의 절정은 아합과 아세벨의 행동)역대기적 역사역대기적 역사란 포로기 이후 시대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도록 권고했다.(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제2성전시대에 기록주제>1. 성전 예배를 강조2. 족보를 통하여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3. 안식일 할례,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3. 성문서(KETUBIM)히브리어 성서의 전통>시가서: 시편, 아가, 예레미야애가지혜서: 욥기, 잠언, 전도서역사서: 룻기,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묵시서: 다니엘시편(5권 150편)탄식시: 전체의 3분의 2감사시제의시: 토라시(1편, 19편, 119편), 지혜시, 성전입장시, 언약갱신시욥기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이러한 질문에 대해 욥의 세 친구들은 신앙적 인과응보 사상(신명기 신학)에 근거하여 답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누구나 다 죄가 있고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BUT 인과응보 사상만이 고난에 대한 유일무이한 해석이 될 수 없다.★전통적인 해석. D.CLINES: 인간의 좁은 생각이나 경험을 토대로 나온 신학으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활동을 가둬두지 말자잠언: 성공 지향적, 현실 안주적(역사의식, 구원, 계시 언급X)전도서허무주의를 느끼게 되는 상황들 속에서도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매일의 삶에서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며 인생을 즐길 수 있다.다니엘다니엘서는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과 함께 묵시문학으로 분류된다★묵시문학: 박해와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말 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신앙을 유지하도록 격려한다.다섯권의 축제 두루마리(메길롯)룻기>오순절, hesed(칠칠절=맥추절)=loyalty, constancy, baruk: 나누어 풍성해짐아가>유월절, 남녀상열지사: 남녀간에 느끼게 되는 이성적인 사랑의 감정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선한 것이라는 점이다.전도서>초막절, 긍정을 위한 부정, 허무주의와 인생무상을 느끼게 되는 상황들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매일의 삶에서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며 인생을 즐기며 살자예레미야애가>아브월 9일,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멸망했을 때 쓴.에스더>부림절, 하나님언급x, 자기 백성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방관하지 않으시고 가장 적합한 때에 합당한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신학>유대인은 누구나 페르시아의 왕후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훌륭한 유대인이 되어 민족 을 구할 수 있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다. 본서는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이방인들의 박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예언서★예언: 미래를 예고한다는 뜻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공개적으로 선포한 말씀★예언자: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늘의 결정을 지상에 전달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전기 예언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후기 예언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예언서3예언서1, 이사야>중심주제-오직 여호와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거룩하다, 겸손1-39장을 구성하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은 시리아-에브라임 위기와 앗수르의 산헤립이 침공이 있다시리아-에브라임 위기를 당한 아하스 왕(불신앙의 예)에게 이사야는 앗수르에게 원군을 요청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표적을 주었다: 임마누엘 그러나 유다는 결국 앗수르에게 지원을 요철하였고 유다는 조공국가로 전락->반역을 한 유다를 침공-> 예루살렘 포위 공격
예전부터 나는 구약에서 나오는 예언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등등 상당히 궁금한 것이 많았다. 혼란과 격동의 시기에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갖고 예언의 삶을 하며 하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한 그들의 삶을 우리는 사모한다. 성서 속의 예언자를 흠모하는 것은 칭찬 들을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의 예언자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운명을 살았는지부터 잘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살아서는 수모와 배척을 당하고 오랜 후 혹은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명예와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은 그런 존재들이다. 예언자들의 예언서는 그들이 남긴 말과 그들에 관한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어떤 필요에 의하여 문서 속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성서 어느 곳에 등장하든지 예언자의 말이나 그에 관한 일화란 결코 생생한 현장 중계방송도 아니고 당대의 기록도 아니다. 모두 사건이 발생한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예언자의 말을 두고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다시금 생각해볼 시간이 충분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이 선포된 후 그동안 역사 속의 사건들이 예언대로 이루어져서 어떤 말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떤 말이 인간의 욕심에 따라 전해진 거짓말인지를 판가름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다. 예언자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보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련의 검증 과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예언자가 남긴 말의 성취여부이다.이런 정황을 두고 미루어 생각건대 예언자 한 개인을 온 사회가 전폭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일이 그렇게 용이한 일도 아니고 상당히 시간이 요구되는 일이었음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아무라도 예언한다고 해서 그 말을 다 믿지 않았거니와 예언자로 모두가 존경을 받은 것도 아닌 것이다. 먼저 그 말의 진실성 여부가 가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은 배척과 불신의 이야기가 없이 마치 존경일변도의 위상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예언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일심히 신앙으로 살아가려는 신앙인 모두에게 요구된다. 우리 모두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제일 먼저 가져야 할 자세는 이런 수난의 삶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는 일이다.예언자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언자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두 가지가 요청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비추심이다. 또 하나는 성서의 묵상을 통해 발견한 진리를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봄으로써 얻어지는 통찰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오늘의 현실이 만족스럽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결코 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는 시대정신과 풍토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예민하게 분석하고 그 문제가 어디에서 생성하고 해법은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자신의 인격적 삶의 성숙도에 따라 인격적인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이다.원래 예언자란 뜻은 앞에서, 대신하여, 먼저 말하는 자 이다. 구약시대에는 신의 뜻을 중재하는 전문인들로서 예언자와 제사장 외에도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주류사회에서 공인받는 존재라기보다는 사회의 변두리에서 음성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이사야 시기에도 변두리에서 활동한 신탁전문가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도리는 오직 살아계신 야웨 하나님에게 물어보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공인하고 있는 예언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상황의 궁극적인 해법이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라고 못박고 있다. 이렇듯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그의 중심부에 공인받은 신탁전문가와 공인받지는 못하였지만 변두리에서 음성적으로 신탁을 분별하여주는 전문가들이 함께 공존했다.그럼 이사야 같은 예언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일까?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일이 토라의 기준에서 비추어 볼 때 잘못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기로 작정한 심판의 소식을 전하거나 또는 정반대로 토라의 기준에서 볼 때 억압당하고 고통로 임명받은 자이다. 여기서 회의의 주된 목적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땅의 일을 다스리는 일이다.그럼 예언은 무엇인가? 예언이란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말씀이다. 그 사람이 성서적 진리와 정의에 입각하여 참된 평화에 이르도록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의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라고 부르는 네 개의 두루마리, 즉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와 후기 예언서라고 부르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예언서를 담은 네 개의 두루마리를 총칭한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예언서란 한 권의 긴 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언서들의 모음집을 일컬으므로 차라리 예언문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예언자들이 경제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그것이 신앙에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영향을 주는 측면을 지적하기 시작하는 것은 사무엘 시절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하고 왕정 정치제도를 추구하자는 여론에 맞서 왕정 시스템의 폐단을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나라의 사회의 근원적 문제점을 야웨 신앙의 빛에서 재해석하고 맹활약을 한 예언자들이다. 그들은 백성 다수의 삶이 피폐해진 이유를 두말하지 않고 지도층이 추진한 정치 경제의 부조리한 역학 구조 안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모든 현실의 참된 해법을 야웨 신앙의 회복이라고 역설했다.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현상을 일으킨 밑바탕에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적인 영농여건과 방식 그리고 토지소유권의 활용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며 정착에 성공한 이스라엘 자영농을 생존 위기로 몰아붙이게 만든 주요 원인은 왕정 정치와 함께 시작된 토지 소유권의 변화이다. 지파 사회 시절에 자급자족을 위해 영농하던 농가는 이제 국가의 요구와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위기집중을 하고 그로 인해 수확 감소 혹은 실패를 감수하고라도 집약농업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엘리야와 엘리사 시절의 정치와 경제는 한마디로 백성의 안녕과 복지는 온데간데말의 깊은 의미가 퇴색해버린 오늘의 현실 때문에 발생한다. 바알신앙은 고대 가나안의 농경문화 속에서 출산과 생산을 보장해준다는 신앙이었다. 바알 신앙을 따른다는 것은 이 땅에서 다산과 부요함의 축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의미다. 하지만 야웨 신앙은 너와 내가 함께 잘 되기 위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하는 세계관을 가르친다. 이익보다 인간을 우선시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성서 속 신앙공동체는 물론이고 오늘의 한국 교회 대부분은 두 가지 신앙이 이토록 판이하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각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축복과 출세를 지향하는 바알 신앙에 깊이 젖어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참된 야웨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익이 아니라 인간이 우선시 되는 그런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무시되는 온갖 현실에 맞서서 교회의 강단은 피 흘리도록 투쟁해야 한다.기원전 8세기 중반 경에 남 유다 드고아의 목자 출신으로서 북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 활동을 한 아모스의 신탁들은 아모스서에 담겨있다. 아모스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기원전 7세기의 남 유다 왕 히스기야나 요시야의 궁전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예배 강화를 위해 아모스가 보여준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기록하기 시작한 예언서이다.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혀와 수십 년을 바벨론에서 살아온 포로민에게 아모스서는 세 가지 해석 지평을 제공한다. 아모스서의 말씀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가지 해석 차원을 가진다는 사실은 다른 모든 예언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 원리는 오늘을 사는 신앙공동체에도 마찬가지 원리로 적용될 수 있다.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그저 옛 일을 그리워하고 향수에 젖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해석을 동반한다.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가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약자를 위해 존립해야 한다. 아모스는 한국의력에 편승하여 살아왔던 과거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 죽음의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한국 사회에 올바른 기독교 정신의 정착을 위해 정의로운 하나님, 정의로운 교회를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일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와 성도는 성서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가꾸고 참다운 예배의 지평을 넓히면서 삶으로 예언자의 권위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거룩한 하나님의 계시와 다시 오실 메시야의 성서적 근거를 찾아서 우리 모두가 즐겁게 읽는 구약성서의 예언서는 일종의 정치문서이다. 그렇다면 예언서가 갖고 있는 이 정치적 성격에 시각을 열고 그것을 시인하는 일이 신앙에 무슨 유익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 유익은 오늘날 한국의 신앙공동체에서 말할 수 없이 크고 중요하다. 정치는 우리 모두의 삶과 관련이 있다. 정치란 바로 힘의 사용과 관련이 깊다. 힘은 모든 사람들이 영의하는 삶의 제 영역에서 불가분의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로 힘을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의 답은 신약성서에서 읽을 수 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던 때이다. 베드로가 로마군병에게 칼을 휘두르자 그를 꾸짖으며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말하셨다. 힘 사용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신앙인이 가진 힘이 있다면 오직 사회 정치 경제적 신앙적 약자의 삶을 세워주고 그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불어 넣는 일에 전부를 쏟아 부어야 한다. 그것이 힘을 기르지만 그 힘을 버리는 참된 신앙의 모습이다.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크고 작은 공동체가 존립하는 곳이면 언제나 활동하였다. 어느 시절에도 예언자는 활동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민족은 이런 예언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시절을 경험하게 되었다. 구약 성서에 글로 남겨진 이 시대의 예언서들을 보면다.
구약 이해 레포트(새로운 눈으로 보는 성서)1. 성서는 과연 진리인가?우리는 어릴 적 교회를 다녔을 때 성서란 인생의 의미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관해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내려주신 지침서라고 가르침을 받아 왔다.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에도 복음서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복음서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상이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은 복음사가들이 서로 다른 표현 방법을 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서 공부를 열심히 하던 어느 날 별안간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공생활기의 순서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모순점은 성서기자들의 기억력 차이라고 해명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신앙의 위기는 어린 시절의 그 성탄 선물이 북극에서 살고 있는 뚱뚱한 산타 할아버지가 보낸 것이 아니라 친척 어른들이 사 보낸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받았던 그 충격만큼 깊은 상처를 주었다.복음서의 진술을 비교하다 보면 많은 점들이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복음서들의 진술이 서로 다른 까닭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건 자체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 ? 사실적으로 진술한 것이 아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사실적인 진술로 이해하여 읽게 될 경우 복음서들간의 내용이 맞지 않는 문제에 대한 막연한 미련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를 그냥 외면하고 지나친다면 각 복음서의 구체적인 성격과 특성을 무시하게 될 뿐만 아니라 복음사가의 본래 의도 또한 놓치고 말 것이다.네 복음서는 한 덩어리로 통합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각 복음서의 메시지에는 일관성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들을 통합해보려는 시도 대신에 각 복음서들의 다양성에 관심을 모아보려 한다. 각 복음사가들의 복음 집필 목적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전기를 남기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표로 삼을던 메시지를 알아들으려면 우리 자신도 각 복음서의 독자적인 이야기 세계에 빠져 들어가야 하며, 복음사가가 창조해낸 독특한 세계를 체험해야 할 것이다. 이 복음서와 저 복음서를 대조해가며, 즉 이 이야기 세계와 저 이야기 세계를 넘나들며 그 안에 숨겨진 역사적 사실들을 캐내려 한다면 그것은 복음서의 본질을 왜곡하고 그 본성을 거스르는 결과가 된다. 우리가 각 복음사가의 증언을 알아 듣기 위해서는 한 복음서가 전하는 증언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복음서의 전혀 다른 이야기 세계로 뛰어들어 해답을 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 복음서의 고유한 이야기 세계 안에서 그 증언의 의미를 발굴해내야만 한다.성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필경 예수 탄생 사화일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매년 재연되고 있는 성탄 사화는 성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였다고 인정되는 마르코복음서는 예수 탄생에 전혀 언급이 없다. 그리고 가장 늦게 쓰인 요한복음에도 동정녀 잉태라든가 구유, 목동들, 동방박사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단지 마태오와 루가복음만이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두 복음서의 이야기도 그 내용이 서로 전혀 다르다. 이 두 복음서의 탄생 사화를 서로 꿰맞추어야만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탄이야기가 구성된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정말 문자 그대로 성서를 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성서가 실제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본다면, 서로 모순된 두 가지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래 복음들이 쓰일 당시에는 자기들이 쓴 복음서가 신약성서의 일부가 되리라는 예상은 하지 않고 썼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각자는 이해와 관심이 서로 다른 민족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미를 증언하려고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를 혼솔로 짠 통옷으로 생각하고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했던 많은 독자들은 지금까지 이 책에서 밝힌 사실들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성서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요인이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서구 문명이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티나의 문명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사가들이 21세기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에겐 이러저러한 뜻으로 들리는 말씀이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이런 내용들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성서의 성격과 목적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고, 새롭게 읽는 방법을 배울 준비가 되었다. 성서 말씀이 본래 의도한 바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알려진 통설대로 생각하지 말고 세부적인 사항에 까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항상 다른 이들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을 함께 연구하며 우리가 얻은 결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항상 마음을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성서기자들이 사건을 기록하는 데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기록한 사건 중에 어느 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복음사가들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역사적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일탈했느냐는 문제이다.많은 이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진실과 사실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읽으면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니면서도 진실일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면 성서 문학을 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은 역사적인 사실성이나 정확성은 없지만 모두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나 나사렛 예수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하여 전달하는 일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역사적 보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메시지로그렇게 함으로써 말씀에 살이 붙고 초월성이 극복되어 이천년 전 예수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깨닫게 된다.2. 성서의 탄생 과정일단 복음서들 간의 상이성을 자각하고 나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상이성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그 상이성이 서로 다른 책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책 안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상반된 진술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한두 장 건너 발견되기도 하고 때로는 불과 한두절 건너 발견되기도 한다. 성서는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여러 권의 책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리나 각각의 낱권 안에도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상반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어떻게 한 책 안에서 이러한 상이성이 생기게 되었을까? 그 해답을 알게 되면 성서의 형성과정을 재현해내는 길이 열릴 것이다.성서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한 상이한 진술들이 수록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즉 7일간의 창조 이야기와 에덴동산 이야기는 상호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다른 이야기의 역사성은 자동적으로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늘 성서를 읽는 이들도 바로 성서의 첫머리 창세기 1장과 2장에 창조에 관한 전혀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있음을 간과하기가 쉽다. 우리는 창조 이야기가 우주와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창세기의 기자들은 과학적 의미에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진술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세계’가 있었다. 창조 이야기가 지구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고대인들의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들임을 알고 나면, 성서의 초기 필사본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다.그렇다면 누가 성서를 쓰기 시작했을까? 성서는 곡물 생산에 의존하던 나일 강 유역(이집트)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메소포타미아) 같은 인구가 밀설을 개발해낸 학자들은 모세 오경이 한 시대에 한꺼번에 모세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4백여 년의 기간을 두고 최소한 네 단계에 걸쳐 쓰인 것임을 밝혀냈다. 그들은 이 네 단계들을 각각 J. E. D. P.라 이름 붙였다(J는 야휘스트 전승, E는 엘로히스트 전승, D는 신명기계 전승, P는 제관계 전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서의 중요한 일부가 가필의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그 형태를 갖추게 되는 모습은 성서의 나머지 부분에도 적용된다.구약성서에는 J, E, P 전승 이외에도 다윗이 통치하던 그 시대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이 다음 일곱 권의 책, 즉 신명기에서 열왕기 하권까지(룻기는 제외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에는 이 부분에 들어 있으나 훨씬 후대에 쓰인 책이다.)의 바탕이 되었다. 이 기념비적 작품은 유배 시대 훨씬 이전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P 전승보다 앞선 사료이다. 이 사료가 완성된 꼴을 갖추게 된 시기는 유대의 요시아 왕 때라고 보고 있다.성서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극히 보편적인 이 믿음은 과거 어느 순간에 성서가 스스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역사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경이라 부르는 성서가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도록 잘 조치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이른바 완벽한 성서 원본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러 세대를 통해 말 그대로 수천 개의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성서 중 어느 한 권만 베끼는 데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새로운 사본을 제작하면서도 기존의 본문을 개정하는 작업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내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성서 본문이 고정되었던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경 자체도 특정한 시기에 선별되어 단시일 내에 결정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결국 두 개의 조직이, 당시에 현존하던 작품들 중에서 어떤 책을 정경으로 할 것이며 또 책의 순서는 어떻게 정